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근대철학
서양근대철학회 엮음 / 창비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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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비로소 볼만한 근대철학 입문서가 나온 듯 하다. 소장 및 중진 철학자들을 중심으로 해서 엮어진 이 책은 말로만 무성하던 근대철학의 본색을 그 배경부터 중심논지를 최근의 국내외 연구성과를 포괄하면서 밀도있고 균형있게 다루고 있다.

외국어로된 근대철학 입문서로는 흔히 코플스턴의 철학사가 추천되었지만 본서는 상대적으로 더 적은 분량이면서도 더 명료하고 긴밀한 듯 하다. 여러 연구자가 공동 집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내용 및 용어적 통일성도 잘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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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노바 바베 역사 인물 찾기 12
칼린디 지음, 김문호 옮김 / 실천문학사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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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자신이 사는 세계 속에 사는 사람과 자신이 사는 세계 밖에 사는 사람이다. 우리는 손쉽게 전자를 현실주의라고, 후자를 이상주의자라고 부른다.

우리가 흔히 성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대개 후자에 속했다. 그들의 마음은 이 세계 밖에 있으면서 그들의 행동은 이 세계 안으로 향한다. 예수가 그랬고 붓다가 그랬다. 비노바 바베도 그럴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마음을 이 혼탁하고 모호한 이 세계 속에 두지 않기에 흔들리지 않으며 명료하고 순수한 행동을 자연스럽게 이끌어낸다. 혼탁을 정상으로 살던 사람들에게 그런 삶의 예는 일종의 빛, 모범이 된다. 순수한 선함 앞에 우리는 모든 잣대와 계산을 놓아 버린다.

어디선가 현대야 말로 망각되어온 영성을 올바르게 되살려야 할 때라는 외침이 자주 들려온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쾌속과 소란 속의 삶 속에서 영성은 느림와 침묵 속에서 자신의 순수한 마음 속에 변치 않아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깨우치도록 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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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미국을 움직이는가
소에지마 다카히코 지음, 신동기 옮김 / 들녘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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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서 책을 보고 그 자리에서 골라 구입한 후 카페에 앉아 읽기 시작했다. 얼마간 읽다가 다시 서점으로 가서 다른 책으로 바꿔버렸다. 이유는 정보의 양이 아니라 그 정확도와 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선 저자가 영어학습서나 쓰던 완전 아마추어라는 사실부터 미덥지 않았지만 그런 선입견을 제거하고 보려고 해도 이 책은 너무 편협하다.

저자의 시선은 미국의 주류 와스프, 그 중에서도 민주당에서 공화당으로 이적한 소위 '자유의지론자들'과 동일시되어 있다. 그는 강자와의 동일시를 통해 미국의 여러 정치적이고 지적인 세력관계를 기술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위험분산적 관점에서 세계 평화주의를 주장하고 있다고 매도되고, 사회복지와 어퍼머티브 액션을 주장하는 주장들도 공상적 이상주의로 편리하게 환원된다. 다각도로 모색되는 시민운동집단도 부도덕한 집단으로 간단하게 매도된다.

저자의 '자유주의'는 곧바로 왜곡 역사교과서를 간행하는데 중추적 역할을 한 '자유주의 사관 연구회'를 연상시킨다. 이들의 극단적 자유주의는 보편을 인정하지 않으며 아전인수격인 편의주의에 함몰되어 있다. 얘네덜 식의 '자유주의'란 '주관주의' '상대주의' 그리고 주관을 절대로 만드는 '무력 우선주의'에 불과하다.

책에 분주하고 산만하게 이 사람 저 사람의 사상이 굴비엮듯이 엮이고 생선토막처럼 잘려서 전시되는데, 정말 딱하다. 한나 아렌트가 스탈리니즘을 나찌즘과 동일시해서 영미계 신보수주의자들의 사랑을 구걸했다거나, 반대로 하이데거나 칼 슈미트는 흔들리지 않고 지조를 지켰다는 식의 서술을 보면 구역질이 날 정도다. (아렌트는 이미 자신의 저서가 신보수주의자에 의해 사회주의나 맑시즘의 포기로 오해되는 것에 대햇 성토했다) 이거 어디서 많이 보던 논조다. 썬글래스에 가죽자켓을 입고 주먹을 불끈 쥔 마초 사진으로 광고하는 산케이 신문을 연상시킨다. 우리는 무리지어 다니지 않는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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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슈비츠 이후 예술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41
이상빈 지음 / 책세상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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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다가 흥미로운 현상에 대해 알게 되었느데, 쇼아나 홀로코스트에 대한 영미쪽의 태도와 독일과 프랑스 같은 대륙계의 태도가 좀 상이하다는 점이었다. 영국과 미국 쪽에서 쇼아는 별 장애없이 끊임없이 다양한 예술장르에 의해 미학화되었던 반면, 독일과 프랑스는 미학화에 대해 머뭇거림과 신중함이 배어나온다는 사실이다. '쇼아'란 인류 역사상 반복적으로 드러나는 인간의 필연적 본성의 발현일까 아니면 그 유래를 찾을 수 없는 극악한 악의 현시일까?

영미계가 역사적으로 쇼아의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왔기 때문에 쇼아를 추상화된 악으로 단순화시킬 수 있었던 반면 대륙계의 신중함에는 그런 전자의 태도가 배여있는 듯 하다. 우리는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발표했을 때 그녀의 '악의 평범성' 개념이 영미계 인사들의 호된 질책을 받았음을 기억한다. 영미의 승전가들에게 쇼아와 홀로코스트는 바다 건너 그들, 혹은 타자의 일이지 자신들 속에 내재된, 그래서 누구에게나 들러붙어 나오기를 기다리는 평범한 어떤 것이라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쇼아의 실행 주체였던 독일인과 독일에 일지감치 항복해서 그것을 거들었던 프랑스인들에게 쇼아는 자신의 끔찍한 상처를 까발리는 일이었으니...

쇼아 문제는 또 하나의 문제를 야기했다. 그것은 소통의 문제다. 사람들은 자신이 믿을 수 있는 것만을 믿는 경향이 있다. 쇼아의 생존자의 증언은 마치 지옥에서 생환한 사람들이 지옥경험을 늘어놓는 듯이 들린다. 생존자들이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했을때 그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의 시큰둥하고 빗나간 듯한 반응은 증언자가 입을 스스로 다물게 한다. 란츠만의 [쇼아]에 등장하는 증언자들의 얼굴표정이 바로 그랬었다. 그들은 그 지옥같던 시절을 왁자하게 지껄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웃는 듯 우는 듯한 굳은 얼굴로 어정쩡하게 서있다. 아마 이 모순적인 상황으로부터 역시 쇼아를 경험했던 철학자 엠마뉴엘 레비나스의 '타자의 얼굴'론이 도출된 게 아닐까? 우리는 그들의 경험 앞에 함부로 입을 놀려서는 안된다. 우리가 그들의 경험 앞에서 할 수 있는 행동은 침묵과 눈물, 그리고 내 자신 속에 만연한 악에 대한 참회다.

이 책은 20세기 중반 이후 유럽문화 속에서 '쇼아'가 차지하는 위치를 문학, 역사, 영화에 걸쳐 따져보고 있다. 저자 역시 느끼는 문제지만, 무슨 이유인지 한국의 아카데미즘은 유럽을 이해하는 단초로써 '쇼아'를 지속적으로 배제한 듯 하다는 것이 저자의 문제의식이다. 나는 이 역시 결국 일제부역자들의 나라로써 쇼아적 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한국의 청산되지 못한 지배문화가 반영된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우리의 지배층은 인간의 존엄을 무차별적으로 짓밟아 온 대동아공영권에 자의든 타의든 결탁해온 인물들이었고 그들은 조선인 강제징용이나 강제 위안부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쇼아를 남의 일처럼 느끼고 싶어 하는 내면 심리의 결과가 아닐까? 역사는 이런 식으로 또 제자리로 돌아올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비관이 다시금 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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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랑 바르트가 쓴 롤랑 바르트
롤랑 바르트 지음, 이상빈 옮김 / 강 / 199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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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에 대해 이야기하기...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이 일을 행하며 그 효과는 무엇일까? 우리나라의 경우 자화자찬류나 성공시대류의 이야기 방식이 주종을 이룬다. 자신이 어떤 상황에 던져졌고 그 상황을 어떻게 극복해서 지금 이 자랑스런 자리에 서게되었는가라는 어쩌면 아주 안일한 이야기방식이다. 진정으로 자기자신과 인생을 이야기하려면 자기 자신을 낳은 뿌리radix까지 핥아봐야 한다.

우리는 이런 것들을 성 어거스틴이나 몽테뉴, 루소와 같은 세계적 지성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느낀다. 이 책 Roland Barthes par Roland Barthes도 그러하다. 하지만 약간 다른 것은 이 책을 통해 그가 곱씹는 것은 그가 그때까지 고안하여 가지고 놀았던 개념들, 기호들에 다시 구멍을 내고 모작을 한다. 이건 일종의 자기 복제와 해체의 유희이고 순간순간 깨닫는 정신의 일면일 듯 하다. 세워지는 순간 동시에 가리워진 부분을 들추어 내는 아이러니 정신이다. 한 장 한 장 야금야금 읽어가며 즐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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