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같은 배우 되지 마>를 읽고 리뷰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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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같은 배우 되지 마 - 조연처럼 부딪치고 주연처럼 빛나라
류승수 지음 / 라이프맵 / 2009년 12월
평점 :
절판
TV를 안본지 6년이 넘었다. 미안한 말이지만, 저자의 사진이 박혀있는 띠지가 없는 채로 책이 배송되었던지라, "류승수"라는 이름 석자만으로는 도무지 누군지 감이 잡히지 않았더랬다. 게다가 책 제목은 왜 그리 안티(anti)스러운지.. 나같은 배우가 되지 말라니? 강하고 튀는 느낌도 좋겠지만, 뭔가 더 밝고 희망적인 제목이 낫지 않나? 하는 잡스러운 생각을 하면서 책을 펼쳤다. 아, <놈놈놈>에 오토바이 타고 나왔던 그 배우구나. 책장 사이사이에 나와있는 사진들을 보니 TV와는 거리가 먼 내게도 이제야 누군지 감이 잡힌다. 그런데, 이 책의 정체는 도대체 뭘까?
자서전도, 영화 평론도 아닌 '성장중인 배우'의 이야기
<달마야 놀자>에서 성격 참 독특한 스님으로 나왔다는 것까지는 사진을 보고 기억해 냈는데, 책의 목차를 보자니 도대체 이 책이 무슨 책인지 알쏭달쏭했다. 영화 하나씩을 꿰어차고 모든 글들이 진행되고 있는데, 이 배우가 이렇게 많은 영화에 출연했단 말인가?! 앗, 혹시 영화배우의 입장에서 쓴 영화평론집 같은건 아닐까? 옆표지와 뒷표지는 준수하지만, 책의 얼굴이랄 수 있는 앞표지의 임팩트가 다소 약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판매를 위해서는 사진이 나와있는 띠날개는 반드시 포함되기를..), 그 중 낮익은 몇 편의 영화에 관한 내용을 찾아보다가 어느새 이 책에 서서히 빠져들게 되었다.
'배우'라고 하면 머리 속에 떠오르는 이미지 중에는 이런 것이 있다. 스타인 일류 배우와 스타가 아닌 그 나머지 배우들. 마치 '모 아니면 도', '주연 아니면 엑스트라' 같은 단순하면서도 황당한 인식구조인데, 어떤 '배우'가 책을 냈다고 하면 그 사람이 누구이든 그 책에는 '스타'가 되기 까지의 길고 긴 인생역정이나 에피소드들이 들어있을 거라고 대략 짐작하게 만들게 되는 것이다. TV 인생극장에서 볼 수 있는, 한번씩 약간의 감동이 섞인 그렇고 그런 이야기들의 뒤범벅은 아닐까 염려하게 되면서. 그런데, 다행이었다. 이 책은 완전히 스타가 된 배우의 회고담도, 스타를 꿈꾸는 덜 익은 풋내기의 잡글을 모은 책도 아니었다 (물론 개인적인 영화평론도 아니었다). '배우란 무엇일까'를 고민하면서 조금씩 성장해온, 우리 또래 어떤 젊은이의 이야기랄까.. 그런 점이 대충 읽고 내려놓으려던 손길을 다시 한 페이지씩 책장을 넘기게 하였다.
배우들, 특히 스타가 아닌 무명시절의 배우들이 힘들게 산다는 이야기는 많이들 듣는다. 그런데, 세상살이가 어디 어떤 직업이나 만만한게 있던가? 철없는 십대, 이십대 아이돌들이 당일치기 TV 인생극장 같은데 출연해서 고생 좀 하고는 삶의 진실에 눈떳다는 식으로 깝친다든지, 반대로 며칠씩 밤샘 작업하는 연예인들의 일상을 다루면서 '스타란 알고 보면 전문적이고 힘들다'는 식으로 특별하게 대하는 것 모두가 사회생활 좀 하면서는 별스럽지 않게 생각되어진다. 어떤 일이나 정성과 노력을 들이지 않고 제대로 되는 일이 어디 있으며, 밤 새고 못 먹고 못 자며 일하는 걸로 따져서는 신제품 런칭 전시회 준비하는 대기업 직원에서부터 전국의 수많은 공장에서 밤샘 작업하는 노동자들까지도 그만큼은 하면서 힘들게 살아가지 않던가. 보고서 한 장도 제대로 못 써오면서 S대 출신이랍시고 연봉 타령하는 신입사원들을 볼 때면 콱 쥐어박고 싶은걸 얼마나 참아야 했던지. 입사 초기에는 학벌이나 영어성적, 외모, 집안배경 같은 것이 눈에 두드러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맡은 일에 임하는 자세나 예의범절, 배우는 자세 같은 것이 결국 더 두드러지지 않던가. 그런 점에서, 저자가 책에서 말하는 에피소드들은 특별히 '배우'라서 그런 것도 있지만 그 나이 또래에 사회생활 했던 삼십대, 사십대들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삶의 배움'에 관한 내용들로 차곡차곡 채워져 있다는 점이 신선하고 친근하게 다가왔다. '배우'라는 특정 직업에 관련된 이야기들이지만, 초심을 강조한다든지, 힘을 빼라고 한다든지, 디테일의 힘을 안다든지, 공부하는 자세에 대한 내용들은 어떤 일을 하건 누구나 '아하!' 해봤거나 '아하!'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배울 줄 아는 사람, 류승수
인상적인 것은 저자가 늘 일관되게 뭔가를 배우려고 한다는 점이었다. 그냥 자기 경험담과 에피소드들, 책에서 베낀 좋은 글귀들을 늘어놓고 폼 재면서 지나가도 되었을 것을, 그는 늘 '배우'란 무엇인지, '연기'란 무엇인지에 대해 주의를 두고 있었던 것 같다. 주변의 선배나 동료들에게서 슬쩍 들은 한 마디를 놓치치 않고 간직하고 되씹고 배우려는 자세. 완성된 '스타'도 멋지겠지만, 이렇게 스스로 생각하며 배워나가는 'ing 중인 배우'라면 참 제대로 멋지지 않은가. 저자의 배우는 자세 때문이겠지만, 한 마디씩 '가르침'을 알려준 것으로 소개된 선배 연기자들의 이야기도 읽는 재미가 꽤 쏠쏠했다. 송강호씨의 '오버'에 대한 이야기라든지, 박신양씨의 '과도한 감정 연습'에 대한 이야기, 또 김지운 감독의 '촌스러움'에 대한 언급 같은 것들은 책을 덮은 뒤에도 일상에서 가끔 의미를 떠올리게 하였다.
이 다음이 기대되는 배우.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나는 어느덧 류승수라는 배우의 다음 작품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이 책의 '자세' 대로라면, 이것이 단순한 문학적 표현과 허세가 아니라면, 그는 또 배움을 통해 계속 자신의 틀을 깨면서 성장해 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부디 그가 초심을 잃지 말고 겸손한 자세로 묵묵히 배움의 길을 걸어나갈 수 있기를 바란다. 그가 인용한 것처럼, 배우는 배우는 사람이자 작품을 남기는 사람이니까. 조만간 <달마야 놀자>를 다시 빌려 보아야겠다. (P.S. 오타: P.186. 밑에서 2번째줄. 명성의 거리Walk of Frame → Walk of Fame 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