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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기완을 만났다 (리마스터판) ㅣ 창비 리마스터 소설선
조해진 지음 / 창비 / 2024년 2월
평점 :
넷플릭스 영화를 먼저 본 후 원작소설을 만났다. 역시나 소설은 영화와는 살짝 다른 분위기이다. 로기완이라는 인물의 존재는 분명히 있지만 스토리의 흐름은 다르다. 그렇기에 소설은 호기심을 충분히 충족시켜주었던 작품이다. <단순한 진심>을 읽었기에 작가의 작품은 처음은 아니다. "처음에 그는 그저 이니셜 L에 지나지 않았다. 무국적자. 난민으로 명명. 신분증 하나 없는 미등록자. 합법적인 절차 없이 유입된 불법체류자. 유령 같은 존재. 인생과 세계 앞에서 무엇 하나 보장되는 것이 없는 다른 땅에서 온 다른 부류의 사람, 곧 이방인이기도 했다." (7쪽) 영화의 로기완을 무수히 떠올리게 하는 문장이다. 그리고 오랜 시간 이 문장의 인물을 무수히 되뇌게 한다. 로기완이 영화로 작품성을 지니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인물을 파악하였을지 짐작하게 된다.
<숨그네> 소설의 책표지 그림이 무수히 떠오르는 인물이 된다. <굶주림>소설도 연상시키는 인물이다. 공산주의 체제에서 모든 것이 부족한 상황을 경험하면서 성장한 그는 성장이 멈춘 20살이다. 15살 정도의 아이로 착각할 정도의 왜소한 몸을 가진 그는 굶주림에 익숙한 날들이 많았던 인물이다. 탈북하면서 로기완의 어머니는 자신들의 신분증을 모조리 버리게 된다. 공안에 잡히면 생명이 위험해지는 상황이라 어쩔 수 없이 살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다. 포상을 받기 위해 혈안이 된 공안들에게 젊은 로기완은 노동을 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그나마 안전한 어머니가 홀로 일을 여러 개 하면서 생계를 유지하게 된다.
그는 어두운 집안에서 어머니의 노동을 바라보는 존재로만 남아 있었고 힘든 노동으로 부은 다리를 끌고 귀가하는 어머니를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가 귀가할 시간에 돌아오지 않는 상황에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인지하면서 사건을 급진적으로 전개된다. 그가 방수포에 싼 돈의 가치는 어머니의 생명값임을 알게 된다.
살아 있고, 살아야 하며,
결국엔 살아남게 될 하나의 고유한 인생,
절대적인 존재, 숨쉬는 사람 236
살아야 하는 존재가 있다. 살아있을 가치가 분명한 인생이 있다. 어머니와 아들, 간암 말기 환자와 전직 의사, 윤주와 방송작가인 화자가 있다. 다양한 인물들이 부유하는 느낌이었는데 결국에는 모두가 살아야 하는 가치가 진중하게 드러난다. 자신이 살아야 어머니가 사는 것이었던 로기완이 있다. 간암 말기 환자가 의사였던 박에게 부탁한 안락사에 대한 내막도 전해진다. 그 환자와 많이 닮았던 방송작가인 화자에게 친절하였던 이유와 헤어지는 순간 "생각보다 괜찮았다고, 그리 고통스럽지 않았다고 한번, 말해 주겠소? 고생했소. 평생을 고생이 많았지." ( 226쪽)라고 말할 때는 먹먹해진다. 안락사를 부탁하는 환자의 심정과 어쩔 수 없이 들어주었던 의사의 절박한 상황이 전해진다.
시청률을 위해 윤주의 수술을 늦추었던 작가는 의도와 다른 수술 결과에 놀라면서 도망친 자신의 모습을 회고하면서 입안에 맴돌았던 말을 어느 순간 용기를 내서 말하게 된다. 윤주가 수술로 잃어버린 감각을 방송작가인 그녀는 온전히 느끼면서 살게 된다. 미안함과 죄책감이 혼재하지만 용기가 없어서 도망친 작가는 로기완의 일기와 자술서를 읽고 그가 경험한 시공간을 직접 느끼면서 살아야 하는 이유를 내밀하게 이해하기 시작한다. 더불어 박이라고 불린 전직 의사의 이야기와 자신의 도피성 집필 여행도 하나씩 살피기 시작한다. 그리고 로기완을 만나면서 그녀는 수면 유도제와 약상자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잠들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용기가 필요해지는 순간이 있다. 도망가고 의존한다고 삶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때로는 스스로 인생을 받아들여야 새로운 삶이 시작되기도 한다. 로기완이 고아원에서 아이들에게 폭력을 당하면서도 참아낸 이유, 벨기에가 부여한 권리를 모두 포기하고 영국으로 간 로기완의 선택도 이해되기 시작한다. 연인을 위해 자신의 전 재산을 쥐여준 그의 사랑이 그를 살아가게 하는 힘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숨 쉬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절대적인 이유가 더욱 명확해지기 시작한다.
박이라고 불리는 그의 삶도 다르지가 않다. 그가 살아야 하는 이유와 의사를 그만둔 마지막 환자의 부탁을 들어주면서 의무가 아닌 관심으로 로기완을 찾아간 박의 발걸음과 두 손의 물건들이 진실하게 전달된다. 살아야 하는 사람들의 절박한 상황들을 보게 한다. 유럽의 선택들과 한국 대사관의 반응도 기억하게 된다.
소설이 집필된 이유가 이야기를 통해서 드러난다. 종교와 국가, 대사관, 경찰, 화려한 거리, 가난한 거리는 상징성을 띈다. 크리스마스 이브날에 로기완을 폭행한 고아원 아이들의 모습과 산타의 선물을 기다리는 밤은 이질적이고 상반적인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대사관의 비협조적인 반응과 무관심적이고 사무적인 태도, 속이면서 권리를 찾으려는 사람들과 진정성을 증명할 수 없는 상황에 내몰린 기구한 사연들로 절망과 불안한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도 있음을 보게 된다.
로기완에게는 기적과 같은 은인들이 있었는데 고아원의 엘렌, 사무실의 흑인 직원, 박이라고 불렸던 전직 의사의 따스함이 부각된다. 화려한 거리, 크리스마스의 의미는 무채색이 되어버린다. 종교와는 상반되는 사회의 모습이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절박한 로기완에게 기회를 주고 따스한 눈빛과 길을 열어준 손길과 마음을 기억하게 된다.
자진해서 청소와 설거지, 세탁일을 한 로기완의 노동의 의미는 죽은 어머니의 고단한 삶을 이해하기 위한 노동이었음을 이해하게 된다. 살아야 하는 이유가 고귀해진다. 그냥 사는 것이 아니라 인생을 허비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가 두드러진다. 로기완이 살아야 하는 이유, 박이 살아가는 이유, 작가가 윤주에게 용기내어 살아야 하는 이유가 드러난다.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야 하는 것들이 있다. 나약하지 않아야 하는 것들이 있다. 아낌없이 살아야 하는 이유가 선명해지는 이야기이다. 공항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방송 작가에게 말해주는 박의 대화에 방점을 찍게 되는 소설이다.
때로는 미안한 마음만으로도 한 생애는 잘 마무리됩니다. 222
의도와 관계없이 맺어지는 사회적 관계들,
관습 혹은 단순한 호감에 의해 만들어지는 수많은 커뮤니티,
실체도 없이 우리 삶이 테두리를 제한하고
경계 짓는 국적이나 호적 같은 것들은
혼자가 아니라는 위로는 줄 수 있겠지만
그 위로는 영원하지도 않고 진실하지도 않다.
회사의 이름과 전화번호가 프린트된 명함,
출생과 죽음, 결혼과 건강을 기록하는 관공서의 수많은 서류들도
개인의 절대적인 존재감을 증명해 주지는 않는다.
기념사진, 약속과 일과를 적어 내려간 수첩,
여권 속의 스태프들, 녹슨 열쇠, 책의 접힌 페이지 같은 것들 역시
우리 삶의 부분적인 단서는 될 수 있을지언정
생애 전체를 관통하지는 못한다...
몸의 리듬마저 변하지 않는 소속감을 약속해 주지 않는다.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