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 평전 - 한 꼬마가 세계적 현자가 되기까지 미다스 휴먼북스 10
만프레트 가이어 지음, 김광명 옮김 / 미다스북스 / 2004년 5월
평점 :
절판


저자는 칸트의 세계를 "암시의 세계"라고 칭하는데 아마도 이것이 칸트가 우리에게 진정 해주고 싶었던 말이라 여겨진다. '암시의 세계'는 중세적 신성의 세계에 대한 근대적 대체물 노릇을 한다. 그리고 인간의 위치는 중세 시대의 순수한 무지의 '어린 양'에서, 아이와 어른의 요소를 동시에 지닌 이중적 존재이면서 '암시의 세계'의 숭고를 머금고 있는 가능성의 존재로 이동한다.

뉴튼이나 스베텐보리 등이 현상 세계의 과학적 원리를 추구했지만 이는 인간에게 (강유원의 말을 빌어) '쓸쓸함'만을 남겨주었고 그 쓸쓸함에 지쳐버린 그들은 급작스레 신으로의 도약에 휩쓸렸다. 그들은 섯불리 신을 보았고 만졌고 말했다. 쓸쓸한 세계로부터 환영적이고 신비주의적 도약 혹은 도피...

"지성적 세계의 이름 아래에서 공허한 초월적 개념의 영역으로 무력하게 날개를 펴지 않으며, 거기서 나오지 못한 채 유령으로 사라져버리지도 않는다." (IV.100)

칸트는 뉴튼의 굳건한 어깨 위에 섰지만 그에게 세계는 뉴튼의 것처럼 쓸쓸하지는 않다. 아마도 그가 인간에게 부여한 능력 때문일 것이다. 그에게 인간은 오성 세계와 감각 세계가 공존하는 이성적(이중적/모순적) 인간으로, 이성의 한계 내에서 자기 창조적인(자율적인) 존재이며, 현상 세계의 입법자이기도 하다. 비록 인간이 이 세계나 자신을 완벽한 존재로 만든다고 장담할 수는 없을지라도 인간은 완전성을 희망하며 그 완전성은 대개 '형언할 수 없는' 어떤 것으로 인간에게는 숭고한 느낌으로 내재한다.

칸트의 일생은 '모순'으로 보인다. 그는 누이의 부양을 위해 시간을 쪼개 일을 했지만 그  누이와는 거의 25년간 말 한마디 나눈 적이 없었고, 일평생 아내도 아이도 없이 살았지만 그는 사교적 모임의 훌륭한 재간꾼이기도 했으며, 평생 쾨니히스베르크라는 서방 변방의 작은 도시에 틀어박혀 떠난 바 없지만 그는 언제나 '세계 시민'을 이야기했다. '모순'은 칸트가 본 인간 조건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모순 덕에 인간은 좀 더 숭고해지는 듯 하다. 광대한 우주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이 사소한 존재가 모순의 압력으로 인해 좀 더 숭고한 어떤 곳으로 발걸음을 내딛는다. 이 압력이 없을 때 우리는 그냥 주저앉아 동물이 되거나 무중력 상태에서 스스로 신을 참칭할 것이다.

이 평전은 칸트가 본 인간의 이중성, 그리고 네가지 형이상학적 근본 질문으로 구성된다. 1장과 2장에서는 칸트가 일평생 구축하고자 한 인간상이 그의 어린 시절의 경험('첫울음'과 '별이 반짝이는 하늘')과 함께 이야기되고, 3장은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영혼을 본자가 있는지 나는 알 수 없다"), 4장은 나는 무엇을 행해야 하는가("오직 비판의 길만이 열려있다"), 5장은 나는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가("네 자신의 오성을 스스로 사용하는 용기를 가져라"), 6장은 인간이란 무엇인가("내 안의 도덕법칙-선의지와 근본악 사이에서")과 연관이 있고, 마지막 7장은 다시 1장에서 다뤘던 생명력이나 열정의 문제와 연관된다.

나같은 문외한에게 직역투의 문장은 좀 고역이었다. 그러나 칸트의 저작에서 직접 인용된 문장이 많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던 듯 하다. 옆에 칸트의 철학 용어 사전이라든가 따위를 놓고 함께 보았으면 더 좋았을 것을...  저자가 말하듯 그가 떠난 200년 이상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가 틀렸던 아니든 상관없이) 그의 업적을 논하지 않고서는 단 한 걸음도 앞으로 나갈 수 없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간달프 2004-05-30 14: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대단히 일찍 분별있게 되었지만, 그들의 오성은 그 후에 같은 비율로 지속적으로 성장하지 못했다. [...] 그들은 정신의 권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술, 담배, 아편 그리고 다른 강한 것들에서 자극적인 것을 찾았다. [...] 인간성은 백인 종족에서 가장 큰 완성상태에 있다. 황색의 인도인들은 보다 떨어지는 재능을 가졌으며, 흑인들은 더 낮고, 가장 낮은 종족은 아메리칸 인종 중의 일부이다. [...] 그들은(백인들은) 언제나 완전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종족이다."
-- 칸트의 <물리적 지리학> 중에서. R.B.Loudon, Kant's Impure Ethics:From Rational Beings to Human Beings, (Oxford, 2000) p.99 재인용
 
선거는 민주적인가 - 현대 대의 민주주의의 원칙에 대한 비판적 고찰, 폴리테이아 총서 2
버나드 마넹 지음, 곽준혁 옮김 / 후마니타스 / 2004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번 탄핵사태는 한국인들은 자신들의 민주주의 제도에 대해 당황하게 만들었다. 왜 이런 사태가 가능했을까? 일부 국회의원들이 사악하고 반민주적이어서 그랬을까? 아니면 한국의 민주주의 제도 자체에 어떤 문제가 생긴 것일까?

이 책은 (한국의 정치제도의 일부인) 선거제의 민주성에 대해 묻는다. 본래 17 - 18세기에 세습군주제를 끝장내고 민주제를 도입할 당시까지 선거제는 귀족적 제도의 일부로 여겨졌으나 선거의 (인민에 대한) 대의적 측면에 주목함으로써 민주적 제도로 받아들여졌음을 보여준다. '대의'의 의미에 대해서도 의견이 갈렸다. 미국의 제헌의회에서 연방주의자와 반연방주의자 사이의 갈등이 이를 보여준다. 전자는 선거를 '탁월한' 사람을 뽑는 일로 여겼지만 후자는 인민과 '유사한' 사람을 뽑는 일로 여겼다. 연방주의자가 1787년 승리했고 선거는 '탁월성의 원칙'에 부합하는 제도("의회 정치")로 정착했다. 선거제는 주기적으로 모든 선거권자에게 통치자를 선출하고 투표로 심판할 수 있다는 점에서 민주적이지만, 보통사람과 다른(탁월한) 사람들을 통치자로 뽑는다는 점에서 귀족적인, 이중적인(모호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 이중성은 선거제가 스스로 민주적이기 힘들다는 점을 상기시키면서도 다른 측면에서 나름의 정치적 통합기능을 갖고 있다. 이 이중성 덕에 보통사람들은 선거제가 민주적이라고 여기고 귀족주의적 특질을 원하는 사람들은 선거제를 귀족적이라고 여김으로서 제도의 지속적 존립을 가능하게 하는 통합의 기능을 갖는다.

처음 정립된 민주체제인 의회정치는 이중성을 가지고 있었고 이 이중성은 변화하는 사회 속에서 내용을 달리 하면서도 지속되었다. 우리는 섣불리 어떤 제도는 '민주적이다'라고 판정하지만 그 제도를 둘러싼 사회적 환경을 무시한 채 내린 판정은 공허하다. 따라서 제도 자체만을 가지고 민주주의 여부를 논하는 형식적 접근은 민주주의 발전에 오히려 장애가 된다. 저자는 그보다는 변화를 제도 내부로 흡수할 수 있는 체제를 더 중시한다. 어차리 형식적 민주주의는 실제로는 불가피하게 이중적이다. 그렇다면 시선을 돌려서 민주주의임을 참칭하는 제도가 그것이 놓여있는 사회와 얽히면서 변화하는 역동성에 주목해야 한다. 역동성이 확보되지 않으면 민주주의는 곧바로 유명무실화하고 이중성의 한 측면인 귀족주의적 성격으로 고착화된다. 우리가 지난 탄핵사태에서 경험한 것은 형식적 민주주의가 귀족주의적 성격으로 고착되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것이었고, 의회 바깥의 다양한 사회적 역동성은 형식적 민주주의가 상실해왔던 민주적 성격을 회복시켜 주었다는 것이다. (의원의) 대의와 (인민의) 표현 사이의 역동적 긴장 속에서 우리는 실질적 민주주의를 지켜낸 것이다.  

인내를 요하는 책읽기였지만 책을 덥고 나니, 난장판이 된 지난 의회에서 "민주주의 만세"를 외치던 국회의원의 모습이 초래한 혼란함을 이 책이 상당 부분 덜어내 준 듯 하다. 만족스러운 독서였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후마니타스 2007-06-14 1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도서출판 후마니타스 입니다.
도서에 관한 리뷰를 출판사 홈페이지로 담아갑니다.
미리 허락을 얻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혹시 언짢으시다면 홈페이지에 글을 남겨주세요.
홈페이지 주소는
http://www.humanitasbook.co.kr
입니다.
건강하세요 ^^
 
근대 일본 크로노스 총서 6
이안 부루마 지음, 최은봉 옮김 / 을유문화사 / 2004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일본 근대사의 드라마는 불현듯 일본 아니메 <신세기에반게리온>의 이야기를 떠올린다. 전공투세대인 안노 히데야키가 일본 근대사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영화에 투사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대체로 그 구도는 이렇다.

1) 가공할 외적의 침입
2) 외적 닮기를 통해 외적에 대항하기
3) 외적 닮기 혹은 외적 능가하기의 기획이 초래하는 예상 밖의 결과(파국)

특히 이 영화에서 'LCL상태'에 관한 부분은 모든 개체를 단일한 생명체로 융합시키려 했던 황도주의의 객관적 상관물처럼 보인다. 철학계에서 현상학과 선불교를 끌어들여 주객일치를 추구했던 '니시다 키타로'나 천황이 패전을 선언하자 초개같이 자기 목숨을 버린 일본의 민초들(대만인, 오키나와인, 조선인들도 있었다)은, 아니메 속에서 'LCL상태'로의 융합상태로 넌지시 언급되는 듯 하다. 그런 면에서 보면 이 영화의 종결은 '오타쿠'는 커녕 희망과 연대성의 개인/시민에 대한 아주 건전한 상식을 이야기하고 있다.  

일본의 근대사는 위의 패턴을 지금도 지루하게 반복하고 있는 듯 하다. 왜 그럴까? 왜 일본에서는 정치적 자유주의가 힘차게 뿌리내리지 못했을까? 이안 부루마의 이 책은 이 질문에 대한 짧은 대답이다. 그가 제시하는 이유는 (1)일본 내부로부터 볼 때, 자생적으로 자기 자신을 근본적으로 개조하지 못한 채 '외부의 충격에 기대어' 미봉적으로 일본 개조와 통합을 추구했다는 데 있다. 천황제는 위엄은 있으나 책임이 모호했고 민중들은 현실감을 상실한 채 극좌와 극우를 무모하게 오갔다. 흑선을 타고 온 페리의 침입으로 일본이 개조되었듯이 전후에는 바탄기를 타고온 맥아더에 의해 일본이 개조되었다. (2)점령자 미국의 대일 정책도 문제였다. 전후 이상적인 뉴딜주의자들은 국가주도의 계획경제를 선호하여 전쟁책임과 무관하지 않은 일본 관료들에게 나라의 기틀을 세우는 권력을 쥐어줬고 반공적 보수주의자들은 이른바 '역코스'를 통해 일본을 미국의 태평양 항공모함으로 재무장시키고 사회의 보수화를 초래했다. 미국의 전후 정책을 지지했던 좌파는 미국에 실망했고 중국사회주의에 대한 환상에 빠졌다. 이 모든 것이 일본에 자생적이고 튼튼한 시민사회가 성장할 입지를 축소시켰고 정당정치는 파벌정치로 전락했다. 이 허약한 토대 위에서 이사하라 신타로같은 돌연변이가 또 재생한다. 이것은 다시 30년대 일본의 코스의 재래다. 일본인들도 다시 흑선에 재래해야 일본이 바뀔 것이라며 답답해 한다. 저자는 No!. 일본인들이 다시 흑선에 기댄다면 비참한 역사를 반복할 뿐이다. 이제는 일본인들 스스로 나설 때다.

번역상태에 대해 말하자. 한마디로 개판이다. "본질적인 원리를 위한 중국의 학문, 실제적 적용을 위한 서양의 학문이라는 유명한 격언"(p.25)이란 장황한 구절은 "중체서용"이라고 하면 된다. "그 부를 축적한 약아빠진 상인계급"(p.27)이란 '죠닌계급'을 말할 것이다. 기본조사도 안된 번역임을 증명한다. "토착론자"(p.28)는 '국학자'로 해야 적절하다. (란카쿠에 상응하게 쿠니카쿠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징집된 국군은 생각을 만든다는"(p.58)은 '국민징병이란 생각은'으로 고쳐야 한다. 오역이고 오문이다. "니시다 기카로"(p.79)는 '니시다 기타로'로 "칼리갈리박사의 캐비닛"(p.70)은 '칼리갈리박사의 밀실'로 고쳐야 한다. "인성에 반하는 범죄"(p.146)는 '인류(혹은 인륜)에 반하는 범죄'로, "숨길 수 없는 착오(an honest mistake)"(p.161)는 '완전한 실수'로 고쳐야 한다. "극현실주의"(p.71)란 용어는 없다. '극사실주의'는 있지만... 이외에도 오문과 비문, 오역, 부적절한 고유명사의 퍼레이드다. 존 다우어는 이 책을 '문체가 좋다'고 평하지만 역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


댓글(0) 먼댓글(1)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근대일본'을 읽었다.
    from 새로운 출발 2009-04-12 18:29 
    지난주부터 이안 부루마가 지은 '근대일본'(을유문화사)을 읽었다. 일본역사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책이 낮이 익지는 않았지만 자유주의자인 저자의 통찰력이 느껴지는 책이다. 책은 1853년 페리제독의 개항에부부터 1964년 도쿄올림픽까지의 기간을 다루고 있다. 아시아에서 누구보다도 빠르게 근대문명을 수용했던 일본의 성장과 좌절의 역사인 셈이다. 일본은 서양의 힘을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그들의 힘을 최대한 배워서 강국이 되고자 했고, 그 구..
 
 
 
책과 세계 살림지식총서 85
강유원 지음 / 살림 / 2004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강유원이 바라는 바는 책(텍스트)을 본래 자리로 되돌려 놓는 것인데, '본래 자리'란 "당대 인류의 생활세계"(p.5)로서의 콘텍스트이다. 그러나 난처하게도 우리는 그 콘텍스트마저 텍스트의 일부임을 유념해야 한다. 따라서 강유원은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허나 불가능하다고 손 놓고 있을 수 없음이 인간에게 주어진 또 다른 진실인 듯 하다. 인간은 텍스트로 자유롭도록 저주받았기 때문이다.

이 자그마한 책은 그런 저주받은 운명에 묵묵히 순종하는 짧은 제스쳐같다. 그는 텍스트라는 허구들을 재료로 삼아서 인류 역사를 아우르는 자기의 콘텍스트를 미련스럽게 건립하려 한다. 이 건물에 굳이 이름을 달자면 "쓸쓸함"이 될 듯 하다. 그에게 인류사는 "쓸쓸한" "행복"과 의미있는 "불행" 사이의 왕복 운동이고 지금 이 시대 우리는 다시 '쓸쓸함'에 직면하게 되었다고 본다. 길가메시 서사시 시절에는 그 쓸쓸함을 아는데 단순명쾌한 직관으로 충분했다면 지금은 그 쓸쓸함이 과학적 인식으로도 보좌받는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인류사의 이러한 계통적 반복은 결국 인간의 개체적 반복의 반영이 아닐까? 인간은 밥벌이의 삶과 밥너머의 삶이 서로 뒤엉켜 있다. 밥벌이의 삶은 철저하게 무의미하여 쓸쓸하다. 그러나 밥너머를 떠올리지 않으면 졸라 행복한 것이 또 그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 존재인 모양이다. [일리아스]의 아킬레우스는 죽음을 능가하는 '명예'로, [오딧세이아]의 오딧세우스와 [외디푸스 렉스]의 외디푸스는 는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과 모험으로, 플라톤은 '유토피아'와 '국가'로,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의 도시'(De Civitate Dei)로 쓸쓸함과 무의미함에 대적했다.

이런 모든 대적 행위는 대체로 이원론적이다. 죽을 운명의 존재와 역사 속에 길이남을 명예, 더러운 몸과 순결한 영혼(혹은 주체), 열등한 현실과 우월한 이상, 유한한 인간과 무한한 신 따위의 이원론들이다. 강유원도 이와 유사한 이분법을 세계와 책이란 대립을 통해 반복하고 있으며 그것의 부질없음도 반복해서 독자에게 주입시켜 저마다의 불일치, 분열, 불행을 일깨우고 있다. 그리고 나선 독자들을 그냥 방치한다. 맘대로 하라고...


댓글(3)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간달프 2004-05-04 2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뜩 강유원은 철학계의 김훈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들에게는 몸과 힘에 대한 책, 글, 텍스트의 절절한 질투가 느껴진다.

로쟈 2005-03-17 2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의 서평을 보면 강유원이 가장 혐오하는 인물 가운데 하나가 김훈이던데요...

노량진김씨 2008-07-08 0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강유원은 김훈 스토커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수십차례에 걸쳐 그렇게 비난해대는 것을 보면......
 
박홍규의 에드워드 사이드 읽기
박홍규 지음 / 우물이있는집 / 2003년 12월
평점 :
품절


이 책 표지를 봤을 때 박홍규님이 문화적 아이콘이 되어가는 것일까하고 생각했다. 덥수룩한 수염과 다부진 매무새가 멋지다. 책은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과 <문화와 제국주의>의 요약적 가이드이자 한국적 아카데미 풍토와 날림 번역 고발서이고 사이드의 학문적 방법론(특히 지암바티스타 비코와 관련하여)에 대한 해설서다.

제국주의 논의에서 기존의 연구는 정치나 경제의 측면에서 다뤄졌는데 사이드가 새롭게 부각시킨 바는 제국주의의 문화적 과정이다. 이는 제국주의적 제도, 경제, 정치에 활력을 불어넣는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인 요소들로, 문화는 단순히 제국주의의 반영 혹은 그것에 인과적으로 종속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과 (의식적이든 아니든)공범적 관계에 있게 된다.

이런 접근방식은 서양이 보수적 학풍이 견지해 왔던 서구문명의 정전 수립과 기념비화라는 구축적 경향에 대해 도전적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정전화와 기념비화는 종교(혹은 본질주의적 형이상학)에 가깝다. 서구인들이 자의적으로 비서구인의 종교적 속박을 안타깝게 여기지만 서구문명에 대한 기념비적 숭고화은 결국 또 다른 아편에 불과하다. 서구인들은 자신들의 민주주의를 제국주의보다는 고전그리스나 고대 로마 공화정에서 기원한 것 혹은 카톨릭 신정체체로부터의 인간주의적이고 이성주의적 해방(혹은 합리화)에 기원한 것으로 보고 싶어한다. 그러나 실상 서구 민주주의는 그런 뜨악한 기원보다는 식민지 쟁탈전이란 폭력적 과정과 더 뜨껍게 통하고 있다고 보는 편이 더 사실에 부합한다.

흔히들 휴머니즘과 개성의 시대라고 칭송하는 르네상스 시대는 기호품 쟁탈전의 시대(리사 자딘의 <상품의 역사>)였고 그 탐욕은 제국주의 시대까지 쉼없이 지속되어 식민지 쟁탈전으로 귀결되었다. 식민지 지배에서 얻은 물질적 이득은 대중의 제국주의 정책과 문화의 지지기반이 되었고 식민지배국 사이의 주도권 싸움은 결국 (국민적) 대중동원의 필요성을 불러왔다. 이러한 필요 때문에 대중 소비와 보통 선거라는 유인책이 제공되었고 여기서 서구 근대 민주주의가 시작된다. 식민지 착취를 둘러싸고 절대권력과 국민대중이 결탁한 결과가 바로 알량한 근대 서구 민주주의의 실상인데 이 때 서구 문학은 서구 민주주의의 천박함을 은폐, 가장시키는 훌륭한 수단이었다. 따라서 그들이 정한 '세계문학'의 목록은 많은 부분이 절취되어야 하고 특히 19세기 문학작품들은 대거 삭제되야 한다. 일방적 특수성과 이기적 이해에 절어있는 문학작품에 감히 '세계'라는 보편적 수사를 부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각성이 서양을 버리고 동양으로 회귀(회복)하는 것으로 귀결되어도 안된다. 동양이란 서양이 만든 남루한 판타지에 불과한데 그걸 쫓는다는 것은 서양의 잔재에 또 다시 포박당하는 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박홍규가 들려주는 에드워드 사이드의 몇가지 방법들을 소개한다. 우선 가장 기초적으로 스스로 행동하고 읽고 묻고 만나고 속박에서 벗어나야 한다. 둘째, 타인을 억압하거나 조작하지 않고 자유 옹호의 관점에서 다른 종류의 민족과 문화를 볼 줄 알아야 한다. 셋째, 문화를 고양되고 숭고화된 영역으로 다루지 않고 세속적인 연관(secular afiliation) 속에서 보아야 한다. 수직적 체계(기원, 영향, 결과/목적)로 구축되는 문화적/문명적 정체성이 아니라 수평적 연관(특히 작가와 작품의 경우)으로 펼쳐서 보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한 목소리로 대변되던 작품(혹은 문화)을 억압된 목소리와 함께 대위법적으로(contrapuntally) 다시 읽어서, 궁극적으로 제3의 통합된 대안적 목소리가 창출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 하나의 대안적 목소리가 가능할 때 더 이상 동양과 서양의 구분따위는 필요치 않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