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데르트바서를 바써
서재 이웃 메리포핀스님이 보내주신 입장권 덕분에
폐막되기 며칠 전 턱걸이로 다녀온 훈데르트바서 한국 전시회. (고맙습니다~ ^o^)/
마녀고양이님이나 메리포핀스님이 알라딘에도 이미 방문기를 올렸을 뿐 아니라,
"촬영 불가"에도 불구하고 근사한 사진들이 블로그마다 올라와 있는, 이미 끝나버린 전시회.
그러거나 말거나, 감사의 뜻으로 주관적인 뒷북을 둥둥~ 두드려본다. ^ㅅ^;
저녁으로 접어드는 시간에도 남녀노소 꽤 많은 사람들이 북적이고 있던 어느 평일 오후.
예술의전당 한가람 디자인 미술관 (2010.12.5 ~ 2011.3.15)
◆ 1단계 : 그냥 느끼기
모든 정보와 지식, 팜플렛과 작품 설명은 내버려두고, 일단 전체 공간을 탐색한다.
전반적 흐름과 규모를 파악한 다음, 설명은 읽지 않고 작품 자체를 그냥 느끼면서 둘러보았다.
실내 촬영을 엄하게 단속하고 있어서 입장 후에는 제대로 사진 한 장 찍지 못했지만,
일찌감치 포기하고 나니 오히려 작품의 느낌과 분위기에 더 충실히 몰입할 수 있었다.
책이나 인터넷에서는 그 화려한 색채와 기하학적 패턴들이 눈에 도드라졌지만,
막상 오리지널 앞에 서니 다른 종류의 질감과 느낌이 온몸을 엄습한다. 뭔가가 다르다.
아래는 당시 메모를 옮겨적은 내용...
창문 + 테두리의 강조.
창문 중심의 구조물. 건물 자체보다 더 강조된 무수한 창문, 제 각각의 모습들.
창문은 얼굴, 자궁, 허벅지, 무릎, 팔꿈치(관절부)에.
불규칙한 면, 그러나 일종의 패턴, 개성있는 분할.
인공적이지 않은 선, 그렇다고 '자연스러운' 것은 아닌,
非정형화된 선.
보기보다 '자연'은 아님. 자연의 모방이 아닌, 자기 개념(철학)에 의한 새로운 선線의 사용.
인공물의 반복(러시안 돔 + 특징적인 기둥의 반복 등),
건물 내부와 옥상의 나무들. 텔레토비 마을, 이화여대 입구 ECC. (블루마우 마을)
북유럽 + 러시아풍 + 우울 + 섬세하지 않은 + 거칠고 충동적이고 일렁이는 정서.
유럽식 건축의 패턴을 벗어나지 못함.
'사람'과 'Sex'는 어쩐지 배제된.
원색적인 색상, 모자이크 패턴.
1960년대 부터 독특한 특징 드러나고, 1980년대 들어와 패턴화, 90년대 들어 안정과 조화.
뻣뻣한 독일 계통에서 드러나는 의외의 우아함과 독창성 : cf. 루돌프 슈타이너(발도르프)
일본의 영향 : 낙관. 목판화,
우키요에?
실크스크린 - 광택나는 표현, 작품 아래쪽 테두리의 동양식 낙관들. 색상표들.
곤충의 세계.
모자와 눈(eye)의 반복적 등장. 모자에 대한 애착.
테두리 =
세포(Cell) : 세포의 염색 사진과 유사. 식물적인, 동물이 아닌.
그의 작품에서 진짜 자연은 없다.
종교와도 무관 : 성 바바라 성당(오스트리아)- 다양한 종교적 상징, 종교색 희석.
상징적인 의미 부여 : 나선, 직선, 수평 = 非수직, 자원 재활용 등.
일정 범위의 장소에서 주운 물건들로 만든 작품들. 자연을 모방한 정수기.
이 사람은 아팠다. 근거를 알 수 없는 어떤 느낌.
'그래, 예술가는 어딘가 아픈(?) 사람이지', 같은 것이 아닌, 실제의 힘겨움, 병리 현상...
다행히 말년에 이르러 평화와 조화에 더욱 가 닿은 물리적 + 내면적 느낌.
백 개의 물 = 百水.
30일간의 팩스 프린팅: 짝사랑했던 여인에게 30일간 보낸 팩스로 구성된 작품(가로6 x 세로5장)
◆ 2단계 : 누군가의 설명
직관과 느낌만으로 설명을 읽지 않고 전체적으로 빠르게 둘러보며 감상한 후,
비로소 전시관 입구의 바이오그래피와 팜플렛을 찾아 객관적 '정보'를 보충한다.
놀랍게도 아팠던게 맞다.
청년기의 황달, 그리고 세계 2차 대전 당시 독일군에 의해 유태인이었던 외가의 몰살...
초기 작품의 뭔가 불편한 느낌들이 이해가 되는 것 같다. 그리고 두 번의 결혼과 두 번의 이혼.
중요한 연도들을 체크하고는 다시 시간 순서대로 전체 흐름을 쫒는다. 이번엔 작품 설명과 함께.
저녁 시간인데도 관람객은 점점 늘어만 간다 (3월에는 저녁 8시까지로 연장).
약 1시간에 걸쳐 설명까지 읽어보며 한번 더 둘러보고 왔을 때, 마침 시작된 도슨트의 설명.
열정적인 그녀의 목소리에 하나 둘 모여든 사람들은 어느새 열대어처럼 우르르 군단을 이루며 몰려다닌다.
깨알같은 안내문에도 실려있지 않던 재미난 이야기들이 흘러나와 작품 감상을 더욱 풍성하게 만든다.
에곤 쉴레와
클림트에게서 받은 예술적 영향. 제도권 예술을 벗어난 "내 멋대로 표현할래!"
관람자와의 '입체적인 만남'을 위해
일부러 벽면에서 고개를 내밀듯 툭 튀어나온 액자와 어두운 조명,
직선을 싫어했던 그의 뜻을 받들어 전시 액자와 도구에까지 구석구석 반영된 곡선들.
5개의 피부 이론 : 1번째 실제 피부, 2번째 옷, 3번째 집, 4번째 사회, 5번째 지구.
영화 <반지의 제왕>에서 호빗 마을의 모태가 되기도 했다는
블루마우 온천 마을의 거대한 축소 모형.
하늘에서 바라보면 거의 풀밭과 수영장만 보이지만, 앞쪽에서 보면
텔레토비 동산이나, (어떤 영화였는지 가물가물한) 평화로운 어느 외계인의 마을처럼 보인다.
도슨트를 포함한 관계자들이 전시회 끝나면 이곳에 놀러가기로 했다고 하여 부러움을 자아냈던 곳.
주교좌 대성당의 녹색 지붕을 접한 후, 비로소 그의 건축에서 특징적인 '건물 옥상 위의 나무와 풀밭'이
전면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큰 계기가 된 것이라 이 작품이 그의 전시회 '얼굴'로 사용되었다는 사실.
엄청나게 예민하고 까다로운 성격. 그리고 작품을 자식처럼 무척 아꼈다는 이야기.
작품을 판매한 후에도 수시로 소장가에게 전화를 걸어 온도와 습도 조절을 위해
에어콘과 가습기를 어떻게 틀어라는 것까지 일일이 체크하고 자주 잔소리를 하여 모두 치를 떨었다고 한다.
2번의 결혼과 2번의 이혼. 그리고 서툴렀던 인간관계...
전시회를 위해 이혼한 부인에게 연락했을 때에도 여전히 반응이 안좋았단다.
무엇보다, 일본 여인과의 두 번째 결혼이 작품 세계에 끼친 엄청난 영향.
정말로 '우키요에'와 일본 문화와의 접촉이 결정적인 변화를 만들어 내었다고 한다.
당시 쇠퇴해가던 일본 전통 목판화의 장인들과 함께 만들어낸 작품들.
작품 아래에 찍힌 수많은 '낙관'과 작품 둘레의 다채로운 색상들이 더욱 눈길을 끈다.
해당 작품에 사용된 모든 색상과 작업의 내용을 이렇게 작품 둘레에 기록해 놓은 것.
그의 예명인 '프리덴스라이히 훈데르트바서' (본명: 프리드리히 스토바사)
= 평화롭고Friedens 풍요로운reich 곳에 흐르는 백 개Hundert의 물Wasser
= 풍화백수豊和百水
아, 그래서, 정말로 낙관에 '百水'와 '豊和百水'가 있었던거군.
훈데르트바서 Hundert Wasser = 헌드레드 워터 Hundred water = 백수百水.
스페인에 '가우디'가 있다면, 오스트리아에는 '백수(훈데르트바서)'가 있다...
그 외의 수많은 설명이나 전시회 내부의 생생한 촬영 장면은 아래 접힌 부분을 참고...
>> 접힌 부분 펼치기 >>
도슨트 설명이 끝난 후 몇 명이 졸졸 따라다니며 물었던 추가 질문.
밑그림 없이 만들 수 있다는 '내기' 때문에 시작된 테피스트리 제작.
어떻게 밑그림 없이 만들수 있냐고 질문을 던지니 직접 작품의 뒷면을 보여주면서 설명이 이어진다. 아름다운 테피스트리 뒷면에는 수많은 털실들이 굉장히 거칠게 삐죽삐죽 튀어나와있다.
일반적인 테피스트리는 십자수처럼 완벽한 밑그림(색상까지 결정되어 있음) 또는 작품과 동일한 크기의 오리지널 작품을 가지고 그대로 모방/복제하듯 제작되는데 반해, 훈데르트바서는 실제 작품보다 훨씬 작은 스케치 정도의 그림을 가지고 (완전히 밑그림이 없었던건 아님) 현지에서 고용한 굉장히 숙련된 테피스트리 직공들을 통해 이 작업을 해냈다고 한다 (백수 양반이 전체를 직접 짠것도 아님;;).
즉, 굉장한 숙련도의 장인들이 대충 형태만 있는 그의 자그마한 스케치만 보고도 그렇게 거대한 테피스트리로 '확대 복사'하여 함께 작품을 만들어 나갔던 것.
그런데도 어떻게 그처럼 다채롭고 변화무쌍한 색상이 만들어질 수 있었는지를 다시 물으니, 작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서로 협응하여 그렇게 된 것이지 시작하기 전에는 그들도 잘 몰랐으리라는 답변이 돌아온다.
게다가, 한 줄에 한 색상의 실이 아니라 무지개빛처럼 다양한 색상과 그라데이션이 들어간 실도 병행하여 썼기 때문에 저런 화려하고 오묘한, 세상에 단 1점 밖에 없는 작품이 나올 수 있었을 거라는 설명.
그렇다면, 이건 완전히 "뜨개질의 재즈jazz, 즉흥연주"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말년까지 그를 괴롭힌 질병은 다름아닌 위장병. 예민하고 까다로운 성격 뿐만 아니라,
전시회장 입구와 실내에서 상영중인 동영상에도 나왔다시피
물감 재료를 손수 만들어 사용하는 과정에서 그 재료들을 직접 맛보기도 하는 등
위생과는 거리가 멀었던 독특한 생활 습관 때문이기도 하단다.
황달은 청년 시절 거의 완치되었지만, 무엇보다, 외할머니를 비롯한 외가쪽 친척들과 함께 살던 시절
독일군에 의해 그들이 모두 몰살당하는 사건을 겪었기 때문에 엄청난 정신적 외상이 있었을 거라고.
도슨트 왈, 스페인 내전이나 세계대전 등 역사적으로 각종 전쟁을 겪은 예술가들이
보통 사람들보다 더 강렬하고 뛰어난 작품 활동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러한 정신적 충격이 예술 창작의 또다른 에너지가 되었을 것으로 추측되기도 한단다.
예술에 대한 이러한 병리적 해석은 또 없는지 물어봤지만, 듣고 있던 주위 사람들이 가세하면서
'예술가들이야 조금씩 정신적/정서적으로 이상이 있다'는 식으로 요상한 일반화가 진행되는 바람에
도슨트의 안내는 여기까지로 급 마무리... -_-;
널리 알려진 그의 스타일과는 달리, 초기와 후기의 작품들은 완전히 다른 느낌을 전해준다.
그리고, 꽤 오랫동안 '상처입고 우울한' 느낌 같은 것이 어디엔가 남아있던 그의 '자식'들은
80년대를 거쳐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색상과 형태 모두에서 독특한 안정감을 찾은 듯하다.
스스로 상처받았던 그가, 후에 상처받은 건축의 치료사로 이름을 떨쳤다는 점 또한 시사점을 남겨준다.
물론, 이 모두는 당일 현장에서 얻은 순전히 주관적인 느낌인데,
'큐레이터에 의해 하나의 정해진 스토리로 전시회가 해석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는 훈데르트바서에게는
이러한 '나름대로의 해석과 나름대로의 감동(팜플렛 발췌)'도 그닥 기분 나쁘지 않았을 것 같다. (그렇죠, 백수씨?)
◆ 3단계 : 다시 보기
1928.12.15, 오스트리아 비엔나 출생 ~ 2000.2.19 뉴질랜드에서 빈으로 향하던 배 위에서 사망.
도슨트 안내 후, 관심있는 작품을 한번씩 더 둘러보고, 동영상과 도록, 판매중인 관련 제품까지도 살펴본다.
인쇄된 사진을 보니, 그새 훌쩍 친근해진 것 같으면서도 방금 보고 나온 작품과는 낮선듯 묘한 느낌.
대도록과 엽서 등 일부 제품은 어느새 현장 매진되었고 소도록과 일부 제품만 남아있던 바야흐로 전시회 끝물.
색채의 마법사니, 건축 치료사니, 환경 운동가니, 그를 일컫는 말들이 많이 있었다.
그 각각에 대해 여러가지 느낀 바가 있었지만, 몇 시간 나름대로 다양한 방법을 통해 그의 작품을 만나고 오니
그는 내게 그런 '레이블label'이 아니라 종합적인 느낌의 어떤 '사람'으로 먼저 다가와 있다.
입구의 연대기를 보면, 사람으로서의 훈데르트바서는 1928 ~ 2000 으로 생을 마감했지만
그가 평소에 원하여 그 아래 묻힌 나무 사진에는 다시 2000 ~ 2010 이라고 표기되어 있는 것도 의미심장했다.
전시회 참관 전에는 어느 별에서 왔을지(?)도 내심 궁금했던 인물.
백수百水여, 이제 당신이 원하던 대로 튤립나무, 밤나무, 온 자연과 하나 되어 나선과 수평 속에 평온하시길...
처음 작품을 보았을 때, 형태와 색상에서 자꾸 유사성이 연상되던 염색된 세포의 모습.
도슨트나 도록의 '식물주의'라는 설명 등에서도 얼추 비슷한 개념임을 재차 확인하게 되면서
훈데르트바서의 작품과 비슷한 느낌의 "자연이 만들어낸 작품"들을 한번 찾아보았다.
(★내 멋대로 바써의 하이라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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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데르트바서의 그림들과 썸네일(작은 사진) 상태로 섞여 있으면 구분하기 힘든 것도 있다.
(믿거나 말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