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자유주의의 기원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53
이나미 지음 / 책세상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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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장집 교수의 최근작인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와 함께 본 책이다. 이 책의 부제가 '한국 민주주의의 보수적 기원'이었는데, 이나미씨의 이 자그마한 책이 그 보수적 기원을, 서양, 일본, 중국 한국 안가리고,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녀가 공격하는 대상은 보수주의자들이 참칭하는 '자유주의'(혹은 자유지상주의)다. 여기서의 자유주의는 민주주의와 배리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민주주의는 강한 자들에 대항하여 약한 자들이 연대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자유-민주주의란 형용모순적 용어가 보수주의에서 사용되는 것은 보수주의자들 역시 자신들의 권익을 위해 민중의 힘을 빌릴 필요가 있기 때문일 뿐이다.

또한 이 책은 박노자씨의 개화기 한국사에 대한 고찰과도 나란히 놓고 읽을 수 있다. 이나미씨는 개화기 당시 독립신문에서 사용된 자유주의적 담론들인 자유, 이익, 독립 등의 용어를 밝히며 그들이 인종차별주의와 경쟁지상주의, 사회진화론, 제국주의 담론에 오염되어 있었는지도 보여준다. 이런 것들이 한국 자유주의의 보수적 기원을 이루며 오늘날까지 '자유민주주의'를 참칭하는 소위 메인스트림의 척도가 된 것이다. 이나미씨가 말미에 <브레이브 하트>에서 멜깁슨이 외치는 뜬금없는 착각적인 'freedom'과 <글라디에이터>에서 막시무스의 뒤늦은 냉소적 자각을 뛰어넘는 진정한 자유인의 사표로 록커인 한대수를 지적한 점도 안성마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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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육과 문명 - 서구의 세계 제패에 기여한 9개의 전투
빅터 데이비스 핸슨 지음, 남경태 옮김 / 푸른숲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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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아마존에서 이 책에 대해 미국의 전 공화당 출신 하원의장인 뉴트 깅그리치가 쓴 서평을 본 적이 있다. 이 사람 다들 알만한 강경보수파다. 성향에 따라 누구의 글을 미리부터 판단한다는 것이 온전히 옳은 일은 아니지만 뭔가 시사적인 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나는 이 책 <살육과 문명>을 보고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을 연상시켰고, 더 소급해서 부르크하르트가 그의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화>에서 전쟁을 '개성의 충돌'로 묘사한 부분을 연상시키게 했다. 저자는 전쟁을 문화로 다루고 있다. 살육에 대한 상이한 문명적 제도가 어떻게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가라는 식의 인식은 전쟁이 왜 일어났으며, 누구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느냐라는 판단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저자는 전쟁에서 정치경제적 배경이나 도덕의 관점을 배제하는 것이 전쟁사를 제대로 읽는 방법이라고 하나, 그것은 제대로 읽는 유일한 방법이 아니라 그저그런 여러가지 해독법 중의 하나에 불과하며, 동시에 전쟁을 피상적으로 '즐기게' 만드는 위험한 방법이기도 하다. 저자에게 전쟁이란 서로 다른 (문화적) 개성의 충돌 정도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냉전이 해체되고 세계화가 급진전되면서 서구의 보수주의자들은 그들의 반공이란 이념적 모토를 '문화의 충돌'로 바꿔달기 시작했다. 진보적인 북반부 유럽에서 조금씩 유행하기 시작한 신극우주의는 세련되게도 '유럽문화의 동일성 보존'이라는 모토를 들고 나오기도 한다. 대놓고 말하지는 못하지만 이들의 관점에는 자신들의 개성이 다른 자들의 개성보다 우위에 있다는 발상이 숨겨져 있다. 그런 점에서 <살육과 문명>에 강경보수파의 싸움개 뉴트 깅그리치가 장문의 서평을 달아준 것은 뭔가 아귀가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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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익에 눈먼 미국 - 어느 보수주의자의 고백
데이비드 브록 지음, 한승동 옮김 / 나무와숲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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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환 위기 이전에 한국은 폐쇄된 나라였다. 외국 언론이 우리에 대해 무슨 이야기를 하던 그건 그네들의 사정이었고, 그들의 이야기는 가끔씩 제한적으로 또는 곡해되는 방식으로 한국 내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기제로 이용되기도 했다. 그러던 것이 외환 위기라는 전례없는 위기를 경험하고 난 후 우리는 외국 언론, 특히 미국의 언론에 아주 예민한 귀를 가지게 되었다. 얼마전에도 전경련이 노무현 당선자를 '사회주의'라고 칭한 것에 대해 예민한 반응을 보인 것도 그 한 가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건 나름대로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자폐적이고 자기중심적인 기제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는 신호니까 말이다. 그러나 아직 충분하지 않다. 지금 우리는 외국에서 들려오는 각각의 신호에 대해 분별력을 기르지 못했다. 월 스트릿 저널과 네이션의 차이를 모르고, 타임과 뉴스위크의 차이를 모르며, 또 각 신문사 내에서 다른 성향의 기고자들이 동시다발로 글발을 날리고 있다는 사실에 무지했다. 외국의 소리는 무조건 신의 소리처럼 떠받들기 바빴다는 것이 틀린 말도 아니었다.

다행히 요즘에는 인터넷 매체가 발달하면서, 분별력을 기를 수 있는 다양한 소스들을 자주 접할 수 있었다. 윌리엄 크리스톨이란 칼럼니스트가 어떤 성향의 작자인지 과거에 누가 관심이 있었겠냐만은 이제는 그 성향을 분별하고 그가 어떤 환경과 인맥 속에서 활동하는 작자인지 아는 것이 중요한 일이 되고 있다. 본 저서는 미국 우익 언론들의 지형도를 내부로부터 시시콜콜하게 살펴보게 해주는 소스 역할을 해준다. 역자는 친절하게 부분 부분 미국에서 활동하는 언론인과 정치인들, 학자들, 민간 연구단체들, 민간 사회단체들에 대한 간략한 정보도 잊지 않고 제공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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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이란 누구인가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49
노서경 지음 / 책세상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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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외부에서 많이 유행하는 프랑스 지식인들, 예를 들어 알튀세르, 사르트르, 퐁티, 라캉, 푸코, 데리다 등은 과연 얼마나 지식인다운 걸까? <지식인이란 누구인가?>라는 제목을 지닌 이 책은, 그러나 그 유행하는 지식인들은 거의 다루지 않는다. 저자가 설정한 지식인의 부류, 혹은 참다운 지식인의 부류에는 이들은 별로 끼여들 일을 하지 못했던 듯 하다. 대체적으로 프랑스의 지식계는 다른 서방의 여러 나라들에 비해 페쇄적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논리실증주의부터 생물학, 심지어는 소련의 꿀락과 같은 잔인한 전체주의에 대한 자각까지 언제나 다른 나라들보다 두어 걸음 이상 늦었다.

그렇다면 이 책이 다루는 지식인들은 어떤 부류의 사람들인가? 그들은 우선 현실문제에 대해 아카데미즘적 거리두기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자유와 평등을 위해 펜을 묘사나 분석용 붓이 아니라 저항의 칼자루로 삼은 사람들이다(페르낭 펠루티에르 보아라). 30년대 전유럽적인 파시즘 열풍 속에 알듯 모를 듯 숨어서(싸르트르롤 기억하라!) 살지 않고 감히 그들에 저항했다(앙드레 지드를 보아라). 이 책은 전통 좌파를 공격하며 돈벌이를 했던 '포스트모던적' - 그들이 원하지는 않는 명칭이겠지만 - 프랑스 지식인들은 거들떠 보지도 않고, 프랑스 전통 좌파의 실천을 이끌고 보좌했던 지식인들, 그리고 다양한 군국주의와 비시정권애 노골적으로 저항했던 반파시즘 지식인들을 다룬다.

그러나 이들의 이름은 우리의 귀에 낯설다. 왜 그럴까? 프랑스 사상 전문 지식인임을 자처하는 사람이 자꾸 늘어나고 있는 형국인데, 왜 맨날 푸코, 들뢰즈, 라캉 타령 뿐일까? 여기 거론된 지식인들의 이름이 그대의 눈에 낯설다면 그대의 프랑스관에는 뭔가 콩꺼풀이 씌웠을 가능성이 크다고 믿는다.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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털없는 원숭이 - 동물학적 인간론
데즈몬드 모리스 지음, 김석희 옮김 / 영언문화사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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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한 공식을 떠올려 보자.

<인간-털=원숭이> 혹은 <원숭이-털=인간>

이건 맞는가 틀리는가? 저자는 이 선세이셔널한 책을 통해 인간의 동물적 요소에 대해 사람들이 좀더 이해하기를 바랬을 뿐, 인간을 동물로 환원하라는 소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인간과 원숭이(동물)가 단지 '털'로 대표되는 물리적 차이만 있다고 주장하려는 것도 아닐 것이다.

문제는 독자들 편에서 시작되는 것 같다. 이 책을 신성모독으로 여기는 종교인들의 반응만큼이나, 거꾸로 이 책을 인간을 본질적으로 정의하는 원리로 받아들이려는 유사 종교적 반응도 넌센스이기는 마찬가지다. 예전에 이 책과 관련해서 나는 특이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결혼을 앞두거나 그에 상응하는 조건 속에 빠져있는 여자들이 이런 류의 책에 금새 빠져드는 것을 자주 보았다. 그녀들은 자신의 자율성을 냉철한(?) 과학의 이름으로 포기하려고 했던 것이다.

동물행동학자들이나 유전자결정론자들도 이런 류의 실수를 자주 범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관찰내용을 의인화시켜 인간세계에 부주의하고 무리하게 적용시키는 발언을 가끔씩 한다. (이 책에서도 가끔씩 그런 비약이 존재한다. 독자를 가르치겠다는 욕망의 과잉때문일까?) 인문학자들이 과학철학 내의 인식론적 상대주의를 이용해서 과학의 정당성을 흔들고자하는 시도가 넌센스인 만큼 자연과학자들이 자신들의 발견을 인간의 사회, 제도, 문화로 비약시키는 것도 넌센스다. 일종의 두 문화(혹은 두 학문) 사이의 헤게모니 싸움인 듯 한데, 이 싸움에 순진한 독자들이 엉뚱하게 피해를 입어서는 안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통해 <인간된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해주는 기회를 준다면 그 자체로 아주 유익한 것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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