렘브란트와 혁명 - 혁명적 예술가 3
존 몰리뉴 지음, 정병선 옮김 / 책갈피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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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스피노자를 공부하면서 17세기 네델란드 사회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없었고, 동시에 스피노자와 몇 블록을 사이에 부고 살던 역사적인 화가 렘브란트에도 눈길이 미치지 않을 수 없었다. 17세기 네델란드 사회를 세밀히 다룬 책을 찾기가 쉽지 않았던 차에 우연찮게 이 책을 발견하게 되었고, 간략하게나마 그 시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며 이 분야에 관한 한 독보적인 저서인 조나산 이스라엘의 'The Dutch Republic: Its Rise, Greatness, and Fall 1477-1806' 도 소개받을 수 있었다.

책이 내보이는 렘브란트는 '새로운 혁명적 예술양식'의 개척자이며, 나아가 그가 개척자로써 등장하게 된 사회적 배경에 주목한다. '렘브란트의 혁명적 예술을 탄생시켰던 것은 17세기 전반부의 네델란드 사회였다. 그리고 그 네델란드 사회는, 에스파냐 왕정에 반발해 1566년에 시작되어 독립 네델란드 공화국 성립으로 종결된 네델란드 독립혁명의 직접적 결과였다.'

그렇지만 렘브란트는 한 시대의 깊은 구조를 반영한 존재이자, 동시에 그 시대를 회의적인 태도를 드러내는 반정립적 존재이기도 했다. 그의 대상 인물에 대한 시각에는 부르조아적 시각과 함께 반부르조아적 (혹은 타자적) 시각이 모순적으로 공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그 증거로 당대의 고통받고 소외되는 자에 대한 단순한 연민의 태도가 아닌 연대감과 동일시의 태도를 내세운다. 렘브란트는 이런 식으로 변증법적 역사 발전의 궤적의 중요한 연결고리이자 증표로서 제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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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사 - 단군에서 김두한까지 한홍구의 역사이야기 1
한홍구 지음 / 한겨레출판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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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 앞에서 '대~한민국'을 외치던 사람들에게 '대한민국'이란 과연 무엇일까? 기성의 50-60세대에게 대한민국이란 미국과 이승만이 김일성의 공산주의로부터 구해낸 '자유'의 나라다. 조선일보 등 구세대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언론들은 그런 류의 대한민국의 기원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이승만의 나라만들기, 박정희의 비극적 영웅담 등을 생산해 내기도 했다.

그런 이야기에 너무 노출된 분이라면 강력추천할 수 밖에 없는 책이다. 이 책을 읽고 나면 <대한민국>이란 나라의 기원이 그다지 내세울 것 없고 심지어는 추하다는 느낌까지 준다. 그러나 그것이 다는 아니다. 추한 것을 아는 것은 중요하다. 그래야 더 추해지지 않을 수 있고 노력 여하에 따라 추함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까...

솔직히 말해서 남한과 북조선을 놓고 볼 떄 어느 나라가 더 정통성이 있을까? 남한은 3-1운동 정신과 대한민국 망명 임시정부의 법통을 잇는다고 헌법에 버젓이 나와있으나 임시정부의 정강에는 토지 국유화안이 있다. 임정의 통일 민족 자주 노선은 당시의 남한과 별로 어울리지 않는다. 그냥 순전히 상대적으로 북조선과 비교한다면 남한이 북조선보다 더 정통성이 있다고 장담할 수 없다고 본다.

그러나 역사는 아이러니의 연속이다. 남한은 정통성없는 정부에 대항하여 민중들이 봉기하여 민주국가로 나아갔으나, 북조선은 정부의 정통성이 상대적으로 수준이 높았기에 아무래도 민중들은 고분고분 독재를 용인했다. 시원의 정통성은 북조선에 있을런지 모르지만 과정의 정통성은 남한에게 있다. 물론 나의 생각이다. 남북의 통일은 바로 시원과 과정의 정통성이 통합되는 수순을 밟을 때 완벽해 질 것이라고 믿는다.

이 책은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대~한민국'이란 나라의 근대적 기원을 흥미있게 서술해준다. 역사에 대한 호기심은 현대사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본다. 이 책은 정말 그 촉매제로 손색이 없는 좋은 책이다. 다만 이 분야를 좀 더 깊이 읽도록 가이드를 해줄만한 저서목록이나 연구 동향 등을 간략하게나마 소개해주었었으면 더 좋았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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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정치 문명
권용립 지음 / 삼인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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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저서는 미국에 대한 기존의 입장들, 예를 들어 선망과 두려움이 섞인 통속적인 시각과 지나치게 개별 현상들의 분석에만 치우친 실증적 시각, 혹은 좌파 쪽의 경제환원론으로부터 한 발 벗어나서, 미국을 하나의 독특한 정치적 문명으로 보고자 한다. 저자의 시각에 따르면 미국은 그리스-로마 문명과 기독교 문명의 구 서구세계와 연관되지만 혈연, 영토, 민족, 역사, 계급 등과 같은 요소보다는 독립 초기의 정치적 담론에 의해 형성된 독특한 나라란 점에서 구 서구와 다르며, '보수적 아메리카니즘'으로 명명된 그 독특성은 지금까지 미국의 정치, 외교 정책의 근본적 정체성을 형성하고 있다고 본다.

나에게 저자의 이러한 논지는 애국주의적 미국 예외주의가 외부자적 시선으로 변형된 또 다른(애국과는 상관없는) 예외주의(나는 이를 '자폐증'로 부르고 싶다)로 보였다. 미국의 보수적 애국주의자들이 미국을 타락한 세계로부터 예외적인 것으로 분리시켰다면, 저자는 미국을 그 독특성으로 인해 자폐증에 걸린 나라 쯤으로 보고 있는 듯 하다. 그리고 이 자폐증적 현상은 일방주의가 거친 방식으로 준동하는 미국의 현 상태와 자주 오버랩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시각은 부분적으로만 우리에게 유용한 것 같다. 유용한 부분이 있다면 미국의 정치인들이 자국민들에게 행하는 정치적 담론들 속에 나타나는 반복적 행태를 이해하도록 돕는다느는 점이다. 이런 반복을 통해 미국은 미국인이라는 정체성을 반복 확인하고 미국적인 것과 비미국적인 것을 분리한다. 이런 식으로 저자의 시각은 미국 내 정치적 선전(및 담론)이 내부적으로 작동하는 방식을 이해하는데는 유익하다. 반면 이런 시각은 자칫 미국에서 있었거나 있을지도 모를 유의미한 변화의 조짐들 마저 거의 원형론적 틀 속에서 질식시켜 버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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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 한국 민주주의의 보수적 기원과 위기, 폴리테이아 총서 1
최장집 지음 / 후마니타스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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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저널에서 언급되었다시피 이 저서는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를 경고하고 있다. 그 위기의 신호는 과거처럼 전통적 권부의 중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시민사회에서 나오고 있는데, 그 병명은 시민사회의 보수화다. 저자는 '보수적'인 것을 보통 우리가 일반적으로 '수구적'이라고 부르는 것과 일치시키는 듯 하다. 과거 반민주적 정권과 밀월관계에 있었던 세력들이 민주화 이후의 변화된 환경 속에서 시민사회 속으로 점진적으로 파고 들어가고 있다는 경고로 해석된다. 권부 내의 구태는 어느 정도 도태되었으나 이제 시민사회 내부에 자리잡은 구태가 권부 자체를 좌지우지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우리는 이런 상황을 김영삼 개혁정책이 호도되는 과정을 통해 분명히 목도하기도 했다.

한국 시민사회의 보수적 기원은 민주주의에 대한 한국인의 불명확한 이해에도 영향을 미쳤다. 권위주의 시대를 통해 한국인들이 배운 민주주의는 자유-민주주의(free-democracy)에만 경도되었고, 자유민주주의(liberal democracy)는 알지 못했다. 자칭 한국의 메인스트림이 주장하는 자유-민주주의란 절름발이 민주주의일 뿐이며, 때로는 아예 반민주적이었다. 또한 '자유'라는 말을 마치 그들 자유-민주주의만의 것인양 했던 것도 문제다. 이를 통해 자유와 평등의 문제가 왜곡되고 한국의 민주주의와 시민사회의 위기를 가속화시켰다. 나 역시 조선일보 등과 같은 언론들이 자유와 민주주의를 어떻게 왜곡시키는지 분명히 목도할 수 있었다.

본 저서는 최근에 출간된 정치관련 저술 중 가장 밀도있고, 동시에 대중적인 것이었다. 권위주의적 체제가 민주주의적 체제로 이행될 때, 정치의 영역이 사회-문화으로 이양되며, 이 과정에서 의외로 민주주의가 위기에 직면할 수 있다는 경고는 새겨들을 만하다. 정치 영역은 타협의 영역으로 매우 탄력성을 확보해 나갈 여유가 많지만, 문화 영역은 경직성이 매우 강한 듯 하다. 바이마르의 독일 혹은 미국 신보수주의 운동에서 정치와 문화의 융합이 어떻게 민주주의를 왜곡시켰는가 하는 문제를 연상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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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별없는 열정 - 20세기 지식인의 오만과 편견
마크 릴라 지음, 서유경 옮김 / 미토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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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마크 릴라는 20세기의 다양한 저항 이데올로기들 - 공산주의, 파시즘, 제3세계 및 여성 해방운동 등 - 을 (근대 자유주의의 '건전한' 전통을 와해시키는) '전제-애호 성향'이라고 통칭하고, 이 경향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를 설명하고자 한다. 이에 대한 전통적 설명방식은 대체로 사상사적 방법이나 지식사회사적 방법이 있었다. 전자의 방법에는 이샤야 벌린의 비정한 합리주의 운동 비판이나 야콥 탈몬드의 종교적이며 비합리적 열정 비판, 후자의 방법으로는 하버마스의 독일 지식 사회의 정치적 미숙성에 대한 비판이나 레이몽 아롱의 프랑스 지식 사회의 정치종속적 경향 비판이 있었다.

반면 마크 릴라가 선택한 것은 그 둘 중 어느 것도 아닌 (레오 스트라우스의 추종자답게) 고전적 전범을 통한 방법이었다. 그는 플라톤, 디온, 그리고 디오니소스 2세의 고전적 이야기에 기대어서 20세기 전제-애호 경향의 지적 흐름을 설명하고자 한다. 여기서 플라톤이 디오니소스 2세라는 '유사 철인왕'을 <전제-애호>로부터 구해내는 덕목은 '중용'과 '절제'다. 디오니소스 2세는 '자기 자신을 잡아늘이려는' 심리적 열정에 사로잡혀서 분별력을 절제를 상실했고 중용은 깨어졌으며, 그의 정치는 전제정으로 타락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는 플라톤이 상정한 고전적 인간 모델을 전제로 한 것이다. 인간은 육체와 영혼 양 방향으로 '가장 아름다운 것을 생산'하고자 하는데(이를 Eros라고 부른다), 이 염원의 현실화 과정에서 고귀한 것과 천박한 것을 구별해내는 '통제력'은 매우 중요한 덕목이다. 이 통제력을 상실한 자는 '지상에 가장 가까운' 전제자의 영혼으로 타락하게 되고, 그것을 지킨 자는 '천상에 가장 가까운' 철학자와 시인의 영혼으로 고양된다고 본다. '사랑이 무의식적으로 추구하는 바 - 영원한 진리, 정의, 미, 지혜 -를 얻고자 하는 희망을 담은 통제된 에로스의 삶'이 저자 마크 릴라가 제안하는, '분별없는 열정'에 대한 대안이다.

그가 20세기로부터 추출한 전제-애호 경향의 철학자들은 이런 고전적 전범에 의거해서 선별, 비판받는다. (이에 대해서는 동아일보 김형찬씨의 서평 참조) 솔직히 말해서 나는 그의 접근법이 얼마나 호소력있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고전적 전범에 의거한 심리적 유형론이랄까? 훈고학 냄새가 짙게 나는 이런 식의 설명이 과연 얼마나 타당한 것인지를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크 릴라가 선별한 이 철학자들을 역사적 맥락과 심리적 맥락에 함께 엮어넣어 살펴보는 것이 전혀 무용한 일인 것 같지는 않다. 특히나 그의 '세속주의적 이성'을 나로서는 거부할 수 없었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 분별과 열정의 긴장, 민주정과 전제정의 유혹 등의 문제는 지금도 많은 지식인들을 사상적, 정치적, 사회적 궁지로 몰아넣기도 하는 문제들이다. '열정적으로 사유'하면서도 낭떠러지에 떨어지지 않고 균형감각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동시에 균형감각에만 너무 몰두하다가 보면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이 한국의 노련한(?) 정치가 '김종필'과 같은 사람이 되어있음을 알게 되는 당혹감을 견뎌야 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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