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은 없다
고자카이 도시아키 지음, 방광석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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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제목이 본문과 어긋난다. '민족은 없다'라고 주장하는 책이 아니다. 민족은 그 실체(혹은 본질)는 없지만 인간들의 상호작용의 세계에 그것이 '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매직 아이'를 연상하면 딱 어울리겠다. 수 많은 점들 속에서 몇 개의 점에 시선을 집중하면 어느 순간 삼차원의 공간이 확 떠오른다. 이 때 어떤 점은 선택하고 어떤 점은 제외된다. 자의적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무언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듯이 확 떠오른다. 실재하지 않지만 더 실재같은 이것이 바로 '민족'이다. 혈연도 인종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현실이란 반은 허구다. 허구없이 현실도 없다. 민족은 명백히 허구지만, 동시에 현실을 가능하게 하는 허구다. 현실과 허구를 둘로 나누고 후자를 버리는 일은 가능하지 않다.

인간은 이 허구가 지속되는 한 그 허구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이런 관점에서 일본의 역사적 부채는, 일본인이라는 허구가 지속되는 한, 일본인에게서 면제되지 않는다. 많은 현대 일본인들이 서구 개인주의의 논법으로 조상의 죄를 왜 우리 세대가 짊어져야 하는지 의아해하지만, 저자는 이런 의심은 정당하지 못하다고 본다. 일본(인)이라는 역사적 허구에 의해 자기 자신이 만들어진 바, 이 조건을 초월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기존의 열린 공동체 개념은 대개 두가지다. 프랑스식 (개인주의적) 보편주의나, 미국식 다문화(다민족)주의다. 그러나 전자는 개인을, 후자는 민족을 실체(본질)로 인정하고 있다는 맹점이 있다. 타자와 상호작용을 하면서 '나'란 것이 가능한 법임에도 루소식의 개인주의는 그런 타자를 소거하고 '순수한 개인'을 고안했다. 순수한 개인으로 공동의 사회란 불가능하다. 그래서 루소는 모든 개인을 초월하면서 규정하는 '일반 의지'를 또 고안했다. 이맇게 개인주의와 전체주의가 겹치는 기회를 제공했다.

반면 미국식 다문화주의는 민족을 실체화하고 성급하게 민족 사이에 경계선을 그어버린다. 어떤 면에서 다문화주의는 분리주의란 용어의 완곡어법인지도 모른다. 소수파를 옹호하되 그들을 분리해서 옹호해서는 안된다. 다문화주의적 논리가 유럽의 극우들에게 재사용되기도 한다. 아랍인들은 유럽인들의 문화에 동화시킬 수 없으므로 그들은 다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다문화주의는 이런 주장에 대해 이렇다할 반론을 재기하기 힘들다. 자, 그렇다면 프랑스식 보편주의도, 미국식 다문화주의도 답은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답일까?

저자가 민족을 다루는 방법은 좀 더 근원적이다. 민족은 대체로 역사학적이거나 정치학적인 방식으로 다뤄어져 왔다. 반면 저자는 인지론적이거나 사회심리학적 방법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색다르지만 결론은 평이한 용어로 간다. '열린 공동체', 우리가 대안적 사회로써 숱하게 듣는 개념이다. 그러나 단순히 이방인과 사이좋게 지내는 사회라는 개념은 아니다. 이방인은 그냥 '다른' 존재가 아니라 그 사회가 자신을 정립하는데 '필요불가결한' 존재다. (이방인이 없다면 그 사회가 이방인을 날조라도 해야할 정도로 공동체의 정체성과 이방인은 서로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언제나 소수파인 이방인들은 주류 사회를 변화시킨다. 이방인과 공동체가 서로 꽈배기처럼 꼬이면서 꾸준히 새로운 공동체로 변신해가는 것이다.

저자가 주장하는 핵심은 이것인 것 같다. 유래나 고정된 것에 집착하기 보다는 타자와의 만남을 통해 끊임없이 변화하는 활력에 참여하고 즐기면서 새로운 것을 창조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다수파든 소수파든 강요에 의하지 않고 스스로 자유롭게 변화의 활력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재일들이 국적이나 이름을 바꾸지 않는 것은 바로 그들이 강요의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고단수의 동화 전략일까? 그렇게 생각했다면 당신은 책을 처음부터 다시 읽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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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네코 후미코 - 식민지 조선을 사랑한 일본 제국의 아나키스트
야마다 쇼지 지음, 정선태 옮김 / 산처럼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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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에 관한 생각이 날카롭지 못한 자의 외국관은 그가 외국에 관한 지식을 아무리 많이 갖고 있다고 할지라도 진부할 수 밖에 없다.' - p.400

자기 자신을 국민이나 민족 등, 집단의 일원으로 밖에 구현할 수 없는 사람은 외국에 대한 지식이 아무리 많아도 자신이 속한 국민, 민족, 집단이 규정하는 추상적 외국관을 반복할 수 밖에 없다. 그의 눈과 귀는 이미 국민 혹은 민족이란 틀로 고정되어버렸기 때문에 살아 움직이는 구체적인 사람들로서의 외국(인)을 볼 수 없게 된다. 근대화기의 많은 일본인들이 근대 국민으로 재탄생하면서 필연적으로 다다를 수 밖에 없었던 인식의 한계가 여기서 비롯된다.

이런 관점에서 저자는 박열을 자유에 관한 생각이 가네코 후미코보다 날카롭지 못한 인물로 판단한다. 그는 아무래도 자기 자신보다는 민족에 더 육감적으로 반응했고 그가 주장한 '자유'란 실제 경험보다는 상상에 그친다고 본다. 박열에게 자유에 대한 열정은 금새 민족적 억압이란 문제에 흡수된다. 반면 후미코의 경우는 자유 그 자체로 팽창하고 그녀의 자살도 그 자유를 억누르려는 전향공작에 대한 최후의 저항으로 해석된다.

저자 야마다 소지의 그런 관점은 적어도 결과적으로 사실에 부합한다. 박열은 전향공작에 굴복하여 천황제를 긍정한다. (심지어 해방 후 친일 잔재 청산에 반대하는 운동에 참여한다.) 일본에서 여러 좌파 계열 중 많은 사람들이 순식간에 천황제로 돌변하고 독일의 좌파 계열 중 많은 사람들이 순식간에 나치즘으로 전향했던 것처럼 말이다. 반면 후미코는 정반대의 길을 간다. 그녀는 국가(천황)의 공작도 뿌리치고, 천황-가부장제적 일본 근대의 틀 자체를 목숨걸고 거부한 것이다. 그것은 국가도 민족도 가족도 아닌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한 결단이었다.

일본의 경우 폐번치현과 천황제 확립의 근대화 과정은 개인들을 '국민'으로 동원, 재탄생시키는 과정이었다. 근대화가 국민국가화와 병행되는 것이라면 다나카 쇼조나 가네코 후미코란 존재는 그런 방식의 근대를 뛰어넘어 삶의 구체적 경험에 바탕하여 탄생하는 '자율적인 개인'을 대표한다. 이런 점에서 저자는 일본 사상사에서 그녀가 차지하는 위치를 높이 평가한다.

이 책의 부제, '식민지 조선을 사랑한 일본 제국의 아나키스트'란 말은 일본에서와 달리 여기 한국에서는 퇴행적으로 작동할 가능성이 크며 이 책이 추구하는 주제와도 걸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일본의 맥락에서 쓰인 부제라면 '민족적 정체성을 초월한 이상(혹은 개인)'을 의미하겠으나, 한국의 맥락에서 쓰인다면 후미코가 '조선의 민족적 불행'이란 집단적 동원 코드로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 독자들의 민족주의적 우월감(피해의식)을 노린 상업적 고려로 오인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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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들을 위한 변호
복거일 지음 / 알음(들린아침)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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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우상파괴적인 대중적 역사서가 연이어 출간되고 있는데, 한홍구씨의 <대한민국사>와 함께, 한국인이면 놓쳐서는 안될 책이라고 생각한다. 한홍구씨와 복거일씨는 비록 정치적으로는 서로 상반적일런지 몰라도, 진실에 대한 열정과 화해에 대한 희구에 있어서는 서로 동질적으로 보인다.

물론 몇 가지 논란을 일으킬 소지는 있다. 일제시대 조선의 경제는 이전보다 더 윤택해졌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저자의 주장은 최근 한국 경제사학계의 실증적 연구결과로 지지되고 있다. 이를 뒤엎을만한 반증도 찾기 힘들다. 식민지 시기 조선의 인구는 이전보다 증가한다. 출생률은 증가하고 사망률은 감소한다. 인구증가율은 일본의 증가율마저 앞지를 지경이었다. 지가가 상승했는데 이는 토지 생산성 증가의 증거이다. 철도망 역시 유래없이 빠른 속도로 확충되었다. 우리가 현재 누리고 있는 근대적 제도의 상당부분이 일본의 강압에 의해 이식된 것이란 점, 특히 박정희의 경제개발은 일본의 메이지 유신과 식민지 경영의 계승이란 점 등은 우리가 외면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물론 식민지 경영의 나쁜 점도 없지 않다. 경제적 성장과 달리 정치적 억압은 상당했다. 하지만 30년대 후반부터 조선 사회로부터 자치의 역량이 확대되었고 이런 노력이 일본 의회에 요구되기도 했다. 이점은 당시 일제 시대 정치적 환경이 완벽히 하향적 압제만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여러 모로 이 책은 우리가 일제 시대에 가지고 있는 자연화된 상식들을 다시 생각하도록 돕는다. 이 부분에 대해 더 관심있다면 윤해동의 <식민지의 회색지대>라는 책을 참고하면 좋겠다. 친일과 저항의 이분법을 넘어서는 회색지대에 자치를 위한 조선인들의 활발한 정치사가 숨어있다는 사실은 당신의 근대사 인식의 지평을 넓혀줄 것이다.

언젠가 은퇴하시던 민족사학계의 신용하 교수께서 학계에 일본계 지원금이 유입되면서 민족주의 사학을 좀먹고 있다고 경고한 적이 있다. 신 교수님의 우려와 열정은 이해하지만 그것은 학문적 비판이 아닌 듯 하다. 지원금이 어디서 나오든 어떤 학문적 결론이 피할 수 없는 증거들과 논증들로 이뤄진 것이라면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데올로기가 진실을 잡아먹는 사태는 학문 뿐만 아니라 이 나라 자체에게도 해가 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책 자체에 대해서는 약간의 불만이 있다. 하나는 인용문 번역의 질이 너무 떨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후주로 영문 원문을 길게 달아놓은 것일까? 또 다른 불만은 책가가 너무 지나치게 책정된 듯 하다는 점이다. 대중적 역사서로 이 가격을 달다니 출판사에 실망이다. 그리고 '21세기 친일 문제'란 부제도 좀 억지스럽다는 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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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1 -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 1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199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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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자인 주경철씨는 그의 <테레지아스의 역사>라는 역사 에세이 모음집에서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씨리즈를 '일본 우익 작가가 일본 우익들에게 이야기하는 우익에세이'라고 간단명료하게 정의한 적이 있다. 이 책을 아주 시대착오적으로 집어든 나 역시 그의 정의를 확인하는 수준의 경험을 하지 못해서 애석할 뿐이다.

시오노 나나미는 도처에서 민주주의를 폄하하고 노예제를 정당화하하며, 전쟁을 두 개성의 충돌로 겁없이 축약시키는 맥락없는 영웅주의에 도취된다. 로마 제국주의는 피지배민에게 관대했음을 설득시키려고 하고(이는 사실과 다르다) 암묵적으로 일본의 우울한 과거에 대해 회한을 드러낸다. 역사학과 소설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은 둘째로 치더라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을 자랑스러워하기까지 한다. 지루하고 비루한 현실 속에서 악전고투하며 현실을 차근차근 바꿔가려고 하기보다는 자폐적 상상 공간에서 무중력 유영하기를 더 좋아하는 어설픈 미학주의자들의 비참한 말로를 나는 시오노 나나미를 통해 볼 수 밖에 없었다.

시오노 나나미의 남근적 제국주의 취향은 일본만의 특수성을 반영한 것이 아니다. 불행하게도 이런 취향을 우리는 우리의 최대 우방 미국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로마 제국에 대한 향수가 영국 제국주의에 대한 칭송으로 이어지고, 다시 미국 제국주의에 대한 자기 반성을 약화시키는 재료로 거듭 사용되는 미묘한 현실을 감안한다면 로마와 함께 시오노 나나미를 비판적으로 읽어야 할 필요성은 결코 작지 않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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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역을 하지 않기 위한 영어번역사전
고노 이치로 지음, 엔터스 코리아 옮김 / 클레오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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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이란 작업은 매우 공적이면서 동시에 사적인 작업이란 사실을 이 책을 보면서 다시 한 번 되새기게 되었다. 번역은 분명 두 개의 공통어를 연결시키는 공적 작업이지만, 실상 그 작업의 세밀한 결들을 들춰보면 매우 사적인 경험과 정감, 뉘앙스 등이 개입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상식적으로는 번역에 있어서 이런 사적 개입은 치명적 오류를 일으킨다고 보지만 실제적으로는 그런 사적 개입이 없으면 의미가 통하지 않거나 엉뚱한 오류를 발생시키는 일이 다반사다. 번역이란 단지 한 언어를 다른 언어로 바꾸어주는 일이 아니라 하나의 언어 공동체와 다른 언어 공동체를 서로 겹쳐보는 작업이기 때문이리라.

처음에 이 책에 마음이 끌렸지만 일본인이 쓴 책이라서 망서릴 수 밖에 없었다. 일본인이 보는 영어와 한국인이 보는 영어는 어떻게해서든 다를 수 밖에 없을 것 아닐까? 그런 차이를 감안한다면 이 책을 보는 것은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일이 아닐까? 그러나 일단 읽어보니 기우에 불과했다. 아무래도 일본어적 감수성과 한국어적 감수성이 다른 어떤 언어들보다 더 가깝기 때문일까? 여하튼 일본인이 일본인 번역자들을 위해 쓴 책이지만 한국 인이 읽어도 전혀 이질감이 없었다. 사전이란 공적인 면과, 에세이라는 사적인 면이 잘 버무려진 그래서 더욱 두덥고 시사해주는 바가 많은 좋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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