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원의 지배
마이클 클레어 지음, 김태유.허은녕 옮김 / 세종연구원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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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절의 이념 대결 혹은 최근에 개발된 문명 충돌에 의거한 국제 갈등들은 결국 한꺼풀 벗겨내면 경제 갈등이며, 경제 갈등의 핵심에는 자원에의 전쟁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 이 책이 우리에게 일러주는 혜안이다. 물론 자원 갈등이 유일한 갈등의 원천일 수는 없지만, 자원에 대한 소유 및 접근성이 가속적으로 희박해지고, 반대로 수요는 점증하는 상황에서 이념적, 문화적, 인종적, 정치적 갈등이 자원에의 갈등과 연관되는 일은 더욱더 잦아지고 있음은 사실이다. 아프카니스탄 사태나 이라크 전쟁이 어떤 식의 정치적 수사로 치장되든지 간에 그것은 근본적으로 자원 전쟁일 뿐이다.

1998년 세계야생기금(World Wildlife Fund)는 1990년과 1995년 사이 이용가능한 자연적 부의 3분의 1을 잃었다고 한다. 물론 이런 상실의 속도는 지속적으로 유지되고 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세계의 경제를 지탱하는 탄화수소 에너지 공급에 대한 비관적 전망이다. 미 에너지부의 예측에 따르면 석유소비가 매년 2%씩 증가하는 현재의 상승세를 감안할 때 현존하는 석유 공급량은 25-30년 내에 사라질 가능성이 크며, 설상가상으로 추가적인 석유 채굴에 대해 더 높은 위험도와 비용을 희생해야 하기 때문에 세계는 2020년 경부터 심각한 수요 대비 공급 위기를 격기 시작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탄화수소 에너지에 대한 통제력이 지니는 국제정치적 함의는 지대해진다. 널리 알려져있다시피 미국에게 있어서 석유 자원에 대한 '세계적 차원'의 통제력은 미국의 글로벌 파워로서의 위상을 유지하는데 핵심적인 요소이다. 이는 과거 구 소련이 동구권에 대한 석유 수급 통제력을 통해 동권 및 여타 공산권에 대한 지역적 헤게모니를 유지했던 것, 중국이 북한에 대해 석유 공급을 토대로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한국과 일본, 대만 (나아가 동남아와 중국까지) 등은 이런 미국의 석유 헤게모니에 의존하여 미국 소비 시장의 공장 노릇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여하튼 본서는 최근의 국제적 분쟁들을 레토릭에 현혹되지 않고 경제적이고 물질적인 토대로부터 읽어내도록 돕는 교과서같은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읽고 나서 느끼는 것이지만 이 책은 평화주의자들 뿐만 아니라 이 땅의 반북론자들에게 읽힐 필요가 있다. 평화주의자들 만큼이나 이 땅의 반북론자들은 일종의 정치지향의 맹신주의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북의 정치체제가 어떤 체제이든지간에) 이북을 통과하여 얻어질 수 있는 에너지 자원에 대한 남측의 접근성 확대는 중동 지역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는 남한의 치명적인 의존구조를 해소하는 첩경이란 점을 제대로 인식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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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없는 정복 - 글로벌 자본주의와 국가의 죽음
노리나 허츠 지음, 조영희 옮김 / 푸른숲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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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일러주는 기업 지배 사회의 모습은 나에게 언뜻 팀 버튼의 음습한 수퍼영웅 영화인 '배트맨'을 떠올리게 했다. 거대한 빌딩 숲의 고담시에서 시민이나 시장(혹은 정부)은 악당에게도 영웅에게도 무력하기만 하다. 그런데 이 악당(조커)과 영웅(배트맨)은 절묘하게도 둘 다 기업가 혹은 자본가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조커는 빠르게 부를 축적하는 신흥 기업가라면, 배트맨은 이미 벌만큼 벌어놓은 기성의 거대 자본가란 점 뿐이다. 한 녀석이 고담시를 혼돈의 상태로 만들면 다른 녀석이 나와서 질서를 바로잡는다. 이 시계추 운동에서 고담시 시장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밤하늘에 배트맨에게 우리를 구해달라고 써치라이트를 켜는 일 뿐이다.

이런 당혹스런 세계는 오히려 우리의 현실에서 더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책에서 소개한 조지 소로스의 경우를 보자. 공교롭게도 그는 배트맨처럼 망가진 가정 출신이고, 자신을 그만큼 성장시켰던 세상에 대해 자기 부정적인 적의를 드러낸다. 소로스는 한편으로는 정치인들이 자신을 주목하게 하기 위해 잉글랜드 은행과 파운드화를 굴복시켰던 검은 수요일 사태를 일으켜 영국인 1인당 12파운드씩의 손해를 입히는 일을 저지르고, 다른 한편으로는 '열린 사회'를 모국 헝가리에 전염시키기 위해 복사기를 무제한으로 비밀 공급하는 작전을 서슴치 않았고, 최근에는 새롭게 등장하는 글로벌 자본주의와 개인주의에 대해 험한 경고를 하는데 말을 아끼지 않는다. 이 해괴한 아이러니...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지속적으로 국가 정치 영역이 시민으로부터 외면당하고 정치인들은 기업에 종속당하며 기업이 전통적 복지국가의 역할을 대신하고 심지어 사회 정의를 위해 여타 시민단체보다 더 급진적인 노릇을 하는 전도된, 그러나 현실인 세계를 보여준다. 정부의 고객은 이제 더 이상 시민이 아니라 기업이 되었고 정부는 사회에 돌아가야 할 복지를 기업으로 돌린다. 기성의 정치적 장이었던 투표장과 의회는 이제 슈퍼마켓과 관공서의 로비로 대체되어 여러 시민운동 단체들마저 더 이상 정부를 상대하지 않고 기업을 상대한다. 우리는 시민의 요구조건을 관철시키기 위해 고담시 시청으로 가봤자 시장님은 결국 써치라이트를 켜고 사장님들을 불러모으는 것으로 해결을 보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가 간파하고 있듯이 이런 전도된 세상은 정상적인 것이 아니며 효과적인 것도 아니다. 언론, 정치 등의 공공적 영역이 끊임없이 사유화되는 과정에서 우리 시민의 삶은 결국 변덕스런 시장에 좌우되는 (이윤 획득이 우선 목표인) 기업들의 변덕스런 결단에 좌우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세계화라면 단호히 거부해야 하나 세계화란 것이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이것을 제어할 수 있는 시민사회의 힘을 길러야 한다. 이 때 국가의 위상은 중요하다. 기업의 비서관으로 전락한 국가를 본래의 자리로 돌려세우고 전세계적으로 네트워크화된 시민의 힘과 연결시켜야 한다는 것이 저자가 제시하는 해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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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탄생 - 한 아이의 유년기를 통해 보는 한국 남자의 정체성 형성 과정
전인권 지음 / 푸른숲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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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분이 대화를 대체'하고 '선택이 아닌 진급하는' 삶을 살며 그 속에서 한 남자는 '동굴 속의 황제'로 즉위하지만 둘로 분열된 자아로 고통받는다. 그는 본연의 자기에는 무관심한 채 분열된 자아들 사이를 떠돌며 '비천한' 삶을 산다. 이것이 저자가 한국 남자로서의 자신의 '탄생' 과정을 면밀히 관찰한 끝에 얻은 결론이다.

이런 비천함은 어디에서 기인할까? 첫째는 신분사회의 감옥에 너무도 잘 순응해 온 이 땅의 아버지와 어머니들 때문이다. 특히 어머니가 이 감옥에서 터득한 생존 방식이 자기 자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자식들에게까지 비극을 확대재생산하고 있음은 더욱 비참한 일이다. 둘째는 그런 부모, 특히 아버지를 과감하게 죽여버리지 못한 한국의 아들들이다. 그들은 아버지(스승, 상관 등)를 사회로 이어주는 매개체로 이상화하고 그에 복종한다. 그들은 아버지를 통해 더 큰 사회의 수직적 사다리에 포섭되지 못해 안달을 한다. 그들은 사회와 자신을 무매개적으로 맞세운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조차 파악하지 못한다. 그렇게 비천함은 계속 반복되는 것이다.

저자는 독자에게 무엇을 요구하는 것일까? 나는 그 무엇이 '자유'라고 생각한다. 그냥 자유가 아니라 진정한 자유말이다. 어떤 것을 하지 않을 자유가 아니라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자유말이다. 수직적 사다리에 포섭된 아들들은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할 자유는 없다. 그저 자기보다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하는 일을 하지 않을 자유만 있다. 그들에게 존재하는 세계는 오직 거대한 사디리 뿐이다. 그 밖의 광대무극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눈멀고 귀먹었다. 그럴수록 그들은 비천하고 공허해졌고, 그의 순종적 아들들은 그 비천한 공허함을 '아름답고 성스러운 질서'의 표상으로 착각했다. 그 표상의 숨통을 끊어놓지 않는 한 우리의 발목을 붙들고 있는 저 비천한 아버지들로부터 우리는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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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 권력과 싸우다 - Kafka Franz
박홍규 지음 / 미토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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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까지 카프카는 단독자, 혹은 현대 인간의 피할 수 없는 고독과 소외, 불안의 재현자 따위로 그려져 왔다. 이런 초상은 인간의 삶은 사회에 대하여 숙명적이고 수세적으로 표상된다. 저자 박홍규의 불만은 거기에 있다. 카프카가 한국 독문학계의 자폐적이고 순응적인 성향과 맞물리면서 실존주의적 우상으로 등극한 듯 하여 실망스러워 한다. 그 외에 유태 시오니스트들에 의해 유대 신비주의 작가로 민족 종교적으로 해석되거나 섯부른 동서양 이분법을 전제로 카프카가 동양과 서양이 만나 형성되었다는, 또 다른 형태의 유사 신비주의적 해석에 대해서는 카프카가 본래 지니고 있던 사회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반증으로 들면서 해석자의 '반사회적' 태도를 카프카에 투사한 것에 불과하다고 일침을 가한다. 덧붙여 마르크스주의 일각에서 카프카를 부르조아 모더니스트로 일갈하여 폄하하는 것에 대해서도 동의하지 않는다. 박홍규의 카프카에 대한 해석은 에른스트 피셔나 질 들뢰즈의 해석과 공유하는 부분이 많다.

박홍규에 의해 그려지는 카프카는 좀 더 지적으로 명석하고, 사회적으로 안정적이면서, 동시에 사회에 대해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자로 그려진다. 그는 어떤 뚜렸한 정치적 행동으로 그런 저항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작품을 통해 일관되게 권력, 국가, 정부, 쁘띠 부르조아적 관료주의에 저항했으며, 그런 일관성을 통해 저자는 그를 아나키스트라고 불릴만하다고 평가한다. 그의 설명을 듣고 있자니 여타 해석들, 예를 들어 문학주의자적 해석이나 철학적 해석, 맑시스트들의 해석, 유사 오리엔탈리스트들의 해석들이 점점 억지스럽게 들리게 되었다.

또 하나 이 책의 미덕은 카프카를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내부에서 독일인들과 함께 체코인들 속에 뭍혀 사는, 독일어권 유태인들의 사회적, 문화적 상황을 자세히 알려주고 있다는 점이다. 당시 사회적 복잡성과 역동성, 입체성 속에서 카프카를 제대로 위치시켰을 때 우리는 카프카에 대해 가지고 있던 기존의 상식적 인상 - 어둡고 폐쇄된 연민스런 인간이란 인상 - 은 사라지고 좀 더 역동적이면서 저항적이고 쾌활한 인간을 보게 된다. 역시 내가 알고 있던 카프카는 독일문학 전공자의 어두움 정신 세계가 영향을 미쳤던 탓이었을까? ^^

여하튼 이 책은 카프카에 대한 박홍규라는 개인의 확고한 주관이 뭍어나는 힘있는 책이다. 일독의 가치는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 번에 서너 권의 전기를 동시에 출간하는 다작의 작가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책의 완성도는 그다지 높지 않다는 점을 지적해야겠다. 비문과 오탈자가 난무한다. 그리고 책 초반의 맹렬함에 비해 종결은 좀 졸렬하다는 느낌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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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2-01 21: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제국의 몰락 - 미국 체제의 해체와 세계의 재편
엠마뉘엘 토드 지음, 주경철 옮김 / 까치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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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서론 딱 두 줄에 이 책의 모든 것이 응축되어 있다. '과거에 우리는 미국에게 어떤 해결책을 찾곤 했다.' 그러나 현재 '미국은 전 세계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다.' 50년대까지만 해도 미국은 신사적이고 개방적이며 해결책과 함께 비젼을 제시하는 나라였다. 그러나 지금은 오히려 덩치만 큰 말썽꾼이 되었다. 고립주의 전통을 이어받은 아시아 우선주의자들이 미국의 권력을 쟁취하자 미국은 갑자기 가장 거칠고 촌스러운 외교 행보로 나아갔다. 이로 인해 여타 문명국들은 거북함을 감추지 못했고, 잠재적 타겟이 되고 있는 일부 강대국들은 분노를 느껴야 했으며, 힘없이 말만 많은 소위 깡패국가들은 걸맞지 않은 린치를 당해야 했다. 찬란한 문명국들 사이에 홀연히 떠오른 촌뜨기 바바리안. 그들에게 미국의 지도력은 너무 과분한 역할이다.

저자는 기존의 반미주의자들에게 충고한다. 그들은 미국을 악의 핵심으로 파악하지만 동시에 유일무이한 파워로 다룬다. 그러나 미국의 힘은 공갈이란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그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미국이 초강대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던 조건과 일치한다. 미국은 악 혹은 공산주의, 전체주의로 부터 민주주의를 지키는 보루를 자임함으로써 최고의 지위에 올랐다. 그러나 지금 민주주의가 도처에서 이룩되고 있는 상황에서(이란까지 포함) 미국은 이제 더 이상 옛 왕좌를 유지할 수 없다.

둘째 세계 대전 이전에 미국은 자기 자신으로 충분한 자급적이고 자율적 경제 속에 있었으나, 현재는 외부 경제에 지나치게 의존하면서 세계 최대의 채무국으로 전락했다. 이제 세계는 미국없이 살 수 있지만, 미국은 세계없이 살 수 없게 되었다. 세번째로 이는 서방 세계에 모두 통하는 것으로, 신진 민주국가는 더욱 민주적으로 변신하는 반면, 오래된 민주주의 국가는 점차 과두제로 퇴화되고 있는데, 미국의 경우는 그 정도가 더 심각하다는 점이다. 자유민주주의가 평화를 가져온다는 기왕의 정설을 떠올려볼 때 전쟁(적 쇼)에 집착하는 미국의 행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다.

미국의 퇴화현상은 미국에게 반복적으로 위기감을 심어주고 있으며, 정치인들은 그 위기를 변명하기 위한 정치적 수사를 개발하게 만들었다. 대표적인 예가 미국의 대규모 국제 수지 적자 현상을 일컬어 미국의 경제는 세계의 소비 역할을 하고 있다는 류의 선전이다. 또한 미국이 여전히 건재함을 보이기 위해 (저자가 이름붙이기를) 연극적 군사주의에 몰두하게 된다. 만만한 놈을 골라 미국의 첨단 군사력을 전시하여 미국의 강함을 만방에 떨치는 것이다. 또 하나는 조만간 피터지게 싸워야 할 산유지역에 대해 미국의 군사적 헤게모니를 강화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집착은 거의 광적이어서 때때로 우습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아랍의 민족주의를 자극하여 미국의 이 지역 통제를 더욱 어렵게 할 뿐이다.

저자는 미국의 부상과 몰락에서 얻는 교훈을 얻자고 충고한다. 미국이 부상한 것은 그들이 군사주의를 거부하고 자기 내부의 내실(경제와 사회적 문제에 집중하는 일)을 기하는데 있었던 반면, 미국이 몰락하기 시작한 것은 그와 정반대되는 일에 집착했기 때문이다. 지금 미국은 악순환의 고리에 외통수로 걸려들어 몰락의 가속도 페달을 밟고 있다. 그러고 보니 요즘 일본이 이런 미국의 자해적 꼬락서니를 답습하고 있다. 자기 경제의 붕괴 위기를 해결할 생각보다는 멀리 군대를 파견하면서 패전국의 설움을 극복하겠다는 발상말이다. 나쁜 일은 동시에 일어난다던가? 우리마저 결코 이런 길을 따르지 말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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