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적 미학
리차드 빌라데서 지음, 손호현 옮김 / 한국신학연구소 / 200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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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적인 것과 미감적인 것의 일치 내지는 얽힘을 보는 것이 소위 탈현대적 사유의 한 갈래였다. 이와 유사하게 저자는 미감적인 것과 계시적인 것의 일치 내지는 얽힘을 보고자 한다. 그리하여 책은 '신학적 미학'이란 이름을 얻는다. 때때로 '진정으로' 종교적인 사람들을 보게 되면 그 천진하고 단순하지만 깊고 굳건한 표정과 매무새에 매혹당하는 일이 많아진다. 다시말해 '아름다운' 것이다.

이런 미감적인 것에 매혹되어 종교에 발을 딛기도 한다. 속진의 때를 미련없이 훌훌 털어버리게 할 정도로 매혹되는 것이다. 이렇게 아름다움이 해방과 회심의 도구가 되기도 한다. 책의 말미에 인용된 도스토옙스키의 말대로 '아름다움이 세계를 구원할' 수 있를런지도 모른다. 아름다움은 대상의 완벽한 완성 이상의 의미로 다가온다. 아름다움과 신성함은 은연 중에 동반관계에 있고 그 덕에 우리는 자기 초월의 기회를 얻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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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 21
가라타니 고진 지음, 송태욱 옮김 / 사회평론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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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윤리, 자유

'두려움없는 사랑은 있을 수 없다고 하지만 사실 두려움이 있으면 진정한 사랑은 존재할 수 없다.'

'두려움은 에고를 전멸시킴으로써 사라진다.'

...... 마하트마 간디, [날마다 한 생각] 중에서 발췌

사랑과 윤리는 본질적으로 동일한 토대 위에서만 가능하다. 그 토대는 '자유로워지라'는 무조건적인 지상명령이다. 자유로운 사람만이 사랑다운 사랑을 할 수 있고, 진정으로 윤리적일 수 있다. 필연성에 속박되어 있는 사람의 생각과 행동은 자유로울 수 없고 동시에 사랑도 윤리도 그에겐 인연이 없다. 필연성 속에 속박된 사랑과 윤리는 기계적 인(그리고 습관적인) 반복운동에 불과하다. 자유롭지 못한 사람은 자신이 사랑에 빠진 듯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고 윤리적으로 살고 있는 듯 하지만 전혀 그렇지 못하다. 사랑과 윤리는 아무런 필연성도 없는 오직 무조건성 위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우리는 사랑을, 윤리를 필연성 속에 종속시키려는 경향이 강하다. 사랑을 운명으로, 윤리를 규범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운명적 사랑이란 대개 정략의 가면, 규범적 윤리란 말썽을 피하려는 수단에 다름아닌 경우가 많다. 이런 것들은 사랑도 윤리도 아니다. 사랑도 윤리도 아니면서 사랑과 윤리로 불리는 이런 것들은 도데체 정체가 무엇인가? 이것들의 정체는 '두려움'이다. 그리고 이 두려움이 사는 집이 바로 '에고(ego)'다. 에고 에고,이 못난 자슥...

사랑과 윤리는 '불구하고'의 정신이요 실천이다. '불구하고' 사랑하며, '불구하고' 윤리적이려고 한다는 것은 바로 필연성의 연쇄고리를 몽땅 괄호 속에 쳐넣어버리고 생각하며 실천할 수 있다는 것, 즉 '자유로와지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인간은 사르트르가 말한대로 '자유롭도록 저주받았다.' 인간은 자유롭도록 저주받았기 때문에 자신을 물체로 착각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그럼에도 자주 자신을 '물체'라고 여김으로써 무조건적 선택의 자유 앞에 있음을 망각하고자 한다. 망각하면 편하다. 그러나 자유롭지 못하다. 그에게는 사랑도 윤리도 영원히 불가능하다. 그는 걸어다니는 시체, 곧 '좀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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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혁명의 이데올로기적 기원
버나드 베일린 지음, 배영수 옮김 / 새물결 / 199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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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들이 유달리 존경스러워 보일 때가 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자투리 사료들을 종횡으로 누비면서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역사적 의미를 길어 올릴 때는 신비감마저 느끼게 되니 말이다. 이 책이 바로 그런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 버나드 베일런은 미국 헌법 비준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치열한 논쟁들을 세세히 좇아서 미국 혁명의 토대를 이뤄 놓은 이데올로기적 토대를 밝혀 내고자 했으며 그의 이러한 시도는 정치사나 지성사에 있어서 베일런 식의 '공화주의'를 학적 공용어로 등록시켜야 할 정도였다.

베일런의 저서에 대한 경이감과 함께 언급하고 싶은 것이 또 하나 있다. 그건 바로 미국 혁명의 해괴함이다. 우리나라 보통사람들에게 미국 혁명이란 영국이나 프랑스의 혁명과 별반 차이가 없게 보는 것이 다반사고 심지어는 우리나라의 식민지 투쟁과 해방과 연관시켜 보는 잘못된 상식이 있다. 아주 잘 아는 것 같지만 전혀 알지 못하는 우리의 미국관의 일면이다. 최근에 대테러전을 수행하는 부시의 언사들은 해괴했다. 부시의 연설들은 그가 아직도 교황이 봉건제후국가들을 순회하면서 십자군 원정을 독려하던 바로 그 시절에 갇혀 있는 듯이 보였다. 나에게는 종교적 근본주의라고 욕을 먹는 이슬람이나 탈레반에 대해서 보다는 오히려 그런 미국에 대해 더 호기심이 생겼다.

도데체 미국의 정체는 뭘까? 김봉중의 '미국은 과연 특별한 나라인가?'라는 책을 집어들었지만 뭔가 아쉬웠다. 그래서 소개받은 책이 이 책인데 정말이지 뿌리까지 뒤집어 훑고 있다. 베일런의 주장은 책의 초판이 나오던 시절 대세였던 나이브한 합의주의 사관 대신 서로 이질적인 것이 뒤죽박죽 뒤섞인 채로 얽혀있었음을 보여준다. 영국 휘그 좌파의 고전적(그리스-로마의 이상을 지향하는) 공화주의, 계몽적 합리주의, 영국 보통법 전통과 뉴잉글랜드 중심의 청교도 신앙, 그리고 반권위주의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베일런은 미국에 다른 유럽 근대국가와는 다른 독특한 정체를 부여하는 듯 한데 솔직히 말해서 나에게는 그런 미국의 정치가 독특하기 보다는 후진적으로 보였다. 부시의 솔직담백하지만 후진적이고 퇴행적인 연설들처럼 말이다. 뉴잉글랜드 청교도식 미국의 시초로 영구회귀하고 있는 듯한.... 가장 최첨단국의 최후진적 지향성...?? 묘한 아이러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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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세계와의 주술적 소통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24
김융희 지음 / 책세상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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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즈 드브레는 그의 저서 [이미지의 삶과 죽음]에서 이미지의 역사를 로고스페어, 그라포스페어, 그리고 비데오 스페어의 단계로 나눠 설명한다. 로그스페어의 단계에서 이미지는 죽은 자의 세계, 혹은 이 세상 너머의 차원을 담는 주술적 의미를 띠고 있다. 그러나 그라포스스페어의 단계에서 이미지는 예술작가의 천재적 심미성을 드러내는 역할을 하며, 로고스페어 단계에서 이미지가 지녔던 존재적 위상은 사라지고 이미지는 하나의 사물, 즉 작품이 된다.

그러다 20세기들어 비데오스페어의 단계에서 이미지는 존재도 사물도 아닌 시뮬레이션이 된다. 영원한 존재도 아니고 불멸의 사물(작품)도 아니라 오직 순간적인 현실(혹은 시뮬레이션)만이 반짝거리며 명멸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미지는 '비쥬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러나 이 이미지는 역설적이게도 주술의 기능을 회복해 돌아온다. 비쥬얼은 사람들에게 마법을 건다. 그러나 그 마법은 사람들을 오직 그 순간적 현실에만 붙들어 매어두는 족쇄같은 마법이다.

이에 대해 저자 김융희는 도전적이다. 다시금 예술의 초월적 기능을 회복하고 '총체적으로'(비쥬얼이 파편적으로 주술화하려한다면) 삶을 재주술화하는 힘을 되찾아야 하지 않느냐고 말한다. 무한과 궁극에 대한 지긋한 지향성을 회복하고 인간의 존재를 한 단계 더 높이 고양시키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미시마 유키오 식의 폭력적 유미주의로 빠지는 우를 범해서는 안되겠지만... 하여간 인간 너머를 추구한다는 것이 예술의 오랜 기능이었다는 사실을 재상기하는 것... 그것이 저자의 의도인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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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 또 다른 시각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김성기 외 47인 지음 / 책세상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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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건의 [철학과 문학비평, 그 비판적 대화]에 대한 비판적 서평을 보고 몇 가지 개인적 소견을 적어본다. 평자는 김영건의 주장이 사회적 관계나 이데올로기적 맥락을 소거한 채 아무런 입장도 취하지 않은 상태에서 논리적 정당성을 따져묻는 태도가 과연 얼마나 현실적인 것인지 의문을 제시한다. 이런 비판의 핵에는 아마도 이런 문제가 깔려 있지 않나 싶다. '논리적 정당성'이란 것이 사회적 관계와 이데올로기적 맥락에서 자유로운 중립적인 것인가라는 것이다.

평자의 의견은 '자유롭지 못하다' 인 듯 하고, 김영건의 태도는 논리적 정당성이란 그런 관계와 맥락 이전의 요소라고 보는 듯 하다. 평자는 김영건의 그런 태도야말로 현실을 무시한 '비현실적' 것이 아니냐고 묻는다. '논리적 정당성'이란 것이 현실과 유리된 멸균된 영역에 속하는 것이냐 아니냐...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식논리학이 헤겔의 논리학에 의해 비판받고 좌파에 의해 부르조아 논리학이라는 비판을 받았다는 사실을 상기할 때 형식논리학이 과연 멸균된 영역에 속하는 것인지 의심하게 된다. 그러나 동시에 어떤 주장이 자기 정합성을 지니지 못한 상태로 있는 것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사실도 피할 수 없다. 광인의 아우성과 이성적 주장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비평문은 그 둘 사이에 어디 쯤 있는 것일까?

내 생각은 이렇다. 비평은 광인의 아우성이랄 수 있는 예술작품을 논리적으로 번역하고 그 근저를 이해가능한 상태로 재서술하고 평가하는 일이다. 이해가능하고 논리적으로 서술하는 일은 형식논리적 과정이 아닐까? 주술에 걸린 듯 비평문을 쓰는 것도 좋지만 그 주술의 기저에 논리성이 없다면 그게 비평문일까 아니면 그냥 문학작품일까? 최근들어 비평과 문학작품 사이에, 혹은 (싸르트르나 데리다에서 보듯) 철학과 문학 사이의 경계선이 모호해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사고의 농밀성과 완벽성, 성실성이란 차원에서 불충분한 사고가 비평이란 간판으로 무마되는 것은 좋지 못하다. 거친 비약에 현혹되어 휩쓸리는 것은 사고의 불완전함, 유치성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닐까? 김영건의 날카로운 비수는 그런 점에서 해보다는 약에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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