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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stic River

 

방향은 이미 정해져 있고, 그 일방통행로 속에서 인간은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한다. 이런 인간에게 남는 인생이란 결국 자기 합리화와 회피적 망각 뿐이다. 똑같은 상황이 끊임없이 돌아오고, 그 앞에서 살아남기 위해 인간은 스스로 무뎌져야 한다.

여기서 人間史는 성숙이나 자각이 아니라 억압된 회한과 무감각의 무한 축적으로 귀결된다. 삶은 상표만 달리 한 채, 끝도 없이 동일한 폐기물로 쌓이기만 하는, 쓰레기 하치장의 산과 같다. 난지도 위에 꽃길과 공원을 만들듯이 우리는 단지 포장만 바꿈으로써 인생을 그야말로 '견딘다.' 그리고 이 영화는 이렇게 잘 견딘다는 사실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를 마지막 퍼레이드 장면에서 보여준다. 견디는 일을 퍼레이드로 바꿀 수 있는 능력, 악몽을 길몽으로 변화시키는 이 놀라운 능력 덕에 인간은 공룡 이후 지구에서 가장 번창하는 종이 되었다.

영화의 핵심은 세 명 중 한 명에 의해 차의 빈 자리는 꼭 채워져야 되고, 그 한 명은 자기 이름을 다 쓸 수 없게 되어 있다는 (일종의 섭리와 같은) 구도인 듯 하다. 그 구도에 인간이 손을 댈 구석은 어디에도 없다. 영화에는 인간이 어쩔 수 없는 차원이 밑에서부터 발목을 부여잡고 있고, 위로부터 어깨를 내리누르고 있다. 그리고 데이브가 죽기 전에 남긴 마지막 말처럼 아무런 준비도 되지 않은 채 삶은 중단된다. 그가 죽은 후에도 어느 누구에게도  開明은 뒤따르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이 준비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누구나 어렴풋이 알지만 스스로 무시할 뿐이다. 아내의 품에 안겨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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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달프 2003-12-18 1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찬욱의 '올드보이'든, 이스트우드의 '미스틱리버'든 모두 호흐의 <어머니와 아이들>이란 그림 속에서 창밖을 응시한 채 뒤돌아선 아이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소위 걸작이라고 뇌까려지는 것들은 대개 안보이게 초월적이다. 현실을 맹렬하게든, 나태하게든 어떤 방식으로 살아도 그걸 극한으로 몰아붙이면 끝이 보이고 결국 낭떠러지 앞에서 망연자실해진다. 이런 태도를 '종교적' 태도라고 봐야 할까? 아마도 종교적인 것이란 스파크처럼 번쩍하다 사라지는 것이리라. 사람이 손대면 개구리가 된다.???

간달프 2003-12-18 15: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에서 한 남자는 범죄자로, 다른 한 사람은 형사로 나온다. 마치 <반지의 제왕>에서 인간 세계를 의미하는 Middle Earth가 천사와 악마가 공존하는 공간이듯 그 둘은 서로를 적대적 보충물로 삼는 하나의 (온전해 보이는) 세계, 즉 인간의 세계다. 그런데 그 세계엔 구멍이 있다. <반지의 제왕>에서는 그것이 '절대반지'로, <미스틱 리버>에서는 야구공을 삼킨 하수구 구멍으로 보인다. 이 구멍은 세상의 온전함을 위협하는 외부로부터의 침입이다.

간달프 2003-12-18 2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른 식으로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미국의 역사에 대한 비극적 알레고리같은 것으로? 제 이름을 다 쓰지 못하고 잊혀진 미국 역사 속의 존재들에 대한 이야기로... 공동체적 봉합(surture) 행사로서의 퍼레이드, 데이브를 납치한 '헨리'와 '조지'라는 이름이 주는 능글맞음, 범죄와 정부(형사)의 공모적 뉘앙스, 모든 죄악으로부터 자신들을 지켜주는, 징그러운 family value... 가히 "국가의 탄생" 수준이다...
 

이렇게 네덜란드 회화에서 위상의 전복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그 전복을 야기한 당사자들도 아마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 같다. [...] 붓의 힘 덕택에 그들은 사물들이 미학적 찬미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 윤리적 찬미의 대상이라는 것을 입증할 수 있었다. 일상생활의 재현을 가능케 했던 애초의 도덕적 명분은 이제 뒷전으로 밀려나게 된다. 일상적 미덕의 아름다움을 발견한 화가들은 이제 그 미덕을 규정하는 입법자가 된다. 회화는 이제 아름다움을 반영하는 거울이 아니라 아름다움을 환히 드러내주는 빛의 원천이 된 것이다.

 츠베탕 토도로프, <일상 예찬>, 이은진 역 (뿌리와이파리,2003),  p.167

이렇게 네델란드 일상생활의 회화를 일정한 시기 속에 가두어 살펴보는 것은 그 회화를 평가절하하기는커녕 오히려 무언가 예외적인 것이 특정한 시기에 일어났다는 것과 그 현상을 우리가 이해해야만 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인간에 의한 창작의 역사, 즉 예술, 문학 또는 사상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유난히 축복하고  싶어지는 순간들이 있다. 그런 순간에 인류는 자신에 대한 새로운 비전으로 더욱 풍요로워지고, 이어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게 된다. 이런 유형의 순간들을 외적으로 알아볼 수 있는 표시는, 평균적인 재능을 가진 화가들마저 걸작을 만들어내는 순간이라는 것이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회화와 프랑스 인상주의 회화가 그 두 가지 예고, 17세기 네델란드 회화가 또 다른 예다. 이 시기에 역사적, 지리적 상황과 거기서 생겨나는 창작물간에 완벽한 등식이 이루어지고 형태와 의미 간에 완벽한 등식이 이루어진다. 화가들은 이 사실을 모르는 채 이런 등식을 활용하게 된다.(그리고 이 등식은 또, 나타날 때만큼이나 묘연하게 사라져버린다.) 그저 배우기만 하면 얻어지는 순수한 기교나 비결이 문제가 아니라, 이런 시기에는 무언가 좀더 본질적인 것, 세계와 삶에 대한 해석 자체와 연관이 있는 그 어떤 것이 작용한다. 이 현상은 거장다운 예술적 솜씨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적 지혜의 문제다. 비록 인간적 지혜가 예술적 형태를 통해서만 표현된다고 할지라도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그림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그림이 전하는 메시지를 해독하거나 적어도 그 비밀을 건드려보기라도 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축복받은 순간들은 언제나 인류에게 소중하기 때문이다.

 같은 책,  p.215-216

 Hooch,Pieter de <어머니와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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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달프 2004-01-10 2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토도로프가 17세기 네덜란드 장르화를 "예외적인" "순간"으로 명명하고 있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에게 그것은 일관된 발전 과정의 한 단계가 아니라 역사 속에서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는 순간적인 각성이 아닐까? 그것은 영구적 완성이 아니라 이행의 순간이다. 시대와 인간과 예술이 한 데 모여 순간 스파크를 일으키고 사라진다. 눈 뜬 자 볼 것이고 눈 감은 자 지나칠 뿐이다.
 


올드보이

 

우진(유지태 분)이 오대수(최민식 분)에게 궁극적으로 일깨우고자 했던 것은 오대수가 자신의 일을 '기억조차 못한다'는 사실, '인지 불가능한 상태', '무지'였다. 왜 기억하지 못했을까? 왜 그리 무감각했을까? 이유는 그가 그의 혀를 놀렸을때 그는 그 자리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 자리를 대신 채운 것은 (질서와 안녕을 보지하려는) 익명적이고 폭력적인 '사회'였다. 대수가 평범한 소시민으로 그려지는 것은 그런 이유때문일 것이다. 평범할수록 진부할수록 '사회'의 무의식적 대리자(편재하는 경찰관)가 된다. 그리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타자에게 가공할 상처를 입힌다.

따라서 우진은 그에게 처방을 내린다. 1단계는 대수를 치명적인 사회의 오염으로부터 격리시키는 것, 2단계는 사회에 의해 오염된 대수의 머릿 속을 복수심으로 말끔히 청소하게 하는 것(그래서 감금되기 전의 대수와 감금 후의 대수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 순수한 복수심의 화신이자 사회의 그물망 밖의 존재...) 3단계는 그를 다시 사회("더 넓은 감옥")로 돌려보낸 후 우진과 유사한 경험(근친상간)을 겪어보게 한다. 4단계는 자신의 과거를 '정말로' 자각하고 스스로 혀를 자르고 자기 딸을 애인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일이다.

혀를 자르는 부분은 외디푸스 신화를 연상시키지만 방향은 정반대다. 외디푸스는 자기 눈을 찌르고 어머니-아내를 떠나지만, 오대수는 자기 혀를 자르고 딸-아내에게로 돌아간다. 외디푸스 신화는 아들을 희생양으로 삼아 사회/가족제는 보호된 후 모두가 불행해지지만, <올드보이>에서는 복수가 완료되면서 사회/가족제는 파괴된 후 모두가 행복해진다.

르네 지라르의 개념틀을 빌자면, <올드보이>에는 두 가지 폭력이 있다. 순수한 폭력과 불순한 폭력... 오대수의 혀는 순수한 폭력이다. 이 폭력은 사회를 보호하는 폭력으로 사회 구성원의 '무지', '인지불능'을 조건으로 행해진다. 부주의함은 이 폭력의 핵심적 성격이다. 물론 당하는 놈에게는 그냥 말 그대로 '폭력'이다. 우진의 누나가 죽어야 했던 것처럼... 우진이 대수에게 가하는 폭력은 불순한 폭력이다. 순수한 폭력은 무지의 상태에서, 사회(질서)의 정당화를 통해 익명적으로 행해진다. 반면 불순한 폭력은 주인이 확실하며 사회/질서에 대해 위협적이다.

복수심은 불순한 폭력이다. 그것은 법이나 공권력과 같은 것에 의존해서 해소되지 않는다. 그것은 대수가 산낙지를 질겅질겅 씹는 일, 우진의 뼈와 살을 아작아작 씹어먹어 버리겠다는 충동에 가깝다. 복수심으로 이빠이 충전된 생명력...  여기서 왠지 모를 희열을 느끼는 나는 변태일까? 복수가 완수되면 생명력도 고갈되고 삶도 지속될 수 없다. 우진은 자살한다. 대신, 죽으면서 자신을 닮은 種을 하나 복제하고 떠난다. 어떤 면에서 보자면 대수에게 우진은 은인이다. 진부하고 흐리멍텅하며 미분화된 상태의 대수라는 '인간'을, 눈을 부라리며 생명력으로 가득찬 '야수'로 업그레이드시킨다. 퇴화를 통한 진화일까? 혹시 이 영화 해피엔딩일까?

 


고야, <1808년 5월 3일>, "총을 쏘는 프랑스군의 뒷모습에는 얼굴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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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달프 2003-12-01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평민의 무기는 익명적 다수성이고 귀족의 무기는 동원적 전능성이다. 평민은 다수의 그림자 속으로 자기 얼굴을 숨기고, 귀족은 자기 얼굴에 잔인함과 자애함의 이중가면을 씌운다. 귀족의 도덕은 폐쇄적이고 근친적이다. 반면 평민의 도덕은 번식적이다. 평민의 힘은 번식과 확대를 통해 강화되지만, 귀족의 힘은 독점과 집중을 통해 강화된다. 대수와 우진의 싸움은 평민의 도덕과 귀족의 도덕 사이의 싸움이기도 하다.

간달프 2004-01-10 2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찬욱 영화에는 공통적으로 염세적이다. 인간은 본디 착한데 사회는 인간을 그렇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 사회가 만악의 근원이다. 그리고 그 만악의 근원을 파괴하려는 자 조차도 그 악에 발목이 잡혀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착하든 악하든 무슨 짓을 하든 숙명적으로 자멸한다. 여기서 박찬욱의 위치는? 혹시 스스로 선지자연하는 것인가? 말세를 전파한 요한 흉내내기인가?
 

지금까지 살펴본 것을 통해 어떻게 해서 다음과 같은 일이 생기는지 이제 쉽게 설명할 수 있다. 즉 우리가 비록 의무라는 개념 아래서 법칙에 굴종하는 것을 생각하기는 하지만, 동시에 그 의무라는 개념 때문에 자기의 의무를 완수하는 인격에 대해 어떤 숭고함과 존엄성을 생각하게 되는 이유를 말이다. 인격이 도덕법칙에 종속되어 있는 한 인격에 아무런 숭고함이 없지만, 동시에 인격이 바로 그 '법칙을 주고' 있으며 오직 그 때문에[스스로 법칙을 주고 있기 때문에] 법칙에 종속되어 있는 한 분명 숭고함이 있는 것이다. 또한 앞에서 보여주었듯이, 공포나 경향성이 아니라 오직 법칙에 대한 존경심만이 행위의 도덕적인 가치를 줄 수 있는 동기이다. 우리 자신의 의지가 자기의 준칙에 의해 가능한 보편적인 법칙을 주어야 한다는 조건을 지킬 때에만, 우리에게 이념으로서 가능한 의지가 존경심의 원래 대상이다. 그래서 인간의 존엄성은 보편적으로 법칙을 줄 수 있다는 점에 있다. 다만 그 자신도 그 '법칙주기'에 종속되어야 한다는 조건이 있다.

 임마뉴엘 칸트, <도덕 형이상학을 위한 기초놓기> 이원봉 옮김(책세상, 2002)  p.10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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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노프스키가 주장하는 것처럼, 원근법의 대두는 서양과학의 대두와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  [...]  과학의 공간은 인간의 구체적 체험을 단순화한다. 어떻게 보면 이 단순화는, 그림을 두고 말하자면, 그 관점의 단순화에 관계되어 있다. 퍼스펙티브의 공간에서 모든 것은 보는 주관의 관점 - 그것도 한 눈으로 보는 관점에서 조직화된다. 이것은 풍경을 체험자로부터 분리시키는 일을 한다. 그리하여 주관과 객관이 혼융되어 체험되는 풍경은 체험이기를 그치고 주관의 저쪽에 있는 객관적 사실로 바뀌게 된다. 결과는 체험적 사실의 왜곡이며 또 빈약화이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체험자로서의 인간의 단순화일 것이다. 원근법에서 체험자는 단순한 눈이 된다. 원근법에 있어서의 주체 또는 보는 눈의 문제를 면밀하게 분석하고 있는 위베르 다미쉬가 이 단순화를 설명하는 것은 빌건대 (사실은 라캉을 인용한 것이지만), " ..... (그림의) 기하학적 평면의 주체로서 나는 소거된다." 이것은 육체를 가지고 있으며 욕망을 소유한 주체로서의 자아가 소거된다는 것이지만, 더 확대하면 기하학적 단위 이상의 것으로서, 사회와 문화 그리고 자연의 신비에 대해 유연하게 노출되어 있는 자연스러운 자아가 억압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이러한 소거로 인하여 가능해지는 세계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 원근법에서의 자아의 소거 또는 더 정확하게 수학화는 이것을 받아들이는 자아에게 무한한 새 가능성과 자유를 가져온다. 데카르트이 사유하는 자아의 세계는 무한한 공간 속에서 정연한 수학적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뉴튼 역학의 세계다. 뉴튼의 세계에서 방향이나 한계가 없이 움직이는 물체는 물체이면서, 이것이 수학적으로 표현되는 운동법칙을 따르는 한, 수학적으로 사유하는 자아이다. 이 사유는 방향이나 한계에 제한됨이 없이 움직이는 원리이며 또 그 실체다. 수학화된 과학의 발전이 인간에 의한 자연의 정복으로 나아가는 것은 이러한 원칙적 연결의 당연한 결과이지만, 여기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그것의 외면 세계에 대한 관계보다도 그것의 근본에 있는 인간 해방의 가능성이다. 그림의 경우로 말하건대, 이러한 자유에 대응하는 것이 근대 서양화에서 보는 바 기법과 소재의 다양한 발전이다. 이에 비하면 동양화는 매우 단조로운 그리고 억압적일 수도 있는 틀 속에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서양화에서 공간은 보는 사람의 관점으로부터 어디에서나 구성될 수 있는 것인데 대하여, 동양화에서 그것은 특정한 사물과의 관계 - 산과 물과 바위와 구름 또는 선택한 화초와 수목을 통해서만 암시될 수 있다. 그림의 특징들은 그대로 다른 인간활동들의 특징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김우창,  <풍경과 마음> (생각의 나무, 2003)  p.118-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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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달프 2004-05-09 1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하자면 서양화의 관습은 인과성(causality)과 범주성(category)의 측면이 강하고 동양화의 관습은 인접성(contiguity)의 측면이 강하다고 할 수 있을까? 니스벳의 <생각의 지도>를 보면, 호랑이, 소, 풀의 예를 주고 연관있는 것 끼리 묶으라고 하면, 서양인은 호랑이와 소를, 동양인은 소와 풀을 연관시키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호랑이와 소를 묶어내는 것은 '눈'의 문화고 소와 풀을 묶어내는 것은 '생활'의 문화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러고 보니 어떤 원로 영문학자가 눈을 소재로 서양문화사를 해석한 책이 출간된 기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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