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머니즘의 옹호
머레이 북친 지음, 구승회 옮김 / 민음사 / 2002년 8월
평점 :
절판


북친의 생태이론이 핵심은 생태문제는 자연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문제라는 점이다. 그리고 그에게 <사회문제>란 초인간적으로 이미 결정 혹은 폐쇄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능동적 실천에 의해 열려있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없는 생태론, 인간의 능동적 <실천>이 결여된 생태론은 북친에게 실날한 비판의 대상이 된다. 그는 이런 경향들을 대개 인간혐오주의, 신비주의, 원시주의 등으로 이름붙이며, 그 구체적 비판 대상들은 윌슨의 사회 생물학, 도킨스의 문화적 유전자 결정론, 에를리히 등의 신멜서스주의, 네스 등의 심층 생태론, 낭만화된 (상상적) 원시에 근거한 원시적 영성(primitive spirituality) 찬양, 기술을 정연명령으로 보는 기술공포적(technopobia) 경향들, 인간의 수동성과 무위성에 대한 정당화로 나아간 하이데거를 직간접적으로 계승한 포스트모던 허무주의, 그리고 파이어벤드 류의 인식론적 상대주의 과학철학 등을 하나하나 논파 혹은 빈정거린다.

북친의 날카로운 비난 혹은 빈정거림은 바이마르 시대에 대두된 보수주의 혁명론이 유포된 이래 인간의 능동적 문제 해결 능력을 부정하거나 과소평가해온 몽롱하거나 결정론적인 여러 이념들이 여전히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은 채 다시 재생되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충분히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역자 구승희씨는 저자가 빈정거리는 몽롱한 생태이론가의 한 부류가 된 때문인지 해설문이나 후기에 직절적인 투정을 부리고 있었다. 역자가 자기가 번역한 책에 대해 이렇게 감정적인 반응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경우는 나로썬 처음이었다. 그러나 구승희씨의 비난은 충분하지도 구체적이지도 못하며 인신공격적 성격이 너무 노골적이다.

개인적으로 별을 다섯개 주고 싶지만 번역 상태가 후반부로 갈수록 성실성이 떨어지고 있음을 느꼈다. 역자의 해설 역시 그다지 성실하지 못하다. 그럴리야 없겠지만 학부생들에게 요약을 맡겨서 대충 짜깁기한 인상을 주는 해설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침묵의 종교 유교
가지 노부유키 지음, 이근우 옮김 / 경당 / 2002년 4월
평점 :
품절


흔히 유교는 종교라기보다는 도덕체계에 가까운 것이라는 설명이 많지만, 이 책이 취한 관점은 <그렇지 않다>이다. 각각의 종교는 모름지기 고유한 生死觀을 보유하고 있다. 기독교는 부활영생, 불교는 윤회전생, 도교는 불로장생이다. 그렇다면 유교는? 공자는 일찌기 <괴력난신은 언급하지 않는다>는 반-초월적인 세계관을 피력했지만, 실상 유교적 관례들에는 제사를 통해 종교적 생사관이 배어나온다. 저자는 이를 <초혼재생>이라고 부른다. 죽은 영혼이지만 제사를 통해 (하늘에서 내려온) 혼과 (땅에서 올라온) 백이 위패(혹은 신주)에 깃들어 이승에 잠시 머물다 간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와 같이 유교의 종교적 패러다임을 통해 동북 아시아인의 도덕적 체계를 분석하고 있다.

나아가 저자는 일본적 유교의 특색을 한국과 중국의 유교와 비교하면서 문화적 차이로 인해서 중국인들이 야스쿠니 신사에 대해 오해하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패전 후 일본 사회에 당연시되어온 개인주의를 비판하고, 家-중심의 체제를 무조건 봉건적이고 구시대적인 유산으로 치부하는 세태를 비판하기도 한다. 기독교적 유산이 뿌리내리지 못한 일본에서 개인주의를 모방하는 것은 방만한 이기주의만을 낳을 뿐이라고 꼬집는다.

그러나, 저자의 <개인주의>에 대한 소견은 나에겐 좀 일면적인 것으로 비쳐졌다. <개인주의>가 과연 <기독교주의>만의 소산일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신과 개인 간의 단독적 계약에 의존하는 삶의 형태는 <개인주의>의 한 역사적 일면일 뿐, 반드시 그것과 동행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기독교주의> 외에 <개인주의>의 형성에 있어서 더 큰 역할을 한 것은 <과학주의>, <이성주의>라고 본다. 이 근대의 이데올로기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주체를 필요로 했다. 바로 여기에 <개인주의>의 또 다른 강력한 원천이 있다. 따라서 일본에 기독교가 뿌리내리지 않았고 유교적 자취가 아직도 짙게 배어있으므로 <개인주의>는 일본과 어울리지 않으며 부작용만 일으킨다는 견해에는 동의할 수 없을 것 같다. 현대의 일본인은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과학적 근대인인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일본과 세계의 만남 한림신서 일본학총서 45
마리우스 B. 잰슨 지음, 장화경 옮김 / 소화 / 1999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네델란드의 해부학책을 처음으로 번역한 스키타 겐파쿠, 메이지 시대에 구미 파견 사절단의 일원이었던 구메 구니다케(久米邦武), 일본 통신사의 상해 지사장으로 전쟁을 회피하려고 노력했던 마쓰모토 시게하루... 에도 시대, 메이지 시대, 쇼와 시대의 이 세 사람을 통해 저자는 일본이 중화적 세계에서 벗어나 세계(혹은 서양)과 만나면서 자신을 새롭게 위치시키는 과정, 그리고 그 과정에서의 부침을 다루고 있다. 세 시대에 각각 전형적인 세 인물을 선정하여 일본의 세계로의 개방사를 재치있게 달고 있다.

한국의 근대에 있어서 일본의 근대는 무엇일까? 그것은 어쩌면 우리가 애써 외면한 우리의 또 다른 자화상일 수도 있다. 단지 우리는 일본의 제국주의와 한국의 민족주의라는 이분법적 시각으로 인해 그와 같은 점을 인지하지 못했을 뿐이다. 이 점에서 이 책은 서론적 가이드 역을 해줄만 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의 포스트모던적 모던 1 책세상총서 20
볼프강 벨쉬 지음, 박민수 옮김 / 책세상 / 2001년 11월
평점 :
절판


이 책은 크게 두 가지 주제를 다루고 있다. 하나는 <포스트모던>의 정체성에 대한 것이고, 둘은 <포스트모던>의 상황에서 필요한 이성의 형태이다.

첫째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다음과 같다. <포스트모던>이란 <모던>과 단순히 배타적인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다. 저자는 <모던> 역시 혼란스런 개념을 전제하여, 그 역사적 전개과정을 <근대>-<근대적 모던>-<20세기의 모던>으로 세분화하고, 그 다음의 자리에 <포스트모던>을 위치시킨다. <포스트모던>이란 <20세기 모던>에서 스캔들과 같이 보였던 양상들이 이제는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시대는 <포스트모던한 모던>으로 규정된다.

둘째 질문에 대한 대답은 <가로지르기 이성>다. 전통적으로 이성을 총체적 통일의 능력으로 파악하고, 인식능력들의 합리성 중에서 오성의 합리성을 유일한 합리성으로 간주하는 근대철학의 경향을 비판한다. 합리성에는 다양한 유형이 있으며, 상이한 합리성들을 하나의 기준으로 통약하는 이성은 불가능하다. 오히려 이성은 상이한 합리성들 사이에서 탄생하며, 그들 사이에 다리를 놓아준다. <가로지르기 이성>은 각각의 합리성들의 차이와 한계를 드러내면서 그것들 사이의 교류를 촉진시키고, 논쟁과 변화를 추동한다. 이는 동일성과 차이를 동시에 적절히 고려하는 이성이다.

이와같은 저자의 대체적인 입장은 후일 <심미적 사유>의 문제로 연결된다. 1990년 간행된 <심미적 사유>에서 지각과 사유의 관계는 새롭게 정의되는데, 여기서 지각을 인식과 도덕적 행위의 예비단계로만 규정했던 전통적 견해에 반박한다. 모든 사유에서는 거의 모든 단계에서 감성이 주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며, 그런 맥락에서 모든 의미는 '감성적 의미' 다름아니라고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잡초는 없다
윤구병 지음 / 보리 / 1998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목의 '잡초'라는 말은 많은 것을 시사해 준다. 잡된 것과 잡되지 않은 것을 구분하는 것은 누구인가? 자연은 본래 잡된 것과 잡되지 않은 것을 구분한 적이 없다. 그런 짓을 한 것은 인간이다.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는 과정에서 그들은 자연을 잡된 것과 잡되지 않은 것으로 나누었다. 우리는 자연 본래의 모습을 망각하고 도구화하기 시작했다.

이런 연관은 과학 자체에 대한 비판으로 확장된다. 경험과학의 목적은 무엇인가? 진리의 발견? 그것은 아니다. 경험을 분석하고 분해하여 이론화함으로써 자연을 인간의 이해에 어울리는 도구로 만들기 위함이다. 그러나 그 경험이란 인간의 경험적 한계 내의 것이란 점에서 이미 제한적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이를 통해 구성한 지식을 구체적 자연에 투사하고 적용했다. 이로 인해 과학자들은 저자 윤구병이 말한 것처럼 '살아있는 폭탄'이 되어갔다.

'실제로 내게는 당신들이 모두 폭탄으로 보인다. 아니 한 걸음 물러서서 폭탄을 가지고 노는 어린애들처럼 보인다. [...] 당신들이 분해하고 해체해놓은 것을 다시 조립하고 합해서 원래 모습으로 되돌려놓을 길조차 모르고 있으면서 왜 파괴를 일삼고 있는가? 멍청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아쉬운 점은 그러한 전일적(holistic) 인식은 과연 인간에게 자유의 여지를 남겨두는가이다. 인간의 자유는 전체의 싸이클 혹은 네트워크 속에서 증발하기 십상이다. 이 때 인간에게 남겨진 일이라고는 그 전체적인 은혜, 그 우주적인 관계를 찬양하는 일 뿐이다. 도교적 시가들이 소재는 다르지만 주제면에서 거의 다르지 않다는 것은 그것을 암시해준다.

우리는 과학 자체의 부정이 아니라 19세기를 통해 그 형태가 굳어진 과학(경험과학류)의 변혁, 즉 좀 더 이상적인 형태의, 진리로 진격하는 과학으로의 변혁을 노려야 하는 것은 아닐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