어느새 12월


또 12월이 왔다. 작년 12월이 엊그제 같은데, 시간이 왜 이렇게 휙 지나가 버린건지 참 놀랍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다. 뇌과학에 따르면 나이가 들수록 점점 시간이 빨리 가는 것처럼 느끼는 것이 정상이라고 하는데, 나는 그런 과학적인 기준보다 더 빨리 간다고 느끼는 경우가 아닐까 생각을 해본다.


1년 중에 제일 바쁜 시기가 12월부터 다음해 3월까지인데, 벌써 그 시기가 시작되어버렸다. 그렇다고 11월까지 덜 바빴던 건도 아니고 계속 바빴는데, 이제 더 바빠지는 때를 맞이한 것이다. 요즘은 바쁘다고 책도 덜 읽고 운동도 덜하고 있다. 운동을 열심히 하려고 몇 가지 운동기구를 샀었는데, 걔들을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추운 겨울을 맞이했다. 아무래도 기온이 떨어지면 운동을 하기가 싫어진다. 겨울에는 몸이 굳어 있어서 부상 우려도 크고, 몸을 움직이는 것 자체가 귀찮다. 이 시기에는 덜 먹어서 몸매 관리를 할 수 밖에 없는데, 요즘은 자꾸 과식과 폭식을 해서 몸매 관리가 쉽지 않다.


최근에는 코로나의 영향으로 사람들을 덜 만나고 살고 있다. 야외 마스크 착용이 풀리고 분위기가 많이 바뀌어 가고 있지만, 한동안 못 보거나 혹은 안 보던 사람들을 일부러 만날 정도는 아닌 것 같다. 아니 적어도 내 경우에 그렇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 연말이 되었는데도 예전에 비해 이런저런 모임들이 적게 생기는 것 같다. 이런 조용한 연말 나쁘지 않다. 조용해도 좋으니 큰 사고 없이 연말연시를 보내면 좋겠다.


벽돌책


오늘 페이스북에서 이 책 인증샷을 여럿 보았다. 계간 황해문화 전성원 편집장의 책이다. 과거 알라디너였고, 대학에서 강의도 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 분이 낸 책 [누가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가]와 [길 위의 독서]를 재미있게 읽었었다. 이 책의 인증샷을 올린 지인들은 예스24에서 북펀딩에 참여해 받았다고 했다. 누군가 올린 후원자 인증샷 사진을 보니 내가 아는 이름이 몇 보이더라. 음, 만약 알라딘에서 북펀딩을 했다면 참여했을 확률이 높을 것 같은데, 예스는 아예 접속도 안 한지 몇 년이 넘어서 이젠 아이디랑 비번도 기억이 안 난다. 암튼 펀딩에서 이 책을 놓친 건 아쉽지만, 뭐 후원자 명단에 이름이 없는 것 정도니 그냥 넘어갈만하다. 얼른 이 벽돌책을 사서 읽어야지 하는 생각을 하며 내용을 보니, 제목처럼 하루에 한 꼭지씩 교양을 쌓을 수 있는 다양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 한다. 하루에 한 꼭지씩이라. 이거 참 좋네. 한 번에 읽지 않고 매일 조금씩만 시간을 내면 된다는 이야기. 물론 건너뛰는 날들이 당연히 생길 수 밖에 없을 것이고 그러다보면 며칠 휙 지나가버릴 수도 있겠지만, 그럼 뭐 일주일 치나 보름 치를 휙 읽어버리면 될 일이다. 암튼 올해 이 책을 사서 내년 12월까지 다 읽는 걸 목표로 삼아도 재미있겠다.
















오늘은 이 책의 출간 소식도 접했다. 한겨레 남종영 기자의 책이다. 이 분은 [잘 있어, 생선은 고마웠어]라는 책으로 처음 접했는데, 제주 남방큰돌고래 야생 방사 프로젝트에 대한 책이었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책을 제대로 읽지 않았다는 것부터 떠올라서 이 신간을 사기 전에 그 책부터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긴 했다.
















매년 겨울이 되면 인간도 겨울잠을 자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따뜻한 이불 속에서 기어 나와야 하는 아침이면 특히 더 그렇다. 올해는 겨울잠 말고 책 읽는 시간을 좀 원없이 가져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안 읽고 쌓아놓았던 책 탑이 벌써 여러번 무너졌고, 그 옆에 새 책탑들이 다시 쌓였다. 지금처럼 야금야금 간간히 읽어가는 속도로는 절대 사는 속도를 읽는 속도가 따라잡을 수 없을 것이다.


뭐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사고 싶은 책은 어쩔 수 없이 살 수 밖에 없는 법. 이 집에서 이사 나가야 할 시기가 되면 또 책을 처분하느라 고민하고 고생하겠지만, 그때까지는 맘껏 책을 사모으는 기쁨을 누리리라.


브라질 전이 새벽 4시라고 하던데, 아무래도 잠들었다가 그때 일어날 자신이 없다. 그렇다고 안 자고 기다리기에는 또 너무 먼 시간인데. 출근도 걱정이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 일단 퇴근해서 저녁부터 먹으면서 고민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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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ka 2022-12-05 1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람구두님 책인가요? 정말 알라딘에서 펀딩했다면 참여했을지도...
암튼 축구땜에 잠자는 시간 고민인분들 엄청 많네요 ^^;;

감은빛 2022-12-09 18:33   좋아요 0 | URL
치카님 오랜만입니다.
바람구두님 오랜만에 신간 내셨네요.
알라딘에서 펀딩을 했다면 당연히 참여했을 것 같아요.

결국 일찍 잠들었다가 딱 축구 시작 직전에 겨우 눈을 떴어요. ^^

기억의집 2022-12-05 20: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바람구두님, 저는 김종배의 시선집중에서 최근에 뵜어요. 게스트로 몇 번 나오셨습니다. 전혀 친분은 없지만.. 그래도 예전에 알라디너이신 분이라 반갑더군요. 예스에서도 펀딩 하는군요. 저도 예스는 쿠폰이 있어 전자책 사러 들어가는 것 이외에는 둘러보질 않아서.. 저도 책 사 들이는 것에 스트레스 안 받으려고요. 유일한 소비가 책인데..
이것마저 없으면 사는 재미가 없어요. 옷도 가전제품도 딱히 사 들이는 게 없는데 책이나 맘에 들면 사자 주의이긴 해요. 안 읽는 책들이 늘어서 문제이지만요!!

감은빛 2022-12-09 18:35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기억의집님.
예전에는 가끔 예스24에 들어가기도 했었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귀찮아서 아예 안 들어갔고, 그게 벌써 몇 년 전인지 기억도 안 나네요.

그쵸? 책 사는 것이 거의 유일한 낙인데. 이거라도 하고 살아야죠. ^^

꼬마요정 2022-12-05 23: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겨울잠을 자면 좋겠다고 늘 생각했답니다. 그래놓고는 또 이불 속에서 귤 까먹으면서 책 읽고 싶기도 하고요. 갑자기 추워져서 운동하기가 너무 힘이 듭니다. 말씀처럼 부상 위험도 많고, 또 괜히 많이 먹게 되네요. 뭐, 봄이 오면 빠지겠죠 ㅎㅎㅎ 추운 겨울 또 힘들지만 봄을 기다리며 소소한 즐거움 찾아보아요^^

책 정말 알라딘에서 펀딩 했으면 참여했을 것 같아요. 벽돌책... 늘 고민입니다. ㅎㅎ

감은빛 2022-12-09 18:36   좋아요 1 | URL
꼬마요정님. 안녕하세요.
매년 겨울마다 겨울잠을 자는 동물들이 얼마나 부러운지 몰라요. ㅎㅎ
겨울에는 조금 쪄도 괜찮지 않을까요?
봄이 되면 금방 또 뺄 수 있잖아요? ^^

얄라알라 2022-12-06 1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성원 편집장님께서 과거 알라디너이셨다(는 사실도 훤히 알고 계시니), 감은빛님께서는 북플(?) 알라딘 많이 선배이신가봅니다^^ 알라디너의 계보(?)를 따라가보는 공부도 즐거울 것 같습니다. 궁금하고요^^

감은빛 2022-12-09 18:38   좋아요 1 | URL
얄라알라님. 안녕하세요.
알라딘을 오래 하긴 했지만, 예전에는 그리 활발하게 활동하지 않았었어요.
알라딘에는 오래 활동하시는 분들이 많이 계신 것 같아요.
제가 예스24는 블로그로 활용하지 않아서 그쪽은 잘 모르지만요. ^^

바람돌이 2022-12-06 17: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바람구두님 오랫만에 책 내셨네요. 저도 이번달 주문으로 장바구니에 넣습니다. 저는 이 분 책 다 있어요. ㅎㅎ 심지어 제 이름으로 사인 받은 사인본도 있다는..... ^^
날이 갑자기 막 추워지면서 운동나가기 진짜 귀찮아지네요. 힘내서 으샤 으샤 열심히 운동도 하고 책도 보고 일도하고 해요. 일이 제일 나중이에요. ㅎㅎ

감은빛 2022-12-09 18:39   좋아요 1 | URL
바람돌이님. 안녕하세요.
저도 바람구두님 책 거의 다 있는 것 같은데요.
제대로 찾아보지 않아서 자신은 없네요.
사인본도 받으셨군요. ^^

날이 엄청 춥지만,
그래도 일도 열심히 하고 아주 가끔 운동도 하고 지내야지요. ㅎㅎ

바람구두 2022-12-12 14: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감은빛님~ 바람구두입니다. 오랜만에 책이 나왔지만, 이제는 알라딘을 떠난지 오래되어서 더이상 과거의 저를 기억해주는 사람은 없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페이퍼를 보게 되어 반가웠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은빛 2022-12-12 18:55   좋아요 1 | URL
안녕하세요.
페이스북에 자주 들어가지는 않는 편인데, 접속할 때마다 소식 접하고 있습니다.
여기 알라딘에서도 뵈니 더 좋네요.
임시로 다시 열었더라도 열어놓는 동안 글 올려주세요.

yamoo 2022-12-14 09:26   좋아요 1 | URL
바람두구 님이 전성원 님이었다는 거에 충격을!!
누가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가...너무 인상깊게 읽었거든요!!
알라딘으로 다시 돌아와주세요~~~~

벽돌 신간...냉큼 사야겠습니다!!ㅎ

yamoo 2022-12-14 09: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누가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가]...이거 인상깊게 읽었는데, 작가가 전성원 님이군요!
알라디너였다구요?! 저는 금시초문이었습니다~~

근데, 그게 바람구두님이었다니, 기절초풍할 노릇입니다! 우와~~

2022-12-14 11: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김장 이야기


매일 아침 북플이 알려주는 과거의 오늘 쓴 글들을 읽는다. 어떤 날에는 없기도 하고, 어떤 날엔 대여섯개나 있는 경우도 있다. 최근 과거의 오늘 쓴 글들을 읽다보니 김장 이야기가 하나씩 섞여 있더라. 그리고 오늘 확인해보니 4개의 글 중에 2개가 김장 이야기를 써놓았더라.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300포기 김장이 그 중 하나였다. 안 그래도 지난 주 금요일에 또 동네 채식식당 김장을 하러 가서, 그 300포기 김장 이야기를 무용담처럼 나눴다. 아마 매년 잊지않고 그렇게 자랑삼아 말할 것 같다. 아, 내가 자랑한다는 뜻이 아니라 당시에 300포기 김장을 함께 했던 분들 중 한 분이 늘 그런다는 이야기다.


이혼을 하기 전에는 해마다 김장을 했다. 아내가 채식을 하기 때문에 채식김치를 담궜다. 아주 소량만 젖갈을 넣어 담그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개는 그냥 채식김치만 만들고 말았다. 이혼하고 나서는 김장할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녹색당 당원 텃밭에서 함께 기른 배추와 무로 김장을 하기도 했고, 녹색당 당원들이 주축이 되어 만든 로컬푸드 식당에서 해마다 김장을 했다. 그 로컬푸드 식당이 이젠 채식식당이 되어 채식김치를 담궜다. 이 식당의 공동주인인 조합원들은 대개 비혼이거나 미혼인 경우가 많아서 김장 경험이 많은 이가 별로 없었다. 그래서 매년 김장을 했던 내가 그래도 조금 익숙한 편에 속해서 일을 많이 했었다. 그러다 재작년과 작년 이렇게 2년 동안 김장 날에 못 갔다. 올해 오랜만에 갔더니 새로운 분들이 몇 분 계셨는데, 김장에 익숙한 분들이 많아졌다. 함께 웃고 떠들며 하는 노동은 즐겁다. 저녁에 회의가 있어서 딱 3시간만 일 하다가 가야 할 상황이었는데, 그 3시간 동안 거의 김장을 다 끝낸 셈이었다. 회의를 1시간 만에 빠르게 마치고 돌아와보니, 모인 사람들끼리 김장김치와 메밀전병 등을 놓고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다. 채식식당이라 아마도 수육 등의 육식은 준비하지 않은 것 같다.


과거 해마다 그 식당에서 김장했을 때마다 정말 긴 시간 강도 높은 노동을 했었는데, 이번에는 뭐 일한 것 같은 느낌도 없을 정도로 수월했다. 역시 경험이 많은 사람들이 다르긴 다르구나 싶었다. 자, 오늘도 김장 이야기를 썼으니, 내년 11월 28일에 확인하게 될 과거의 오늘 쓴 글에는 김장 이야기가 3개가 되겠네.


어떤 인터뷰


어느 프랑스 학자가 한국 협동조합 사례를 연구하는데, 우리 조합 사례를 알아보고 싶다고 연락이 왔다. 과거 협동조합 운영에 관한 강의를 요청드렸던 어느 선생님께 연락을 받았다. 그 선생님은 뭐랄까 조금 대하기 어려운 분인데, 흔히 까칠하다는 표현으로 적당할 것 같은 그런 분이시다. 암튼 연락을 받고 당연히 좋다고 말씀드렸다. 그리고 속으로는 조금 부담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인터뷰 당일 그 선생님과 키가 크고 덩치가 큰 프랑스인 사내가 들어왔다. 인사를 나누고 두 사람이 내게 선물을 주셨다. 프랑스인 교수는 자기 학교 이름이 들어간 셔츠, 장바구니, 수첩, 볼펜이 포장된 꾸러미를 주셨고, 그 선생님은 최근에 낸 본인의 책을 주셨다. 감사한 마음으로 받고 보니 나는 따로 선물로 드릴 것이 없었다. 뭐라 인사를 드려야 할 지 몰라 그냥 "고맙습니다!"만 여러차례 말씀드리며 머리를 숙였다.


인터뷰를 시작하자 교수님이 프랑스어로 질문을 했고, 그 선생님이 수첩에 메모하며 대화를 나눴고, 이어서 나에게 질문을 전달했다. 나는 그에 대해 답을 했고, 그 선생님은 다시 수첩에 메모하며 내 설명에 대해 추가 질문을 하기도 하다가 이어서 그 교수님께 프랑스어로 전달했다. 그 선생님이 교수님의 질문을 듣고 내게 전달할 때에는 거의 막힘이 없었는데, 내 대답을 다시 프랑스어로 전달할 때에는 조금 머뭇거리거나 단어를 바로 떠올리지 못해 답답해하는 등의 모습을 보였다. 사실 그 선생님은 학자이지 통역사가 아니라서 당연한 것 같았다. 그리고 그 프랑스인 교수와도 친한 사이인 것 같았다. 내게 질문할 때 '이 친구'라고 표현했고, 둘이 대화를 나눌 때에도 격식없는 모습으로 느껴졌다. 나는 두 사람의 프랑스어 대화를 들으며 조금이라도 알아들어 보려고 애썼지만, 당연하게도 거의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아주 가끔 아는 단어 몇 개를 듣고 그저 반가울 뿐이었다.


평소 언론 인터뷰나 다른 대학원생들의 인터뷰 등도 많이 해봤지만, 이번처럼 외국인이 요청한 인터뷰는 처음이어서 이 중간의 통역 과정이 조금 신기하게 느껴졌다. 아주 오래전에 몽골에 사막화 방지 행사를 갔을 때 한국, 일본, 몽골 공동 행사에서 발언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내가 한 마디를 하면, 통역을 해 주시던 선배가 일본어로 전달했고, 그 일본어를 들은 일본어-몽골어 통역사가 몽골어로 전달했었다. 그래서 내 말들이 일본어로 바뀌고, 몽골어로 바뀌는 신기한 일을 겪은 적이 있었다. 뭐 별 대단한 말을 한 것도 아니었는데, 그때 기억은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암튼 평소 인터뷰를 하면 내가 쉴 틈없이 말을 많이 하는 편인데, 이번에는 중간에서 말을 옮겨주시는 그 선생님이 무척 바쁘신 상황이었다. 인터뷰를 하면서 이렇게 편하고 여유가 있었던 적은 처음이라 그것도 재밌다고 여겼다. 그 선생님이 빠르게 수첩에 프랑스어를 받아 적으며 말을 옮기는 것을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두 사람의 태도가 변했다. 내게 뭔가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는데, 나로서는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내용이었다. 질문을 받고 조금 당황했다. 그때부터 인터뷰가 끝날 때까지 나는 당황한 상태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했다. 땀이 자꾸 흘러서 나도 모르게 손이 목덜미와 이마를 훔치고 있었다. 수없이 많은 인터뷰를 해봤지만, 이렇게 예상치 못한 질문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것도 처음이었다. 하긴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그 두 사람은 학문적으로 협동조합을 연구하는 사람들이고, 나는 현실에서 협동조합에 근무하는 활동가라서 처한 상황과 바라보는 방향이 완전히 달랐다. 그들의 말은 그들의 입장에서는 타당하고 합리적이었고, 내 말은 내 입장에서는 당연했다. 다만 그 두 입장이 어떻게 왜 다른지를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저 안쪽 사무실에서 인터뷰 내용을 듣고 있던 후배 활동가가 본인도 엄청 당황스러웠다고 말했다. 만약 본인이 질문을 받았다면 아무 말도 못 했을 거라고 했다. 살다보면 참 많은 일을 겪게 되는데, 이런 일도 겪는구나 싶었다. 무언가 서로의 입장 차이에 대해 자주 생각하고 그 차이의 본질이 무엇인지 고민해보는 시간을 자주 가져야 할 것 같다. 인터뷰를 마치고도 꽤 오래 곱씹었다. 내 대답이 과연 적절했을까? 그들은 실제로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이미 지난 일이고 고민해보아야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었지만, 만약 다시 그런 일이 생기면 조금 더 정확한 표현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 때문에 그 상황에서 벗어나기가 어려웠다.


비 오는 저녁


낮부터 비가 내리고 있다. 전라남도 쪽은 가뭄으로 인해 제한 급수가 되고 있다는데, 이 비가 그 동네에 좀 내렸으면 좋겠다. 일기예보에서 중부지방에 비가 온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비구름을 전라도 옮겨갈 수 있는 초능력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쓸데 없는 생각을 하면서 손님 없는 가게 카운터를 지키며 이 글을 두드린다. 오늘은 월드컵 가나전 축구경기가 있는 날이다. 지난 우루과이 전은 집에서 봤다. 티비는 없지만, 평소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 태블릿으로 축구를 봤다. 큰 티비를 가진 후배가 자기 집에서 같이 볼 거냐고 물었었는데, 나가기가 너무 귀찮고 싫어서 그냥 집에 있겠다고 답했었다. 오늘은 그 후배 집으로 축구를 보러 가겠다고 미리 전했다.


비가 오는 날엔 재즈가 잘 어울린다. 재즈 음악을 틀어놓고 이 글을 두드린다. 방금 손님이 들어왔다가 몇 가지 상품을 조금 둘러본 뒤에 아무것도 사지 않고 나갔다. 나는 손님의 뒤통수에 대고 "고맙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라고 인사하며 고개를 숙였다. 내 말은 그의 귀에 가 닿겠지만, 내 행동은 그의 눈길에 가 닿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인사를 할 때 고개를 숙이는 행동은 자동으로 나온다. 마치 전화에 대고 고개 숙여 인사하는 것처럼.















페이스북을 둘러보다가 이 책의 표지를 발견했다. 서명숙 님은 내가 재밌게 읽고 서평을 썼던 [제주 올레 여행]의 저자이자 제주 올레길을 만든 사람이고, 현재 제주올레 이사장으로 알고 있다. 제목만 봐서는 어떤 종류의 책일지 가늠이 잘 안 되지만, 일단 서명숙 님의 글이니 무척 재미있을 것 같다. 책을 알라딘에 검색해보니 제목과 저자가 같은 다른 표지의 다른 출판사 책이 하나 더 있다. 아, 개정판이구나. 목차를 살펴보니 담배를 키워드로 본인의 이야기를 펼쳐놓은 것 같다. 일단 찜해둔다.


이제 슬슬 매장 정리를 하고 축구보러 갈 준비를 해야지. 아, 우선 나도 담배 한 대 피우고 와야겠다. 거의 안 피우던 담배를 요즘 일 스트레스 때문에 또 조금씩 피우고 있다. 이러다 또 거의 안 피우는 생활로 돌아갔다가 다시 조금씩 피우는 날들로 회귀하겠지. 이 책을 보니 김형경의 소설 [담배 피우는 여자]를 다시 읽고 싶어졌다. 지금 우리 집에는 아마 없을 것이고, 부산 집에 있을 것 같은데. 엄마에게 택배로 보내달라고 할까? 아니면 새 책을 하나 살까? 모르겠다. 일단 담배 먼저 피우고 생각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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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22-11-29 1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김장 300 포기요? 굉장합니다. 허리가 나가도 수십번은 나갈 것만 같아요ㅠㅠ 채식김치는 양념에 굴이나 젓갈 등이 안 들어가고 고춧가루랑 파랑 뭐 이렇게만 들어가는 건가요? 저도 결혼 전에는 엄마 많이 도와드렸는데 오히려 결혼 하고 나서는 김장을 안 하네요. 시어머니 돌아가시기 전에 다들 추억 쌓는다고 마지막으로 김장 한 번 하고는 끝이네요. 막 김장 하고 먹는 쌀밥은 진짜 꿀맛이긴 한데 너무 너무 큰 노력이 필요합니다ㅠㅠ

이론과 실재는 뭐라 할까요. 너무 가까운 것 같은데 너무 떨어져 있는 것 같아요. 그래도 멋지십니다. 아마 흐트러짐 없이 말씀하셨을 것 같아요!!!!

감은빛 2022-11-29 19:51   좋아요 1 | URL
네, 꼬마요정님. 채식김치니까 굴이랑 젓갈은 안 들어가고 다른 채식 재료들로 맛을 내는데, 그게 쉽지는 않은 것 같아요. 그래서 재료비가 많이 든다고 하네요. 식당에서 낼 김치라서 더 신경쓰는 거겠죠. 예전에 애들엄마는 딱히 재료를 많이 넣지 않고 담백한 김치를 담그곤 했어요.

저 인터뷰 완전 망했어요. 지금까지 꽤 인터뷰를 많이 했는데, 저렇게 망한 적은 없었거든요. 다만 사고의 틀을 바꿔주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고 여기고 스스로를 위안하고 있습니다. 좋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
 

사람을 대하는 태도


지금까지 살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좋은 사람들도 많았고, 존경할만한 훌륭한 사람들도 제법 있었다. 닮고 싶은 면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면 부러워했고, 내가 결코 가질 수 없는 면을 가진 사람을 보면 질투를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만난 사람들 중에 그렇게 좋은 사람은 사실 소수다. 다수는 그닥 상대하고 싶지 않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엮이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었고, 그 외에 정말 싫은 사람들도 제법 많았다. 그중 제일 싫은 사람은 남을 함부로 대하는 사람이다. 아무리 다른 측면에서 훌륭한 사람이라고 해도, 다른 사람을 함부로 대하는 장면을 목격하거나, 그런 이야기를 듣고 나면 좋게 생각하기 어렵다.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태도야말로 기본 중에 기본이 아닐까 생각한다. 가끔 다른 사람을 충분히 존중한다는 것이 그리 쉽게 드러나는 태도가 아닐 경우도 있다. 눈에 띄지 않지만 항상 타인을 존중하는 태도를 잘 갖추는 것이야말로 가장 훌륭한 태도가 아닐까 싶다.


최근에 겪은 두어가지 사건이 사람들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믿었던 사람 아니 믿고 싶었던 사람에게 충격적인 표현을 들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생각에 빠질 수 밖에 없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쉽게 알기 어려우니까. 자기 생각만으로 잣대를 만들어 살아가야 한다. 그 잣대가 남들과 많이 다르면 어렵고 힘든 삶이 될 확률이 높다. 그런데 자기 잣대와 남들의 잣대가 다르다고 해서 어느 한 쪽이 무조건 옳거나 틀린 것은 아니다. 그저 다를 뿐이다. 경우와 상황에 따라서는 어느 한 사람의 잣대가 더 적절해 보일 수 있다. 그럼에도 일방적으로 그 잣대만 맞다고 볼 수는 없다. 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가? 아, 이렇게 말해놓고 나 역시 이해하지 못하는 혹은 이해하려는 시도 조차 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모르겠다. 나는 나고 너는 너일 뿐. 사람은 영원히 다른 사람을 완벽히 이해하기 어렵다.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부모 자식이라도.


시간이 흐를수록 마음 속에서 사람들을 점점 지워가게 된다. 최근에 몇몇 사건들을 겪으며 또 몇 명의 사람들을 지웠다. 좋은 사람에서 왠만해서는 엮이지 말아야 할 사람으로 마음 속에서 분류를 바꿨다. 어쩌면 나 역시 그럴지도 모르겠다.


육체노동을 하고 싶다.


교통사고를 당한 지 2년 4개월이 지났다. 사고 이후 긴 시간 제대로 먹지 못해 위가 줄어들어서 저절로 다이어트가 되었던 기간이 지났다. 스트레스를 이유로 과식과 폭식을 이어간 덕분에 다시 예전처럼 위가 늘어났다. 먹는 양이 줄어들어 있을 때에는 억지로 애쓰지 않아도 배가 부르면 뭘 더 먹을 수가 없었으니 몸매 관리에 딱히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어서 편했다. 그런데 이젠 아무 생각없이 먹다보면 끝없이 먹게 되어 배가 나온다. 그럼 또 한동안 식사 조절을 해서 다시 배를 넣고 몸매 관리에 들어간다. 익숙한 일이라 크게 스트레스를 받지는 않는다. 조금만 참고 조금만 노력하면 된다. 그런데 점점 더 어려워 진다는 걸 느낀다. 그 참고 노력하는 일.


머리가 아픈 일들이 많다. 다 그만두고 그냥 몸을 움직이는 일을 하고 싶다. 아무 생각없이 힘을 쓰기만 하면 되는 일이 생계를 위한 직업이었으면 좋겠다. 답이 안 나오는 일을 갖고 고민하는 것 너무 피곤한 일이다.


차별 없는 삶


한 2주 간격으로 두 번에 걸쳐 이 책을 다 읽었다. 학교 선생님이라는 저자의 직업이 부러웠고, 저자의 유연한 태도와 사고가 부러웠다. 나는 대학시절 여성학 강의를 들으며 처음 여성주의를 접했다. 남성을 적대시하는 것처럼 느껴졌더너 강사의 태도 때문에 나도 모르게 여성주의에 대한 반감이 생겼다. 머리로는 당연히 모든 내용에 동의한다고 생각했지만, 내 감정은 자꾸만 삐뚤어졌다. 특히 학년대표였기 때문에 늘 그 강사의 뒤치닥거리를 도맡았던 나를 유난히 괴롭히는 듯한 태도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나중에 한참 시간이 지난 후에 그 강사 역시 인간이기 때문에 나를 포함한 남학생들을 대하는 태도가 그리 성숙되지 못한 사람이었던 거라고 이해해보려는 생각을 해봤다. 그 후로 다시 마주친 적이 없기 때문에 물어볼 수는 없었다. 이제는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다.


여성주의라고 부르건, 페미니즘이라고 부러건 용어가 중요한 건 아니겠지만, 암튼 성별로 차별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 차별이 없어져야 한다는 생각은 평생에 걸쳐 몸에 체득해야 할 태도다. 맨 처음에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태도가 기본 중에 기본이라고 적었는데, 성별로 인한 차별이 없어져야 한다는 건 그 기본에 포함되는 내용이다. 당연히 꼭 지켜야 할 하나의 도덕이자 규범이라 여기고 살았다. 물론 일상에서 그것을 잘 지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지금은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지만, 큰 아이가 태어난 지 얼마되지 않아서 육아휴직을 신청했을 때, 남자가 무슨 육아휴직이냐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사회를 바꾸겠다는 활동가들에게도 그런 말을 듣곤 했다. 하루종일 아기와 집에 있는 날들이 답답하면 아기를 안고 집에서 가장 가까운 백화점에 가서 사람 구경을 하곤 했다. 분유를 먹이거나 기저귀를 갈기 위한 공간들이 백화점에는 잘 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거기서도 나는 눈총과 수근거림의 대상이 되곤 했다. 나를 제외하면 모두 엄마들이었기 때문에. 음, 쓰다보니 또 자꾸 옛 기억에 빠져들게 되네.
















책을 다 읽고 한 가지 고민은 과연 우리 인간이 자신의 삶 안에서 명확하게 차별 없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이다. 사회적인 태도로는 모든 차별에 반대한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개인의 취향을 고려한다면 그렇게 답하기 어렵다. 어떤 태도나 어떤 모습을 보면 나도 모르게 거부 반응이 들기도 하니까. 내가 싫은 것과 사회적 차별은 다른 문제라서 아무리 싫은 어떤 취향의 사람이라도 그가 차별받는다면 그를 위해 싸울 수는 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계속 그를 아니 그의 취향을 싫어하는 상태로 살아갈지도 모른다.


**

이태원 참사 이후로 또 한동안 마음이 힘들어 일상생활을 버티기가 어려웠다. 세월호 사건 당시에 매일매일 괴로웠던 시절이 다시 떠올랐다. 그리고 정부의 대응을 보며 답답해 죽을 것만 같다. 민주당 정부가 뭐 잘한 거 하나도 없지만, 박근혜나 윤석열은 어떻게 이렇게 예상을 벗어나지를 못하나.


***

아주 오랜만에 아이들과 여행을 다녀왔다. 즉흥적으로 아이들에게 놀러가자고 말을 꺼낸 후에 어디로 갈지를 정하지 못하고 며칠을 보냈다. 멀리 가려면 시간도 많이 걸리고 차도 많이 막힐 것이고 힘드니 비교적 가까운 곳을 가며 좋겠다 생각하다가 충청도 지역으로는 제대로 여행을 가 본 적이 없을을 깨달았다. 충청도 출신 후배들에게 어디 좋은 데 없냐고 물어보고 서너군데 추천을 받았다. 거의 여행 전날까지 고민하다가 단양으로 목적지를 정했다. 1박2일동안 단양8경을 돌아보고 오는 것을 목표로 정했다. 애들엄마가 미리 말을 해주지 않고 있다가 갑자기 일주일 해외 출장 일정을 알리며, 아이들과 함께 지내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여행은 그 일정의 거의 가운데 위치했다. 어쨌거나 아이들과 재밌게 잘 놀고 돌아왔다. 첫째날은 늦게 출발해서 숙소에 들어와 저녁 먹고 노는 것으로 끝났고, 둘째날 아침부터 저녁 나절까지 단양8경을 모두 보는 강행군을 거쳤다. 사실 두번째 중선암은 먼 발치에서 보고 돌아섰고, 세번째 상선암도 스쳐지나듯 보기만 했다. 그리고 맨 마지막 석문의 경우 아이들은 올라오지 않고 나 혼자 빠른 속도로 올라와서 보고 내려갔다. 어쨌거나 목표는 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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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11-25 23: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일 싫은 사람은 남을 함부로 대하는 사람에 동의해요. 저도 그렇거든요. 근데 보통 그런 사람이 처음에 괜찮았던 적도 없는거 같아요. 저건 기본적인 심성에 관한거 같아서요.
여러가지 일들로 늘 마음은 싱숭생숭하고 어지럽지만 그래도 시간은 흘러가고 또 그속에서 의미있는 시간들도 있으니까 그렇게 살아지는듯 합니다. ^^

감은빛 2022-11-28 18:05   좋아요 0 | URL
바람돌이님. 시간이 이렇게 흘러가는 것이 참 속상하기도 하고 또 이상하기도 합니다.
매일 보내는 일상에서 의미를 찾는 것이 참 어렵네요.
어느새 11월도 휙 지나가버리고 12월이 다가오네요.
금방 또 23년이 다가오겠지요.

지나가버리는 날들이 아까워 뭔가 기록을 남기고 싶은데,
늘 시간에 쫓기는 삶을 살다보니 그것도 쉽지 않네요. ㅎㅎ

하루종일 비가 내려서 더 기분이 쳐지네요.
이따 축구보면서 기분 전환을 할 수 있으려나 모르겠습니다.

페크pek0501 2022-11-28 10: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남을 함부로 대하는 것을 두 가지로 나눠 볼 수 있어요. 자신이 오만해서일 수 있고 자신이 무지해서일 수 있고... 오만한 쪽이 더 싫지요. 그리고 남을 무시함으로써 자기의 위치가 올라가는 걸로 착각하는 사람도 더러 있을 거예요. 그런 이를 싫어하는 이들이 많다는 걸 안다면 안 그럴 것 같은데 말이죠.

글을 길게 쓸 수 있는 것, 부럽네요. 저는 요즘 무슨 글을 써야 할지 모른다는...

감은빛 2022-11-28 18:08   좋아요 1 | URL
네, 페크님. 저는 오만한 사람이 무지한 걸로 보이기도 하더라구요.
그 두 가지를 다 가진 것으로 보여요.
분명 똑똑한 사람이고, 어떤 분야에서는 잘 나가는 사람이지만,
사람과의 관계를 잘 모르는 무지한 사람이기도 한 거겠지요.

페크님께서 제게 부럽다고 하시니, 제가 민망하네요.
제 글은 그저 생각이 흐르는대로 막 쓰는 거라 내용이 부실하지요.
페크님의 글은 정갈하고 멋져요. ^^

고맙습니다!
 

불통


지난 주말 화재로 인해 카카오톡 서버가 다운되어서 난리가 났었다고 한다. 토요일 오후였다. 그날 나는 아침부터 일정이 있었다. 조합원들과 함께 동네 천변을 걸으며 쓰레기를 주웠다. 약 3시간 한강 근처까지 걸었다. 월드컵 경기장 근처에서 함께 김밥을 나눠먹고 몇 가지 게임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최근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인한 통증 때문에 입맛이 없어서 제대로 챙겨 먹지 못했는데, 그날 야외에서 먹은 김밥은 왜 그렇게 맛있던지. 평소 한 줄도 다 못 먹는데, 그날은 두 줄을 다 먹고 구운 계란까지 먹었다. 오전에 많이 걷고 몸을 쓰는 일을 해서 입맛이 좋았던 것이겠지. 게다가 좋은 사람들과 함께 나눠 먹어서 더 좋았을 것이다. 날씨가 좋아서 덩달아 기분도 좋았다. 보물찾기를 했는데, 나만 단 하나의 보물도 찾지 못했다. 눈썰미가 없는 것이겠지. 다들 하나씩은 선물을 받았는데, 나만 빈 손이라 게임을 준비하신 분이 내게도 선물 하나를 투척하셨다. 국민학교 소풍 때 이후로 보물찾기는 처음이었는데, 기억을 떠올려보면 국민학생이었을 때에도 나는 보물찾기를 잘 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암튼 그렇게 행사를 마치고 다시 천변을 따라 걸어서 동네로 돌아왔다. 친한 후배집에 놀러가서 또 뭔가 맛있는 것들을 먹었는데, 그때 처음 들었다. 카톡이 안 되어서 난리도 아니라고. 나는 카톡을 거의 업무용으로만 사용한다. 업무용 단톡방이 수십개가 넘는데, 주말에는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거의 들여다보지 않는다. 예전에도 언급한 적이 있는데, 이런저런 이유로 나는 사용하는 메신저가 많다. 카카오톡, 텔레그램, 라인, 왓츠앱 등. 개인적으로 친한 사람들과는 카톡이 아닌 다른 앱들을 주로 쓴다. 텔레그램은 파일 저장기한이 없어서 업무용으로 이용하면 정말 좋은데, 나를 제외한 다른 분들은 카톡을 주로 쓰다보니 업무용으로 그닥 장점이 없고 단점이 많은 카톡을 업무용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건 일종의 아이러니라고 볼 수 있을까?


사실 한 10년 전쯤인가 카카오톡 문제가 한 번 터졌었다. 그때 나는 카카오톡을 탈퇴했다. 어차피 문자 메시지로 소통할 수도 있고, 그때도 텔레그램을 사용했으니 문제가 없으리라 여겼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엄청나게 불편해했다. 나 때문에 일부러 텔레그램을 깔아야 한다고 투덜거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게 카톡을 지우고 한참을 지냈는데, 지금 이 일터에서 일을 하게 되면서 다시 카톡을 깔아야 했다. 전임자와 내 직속상관과 임원들이 모두 카카오톡을 기반으로 소통하고 있다고 했다. 먹고 살기 위해서는 일을 해야 하고, 그러려면 싫어도 카톡을 깔아야 했다. 전임자는 업무용 공식 메일도 한메일에 만들었다. 카톡 서버에 문제가 생기면서 단순히 카톡 메신저만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니었다. 카톡을 기반으로 한 다양한 서비스들이 다 안 되면서 큰 혼란이 생겼다고 했다. 나는 월요일인 어제 아침 일을 시작하면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인 일터 공식 메일함을 확인하다가 한메일이 먹통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일을 하다보면 메일로 소통해야 하는 경우가 많은데, 어제는 하루종일 개인 메일을 업무용으로 써야했다. 그동안 주고받았던 메일을 참고로 해야하는데, 메일 접속을 할 수 없으니 당연히 열어볼 수 없었다. 업무 메일들은 어딘가에 백업을 받아뒀어야 했는데, 이런 일이 생기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나 뿐 아니라 상대방도 한메일을 쓰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경우 일일이 전화해서 다른 메일 주소를 알려달라고 요청해야 했다. 그래도 나는 겨우 메일 계정에 접속되지 않는 정도의 사소한 피해만 입었다. 언제 메일 서비스가 복구될 지 모르겠지만, 그동안 이 핑계로 일을 안 하면 좋겠다는 상상르 잠시 해본다.


불통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대통령이라는 자도 그렇고, 수많은 정치인들이 그렇고, 우리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그렇다고 여긴다. 나 역시 어떤 경우에는 그러하다. 이 불통의 시대에 그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가 바로 이 카카오톡 사태가 아닐까 싶다.



소비


운동을 제대로 하지도 못하면서 (혹은 안 하면서) 자꾸 운동기구들을 사모으고 있다. 꽤 긴 시간 나를 괴롭히고 있는 관절 통증이 한동안 좀 줄어들었다. 관절이 아파서 잘 하지 못하던 동작들을 다시 하게 되니 너무나도 기분이 좋았다. 이제 평생 좋아했던 운동들을 못하고 살아야 하는구나 라는 생각까지 했었는데, 통증이 없어지니 이렇게 세상은 살 만했구나 라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또 새로운 동작들을 배우고 익히고 하다가 지금 갖고 있는 기구들만으로는 못하는 동작들을 발견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몇 가지 운동기구들을 검색하고 있는 나 자신을 뒤늦게 발견했다. 아차 하는 순간 이미 결제 버튼을 눌렀더라. 그리고 며칠이 지나서 하나씩 새로운 기구들이 도착했다. 손목이나 발목에 차는 모래주머니는 오래 사용하던 것이 있는데, 이번에 운동기구들을 구경하다 보니 이쁘게 생긴 깔끔한 모양새의 새 제품이 있더라. 먹는 것과 책 사는 것 외에 돈 쓰는 일이 거의 없는데, 왜 운동기구만 보면 막 사고 싶어지는 걸까. 새 제품을 받아보니 모래가 아니라 금속 막대들이 주머니들에 들어있었다. 무게가 너무 가벼워 조금 아쉬웠지만 이뻐서 마음에 쏙 들었다. 이건 여름에도 발목에 차고 뛰어다녀도 될 정도로 디자인이 좋았다. 원래 쓰던 건 정말 말 그대로 모래 주머니라 차고 밖에 나가기엔 남들의 시선이 신경쓰였었다.


이번에 산 것들 중에 제일 마음에 드는 건 짐볼이었다. 받자마자 손펌프로 열심히 바람을 불어넣고 앉아 보니 탱탱해서 좋았다. 전부터 짐볼을 이용한 운동 몇 가지를 하고 싶었는데, 드디어 짐볼을 샀다. 그런데 집이 좁아서 하고 싶었던 동작들을 다 할 수는 없었다. 짐볼을 샀다고 친한 후배에게 자랑했더니, 형 집에 짐볼 놓을 곳이 있어요? 맨날 바람 뺐다가 넣었다 하는 거예요? 그건 그거대로 운동이 되겠네요. 이런다. 물론 집이 좁긴 하지만, 그 좁은 집에 이미 많은 운동기구들이 있지만, 그래도 짐볼 하나 정도 놓을 공간은 당연히 있다. 


사람은 언제나 새로운 무언가에 끌리는 법이다. 그래서 소비를 멈출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새 운동기구들을 장만했으니 이제 다시 열심히 운동해야지.



가을, 쌀쌀함 그리고 쓸쓸함


날이 많이 쌀쌀해졌다. 지금 일터에서 이렇게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데, 자꾸만 손이 시려워서 손끝을 입에 대고 입김을 호호 불고 있다. 최근 여러 사람들과 등산에 대해 자주 얘기했다. 최근에는 거의 등산을 가보지 못하고 있는데, 예전에 나는 등산을 꽤 좋아했다. 어려서 산 중턱쯤 되는 곳에 살았고, 거의 매일 약수터로 올라가 약수를 떠왔다. 비쩍 마른 허약한 체질이었던 내가 운동을 좋아하게 되고, 운동할 수 있는 체력을 길렀던 건 바로 그 국민학교 시절 매일 했던 등산 때문이었다. 약수터에 오르면 늘 돌로 된 역기를 들어올렸다. 벤치프레스, 클린 앤 저크, 스내치를 그때 어른들에게 다 배웠다.


아, 등산 이야기 하려다가 또 운동 이야기로 샐 뻔했네. 암튼 등산 얘기를 자꾸 하다보니 등산을 가고 싶어졌다. 참 좋아했던 산이 설악산인데, 문득 설악산을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은 주말마다 일정이 잡혀 있어서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있는데, 언제 설악산을 가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만 해본다. 조금 여유가 생기면 가까운 북한산에라도 다녀와야지.


날이 쌀쌀해지니 마음이 쓸쓸해지는 것은 저절로 따라오는 현상일까? 한동안 바쁘게 지내느라 외롭다는 생각조차 못하고 살았는데, 문득 외롭다는 생각이 든다. 마음이 쓸쓸하다는 것은 과연 어떤 상태를 말하는 걸까? 나는 어떻게 내가 쓸쓸해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까? 모르겠다. 이런 이야기는 술 한잔 하면서 주저리 주저리 늘어놓아야 하는데. 오늘 저녁에는 회의가 두 건이나 잡혀있다. 밤 늦게나 끝나겠지. 매일 매일 저녁에 회의나 강의가 잡혀있고, 주말마다 일정이 잡혀 있다. 이렇게 바쁘게 살면 외로울 겨를이 없을거야 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바쁜데도 외로움을 느끼는구나. 모르겠다. 외로우면 외로운대로, 쓸쓸하면 쓸쓸한대로 또 살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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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2-10-18 1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운동일지가 올라오는 건 아닐까, 숭늉 먼저 마시며 기대해봅니다. 건강 예년 이상 회복하셔서 입맛도 되찾으시기를, 아무쪼록 건강과 안녕 기원드립니다

감은빛 2022-11-25 15:17   좋아요 1 | URL
아, 제가 이 댓글에 답을 달지 않았었군요. 죄송합니다!
알라님의 마음 덕분에 몸은 탈없이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다만 마음은 참 많이 무겁고 힘드네요.

희선 2022-10-19 23: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카카오랑 다음 합친다고 해서 이걸 어떻게 하나 하다가 통합했는데, 며칠 메일 못 봤습니다 중요한 건 없어서 괜찮지만, 인터넷 사이트에서 보내주는 메일은 거기에서 받아서... 이제 되더군요 카카오 탈퇴했다가 다시 가입한 사람 많다는 기사가 보이더군요 그게 아니어도 문자 보낼 수 있죠 그게 그렇게 편하지 않을까요 저는 잘 모릅니다 컴퓨터는 쓰지만 휴대전화기는 안 써서, 쓴다 해도 연락할 사람이 없어요 있으면 있는대로 쓸쓸할 것 같아요 아직은 괜찮아도 앞으로도 괜찮을지, 그게 없어서 좀 안 좋은 것도 있어요

감은빛 님 이제 건강 많이 좋아지셨군요 다행입니다 여러 운동 하시는 거 좋아하시다니, 그런 게 있는 게 좋지요 운동 즐겁게 하시고 가끔 책도 즐겁게 만나세요


희선

감은빛 2022-11-25 15:18   좋아요 1 | URL
벌써 한 달이 넘게 답을 안 달고 지나갔군요. 죄송합니다!
희선님.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고맙습니다!
 

인생 달관한 사람


어제는 어느 연대단체 회의에 아주 오랜만에 나갔다. 한동안 다른 분이 거기 회의는 모두 참석하는 역할을 맡아주셔서 약 2년 가량 내가 나가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분이 그 회의에 좀 많이 늦을 것 같다며 혹시 시간이 되면 먼저 참석하고 있어 달라고 요청하셨다. 난 마침 시간이 비어있었고, 오랜만에 만날 반가운 사람들 생각에 흔쾌히 가겠다고 말씀드렸다.


보통 여기저기 회의를 다니다보면 자주 마주치는 분들도 계신데, 어떤 분들은 특정한 자리에서만 만나게 되기도 한다. 여기 회의 오시는 분들 중 두세분은 다른 회의에서도 종종 만나지만, 다른 대부분은 사람들은 여기에서만 만나는 경우가 많아서 한동안 얼굴 볼 일이 없었다.


사람들을 만나고 대화를 나누는 일은 가끔 피곤하고 힘들 때도 있지만, 대체로는 즐거운 일이다. 오랜만에 만난 반가운 얼굴들 덕분에 기분이 좋았다. 그 분들 대부분이 또 나를 반갑게 맞아주셔서 좋았다. 그중 두세분 정도는 정말 오랜만에 만나는거라 내 머리스타일을 처음 본 상황이었다. 머리칼을 길어서 못 알아봤다며 계속 낯설어하고 놀라워 하셨다. 이런 반응 오랜만이라 재밌었다. 한 여성 선배님은 "어디서 영화배우가 온 줄 알았다." 고 하셨고 한 남성 선배님은 "인생을 달관한 사람 같다." 고 하셨다. 확실히 여성들은 좀 더 기분 좋을 법한 표현을 쓴다. 


여름 내내 단발머리를 찰랑찰랑 흔들며 다녔는데, 가을이 되자 이제 머리가 좀 더 길어서 어깨에 닿는다는 걸 깨달았다. 머리를 풀고 다니기엔 좀 부담스럽게 곱슬머리가 치렁거린다는 느낌이 들어서 어떻게 할까 좀 고민이다. 머리를 묶고 다니면 두상이 좀 안 예뻐서 별로이고, 머리를 기르기 시작했던 초기처럼 계속 모자를 쓰고 다니기도 좀 싫은데. 그렇다고 다시 단발로 자르고 싶은 마음도 아니라서 말이다.


아, 회의때 만난 사람들 이야기 하다가 금방 내 머리 스타일 고민 이야기로 넘어갔네. 그 회의를 마치고 뒤풀이 자리에 따라가게 되었다. 처음에는 갈 생각이 없었다. 달리 할 일이 있기도 했고. 그런데 오랜만에 만난 반가운 분들이 잠깐이라도 있다가 가라고 붙잡아서 나도 모르게 따라가는 것으로 마음이 바뀌어 버렸다. 뒤풀이 자리에서 어쩌다가 한 선배에게 이혼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사실 애들 엄마도 나도 둘 모두 동네에서 활동하던 사람들이라 인간관계가 겹치는 사람들이 많다. 이혼 이야기가 뭐 그리 좋은 이야기도 아니라 막 떠들고 다닐 이야기가 아니라 나도 애들엄마도 친한 사람들 외에는 밝히지 않았다. 물론 발 없는 소문이 천리를 간다고 했듯이 우리가 말을 안 해도 이야기는 널리 퍼졌을 것이다. 다만 그래도 그 한계는 있었을테니 당연히 아직 모르는 사람들도 제법 있으리라. 그 선배는 그 아직 소문을 듣지 못한 사람에 속하는 것이었다. 나보다 한참 연배가 위인 그 선배는 내가 혼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내 어께에 팔을 올리시곤 자신도 지금 혼자라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맞은 편에 있던 한 분이 왜냐고 물었다. 나도 의외라고 생각했다. 내 기억엔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다른 선배 한 분이 최근에 형수님과 사별했다고 알려주셨다. 아! 그랬구나. 내가 왜 소식을 몰랐을까? 나한테 소식이 오지 않았을 리가 없었을텐데. 시기를 들어보니 내가 교통사고 후유증이 좀 심해져 잠시 병가를 내고 쉬고 있었을 때였다. 아무리 쉬는 중이었어도 이런 중요한 소식을 그냥 지나치지는 않았을텐데. 어쩌면 한동안 너무 통증이 심해 진통제로 간신히 버티던 시기가 있었는데, 그때 모르고 넘어갔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으로 그냥 답을 찾을 수 없는 의문을 해소하기로 했다. 암튼 그 선배는 사람은 누구나 다 외로운 존재라고. 혼자 있어서 더 외롭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가족들과 함께 있는 사람도 누구나 외롭다고 말했다. 당연히 나 자신도 오래전부터 공감하고 있던 말이다. 이혼하기 전에도 애들 엄마와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너무 잘 깨닫고 있었다. 암튼 그리고 혹시 문득 외롭고 말 상대가 필요하면 언제든지 연락하라고 했다. 같은 동네 산다는 것이 이럴 때는 얼마나 좋은 일인가.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9월의 마지막 날 하루 전날


또 한 달이 훌쩍 지나갔다. 추석 연휴가 있었고, 아주 중요한 행사였던 기후정의 행진이 있었기 때문에 유난히 빨리 지나간 것처럼 느껴지는 달이었다. 물론 늘 반복해서 말하지만, 어느 달이라고 그렇지 않았겠냐 싶지만. 중간이 이런저런 사고 비슷한 상황들이 벌어져 내가 꼭 수습해야 하는 일들도 있었고, 강의도 많이 맡았고, 사람들을 참 많이 만나고 다닌 시간이었다.


여기까지 버스에서 폰으로 자판을 두드려놓고 북플 앱에 임시 저장을 해뒀다. 12시가 되기 전에 글을 마무리 지을 생각이었다. 영화 [기생충]의 유명한 대사 처럼 계획을 세우면 늘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나는 자정이 되기 전에 다시 글을 두드릴 시간을 갖지 못했고, 어느새 9월의 마지막 날이 되어버렸다. 처음에 이 글을 두드리기 시작하면서 제목을 '9월의 마지막 날 하루 전날' 이라고 적어놓고 시작했는데, 이제 다시 제목을 바꾼다. '9월의 마지막 날' 이라고.


큰 아이는 요즘 전국 여기저기 백일장을 다니며 상을 쓸어모으고 있다. 최근 참여한 열 개 남짓한 백일장들 중에서 다섯 개의 상을 받았다. 야구로 치면 타율 5할인 셈이다. 아이가 글쓰는 일을 좋아하고, 또 조금은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짧은 시간에 상을 많이 받아올 줄은 몰랐다. 그리고 10월에는 또 꽤 많은 백일장들이 기다리고 있단다. 매번 새벽에 일어나 버스를 타고 행사장으로 갔다가, 마치고 밤 늦게 서울로 다시 돌아오는 일은 엄청 피곤한 일일 것이다. 그래도 아이는 하나도 빠지지 않고 다 참여하려고 노력한다. 대견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고, 뭔가 해주고 싶은 말이 많은데, 그런 말들 다 말하지 않아도 다 알고 있을 것 같기도 하고 그렇다. 내가 이 나이에 벌써부터 자식 자랑을 막 하고 다닐 줄은 몰랐다. 친한 사람들을 만나면 자주 "이번에도 상을 받았더라구." 이러면서 아무것도 아닌 것인양 슬쩍 한 마디를 하지 않고 못 배길 줄이야.


작은 아이는 그림에 푹 빠졌다. 미술학원을 열심히 다니고, 자신이 만든 우리 가족 캐릭터를 갖고 만화도 그린다. 나중에 그림으로 진로를 정할지 어떨지는 더 지켜봐야 하겠지만, 지금 상황을 보면 그렇게 될 확률이 높아 보인다. 음, 미술 쪽은 글쓰기 보다는 돈이 훨씬 더 들긴 할텐데. 라고 나도 모르게 돈 생각을 하고 있는 걸 보면 참! 한심한 아빠이긴 하다. 어렸을 때 나도 만화를 그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조금은 재능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했다. 아버지는 나를 화가인 지인에게 데려갔다. 그 화가는 내 그림을 보더니 재능이 없지는 않다는 정도의 평을 했던 것 같다. 다만 미술은 돈이 많이 든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우리 집은 정말 가난했다. 그래서 제대로 그림을 배워보고 싶다는 마음을 접었다. 그냥 아주 가끔 스케치로만 그림을 그리곤 했다. 그리고 조금 시간이 지나서 글쓰기로 내 목표를 바꿨다. 그게 아마 중학교 2학년 때부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매번 새학기에 자기 소개를 하는 시간이 오면 어른이 되면 소설가가 되어 있을거라고, 서점을 지나가다가 내 책을 발견하면 한 권씩 사달라고 말하곤 했다. 결국 나는 만화가도 소설가도 되지 못하고 이렇게 늙어가고 있지만, 아이들은 시와 그림에 어느 정도 재능을 보이고 재미도 붙이는 것처럼 보인다. 아주 다행한 일이다. 


작가 라는 타이틀


오랜 시간 시민사회단체와 협동조합을 거치며 일을 하다보니 회원으로 속해있는 단체들이 제법 많고,(즉, 회비로 나가는 돈이 많다는 뜻) 조합원으로 속해있는 협동조합도 많다.(출자금을 여기저기 많이 냈다는 뜻) 어느 협동조합에서는 조합원들을 단체 대화방으로 초대해 조합 소식을 알리거나 조합원들끼리 서로 소식을 주고 받도록 하고 있다. 그 협동조합은 내가 주로 활동하는 분야와는 접점이 좀 없는 편이라 나는 대화에 끼는 경우가 많지 않고, 그저 소식만 열심히 읽는 편이었다.


지난 주에 그 조합에 신입 조합원들이 여러명이 들어왔다. 조합 활동가가 신입 조합원들을 초대하면 기존 조합원들이 환영의 인사를 하느라 읽지 않은 대화가 빠르게 늘었다. 그러다가 나와 친한 활동가가 치통 때문에 수술을 받으려고 입원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 단체 대화방에서 그 친구에게 수술 잘 받고 빨리 나으라고 한 마디를 했다. 그 친구는 평소에 일중독이라고 불러도 별로 이상하지 않을만큼 일에 빠져있는 편인데, 병원에 입원한 상태에서 일을 할 수 없으니 엄청 심심했나보다. 그 대화방에 한 마디라도 글을 올리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에 대해 자신이 간단히 소개를 하겠다고 하면서 그날 대화를 쓴 사람들을 하나씩 찾아서 알려주기 시작했다.


작년에 오마이뉴스에 내 인터뷰 기사를 실었고, 그 활동가 인터뷰 연재 기사들을 모아서 책을 출간한 분을 소개하면서 과거 주요 활동 등을 알리고, 마지막에 '작가' 라고 소개했다. 그리고 다른 조합원들을 한참 소개한 후에 내 소개를 올렸는데, 내게도 "평생 환경운동을 했다." 는 소개와 더불어 몇 가지 정보를 덧붙이고는 마지막에 '작가' 라고 소개했다. 그러자 아까 언급한 작년에 활동가 인터뷰 모음집을 출간하신 그 '작가'님께서 나에게 질문을 했다. "00씨(내 본명)도 책 냈어?" 라고. 나는 이 대화를 좀 뒤늦게 읽었다. 조금 고민하다가 이렇게 답을 적었다. "공저가 두 권 있습니다만, 아직 작가라고 부르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한참 후에 그 작가님께서 내게 다시 답을 했다. "어느 책이든 글 썼고, 이름 올라가 있으면 작가입니다." 음, 그러니까 공저로 냈더라도 책을 냈으면 작가라는 뜻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렇군요. 가르침을 주셔서 고맙습니다!" 라고 답하고 그 대화를 잊었다. 한참 시간이 흐른 후에 다시 안 읽은 대화가 엄청나게 쌓여 있길래 들여다 보았더니, 그 뒤로 여러 조합원들이 자신이 책을 낸 경험들을 고백하고 있었다. 공저도 있었고, 단독으로 내신 분도 있었고, 책의 종류도 제각각 엄청 다양했다. 그래서 누군가가 우리 조합에 작가님들이 이렇게 많으니 작가클럽을 결성하자는 제안을 했더라.


사실 친한 친구나 후배들 중에 여러 사람들이 자주 내게 책을 쓰라고 권하곤 했다. 나는 늘 바쁘다는 핑계로 그럴 여유가 없다는 말로 빠져나오고 있다. 정말 아이들이 좀 더 자라고 양육비가 필요없는 날이 온다면 나는 매일 노동하는 이 일을 그만두고 짧게 일하고 꼭 필요한 만큼만 돈을 벌면서 책 읽고 글 쓰는 삶을 살고 싶다고 계속 생각하고 있다. 그 때가 오기 전에 책으로 만들 이야기 꺼리들을 많이 모아두어야 하겠지. 그런데 최근 저 작가라는 직함을 두고 저런 대화를 나누고 나니 내 단독 저작을 내보고 싶다는 욕심이 조금은 생기는 걸 깨닫는다. 쉽지 않겠지만, 혹시 하는 가능성을 열어두자.


사실 그 활동가가 나를 소개하며 '작가'라고 쓴 것은 책을 냈다는 의미가 아니라 평소 글쓰는 것을 즐긴다는 의미가 아니었을까 혼자 생각했다. 그 친구는 내가 실제로 그렇다는 걸 알기 때문에. 그래서 앞에서 처음 '작가입니다.' 라고 소개한 진짜 작가님과 내게 쓴 '작가'라는 이름은 다른 뜻이었을 것이다 라고 혼자 생각해봤다. 어느새 밤이 늦었네. 이제 그만 두드리고 자야지. 9월의 마지막 날이자, 금요일이다. 푹 자고 또 보람찬 하루를 보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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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22-09-30 0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큰 아이의 백일장 상 휩쓸기는 대견합니다^^
사실 한 두 개 타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인데요.
작은 아이는 그림을 잘 그리고~^^
아이들이 다재다능 하네요.
그것은 부모라면 무척 흐뭇한 일이지 싶어요. 자랑하고 싶을 정도로~^^

지난 번에 책 제목을 본 듯한데 제목이 기억나질 않네요? 책 제목을 알 수 있을까요?^^

감은빛 2022-09-30 13:07   좋아요 1 | URL
책읽는나무님. 이 글에 소개된 활동가 인터뷰 모은 책을 말씀하시는거죠?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문세경 / 사우
이 책입니다.

두 아이가 일찍부터 무엇을 하고 싶은지를 잘 찾아가는 것 같아서 대견해요.
고맙습니다!

책읽는나무 2022-09-30 13:34   좋아요 0 | URL
감은빛님이 공저하신 책이 맞는 거죠?^^

감은빛 2022-09-30 14:34   좋아요 1 | URL
아, 아니예요.
제가 공저로 참여한 책은 이 책 아니예요
저는 이 글에 언급된 다른 책 제목 여쭤보신 줄 알았네요.

감은빛 2022-09-30 14:41   좋아요 1 | URL
제가 공저자로 참여한 책 하나는 2010년에 알라딘과 예스24에서 활동하는 여러 서평 블로거들과 함께 낸 [100인의 책마을] 이구요.
두번째는 녹색당 창당할 때 여러 당원들과 함께 낸 [녹색당 선언] 입니다. 이 책은 지금 절판되었어요.

이 두 권 모두 공저자 숫자가 많아서 제 글은 분량이 무척 적어요.
제 글 때문이라면 굳이 일부러 찾아보시지 않으셔도 되지만,
대신 다른 분들 글이 좋으니 그래도 추천할 만한 책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책읽는나무 2022-09-30 15:41   좋아요 1 | URL
그렇군요^^
제게 협동조합 활동하면서 환경활동에 열심인 친구가 있네요.
가끔씩 얘기를 듣곤 하는데 참 좋은 일 하시는 분들이 많다는 생각을 하곤 했었습니다.
지난 번 환경에 관한 책을 소개하신 듯 하시던데 한 번 읽어봐야지~ 했다가 시간이 지나니까 책 제목이 기억나질 않더군요.
저는 그 책이 공저하신 책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책도 검색해 보니 좋은 책이네요^^
일단 보관함에 담아 뒀습니다.
한 번 찾아 읽어보겠습니다.
<100인의 책마을>은 알라디너님들도 다수 계시겠군요^^
답변 감사드립니다.
좋은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yamoo 2022-10-01 12: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실로 놀라운 정보를 알 수 있는 페이퍼 입니다. 감은빛 님 헤어스타일이 찰랑찰랑한 단발이었다니!!!! 이거 참으로 놀라운데요~~
저두 10여 년 전에 단발을 했었습니다만...그 따가운 눈총들과 관리의 어려움으로 4개월을 못 넘겼던 거 같습니다..ㅎㅎ 바뀐 헤어스타일이 어떤지 무척 궁금하네요..ㅎㅎ

아이의 백일장 수상확률 50퍼가 정말 놀랍습니다. 뭐, 저도 학부 4학년 때는 공모전 글쓰기 승률이 괘 높았긴 했습니다. 상금으로 마지막학기 등록금을 땜방하기도 했으니까요...근데, 지금 생각해보니, 수상은 운이 많이 따라줘야 가능한 것도 같습니다..ㅎ

미술에 재능이 있으면 그 소질을 개발해 주는 것이 좋죠. 하지만 돈이 그렇게 많이 드는 건 아닌 듯해요. 제가 그림을 그려보니 저렴한 국내용품으로도 어느 정도 작품활동은 할 수 있어요. 발색이 욕심 나면 뭐, 그때는 정말 돈이 남아나지 않겠지만요..ㅎㅎ
참고로 유화 작가용 유럽제품은 50밀리 색 1나당 2만원이 가뿐히 넘네요. 50호 그릴려면 돈이 어마무시하게 나가겠죠. 붓 한개당도 몇만원이니...^^;;

감은빛 2022-10-03 18:01   좋아요 0 | URL
야무님도 단발머리를 하셨었군요. 예전부터 야무님 글 보면서 보통 멋쟁이가 아니구나 라고 생각했었어요.

저는 일단 머리칼을 기른지는 2년이 다 되었고, 단발로 잘랐던 건 아마 늦봄쯤이었으니 단발 스타일로 6개월쯤 되었네요.

미술 쪽은 제가 거의 모르는데, 야무님 말씀 들으니 도움이 되네요. 고맙습니다!

카스피 2022-10-01 1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은빛님,단발이시라니 래퍼넉살스타일이신지 열혈사제의 장룡스타일인지 궁금합니다.저도 머리기른적이 있는데 주변의 압박이 장난이 아니라 결걱 포기했어요ㅜ ㅜ

감은빛 2022-10-03 18:04   좋아요 0 | URL
카스비님도 역시 장발을 시도하셨군요. 저도 대학시절부터 서너번 시도했다가 계속 포기했었는데, 이번에 성공했어요.

넉살, 장룡 둘 다 누구지 몰라서 검색해봤어요. 둘 다 저랑은 많이 다르네요. 일단 저는 외모가 안되니 뭐 다르게 보일 수 밖에 없겠지요. ㅎㅎ

얄라알라 2022-10-08 18: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은빛님 닮아서 자녀분들 예술 재능이 탁월한가봐요^^ 은근자랑하심인가요?^^ 넘 훈훈합니다!

감은빛 2022-10-18 13:31   좋아요 1 | URL
큰 아이가 백일장에 갈 때마다 상을 받는다고 주위 사람들에게 자랑하면, 다들 저를 보고 납득한다는 말과 표정으로 반응합니다. 사실 그렇게 생각해주시면 너무 고마운 일이지요. 제가 사실 뭐 내세울 것이 없으니 딸 자랑 밖에 할 게 없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