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네스터를 죽이고 싶어한다
카르멘 포사다스 지음, 권도희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5월
평점 :
절판


독서경향이 점점 넓어지고 있다. 분명 고무적인 일이리라. 사실 고백하자면, 본래 소설을 많이 읽는 편이 아니었다. 최소한 작년까지는 인문학이나 경제&경영도서, 자기계발서, 기독도서 등의 부류들로 독서경향이 한정되어왔다. 소설이라는 장르가 내 머리와 가슴을 크게 두들기기 시작한 것은 금년부터가 아닌 듯 싶다. 그 어떤 자기계발서보다 깊이 있는 소설 한 권이 더욱 웅숭깊은 삶과 지혜에 대한 통찰을 비춰줄 때가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 시점부터다. 

  이런 추세에 기름을 붓는 심정으로 최근들어 편식하지 않고 다양한 독서를 즐기려 노력하고 있다. 주로 온라인서점 예스24에서 책을 구매하는 편인데 베스트셀러 중에서 반감이 생기지 않는 책과 오늘의 책 메뉴 중에서 구미가 당기는 책들이 대부분 내 지갑의 문을 열고 있는 형편이다. 더욱이 최근 한국과 일본을 넘어 동유럽소설까지 내 독서성향이 침투하고 있다. 얼마 전에 읽은 『차가운 피부』는 기대 이상의 강한 인상을 심어줬으며 최근 일간지에 대대적인 마케팅을 펼치고 있는 『바다의 성당』은 이미 구매하여 책장 속에서 읽히기를 기다리고 있는 책 중 하나이다. 또한 제목에서부터 강한 호감을 불러 일으켰던 『모두가 네스터를 죽이고 싶어한다』는 내 의지와 결정이 아닌, 블로그 이웃인 린드그렌님으로부터 책여행을 통해 소개받은 경우이기도 하다.

  『모두가 네스터를 죽이고 싶어한다』는 철저한 추리소설이다. 하지만 여느 추리소설과는 달리 사건을 해결해가는 형사나 탐정의 존재는 없다.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네스터를 비롯하여 사건과 관계된 몇몇 중심인물들의 이야기로만 추리의 서사가 완성된다. 복잡한 플롯이나 반전의 연속도 그리 크지 않다. 추리소설이되, 나름대로 차분하게 이야기가 진행되며 각 등장인물들의 독특한 인간상 묘사를 재치있고 흥미롭게 그린 것이 이 소설의 매력이라면 매력일 것이다.

  뜻하지 않게 냉동고 안에 갇혀 죽게되는 네스터의 현재의 시간에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사건이 벌어진 동일한 시간과 장소에 있던 6명의 인물들. 소설의 시간은 과거로 회귀하면서 각 인물들과 네스터와의 인과관계가 마치 퍼즐을 조합하듯이 정리된다. 소설의 서사는 <네스터의 죽음>이라는 현재의 사건 결과가 과거의 사건의 원인으로 이동하면서 뒤엉켰던 실타래가 풀어지듯 인과성의 순서로 재정리된다. 하지만 결코 복잡하지는 않다. 

  <네 개의 T> -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이에 대한 설명은 논하지 않기로 함 - 의 존재와 네스터와의 상관관계가 이 소설의 핵심 키워드라 할 수 있다. 작가는 각 인물들을 다양하고도 섬서하게 묘사하고 있다. 호모와 동성애, 부정부패, 욕망과 불륜 등 지우고 싶은 과거와 현재의 비밀에 압박을 받고 있는 인간상들의 묘사는 흥미롭다. 각 인물들은 '사실이 알려지면 어떻하지?', '누군가가 이 비밀을 알고 있다면?' 이라 생각하며 자기 자신의 방어에 대해 사유한다. 이러한 사유는 보다 더 진전된 사악한 마음과 오해와 선입견이 결합되어 어두운 인간상을 형성한다.

  과연 그들의 생각은 옳았던 것일까? 비밀에 대한 발설 염려와 그것을 알고 있는 자의 발설 의지가 일치했던 것일까? 잘못된 인식과 지나친 이기심과 자기방어, 그리고 인생에서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는 오해와 편견이라는 단어들.. 인간이라는 존재를 부정적으로 수식하는 단어들을 음미하며 소설을 마지막 장을 덮는다.

  <아가사 크리스티>적인 냄새를 물씬 풍기는 이 소설은 추리소설로서 크게 전복적이거나 크게 두근거리지는 않는다. 하지만 극도의 이기적 자기방어를 비교적 섬세하게 그렸다는 점에서 흥미있다. 추리소설이라는 기계적인 구성에만 초점이 맞춰진 것이 아닌, 보다 철학적이고 인간의 내면적인 심리묘사가 돋보이는 꽤 흥미있는 소설이라 할 만하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모든 <비밀>에 대해 알 필요는 없다. 비밀에 대한 인간의 원초적 호기심을 부인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굳이 알 필요가 없는 것을 알려고 할 때에 인생사는 꼬이고 문제가 발생한다. 이 소설이 주는 교훈을 <모르는 게 약이다!>라고 주장한다면 너무 쌩뚱맞을까? 하지만 우리네 인생에서 모르는 게 약이되는 경우가 매우 많다는 것은 정말로 정말로 정말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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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피부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1
알베르트 산체스 피뇰 지음, 유혜경 옮김 / 들녘 / 2007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 스포일러 일체 없음. 안심하고 읽어도 되는 서평임.

인간은 어떤 종족인가? 쉬운 질문일 수 있지만 질문의 의도를 파악한 채 반추하면 쉽지 않은 질문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인간에 대한 연구는 인류의 역사와 함께 오랜 시간동안 진행되어 왔다. 심리학, 미학, 철학, 의학 등의 다양한 학문이 인간을 대상으로 하고 있으며 수많은 종교들도 인간을 천착한다. 불교는 인간이 깊은 수련의 과정을 거쳐 신이 되는 종교이며, 기독교는 신이 인간을 찾아나선 종교이기도 하다. 그만큼 인간이란 종족은 만물의 영장인 동시에 이 우주에서 가장 뜨거운 감자일 수 밖에 없는 고귀한 존재인 것이다. 

  인간이 지향하는 정신적 가치 중에서 가장 찬연하게 빛나는 것이 무엇일까? 사람마다 이에 대한 답변은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지만, 인류의 교육과 종교 등에서 드러난 보편적 이상을 정리하면 <사랑>이라는 위대한 가치가 아닐까 싶다. 인간을 제외한 지구상의 그 어떤 동물도 <사랑>에 민감하며, 갈구하며, 구속된 종족은 없다. 모든 교육과 이상과 종교는 <사랑>이라는 거대한 카테고리 안에서 귀결된다. <사랑>은 동기에 질문하지 않으며, 인과관계로 설명될 수 없는 절대선이다.  

  그렇다면 사랑과 철저하게 배치되는 개념은 무엇일까? 미움이나 분노? 아니면 질투? 사실 미움이나 분노, 질투 등의 개념은 사랑의 정의를 외연적인 의미로만 해석했을 때 가능한 반의어들이다. 사랑의 웅숭깊은 내면적 정의에 대한 명확한 반의어는 <두려움>이다. 인간은 사랑이 결핍되었을 때 두려워하며, 두려움이 극대화되었을 때에 사랑이 결락된다. 사랑이 충만한 인간은 두려울 수 없고, 두려움이 충만한 인간은 사랑이 들어갈 자리가 없는 것이다. 즉, 인간은 자기 앞에 주어진 우주의 시공간에서 사랑과 두려움 사이를 오가며 살아가는 존재인 것이다. 

  인간은 고독한 존재이기도 하다. <두려움>의 친구격인 <외로움>은 인간을 고독하게 하는 원인이다. 고독한 인간은 사회성 결핍에 빠지며 극도의 감정 불조절 인간으로 추락하기도 한다. 극도의 고독은 종국에는 폭력성과 잔인함으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적잖이 충격적이고 폐륜적인 사건들이 여기서 연유하기도 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심한 고독으로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지구상에 66억의 인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만 있고 너와 우리가 있다는 것을 모르고 살아가는 이들이 적지 않은 것이다. 이는 인류의 불행이기도 하며 <불관용>이라는 또다른 성질의 절대악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렇다면 절대선인 사랑을 지향하며 갈구하는 인간이 과연 선한 존재라 정의될 수 있을까? 답변을 함에 있어 꽤나 머뭇거림을 제공하는 질문이다. 나 또한 인간종족으로 이 세상에 태어났지만 내가 몸담고 있는 종족이 선하다고 말할 수 없는 처지이기 때문이다. 과학의 발전과 더불어 부의 개념이 정립되어가면서 경쟁논리가 모든 것을 지배하게 되었고 인간은 점차 인간 본연의 모습을 잃어가고 있다. 물질만능주의의 만연은 인간성을 상실케 했고 극도의 이기심과 거짓을 양산하였다. 전쟁과 테러, 성적 타락과 가정의 파괴, 양심의 실종 등 인류는 온갖 부패함으로 가득차 있다. 인간이 아닌 비인간, 또는 비인간이 아닌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한 몸부림은 지금도 냉혹하게 진행되고 있다. 

  알베르트 산채스 피뇰의 『차가운 피부』는 이러한 인간의 사랑과 고독, 미움과 두려움, 잔인함과 폭력성을 깊이 있고 수준 높게 그리고 있는 소설이다. 저자는 그의 처녀작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능숙한 전개로 원초적 인간의 내면상을 통찰하고 있다. 세상에 절망하고 소통을 거부한 채 남극의 외딴 섬에 도착한 한 남성화자를 통해 절대 고독과 소통 불가함이 설정된다. 원초적인 공포에 앞선 두려움과 그로테스크한 상황에서 뜻하지 않게 벌어지는 사랑과 미움,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내재된 잔인함과 폭력성 등 인간의 악한 내포적 성향들이 다채롭게 출현하고 있다. 

  <차가운 피부>는 징그럽다 못해 섬뜩하다 . 소설을 읽은 후 차가운 피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되면 닭살이 돋을 정도로 섬뜩하다. 한 남자의 1년여의 섬에서의 생활을 통해 한 인간의 고독이 외로움을 만들고, 그 외로움의 잘못된 전이가 기괴한 사랑의 감정을 만들며, 이에 소통의 불가능이 합쳐지면서 미움과 비인간성의 극대화로 실현되는 것을 특이한 소재와 공포스러운 분위기의 연출로 그려낸 수작이라 할 만하다.  

  제목 <차가운 피부>를 다시 한번 생각했다. 사실 인간의 피부는 전혀 차갑지 않다. 오히려 따뜻한 피부다. 인간은 위대한 온혈동물의 포유류로서 가장 발달된 두뇌구조를 갖고 있는 직립종족이다. 하지만 때와 상황에 따라 가장 차가운 마음을 지닌, 냉혈한 종족이기도 하다. 아마도 알베르트 산채스 피뇰은 현세에 존재하지 않는 비현실적인 가상의 <차가운 피부>를 통해 현실 속에서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냉혈한 <차가운 인간>종족의 본성을 그림으로써 인류에게 얼마나 <사랑>이 결락되었는지를 말하고자 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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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석제의 이야기 박물지, 유쾌한 발견
성석제 지음 / 하늘연못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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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성석제는 섬세한 관찰력을 가진 작가다. 그 관찰력이라는 것이 제법 흥미롭다. 옆집 강아지부터 여행중의 맛집 간판의 문구, 방문한 치과의사의 외모, 과거 명시의 어느 한 구절에 이르기까지 그의 관찰력은 다양함의 다양함의 다양함의 쌩뚱함이다. 일상에서 놓치기 쉬운 것을 끄집어 내서 글의 재료로 삼을 뿐만 아니라 적잖은 지식의 내공을 풀어놓기도 한다. 그의 글은 엉뚱하기도 하고 유쾌한 면도 있으며 신선하면서 쌩뚱맞다. 순간적으로 발견한 것들과 세인들이 잘 알지 못하는 상식 이상의 지식들을 수다스럽게 이야기한다. 『성석제의 이야기 박물지, 유쾌한 발견』도 이러한 성석제표 브랜드를 여과없이 보여주는 책이다. 

  이미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을 통하여 성석제가 굉장히 뛰어난 관찰력을 가진 작가라는 점을 인지하고 있었다. 소소한 일상에 스쳐 지나가는 것들을 잊지 않고 메모하면서 활자로 풀어놓는다. 문체 또한 유쾌하고 유머러스하기 그지 없어 독자는 그의 글에서 지루함을 느낄 틈이 없이 <재미>있어 한다. 그의 최근 출간작인 『성석제의 이야기 박물지』는 바로 이러한 그의 특질에 더하여 범박한 지식을 총망라한, 그야말로 책속의 책이라 할 만하다.  

  「이야기의 힘」, 「관점에 따라 다르다」, 「오후의 국수 한 그릇」, 「문자의 예술」, 총 4개의 큰 카테고리를 구분하여 수없이 많은 내용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마치 코믹한 백과사전이라 정의할 만큼 그의 경험담과 지식이 특유의 유머러스한 필치에 양념되어 독자들을 즐겁게 해주고 있다. 특히 「오후의 국수 한 그릇」편에서는 음식의 기원 및 맛나는 음식에 대한 소개 등의 풍성한 음식에 대한 경험과 정보를 얘기하고 있어 읽는 내내 입 안에서 침샘의 활성화를 일으키기도 한다. 더불어 「문자의 예술」편에서는 재미있는 <문자>이야기를 다양하게 들려주고 있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문자의 예술」편을 꽤 흥미있게 읽었다. 성석제가 언급한대로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한글은 세계 최고수준의 문자라 할 만하다. 한글의 과학성과 예술성은 이미 국내외의 저명한 전문가들로부터 공감되고 있다. 세계의 공용어인 영어가 동사가 발달한 언어라면, 한국어는 형용사가 발달한 언어이다. 영어를 한국어로 번역하는 데에는 큰 어려움이 없으나, 한국어를 영어로 번역하는 데에는 적잖은 어려움이 있다는 것이 번역계의 정설이다. 한국어의 깊이있고 다채로운 형용문구를 영어의 어휘로는 충분히 소화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뛰어난 문자를 지녔음에도 노벨문학상을 단 한 번도 배출하지 못하고 있는 점은 씁쓸함을 넘어서서 억울하기까지 하다. 번역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국력의 신장과 자국문학의 사랑을 고양시킬 수 밖에 없는 노릇이리라. 

   문학은 다양한 기능을 독자에게 제공한다. 비단 문학의 교화적 기능이니 쾌락적 기능이니 하는 전문적 문구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문학은 오롯하게 인간을 자극한다. 성석제의 두 권의 책을 읽으면서 그의 글이 독자들에게 부담 없고 걸죽하게 <재미>와 <지식>을 제공한다는 점을 인정했다. 그의 글은 가벼움과 무거움의 높낮이가 교차되지 않으며, 냉정함이나 강렬한 느낌도 추구하지 않는다. 전복적이며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럼에도 <재미>가 있다. 그것이 성석제표 활자의 매력이자 강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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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이 멈추는 곳, 라오스 - End of Pacific Series 2
오소희 지음 / 에이지21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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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여행이란, 내가 있던 자리를 떠나 내가 있던 자리를 보는 것이다."

이 얼마나 멋진 말인가? 여행에 대해 이만큼 명확하고 본질적인 정의를 내릴 수 있는 말이 어디 있을 수 있을까? 여행의 외연적 의미에서부터 내포적 본질에까지 아우르는 깊은 통찰적 정의라 할 수 있는 명문장이다. 어린 아들과 함께 세계의 오지를 탐구하는 여행가이자 블로거 오소희씨는 자신이 있던 자리를 떠나서 자신이 있던 자리를 깊이있고 냉철하게 보기를 좋아하는, 바로 그런 여자다.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겠지!』 로 처음 만난 그녀의 여행수기는 충격, 그 자체였다. 세 살 배기 어린 아들을 데리고 한 달동안 터키의 오지 곳곳을 수색(?)하고 다닌 점도 대단하지만, 무엇보다 여느 여행서적과 달리 여행에 대한 물리적이며 기술적인 설명 외의 웅숭깊은 삶과 인간에 대한 통찰을 보여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여행수기는 그저 다른 나라의 지리와 문화를 둘러보는 것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우주 탐구를 보여준다. 그녀의 독특한 여행세계에 책을 통해 나도 모르게 빠져들어서 어느새 그녀의 팬이 되어 버렸다. 매일같이 그녀의 블로그에 들어가 새로운 흔적을 확인하지 않으면 좀이 쑤실 수 밖에 없는 정도에 이르렀다. 이러한 팬의 입장에서 이번에 출시된 그녀의 두 번째 신간은 내 머리속의 도파민과 베타-엔도르핀 호르몬의 분비량을 촉진시켰을 뿐만 아니라 이미 읽기가 예약되어 있는 적잖은 도서들에 새치기하여 우선 구독하는 것을 손쉽게 결정하게 했다. 

  『욕망이 멈추는 곳, 라오스』 는 전작에 비해 사뭇 다른 느낌을 준다. 사진이 상대적으로 많이 실렸고, 설명보다는 시적으로 표현한 부분이 많다. 총 분량이 대략 300페이지 정도의 평범한 두께지만, 사진은 많고 글자는 적어서 완독하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완독을 한 후에 느낀 것이지만, 라오스가 갖는 소박함과 안정감, 고즈넉함과 모자람 등을 표현함에 있어 장황한 설명보다는 어쩌면 짧고 간결한 글귀들의 시적 표현이 더 어울릴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저자의 의도와 내 느낌이 부합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책 속에 빠져 들어 읽었다는 점에서는 전작과의 차이가 없다고 하겠다.  

  라오스가 어떤 나라인가? 연간 3억불의 원조를 받는 세계 최빈국으로서 초등학교 수료율은 41%, 15세 이상의 문맹률은 43% 수준인 극도의 후진국이다. 유럽이나 미주여행이 해외여행의 교과서가 되어가고 있는 한국의 해외여행기호에서 라오스라는 국가는 쌩뚱맞은 선택일 수 있다. 그곳에서 과연 무엇을 보고 배울 수 있는가?, 라는 냉소적 의문이 제기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견해는 저자가 언급한 여행의 목적과 동기에 철저하게 배치된다. 여행이라는 스승을 통해, 삶에 대해 더 낮아질 것을 배우게 되며, 엎드려 고개를 숙이면 더 많은 것이 보인다는 것이 저자 오소희씨의 여행철학이다. 낮추면 보인다는 것이다. 
지독하게 여행을 떠나고 싶어질 때는 언제나 더 이상 내가 나를 낮추고 있지 않을 때였고, 스스로 그 직립이 피로할 때였고, 피로함으로 인해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겠지』 중에서> 

  라오스는 매우 조용한 곳이다. 시간의 속도가 더디게 흘러가는 곳이다. 바쁘지 않고, 바쁠 이유가 없고, 바쁨이 무언지도 모르는 곳처럼 보인다. 풍선이라는 작은 놀이기구 하나에도 새로움을 느끼며 흥분하는 아이들, 주고자 하는 돈과 받으려 하는 돈의 높낮이가 상하로 출렁거리는 최소한의 경제적 행위에도 익숙지 않은 시장상인들, 두 시간에 한 번씩 고장나는 버스를 타며 몇 시간을 이동해도 서두르거나 조급해 하지 않는 사람들, 상대방이 준비되지 않을 때 자발적으로 물러날 줄 아는 사람들, 개와 고양이까지도 조용하고 착한 그곳.. 라오스는 바로 그런 곳이다.  

  라오스의 남쪽과 북쪽의 지방색이 확연하게 구별되는 것이 흥미롭다. 남쪽에 비해 북쪽에 대도시가 많고 경제적 활동이 활발하다. 한결같이 순수하고 고요함에 가득차 있는 남쪽 지역과는 달리 북쪽으로 올라가면서 원하는 것보다 원하지 않은 것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 사반나켓은 여행자가 봉이 될 가능성이 있는 곳이며, 수도 비엔티엔은 대부분의 여행객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좋지 않은 곳(?)이다. 제법 북쪽에 위치한 방비엥이라는 작은 마을은 사랑하는 자와 싫어하는 자로 여행객들이 양분되는 두개의 얼굴을 지닌 곳이기도 하다. 아름다운 자연과 볼거리, 할거리들이 적잖은 방비엥이 해외의 수많은 배낭여행가들의 침범으로 인해 그 영혼을 잃어가는 모습은 씁쓸하기만 하다.
쏭강이 흐르는, 아름다운 석회 카르스트 가운데 위치한 이 작은 마을을 방문하는 여행자들은 둘로 나뉜다. 이곳을 사랑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으로.   <p170> 

  역시나 저자의 자녀교육은 철저하다. 축구공을 강력한 소통의 무기로 들고간 중빈이는 남부 시골에서 그곳 아이들과 쉽게 축구를 하며 교제를 이룬다. 하지만 라오스 4대 도시 가운데 하나인 사반나켓에서는 중빈이의 축구공에 신기해하는 아이도, 관심을 가져주는 아이도 없다. 내가 놀 수 있는 아이는 없어, 라며 결론 짓는 중빈에게 저자는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준 뒤 자전거에 몸을 실은 채 자리를 비켜준다. 용기내어 말을 걸어보고, 축구공을 굴려보아도 돌아오는 것은 비웃음뿐이다. 중빈의 얼굴에 울기 직전의 모습이 역력하지만 저자는 자녀의 사회성 학습에 절대 개입하지 않은 채 관찰자로만 일관한다. 중빈의 접촉 시도와 상대방의 무시가 반복의 반복을 거듭하던 끝에 아이들중 나이 많은 여자아이의 종용으로 축구공은 중빈과 아이들 사이를 오가게 되고 사회성 학습은 성공으로 마무리 짓는다. 무려 1시간 30분의 지리한 긴장감이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자신의 힘으로 멋지게 성취한 중빈에게 돌아온 면류관은 엄마의 안아줌과 "JB!", "JB!" 라고 외치는 아이들의 환호성이다. 다른 나라에서 다른 생김새를 지닌 공동체 속으로 순전히 자신의 힘으로 침투한 중빈의 용기와 인내, 그리고 그것을 이룬 성취감은 훗날 그의 당찬 미래의 보증수표가 될 것임을 믿는다.
아이가 해낼 수 없는 것을 요구하는 것은 부모의 무지이자 욕심이다. 그러나 아이가 해낼 수 있는 것을 기다리지 못하는 것은 부모의 무능력이다.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겠지!』 중에서> 

  나는 생각했다. 내가 왜 그토록 그녀의 여행수기에 매료를 느끼는 지를 말이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그것은 나의 독서 기호와 그녀의 여행 목적이 완벽하게 부합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문학을 위시한 다양한 장르의 도서를 읽는 내게, 독서는 인간 탐구의 또다른 성격의 학습으로 정의된다. 책 안에서 다양한 인간상들을 만나면서 인생과 사랑 등의 다양한 삶의 본질적 가치들을 목도할 때면 내 전두엽은 활발하게 작동하고 내 마음속의 감성량은 충만하게 흘러 넘친다. 그녀의 여행에세이도 철저하게 인간과 삶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자연경관의 웅장함이나 문화재의 화려함보다는 나와 다른 너에 대한 깊은 천착을 거듭한다. 특별하지 않아 놓치기 쉬운 소소한 것에서 대단한 것을 이끌어 내며, 보편적 정서와 상식을 뒤엎어 한단계 높은 차원에서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키기도 하며, 아무 생각 없이 동일한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을 약간 다르게 봄으로써 우주의 이치를 멋지게 해석하기도 한다. 깊은 사색에서 오는 주옥같은 언어로 정제된 독백적 문장들. 내가 그녀의 글귀를 좋아하는 이유다.  

  한 명의 애독자로서 앞으로 저자의 후속 신간들이 봇물 터지길 기대한다. 저자의 신간이 늘어나고 책의 판매량이 증가할 때마다 중빈이의 지성과 감성의 수치도 지수적으로 증가하길 축복하는 바이다. 

 

[인상깊은 구절]


현명함이란, 가진 것에 시선을 고정시킬 때 찾아온다.
그러나 시선을 제대로 고정시킬 수 있는 힘은
세상에 널린, 내게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것들을
오랫동안 두루두루 바라본 뒤에야 얻어진다.
젊음과 현명함이 공존할 수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p242>
 
남자들은 사랑을 <한다>.
면도를 <하고> 사업을 <하고> 산책을 <하>듯.
그러나 여자들은 사랑에 생을 건다.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녀의 전부가 <된다>.
호흡을 하고 걸음을 내딛는 순간순간이 사랑과 결부된다.
사랑이 있는 여자와 없는 여자는 같은 여자여도 다른 여자이다.
대부분의 여자들이 그렇게 진화되어 왔다.
일단 사랑에 빠지면 다른 것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도록.
오직 사랑하는 대상만이 존재하도록.
그렇게 진화되어 오직 않았다면
유난히 긴 양육기간을 필요로 하는 인간은
더러운 기저귀를 떼기도 전에 모성으로부터 버림받았을 것이다.
<p243>

모든 소망에는 그것을 높게 하거나 낮게 하는 장애가 있다.
생의 절반을 지나 엄밀하게 생각해 보니.
소망을 이룰 때까지
모든 장애는 단지 변명의 크고 작은 다른 이름이었다.
<p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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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9-05 16: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고 누르고 가요, 다윗님^^
 
신도 버린 사람들
나렌드라 자다브 지음, 강수정 옮김 / 김영사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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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등학교 시절이다. 세계사 공부를 할 때에 소위 '밑줄 짝~'이라는 교육문구가 강조되면서 시험마다 출제되는 중요한 용어가 있었다. 바로 '카스트 제도'라는 것이다. 전 세계에서 인도만이 갖고 있는 유일무이한 제도로서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계급이 정해져있고 그 계급에 할당된 정도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3,000년 전에 탄생한 그 제도가 21세기에 이른 작금의 시대까지 한 국가의 정신적, 이념적 체계를 지배하고 있다는 생각에 혀를 내둘렀던 기억이 생생하다. 

  카스트 제도라는 것이 무엇인가? 인간을 크게 네 가지의 계급으로 나누는데 최상위 계층은 '브라만'으로 사제들이고, 군인계층 '크샤트리아'가 그 다음이며, '바이샤'라는 계층은 상인이나 평민이 속하고, 마지막으로 최하위 카스트인 '수드라'는 노예들이 속한다는 계급 제도다. 더욱이 아웃카스트라고 해서 카스트 안에 들지 못하는 계층이 있는데 '불가촉천민'으로 불리는 달리트가 그들이다. 현재 인도에 1억 7천만명의 불가촉천민이 있다고 한다. '불가촉천민'의 개념은 접촉을 하지 말아야 하는 천한 계층이라는 의미라고 하니 명칭만 들어도 그들의 일상을 대략 유추해 볼 수 있으리라.  

  사실 카스트 제도는 인도의 독립 이후 1950년 인도헌법에서 법적으로 폐지되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인도 사회에서 카스트는 엄연히 존재하며 인도의 정치, 경제, 사회 등의 전 부분에 걸쳐서 억누르고 있다. 카스트는 인도의 국교라 할 수 있는 힌두교에서 연유한다. 힌두교에서는 신이 카스트 제도를 만들었다고 말한다. 기원전 1,000년경에 만들어진 힌두경전 '리그베다'는 인간의 계급이 어떻게 탄생되는지 언급하였다. 그에 따르면, 태초에 우주의 본질을 상징하는 거대한 신 푸루샤가 자신을 희생하여 인류를 창조했는데, 푸루샤의 입은 사제인 브라만이 되었고 팔은 군인계층 크샤트리아가 되었다. 허벅지에서는 상인 계급 바이샤가, 두 발에서는 노예인 수드라 계층이 탄생하였다. 이 네 계급을 색깔이라는 의미의 바르나 제도, 곧 사성제라고 불렀다. 여기에 사성제에 들지 못하여 아웃카스트로 불린, 앞서 언급한 불가촉천민이 있었다는 것이다. 

  인도 사람들은 아직도 이 카스트 제도에 순응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이미 법적으로는 폐지되었다고는 하나 아직도 인도인들의 삶과 의식을 지배하고 있다. 힌두교에서는 윤회사상에 기인하여 현세에 낮은 카스트로 태어나면 다음 세상에는 높은 카스트로 환생한다고 세뇌하고 있다. 이에 나름의 안정감을 얻은 인도인들은 아직도 카스트라는 제도에서 자유롭지 못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비인간적이고, 비합리적이며, 비과학적인 제도에 앞서 다음 세상에 대한 강한 믿음(?)을 기약하며 자신의 의지와 관계되지 않은 운명적 카스트 안에서 계급에 따른 지위와 명성, 생활양식 등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것이 대부분의 인도인들인 것이다. 

  이러한 카스트 제도라는 불가항력의 테두리를 벗어나고자 애쓰며 투쟁하여 나름의 성공한 삶을 산 사람이 있다. 『신도 버린 사람들』은 닿는 것조차, 같이 숨쉬는 것조차 금지된 불가촉천민의 위대한 드라마를 다룬 책이다. 그림자만 닿아도 오염되는 불가촉천민에서 세계 경제를 좌우하는 지도자가 된 나렌드라 자다브는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카스트에 맞서 어떻게 싸워왔으며 그 힘겨운 싸움과 삶의 열정이 종국에 어떤 결과를 만들어 냈는지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 

  저자의 아버지인 다무와 어머니인 소누의 일기와 회상이 이 책의 8할 정도의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 두 사람이 만나서 결혼을 시작하여 불가촉천민으로 인간 이하의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던 고된 수난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 저자는 철저하게 부모의 일기 기록을 반영하고 있다. 다무와 소누의 1인칭 서술이 교차되면서 당시의 삶을 생동감있게 들려주고 있다. 다무와 소누의 일기식 회상담이 이 책 분량의 8할이라면, 그 중 4할은 바바사헤브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빔라오 람지암베드카르 박사의 달리트 인권 운동이 크게 소개되고 있다. 그리고 나머지 2할은 저자 자신이 화자가 되어 말하고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받은 유산과 당신들의 철저한 교육과 가르침으로 인해 저자 자신을 위시한 자녀들이 어떻게 성장하고 성공했는 지를 고백하고 있다. 더욱이 마지막 에필로그에서는 저자의 딸이 할아버지와 아버지로부터 받은 고도의 정신과 경외심을 고백하고 있기도 하다. 즉, 이 책은 불가촉천민으로서의 잘못된 제도와의 싸움과 투쟁, 그리고 적극적 삶의 방식을 통해 성공화를 이룬 한 가문의 3대에 걸친 자유와 용기, 정의라는 인간의 숭고한 가치에 대한 경험적 회고를 생생하게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저자의 아버지는 잘못된 전통과 제도에 순응하지 않았다. 그는 동물보다 못한 취급을 받으며 개인적 잠재력과 꿈을 무시당한채 살아갈 수 없음을 자각하고 문제의식을 제기한다. 아버지 다무의 자각은 그의 또다른 내포적 힘인 용기와 결합한다. 당시 달리트들의 기본권을 위한 투쟁이 바바사헤브가 지도자가 되어 활발하게 진행되었고 그를 정신적 지주로 삼아 지리하고 끝이 보이지 않는 투쟁에 선봉에 서기도 한다. 저자는 뒷부분의 고백에서 아버지 다무를 경외와 상찬의 대상으로 말하고 있다. 비굴하지 않고 옳지 않은 것에 순응하지 않았던 아버지의 용기와 집념이 지금의 자신을 만든 원동력이었음을 고백한다.
  다다(아버지 다무를 자식들은 다다라 부름)는 결의와 용기라는 더없이 소중한 유산을 남겼다. 다다는 우리의 아버지였을 뿐만 아니라, 철학과 삶의 방식 그 자체였다. 살다가 힘이 필요한 순간이 닥치면, 우리는 우리 안에 간직한 다다를 찾아본다.   <p344> 

  무엇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강렬하게 관찰한 부분은 아버지 다무와 어머니 소누의 흔들리지 않는 깊은 사랑이었다. 불과 10세 밖에 되지 않은 어린 소녀가 나이 많고 까무잡잡한 청년의 아내로 결혼하여 수십 년의 지난한 삶을 버텨내는 과정은 경이로움 그 자체이다. 비록 둘다 불가촌천민으로 태어난 소외계층으로 가난하고 억울한 삶을 살아야했지만 서로 의지하고 존중하며 살아갈 때에, 그것은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내는 남편의 판단과 결정을 항상 존중하여 우군 역할을 해주었고 남편도 고생하는 아내를 아끼고 사랑해 주었다. 아이를 10년동안 낳지 못해 다른 아내를 얻어야 한다는 주변의 목소리에 아랑곳하지 않고 끝까지 아내를 지켜주고 보듬어 준 남편의 기백과 강단은 같은 남자로서 멋있기 그지 없는 장면이다. 부부 사이의 사랑이라는 강력한 내포적 힘이 가난과 주변환경이라는 외연적 겉치레를 충분히 압도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어려운 환경에서도 이러한 두 부부의 흔들리지 않는 사랑에 기반한 가정적 안정감이 자녀들 모두 훌륭한 동량으로 길러낼 수 있었던 가장 큰 원천이었을 것이다.
  다다가 세상을 떠난 후 바이(어머니 소누를 자녀들은 바이라 부름)는 부쩍 늙었다. 바이는 까마귀에게 먹이를 주며 말을 거는 걸 좋아했다. 색깔 말고는 까마귀와 다다가 비슷한 점이라곤 없었지만, 바이는 다다가 까마귀가 되어 당신을 만나러 온다는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매일 밥을 먹기 전에 부랴부랴 까마귀가 먹을 부스러기를 주러 나가서 이렇게 중얼거리곤 했다. "자다브가 온 것 같으네."   <p353> 

  책의 마지막 부분에 저자가 비토바 신당을 처음으로 찾았던 때를 회상하는 장면은 압권이라 할 만하다. 한 명의 불가촉천민을 맞이하기 위해 사원의 관계자들이 총출동한다. 저자는 이른바 VIP였고, 사원의 높으신 분들이 앞 다투어 환영했다고 한다. 저자는 어쨌거나 불가촉천민이었다. 사원출입이 금지되었던 카스트 출신이었다. 불가촉천민은 하다못해 그림자도 사원에 드리울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힌두 사원 권력의 심장부와 같은 비토바 신당에 사제들의 환영을 받으며 들어가는 것이다. 사원의 운영회장과 대사제가 세계적인 지도자가 된 저자를 맞이했다. 특히 저자가 사제들에게 돈을 주고 사제들이 갈구하며 돈을 받는 장면은 왠지 모를 전율이 느껴진다. 일개의 불가촉천민이 부모님의 정신과 교육을 이어받아 제도와 전통을 극복한 불세출의 인물로 성장하고 마치 카스트를 비웃기라도 하듯 최상위 카스트인 브라만에게 돈다발을 건네는 것이다.
  나는 있으나마나한, 천하에 쓸모없는 불가촉천민이었다. 주머니에서 빳빳한 100루피 다발을 꺼내어 사제들에게 나누어 주기 시작했다. 한껏 내밀어 갈구하는 가촉민의 손바닥에 누르듯 쥐어 주기 시작했다. 그들은 먹이를 노리는 매처럼 달려들었다.   <p355> 

  그렇다. 한 개인의 능력과 열정은 공동체의 관습과 전통을 바꿀 수 있는 힘이 있다. 우리 주변에는 무수히 많은 공동체가 있다. 가족, 학교, 교회, 회사, 국가 등 크고 작은 수많은 공동체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모든 공동체의 습속과 문화가 옳고 선한 것만은 아니다. 사회적 환경의 불순함과 비상식에서 개인의 자유와 상식은 침범을 받기도 한다. 인간의 내면적 숭고함 중에 극치라 할 수 있는 용기와 정의감이라는 가치가 많은 사람들에게 지향되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자다브 가문이 보여준 절대적 선한 가치에 대한 용기와 정의감이 어떤 인과물을 탄생시켰는지를 이 책은 경험적으로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잘못된 것에 맞서는 용기와 공동체에 대한 희생의 가치가 찬란하게 빛날 때에 인류는 더욱 아름다운 지구에서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그 어떠한 잘못된 관습과 체제도 한 인간의 인권과 자유에 우선할 수 없다. 그것이 수천 년동안의 12억의 인구를 억누르고 있는 카스트라 할 지라도 말이다.

  나는 비겁한 사람들을 자주 본다. 작든 작지 않든 자신이 몸담고 있는 사회의 절대적 선의 기준이 무너졌음에도 불구하고 외면하며 그 전통과 제도에 순응하는 자들이 적잖다. 그리고 그 잘못된 기준으로 약한 자들을 핍박한다. 어쩌면 나도 그러한 사람일 수도 있다. 이 세상은 지배하는 자와 지배 당하는 자로 철저하게 이등분된다. 현대적인 언어로 다시 표현하자면, 프로그래밍 하는 자와 프로그래밍 당하는 자로 양분되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도 그 유명한 팔레토의 법칙은 적용된다. 2할의 지배자가 8할의 피지배자를 다스리는 것이다. 그것은 정치일 수도 있고 경제와 사회, 문화 등의 외연적 결과물로 나타난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그것을 가르는 동기다. 2할과 8할을 가르는 가장 중요한 내면적 원천은 정의에 대한 용기와 공동체에 대한 희생과 사랑의 가치라는 것, 나는 그리 믿는다. 
 

  그러나 우리 세대는 이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다. 우리 할아버지와 암베드카르 박사의 노력이 우리 세대에 이르러 결실을 맺었다. 나는 달리트를 나타내는 어떤 표식도 달고 있지 않으며, 내 또래와 다르다고 생각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우리 조상들은 내가 이 세상 모든 소녀들과 똑같이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해 피땀을 흘렸다. 나는 그들이 나를 위해 밝힌 횃불을 받아 들었고, 이제 나를 막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p354>
- 아푸르바 자다브(저자의 딸)

 

http://blog.naver.com/gilsamo

Written by 다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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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9-02 2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굉장히 정성스런 글 잘보고 갑니다. 다윗님의 글을 읽고나니 이 책에 관심이 가지지 않을 수가 없는데요.ㅎㅎ

프레이야 2007-09-03 2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윗님, 성실한 리뷰,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꾸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