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과 동아시아 이웃 나라들 - 과거에서 미래로 - 일본학 총서 69
마리우스 B. 잰슨 지음, 지명관 옮김 / 소화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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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과 그 세 이웃, 한국, 중국, 류큐(오키나와)의 관계를 짧게 개설한 책이다. 같은 출판사에서 먼저 번역된 <일본과 세계의 만남> 만큼 짧으면서도 석학의 연륜이 느껴지는 명쾌함과 신중함이 이 책의 미덕이다. 일부 한국사람들은 원통해 할런지 모르지만 일본 열도는 그 자체로 하나의 독특한 문명권으로 인정받고 있다. 논란이 없지 않지만 중국의 영향을 받기 이전에 일본 고유의 문명적 발흥(야요이)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 문명적 고유성이든, 지리적 폐쇄성 때문이든지 간에 일본은 전근대 동아시아의 중국중심의 질서에서 (문화적으로든 정치적으로든) 어느 정도 자율성을 확보하고 있었다. 이 책은 그런 상대적 자율성 하에서 일본이 주변국과 어떤 관계를 만들고 어떤 방식으로 이해했는가에 대해, 그리고 서구와의 만남에서 이런 관계가 어떻게 변화했는지에 대해 평이하면서도 구체적이고 흥미롭게 서술해준다.

마리우스 젠슨의 일본 근대사 서술은 흡인력이 강한데, 빠른 시일 내에 그의 [Making of Modern Japan]나 [Sakamoto Ryoma and the Meiji Restoration]을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항간에 북한에 대한 '내재적 읽기'가 논쟁이 되기도 했는데, 일본이야말로 그런 '내재적 읽기'가 필요한 대상이라고 생각한다. 값싼 '일본은 있다/없다'류의 부족중심적 난리부르스에 이제 신물이 난다면 마리우스 젠슨이야말로 좋은 대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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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예찬 - 17세기 네덜란드 회화 다시 보기
츠베탕 토도로프 지음, 이은진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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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도로프는 수잔 손탁을 연상시킨다. 어떤 점에서 그렇냐하면 비평적 태도에서 있어서 소박함을 견지하려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토도로프는 문학을 삶의 진실과 윤리적 가치를 희구하는 인간적 노력의 견지에서 바라본다. 작품을 물질이나 역사의 부산물로 보거나 반대로 그 무엇으로부터도 독립(절연)된 작품 그 자체로 보는, 두 가지 극단적 경향 모두를 거부하고 작자, 독자, 사회가 서로 상호작용하면서 그들의 삶, 윤리 등의 문제를 함께 풀어나가는 과정에 주목한다. 수잔 손탁이 그녀의 <해석에 반대한다>에서, 작품과의 만남이 해석을 위한 해석 또는 이론을 위한 해석으로 전락되는 꼴을 피하고 작품과 감상자가 직접 만나 일으키는 스파크, 혹은 에로틱한 국면에 몰두하라는 충고와 유사하다. 소박하지만 강렬한 만남을 견지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츠베탕 토도로프와 수잔 손탁이 추구하는 바가 아닐까?

토로로프의 이런 비평적 태도는 이 우아한 17세기 네델란드 장르화에 대한 에세이에서도 견지된다. 그에 따르면 일상적인 것이 처음으로 회화의 필수적 요소로 자리잡은 것이 이 당시 네델란드의 장르화다. 이전의 회화들 속에서는 聖과 俗의 이분법 하에서 신적인 것은 고귀하고 탁월하며 이상적인 것, 인간적인 것은 열등하고 평범하고 무가치한 것으로 다뤄졌다. 신적 세계는 완벽한 세계라면 인간의 세계는 결핍된 세계였다. 이 때 회화는 결핍된 인간 세계에 인간 너머의 이상적인 것을 지시하는 알레고리로 기능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17세기 네델란드 장르화에서는 일상적인 것 안에서 성과 속의 이분법이 그려진다. 일상적인 것 안으로 성스러운 것이 포획된 것이다.

쟝르화 속에서 성과 속의 이분법은 가정 對 세상, 실내 對 실외, 미덕 對 악덕 등의 구도로 등장한다. 책에 가장 처음 등장하는 '야콥 오흐테르벨트'의 [거리의 악사들]이란 그림은 이 구도를 제대로 보여준다. 아마도 네델란드 쟝르화가 여기서 그쳤다면 토도로프의 관심을 끌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은 한 걸음 더 나간다. 그 대표로 토도로프가 소개하는 화가는 '헤라르트 테르보르흐'와 '피테르 드 호흐'다. 이들은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기존의 이분법으로부터 이탈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전자는 모호성과 복합성으로, 후자는 초월성으로 그렇게 한다. 나는 이 둘을 현미경적인 태도와 망원경적 태도로 이름붙이면 잘 어울리겠다는 생각을 하게됐다.

테르보르흐의 그림 속에서는 미덕과 악덕의 판에 박은 도덕적 구조 대신 감상자가 인물과 상황들 속으로 빠져들어 헤메도록 만든다. 실내와 실외의 명확한 구분은 마당을 배경으로 하여 모호해지고, 미덕 대신 인물들의 모호하고 복잡한 심리에 빠져들게 만든다. 미덕과 악덕의 이분법은 그 속에서 모호해진다. 이는 마치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서 얻는 일상에 대한 현미경적 접근을 연상시킨다. 반면 호흐의 그림은 망원경적이다. 호흐의 실내는 문을 통해 실외와 통하고 그곳에서 빛이 들어온다. 인물 중 하나는 반드시 빛의 원천을 향해, 혹은 무심하게 허공을 향해 시선을 던진다. 그들은 일상 속에 있으나 일상의 바깥을 응시한다. 그것은 천체 망원경의 기능과 유사하다. 지구에서 우주를 보고자 하는 인간의 망원경이다.

이 과정을 통해 화가는 미덕의 명령을 수행하는 메신져가 아니라 일상에서 미덕과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심지어 만들어내기까지 하는 존재로 변신한다. 회화는 단지 '아름다움을 반영하는 거울이 아니라 아름다움을 환히 드러내주는 빛의 원천'이 된다. 여기서 좀 더 나아가면 일상 자체를 있는 그대로 모사하는 사실주의나, (시대를 앞선) 베르메르처럼 작품 자체가 어떤 외부적 참조없이 자기 참조적인 완결이 되는 미학주의가 온다. 그러나 토도로프가 사랑하는 것은 사실주의나 미학주의의 두 극단이 아니다. 그에게 그 둘은 인간들이 실제 삶에서 마주하는 절실한 의문들을 과학이나 미학의 도그마로 밀어내버린 것은 아닌지 의심된다. 이 둘은 서로 대화하려는 의지가 부족하다. 대신 삶의 진실과 가치에 대한 소박한 질문을 통해 외부로 열려있는 테르보르흐나 호흐의 그림에 더 매혹되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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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4-09-17 1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나왔을 때 수첩에 적어넣어 놓고 까맣게 잊고 있었네요.
간달프님, 잘 읽고 갑니다. 고맙습니다.^^
 
풍경과 마음 - 동양의 그림과 이상향에 대한 명상
김우창 지음 / 생각의나무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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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가 중국 백과사전을 보고 당혹해 한 것은 그 '이해할 수 없는' 분류법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중국인이 보기엔 당연한 분류법일 것이고, 반대로 중국인은 프랑스 백과사전의 분류법에 당혹스러워할런지 모른다. 백과사전이니 분류법이니 하는 것은 보편을 참칭하는 지적 체계인데, 이것이 각각의 문화마다 다르다면 우리는 어디서 보편을 찾을 수 있을까? 그래서 푸코는 그 각각의 지적 체계들 밑으로 내려간다. 그것이 푸코의 용어로는 '에피스테메'요, 김우창의 정의로는 '생성적 원형 또는 매트릭스'다. 이는 우리의 언어-이야기, 문법의 바탕으로 각각의 (보편적?) 질서를 가능하게 하는 기저의 잠재성(푸코 왈 '질서의 생존재' L'etre brut de l'ordre)이다.

이 '생존재'는 '문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듯 하다. 그러나 여기서 '문화'란 흔히 말하는 포괄적 의미의 표면적 문화가 아니라 심층적 문화다. 이는 [미메시스적 차원의 문화]로 구분해도 될 것 같다. 있음과 뜻, 주관과 객관이 혼연, 일체, 미분화된 상태로서의 삶의 체험의 총체라고 정의하자. 김우창 선생은 동양화(혹은 풍수)는 서양화에 비해서 이런 미분성과 좀 더 직접적으로 연관을 맺고 있다고 본다. 이 未分的 일체 속에는 유토피아에 대한 상기와 삶의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체험, 초월과 안주의 실존적 욕망, 추상과 구상이 하나다. 그로 인해 동양화는 서양화보다 주어진 관습의 한계에서 멀리 벗어나지 못했다. 미분성으로 인해 자기 문화에 대한 반성적, 비판적 태도를 보유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반면 서양화는 원근법과 소실점의 기법을 통해 보는 주체와 보여지는 대상을 구분해낼 수 있었다. 여기서 얻는 것과 잃는 것이 있으니 전자는 주체를 중심으로 한, 일관된 방향성과 개인의 (미분화된 문화로부터의) 해방이고 후자는 개인이 실제로 살고있는('장소'의) 인간이 아니라 하나의 점으로써의 눈으로 환원(소멸)되어 버렸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것의 역은 동양화에 고스란히 적용된다.) 개인의 소멸은 역설적으로 개인의 해방을 가능하게 했다. 그리고 개인의 해방은 관점의 (미분화된) 주관적 특수성(미성숙?)을 관점의 객관적 보편성(성숙?)으로 이행하게 하는 것도 가능하게 했다.

이런 동서양간 차이는 결정적으로 서양에 '메조코스모스(중간 규모의 우주)'의 발전을 가져왔지만 동양은 여전히 자연 전체로서의 마크로코스모스와 사사롭고 個物的인 마이크로코스모스가 따로 분리되어 병존하는 상태에 머물러 있게 된다. 동서양의 풍경화에서 원경 중경 근경의 묘사방법의 차이에서도 이를 엿볼 수 있다. 서양화의 경우 하나의 방향성 속에서 원경, 중경, 근경이 총체적으로 통합되는 방식이지만 동양화의 경우 원경(혹은 총체적 유토피아 영역)와 근경(혹은 아주 사사로우며 사물적인 영역)이 뚜렷하게 표현되지만 그 중경은 안개나 구름 따위로 모호하게 얼버무려진다. 이는 묘사법의 우열의 증거가 아니라 동양화와 서양화가 서로 다른 성격의 그림(혹은 활동)임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동양화의 이런 특성은 보편적 이상과 현실적 삶을 매개할 해방된 주체의 부재로, 사회적으로는 절대권력과 일반민중 사이를 매개할 중간적 사회조직의 부재와 연관되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도 하게된다.

저자는 동양과 서양을 넘나들면서 각각의 성취와 한계를 동시에 들춰보이지만 그것이 통속적인 화혼양제니 동도서기론 따위와 같은 가짜 화해로 이르지도 않는다. 그의 길은 하나를 택하고 다른 하나를 버리거나, 하나 중 좋은 것과 다른 하나 중 좋은 것을 조합하는 길이 아니다. 각각의 길 속에서 갈린 공통의 지반에 주목하고 그 지반에서 각각 어떤 무늬를 형성해가는지 면밀히 살피며 그 무늬 속에 새겨진 인간의 삶과 사유, 가능성과 한계를 공평하게 읽어내는 길이다. 이는 다양성 속에서 모든 가능성에 자신을 열어보이는 자세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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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현대미학 강의 - 숭고와 시뮬라크르의 이중주 진중권 미학 에세이 2
진중권 지음 / 아트북스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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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imatio와 mimesis에 대해 말해야겠다. 전자는 근대 미학이 추구하는 바이고 후자는 모더니즘 예술과 탈근대 철학/미학이 추구하는 바다. imatio의 미학이란 '수학'을 모범으로 삼은 것일게다. 진리는 수학공식처럼 나의 바깥에 있으며 나는 그 진리를 혹은 대상을, 내 머릿속에 혹은 화폭이나 오선지에 감각적으로 복사한다.

mimesis의 미학이란 '예술'을 모범으로 삼는 것일게다. 여타 행위(특히 수학)와 유별되는 예술행위의 본래적 특징은 환원이나 반복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왜 그런가하면 예술행위란 단지 대상을 복사하는 일이 아니라 대상과 자신(작가나 감상자)이 서로 분리불가능해지는 사태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를 '존재론적 닮기'라고 짧게 설명한다. 카멜레온이 제 몸 색깔을 주변에 섞어버리는 것과 같다. 이는 대상과 거리를 둔채 미적 관조를 행하는 근대미학의 태도와 정반대다. 본래 예술이란 것은 작가든 감상자든 그대로 내버려두질 않는다. 변화시키고 생성시킨다. 예술에서의 진리는 모방하는 데서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생성하는 가운데 열리는 것이다. 미메시스의 미학이란 예술을 본래의 예술답게 만들라는 소릴까?

미메시스의 최고봉은 '숭고'일 것이다. 왜냐하면 예술행위('사건', '작품의 개시')을 고스란히 반복한다(혹은 '현전'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기껏 반복은 부정적인 방식으로나 얼핏 가능해진다. 십자가가 미니멀할수록 예수의 희생에 더 가까와지는 방식이다. 뭔가 안타깝고 절박한 느낌이다. Less is more! 책에서 소개한 조각가 뉴먼의 길이고 철학자 리오타르의 길이다.

그런데 이게 다가 아니다. 현대 예술에는 이런 숭고의 위계를 전복시켜버리는 경향도 있다. 이는 원본(예술행위)을 사본더미 속에 실종시켜 버리는 방법이다. 시뮬라시옹이다. 원본과 사본의 구별이 불가능한 차원까지 마구 복제하는 것이다. 이 상태에서 무엇이 아쉽고 무엇이 부족하리오? More is more! 보드리야르는 (실재의) '사라짐'을 말한다. 많아질수록 사라진다. 실재는 흔적만 남는다. 시뮬라르크와 숭고는 반대 방향으로 달려 같은 결승라인에 도달한다.

내 우스운 연상인지 모르겠지만 '숭고'하면 천국의 문이 떠오르고 '시뮬라르크'하면 지옥의 문이 떠오른다. 숭고를 통해 다다를 수 없는 엑스타시의 정점을 애처롭게 갈구함를, 시뮬라르크를 통해 영겁에 걸쳐 같은 것이 무한반복되어 폐허 혹은 사막처럼 쌓이기만 하는 무감각, 무의미으로의 내처침을 느낀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천국과 지옥은 똥고를 맞추고 있다. 재미있다. 20세기 초 독일의 세 선각자로부터 시작해서 20세기 후반 프랑스의 암묵적 후계자로 이어지는 이 강의는 저자의 센스있는 요약과 인용으로 읽기 쉽고 재미나는 강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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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아나키즘
숀 쉬한 지음, 조준상 옮김 / 필맥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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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차원에서 아나키즘은 무질서가 아니라 자생적/자율적 질서를 신뢰한다. 또한 권위가 아니라 권위주의를 거부한다. 또한 인간을 특정한 유형으로 고형화(물화)시키는 것을 거부한다. 아나키스트에게 자본주의가 거부되는 이유는 인간을 이기적 개인으로 미리 규정하고 자본의 억압적 시장 질서가 인간들 사이에서 생성,변화하는 자생적 질서를 밀어내며, 시장경쟁에 의한 승자와 패자를 자연스런 것으로 인정하고 승자의 일방적 권위, 즉 권위주의의 질서를 강요하기 때문이다.

개인적 차원에서, 아나키즘은 '방종'이 아니라 '자기 창조'의 능력을 신뢰한다. 일방적 권위(즉 권위주의)에 순응하는 것도 방종이다. 왜냐하면 자기 창조의 임무를 져버리고 자기 자신을 일방적 권위의 지배 아래에 내팽개쳐 버렸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런 방종과 자기 창조 사이를 확연히 구분짓는 질적 요소가 바로 '용기'라고 생각한다. 용기없는 자는 자신을 권태 속에 방치한다. 여기서 자포자기한 백수든 성실한 직장인이든 다를 것은 없다.

숀 쉬한은 아나키즘의 사회적이고 개인적 차원은 각각 맑스와 니체의 혜안과 깊은 연관이 있음을 밝히고 있다. 저자는 맑스의 '노동하는 인간'과 니체의 '유희하는 인간'은 주요 강조점이 서로 다르지만 아나키즘의 큰 틀 속에서 하나로 만날 수 있다고 본다. 맑스가 꿈꾸는 '소외없는 노동'과 니체가 꿈꾸는 '목적으로서의 유희'는 그다지 멀지 않으며 그 둘은 아니키스트적 인간에게서 종합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 아나키스트적 인간은 우리가 흔히 딱지붙이듯이 전체주의의 황당스런 반대 극단 따위가 아니다. 저자는 '아나키스트적 긴장'을 말한다. 그것은 저자가 르귄의 소설 <빼앗긴자들>에서 보았듯이 '고독과 연대성 사이에 필연적인 역동성에 대한 자각'이다. 자칫 이 긴장을 놓치면 우리는 자폐적 개인주의로, 아니면 반대로 권위주의적 전체주의로 빠져 버린다. 이런 면에서 보면 아나키즘은 돌연한 극단이 아니라 건전한 상식이다. 이런 통찰력은 전에 접했던 김상봉의 그리스 비극 읽기와 일맥상통했다.

리뷰의 끝은 이문열에 대한 곁가지 이야기로 잇고 싶다. 이문열을 흔히 한국을 대표하는 문호라고들 쉽게 말한다. 나도 수긍한다. 단지 한국이란 나라를 자생적 질서의 문화가 고사된 나라라고 규정하는 한에서 수긍한다. 그에게 인간(민중)이란 깡패든 예수든 초민중적이며 권위적인 전위에 의해 인도되어야 할 어리석은 존재일 뿐이며 그의 작품 속에서는 인간들 사이의 자생적, 자율적 질서에 대해서는 별다른 상상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엄석대의 깡패적 지도자가 신임 교사의 포고령 민주주의로 대치될 뿐, 어디에도 급우들 스스로의 자유와 자율의 자리는 배려되지 못하며, 이문열의 분신인 주인공은 어색하고 음습하게 수긍하며 경멸하고 푸념할 뿐이다. 패전 직후 요시다 시게루가 美 GHQ의 과감한 민주화 조치에 버럭 반기를 들며, '일본인은 자치를 감당할 능력이 없다'고 강변한 것과 그리 멀지 않아 보인다. 충군유학, 천황제, 군사독재를 한 아버지로 섬긴 사람들의 비참한 말로다. 그런 면에서 이문열은 분명 한국을 창피스럽게 대표하는 문호다. 이 한국의 문호가 빠져버린 극단에 대해 아니키즘적 상식으로 균형점을 잡아주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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