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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밀한 이방인 - 드라마 <안나> 원작 소설
정한아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0월
평점 :
그 사람을 이렇게까지 몰고 간 것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함께했던 시간은 무슨 의미일까요.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대체 왜 그 이야기를 저에게 남겨둔 것일까요. 21
드라마 <안나>를 보고 내용에 이끌려서 이 작품을 읽었다. 작가의 작품은 두께감보다도 더 두꺼웠다. 인물들이 드러내는 다양한 성향과 그들이 나누는 대화는 무엇도 가볍지가 않았다. 사회적 풍습에 의심 없이 스치면서 지나친 것들의 당위성이 얼마나 모순적인지 들여다보는 시간이었다.
화려한 옷, 가방, 신발, 학위, 결혼이 단단한 벽을 이루지는 못하면서 이 작품의 이유미, 이유상이라고 불리는 그녀와 그라는 인물에 의해서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믿는 허상이 과연 완전한 것일까? 쉽게 은밀한 곳에서 누군가에 의해 조작되고 위조되는 것이 너무나도 쉬웠다. 그것이 과연 이유미만의 잘못이었을까? 그것들이 가지는 상징성에 쉽게 동요되면서 이끌려간 많은 인물들에게는 잘못이 없었을까?
원피스, 구두, 가방, 화장품, 그런 것들이 인생을 바꿔줄 거라고 믿다니. 정말 어리석죠. 저는 ... 믿을 건 원룸 건물. 이것뿐이라니까요. 73
속는 자와 속이는 자는 함께 쾌락에 빠져들기 마련입니다. 197
이 세상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믿고 있는 사회일까? 이유미가 다양한 인물로 살아간 거짓된 인생은 그녀만의 잘못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역할 대행업체가 필요한 사회이며 단 하루도 쉬지 못하는 근무 조건을 강요했던 사회가 이 사회의 민낯이기도 하다. 길거리의 젊은 여성들이 낮은 임금으로 일할 수 있는 이 사회에게도 묵직한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기도 하다. 그녀를 온전히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이 사회의 무수한 것들이 등장하고 있었던 작품이다. 속는 자와 속이는 자가 있다. 우리는 얼마나 속는 자인지, 속이고 있는 자인지 진중하게 생각해 보게 한 문장도 만나게 된다. 함께 쾌락에 빠져들고 있지는 않는지 지금의 우리에게도 질문하는 작품이다.
한 집에서 이십 년. 우리가 질서를 연기하는 한, 진짜 삶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다. 그렇다면 진짜 삶은 어디 있는가? 인생의 마지막에서야 밝혀질 대목이다. 133
고학력 무능력자. 막연한 꿈을 좇아 끝도 보이지 않는 일에 매달리고 있었다. 영화잡지사 인턴 79
나는 무덤을 지키듯 집을 지켰어. (작가 남편) 217
사랑하는 거예요. 당신은 저런 사랑해 봤어요? 우리는 맞선을 보고 이 주 만에 결혼을 했죠... 우리가 참을 수 없는 패배감을 느꼈단 사실... 이제 네 인생을 살란 말이다. 152
진짜 삶에 대해서도 작품은 언급한다. 이제 네 인생을 살라고 단침을 놓는다. 진짜 삶과 진짜 사랑이 무엇인지도 묻는다. 잘 지키면서 살아온 날들이 진짜 삶이 아니었다는 깨달음이 가져다주는 헛헛함을 이혼을 청구하는 어머니에게서 만나기도 한다. 무덤과 같은 집을 지키는 것의 의미와 노력도 작품은 매만진다. 인생에는 정답은 없다. 잘 살았던 것 같은 삶이지만 무의미한 허상으로 부유한다면 가치가 없는 인생이 될 뿐이다.
어머니. 더는 견딜 수가 없는 거야. 한 번도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아보지 못했는데. 늘 꼼짝도 못하게 나를 짓누리며 살았는데. 132
아버지는 평생에 걸쳐 인간을 의심하고 현실을 부정하는 구약의 세계관을 따랐다. 그렇지만 단 한 번도 자기 삶을 위험하게 몰아가거나 경계의 도마 위에 올리지 않았다. 진정한 회의주의자는 엄마였다.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던 성과였다. (이혼으로 남편. 집. 재산. 홈시어터 잃어버렸다.) 187
죽음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 이른 노부부에게 위기가 닥친다. 위암 말기인 남편에게 이혼을 청구하는 아내의 상황은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녀를 충분히 알게 된다. 이혼으로 남편과 집과 재산과 최신식 홈시어터까지 잃어버리는 아내의 이혼이라는 선택은 진짜 삶을 살아야겠다는 의지의 반영이었기 때문이다. <소망 없는 불행> 페터 한트케의 작품의 어머니가 자살을 선택하는 이유와 맥락을 나란히 한다. 그녀들이 결단하고 실행하는 것은 이혼과 자살의 형식이다. 우유부단하게 머뭇거리면서 세월을 허송세월하지 않고 실행한 것들이다. 왜 그녀들은 자신의 결혼을 그렇게 온점을 찍었을까? 그녀들의 결혼생활이 답을 해준다.
작가의 글작업. 육아 독박. 나는 그 애가 미웠고...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낼 수 없도록 짓뭉개버리는 환상을 보기도... 102
그 여자는 한때 자신에게 있었던 생기와 아름다움을 남편과 아이에게 빼앗겼다고 믿으며, 그들을 남몰래 증오했다... 그들은 이제 그 여자의 이름이고, 집이고,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104
작가의 글작업이 고된 작업이라는 것을 책을 통해서 많이 보게 된다. 글을 쓸 때 행복했다고 말하는 이유상의 말에 의심을 품는 작가의 마음도 충분히 짐작하게 된다. 글을 쓰는 작업이 가져다주는 엄청난 고난을 이 작품의 여성 작가에서도 만나게 된다. <고스트 라이터>소설의 화자가 보여준 모습과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아이를 독박으로 육아하는 여성 작가에게는 엄청난 시련임을 이 작품에서도 만나게 된다. 모성이 부서지고 환상을 보는 상황이 전개된다. 여성이 출산과 육아를 전담하면서 제자리에 머무는 시간에 남편은 업적을 이루어가는 시간들로 채워진다. 서서히 지워지는 자신의 이름을 자각하면서 모성도 퇴보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어둠의 세계인 타락으로 멈추지 않고 돌진하는 모습도 이유미와 다르지 않는 모습이기도 하다. 왜 이 여성들은 멈추지 못했을까? 자신이 망가진다는 것을 인지하면서도 계속 걸어들어갈 뿐이었다.
여러 여성 인물들이 자신을 찾는 여정이 전개된다. 자신이 망가지는 것을 알면서도 의지를 보이는 다양한 여성들이 이 작품에 등장한다. 하나같이 아프게 상처투성이다.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상처받지 않고자 하였던 여성들은 어느새 상처받고 멍투성이로 자신의 것을 찾기 시작한다. <난파선>이라는 작품이 상징하는 의미를 다시금 되돌려보게 한다. 여성 작가도, 이혼을 요구한 어머니도, 이유미도 난파선이었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진정 우리는 잘 살고 있는지 질문해 주는 작품이다. 여성으로써 잘 살고 있나요? 살기 좋은 세상에 여성으로 살고 있나요? 우리를 돌아보는 시간이 된다.
난파선. 다이버 직업. 넉넉한 급료가 쥐어진다... 하지만 그는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가 없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게 뭔지,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지를 생각해 본다. 하지만 아무것도 떠올릴 수 없다. 26
자신이 텅 빈, 아무 쓸모가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난파선. 둥둥 떠다니는 부속물. 이끼류. 그것이 바로 자신인 것이다. 36
기독교인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신앙이 있고 권사라는 직분이 있지만 가정 안에서는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신앙인이 등장한다. 딸아이에게도 자신의 욕망을 내세웠고, 새 가족을 결혼으로 받아들이지만 가족으로 인정하지 않는 신앙인의 모습이 등장한다. 이중적이고 모순적인 신앙인의 모습을 작품은 매만진다. 권사 어머니의 손은 기이하다고 말한다. 왜일까? 사랑이 없는 삶으로 살고 있지는 않는지, 가면을 쓴 신앙인은 아닌지 우리들에게 묻는 작품이기도 하다.
권사 어머니. 기이할 만큼 메마른 손이었다. 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