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사냥 - 젠더 정치 탐구 민음사 탐구 시리즈 12
이민주 지음 / 민음사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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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사 탐구 시리즈 중의 신간도서이다. 김아미의 『온라인의 우리 아이들』, 조무원의 『우리를 바꾸는 우리』에 이어서 읽은 한 권이다. 빨간 책표지에 강열하게 대비를 이루는 책 디자인만큼이나 이 책도 단단한 내용들을 응집하고 있을 거라는 것을 짐작하면서 펼치게 된다. 마거릿 애트우드의 『시녀 이야기』와 『증언들』, 헨리크 입센의 『인형의 집』, 김현아 류머티즘 내과 교수의 『의료 비즈니스의 시대』, 아니 에르노의 『세월』도 생각나게 하는 페미니즘이다.

한국 사회에서 일어난 사건들이 조명되고 해석된다. 2016년부터 2024년까지 발생한 사건들을 시간순으로 살피면서 조롱과 혐오, 특정한 정치사회적 맥락에서 상호작용한 현상임을 설명한다. 촘촘한 논리와 증거들이 제시되어야 했던 이유부터가 조명된다. 마녀사냥은 중세 시대의 희생물이었던 여성들이다. 모냐 솔레의 『마녀』책을 통해서 알게 된 역사적 사실들부터 상기할수록 페미사냥이라는 책 내용은 예사롭지 않는 조짐이 된다.

중세 시대에 마녀로 희생된 여성들이 누구인가. 희생된 여성들에게서 무엇을 빼앗는지, 결과적으로 어떤 지배 구조를 구축했는지가 중요해진다. 다시 현실로 돌아와서 페미사냥의 희생된 여성들이 누구인지, 무엇을 빼앗고 누가 빼앗았는지, 어떤 지배 구조가 구축되었는지를 살펴보아야 하는 이유가 분명해진다. 문학을 통해서 많은 작가들이 한국 사회의 페미니즘에 대해 조명하고 문제점이 무엇인지 소설을 통해서 함께 생각하도록 이끌어주고 있는 만큼 탐구 시리즈를 통해서 한국 사회에 어떤 사건들이 일어났고 어떤 사회적 문제들이 조명되고 있는지 알려주는 책이라 의미심장해진다.

근대 자본주의와 정치경제 기획이 어떤 페미사냥을 하였는지 하나씩 시간순으로 알려준다. 자본주의 체제가 부정적인 여성상을 만들어 왜 여성을 마녀로 만들었는지 살펴보게 된다. 소비와 놀이의 영역인 온라인 커뮤니티와 어떻게 힘을 얻었는지도 조명한다. 페미니스트를 낙인찍는 것과 감시와 검열, 폭력을 정당화하는 한국 사회의 문제까지도 재조명한다. 앞서 언급한 책들에서 다루는 것들은 보다 나은 여성의 삶과 성평등을 향한 발걸음인 만큼 이 책에서 언급되고 조명되는 이유들을 함께 살펴볼수록 다분히 복잡한 이해관계들을 엿보게 된다.

페미사냥으로 위축된 이들이 누구이며 혐오라는 정치적 움직임에 동요되지 않는 지각도 필요해진다. 대립하는 구조로 싸우는 것이 해결이 되지 못한다. '대등하지 않은 것을 대등하게 비교하는 부당한 체계'라고 강조하는 저자의 말에는 함축된 응어리가 전달된다. 아직도 갈 길이 멀고 험준한 한국사회이지만 깨어있는 지각으로 한 걸음씩 나아가는 움직임들은 감지된다. 수많은 질문들을 들으면서 살아오면서 굳건하게 구축한 진실과 믿음에는 성평등이라는 올곧은 희망을 가득하게 품으면서 살아왔던 것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대립하고 싸우는 방식이 아니라 자신만의 방식으로 조금씩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것이 행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한 걸음 나아가고 다음 세대가 더 나아가기를 희망하게 된다. 여성을 억압하고 억누르면서 과거의 시대로 되돌리려고 노력하는 사건들을 확인할 수 있었던 내용들이 전해진다. 조롱하지 않는 문화, 누군가를 짓밟지 않는 문화가 선진국의 문화라고 생각한다. 저급한 방식으로 싸우는 문화가 아닌 평등한 사회로 나아갈 수 있도록 더 나은 삶을 모색하여야 하는 이유도 분명해지기 시작한다. 누군가의 이득을 위해 싸우고 대립하며 혐오하지 않는 것이 승리이다.

페미사냥에 얽힌 다양하고 복잡한 문제들에 대해서도 책은 언급한다. 신자유주의 질서와 시장화, 온라인 환경, 반지성주의와 극우주의, 친밀성과 욕망의 정치경제가 9년 동안 뒤엉킨 사건들로 조명된다. 분명한 것은 권력 구도이다. 복잡하고 다양한 긴밀한 구조에 무차별적으로 희생된 페미사냥은 오늘날 한국사회의 분명한 사회문제라는 것이다.

페미니즘을 재미로 공격하는 온라인 사냥터를 고발하는 저자의 책이다. 그저 살아남는 게 아니라 더 존엄하게, 즐겁게 살아가기를 희망하는 것과 제자리를 찾을 것이라는 확고한 의지가 전해지는 책이다. 원한이 가득한 저자의 마음과 목소리들이 한 권을 통해서 응결되면서 희망까지도 전해진다. 정확한 인식과 진실한 용기에 대해서도 힘주어 강조된다.

무차별적인 사냥에 수많은 여성이 사라졌고 185

여성을 내쫓고 칭찬받는 개들 167


페미니즘 백래시는 페미니즘이 성취해 낸 것을 억누르고 되돌리려 한다. 24

페미는 어떻게 여자 일베가 되었는가 87



억압받는 이들... 정확한 인식과 진실한 용기 - P24

그저 살아남는 게 아니라 더 존엄하게, 즐겁게 살아가기를 포기하지 않는... 끝끝내 이길 것이다. - P182

남을 짓밟고 조롱하고 탈락시키는 서사 - P180

무차별적인 사냥에 수많은 여성이 사라졌고 - P185

여성을 내쫓고 칭찬받는 개들 - P167

페미니즘 백래시는 페미니즘이 성취해 낸 것을 억누르고 되돌리려 한다. - P24

페미는 어떻게 여자 일베가 되었는가 - P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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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 에센셜 한강 (무선 보급판)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디 에센셜 The essential 1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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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편의 단편소설이 구성된 한강 『디 에센셜』이다. 『채식주의자』, 『작별하지 않는다』, 『소년이 온다』, 『희랍어 시간』을 읽고 잔뜩 몸을 움츠렸던 것이 안타까워진다. 단편소설과 시 다섯 편을 읽으면서 읽었던 여러 소설들을 함께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작가가 꾸준히 긴 시간 응시한 것들이 무엇인지 총체적으로 상기하는 귀한 시간으로 인도된다. 단편소설 『회복하는 인간』에 이어 읽은 『파란 돌』은 "오랜만에 당신을 불러봅니다." (247쪽) 문장으로 이야기가 시작한다. 화자인 그녀는 연약한 아이의 어머니이며 한 남자의 아내이다. 그런데 그녀가 부르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그가 부르는 사람을 만났을 때와 같은 나이가 된 그녀가 그를 오랜만에 부르는 이유가 하나씩 들추어지면서 그녀가 밤의 나무들을 의연하다고 말하는 이유, 그 나무들을 두려워한 이유들이 밝혀진다.

완강한 어조의 말들을 껍질 속에 숨기고 있는 밤의 나무들은 여전히 검고 묵묵하다고 그녀는 말한다. 일 년 전에 그녀에게 어떤 일이 있었기에 그녀는 밤의 나무들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인지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다. 각진 노끈이라는 이질적인 노끈이 목을 파고드는 고통까지도 그녀는 충분히 짐작하기도 한다. 기다란 끈이 지닌 잔혹한 폭력성에 화들짝 놀라버리는 이유까지도 소설은 서서히 보여준다.

자살을 하는 사람들의 사전 징후라고 감지되는 것들을 그녀는 자신에게서도 감지되었음을 나열한다. 왜 그녀는 자살을 계획하고 삶을 마감하려고 하였을지 짧은 소설에서도 충분히 감지하게 된다. 가족이라는 이름, 부부라는 이름으로 하나가 된 가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폭력에 누군가는 가해자, 피해자가 될 수 있는 상황에서 아무런 일이 없었다는 듯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수많은 움직임과 삶에서 고통과 슬픔이 점철되면 누구라도 갑자기 자살을 실행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녀는 죽음을 계획하고 실행하려고 집을 떠났지만 다시 계획에 없는 귀가를 하게 된다. 갑자기 그녀를 살린 것, 문득 떠올린 것이 그녀를 다시 살게 만든 것이다. 살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여자가 월경을 한다는 것, 피를 흘리며 아이를 낳는다는 걸 생각하면 경이로워. 생명은 언제나 핏속에서 시작되는 모양 258

여자의 월경과 출산, 출산 후 수많은 날들을 피를 흘려보내야 하는 산모의 자연스러운 현상, 출혈하면 멈추지 않는 지난날 추억 속에 있는 남자의 병을 떠올리기 시작하면서 그의 이름을 오랜만에 부르게 된다. 피는 생명이기도 하고, 피는 죽음이기도 하다. 어린 날 그의 죽음 소식을 감당하기가 힘들었을 그녀, 그녀의 첫사랑과 다름없는 그를 지금 오랜만에 이름을 부르기 시작한다.

그가 그녀에게 자화상이 무엇인지 이야기하였듯이 그가 두 번째 입원하면서 무수히 바라본 하늘에서 그가 깨달은 영혼과 무한에 대한 이야기도 그녀에게 깊게 각인된 대화로 남아있음을 보여준다. 덕분에 그녀는 이제 그의 죽음을 슬픔으로 떠올리지 않는다. 그가 꿈에서 경험한 죽음은 두려움이 아닌 홀가분함이라는 것을 알기에 그를 부르면서도 자유로워진 그를 떠올리게 된다.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고 느낀 그녀의 생각까지도 전해진다. 아주 짧은 시간 우리가 머무르는 생애를 깨달으면서 그녀가 기억을 등지고 나아가야 하는 이유, 버텨내고 이겨내야 하는 남은 생애를 각진 노끈, 남편의 악력, 목덜미를 압박한 남편의 잔인함을 떠올리며 이겨내야 하는 생애를 화가였던 그를 부르면서 하나씩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잔인한 사람임을 알게 되면서 그녀가 자살을 시도하였지만 그녀가 다시 살아가고 있는 지금 그녀에게 어떤 기억들을 불어넣어 준 사람이었는지 하나씩 그녀가 기억을 떠올리게 된다. 그녀에게도 더 나은 삶으로 전진하라고 응원을 아낌없이 던지게 된다. 타인의 잔혹함에 누군가가 생을 실패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커진다. 악인이 타인을 부수려고 할지라도 자살을 하려고 할 때 그녀를 살려낸 아이가 보낸 영혼의 목소리, 추억 속의 남자와 함께한 기억들이 그녀를 한 걸음씩 나아가게 할 것이라고 믿게 된다. 소설이지만 시어를 마주서는 기분을 느끼게 된다. 그녀를 침식시킨 어두운 밤이 무엇이었는지 작가의 문장들에 또 한 번 감탄하게 되는 소설이다.

목줄기에 느껴지는 손의 감축, 따뜻한 첫 열기와 악력의 기억 267

7여 년의 시간을 함께 살았던 남자. 세 시간 전에 내 목을 조르다 말고 안방에 들어가 잠들었던 사람 260



밤의 나무들은 여전히 검고 묵묵합니다 - P265

꿈. 이미 죽어있어... 얼마나 홀가분했는지 몰라. - P268

기억을 등지고 나아가야 할 길은 얼마나 멀까요. 얼마만큼, 무엇을 넘어갈 수 있을까요 넘어갈 수 있기는 한 걸까요. - P267

내 방에 숨어 있는 사람 같았습니다. 내 모든 걸 알고 있는, 사실은 잔인한 사람 - P266

영혼과 무한 같은 것을 생각이나 느낌이 아닌 몸으로 알게 되었다고.
그건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거야. - P270

밤의 나무들은 의연합니다... 단단한 밑동은 뭔가 완강한 어조의 말들을 껍질 속에 숨기고 있는 듯합니다... 저 나무들을 바라봤습니다... 저 나무들이 다시 두려워 시선을 뗄 수 없었습니다. 바라보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나무가 너를 닮았구나,라고 당신이 말하던 것을 나는 기억합니다. 네가 그리는 모든 게 실은 네 자화상이야. - P248

여자가 월경을 한다는 것, 피를 흘리며 아이를 낳는다는 걸 생각하면 경이로워. 생명은 언제나 핏속에서 시작되는 모양 - P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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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한 이야기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 민음사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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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의 단편소설집이다. 그중에서 『병조림』, 『솔기2편의 단편소설에서는 가족의 죽음으로 남겨진 사람의 남은 일상들을 보여준다. 『병조림』은 어머니의 장례를 마친 무직자인 중년 아들의 이야기이다. 중년이 될 때까지 한 번도 구직활동을 하지 않고 집안에서 텔레비전만 보았던 아들이다. 어머니의 연금도 서서히 바닥이 나는 상황이라 구직 활동을 서둘러야 하지만 그는 아직도 시간은 충분하다고만 생각한다. 어머니가 좋아한 집안의 공간은 지하실이다. 아들은 한 번도 어머니가 좋아한 지하실을 가본 적이 없었다. 더불어 지하실을 궁금한 적도 없었던 아들이다. 어머니가 죽고 나서야 어머니가 머무르기 좋아한 그 공간을 처음으로 가보게 된다. 그곳은 놀라울 정도로 깔끔한 곳이었고 수많은 병조림들이 발견되면서 아들은 놀라워한다. 라벨에 표시된 것들을 보면서 아들은 맛을 보기 시작하는데 맛이 일품이라 더욱 만족스러워한다.

어머니에게 남편과 아들은 무거운 짐과 같은 존재였다. 평생 빨래와 다림질, 장을 봐야 했다고 아들에게 한탄을 하지만 아들은 귀담아듣지도 못한다. "아기 새들도 모두 때가 되면 둥지를 떠난다. 이게 순리야. 부모도 좀 쉬어야지. 이건 모든 자연에 적용되는 불변의 법칙이야. 대체 왜 이렇게 날 괴롭히니? 넌 벌써 오래전에 집을 떠나서 자신의 삶을 꾸렸어야 해... 나도 그만 쉬고 싶단다." (55쪽) 노년을 편하게 보낼 권리를 아들에게 말하지만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는다. 타인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삶을 짊어지게 했는지 짧은 이야기에서도 충분히 전달되면서 남겨진 아들이 맞이하게 되는 죽음은 기묘한 우연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아들이 집안에서 발견한 병조림들 중에는 기괴한 라벨을 가진 병조림도 발견된다. 식초에 절인 신발끈이라는 병조림, 토마토소스에 담긴 스펀지 발견이 되면서 어머니가 사랑하고 열정을 쏟았던 병조림으로 감정들이 표출된 것임을 감지하게 된다. 이러한 기괴한 병조림을 보면서도 아들은 어떤 변화도 감지되지 않는다. 어머니의 방은 환기가 되지 않아서 썩기 시작하여 퀴퀴한 냄새로 가득해진다. 아들의 게으름과 무능함은 어머니의 죽음 이후에도 변화를 보이지 않는다. 살아생전에 어머니가 그 모든 생활들을 홀로 감당하였을 것이라는 것을 충분히 짐작하게 된다.

아들은 혹시나 유가 증권이나 현금이 발견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도 가지지만 그것들이 발견되지는 않는다. 여전히 TV 앞에서 시청을 하면서 병조림을 다 먹어치웠다는 사실에 놀라워한다. 그리고 구토 증세로 구급차를 타고 병원에 가게 되면서 그는 간 이식이 필요하다는 말을 듣게 되지만 기증자를 찾지 못하여 며칠 사이에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에게는 가족이 없어서 그의 시체는 어머니의 친구들이 수습하게 된다. 노년의 삶을 편안하게 살고 싶어 했지만 전혀 이해하지 못한 중년 아들은 어머니에게는 무겁고도 무거운 짐이었음을 보여준다. 그에게 유산으로 남겨진 병조림은 어떤 의미였는지 함께 생각해 보자고 질문을 던지는 소설이다.

솔기』 단편소설에서는 아내가 죽은 후 남겨진 노쇠한 B 씨의 이야기이다. 아내의 장례식이 끝나고 그는 아내의 침대에서 잠을 자는데 그는 최근에 잠을 설치는 상황이다. 무념무상의 둥그런 삶, 먼지 덩이 속에서 살아가는 삶, 바닥 틈새에서 살아가는 삶들을 포착한 작가의 시선이 아내의 구슬 목걸이와 잠 못 드는 수많은 밤들을 통해서 사색하게 한다.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어디에 정착하면서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생각없는 삶들로 생을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무수히 많은 질문들을 마주하게 한다.

"죽은 아내의 오래된 구슬 목걸이처럼 밤은 자꾸만...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꽤 많은 구슬을 찾지 못했다. 구슬들이 ... 어디에서 무념무상의 둥그런 삶을 살고 있는지, 어떤 먼지 덩이 속에 장착했으며, 바닥의 틈새 어디쯤 둥지를 털었는지 종종 궁금한 마음이 들곤 했다." 59

양말의 솔기를 보면서 사소한 생각에 강한 흥미를 느끼는 그의 일상들이 이야기된다. TV 프로그램 편성표를 정리하고 스케줄에 익숙해지면서 그는 자신의 하루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인지하고자 안간힘을 쓰게 된다. 이웃집에서 창문 청소를 하는 모습에 자신도 갑자기 뭔가를 해야겠다는 초조감도 느끼기 시작하면서 먼지가 소복히 쌓인 400 여장이 넘는 편성표를 버리게 된다. 하지만 곧 후회하고 다시 되찾고자 하지만 사라진 것을 알고 울기까지 한다. 아내가 떠난 후 남겨진 노쇠한 그의 일상은 예전의 삶을 잃어버린 것처럼 보인다. 아내 옷장에 여전히 남은 옷들을 정리하면서 아랫집 여자에게 선물을 하게 되는데 모피를 보자 여자가 보이는 욕망까지도 날카롭게 조명한다. B씨와 아랫집 여자가 대화를 나누면서 그가 질문하는 것들을 듣는 여자는 긴장과 실망이라는 감정을 느끼게 된다.

여전히 잠을 설치는 그가 아내의 잠옷을 안고 잠이 드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난다. 그가 흥미를 보였던 것들 중에는 우표의 모양이 다르게 보이는 기묘한 현상과 볼펜의 색이 갈색이라 싫어한 그의 반응들까지도 이야기된다. 갈색을 연상시키는 썩은 나뭇잎, 마루 광택제, 축축한 녹, 끔찍한 황토빛 흔적이라고 떠올리는 그의 일상들이 하나씩 이야기된다. 가족들 중에서도 홀로 남겨진 사람이 어떻게 노년의 삶을 살아갔는지 떠올려보게 된다. 먼저 죽은 아내의 흔적들을 무수히 떠올렸을 남겨진 사람의 남은 시간들을 이 소설을 통해서 다시 상기하게 한다. 낡은 모래시계 시간의 흐름이 노년들에게는 더 빠르게 느껴지는 이유에 대해 나누는 대화도 기억에 남는 장면이다. 인생의 가을이며 겨울이 되는 시점에 갈색을 싫어했던 그의 이유들을 함께 떠올리게 한 소설이다.


모피 / 욕망의 기색은 감춰지지 않았다. 69

진정한 새해란 달력의 날짜가 아닌 봄과 함께 시작되기 때문. 해묵은 과거의 흔적을... 수거함에 던져 넣었다. 갑자기 공항 상태 65

TV 프로그램의 조직적인 스케줄에 적응... 하루 중 어디쯤 와 있는지 알아내려고 안간힘을 쓰는 나날이 반복 62

죽은 아내의 오래된 구슬 목걸이처럼 밤은 자꾸만...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꽤 많은 구슬을 찾지 못했다. 구슬들이 ... 어디에서 무념무상의 둥그런 삶을 살고 있는지, 어떤 먼지 덩이 속에 장착했으며, 바닥의 틈새 어디쯤 둥지를 털었는지 종종 궁금한 마음이 들곤 했다. - P59

갈색 / 썩은 나뭇잎, 마루 광택제, 축축한 녹, 끔찍한 황토빛 흔적 - P67

모피 / 욕망의 기색은 감춰지지 않았다. - P69

세상이 변한 것 같지 않나요? 우리가 따라잡을 수 없게 말입니다. 우리의 정신이 노쇠해지는 바람에 그것을 쫓아가지 못한다는 겁니다. 지금 우리의 처지가 마치 오래된 모래시계 같지 않나요? - P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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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 에센셜 한강 (무선 보급판)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디 에센셜 The essential 1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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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하는 인간』

단편소설

2024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의 여러 작품들을 한곳에 모은 디 에센셜 한강 책이다. 장편소설 『희랍어 시간』, 단편소설 두 편, 시 다섯 편, 산문 여덟 편으로 구성되는데 이중에서 『회복하는 인간』이라는 단편소설을 지긋하게 천천히 읽으면서 치유를 내밀하게 문학적으로 만난 소설이다. 반복되는 말들을 여러 번 곱씹으면 강조되고 있는 이유들을 차분하게 만나게 되는 이야기이다.

라디오 작가인 그녀와 몇 살 차이가 나는 언니가 있다. 외모도 언니가 월등하지만 언니는 여동생에게 열등감을 표출하였다는 것이다. 그녀의 결점들을 오히려 언니는 무한히 질투하고 있었음을 들려준다. 자매가 서로 거리감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언니가 소파수술을 한 대학 4학년 겨울이다. 그때 여동생은 대학 1학년이었고 언니의 비밀을 부탁하지 않아도 여동생은 비밀을 지키는 동생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언니는 그 사건 이후로 여동생에게 냉대하다. 그때 언니가 동생에게 '통념'과 '견디는 것'에 대한 이야기한다. 사회적 통념 뒤에 숨은 사람이 누구인지는 분명해지는 순간이다. 언니가 어떻게 통념 속에서 살았는지, 어떻게 견디었는지는 자매의 이야기를 통해서 사실적으로 전달된다. 언니는 더 이상 동생을 사랑하지 않는 차가운 사람으로 존재한다. 질병으로 고통 속에서 살려달라고 외치면서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도 언니는 여동생에 대한 감정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죽음을 앞둔 언니와 대화를 하고자 망설였던 여동생의 기회들은 갑자기 무산되어버린다. 회복할 수 있었던 수많은 기회들을 놓쳐버린 자매, 남겨진 여동생의 시간들은 너무나도 천천히 흐르게 된다.

다친 발목 통증을 치료하려다가 오히려 여동생은 화상을 입게 된다. 심각하지만 의사는 수술보다는 자연적인 치유를 기대하면서 시간들을 공들이기 시작한다. 일반적인 상황보다 더 느리고 더딘 회복을 보였던 여동생의 모습에 의사는 의아해하면서 다행히 수술을 하지 않아도 될 거라는 것에 안도한다.

여동생의 내면에 회복되지 않은 상처가 있다는 것과 자전거를 타면서 느끼는 행복감과 진심으로 사랑한 것이 자전거 타는 것이었음을 떠올리면서 동생은 자신이 사랑한 것들을 서서히 보기 시작한다. 정말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조차 하지 못하면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삶도 엿보게 된다. 바쁜 일상이 정답이 되지 못하지만 무심하게 자신을 돌보지 않는 현대인의 모습까지도 여동생을 보면서 포착하게 된다. 자신보다 일을 더 우선순위에 놓고 살아가는 것은 정답이 되지 않는다. 작은 상처이지만 몸은 거짓 없는 반응을 보인다. 자신을 돌보고 자신을 살피는 만큼 놀라운 치유의 기적은 없기 때문이다. 자전거 타는 것이 죄가 아닐까라는 조마심도 이겨내면서 그녀는 서서히 자연 치유를 하게 된다. 회복되는 과정에는 자기 의지도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타인에 의해 차가운 마음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여동생의 지난날들과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즐기면서 기뻐해야 회복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타자에 의해 짓눌린 감정들이 괜찮은 것처럼 보일지라도 사실은 전혀 괜찮은 것이 아님을 소설은 보여준다.

라디오 작가인 여동생은 앞으로 자신에게 일어날 수많은 날들을 전혀 모른다고 작가는 반복적으로 이야기한다. 상처로 얼룩진 내면을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회복하는 과정에 때로는 용기와 결단이 필요하다는 것도 보여준 소설이다. 어두운 공간에 홀로 잠 못 드는 깊은 밤의 시간을 보내는 것이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는 것과 늙은 왜가리가 고요하고 느리게 먼 곳을 바라보면서 응시하는 것도 상징적으로 들려준 이야기이다. 한 사건에 고여있는 삶은 발전적이지 못하며 인간관계까지도 녹슨 감정을 연장시켰음을 보여준다. 회복하는 인간, 깨어나는 인간, 치유되는 인간은 자발적으로 역동성을 띠면서 계속 나아가는 사람임을 보게 된다. 여동생이 자전거를 타고 멈추지도 않고 계속 달리는 장면이 등장한다. 그렇게 자신을 찾아야 하는 이유는 분명해진다.

타자에 의해 젊은 날 보내버린 날들을 수긍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회복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이야기를 들려준 소설이다. 새살이 차오르는 상처처럼 자신을 방치하면 치유도 더디며 회복되는 과정도 느리고 기회마저도 놓칠 수 있다는 것을 일깨워 준다. 몸을 돌보는 것은 마음에서부터 시작되는데 마음을 잘 살펴보는 여유, 아픈 상처는 없었는지 돌아보면서 자신의 의지로 되돌릴 수 없는 것들을 때로는 인정하고 자신의 삶을 시작하는 출발도 필요해진다. 언니의 소파수술은 여동생의 잘못이 아니지만 언니는 여동생을 차갑게 대면했고 동생은 언니의 죽음에서도 자유롭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이 소설에서 '좋은 죽음'은 무엇인지 다시 질문을 하게 된다. 살아온 삶을 정리하지도 못하고 떠난 언니로 인해 동생은 느린 회복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 가족이지만 남보다 더 먼 관계들도 많아 보인다. <조립식 가족> 드라마를 보면서 이 소설을 읽어서 더욱 그런 생각들을 많이 하게 되었는데 이 소설처럼 가까운 가족들끼리 더 질투하면서 상처를 주는 가족들도 많아 보인다. 어느 누구도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없지만 부당한 미움과 질투에 불편한 관계가 되어버린 여동생이 언니의 죽음으로 해결하지 못한 미지근한 아쉬움과 미련에 고통의 나날들을 보낼 거라고 여동생도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이 소설에서도 언급된다.

남부럽지 않은 화려한 삶을 살아도 통념 뒤로 숨어버린 언니가 놓친 것은 무엇인지도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다. 읽는 동안 여동생의 과묵함과 신뢰를 고마워하지 않고 질투하였던 언니는 동생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언니의 죽음 이후를 보내면서 더욱 선명해지기 시작한다. 살아야 하는 이유, 견디고 버틴 이유들이 전해진다. 누군가를 질타하고 질투하는 어리석음이 너무나도 무용해지는 순간이다. 스스로 회복하고 계속해서 치유하면서 살아야 하는 이유가 그녀의 자전거 타는 모습을 통해서 보여준다.

더 추워지기 전에... 그전에 꼭 한 번 자전거를 탄다면 죄일까? 236

사람들이 어떻게 통념 속에서만 살아갈 수 있는지, 그런 삶을 어떻게 견딜 수 있는지... 그럴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 않을까, 통념 뒤에 숨을 수 있어서. 230

언니는 그날 이후 당신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았다. 229

당신과 언니, 둘 가운데 누가 더 차가운 사람이었는지. 스스로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228

당신이 끈덕지게 되돌려 기억하게 되리라는 것을 모른다. 242

당신은 모른다.

얼굴에 찬물을 끼얹는 당신의 손이 거푸 떨리라는 것을 모른다. 241

그 어떤 것도 모르는 채 ... 239

그러나 당신은 멈추지 않고 계속 달려간다. 239



친숙한 감정을 내부에서 깨우지 않기 위해 애썼다. 마음을 최대한 차갑게, 더 단단하게 얼리기 위해 애썼다. - P231

끈덕지고 뜨거운 그 질문들을 악물고 새벽까지 뒤척이리라는 것을 모른다. - P243

이 모든 통각들이 너무 허약하다고 - P243

나도 앞이 보이지 않아. 항상 앞이 보이지 않았어. 버텼을 뿐이야. 잠시라도 애쓰고 있지 않으면 불안하니까, 그저 애써서 버텼을 뿐이야. - P241

자책을 멈추지 못했다... 말하려 했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이 끝난 뒤였다. - P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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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한 이야기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 민음사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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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낮의 집, 밤의 집』, 『방랑자들』, 『태고의 시간들』,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 에세이 『다정한 서술자』, 그림책 『잃어버린 영혼』의 저자인 올가 토카르추크는 2018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이다. 작가의 작품들을 좋아해서 신간 중단편 소설집이 출간된다는 소식에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기대감을 가득히 품으면서 총 10편으로 구성된 기묘한 이야기들을 하나씩 읽을수록 역시 작가만의 세계를 만나지 않았다면 후회했을 것이라는 확신이 가득해지기 시작한다. 먼저 『승객』과 『녹색 아이들』을 만나본다.

승객』이라는 소설은 짧은 단편소설이다. 장거리 밤 비행을 하면서 옆자리의 승객과 대화를 나누게 된다. 그가 어린 3~4살 무렵에 경험한 똑같이 반복되는 악몽에 대한 이야기부터 전해진다. 부모님은 어린 아들의 악몽을 이겨내도록 노력하지만 누나는 전혀 어린 남동생을 도울 생각이 없었기에 온갖 무서운 이야기들을 들려주기 시작한다. 하지만 너무 어린 남동생이었던 그는 두려운 대상들을 두려워하는 법을 알지 못했으며 덕분에 저항력도 생겨서 두려움 없는 남자로 성장했다면서 누나에게 감사하다는 마음을 가진다고 말한다.

지옥 2 드라마가 자꾸만 생각나는 소설이다. "죽음. 계속해서 되풀아되는 것. 최악의 경우란, 반복적이고 리드미컬하며, 불변의 상태, 예측 가능, 불가피, 무기력한 것, 그 어떤 영향도 끼칠 수 없는 것, 갈고리로 우리를 낚아채서 어쩔 수 없이 끌려가게 만드는 것​​" (9쪽) 지옥에서 온 판사 드라마에서도 죄인들에게 반복적으로 죽음의 고통을 경험하게 한다.

공포란 무엇인가. 공포의 원인은 무엇인지도 짚어낸다. 엄격한 원칙주의자인 아버지는 경험론에 입각하여 증거의 절대적인 힘을 믿는 인물이다. 반면 공포의 원인은 아버지의 입장으로 설명되지는 않는다. 악몽에 등장하는 사내의 눈동자는 피로에 찌들고 원망을 머금은 창백한 눈동자였다고 그는 떠올린다. 밤마다 계속되는 악몽에 수호 의식인 기도문을 소리내어 읊조리지만 무용해지면서 밤을 점차적으로 불신하게 된다. 그리고 낮의 위력은 강해지면서 신비감을 선사하게 되면서 아침과 한낮이 황혼 녁과 밤을 지워 버렸다고 떠올리게 된다. 그렇게 잊고 지낸 밤의 악몽이 평화로웠던 60대에 갑자기 찾아오기 시작하면서 그가 두려워하던 존재가 누구였는지 깨닫게 되면서 진실을 알게 된다. 바깥세상은 안전하다고 말해준 부모님의 말이 어느 정도는 맞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 그는 내면이 더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인지하게 된다. 죽음과 공포, 불안과 두려움의 원인이 내면에서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는지 살펴보게 하는 기묘한 이야기로 마무리된다. 이야기가 다 끝나자 두 사람은 비행기의 엔진 소리를 자장가처럼 들으면서 잠든다.

아침과 한낮이 황혼 녁과 밤을 지워 버렸다. 10 _ 승객

『녹색 아이들』은 더 묘한 매력을 발산한다. 프랑스 왕실의 정원을 관리한 식물학자가 폴란드의 국왕의 주치의로 초대받게 된다. 혹독한 폴란드의 기나긴 겨울 때문에 식물학자는 식물보다 인간을 돌보게 된다는 것도 설명한다. 국왕의 질병들을 치료하는 목적으로 변방 야생 지역을 여행하는 길에 동행하게 되면서 그가 경험한 이야기가 시작된다. 수많은 전쟁을 경험한 폴란드는 잔인한 민족들의 피의 얼룩들을 기억하게 된다. 스웨덴군, 모스크바인들, 타타르족의 야만적이고 잔혹한 일들이 서술된다. 마을 사람들을 산 채로 불태우고 교수대와 사체들, 청년의 아버지 배는 찢기고 어머니와 누나는 잔인하게 강간을 당했다고 전한다. 참혹한 전쟁을 경험한 사람들의 폭력성과 야만성은 많은 문학작품들에서도 거듭 확인하게 된다. 『반쪽자리 자작』, 『면도날』, 『카시지』, 『도둑신부』, 』눈먼 암살자』, 『태고의 시간들』, 『낮의 집 밤의 집』,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에서도 전쟁의 참혹함을 확인하게 된다.

폴란드 국왕은 질병과 우울증이라는 고통을 와인과 여성으로 극복했다고 한다. 술과 여성이 순간적인 고통을 잊게 하지만 왕의 고통은 회복되지 않는다. 그러한 왕은 여행길에서 만난 특이한 사냥감인 소녀와 소년을 만나게 된다. 피부색이 초록빛인 소녀와 소년은 이색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녹색 아이들'이라고 불린 이 두 아이는 마르고 남루한 모습으로 이끼 냄새도 나는 초록 피부를 가진 아이들이다. 소녀가 왕의 아픈 곳을 손을 문지르자 고통이 호전되기 시작한다. 주치의가 뼈가 부러지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그를 보호해 줄 청년과 함께 낯선 지역에 남게 된다. 다른 일행들은 떠나게 되면서 그를 수술해 줄 의사를 기다리게 되지만 의사는 오지 않는 상황이다. 마을 사람이 급하게 불러놓은 여자와 벙어리 조수가 그의 뼈를 붙이게 된다. 그곳에서 지루한 시간을 보내면서 그는 연구하고 기록하게 되는데 연구 대상은 초록아이들이다. 소녀가 말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전해 듣는 말들을 기록하게 된다. 초록아이들이 어떤 곳에서 살고, 어떻게 살고 있는지 전해 들을수록 깊게 끌어당기는 매력을 처음으로 상상해 보게 된다.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과 우리들이 살아가는 방식이 얼마나 다른지, 무엇이 다른지, 왜 다른지 하나씩 조목조목 여러 번 되짚어보게 된다. 아이가 태어나면 모두가 부모이며 그들을 기쁜 마음으로 키운다는 것, 육식을 하지 않는다는 것, 집이 필요없다는 것, 통치자, 영주, 농민, 사제도 없는 세상을 잠시 떠올려보게 한다.

'자연이란 무엇인가?' 23

신이 뭔가요? 42

어디로 갈까? 어디로? 46

자연이 무엇인지, 신이 무엇인지, 어디로 가는 삶을 구축하고 있는지 자문하게 하는 소설이다. 기묘한 초록색 아이들의 세상과 전쟁으로 얼룩진 땅과 종교 때문에 싸우는 전쟁에서 신은 어떤 의미인지도 질문을 꾸준히 던지기 시작하는 작품이다. 작가가 움켜쥔 것들을 하나씩 펼쳐놓으면서 함께 생각해 보는 것은 꽤 유용한 여행길이 된다. 중심으로 가고 있는 삶인지, 변방으로 향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잠시 멈추게 하는 소설이다. 갑자기 모두가 사라진 마을에는 누가 사라졌고, 누가 남았는지가 중요해진다. 미래가 사라진 마을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저출산 시대의 경보등이 대한민국에도 요란스럽게 울리고 있다. 아이들이 사라진 사회는 미래를 보장할 수 없는 시대이다. 왜 태어나지 않는 것인지, 결혼을 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지 이유와 대책이 시급해지는 시대이다. 무엇을 멈추어야 하는지도 자문하면서 길을 찾게 하는 소설이다. 종교 때문에 전쟁을 치르는 인간들의 어리석음을 향해서도 질타를 아끼지 않는다. 잔혹한 고통을 피할 수 있었다는 신의 섭리에 감사하는 주치의의 모습보다는 전쟁의 반복을 멈추는 섭리가 더 절실해진다. 작가가 사실적으로 표현한 전쟁의 야만성을 곁눈질로만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경성 크리처 시리즈에서도 이에 대한 경고를 아끼지 않는다. 다른 이름으로 다른 모습으로 전쟁은 아직도 진행 중임을 우리는 목도하고 있으니 말이다.

공익보다는 늘 사익을 우선시하는 귀족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귀족이 현대사회의 누구를 의미하는지도 상징성을 띈다. 문학은 허구이지만 하고 싶은 말들을 마음껏 표출할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드라마와 영화, 문학의 허구라고 명시하는 내용의 상징성을 다각도로 접목하는 재미까지도 선사해 준 작품이다. 단편소설들이라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단편소설집이다. 짧은 시간 펼쳐지는 다양한 이야기들은 재미뿐만이 아니라 고찰하는 힘까지도 이끌어준다. 늘 무엇을 바라보고 무엇을 의식하면서 살아야 하는지 진지한 어조로 이야기하는 작가이다. 예수와 성모 마리아를 향해 통치자와 주인이 누구인지도 설명하는 문장도 기억에 남는다. 목수의 유일한 업무가 살인 도구를 만드는 사형대를 만드는 것이라고 말하는 장면도 등장한다. 십자가는 사형 도구였으며 구원의 의미로도 사용되는 모순을 이 소설에서도 만나게 된다. 예수의 직업이 목수였음을 감안하면서 읽으면 더욱 의미있는 소설이기도 하다.


목수의 유일한 업무가 살인 도구를 만드는 것. 교수대 - P19

어리고 싱싱한 존재가 모두 사라졌고, 미래도 사라졌다. - P46

귀족 / 공화국의 이익을 우선시하지 않고 늘 자신의 이익을 추구 - P18

나무 위에서 살며 땅에서 잠을 잡니다. 많이 먹을 필요가 없고, 열매나 버섯, 호두 양분 섭취. 농사를 짓지 않음. 집 필요 없음. 모든 일은 그저 즐기기 위해. 통치자, 영주, 농민이나 사제도 없습니다. 서로에게 조언 - P41

지금 당신의 눈에 보이는 사람은 당신이 보고 있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당신을 보고 있기에 존재한다. -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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