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와 무한
엠마누엘 레비나스 지음, 양명수 옮김 / 다산글방 / 2000년 7월
평점 :
품절


근현대의 철학적 주류는 인식론이다. 데리다가 인식론적 형이상학에 대한 실날한 조소를 보내는 등 인식론의 제국주의에 대한 공격이 날고 거세지고 있지만 여전히 인지과학과 철학의 연계에 철학자들의 관심이 쏠려 있는 것을 보면 인식론의 지배는 여전한 듯 보인다. 그러나 그 놈의 인식란 것... 따지고 보면 우스운 거다. 도데체 인식이 존재(심지어 실존)에 대해 뭘 안다고 할 수 있나? 기껏해야 몸의 생존을 위한 도구 밖에 더 되는가?

그걸 러셀처럼 악으로 깡으로 수학적 집합론을 매개로 인식론의 세계상을 절대화하려는 꼴같잖은 짓은 집어치워주시라. 내 생각으론 인간의 인식이란 도구적인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도구적인 한계에 갇힌 인식이 자신을 '절대'라고 참칭할 때 무슨 해괴망칙한 일이 벌어질까? 다들 알 것이다. 현대사의 꼬락서니를... 나는 레비나스의 철학은 포스트모던 철학이란 배들이 아직 다다르지 못한 항구를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푸코도 말년에 '윤리'의 문제로 나아가지 않았던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서양과 동양이 127일간 e-mail을 주고받다 대담 시리즈 2
김용석 외 지음 / 휴머니스트 / 2001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얼마 전 공중파 매체를 통해 번져간 동양학 열풍이 지나간 자리에는 찝찝함도 짙게 배어있었다. 동양열풍에 서양철학자들이 사시눈을 뜨고 바라봤고 교수신문 등과 같은 매체를 통해 상호비판이 오고가기도 했다. 그러나 아직 우리 학계는 그런 대화에 익숙하지 못한 듯 하다. 예전에 스노가 말한 '두 문화' 격으로 우리에겐 동양철학과 서양철학이란 비무장지대가 가로놓인 '두 문화'였을 뿐이기 때문일까? 의욕적인 소장 철학자 이정우 선생의 비교철학적 접근은 그를 강단에서 밀어내도록 하는 압력으로까지 작용했었던 일이 생각난다. 언제나 철학에서 '비교'란 보편을 추구하는 철학의 속성 상 어쩔 수 없이 주변적일 수 밖에 없는 것일까?

이 책에서 김용석 선생과 이승환 선생 사이의 대화 속에서 치열한 비판과 반박은 그리 두드러지지 않는다. 독자로서 그런 면을 바랬지만 이승환 선생의 공격적 자세에 대해 김용석 선생은 '...도'의 정신으로 평화로운 절충을 시도하려 한다. 덕택에 책은 아주 건전해졌고 동시에 평범해졌다. 이승환 선생의 공격도 서양철학을 너무 거칠게 환원하는 방식으로 몰고가서 그리 수긍할 만한 것이 못되었던 듯 하다. 혹시 동양과 서양이란 말 자체가 너무 외연이 큰 건 아닐까? 그래서 이렇게 힘이 빠진 것은 아닐까? 기획의도는 좋았지만 뭔가 개운치 않은 책이다. 비슷한 시도를 이 출판사에서 다시 한다면 좀 더 논쟁적인 접근을 해서 읽는 이를 긴장시켜 줬으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화하미학 동문선 문예신서 21
이택후 지음 / 동문선 / 1999년 8월
평점 :
절판


[미의 역정]은 이택후의 미학 저작 중 가장 대중적인 성공을 거둔 작품이다. 그는 이 책에서 모든 전통문명을 철저히 파괴한 문화 대혁명의 여파로부터 중국이 점차 벗어나던 시절에 집필된 것이다. 그는 거시적 관점으로 미의 문제를 통해 중국문명의 양상을 파악하고자 시도한다. 이를 통해 과거 문명의 유산을 분석하고 계승 보존하는 것이 미래를 열어가는 것임을 명쾌한 논리 전개를 통해 실증적으로 보여준다. 특히 그의 철학과 미학의 주요개념인 '침적'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마르크스 철학의 기초 위에 융의 무의식론과 피아제의 발생 인식론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이 '침적'은 인간의 일상적이 활동과 경험으로 정신의 내부에서 이성적인 면, 감성적인 면 등 다양한 요소가 거듭 쌓임을 의미한다. 이 무수한 개별의 '침적'이 오랜 시간에 걸쳐 축적되면서 현상면으로는 인간의 내부와 외부 '자연'에 대한 끊임없는 작용을 통해서 인간의 문명이 형성되어 간다. 그 형성과정은 '자연의 인간화', '인간의 자연화'라는 이중적 형태를 취하며 모든 사상 문학 예술은 모두 이 침적의 결과이다. 인간의 역사는 이 부단한 침적의 과정에 있으며 인생이란 개체로서의 침적을 통하여 문명의 형성에 참여하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냉전과 대학 - 냉전의 서막과 미국의 지식인들
노암 촘스키 외 지음, 정연복 옮김 / 당대 / 2001년 11월
평점 :
품절


책세상 우리시대 문고로 출간된 홍기빈의 <아리스토텔레스, 경제를 말하다>란 책이 있다. 저자는 그의 서문에서 서울대 경제학과의 몇몇 교수들의 충격적인 이야기를 전해준다. 그들은 경제학과의 커리큘럼을 하바드 경제학과와 똑같이 만들자고 공공연히 떠들고 다니더란 것이다. 그들은 경제학을 미국이든 한국이든 각각의 독특한 역사적 사회적 맥락을 무시한 채 도매금으로 적용될 수 있는 '과학'이라고 믿는 맹신 풍조에 절어있다. 그걸 아무런 의심도 없이 신주단지처럼 모시는 한국놈들도 문제지만 대체 그런 '미국적 보편'은 언제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자그마한 실마리가 노엄 촘스키의 글 '냉전과 대학' 속에서 르포처럼 전해진다. 전쟁 전에는 지적으로 유럽에 종속되어 있는 미국 지식계의 열등의식이 전쟁을 거치면서 그 태도가 180도로 배타적인 배척과 경멸과 오만으로 바뀌어 버렸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세계적인 언어학자였던 로만 야콥슨이 미국으로 망명했을 때 아무도 그에게 교수 자리를 내어주지 않고 주변부에서 맴돌게 하기도 했다. 50년대를 지나면서 이런 자폐적인 미국 중심주의가 지식계에 만연하게 되었고 유럽의 전통은 순식간에 형편없는 것으로 매도당했다.

그 속에 절어있던 젊은 촘스키가 본격적으로 자기 공부(언어학)에 매진하기 시작하면서 알게 된 것은 미국 언어학자들 자신의 최신 발견과 이론이라고 하는 것들이 이미 몇 십년, 심지어는 몇 백년 전에 유럽에서 다 다뤄져 있었더라는 창피한 현실이었다. 그런 미국의 학풍이 과거의 유럽적 신비주의와 자랑스럽게 결별했다고 내놓은 학문 패러다임이 바로 '행동주의'였고 그것은 전가의 보도로 활용되었다. 그들은 행동주의를 보편과학으로 상정, 세계의 지식을 접수하고자 했다. 물론 그것이 천편일률적인 것은 아닐 것이다. 진짜 문제는 그걸 천편일률적으로 성서처럼 받아들이는 우리의 몇몇 전문가 바보 지식인들의 한심한 작태가 아닐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영화의 역사:이론과실제
로버트C.앨런 외 지음, 유지나 외 옮김 / 까치 / 1998년 12월
평점 :
품절


이 책과 함께 몇 해전에 발간된 보드웰이 편집한 [Post-Theory:Reconstructing Film Studies]를 함께 보는 것도 좋을 듯 하다. 보드웰이 편집한 이 책은 프로이드와 라캉에 휘둘리는 영화이론 및 비평계에 대항하여 다양한 대안적 퍼스펙티브들을 시도하고 있다. 지금 로버트 앨랜의 [영화의 역사:이론과 실재] 역시 작가주의에 휘둘리던 전대의 영화연구에 대해 반기를 들고 당시 사회과학계에서의 수용자지향이론 및 사회학적 접근법을 반영한 영화연구의 방법적 틀을 다각도로 고안하고 있다.

물론 이 수용자 지향적인 경향은 프로이드와 라캉의 이론, 그리고 문화적 좌파나 데리다의 몇가지 도그마와 맞물리면서 또 다시 변신한다. 양적인 수용자 연구 경향에서 좀 더 질적이고 정신분석적인(혹은 현상학적) 수용자 연구로, 나아가 대중 수용자의 정치적 무의식에 대한 분석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이 쯤이 현재 미국 영화연구의 주류적 상황이다. 로버트 앨런의 [영화의 역사]의 번역은 미국가 큰 시차가 나지만 한국적 영화 연구의 맥락에서는 신선한 면도 없지 않다. 그 만큼 한국의 영화연구가 지나치게 발신자(창작자)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번역자들은 이런 경향을 좀 더 수용자 중심적인 태도로 바꾸고 싶어하는 듯 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