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아주는 사람


페이스북으로 일본 반한시위 옆에서 프리허그를 하는 여성의 동영상을 봤다. 한복을 입고, 눈을 가린 한국 여성에게 여러 일본인들이 와서 안아주었다. 누군가를 안아준다는 것, 포옹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새삼 깨달았다. 그건 안는다는 행위 자체보다 누군가를 감싸주고 위로해준다는 심리적인 작용이 더 큰 것 같다. 그 영상을 보면서 나를 안아주었던 사람들을 떠올렸다. 연인이었던 사람들을 빼고 한 명씩 기억을 떠올렸다.


여자 선배


아마 대학 1학년 때였을 것이다. 여성이 남성보다 약 3배 가량 많았던 우리 과의 특성 상 여성 선배들이 많았고, 새내기들 중에서 톡톡 튀었던 나는 선배들의 애정을 많이 받았다. 그 중 4학년 선배 한 명이 유독 내게 잘 해줬다. 자주 만나지는 못 했지만, 만날 때마다 잘 챙겨줬다. 하루는 그 선배를 비롯해 몇몇 선배들과 밤새 술을 마셨다. 그 선배는 그날따라 술을 많이 마시고 취했고, 바로 옆에 앉아 있던 내 어깨를 감싸거나, 내 손을 잡는 등 스킨쉽을 했다. 취하면 그렇게 스킨쉽을 하는 것이 술 버릇이었을까? 어느 학회실에서 초저녁에 시작된 술자리는 새벽까지 끝날 줄을 몰랐고, 예비역 남자 선배들이 계속 술을 사다 날랐다. 점점 더 그 선배는 취했고, 나중에는 내가 이쁘다고, 귀엽다고 하면서 내 어깨에 얼굴을 대고 꼭 끌어안기도 했고, 내 얼굴을 본인의 가슴에 끌어와 안기도 했다. 


같이 술 마시던 다른 선배들이 뭐하는 거냐고, 막 뭐라고 해도 그 사람은 개의치 않았다. 계속 내 머리를 쓰다듬거나, 가끔 내 어깨에 얼굴을 기대거나, 또 끌어안곤 했다.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싫지 않았다. 오히려 그때 여러 사정으로 힘든 일이 많았는데, 그 사람이 그렇게 안아주는 것이 위로가 되었다. 나중에 택시를 타고 어느 선배의 집으로 이동할 때도 내 옆에 앉아 내 팔을 끌어안고 내 어깨에 기대어 있었다. 아침에 해가 뜰 무렵 어느 낯선 방에서 다같이 잠들었고, 아침 늦게 일어나 함께 택시를 타고 돌아와 학교 근처 식당에서 해장국을 먹었다. 그날 이후 그 선배와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그저 가끔 마주치면 애정어린 시선으로 반겨주고, 웃어주던 사람이었다.


이성 친구


한때 친했던 여성인 친구도 나를 안아준 적이 있었다. 당시 짝사랑하던 여성과 집안 문제와 운동권 내부의 파벌 문제 등 여러 복합적인 상황 때문에 힘들어 할 때였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던 무렵이었다. 학교 안 어딘가를 걷다가 벤치에 앉았는데, 그 친구가 주머니에서 따뜻한 캔 커피 두 개를 꺼내 하나를 내게 건넸다. 커피를 받아 들었는데, 잠시 후 가방에서 화장지를 꺼내더니 내게 줬던 캔을 다시 달라고 했다. "내가 남자친구 외에는 이렇게 잘 챙겨주지 않는데, 고마워 해야 해"라고 하며, 캔 뚜껑 쪽 입이 닿는 부위를 깨끗이 닦아서 다시 돌려줬다. 내가 "영광입니다."라고 웃으며 답하자, "그럼 영광이지. 이 바쁜 내가 특별히 시간 내서 만나준 것도 영광인 줄 알아."라고 했다. 실제로 그 친구는 과외와 학원강사 등으로 무척 바빴다. 그 친구를 처음 만난 것도 같은 학원에서 강사로 지내면서였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자신의 연하의 남친 얘길 한참 들었고, 자연스레 내 얘기를 했다. 여러가지 상황들이 다 어렵고 힘들다는 얘길 했고, 내 뜻대로 잘 되지 않아 많이 답답하다고 했고, 내 의도와는 다르게 자꾸 다른 사람들에게 오해를 사고, 친했던 사람들이 적으로 돌아서서 억울하다는 말도 했다. 말하던 중에 담배를 한 대 피웠다. 내가 담배를 피우자 눈을 찡그리며 싫은 표정을 짓던 친구가 내 깊은 한숨과 그늘진 표정을 보더니 걱정스런 표정으로 바뀌었다. 담배를 끄고, 커피를 다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그가 나를 불러 자기 옆 자리에 앉으라고 했다. 앉자마자 몸을 돌려 나를 살짝 안더니, 너무 힘들어하지 말라고, 잘 될거라고 위로했다. 그 마음이 참 고마웠다. 


출판사 후배


마지막으로 다녔던 출판사에 제일 늦게 들어온 여성은 나이에 비해 경험이 부족했다. 출판쪽 경험은 전혀 없었다. 나머지 직원들은 잡지쪽 일을 중심으로 했고, 나와 그 친구가 주로 단행본 일을 했다. 사장님이 모르는 건 모두 나한테 물어보라고 했고, 나는 늘 그렇듯 그 친구가 잘 적응하길 바라며, 하나씩 차근차근 알려줬다. 자세히 설명해주고, 어려운 점은 특별히 주의하라고 알려주고, 작은 실수들은 괜찮다고, 다들 그렇게 시작한다고 격려해줬다. 이 친구가 어느 순간부터 나를 좀 다르게 대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밥을 먹으러 걷다보면 나에게 바짝 붙어서 걸으며 말을 걸었고, 좀 지나치게 붙어서 그의 팔이나 가슴이 내 팔에 닿기도 했다. 뭔가 질문하려고 내 자리로 올 때도 너무 가까이 붙어서 좀 이상하다 싶었다.


아침까지 술을 마시고 바로 출근했던 날이었다. 점심 때 사장님이 맛있는 내장탕 집을 가자고 해서 다 같이 차로 이동했다. 평소 조수석은 내가 앉는 자리였다. 뒷좌석 세 명이 끼어 앉아야 하는데, 상대적으로 넓고 편한 자리를 직급으로나 나이로나 사장님 다음이었던 내가 앉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날은 내 몸에서 워낙 술냄새, 담배냄새가 심하게 났고, 사장님 옆 자리에 앉으면 뭔가 잔소리를 들어야 할 것 같아서 일부러 뒷 자리에 앉으며, 후배 기자를 앞 자리로 보냈다. 뒤의 세 자리 중에서 이 친구가 제일 불편한 중간 자리에 앉았고, 자연스레 내 옆이 되었는데, 나에게서 술냄새, 담배냄새가 장난이 아니라고 웃으며 말했다. 난 미안하다고 말하고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는데, 이 친구가 '정겨운 냄새'라는 표현을 썼다. 처음에는 무슨 소리인줄 몰랐다. 얘기를 다 듣고, 아직 술이 덜 깬 머리로 한참을 생각해서야 이해했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술과 담배를 즐기셨고, 늘 아버지에게서 술냄새와 담배냄새가 많이 났다고 했다. 자신은 어려서부터 익숙하기에 그 냄새가 싫지 않았고, 돌아가시고 나서는 그 냄새가 그립다고 했다. 그런데 오랜만에 나에게서 그 냄새를 맡아서 아버지 생각이 났다고 했다.


어느날 영업 일로 누군가를 만나 술을 한 잔 하고, 늦은 시간 집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버스정류장에 멈춰선 버스 앞쪽 창문이 열리더니, 이 친구가 거의 창 밖으로 몸을 내밀듯이 하면서 큰 소리로 "팀장님!"하고 불렀다. 양 팔을 크게 흔들며 어찌나 반갑게 웃던지. 나는 그 반응에 깜짝 놀라기도 했고, 주위의 시선이 좀 부끄럽기도 했다. 어색하게 손을 들어 흔들어줬다. 우리집 방향으로 가는 버스가 아니어서 타지 않았고, 버스는 곧 출발했고, 그 친구는 여전히 웃으며 내게 양 팔을 흔들고 있었다. 술을 한 잔 더 먹고 싶었는데, 이 친구가 이토록 반가워하니 한 잔 하자고 전화를 했다. 조금 늦은 시간이었지만, 좋다고 했고, 그 친구의 집과 우리집 중간쯤의 먹자골목에서 만났다.


좀 힘든 시기였다. 책이 팔리지 않아 영업 이익이 예상만큼 잘 나오지 않았고, 편집 작업 중인 책도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았다. 애들엄마와 오랜 불화로 인해 서로 감정이 많이 상해 있는 상태였고, 이 어정쩡한 상태가 답답해서 웬만하면 집에 일찍 들어가기 싫어 늘 늦게까지 술을 마시거나 야근을 했던 때였다. 내 힘든 상황을 한참 떠들고, 그 친구의 어려운 점을 들어주면서 늦게까지 술을 더 마셨다. 술집을 나와 헤어질 때, 이 친구가 정색하면서 "팀장님"이라고 불렀다. 약간 취해서 대답은 않고, 그저 눈을 쳐다보았는데, 갑자기 나를 껴안았다. "힘내세요. 늘 그렇듯 잘 해내시리라 믿어요." 라고 했던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고 떨어지더니 씩씩한 걸음걸이로 택시를 잡으러 갔다. 조금 놀랐지만, 그 걸음걸이를 보면서 웃음이 나왔다.


후배 활동가

 

활동하는 공간이 달랐으니 자주 마주치는 건 아니었고, 가끔 만나는 여성 활동가였다. 몇 번 마주치는 동안 인사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나중에 어느 토론회에서 정식으로 인사를 건넸는데, 웃으며 "저는 선배님 잘 알아요."라고 했다. 나는 이름도 알지 못해서 좀 당황스러웠다. 시간이 흐르며 또 몇 번을 마주쳤고, 한 두 번 술자리도 가졌다. 그때까지 그 친구는 그냥 가끔 마주치는 후배 활동가 외에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어느 날 사람들이 아주 많은 술자리에서 그가 여러 테이블을 옮겨 다니며 술을 마시는 장면을 봤다. 우리 테이블은 다들 좀 재미없는 사람들과 재미없는 얘기들만 있어서 혼자 딴 생각에 빠져 술을 홀짝였다. 재미없는 술자리는 질색이라 차라리 집 근처에서 다른 후배를 불러내 술을 마셔야지 생각했다. 일어설 타이밍을 찾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그 친구가 내 옆에 앉았다. 이미 많이 마신듯 살짝 취한 느낌이었다. 내게 술을 권해서 잔을 부딪혔다. 술을 마시고, 내게 이런저런 얘기들을 물어왔다. 개인적으로 얘기를 나눈 기억이 거의 없는데, 생각보다 나에 대해 많이 알고 있었다. 몇 번인가 잔을 더 부딪히고 웃으며 술잔을 비웠고, 여러 얘기들을 더 나눴다. 갑자기 담배를 달라고 했고,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담배를 피우러 나갔다. 또 뭔가 떠들며 담배를 피웠고, 담배를 끄고 돌아설 무렵 갑자기 이 친구가 나를 껴안았다. 그리고는 두 팔로 내 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당시 처해있던 복잡한 상황들 때문에 지쳐 있었는데, 그 포옹과 토닥토닥이 나를 위로해주는 느낌이었다. 자리로 돌아가자마자 그는 술잔을 들고 또 다른 테이블로 옮겨가며, 눈웃음을 지어보였다. 나중에 보니 또 다른 사람들과도 그렇게 껴안고 토닥토닥을 해주고 있었다. 저건 동지로서의 교감의 포옹일까, 아니면 취해서 그런걸까? 그와 술을 자주 먹지 않았고, 취한 걸 처음 보는 터라 알 수 없었다.


후회


누구나 실패를 겪고 또 실수를 한다. 나는 지나치게 많은 실수를 하고, 그로 인해 무언가를 망치며 살았다. 후회하고 또 후회해도 시간을 돌릴 수 없기에, 이미 엎지른 물을 담을 수는 없다. 할수만 있다면 그 많은 실수들을 바로 잡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걸 잘 안다. 모두 내 잘못이고, 내 책임이다.


아직 어렸을 때,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내가 유난히 운이 나쁜거라고, 유독 나에게만 그렇게 나쁜 상황이 닥치는 거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다시 생각해보니 그렇지 않았다. 그 상황을 만든 것이 나였거나, 그 나쁜 상황으로 빠져 들어간 것이 나였다. 그리고 나쁜 선택을 한 것도 나였고, 실수를 저지른 것도 나였다. 다른 누구의 잘못이 아닌 내 잘못이었다. 


엊그제 함께 술을 마셨던 후배가 그랬다. "형, 왜 그렇게 살아요?" 모르겠다. 아니 내가 그렇게 생겨먹은 놈이라서 그런 거겠지. 나약하고, 겁이 많고, 깊이 생각하지 못하고, 쉽게 감정에 휘둘리고, 스스로를 잘 조절하지 못하는 인간이라서 그렇겠지. 잘못을 저질렀으면 그로 인해 교훈을 얻고 고쳐야 할텐데, 후회하고 반성은 하지만, 정작 바로 잡지 못하고 반복적으로 실수를 저지른다.


사람을 잃고, 적을 만들고, 그런 상황이 반복되면 후회를 하면서도 결국 나는 이것 밖에 안 되는 놈이야 라고 생각한다. 이제 부터라도 그러지 말아야겠다. 후회와 반성에서 그치지 않고, 이제라도 그 잘못이 반복되지 않도록 나를 바꾸기 위해 노력해야겠다. 조금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겠다. 아프고 힘들지만 그 감정에 머물지 않고 극복해 나가기 위해 노력해야겠다. 그것이 내 잘못으로 상처입은 사람들에게 사죄하고 책임지는 자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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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6-11-25 07: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아요~ 이렇게 마음을 열어 자신을 내보이는 글! 나도 덩달아 같은 제목으로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감은빛 2016-11-28 02:07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께서 쓴 같은 제목의 글을 읽어보고 싶어요.
좋다고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

samadhi(眞我) 2016-11-25 22: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존경하는 사람에게 먼저 가 앵깁니다. 제일 처음은 신영복 선생님이었고요. 김용택 시인, 금난새씨, 백경우씨(이매방류 살품이품 전수자)... 김용택 시인 빼고는 세 분 다 얼마나 당황해하시고 부끄러워하시는지... 세 분 모두 제 남자입니다 ㅋㅋㅋㅋ

감은빛 2016-11-28 02:08   좋아요 0 | URL
그 네 분이 모두 부럽네요.
저도 언젠가 유명해지면, 진아님의 포옹을 받을 수 있는 건가요? ^^

samadhi(眞我) 2016-11-28 04:49   좋아요 1 | URL
세 분은 강연회였고 한 분은 공연 때 뵈었으니 언젠가 강연을 해주시거나
우리춤을 아주 잘 추시면 제가 먼저 ˝ 선생님 한번 안아봐도 되요?˝ 묻고서 대답할 시간도 주지 않고 덥썩 안아버릴 거예요. ㅋㅋㅋ 그분들이 좋아서 제가 헤벌쭉해져 그러는 것이라... 제가 안아드려봐야 퐁신퐁신 따끈따끈하지도 않고요 ㅋㅋ
 


꿈을 꾸었다. 쫓기고, 다치고, 떨어지는 꿈. 반복되는 꿈. 전생이라는 것이, 윤회라는 것이, 천국이나 지옥이라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지만, 가끔 믿고 싶을 때가 있다. 난 전생에 사회주의 혁명가이자, 독립운동가가 아니었을까? 그렇지 않다면 왜 이렇게 자주 일제 경찰에 쫓기는 꿈을 꿀까? 뭐 어차피 전생이란 건 없는 거다. 그저 뇌의 작용에 의한 착각일 뿐. 친한 형은 (이렇게 속된 표현을 써서 미안하지만) 어린 여성과 결혼했고 애도 셋이나 낳아서 전생에 나라는 구한 장군이 아니냐는 얘기를 듣고 있다.

그럼 나는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렇게 뭐 같은 삶을 사는 걸까?

아니, 그런 말을 하려던 건 아니고, 이 새벽 시간이 참 좋다! 마시려다가 피곤해 잠들어 버려 못 마신 와인을 마시는 것도 좋고, 아직 밝아지지 않은 어둠에 쌓인 창 밖 풍경이 좋고, 침대에 누워 멍하니 시간을 보낼 수 있어 좋다. 심지어 평소라면 짜증 났을 밖에서 들려오는 기차소리, 차소리조차도 좋다.

와인을 홀짝이며 생각한다. 어쩌면 이 반복되는 꿈은 이야기를 만들고 싶은 내 의식의 반영이 아닌가? 소설이라는 거창한 타이틀을 붙이지 않더라도 이야기를 만들어 봐야겠다.

해가 뜨면 책을 읽어야겠다. 지금은 그저 기차 소리 들으며 와인을 마셔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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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madhi(眞我) 2016-11-20 06: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감은빛님 집도 기찻길옆 오막살이 입니까? 우리집도 그래요 ㅠㅠ 비행기가 하루종일 날고 기차는 쉬지도 않고 달리며 차들은 쌩쌩 달리는 변두리에서 사는 고충을 살아본 사람만이 알지요.

감은빛 2016-11-22 00:41   좋아요 0 | URL
이 글은 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 썼어요.
한때 기차길 근처에 산 적이 있었어요.
다행히 기차가 많이 다니는 노선은 아니었어요.
그래도 새벽에 기차 소리에 종종 깨긴 했었죠.
소음 피해는 진짜 힘든 일인 것 같아요.
매일 듣고 싶지 않아도 들을 수 밖에 없고,
달리 방법이 없으니까요. 힘드시겠어요!

yureka01 2016-11-20 0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꿈은 현실의 반영,,내면의 투영,,,체게바라처럼 살고 싶었던건 아니었을까요...

감은빛 2016-11-22 00:43   좋아요 1 | URL
체 게바라 보다는 이 책에 나온 몇몇 선배 혁명가들의 생애에 관심이 많아요.
과연 내가 저 시대를 삻았다면 저런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싶어요.
 


올해 처음으로 정장을 꺼내 입었다. 구두도 꺼내 신었다. 넥타이도 메야할까 생각하다가 귀찮아서 생략. 애들 엄마가 큰 아이의 학교 교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 집을 나서기 전 거울을 본다. "아! 나 오늘 좀 멋진데!" 이런 생각하고 있을 상황이 아닌데도, 내가 봐도 내가 너무 멋져서(내가 보는 거니 그런거겠지만) 매일 정장 입고 출근할까 라는 생각을 잠시 해본다. 사실 와이셔츠 빨아서 다려 입는 것만 아니면 정장 입고 다니는 것이 더 편하긴 하다. 뭘 입을지 따로 고민하지 않아도 되니까. 


애들 엄마는 머리를 짧게 자르고 독특한 스타일의 파마를 한 듯 하다. 낯설다. 저 사람이 10년 넘게 같이 살았던 사람이 맞나 싶다. 내가 채 교문 앞에 도착하기도 전에 그는 보안관실에 방문 접수를 했다. 교장선생님과 교감선생님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한 2주 전쯤에 애들 엄마가 메일을 보냈다. 아이의 담임이 아이들에게 폭언을 일삼고, 여학생들에게 성차별적 발언으로 모욕을 주고, 아이들에게 답안지를 던진다던가 폭력적인 행동을 일상적으로 했다고, 교사로서 부적절한 언행을 너무 자주 해서 아이들이 무척 힘들어했고, 그 와중에 급식에서 머리카락이 나왔다고, 여학생들에게만 머리를 묶으라고 강요하면서 특정 학생을 심하게 몰아세우는 일이 벌어졌다고 했다. 이에 몇몇 학부모들이 뜻을 모아 담임을 교체해달라는 요구를 했고, 몇 차례 교장, 교감과 간담회를 가졌다고 했다.


그런 내용을 애들 엄마가 몇 번 메일로 전달했다. 나는 애들 엄마가 그 논의에 들어가 있으니 직접 참여하지는 않고 전해주는 소식만 들으면서 지켜보고 있었다. 어제 최종적으로 교장과 학부모들이 만나서 담임 교체를 결정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그런데 하필 어제 결근한 담임 대신 대리로 들어온 다른 선생 둘이 학생들에게 "너희가 뭔데 선생님을 괴롭히냐?", "선생님이 얼마나 힘드셨으면 그만두시겠냐?". "선생님이 바뀌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손을 들어봐라" 등 도저히 상식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발언들을 했단다. 학교를 마친 큰 아이가 애들 엄마랑 떡볶이를 먹다가 너무 억울하고 싫었다고 울먹였다고 했다.


큰 아이는 2학기에 여자 회장이 되었다. 회장으로 뽑혔다고 나한테 신나서 자랑하던 아이의 표정이 생생하다. 그런데 선생이라는 인간들이 그따위로 아이들을 억압하고 몰아붙이니 회장으로서 아이가 무척 힘들어했다고 한다. 오늘 아침 애들 엄마가 전화로 이걸 그냥 두고 볼 수는 없다고 교장을 만나서 단단히 따져야겠다고, 나에게 함께 가 줄것을 요청했다. 이 인간들이 엄마들만 찾아갔을 때랑 아빠가 한 명이라도 함께 갔을 때 태도가 완전히 달랐다고 했다. 


바쁜 날이었지만 함께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출근하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와서 정장으로 갈아입었다. 얕잡아보이면 안된다고 생각해 일부러 옷도 갈아입고, 구두도 꺼내 신었다.


교장과 교감 두 명을 만났다. 애들 엄마가 차분하게 상황을 설명하고, 요구사항을 말했다. 교감과 교장은 어제 상황을 전혀 몰랐다고 하면서 배경을 설명하겠다고 변명을 했다. 핵심은 아이들에게 절대 하면 안되는 짓을 한 것인데, 계속 말을 돌리는 것처럼 보였다. 참다 못한 내가 정중하게 정곡을 찔렀다. 생각 같아서는 훨씬 더 심하게 말을 하고 싶었지만, 꾹 참고 최대한 표현의 수위를 낮췄다. 그들은 계속 비슷한 말을 반복했다. 말을 하다보니 나도 모르게 흥분해서 목소리가 막 떨렸다. 아니 몸도 막 떨렸다. 아, 쪽팔리게. 잠시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진정시켰다. 떨리는 오른손을 왼손으로 꼭 붙잡고 다시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중요한 것은 학교측에서 선생들에게 제대로 이 상황을 인지시키고, 앞으로 이런 말도 안되는 일이 다시 벌어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약속을 받는 것이었다. 한 시간이 넘게 대화를 나눈 후에 결국 교장과 교감의 사과를 받고, 재발방지 약속을 받고 나왔다.


마지막에 한 마디를 하고 싶었던 걸 참았다. 원칙적인 얘기다. 아이들을 가르치고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인격체로, 학교를 구성하는 주체중 하나로 인정해야 한다. 선생들의 인격이 제대로 갖춰지지 못했는데, 무슨 자격으로 아이들을 가르친단 말인가? 학교 차원에서 제대로 기본부터 교육을 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교육자로서 스스로를 돌아보도록 인권 교육을 처음부터 다시 시켜야 한다. 선생들이 먼저 똑바로 태도를 갖춰야 학생들 앞에 떳떳하게 설 수 있을게 아닌가. 


늘 생각한다. 아이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현명하다. 아이들은 가르쳐야 할 대상이 아니라 함께 생각하고 고민하는 동반자로 봐야 한다. 그런 기본조차 갖추지 못한 자들이 교육자라고 교단에 서서 아이들을 무시하고, 성차별을 일삼고, 폭언을 퍼붓고, 폭력적인 행동을 하고, 억압하니 아이들이 뭘 배우겠나?
















큰 아이가 1학년때 담임은 퇴직이 얼마 남지 않은 나이 많은 여선생이었다. 아이들에게 엄하다는 수준을 넘어서 히스테리를 부렸다. 아이는 그 선생을 엄첨 무서워했다. 아이를 데리러주러 학교에 함께 갔다가 아이가 울면서 학교 가기 싫다고 난리를 쳐서, 들여보내지 못하고 데리고 출근한 적도 있었다. 언젠가는 아이들에게 '빨갱이'라고 부르면서 막 짜증을 내기도 했단다. 잘못이 있으면 잘 알아듣도록 타일러야지. 아이들이 당신들 짜증을 받아주는 존재인가? 그리고 애들에게 빨갱이가 뭔가? 그 단어 뜻도 모를 초등학교 1학년에게 그게 무슨 짓인가? 


이번에 교체된 담임도 나이가 많은 사람이라고 했다. 또 어제 아이들에게 헛소리를 했던 선생도 나이가 많은 사람이라고 했다. 이렇게 지적하면 나이 많은 교사들에 대한 편견이자 일반화의 오류가 되겠지만, 전반적으로 젊은 교사들보다는 나이 든 교사들이 인격적으로 문제가 있고, 인권 의식이 없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제발 나이 값 좀 하고 살자!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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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장을 입고 사무실에 오니 만나는 사람들마다 한 마디씩 한다. 오늘 선보는 날이냐? 왜 이렇게 쫙 빼입고 왔냐? 어디 중요한 프레젠테이션이라도 하고 왔냐? 이 사람들이 진짜! 이 나이에 무슨 선을 보나? 다 설명하려면 너무 긴 얘기라 그냥 그럴 일이 있다고 하고 지나치려는데, 한 두명이어야지. 매일 정장입고 출근할까 잠시 생각했던 것 포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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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18 16: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1-22 00: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samadhi(眞我) 2016-11-18 16: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교육이 그따구여서 저는 아이가 생기면 학교를 보내지 않을 생각입니다. 대책도 없이 그냥 애를 데리고 어디든 함께 다닐 계획(?)인데요 ㅎㅎ

감은빛 2016-11-22 00:35   좋아요 0 | URL
홈스쿨링과 대안학교 등 이런저런 고민을 했었죠.
현실적인 대안을 만들지 못해 결국은 공교육에 아이를 맡겼지만요.
아이가 좀 더 자라면 스스로 판단하게 할 수 있을까 모르겠습니다.

transient-guest 2016-11-20 1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한국에서의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선생이라기보단 개새끼만도 못한 것들이 더 많이 떠오르네요. 직업으로서의 교사가 생산되는 지금은 더할 지도 모르겠어요

감은빛 2016-11-22 00:37   좋아요 0 | URL
네, 저도 그런 선생 같지도 않은 인간들에게 수업을 들었죠.
학교라는 공간을 감옥처럼 여기며 12년을 꼬박 보냈어요.
지금은 좀 달라졌으면 좋을텐데, 그렇지 않은 것 같아요.

2016-11-21 21: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1-22 00: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책, 무거운 삶의 동반자


아마 알라딘 서재에 쓴 적은 없는 것 같은데, 당시 활동하던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그때 글을 남겼었다.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자세히 쓴 글이 있었다. 알라딘 서재에는 ['날씬하세요'와 '니가 임신했냐?' 사이에서]라는 제목의 글에 잠시 언급을 했었다. 출판계에 들어와서 영업일을 하다가 단행본을 하나도 내보지 않은 출판사에 들어왔는데, 첫 단행본으로 학술서적을 냈다. 엄청 두꺼운 양장본 책이었다. 그 당시는 창고와 배본을 전담하는 업체를 쓸만한 상황도 아니었다. 첫 단행본이 대중을 위한 단행본이었다면 달랐겠지만, 이건 학술서적이었다. 평범한 사람들은 사서 읽어도 무슨 말인지 조차 이해하기 어려운 책이었다. 사무실로 받아야 했다. 직접 배본하고 배송해야 했다. 


책이 나오는 당일은 무지 더운 날이었다. 나는 온라인서점 담당자들을 만나기 위해 평소 반바지에 허름한 반팔 티셔츠를 입고 다니다가, 그날 만큼은 단추를 채우는 예쁜 셔츠를 골라 입고, 바지도 긴 바지를 입고 나왔다. 영업자로서 정장을 입진 못하지만,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책이 도착했을 때, 사무실에 책을 나를 사람이 없었다. 우리 사무실은 4층이었고, 박스는 제법 묵직하고 많았다. 책을 옮기는데 도와줄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내가 혼자 4층까지 올려야 했다.


사장님은 이삿짐 센터 같은 곳에 사람을 부르자고 했다. 그러면 아마 1인당 적어도 7만원에서 10만원 가까이 인건비가 들어갈 텐데, 이 책의 손익구조를 보면 절대 지출할 수 없는 항목이었다. 잡지 기자 두 명이 함께 도와줬다면 쉽게 옮길 수 있었을 텐데, 그 기자 두 명은 다른 일로 사무실에 없었다.


혼자 4층까지 수많은 책 박스를 올려야 했다. 결심을 했다. 책 한 권 팔아봐야 얼마 남지도 않는데, 그리고 이 책은 많이 팔릴 책도 아닌데, 이걸 옮기느라 돈을 또 제법 써야 한다니. 차라리 내가 혼자 옮길테니, 그 돈을 나한테 달라고 하고 싶었으나, 그 말도 차마 하지 못하고, 그냥 사장님께 혼자 할 테니, 나중에 술이나 한 잔 사시라고 말했다. 까짓거 내가 이 정도도 못 해낼까? 근거없는 자신감이 흘러넘쳤다. 


30분도 지나지 않아 후회하기 시작했다. 진짜 힘들었다. 죽을 만큼 힘들었다. 도저히 더 움직이기 힘든 상황인데, 아직 3분의 1도 다 옮기지 못했다. 빨리 해치우려고 상자 두 개를 동시에 등짐으로 지려고 했다가 허리를 삐끗했다. 역시 무리하면 안 된다. 그냥 하나씩 어깨에 올리거나, 등짐으로 지면서 올렸다. 쉬다가 다시 일하면서 몇 십번을 후회했다. 욕도 많이 했다. 다른 사람을 욕한 것이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한 욕이엇다. 미쳤지. 어쩌자고 이걸 혼자 하겠다고 큰 소리르 뻥뻥 쳤냐? 왜 이렇게 바보냐? 이러면 누가 알아줄 것 같냐? 아무도 기억하지 못 할거다. 그냥 나만 바보처럼 손해보고 마는 거다. 뭐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계속 책 상자를 올렸다.


막판에 사장님께서 조금 도와주셨다. 확실히 둘이서 하니 속도가 빨라졌다 .금새 남은 책을 다 옮기고 점심을 먹으로 갔다. 사장님게선 특별히 맛있는 샤브샤브 집에 데려가셨고, 맥주를 시켜주셨다. 고기를 잔뜩 먹고, 맥주도 제법 마시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오후엔 사무실에 아무도 없을 예정이었다. 나도 원래 계획대로라면 책을 갖고 온라인 서점 담당자를 만나야 했지만, 이미 옷이 땀에 다 젖어버려 그럴 수가 업었다. 대신 혼자 문을 걸어 잠그고 옷을 다 벗은 채, 알몸으로 일했다. 땀에 젖은 셔츠와 바지를 각각 선풍기에 걸어놓고, 땀에 절은 속옷까지 벗어서 빈 공간에 널었다.


그 전까지 나는 애들 엄마에게 구박을 많이 받았다. "몸매 보고 결혼했는데 속았다"는 말도 자주 들었고, 급기야 그가 작은 아이를 임신했을때 "니가 임신해냐?"는 소리까지 들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다시 결혼 전 몸매로 완벽하게 돌아가지는 못할 지라도, 최소한 지금 상항은 벗어나야 겠다고 마음 먹었던 게 그해 봄이었다.


그 날의 힘든 경험은 분명 나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우선 육체적으로 거의 불가능한 미션을 수행하면서 결혼 후 오랫동안 나태하게 살았던 내 몸이 그 날을 계기로 다시 예전 몸에 대해 깨닫고 돌아 갈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다. 사장님이 나에게 엄청 미안해하고, 또 그걸 혼자 다 옮긴 것에 대해 경외감을 갖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후 사무실이 4층에서 2층으로 이사하게 되었을 때 또 육체노동을 했다. 나는 재고 도서를 관리하는 영업팀장이었기 때문에 더 짐이 많았고, 할일이 많았다. 

그런 과정들이 결국 '임신한 것 처럼 뽀록한 배'를 '식스팩의 윤곽이 살아있는 배'로 만드는 데 한 몫 한 것 같다.


강의와 김장


지난 주에는 내가 쓴 '에너지전환 가이드 북' 소책자를 옮기느라 무거운 상자를 들고 제법 오래 걸었다. 팔과 등의 근육이 조금 무리를 해서 며칠간 뻐근하고 당기는, 기분 좋은 느낌이 들었다. 바빠서 운동을 자주 하지도 못 하는데, 이렇게 일상에서 힘을 쓰는 일을 하고, 땀을 흘리면 그 자체로 기분이 좋다. 


어제는 아침에 중학교 1학년 학교 수업을 했다. 예상보다 아이들이 어려워하는 느낌이 들었고, 많이 떠들어서 힘들었다. 목소리가 작은 편인데, 아이들이 떠들면 그걸 누르기 위해서 나도 모르게 점점 소리를 크게 높게 올린다. 수업을 다 마치고 나와서 전화를 받았는데, 거의 목이 잠겨 있었다. 목소리가 왜 그러냐고 묻길래, 수업하고 방금 나왔다고 답을 했다.


확실히 떠드는 일은 에너지 소모가 많은 일이다. 2시간 강의를 마치고 나왔더니, 너무 힘들고 배가 고팠다. 에전에 학원 강사 시절엔느 4시간 연강에 잠시 쉬는 시간을 갖고 다시 3시간 연강을 뛰기도 했는데, 그땐 무슨 에너지로 그걸 버텨냈을까? 젊었기에 가능했던 걸까?


작년에 300포기 김장을 했던 로컬푸드 식당에서 올해는 60포기만 김장을 하겠다고, 도와달라고 연락이 왔다. 우선 밥을 얻어먹고, 김장을 돕기로 했다. 작년보다 배추가 더 컸다. 소금에 절인 배추를 헹궈서 물을 빼는 작업을 먼저 돕고, 나중에 무채를 썰고, 양념을 버무리는 작업을 도왔다. 중간에 사무실에 들러 잠시 일을 하다가, 다시 돌아와서 배추에 양념을 넣는 김장의 하이라이트인 작업을 했다. 일하는 도중에 저 쪽에 물을 빼려고 받쳐놓은 절인 배추 바구니를 가져와야 했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무거운 바구니를 들고 옮겼으나, 속을 넣고 있던 언니들은 깜짝 놀라며, 아니 둘이서 들어야지, 왜 혼자서 그 무거운 걸 드냐고 난리였다. 씩 웃고 아무말도 하지 않고 그냥 다시 속을 채우는 일을 했다. 옮겨 놓은 배추를 다 쓰면 또 바구니를 옮겨왔다. 몇 차례 반복했더니, 힘도 좋다고 칭찬이 자자했다. 딱 한 번, 훨씬 크기가 큰 바구니를 들어올리다가 실패했다. 저 멀리서 언니들이 무리하지 말라고, 둘이서 옮기라고 했지만, 나는 한 번 들어보니 대충 가늠할 수 있었다. 다음 순간 번쩍 들어서 옮겼다. 


김장을 다 끝내고 수육에 막걸리를 마셨다. 정말 맛있었다. 작년엔 300포기, 올핸 60포기. 작년에 비해 올핸 별로 도운 것도 없었다. 내년에 또 김장을 도와야 할까? 어쨌거나 이번 김장을 통해 깨달은 것은 내가 단순 육체노동을 좋아한다는 거다. 아무 생각없이, 고민 없이 이렇게 손을 움직이는 일이 좋았다. 힘쓰는 일이 좋았다. 난 아무래도 다 때려치우고 육체노동을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아, 물론 내가 일상적으로 책상 앞에 일하거나 사람들을 만나서 떠드는 사무직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육체노동을 자주 하지 않다가 가끔 하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일 수 있다. 그리 오래 해보지 않았지만, 막노동 일을 할 때는 진짜 힘들었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책상 앞에 앉아서 잘 돌아가지도 않는 머리를 굴리려고 애쓰는 것 보다 몸을 쓰는 일이 훨씬 더 자연스럽고 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끔 동네 축제에 막노동을 하러 갈 때가 있다. 뭔가 행사를 치루려면 누군가는 바닥에서 육체노동을 해야 한다. 나는 그 일이 그리 어렵지 않고, 조금 힘들긴 하지만, 해 볼만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것 만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을지는 또 다른 문제겠지만. 


바쁜 일주일의 절반 이상이 훌쩍 지나갔다. 어제 밤 기분이 안 좋아 술을 마시고 자려고 생각했지만, 너무 피곤해서 술을 먹지 못하고 멍하니 한참을 누워있었다. 숨을 쌕쌕 내쉬며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기분이었다. 그저 모로 누운 채 눈만 껌뻑일 뿐이었다. 


어느 순간 잠이 들었고, 밤새 계속 잠에서 깼다. 악몽을 꾸기도 했고, 어이없는 코메디 같은 꿈을 꾸기도 했다. 쫓기는 꿈을 꾸었고, 간절하게 사랑을 표현했다가 거절당하는 꿈을 꾸기도 했다. 


아침에 배가 고파서 생굴을 넣고 굴국을 끓여서 두 그릇이나 먹었다. 어제는 다 필요 없고 죽고 싶다는 생각 밖에 없었다. 패배감에 이런 삶 살아서 뭐하는 하는 생각이었다. 그랬던 내가 아침에 국을 두 그릇이나 비우다니. 웃음이 나왔다. 기분 나쁜 감정에 얽매여 있는 건 의미 없다. 그건 그거고 난 또 일상을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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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6-11-17 1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긴 페이퍼에서 이 문장이 가장 빛나네요.

‘다음 순간 번쩍 들어서 옮겼다.‘

ㅎㅎㅎㅎㅎ

감은빛 2016-11-18 13:54   좋아요 0 | URL
그걸 본 언니들의 반응이 좋았어요.
그런 반응을 원했거든요.
어깨를 한 번 으쓱 했죠. ㅎㅎㅎ

yureka01 2016-11-17 14: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고..책이 원 재료가 나무잖아요..나무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았을텐데요..그걸 다 옮겼다니..몸살날만했을 겁니다. 집에 이사할 때 서재방에 책옮기고 정리하는 일도 보통이 아닌데...300포기 김장을 번쩍이였다면 육체의 발전!!!대단하십니다~

감은빛 2016-11-18 13:57   좋아요 1 | URL
유레카님, 몸살이 나진 않았어요.
한 삼사일쯤 온 몸이 좀 뻐근한 느낌. 기분좋은 느낌이 들었어요.
출판사 다닐 때, 이사를 세번 했어요.
하필이면 모두 창고를 두고 있는 출판사여서 책이 몇 만권 있었거든요.
그거 다 싸고, 옮기고, 다시 풀고, 정리하는 게 진짜 힘들었어요.

하이드 2016-11-17 17: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육체노동 좋아요. 아직까지는 사무실에서 일한 기간이 더 길지만, 샬랄라꽃.. 아니고, 농부와 나뭇꾼의 팔뚝으로 꽃일하며 무아지경에 빠진답니다.

육체노동, 힘을 내는건 습관이거나 해야한다는 마음, 기갈 같은게 작동하는거 같아요.
엄청엄청 무거워도 해내고 나면 뿌듯..하긴 개뿔 몸살나죠. 이걸 내가 어떻게 했을까 싶고.

저 요새 살아서 뭐하나 생각 되게 많이 하는데, 짐 치우고, 빚갚고, 고양이 키워야 해서 죽지도 못해요. ㅎㅎ 그러면서 저녁때 김치찌개 먹으러 빨리 들어가고 싶다. 뭐 이런 생각 하죠.

감은빛 2016-11-18 13:58   좋아요 0 | URL
하이드님. 안녕하세요.
무아지경. 맞아요.
단순한 육체노동을 하다보면 그런 느낌이 들어요.

살아서 뭐하나. 그죠. 가끔 그런 생각 들어요.
그래도 죽지 못하니 살아야죠.
김치찌개에 소주 한 잔 하고, 그러면서 살아야죠.

samadhi(眞我) 2016-11-17 1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남편에게 요즘 곧잘 하는 말인데 ㅋㅋ 복근 보고 결혼했는데 속았다고. 남편이 요즘 운동을 안 하니 복근이 사라져버렸거든요.
저도 노동예찬론인데요. 제 몸이 너무 부실해서 조금만 일해도 바로 몸살이 나더라구요. 제가 육체노동을 하려면 먼저 체력을 길러야 해요. 하다보면 이력이 붙는 몸이 아니라서요.

감은빛 2016-11-18 14:01   좋아요 0 | URL
아! 보다 구체적이시군요. 복근 보고 결혼하셨다니!
예전에 애들엄마가 마치 농담처럼 그런 말을 자주 했어요.
누군가 왜 결혼했냐고? 저런 놈 뭐가 좋아서 결혼했냐 이렇게 물으면,
˝몸매보고 결혼했어요˝ 라고 그랬죠.
그리고 몇 년 후에 그 말이 ˝몸매보고 결혼했는데, 속았어요.˝로 바뀌었죠.

운동을 안하면 자연스레 근육이 조금씩 줄어들고,
몸매도 금방 망가지죠.
꾸준히 운동하면서 살아야겠어요.
간신히 20대 때 몸매 비슷하게 만들었는데,
다시 망가지면 무척 아까울 것 같아요.

양철나무꾼 2016-11-18 15: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은빛님, 몇 년전 뵜을때 몸매 이쁘셨는데...
몇 년 전이기는 하고,
그 후엔 뵌 일이 없을 뿐이고, ㅋ~.



감은빛 2016-11-18 15:41   좋아요 0 | URL
양철님, 안녕하세요.
그때 겨울이었는데, 옷을 잔뜩 껴입고 있었는데요. ^^
지금은 그때보다 더 만족할만한 몸매가 되었어요.

아침마다 거울 보면서 흐뭇해합니다. ^^
 

쥐가 나서 아파


아마 열흘 전쯤이었다. 운동을 하고 씻고 잤는데, 새벽에 팔에 쥐가 나서 잠을 깼다. 종아리에 쥐가 나서 깨는 일은 가끔 있지만, 팔뚝에 쥐가 나서 깬 건 처음이었다. 쥐가 난 것은 왼팔이었고, 오른팔로 주무르다가, 주먹으로 쾅쾅 내리쳤더니 통증이 가라앉았다. 팔뚝이 돌덩어리처럼 굳어 있었다. 낯선 느낌이었다. 팔에 쥐가 나다니! 생각해보니 평소와 달리 운동을 마치고 팔 운동을 더 했었다. 특정 부위 근육만 키우는 고립운동을 잘 하지 않다가, 갑자기 더 했던 것이 화근이었나보다. 고통 때문에 잠을 깬 것은 기분이 나빴지만, 다음날 그 만큼 운동을 열심히 한 때문이라 생각하니, 운동한 보람이 있구나 싶었다.


어제 밤에는 종아리에 쥐가 나서 잠을 깼다. 너무 아팠다. 발을 뒤로 젖혀야 풀리는데, 혼자서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혼자 끙끙 신음 소리를 내며 손을 뻗었지만, 통증 때문에 발가락 끝에 손이 닿지도 않았다. 예전에는 자다가 쥐가 나 신음 소리를 내면 애들엄마가 깨서 발을 젖혀주기도 했다. 아, 곤히 자느라 모르고 도와주지 못했던 적도 많지만, 가끔은 도와줬다. 억지로 고통을 참으며 손을 뻗어 발가락 아래 굳은살이 배긴 부분을 잡고 뒤로 당겼다. 간신히 쥐가 풀렸다. 이젠 쥐가 나서 고통스러워도 옆에서 도와줄 사람이 없구나. 새삼 깨달았다. 그렇구나. 아프지 말아야 겠다. 다치지 말아야 겠다. 돌봐줄 사람이 곁에 없으니 혼자 씩씩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아프지도, 다치지도 말아야 겠다. 새삼 다시 깨달았다.


어제 쥐가 난 건 토요일 아치 발전소 청소와 집회 참가 때문이었으리라. 종아리 근육에 무리가 갈만큼, 발전소 청소 때 힘을 많이 썼고, 이후 계속 서있거나, 인파를 뚫고 걸어다녔다. 가끔 뛰기도 했다. 수많은 인파에 묻혀 꼼짝하지 못할 때에도 계속 몸이 이리저리 밀려 다리에 힘을 주고 있어야 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새벽까지 계속 밖에 있었고, 계속 다리에 힘을 주고 있어야 했고, 또 제법 걸어야 했다. 그러니 종아리 근육이 뭉쳐서 쥐가 날 만 했다. 


예전에 이명박 시절에 G20 포스터에 쥐 그림을 그린 두 분의 실형 선고 소식을 전하면서, 내 종아리에 쥐가 난 소식을 쓴 적이 있는데, 그때 어느 알라디너가 비밀 댓글로 조심스럽게 하지정맥류 증상이 아닌가 걱정을 하셨다. 쥐가 나서 깬 적은 많았지만, 아침에 깨서 그 쥐가 난 증상 때문에 다리를 절고 걸어야 할 정도고 통증이 오래 간 적은 없었으니까 나도 좀 이상하다 생각했던 참이었다. 다행히 그 후로 별 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마 당시에도 무리해서 운동을 했거나, 많이 걷거나 뛰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0


뛰어다니는 걸 좋아한다. 그래서 가방이나 거추장한 옷 차림을 별로 좋아히지 않는다. 가방이 작거나, 없어야 뛰어다니기 편하다. 옷도 되도록 간편해야 한다. 사람들이 많은 거리를 좋아하지 않는다. 인도에 인파가 많으면 과감하게 차도로 내려가 뛰기도 한다. 


출근을 할 때나, 아이가 어린이집에서 홀로 기다리고 있을 퇴근시간이나, 약속 시간에 늦었을 때, 하필 눈 앞에서 버스를 놓쳤다면 버스 노선과 거리를 가늠해보고 뛰어서 다음 정류장에서 버스를 따라잡아 타기도 한다. 차가 막히는 시간이거나, 다음 정류장이 거리가 아주 가깝거나, 신호가 절묘하게 걸렸을 때 등 운이 따라줘야 하고, 가슴이 터지도록, 허벅지 근육이 터지도록 전력질주를 해야 가능하다. 


#1


출판사에 다닐 때니까 벌써 몇 년 전이다. 뭔가 급한 일을 하다가 거래처를 방문하기로 한 약속 시간에 아슬아슬하게 나섰는데, 하필 눈 앞에서 버스가 출발해버렸다. 택시도 잘 잡히지 않는 거리였다. 빠르게 머리를 굴린 다음 뛰기 시작했다. 교차로 3개를 지나는 동안 버스는 계속 신호에 걸렸다가 가기를 반복했고, 그 동안 나는 전력으로 달려서 다음 정류장에서 간신히 버스를 탔다. 가을이었던 것 같은데, 땀을 비오듯 흘렸고, 거의 10여분 이상을 숨을 헐떡였다. 그래도 덕분에 약속 시간에 늦지 않았다.


#2


어느 날 출근 시간 집에서 나서서 내려오는데, 저기 앞 종점에서 버스가 출발하는 것이 보인다. 뛰기 시작했는데, 도중에 차량이 가로막고, 사람들이 앞을 가려서 제대로 뛰기 어려웠다. 정류장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버스가 승객들을 태운 뒤 출발해 버렸다. 다음 정류장은 가까웠다. 뛰면 분명히 따라잡을 수 있었다. 전력질주. 교차로에 닿기 직전에 직진신호로 바뀌면서 버스가 출발했고, 횡단보도 역시 초록불로 바뀌었다. 버스보다 빨리 정류장에 닿아야 했다. 버스가 서서히 속력을 올리는 동안 온 몸의 힘을 짜내어 달려서 버스를 추월했다. 정류장에 도착하기 직전 버스가 나를 앞서가 정류장에 섰다. 하필이면 아무도 타는 사람이 없었다. 사람들이 타면서 버스를 잠시라도 붙잡아 둬야 하는데. 다행히 내가 뛰는 걸 본 기사님께서 잠시 기다려주셨다. 숨을 헐떡이며 버스에 오르며 기사님께 간신히 "고맙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일터에 도착할 때까지 숨을 고르며 지냈다.


#3


이미 퇴근 시간이 지났건만, 회의는 끝날 줄을 몰랐다. 어린이집에서 홀로 기다리고 있을 작은 아이가 생각났다. 지금 일어서야 했지만, 이 회의에 자주 들어오지 못하다가 오랫만에 들어온 터라 눈치가 보였다. 게다가 중요한 논의였고, 사람들은 망설였고, 쉽게 어떤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답답했다. 내가 나서서 정리를 하고 싶었지만, 그러면 나에게 책임이 돌아올까봐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굴리고 있어야 했다. 아, 이 회의는 왜 이렇게 비효율적인거야! 회의 주최자가 원망스러웠다. 결국 참지 못하고 발언을 했다. 이렇게 저렇게 하면 간단한 문제가 아닌가. 이렇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빨리 결정을 하고 준비를 해야 한다고 말한 다음, 눈치를 보다가 살그머니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건물을 나와 정류장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걷는데, 저 위에서 버스가 좌회전을 해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앗! 아직 정류장까지 거리가 제법 되는데, 자동으로 뛰기 시작했는데, 인도에 사람이 많았다. 한 명 한 명이 장애물이었다. 요리조리 피해가며 뛰는데, 버스가 나를 추월해 지나갔다. 다급했다. 인도에서 차도로 내려가 뛰기 시작했다. 뒤에서 오던 택시가 빵빵 클랙션을 울리며 나를 피해갔다. 다시 인도로 돌아와 사람들 사이로 뛰었다. 정류장에서 타는 사람이 많아 버스는 한참 서있었다. 퇴근 시간이라 만원버스겠지? 과연 탈 수나 있을까? 정류장에 닿기 직전에 버스는 출발해버렸다. 이런 젠장! 다시 한번 혼자 심심하게 기다리고 있을 작은 아이 얼굴이 떠오른다. 


출발했던 버스가 저 앞에서 신호에 걸린다. 다시 뛰기 시작한다. 다행히 이 구간엔 사람이 많지 않다. 전력으로 뛰었다. 다음 정류장에 버스가 들어서는 것과 동시에 나도 도착해 버스를 탔다. 완전 만원 버스라 간신히 사람들을 밀고 올라탈 수 있었다. 말 그대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문이 닫힐 때 옆 사람을 밀치고 몸을 피해야 했다. 작은 아이를 만나기 전까지 호흡이 정상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하지만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또 뛰어야 했다. 아이가 기다리고 있으니까. 어린이집에 도착해서 선생님을 만났을 때 말이 나오지 않아 허리를 크게 숙여 인사를 해야했다. 만나자마자 작은 아이의 한 마디. "아빠, 왜 이렇게 늦게 왔어?" 나는 바로 대답도 못 하고 한참 숨을 고른 후에야 "미안해"라고 말할 수 있었다.


가슴이 아파



'내 귓가에 스친 노래가 아파' 라는 가사가 가슴을 후벼팠다. 한때 좋아했던 슬픈 노래 중에 너무 아파서 잘 듣지 못하는 노래가 있다. 그 노래를 들으면 길 한 가운데에서 걷던 중이라도, 사람이 많은 버스나 지하철 안에서라도,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도저히 들을 수 없었다. 다행히 아주 유명한 노래가 아니지만, 가끔 라디오에서 틀어주거나, 유튜브 자동재생 목록에 포함되는 걸 막을 수는 없다. 


'가슴이 아파, 너와 함께 했던 시간이 아파~ 니가 없는 나의 하루가 아파~ ' 

'햇살이 아파, 너와 함께 걷던 거리가 아파~'


꽤 오랫동안 그 사람과 좋았던 시간들을 기억에서 지우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내 생활 반경 곳곳에 그 사람과의 추억이 도사리고 있다. 일터에서 자주 들러야 하는 지역의 거점 공간을 가려면 결혼하자마자 구해서 짧게 살았던(미친 집주인 때문에 대판 싸우고 나왔던) 집 앞을 지나야 하고, 그 거점 공간 뒤쪽에는 재개발을 통해 지금은 허물고 아파트를 지었지만, 평택에서 막 올라왔던 나를 받아줬던, 그래서 그와 동거했던 집이 있었다. 그와 팔짝을 끼고 웃으며, 장난치며 걸어다녔던 골목길들, 큰 아이가 태어나기 직전 내 팔에 몸을 기댄 그를 데리고 산부인과로 걸었던 길이 바로 근처다. 잊고 싶어도, 생각하고 싶지 않아도 자꾸만 떠오른다. 머리가 나빠 숫자도, 사람 얼굴도, 이름도 잘 기억하지 못 하면서 왜 그런 기억은 자꾸 떠오르는 거냐!


아이들이 좋아하는 월드컵공원을 가면 늘 술을 마실 수 밖에 없다. 거긴 그가 나에게 인라인 스케이트를 가르쳐주고 함께 탔던 데이트 장소였다. 나도 모르게 아직 젊었던 그의 얼굴과 바람에 날리던 머리칼이 떠오르고, 저만치 앞서 가다가 나를 향해 돌아보며 웃던 표정이 떠오른다. 아이들은 신나게 뛰고 놀지만, 나는 괴롭다. 술을 마시지 않으면 견디기 힘들다. 그래도 조금씩 무뎌지긴 하는 것 같다. 최근에 갔을 때는 덜 아팠다. 대신 다른 사람을 떠올렸다. 


마지막으로 인라인 스케이트를 탄 적이 언제였는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작은 아이가 아직 한참 어렸을 때, 인라인 스케이트를 신은 채로 작은 아이를 태운 유모차를 몰고 좀 타보려고 시도했던 기억이 있는데, 잘 되지 않았다. 결혼 후 창고에 처박아놓고 한번도 타지 않은 탓이다. 발목 근육이 약해졌는지, 자세가 바로 잡히지 않았다. 아마 그때가 마지막이 아니었을까? 아니다! 큰 아이와 함께 타보겠다고, 겁없이 인라인을 신었던 적이 또 한 번 있었다. 그때 깨달았다. 난 이제 더이상 인라인을 탈 수 없구나. 몸이 타는 법을 기억하지 못하는 구나. 아니 탈 수 있는 몸이 아니구나. 


인라인을 더이상 타지 못하는 몸이 된 것처럼, 이제 그와의 즐거웠던 기억들을 다 잊어버리고, 더이상 괴롭고 아프지 않은 내가 되었으면 좋겠다. 물론 쉽지 않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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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15 19: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1-15 19: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1-15 19: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yureka01 2016-11-15 09: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무릎 관절..고관절도 재생안되는 거예요..관절을 소중히^^..몇해 전에 1년에 자전거 및 산행..걷기..달리기 총거리가 900KM이동거리였습니다..그 이듬해 봄에는 고관절에 물이 차더군요..정말 아프더군요..ㅎㅎㅎ지금도 무릎이 뜨끔뜨끔거릴때가 간혹 있어서요..나이들어가니 표시가 나던데요..ㄷㄷㄷㄷ

감은빛 2016-11-15 19:02   좋아요 1 | URL
관절은 소중하죠.
저는 20대 초반에 어깨와 무릎을 다쳐서 지금도 가끔 아플 때가 있습니다.

달리기를 좋아하지만, 또 그렇게 많이 뛰지도 않아요.
계단 오르내리기를 하다보면 무릎 주변 근육을 키우는데 도움이 되더라구요.

유레카님 고맙습니다!

안타까워 2016-11-15 1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우리 몸도 소모품이랍니다. 그러니 아껴쓰야지요. 체계적으로 운동을 해서 운동강도를 높혀가는게 아니면 꼭 탈이납니다. 그리고 쥐가 자주난다면 마그네슘을 복용해보세요.그렇게 무작정 뛰다가 정말 어디 부딪히기라도 하면 큰일납니다.

감은빛 2016-11-15 19:03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염려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쥐가 자주 나는 건 아닙니다.
어쩌다 한 번씩인데, 하필 팔에 나고 얼마 후에 종아리에 난 거죠.
뛰다가 가끔 넘어져서 다치기는 했어요.
조심하려고 합니다.

cyrus 2016-11-15 1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이가 들면 들수록 조금씩 몸에 변화가 온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서글픕니다. 제 친구는 저보다 운동 신경이 좋고, 농구를 엄청 좋아했어요. 그런데 제대 이후부터 허리 디스크에 걸려 한동안 고생한 적이 있어요. 허리 때문에 농구를 점점 멀리하게 되고, 예전의 기량을 볼 수 없게 됐어요.

감은빛 2016-11-15 19:05   좋아요 0 | URL
시루스님,
지난 번에도 그 친구 말씀 하셨어요.
안타깝네요!

이젠 진짜 몸이 예전같지 않다는 걸 자주 느낍니다.
그래서 더 운동이 필요한 것 같아요.


samadhi(眞我) 2016-11-15 1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쥐가 날 때는 얼른 벽이 있는 공간 앞에 가서 다리를 벽에 올리고 누운 상체와 다리를 90도로 유지한 채로 잠시 있으면 금세 풀립니다. 신기하게도. 지독히 심할 때도 그럴 지 모르지만 저도 학원강사 할 때 만날 서 있다보니 밤마다 쥐가 났거든요. 그럴 때마다 그렇게 하면 금방 괜찮아지더라구요.

감은빛 2016-11-18 13:53   좋아요 0 | URL
진아님,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다음에는 그렇게 한 번 해 볼게요.
발을 뒤로 제치면 잠시 후 풀리는데, 혼자서는 그걸 잘 못 하겠더라구요.

학원 강사 하셨군요. 저도 꽤 오래전에 한동안 했어요.
활동가로 살면서 사교육 시장에 일한다는 것이 모순이라
생각한 이후 부터는 생각도 안 하지만,
아이들과 지내는 시간은 참 좋았다 싶어요.

samadhi(眞我) 2016-11-18 14:58   좋아요 0 | URL
발바닥을 벽에 붙이시구요. 보여드릴 수 없어 아쉽지만 대충 아시겠죠? 대충 하시면 됩니다. 맞아요, 그 아이들은 절 잊었겠지만 저는 그 애들이 가끔 생각나요.

감은빛 2016-11-18 15:39   좋아요 0 | URL
아, 발바닥을 벽에 붙이라고 하시니 알 것 같아요.
그럼 더 쉽게 될 것 같아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