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 : 교양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
디트리히 슈바니츠 지음, 인성기 옮김 / 들녘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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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유럽 각국과 미국 등지에서 포스트모더니즘과 문화적 다원주의가 휩쓸고 지나간 폐허 위에 다시 전통의 정신을 계승하려는 시도가 지속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유럽은 유럽 통합과 함께 유럽 공동의 역사서술에 나서고, 젊은 세대로부터 자꾸만 멀어져만 가는 성서나 고전들을 이 세대들의 감수성과 언어에 적합하게 고쳐 재출간하여 크게 성공하기도 하고, 프랑스의 크세쥬 총서처럼 학생이나 초심자를 위한 각종 문화 및 역사 참고 사전들에 대한 공세적인 기획을 시도하기도 한다.

이런 시도들은 문화적 좌파에 의해 자민족중심적인 '기념비주의'라고 매도당하기도 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그런 매도가 과연 100% 합당한 것인지는 의문스럽다고 생각한다. 기념비를 세우는데만 혈안이 되는 것은 문제겠지만 그렇다고 수천년간 쌓아온 조상들의 사유와 창작의 성과들을 일시에 '기념비'라고 레테르를 붙여서 고물창고로 던져 버리는 것도 심각한 문제가 아닐까?

저자의 태도는 분명 교양문화론적이고 엘리트주의적인 뉘앙스(예를 들어 그는 프롤레타리아적인 것을 경멸한다)를 짙게 풍긴다. 바보상자를 내치고 쓰잘데기 없는 가십문화와는 절연하라고 한다. 코드니 탈코드니 어쩌구 하면서 보잘 것 없는 텍스트에 이론적 숭고미를 덮어씌우려는 공허한 시도도 그만두라고 말한다. 한때 대중문화 속에서 정치적 무의식을 읽어내려고 시도했던 문화적 좌파들(대개 안락한 상아탑이나 살롱에 은거해 있다)이나 문화산업에 빌붙어서 상품에 그럴싸한 지식포장을 해주던 지식날품팔이들(대개 입 가벼운 비평가들이다)을 상당히 속상하게 하는 일갈일 것이다. 그래도 슈바니츠는 거대이론 혐오시대의 도래와 함께 전통적인 지식인과 교양인이 죽고 매니아와 문화게릴라(?)가 패권을 차지한 현대 문화가 영 못마땅하다.

내가 보기에도 이 현대의 문화패권들은 너무 호흡이 짧고 안목도 좁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 슈바니츠 말마따나 '와우! 짱이야!' 수준이다. 이런 형편없는 상태를 고칠 수 있는 치료법으로 그는 글자문화(글읽기와 글쓰기)를 제시한다. 일리있다. 영상문화시대 어쩌구 하지만 읽어보고 써본 경험이 없는 놈이 대체 영상에 대해 무엇을 얘기할 수 있다는 말인가? 기껏 '음... 그 영화 좋더군...' '음 그래 너도 그러니?'와 같은 수준에서 얼마나 벗어날 수 있을까? 글쓰기는 감정의 순간적 표현이 아니라 사고의 깊이와 정연함을 훈련하는 것이며 교양인의 최저 요구 조건이 된다.

분명 저자의 관점은 뭔가 문제가 있다. 너무 엘리트중심적이고 서구중심적이다. 게다가 고의적으로 강조하기 위해 그런 것이겠지만 교양문화집단의 배타적 에티겟으로까지 발전시킨다. 그러나 한 번 더 생각해 보자. 얼마전에 고흐 전기를 펴냈던 박홍규선생은 노동자들이 티브이보다는 고호의 그림에 감동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노동-인권 운동의 궁극목적은 월급 몇 푼 올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서구 중심적이란 몇몇 비난도 내겐 좀 너무 틀에 박힌 비판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저자의 태도는 서구에서 태어나 서구 전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한 사람이 붕괴되어가는 서구 문화의 전통으로부터 성찰적인 연속성을 되살리려고 발버둥치는 것이다. 이런 사람에게 '왜 넌 서구 밖에 모르냐'고 일갈한다면 뭔가 핀트가 맞지 않는다. 그건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꼴은 아닐까?

서구중심적이라고 비판해야 할 대상은 침몰하는 배를 구하느라 정신이 없는 슈바니츠가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들이다. 슈바니츠를 서구중심적이라고 욕하는 우리는 과연 비서구적인 우리 자신에 대해 얼마나 알고 감흥하고 있는가? 더 나아가 서구화된 우리는 서구에 대해 얼마나 깊이 알고 있는가? '서구중심적'이란 비판은 함부로 사용해선 안된다. 그 비판은 우리에게 지적 나태를 '배타적 태도'로 얼버무리는 자기기만적 부메랑으로 되돌아 올 수도 있다. '서구중심적'이라고 일갈하기 전에 과연 '서구'의 정체는 무엇인지 열심히 공부하고 탐구해야 한다. 어설픈 일반론적이고 추상적인 비판은 안하느니만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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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한 생각
마하트마 간디 지음, 함석헌 외 옮김 / 호미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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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진정한 삶을 살기 원한다면 정신적 게으름을 버리고 좀더 기본적인 사고를 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 삶은 아주 단순해질 수 있다.' (p.52)

최근에 경쟁과 속도에 대항하여 느림과 단순함을 중시하는 태도가 또 하나의 주요한 문화적 흐름을 이루고 있다. 이 때 느림과 단순함은 어떻게 얻어지는가? 느림과 단순함이 단지 외양 뿐인 라이프 스타일에만 국한된 것이라면 그건 가장(假裝)이자 장식일 뿐이다. 삶이 단순해지기는 커녕 군더더기를 덧붙여서 더 복잡해지는 꼴이 된다. 스타일을 아무리 바꿔야 아무 짝에도 소용이 없다. 삶 그 자체가 바뀌어야 하고 그러자면 정신적으로 부지런해야 한다. 정신적으로 부지런해야 한다함은 깊이 깊이 생각하는 힘을 길러야 한다는 뜻이다. 느림과 단순함이 추구하는 삶의 소박성은 사유와 통찰의 깊이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다. 소심심고(素心深考)... 소박한 마음을 깊게 생각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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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문학으로서의 삶 책세상총서 10
알렉산더 네하마스 / 책세상 / 199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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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헤마스는 최근에 The Art of Living이란 저서를 낸 바 있다. 이 저서 속에서 그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몽테뉴, 니체, 그리고 푸코(푸코의 말년 기획인 '자아의 배려'로 끝맺는다)를 다루면서 아이러니 속에 처한 인간의 삶과 그 와중에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실존적인 차원의 여정을 보여준다. 그의 니체 연구서인 이 책도 그러한 문제의식에서 바로본다. 해체주의가 지배하는 속에서 폴드만류의 해석이 주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 결과가 상당히 공허해서 니체를 읽으면서 느끼는 고양감이나 충만감을 설명해주지는 못했다.

이 책은 그런 해체주의적 해석이 놓친 부분을 일목요연하고 다가가기 쉽게 해준다. 경쾌하고 날카롭다. 네헤마스가 니체로부터 읽어낸 좋은 삶이란 책 제목이 시사하듯이 하나의 작품으로서의 삶으로써 같은 시간과 공간이 반복된다고 해도 기꺼이 그 삶이 반복되길 원하는 삶이다. 개인적으로 니체 연구서 중 가장 애착이 가는 책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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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와 비트겐슈타인 - 이데아총서 60
뉴턴 가버 / 민음사 / 199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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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서는 데리다와 비트겐슈타인에 대해 만연된 속류적 오해를 바로잡고자 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데리다가 지나치게 무비판적으로 취급되어 (특히 문화 예술계에서) 마치 교주처럼 받들어지고, 이는 비트겐쉬타인에게도 마찬가지인데 너무 논리적으로만 취급되어 그가 언급한 말들 하나하나가 과학주의적 용어로 온전히 완성되어야 할 어떤 것으로 숭배받는다. 바야흐로 데리다와 비트겐슈타인은 두 문화의 기념비격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저자들의 접근법은 중도적인데 비트겐쉬타인으로부터 데리다적인 고찰을, 데리다로부터 비트겐쉬타인적인 논리를 발굴해 보고 좀더 심층적인 비판을 시도해 보자는 것이다. 그리고 저자는 결론적으로 비트겐쉬타인이 누구에겐 진부할런지 모르지만 올바른 출발점에 서있다는 점에서 그의 손을 더 높이 들어준다. 이 때 그 올바른 출발점이란 우리가 너무 당연하게 파악하고 있는 우리의 '삶의 세계'를 말한다. 현대 언어철학을 개괄하여 비판적 논점들을 논쟁적으로 제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고민하며 읽어볼 만한 책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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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으로서의 은유
G.레이코프 외 / 서광사 / 199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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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식에 있어서 파리와 인간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시각적인 면에서만 한정해서 본다면 분명 인간과 파리는 같은 대상에 대해 서로 다른 시각자료를 받을 것이다. 서로 다른 이유는 각각의 독특한 신체적 특성 때문일 것이다. 신체적 차이에 의한 감각입력자료의 차이다. 그리고 하나의 대상에 대해 파리와 인간은 다른 반응을 보인다. 예를 들어 똥이 그렇다. 파리는 똥에 달려들지만 (물론 제한적인 의미에서) 인간은 똥을 피한다. 대상은 같지만 반응을 서로 다르다.

특정한 행동은 순전히 주관주의적인 것만도 아니고 그렇다고 순전히 객관주의적인 것도 아니다. 이 주관주의와 객관주의의 이분법을 허무는 것은 바로 '몸'의 존재다. 파리의 '몸', 인간의 '몸' 말이다. 라코프와 존슨이 주장하는 (주관주의도 객관주의도 아닌) '체험주의'의 토대는 바로 '몸'에 있다. 주관주의적 신화 속에서 상상력의 무제약성은 몸의 현존에 의해 제약받는다. 객관주의의 신화 속에서 절대적 진리의 무제한성 역시 몸의 현존에 의해 제한받는다.

그리고 우리는 체험을 은유라는 특정한 방식을 통해 조작한다. 객관주의적 시각으로부터 몸을, 주관주의적 시각으로부터 은유를 포착하여 두 극단 사이에 경계선을 긋는다. 얼핏 스치는 생각에 이건 '이해'를 중시하는 대륙계의 해석학적 전통이 인지과학과 언어철학, 분석철학 등의 영미계 학풍을 통해 드러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이와 관련하여 유사한 책을 소개하자면 이 책의 공저자인 존슨의 [마음 속의 몸]이 번역되어 있다. 인식의 해석학적 측면을 깊이 있게 다루고 있는 볼노오의 [인식의 해석학 1,2]도 볼만 하다. '구조'와 '은유'는 언어철학과 인식론에서 중요한 논점들인데 최근에 뉴턴 가버와 이승종의 [데리다와 비트겐쉬타인]에서 '2장 구조와 은유'가 생각난다. 또한 최근 인지심리학적 연구에서 인간 인식능력에 대한 Olympian rationality의 의심과 대안적 패러다임의 모색과도 서로 시사점이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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