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즈앤로지즈를 처음 들었던 것은 중학교 1학년 때였다. 기억이 안 날 리가 없다. 비슷한 또래들이 입문과정으로 거치는 것처럼 그 미국 양아치들의 1집은 엄청난 중독성으로 다가왔었으니까.

그런데 굳이 재론할 필요가 없는 1집의 충격 이후, 그들의 2집을 듣게 된 건 무척이나 오랜 시간이 지나서였다. 아마도 나는 1집이 너무 맘에 들었던 탓에 그들의 2집에 대해 지레 별볼일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어쩌면 1집의 좋은 기억이 엉망으로 만들어졌을지 모를 2집에 의해 깨질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확실히 몇 곡 들어봤던 2집에서 귀에 착착 감기는 노래는 없었고, 'NOVEMBER RAIN' 뮤직비디오는 당시 TV 음악 프로그램에서 줄기차게도 틀어주는 단골곡이었지만 길고 긴 러닝타임에 비추어 역시 길고 길게도 만들어진 그놈의 자뻑 뮤직비디오에서 내가 맘에 드는 장면은 보이지 않았다. 내 시선은 항상 슬래쉬가 전면에 등장하는 마지막 부분에 이르기 전에 거둬지곤 했었다.

고등학교를 올라가니 같은 반에서 안경 끼고 마른 몸에 뭔가 뻘쭘해보이는 녀석을 알게 됐다. 메탈리카와 메가데스 얘기로 서로 안면을 트게 된 녀석은 기타를 친다고 했다. 독학으로 익히고 있다나. 아 뭐 그렇구만, 하는 터였는데 어찌되었든 그 이후로 이 녀석과의 얘기에서 기타 얘기가 빠지는 걸 거의 본 적이 없었다. 정확치 않은 기억이지만 'ENTER SANDMAN'의 기타 리프를 소화해낸다는 것이 굉장한 자랑거리였던 듯 싶다. 곧 치루게 된 중간고사 때 알게 된 바지만 그 이후로도 학교 전체 성적 1등을 올랐다 조금 내려갔다를 반복하게 될 녀석에게 기타의 재능은 공부의 재능 만큼은 없었던 것이다. 어쨌든 신은 그럭저럭 공평하다.

이 녀석이 당시에 롤모델로 삼고 있었던 것이 바로 슬래쉬였다. 그의 말로 알게된 바이지만 슬래쉬는 독학으로 그정도 경지에 이르렀다 이거 아니냐였다. 그러니까 자신도 '잘하면'(그때에도 녀석은 자기 분수를 모를 만큼 뻔뻔스러운 사람이 아니었다) 가능하다는 것이 정말 꾸준하게 기타에 대한 애정을 놓지 않았던 녀석의 희망이었던 듯 싶다. 롤모델이었던 슬래쉬가 만들어낸 최고의 기타 사운드가 담긴 2집에 대한 얘기 또한 줄기차게도 했던 것 같다. 그래서 덕분에 나는 반쯤은 실망했고 반쯤은 거부했던 그 앨범을 본격적으로 듣게 됐고. 그리고 'NOVEMBER RAIN' 하나를 건져냈다. 앞의 엑슬 로즈의 저음 주절거림은 그렇다치자. 대부분이 동의하는 것처럼 이 곡의 사랑스러움은 곡을 구성하는 모든 것들이 슬래쉬의 기타 리프에 맞춰 폭발하듯 터져나오는 순간이다. 그 위력은 나이 들어도 별로 정신을 못 차린 것 같은 엑슬 로즈가 10여년 후에도 건즈앤로지즈의 간판만을 달고 1, 2집 노래들로만 소화하면서 투어를 소화하고 페스티벌에 나와도 사람들이 열광할 수 있는 그런 경지에 도달해 있다.

 

가장 유명한 것은 엘튼 존과 함께 한 공연이지만 워낙 화질 음질이 안 좋으니. 2006년에 열린 락앰링 공연에서 엑슬 로즈는 이젠 늙어서 예전의 쇳소리는 간 데 없이 둔탁한 외침과 어색하게까지 보이는 피아노 연주 속에서 곡을 이끌어간다. 그러나 레게머리를 한 엑슬 로즈, 마지막을 보라. 저 즐거운 모습, 자신이 새롭게 꾸린 팀에서 빚어낸 옛 감동에 관한 다소 마모된 재생 속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어깨와 괜히 심각해 보이던 얼굴엔 힘이 안 들어가 있고 밴드는 모두 박자를 맞춰 숨을 쉬는 장난을 하듯 즐거워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클라이맥스의 폭발이 기다리고 있다.

그 최초의 경험이 벌써 11년 전의 얘기. 자신감 없는 기타리스트였던 그 친구가 드디어 오늘 결혼을 했다. 특유의 뻘쭘한 모습 그대로(이 부분은 그의 아내 또한 마찬가지였다는 점에서 꽤 잘 어울리는 커플이었다) 식은 치뤄졌고 기억을 열심히 더듬어야 그 자리를 집어낼 수 있었던 얼마 안되는 동창들과 그가 법원에서 새롭게 맺은 친구들과 함께 박수를 쳤다.

 

무엇보다도 좋았던 것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예식장을 일하러 간 게 아니라 먹으러 갔다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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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07-12-03 0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건스앤로지스의 'Don't cry'는 별로 안좋아하시나요? 마지막의 길고도 긴 호흡에 감탄했더랬어요. 물론, 저는 그 노래가 주는 '서정성'이 좋았지만요.

'November Rain'은 정말 너무 길어요. 휴~

hallonin 2007-12-04 0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에 바이브 끄는 거 곧잘 흉내내는 패거리가 있었죠....

유부남 2007-12-12 2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오우, 나에게 이런 선물을.. 감사. 나는 몰디브에서 무사히 귀환하고 이런 저런 일정을 마치고 (네가 이미 보았다시피) 어여쁜 와이프와 함께 우리의 신혼집에서 짐정리를 하고 있다. 어찌 아니, 언젠가 내가 노벰버레인의 솔로를 멋들어지게 칠 수 있을지..(솔직히 얘기하자면, 노벰버레인의 솔로를 얼추 흉내내는 것은 지금의 내 보잘것 없는 기타실력으로도 얼마간의 시간만 있으면 어려운 일은 아냐.ㅋ)
 

물론 갑작스럽게 김연아가 생각난 것은 아니었다. 브랜드 파워 1위, 역대 최고 점수 등등 차례로 세워지는 간판들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녀의 표정이 견지하고 있는 선천적 무감함이 그녀의 냉정한 아우라를 지켜주고 있는 것처럼(그리고 수많은 승냥이들이 나이값을 못하고 그녀를 누님이라고 부르는 이유) 그녀의 기술적 바탕은 (미세한)부분적 빈약함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충실하게 다져져 있으며 그 표현력에 있어선 나이를 뛰어넘는 발군의 경지에 다다러 있다고 인정하고 있던 나는 언젠가는 그녀에 대한 주의를 던져줘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터였다. 그러니까 이 연상은 빅뱅과 장근석(오, 세상에...)이 슬슬 좋아지고 있다는 것에 대한 반발로서의 정치적 꼼수는 아니었던 것이다(그렇다!).

 

[천원돌파 그렌라간]은 훌륭했다. 이 시대착오인 것처럼 시청자를 속이면서 시작했던 열혈로봇물은 단순한 로봇물 내러티브에 묶이는 것을 거부하면서 인간에 대한 지독한 긍정론을 장르 특유의 알레고리를 통해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그렌라간]이 서사적으로 신선했던 것은 기존 로봇물들의 키워드와 매너리즘에 가까운 구조를 그대로 가져오면서도 놀라울 정도의 속도감으로 전개를 밀어부쳤다는 점이었다. 물론 이것은 방송국 사정이라는 경제논리에 의해 이뤄진 바이긴 하지만 그 효과는 강렬했다. 또한 동시에 감동의 코드화 또한 확인 할 수 있었던 것. 약속된 서사적 스위치들과 해당 효과들은 이미 기존 로봇물에 학습된 이들에겐 익숙했던 흐름인 것이라, 이 부분에서 열혈 로봇물을 접했던 이와 접하지 않았던 이의 괴리감이 드러나기도 했다. 즉슨 후자들의 [그렌라간]에 대한 비판은 주로 감정의 인과가 너무 갑작스럽다는 것이었다. 그 비판은 이제는 거의 선택의 영역(소위 쉬운 말로 취향문제라고 불리는)에 들어가버린 것이기 때문에 납득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로 잠정지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지자들의 코드적 긍정론에도 불구하고 편당 30분이 채 안되는 시간적 한계 및 스토리의 극단적인 압축성이 빚어낸 어색한 순간이 가끔씩 돌출되어 튀어나오는 것을 막을 순 없었다.

그러나 비판들에도 불구하고 [그렌라간]은 주제를 향한 거침없는 진행에 있어서도 빛난다. 항상 세기말을 꿈꾸는 것처럼 모종의 트렌드로 떠도는 인간비관론과 세계멸망에 대한 어두운 매혹들로 가득한 온갖 문화상품들(저패니메이션에도 지치지 않고 적용되는)의 경향과는 정반대로 의지의 긍정적 힘을 설파하는 [그렌라간]은 뻔뻔스러울 정도의 스케일로 이야기를 밀어부치면서 인간의 어리석음에 천착하는 자세 자체가 세계를 마모시키고 있다고 얘기한다. 특히 1화의 오프닝은 2쿨 26화 전체에 걸친 긴 낚시를 성공적으로 수행함과 동시에 마지막에 보여지는 의미의 역전으로 [천원돌파 그렌라간]의 인간 긍정론에 힘을 보태준다. 그 대책없게까지 보이는 낙관론은 너무도 당당해서 날선 회의주의자들로 하여금 실망시키지 않고 깔 수 있는 소재를 마련해주겠지만, 혹여나 있을 불쾌함에도 불구하고 [그렌라간]이 [프리크리] 이후 자신들의 3기 색깔을 정립시킨 가이낙스 특유의 넘쳐나는 에너지와 장르 전통적인 쾌감으로 가득 차 있음을 부정하긴 힘들 것이다.


[흑의 계약자]는 다소 노골적으로 얘기하자면 전체적으로는 시간낭비에 가까운 작품이었다(그 멋진 작화 퀄리티가 더욱 안타깝게 느껴질 정도로). 충분히 진중하게 풀어갈 수도 있는 에피소드들이 2부 한시간 분량으로 압축되는 동안 손실이 너무 컸다. 그러나 물론 여기서도 빛나는(혹은 검은색보다 어두워서 돋보이는) 부분들이 자리하고 있다. 다만 그 순간을 기다리기까진 버려야 할 것들이 많다는 것이 문제다.

 

사로드와 산토르의 결합에 물린 소닉스의 아니마는 영 맛을 못 보여줬다. 그러나 자비앙은 놀라울 정도의 즐거움을 선사해줬으며 엠프리스는 그와 동등, 혹은 그를 넘어서는 효과를 발휘했다. 그러나 엠프리스의 힘에도 불구하고 예상외였던 자비앙의 멋드러진 탁월함이 역시 기억에 남는다.

그 안에서 발견한 것은 로시니였다. 변변찮은 지식으로 몇 편의 오페라를 만든 작곡가로만 기억하던 로시니의 실내악곡들이 담긴 이 앨범이 무심하게 집어져 메리디안 속으로 빨려들어가서 그 몸에 담고 있던 노래를 빚어내기 시작했을 때, 소리가 빛 속을 걸어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아름다움. 놀라운 순간은 정말 예상치 못하게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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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amX 2007-12-02 2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 만원을 돌파합시다.

hallonin 2007-12-03 0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선 천원부터 돌파하고.
 

http://leegy.egloos.com/3899785

착각을 많이 한 건지 자신을 속이고 싶었던 건지 어느 쪽이든 결론적으론 헛소리인 강명석씨의 원더걸스 현상 분석에 대한 비판.

http://leegy.egloos.com/3938261

박진영이 바라본 텔미 현상. 박진영의 말을 토대로 하자면 생산자 수요층 양쪽에 버티고 있는 중년의 힘이라는 거.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253147.html

대강의 추이를 종합한 결론. 로리콘 문화의 제도권 진입에 중년의 정치적 경제적 좌절의 반동이 작용했다는 것.

 

 

얼마 전에 동창놈들이랑 술자리를 가졌을 때 텔미 얘기가 나왔는데, 텔미 열풍이 로리콘 현상의 영역에 속한다는 결론에 대해 별 거부감들은 없었습니다. 그때 나왔던 인상 깊었던 한마디. "그래도 모두가 다 좋아해서 다행이야...." 모두가 맛이 가 있어서 다행이야 히히.

암튼 요즘 드는 생각은 테엘미 테엘미 테테테테테 헉헉~ 하는 사람들이 하루히가 내용이 없다고 까면 좀 웃길 거 같다는 거.

아 완전 덕후들의 천지가 되가고 있어. 뭐 정확하게 구분하자면 아이돌 덕후랑 애니 덕후는 또 다른 인종들인데(중얼중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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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7-11-28 1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끔 텔(Tell)을 다른 영어단어를 넣어 노래부르는 덕후들도 있더군요..
(ㄸ나 F로 시작하는 걸로요..허허허)

hallonin 2007-11-29 16: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 즐겨 하던 짓거리네요.

Mephistopheles 2007-11-29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이퍼는 뒤늦다 하시지만 앞서가시는 분이셨군요.^^
 

잠이 무엇보다 좋은 것은 단순히 눈꺼풀을 덮는 수고만으로 주체없이 고통스러울 시간을 단축시켜준다는 점이다. 그리고 중간에 현실의 싸구려 믹싱, 열성 복제된 라엘리안풍의 외우주적 계시, 미래 지향적 몽타주를 빙자한 묻혀진 과거 탐색, 추억의 공포영화 짜집기 모음 등등과 같은 모험을 가끔씩 제공해준다.

한바퀴 다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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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한다는 말은 때론 오만으로 비춰진다. 아니, 대부분의 경우 그 표현은 오만에 가깝다. 타인을 완전하게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고, 오래 전부터 현대라는 기이한 강박 속에서 존재해야할 우리 팔자로는 동의하면서 살고 있지 않나. 결국 마지막에 위안을 가져오는 것은 자기자신이다 등등.

그러나 이해라는 행위는, 그러니까 표현이 아니라 행위는, 상대방과 나자신을 동일시하고자 하는 노력이다. 상대를 알고 받아들이며 그이의 입장에서 같이 고민하고 헤쳐나가고자 하는 행동의 초석이다. 그러니까 다시 한 번 얘기하자면 표현이 아니라 행위다. 그래서 그 끝에 조심스럽게 이해하고 있다, 라는 말이 비로소 나올 때쯤이면 발화자 또한 힘들게 고민하며 겨우 내놓는 말이다. 왜냐하면 발화자 또한 그 표현의 두려울 정도의 파괴력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완전한 일치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차이점들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수용과 인내는 공존의 의지다.

이해는 의지를 바탕으로 하여, 연쇄를 위해 필요하다. 감정, 앎, 그리고 행동. 이해는 모든 창조에 앞서 우선되야 할 조건이다. 이해라는 행위는 그래서 근본적으로 중요하다.

그러니 가끔씩 이해해서 뭐에 쓸 거냐는 말을 들으면 허탈해질 수밖에 없다. 그 말에선 내가 혹여 비춰낼지도 모를 오만에 대한 잔인한 방어기제가 느껴진다. 그 태생처럼 한계지어진 말은 '이해'라는 표현에 대한 부정뿐이 아니라 행위와 노력 자체에 대한 부정까지도 아우르기 때문에, 그 발언이 나에게로 향할 때 결코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그 의도하지 않음에 의한 상처는 크다. 굳이 마음을 물화해서 표현하자면, 혹은 마음을 질량과 숫자의 영역으로 치환하면(그렇게 하지라도 않으면 마음은 더욱 불확정적으로 되버리기 때문이다), 말은 마음을 조금씩 깎고 부숴버린다.

 

그러나 말은 그 반대도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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