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차르트 - 한 천재에 대한 사회학적 고찰
노르베르트 엘리아스 지음, 박미애 옮김 / 문학동네 / 199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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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의 압력은 비둘기의 비행을 어렵게 하는 듯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는 칸트의 말은 통속적으로 '타고난' 천재로 인식되는 모짜르트에게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천재과 사회의 관계는 어떤 것일까? 천재를 순전히 개인적 특성으로만 환원시켜 생각할 경우 사회 혹은 관습과 제도란 오직 장애물로만 비춰질 것이다. 그러나 역자가 후기에서 말한대로 '예술의 창조적 표현은 관습의 형태에 맞서는 저항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저항 '덕분에' 완성되는 것이다.'

모짜르트라는 인간의 퍼스낼리티는 천재라는 예술적 존재와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다. 피터 새퍼의 희곡을 밀로스 포먼이 연출한 영화 [아마데우스]를 보면 모짜르트에 대한 사회학자 엘리아스의 시각이 엿보인다. 아버지의 권위에 눌려 살면서 그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채 어린애처럼 사는 모짜르트의 이율배반적인 모습은 엘리아스가 포착해낸 또 다른 사회적 관계인 궁정 사회와 모짜르트 사이의 이율배반적 관계에도 오버랩될 수 있다. 천재란 단순히 순수하게(미적 세계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듯 다양한 사회적 관계 속에서, 특히 모순적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는 것이다.

아쉬운 점도 있다. 아마 사회학적 시각의 한계이겠지만 모짜르트를 천재로 규정해내는 요소들 중 가장 중요한 특성은 바로 작품이란 점이다. 따라서 엘리아스는 인간 모짜르트와 그가 속한 사회의 관계에만 천착할 것이 아니라 사회와 작품사이의 관계도 추적했어야 했을 듯 하지만 이 점은 좀 소홀한 듯 하다. 사회학자의 영역이 아니라고 여기기 때문일까? 문학의 경우 문학 텍스트와 사회의 관계, 즉 정전과 사회의 관계를 따지는 문학사회학이 그런 것인데 음악 사회학적 시각으로 살펴보는 것이 논의의 긴밀함과 설득력을 더 높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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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와 고양이에 관한 우습고도 놀라운 진실
리처드 토레그로사 글 그림, 이상원 옮김 / 푸른숲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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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다. 이 책은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단편적인 사실들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실들은 저에게 일종의 끝없는 연상작용을 일으키게 했고, 몇 가지 다른 책들이 머릿 속에 떠오르도록 만들었습니다. 다음은 그 결과입니다.

제가 여기서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것은 '개와 고양이'라는 짝패를 다룬 책들에 기대어서 '인간을 보는 두 가지 시선'입니다. 개와 고양이에 대한 팩트들로부터 시작해서 개와 고양이가 넌지시 암시하는 각각의 인간성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이분법을 형이상학적인 의미로 확장해보고자 합니다.

우선 팩트들부터 수집해 볼까요? 리처드 토레그로사의 [개와 고양이에 관한 우습고도 놀라운 진실]이란 책을 소개합니다. 개와 고양이에 대해 구체적이고 다양한 사실들, 일화들을 담고 있지요. 개는 주인을 나폴레옹으로 알고, 고양이는 주인을 친구로 안다죠? 그래서 그런지 쿠빌라이칸은 수천마리의 개를 키우는 애견가였고, 나폴레옹은 불현듯 출몰하는 들고양이를 두려워했답니다. 군주적 인간은 개를 좋아하고 고양이를 두려워 합니다. 미국에서 고양이를 키우는 주인들은 95%가 고양이에게 말을 건다더군요. 반면 개를 키우는 주인들은 말을 거는 대신 자기 말을 무조건 따르도록 훈련을 시키지요. '굴러!', '손 줘', '누워', '일어나!' ^^ 개는 동족을 만나면 방방 뛰면서 꼬리를 흔들며 시끄럽게 짓어대죠. 허나 고양이는 마치 부처 앞의 마하가섭처럼 저희들끼리 조용하게 씩 웃어줍니다. '염화미소!'^^

자 이제, 한 단계 더 나아가 볼까요? 프랑스의 좌절한 철학자이자 성공한 소설가인 미셀 뚜르니에에게로 가봅시다. 그의 [소크라테스와 헤르만헤세의 점심]입니다)는 개와 고양이를 인간을 두 부류로 나누는 개념틀로 이용합니다. 개는 들척지근 한 것을 좋아하지만 고양이는 질색을 합니다. 고양이는 쓴 것을 얼마든지 감내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안락한 달콤함을 역겨워한다는 점에서 아주 독립적이죠. 반면 개는 끊임없이 자기를 보살펴주고 자기에게 명령내려줄 주인 혹은 집단을 찾습니다. 장콕도는 이를 가르켜 경찰견은 있어도 경찰고양이는 없다는 말로 대신합니다.

뚜르니에는 개와 고양이의 성정을 통해 일차적 인간과 이차적 인간이란 두 부류의 인간을 유추해냅니다. 일차적 인간이란 주어진 것을 알파와 오메가로 아는 사람을 말할 겁니다. 그는 현실을 최우선으로 여기며, 과거와 미래는 부차적인 요소일 뿐이지요. 반면 이차적 인간은 노스텔지어와 유토피아, 즉 이미 지나간 것과 아직 없는 것에 더 집착하지요. 그래서 이차적인 인간은 현실에서의 감각을 그리 중히 여기지 않습니다.

뚜르니에의 글은 고양이 옹호론 냄새가 납니다. 뚜르니에 자신이 실제로 수도승처럼 전원에 틀어박혀, 고양이처럼 있는 듯 없는 듯 자세를 낮춘 채 고립을 즐기고 있는 모습 자체가 그걸 말해주지요. 뚜르니에의 글을 보던 저 역시 그의 글발에 말려들어 고양이를 숭배하게 되었지요.

이제 이야기를 좀 형이상학적인 차원으로 한 층 더 올려놓아 봅시다. 문학평론가이자 저널리스트인 송상일의 [국가와 황홀]을 승강기로 삼겠습니다. 그는 '존재와 무', '국가와 시(즉 황홀)'을 마주 세웁니다. '존재'는 국가, 질서, 얼, 주체, 사유, 안(內)에 복무합니다. 반면에 '무'는 아나키, 얼빠짐, 니르바나, 구멍, 바깥(外)에 봉사합니다. 여기서도 개와 고양이의 성정이 교차할 듯 합니다. 개는 주인(국가 혹은 질서)으로부터 존재(주체)를 부여받고 이에 충실히 복무합니다. 반면에 고양이에게 주인은 자기의 정체성을 규정해주는 존재가 되지 못합니다. 고양이는 그저 문틈 사이로 불어오는 산들바람에 자기 수염이 흩날리게 놔두는 상태를 더 좋아하겠죠. 존재 대신 고양이는 미궁(즉 구멍)을 탐험합니다. 미궁의 끝은 적멸의 경험이고, 그것은 시의 영혼이지요. 시의 영혼은 그래서 창조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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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 - 프랑스에세 1
미셸드 몽테뉴 지음 / 인폴리오 / 199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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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란 요즘 말로 흔히 쓰는 수필이라든지 에세이라든지, 혹은 몽테뉴의 이 작품에 상투적으로 붙이는 수상록이나 명상록이라든지 하는 말과는 그 성격이 아주 다른 말이다. 역자가 이미 말하고 있듯이 에세eassai란 12세기 라틴어 exagium(무게 달아보기)에서 말미암은 말이다. 몽테뉴는 자신의 에세를 통해 뭘 달아보려는 지에 대해,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뭘 달아보지 못하는지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세상 사람들은 늘 마주 있는 것만 바라본다. 나는 내 눈길을 안으로 돌려, 처박고는, 거기서 굴린다. 저마다가 자기 앞만을 바라본다. 나는 내 속을 들여다보고 나는 나한테만 볼 일이 있어, 끊임없이 나를 살펴보며, 나를 검토하고, 나를 맛본다. 남들은 늘 딴 데로 가고 있으며, 제대로만 생각해본다면 그걸 깨닫게 될 것이다. 그들은 늘 앞으로만 가고 있어 아무도 자기 자신 속으로 내려가려들지 않으며, 나는 나 자신 속에서 뒹구는 것이다.'

몽테뉴는 자신이 글을 쓰던 시절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 둘레에 모든 것이 무너지고 있다.' 르네상스 시절의 호기로운 자신감은 서서히 뭉개져가고 내란의 기운이 유럽 구석구석에서 들썩거리기 시작할 때 몽테뉴는 르네상스적 성찰과 이성의 힘을 시대 속에서 점점 확인하기 힘들어졌고 아마도 거기서 그의 회의하는 정신, 즉 '확인하는 이성'이 아닌 '회의하는 이성'이 자리잡은 것이 아닌가 한다. 이런 몽테뉴를 보고 있으면 20세기에 T.S. 엘리어트가 '무너진다 무너진다. 런던 브릿지가 무너진다.'는 주문을 떠올리게 한다.

몽테뉴의 글쓰기 태도는 프랑스 철학과 문학에 지대하고도 끈질긴 영향을 미쳐왔다. 내가 좋아하는 쟝 그르니에의 수필에서부터, 르 클레지오의 소설, 그리고 최근에 번역된 파스칼 키냐르의 [은밀한 생]까지... 자기를 곱씹고 되뇌며 삶과 사유를 음미하는 아주 사적이지만 동시에 아주 보편적인 모습들에서 나는 자주 몽테뉴의 얼굴을 만나게 된다. 그 때 마다 나는 생긋 웃으며 '몽테뉴 아저씨 안녕하세요?'하고 눈웃음을 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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팡세 -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소 고전총서 서양문학 4
B. 파스칼 지음, 김형길 옮김 / 서울대학교출판부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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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색해보면 알겠지만 파스칼의 <팡세>는 우리나라에서 정말 수없이 번역출판되어 왔다. 아마도 기독교 영성을 찾는 사람들 때문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완역을 찾기는 힘들었다.

<팡세>에서 자기가 원하는 것만 찾아버리고 말겠다면 그런 말랑말랑한 요약본으로 충분하다. 하지만 근대적 정신의 한계에 가장 예민하게 반응하며 섬세의 정신esprit de finesse을 이야기했던 파스칼 그 자신과 직접 대면해보는 것 또한 해볼 만한 일이다. 그러기 위해선 제대로된 완역이 필수적일 것이다.

서울대 출판부에서 나온 이 완역본은 충실하다. 오래도록 파스칼 사상을 연구해온 저자의 공력과 완숙미가 돋보이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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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의 유산
패트리샤 넬슨 리메릭 / 전남대학교출판부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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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3년 시카고에서 미국 역사학에서 큰 전환점을 제시해준 논문 하나가 발표된다. 그것은 바로 프레드릭 젝슨 터너의 'The Significance of the Frontier in American History'란 논문이다. 기존의 역사학자들이 미국의 역사를 유럽사의 연장선상에서 보려했던 반면, 터너는 미국에는 유럽에는 없는 '프론티어'(혹은 미개척지 서부)가 있으며 이를 통해 미국은 미국만의 유동적이고 민주적인 문화와 역사를 이룰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관점은 1960년대 소위 수정주의 사가들에 의해 반박을 받는다. 특히 페트리시아 리메릭의 [정복의 유산]은 (터너가 1890년을 기점으로 종결되었다는고 주장한) 프론티어 운동은 미국 사회 내부에서 성, 계급, 인종 등의 영역으로 발전되고 있다고 보며, 기존의 프론티어론이 보지 못한 다층적인 환경들을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크게 보아 저자의 이런 주장은 '신서부사'라고 통칭된다. 이와 관련해서 함께 보아두면 좋을 책이 소개한다면 비봉출판사에 간행된 '미국역사학의 역사'다. 역사란 언제든 관점의 문제를 무시할 수 없다는 점에서 함께 볼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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