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문제는 ‘관계’로서의 동아시아

[학술- 다시, 동아시아!]

서구에 대비되는 실체로, 민족국가 단위로 규정하다 보면 역사 왜곡이나 통일에 대비할 수 없다

▣ 성근제/ 연세대학교 강사 · 중문학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동아시아’는 누가 뭐래도 꽤 잘나가는 물건 가운데 하나임에 틀림없다. 무엇보다 21세기 ‘뜨는 중국’이 화려한 배경을 받쳐주는 데 힘입어 이른바 ‘동아시아 담론’은 그 논자와 갈래들을 일일이 거론하고 분류하기 어려울 만큼 다양하고 폭넓게 전개됐다. 목하 동아시아는 넘쳐흐르고 있다.


△ 일제의 만주국에 점령당했던 중국 철강도시 안산. 동아시아를 국가단위로 규정할 때 대만이나 만주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사진/ GAMMA)

오도된 오리엔탈리즘의 운명

그러나 동아시아는 여전히 목마르다. 그리고 이 목마름은 다양다기한 분화와 확산에도 불구하고 이른바 ‘동아시아론들’이 공유하고 있는 몇 가지 공통된 특징과 편향성에서 기인한다.

최근의 동아시아론은 1989년 전후의 극적인 국내외적 변동으로 인한 이데올로기적 지형 변화의 틈새를 파고들며 새로운 ‘대안적’ 담론으로 부상했다. 물론 이러한 대안적 동아시아론이 1990년대에 처음 등장한 것은 아니다. 조금 넓은 의미에서 보자면 동아시아론은 20세기 역사의 중요한 고비고비마다 다양한 형태로 등장하고 또 사라져갔다. 20세기 초반 중국의 동서문화 논전이 그러했고, 1920, 40년대 일본 대동아공영의 논리가 그러했다. 그것은 서구적 모델 혹은 그 세력이 ‘문제’의 원인으로― 혹은 그것의 ‘위기와 한계’가, 혹은 그것의 ‘위협과 적대성’이― 지목될 때마다 어김없이 등장하곤 했다. 90년대 이후의 동아시아론 역시 다를 바 없다. 그것은 89년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이 가져다준 충격으로 인해, 문제의 근원에 대한 관심과 탐색이 정치경제적 체제와 제도로부터 서구적 근대성의 근본적 한계라는 문제로 이동·심화되는 과정에서, 그리고 그와 동시에 신자유주의와 세계화라는 이름을 앞세운 새로운 차원의 공세가 본격화되는 조건 속에서 새로운 등장을 위한 조건을 발견했다. 말하자면 동아시아론은 언제나 ‘서구’라는 대립항의 존재와 그것의 위기를 전제로 하여 구성되는 대안담론이자 안티테제였던 셈이다.


△ 중국 동북부 지안에 있는 광개토대왕비.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은 단순히 한국과 중국의 문제가 아니라 중국과 미국, 동북아 전체의 '관계' 문제이기도 하다. (사진/ 오효정 제공)

조악을 감수하고 대별하여 이야기해보자면, 이러한 대안적 동아시아론에는 크게 두 가지 부류가 존재한다. 하나는 동아시아 문명(문화)론이며, 다른 하나는 동아시아 연대론이다. 전자는 자본주의적 근대의 근저에 깔려 있는 서구 문명의 특징들을 위기의 근원으로 지적하며, 동아시아 문명의 부활과 패러다임의 전환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후자는 아시아 사회의 근본 문제를 ‘서세동점’으로 요약할 수 있는 힘의 불균형과 불평등으로 지목하며, (동)아시아의 단결과 연대를 통해 힘의 불균형에 대응할 것을 주문한다. 이처럼 양자 사이에는 문제 설정에서 실천에 이르기까지 적잖은 차이가 존재한다. 그러나 이 두 경우 모두 ‘서구’라는 타자의 존재를 자기 입론을 위한 기본 전제로 요구한다는 점에서 완전히 일치하는데, 중요한 문제 가운데 하나는 이 지점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 문제란 바로 거의 모든 동아시아론이 ‘동아시아’라는 개념을 존재론적 실체로 상상하는 경향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언제나 서구라는 타자와의 대비 속에서 구성되기 때문에, 이른바 ‘서구’가 아시아인들의 눈과 언어에 의해 발견되고 규정되는 수준과 정도에 비례하여 똑같이 실체화되고 규정되며, 따라서 탈역사화될 위험성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동아시아를 탈역사화된 존재론적 실체로 상상하는 동아시아론은 동과 서를 이원대립적인 선악 구도 속에서 기술하며, 중요한 사유의 길목마다 양자택일적 선택을 강요하고자 하는 유혹에 항상 노출되어 있다. 그것은 서구에 대한 심각한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오도된 오리엔탈리즘의 운명과 닮아 있다.

역사 왜곡은 중-미 관계에서 시작

대안적 동아시아론에 부가될 수 있는 또 하나의 혐의는 그것이 여전히 민족국가 단위의 사고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경향을 보인다는 점이다. 익숙한 이야기이지만, 동아시아를 이야기할라치면 늘 뒤를 밟아 등장하는 것이 ‘한·중·일’이라는 국가의 명칭이며, 베트남과 동남아시아 그리고 몽골은 왜 빠져 있느냐는 질문이다. 말하자면 동아시아의 범위를 ‘국가’ 단위로 규정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문화주의와 지역주의와 국가주의가 묘하게 결합되어 있는 이러한 관점이야말로 동아시아를 ‘규정’지어 사고하려는 부질없는 노력의 부산물이자, 살아 움직이는 오늘의 동아시아를 올바르게 사유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주요한 걸림돌 가운데 하나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국가 단위의 사고가 지속되는 한 조선족(자치주)와 만주의 문제 그리고 극동러시아와 내외 몽골의 문제, 북한과 대만의 문제 등 동아시아의 핵심적 사안들에 생산적인 논의의 초점이 맞추어질 가능성은 대단히 낮기 때문이다.

8월로 접어들면서 중국의 역사 왜곡 문제가 그야말로 점입가경이다. 혹자는 이를 두고 중국이 역사 문제를 본격적으로 들고 나오는 것이야말로 한반도의 통일 과정이 비로소 제 궤도에 올랐음을 보여주는 증거라면서 짐짓 기대 섞인 반응을 보인다. 이것이 옳은 이야기일지 아닐지 필자로서는 판단하기 어렵지만, 어쨌든 당혹스럽기 그지없다. 오히려 필자는 중국이 얼토당토않은 고구려 역사 문제를 저렇게 본격적으로 들고 나오는 것이야말로 한반도의 향후 통일 과정이 얼마나 고되고 파란만장할지를 암시하는 징조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더욱이 안타까운 것은 고구려 역사 왜곡 문제에 대한 우리의 대응 방식이다. 정부도 학계도 언론도, 심지어 앞서가는(?) 네티즌들까지도 이 문제를 전적으로 한국과 중국 사이의 문제로‘만’ 파악하고 있으며, 사태의 본질을 중국의 변방국에 대한 패권주의적 의식의 발로로만 해석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문제의 형식적 당사자가 한국과 중국인 것은 사실이며, 중국의 패권주의가 드러난 것이라는 지적도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적어도 중국의 수가 한반도 통일 이후를 염두에 둔 것이라는 지적이 옳다는 것을 전제로 이야기할 때) 중국이 두고 있는 수는 우리를 향한 것일 뿐만 아니라 미국을 향한 것이며, 때문에 그것은 주변의 작은 나라들에 대한 ‘패권주의’임과 동시에 통일 이후 미국의 동북아 영향력 확대에 대비하기 위한 선수(先手)이기도 하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도 중국 태도에 대한 옹호가 아니다. 오히려 더욱 우려할 만한 사태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다. 문제의 본질은 한국과 중국의 역사 문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중국과 미국이라는 양대 강국이 다시금 한반도를 사이에 두고 건곤일척의 싸움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 연구자들은 왜 북한을 모르나

필자는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우리의 동아시아론이 새롭게 구성되고 더 발전적으로 확산되기를 기대한다. 지금 우리에게 시급한 것은 동아시아라는 존재에 대한 상상이 아니라, 다양한 역관계의 얽힘으로 구성된 동아시아라는 ‘관계장’(關係場)에 대한 현실적이고 역사적인 이해와 관심이다. 20세기의 우리 역사는 식민과 분단으로 요약할 수 있으며, 그 두 사건의 주요한 효과 가운데 하나는 바로 남한의 동아시아로부터의 탈각이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러나 분단과 아시아로부터의 탈각이 그러했던 것처럼, 통일과 아시아로의 복귀 역시 전적으로 우리의 의사와 일정에 따라 이루어질 가능성은 매우 낮다. 통일은 도둑같이 올 것이다. 왜냐하면 바로 우리가 ‘동아시아’라는 ‘관계’의 역학적 중심에 자리잡고 있고, 그 관계들을 구성하는 다양한 힘과 역사들을 우리 뜻대로 조절할 수 있는 힘을 현실적으로 지니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느 시점에 그 사건들이 일어날지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어떤 의미에서도 우리의 통일 이후에 대한 대비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필자가 현대 중국문학을 공부해오면서 가장 아쉽고 당혹스러웠던 것을 하나 꼽으라면 역시 중국문학 연구자들의 북한에 대한 이해와 관심이 지극히 박약한 수준에 머물러 있음을 제일 먼저 꼽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오로지 중국문학 연구자들의 게으름이나 시야의 협소함 때문이라면 오히려 문제는 단순하다. 그러나 이에 못지않게 당혹스러운 사실 가운데 하나는 우리 사회의 북한 문학 연구자들 속에서도 중국에 대한 관심과 이해를 축적하고 있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한국 문학을 전공하는 국문학도들 역시 상황은 별로 다르지 않다. 중국을 이해할 때에도 북한을 이해할 때에도 그리고 우리를 이해하고자 할 때에도, 중국과 북한 그리고 우리의 역사와 경험에 대한 상호 이해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동아시아론은 넘쳐나지만, 동아시아에 관한 관심은 여전히 지극히 낮다. 이처럼 현실과 유리된 동아시아론을 살아 있는 동아시아에 대한 역사적 관심으로 확장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관계로서의 동아시아’라는 화두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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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 북한과 대만을 이야기하라

[학술- 다시, 동아시아!]

동아시아는 ‘본질’이 아닌 역사로 접근해야… 왜 지금 논객들은 북한에 무관심한가

▣ 김재용/ 원광대 교수 · 국문학

한국 근대사에서 동양 담론이 풍미한 것은 구한말시대도 아니고 현재도 아닌 일제 말이다. 1940년 6월 독일의 파리 함락이 조선 지식인 사회에 전해지자 적지 않은 지적 동요가 일어났다. 많은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파리의 몰락은 곧 서구 근대의 종말을 의미했다. 중-일 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굳어지는 결정적 계기인 1938년 10월의 무한 삼진의 함락을 보면서도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신중했던 지식인마저 파리 함락을 전해들으면서는 심한 지적 충격을 받았고, 그 와중에서 붙든 것이 바로 동양 담론이었다.


△ 6월23일 열린 3차 6자회담 참가자들. 북한을 비롯한 남북 문제를 중심에 두고 동아시아를 조망해야 한다. (사진/ 연합)

파리 함락과 동양론의 확산

유럽의 지식인과 달리 조선의 지식인들은 유럽 근대 문명의 종말을 서구의 몰락이라고 이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를 동양의 발견과 재인식으로 키워나갔다. 유럽의 지식인들에게 좀처럼 발견할 수 없는 이러한 인식이 물론 조선에서 시작된 것은 아니다. 당시 일본의 경도대학 철학과를 중심으로 한 일련의 지식인들이 파리 함락을 유럽중심주의에서 벗어나 동양을 발견하는 계기로 삼았던 것과 떼놓고 생각할 수 없다. 여하튼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동양 담론은 최대의 화두가 되었다. 그리하여 이때부터 1945년 일본이 패망하고 새로운 세계질서가 구축될 때까지 조선의 지식인들은 동양 담론을 중심으로 모든 논의를 펼쳐나갔다.

문제는 어떤 동양론인가 하는 것이다. 아편전쟁과 명치유신 이후 정신없이 서구 근대를 추종하면서 달려온 동아시아 사람들에게 동양 담론은 가지각색이었다.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의 지식인에게 동양 담론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진행되었다. 하나는 서구 근대는 종말을 고하였고 이를 대신할 수 있는 문명은 동양이기 때문에 그동안 간과했던 동양의 특질을 고구(考究)하여 이를 오늘에 되살리는 것만이 지식인과 문학자의 임무라고 믿는 축이다. 이들에게는 민주주의보다는 도의(道義)가 훨씬 매력적인 어휘로 등장한다. 동양에 대한 본질주의적 접근이라고 이름할 수 있는 이 태도는 당시 동아시아의 현실, 즉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을 식민지화하고 서구에 맞서 동양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중국을 침략하는 것이 갖는 구체적 역사의 의미에는 무관심하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서구 문명의 구원자로서의 동양이고, 이것이 주축이 되는 새로운 세계질서이다. 세계사적 질서의 창출이라는 거대한 이야기에 비하면 식민지로 점철된 동아시아 각국의 구체적 현실은 일시적이고 현상적이라고 보는 것이다.

경성제대에서 일찍이 영문학을 전공하고 이후 영국을 비롯한 유럽 문학계 소식을 동시적으로 소개하는 일을 하면서 자신의 비평적 전망을 탐구했던 최재서가 이의 대표적인 지식인이다. 1차대전 이후 유럽 문명의 위기가 한층 심화되는 것을 목격하면서 이를 날카롭게 들추어냈던 영국과 유럽의 작가들에게 각별한 관심을 가졌던 최재서에게 파리 함락은 사고 전환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유럽 문명의 위기를 구하기 위해 벌였던 온갖 지성적 노력들이 수포로 돌아간 마당에 더 이상 유럽에 기댈 것은 없다는 것이다. 이제 서양에서 벗어나 동양을 찾아나서게 된다. 엘리엇이 근대 유럽에 실망한 나머지 전근대 유럽의 가톨릭에 귀의하는 것까지도 안쓰럽게 볼 정도로 최재서는 서구의 대안으로 동양에 확신을 가졌고, 자신이 그 한복판에 서 있다는 것에 큰 자긍심을 느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대동아공영권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이를 지지했으며, 서양에 맞선 동양의 이 전쟁을 세계사의 신질서를 창조하는 성스러운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당시 조선에 이처럼 식민주의에의 협력으로 치달았던 본질주의적 동양 담론만이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다른 한편에서는 역사주의적 접근이라고 할 수 있는 것도 존재했다. 아편전쟁 이후 서구 근대의 파고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었기 때문에 조선과 동아시아를 제대로 관찰하지 못한 것을 반성하면서 유럽중심주의에 대해 비판적 성찰을 한다. 하지만 이들은 전근대 동아시아 지역의 지적·문화적 자산을 본질화하는 것에 반대하는 한편, 서구 근대가 갖고 있는 진보성에 대해서도 정당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섣부른 근대의 초극보다는 근대의 차분한 청산이 더욱 중요하다고 본 것이다.


△ 3월21일 선거에서 승리한 뒤 지지자들에게 답례하고 있는 대만의 천수이볜 총통. 중국은 대만 문제를 북한 문제와 연관지어 이해한다. (사진/ GAMMA)

본질주의? 역사주의!

이들은 일본이 동양 담론을 명분으로 내세우면서 식민주의적 책략을 감행하는 것에 대해서 강한 비판의식을 가졌다. 본질주의적 동양론이 간과했던 점을 역사주의적 동양론은 간파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대동아공영권을 서구 근대의 변형된 아류로 간주하고 이에 동참하지 않았던 것이다. 일본 센다이의 동북제대에서 영문학을 공부한 뒤 주로 1차대전 이후 영국과 유럽에서 전개된 근대 문명의 억압을 넘어서려는 문학가들의 노력을 소개하면서 시작활동과 비평활동을 하였던 김기림이 이의 대표적인 지식인이다.

1990년대 이후 전개된 동아시아론에서도 이러한 두 가지 접근방식을 상정할 수 있다. 유교자본주의론이 본질주의적 접근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라고 생각하지만 그 이외의 동아시아론에도 이런 점을 부분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역사주의적 접근인데 그것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된 가장 결정적인 근거는 동아시아를 이야기하는 논객들에게 공통적으로 발견하는 북한에 대한 무관심과 배제이다.

현재 동아시아 특히 동북아에서 가장 심각한 현안 중의 하나가 남북 문제이다. 유럽이 공동의 헌법을 마련하는 것과 달리 동북아에서는 아직 국가간의 초보적 관계인 외교관계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형편이다. 북-일간의 수교 교섭이 1992년 이후 시작됐지만 10여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 앞날을 예견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일본의 우익은 북한을 타자화하면서 자신의 영역을 넓히고 있어 민주적 아시아 건설의 큰 장해물로 성장하고 있다. 미국의 동북아 정책이 핵심 변수이기는 하지만 아직도 동북아가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동북아는 항상 위험한 상황 속에 방치되고 있다. 북핵 등 주변 상황의 변화에 따라 언제든지 한반도는 무서운 전쟁의 중심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결코 평화롭지 못한 조건에 놓여 있다. 상황이 이렇게 진행되고 있음에도 동아시아론에서 북한을 비롯한 남북한 문제는 정당한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

대만 문제 해결 없인 남북 문제도…

이 문제는 비단 일본에 국한되지 않고 중국에까지도 미친다. 대만의 독립파들이 정권을 잡은 2000년 이전에 중국이 우려한 것은 남한 중심의 통일로 인해 미군이 중국 국경선에 배치되는 상황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를 막기 위해 식량과 원유 등의 지원을 통해 북한의 붕괴를 막았다. 하지만 대만 문제가 중국의 현안으로 떠오른 이후에는 더욱 적극적으로 남북 문제에 개입하여 6자회담의 주도권을 쥐려고까지 하고 있다. 대만의 독립파들이 정권을 잡기 전까지만 해도 대만과 북한 문제는 별다른 관련이 없었다. 하지만 대만의 독립파들이 정권을 잡고 공공연하게 중국으로부터 분리를 외치고 이를 일본과 미국이 뒷배를 보아주는 상황에서 중국은 대만 문제를 북한 문제와 연관시켜 이해하게 되고, 따라서 동남아의 대만과 동북아의 북한은 별개의 존재가 아니다. 중국으로서는 미국과의 협상에서 항상 대만과 북한 문제를 동렬의 차원에 올려놓고 사고하기 때문이다. 대만 문제의 해결 없이는 남북 문제의 궁극적 해결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미국과 중국이 대만과 북한을 맞바꿀지도 모른다는 일각의 무서운 우려가 턱없는 잠꼬대로만 들리지 않는 것도 이러한 상황 때문이며, 동아시아 지역에서 한반도보다 더욱 위험한 지역이 양안이라는 이야기가 그냥 들리지 않는 것도 이러한 정황 때문이다. 동아시아의 두 위험한 지역이 세계 질서의 차원에서 이렇게 연동되는 것이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동아시의 역사적 현재이다.

이처럼 현재 동아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변수를 차지하는 북한을 고려하지 않는 동아시아론이 얼마나 역사적인 접근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 필자는 의문을 가지는 사람 중 하나이다. 물론 동아시아론을 이야기하는 논자들 중에서 분단을 고려하는 경우를 발견할 수 있지만, 이것 역시 북한을 비롯한 남북한 전체에 대한 구체적 성찰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다분히 선언적인 것이라는 것을 부정하기 어렵다. 동아시아론이 더욱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역사주의적 접근이 긴요하며, 그것의 요체는 북한을 비롯한 남북 문제를 중심에 두고 동아시아를 조망하는 것이다. 청-일 전쟁으로 인한 대만의 식민지화, 일본의 식민주의와 한반도의 분단으로 점철된 근대 동아시아에 대한 차분한 결산만이 일제 말의 동양 담론 중 본질주의적 접근이 갖고 있는 과오를 다시 되풀이하지 않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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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 동아시아, 논쟁의 릴레이를 시작하자

[학술- 다시, 동아시아!]

▣ 유현산 기자 bretolt@hani.co.kr

90년대 중반부터 한국 지식계에 퍼져나간 동아시아론은 10년의 세월을 거치며 진화를 거듭했다. 최근에는 국가가 동아시아 중심국가라는 정책적 과제마저 내걸 정도다.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으로 대안적 이데올로기가 요청될 뿐 아니라 우리의 근대에 대한 반성과 탈근대를 사유하던 시기, 동아시아론은 근사한 ‘발명’이 아닐 수 없었다.


△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두서없이 쏟아져나온 그간의 동아시아론을 거칠게 요약하면 세 가지 정도의 갈래로 다듬을 수 있다. 첫째는 지금까지 동아시아 담론을 주도적으로 이끈 최원식·백영서 교수 등 계간 <창작과 비평>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론이다. 이들은 한반도 분단 체제를 푸는 작업을 통해 동아시아의 평화를 확보하고 서구적 근대의 진정한 대안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 둘째는 함재봉·유석춘 교수 등이 이끈 ‘유교자본주의론’이다. 70, 80년대 일본과 ‘네 마리의 용’이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하자 서구는 기독교 자본주의와 대비되는 유교 자본주의 개념을 만들었다. 이들은 유교적 가치와 자본주의 경제 발전의 결합으로 공동의 번영을 추구하자는 입장이다. 그러나 외환위기 이후 정경유착을 기반으로 한 아시아 경제체제에 대한 비판이 일면서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고 사그라졌다. 셋째는 동아시아 문화론으로 뭉뚱그릴 수 있는 다양한 담론들이다. 이들은 유·불·선과 한자문화란 공동의 경험을 가진 동아시아를 가정한다. 계간 <상상>의 편집위원 정재서 교수 등은 동아시아적 문화적 정체성의 발견, 전통문화와 현대성의 창조적 결합 등을 모색한다. 그 외에도 한국이 문명의 중심 노릇을 해야 한다는 시인 김지하씨의 동아시아 문명론 등을 들 수 있다.

동아시아론의 역사가 지속되고 중요성이 부각될수록, 논쟁의 빈곤함은 더욱 두드러진다. 동아시아는 국가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한 철저한 성찰을 하고 있는가. 이보다 앞서 과연 ‘동아시아’라는 실체가 있는가. <한겨레21>은 지금 다시 동아시아론을 돌아볼 필요가 있음에 공감하고, 릴레이 기고를 마련했다. ‘다시, 동아시아’는 그 어떤 반론과 논쟁에도 문을 열어놓고 있다(제안은 bretolt@hani.co.kr로).

 

[학술] 그 동아시아론은 끔찍했다

[학술- 다시, 동아시아!]

피비린내 나는 19세기초 ‘일본발 동아시아론’…한국 지식인들은 역사의 경험 잊지 말아야

▣ 정선태/ 연구공간 수유 + 너머 수석대표

“일본 유명한 정치가 후작 이등박문씨가 이달 23일쯤 입성한다 하니 이등박문씨는 당금 세계에 유명한 정치가요 또 우리 대한 독립한 사업에 대공이 있는 사람이라. 이번에는 유람차로 오니 정부와 인민이 각별히 후대하기를 바라노라.” <독립신문> 1898년 8월20일자 잡보란에 실린 ‘후작 이등박문씨의 유람’이라는 제목의 기사이다. <독립신문>은 이 단신에 이어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조선을 방문한 날부터 떠나기까지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상세하게 보도한다. <독립신문>의 ‘요청’에 화답하기라도 하듯 대한제국 정부는 궁내부 대신 이재순의 감독하에 대대적으로 궁궐을 수리하는 등 ‘세계의 유명한 정치가요 대한 독립에 큰 공을 세운’ 이토 히로부미를 접대하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갖춘다.


△ 1909년 하얼빈역에 내린 '동양평화론의 전도사' 이토 히로부미(왼쪽에서 세 번째). 안중근에게 저격당하기 직전의 모습이다.(사진/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하나밖에 없는 영웅, 이토 히로부미?

정교(鄭喬)의 <대한계년사>를 보면 이토 히로부미를 향한 대한제국 지도층의 존경과 신뢰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일본 요릿집 국취루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조선 방문을 환영하는 성대한 연회가 열린다. 그 자리에서 각부 대신과 독립협회 지도부(윤치호·정교·이건호)가 그의 공덕을 칭송하는 시를 지어 건네자 이토 히로부미는 다음과 같이 화답한다. “흉금을 털어놓으니 너와 내가 따로 없네(開懷無彼此)/ 고치기 어려운 버릇은 영웅을 사모하는 것이라(痼疾慕英雄).” 그러자 곁에 있던 정교가 이렇게 답한다. “하늘과 땅 가득히 감개가 무량하네(乾坤多感慨)/ 아시아와 유럽을 통틀어 한 사람의 영웅이 있도다(亞歐一英雄).”

아시아와 유럽을 통틀어 하나밖에 없는 영웅! 접대용 발언 또는 외교적 수사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보기에는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뒤 군비 확장을 통한 아시아 지배 전략 구상에 골몰하고 있던 이토 히로부미의 영향력이 너무나 막강했다. 일본을 일약 문명국의 반열에 올려놓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청나라의 속국이었던 조선을 ‘독립’시키는 데 막중한 역할을 수행한 그는, 조선의 문명개화와 자주독립을 추구하던 사회적 지도층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선망의 대상이자 존경에 값하는 인물이었음에 틀림없다.


△ 버마 미드키나에서 일본군이 퇴각하면서 포로가 된 조선인 위안부.

공식적인 방문이 아니라 개인적인 유람에 나선 일본 정계의 ‘거물’을 이처럼 성대하게 환영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을 터이다. ‘동양평화의 전도사’를 자임하던 이토 히로부미에게 대한제국 정부는 기꺼이 경부철도부설권을 ‘선물’로 주었으며, 열강들의 이권 침탈에 격렬하게 저항했던 독립협회에서도, 그가 중국으로 향하기 위해 인천으로 떠나던 날, 독립문이 그려진 은제 찻잔 한벌을 선사하면서 따뜻하게 전별했다. 그 대신 그는 자신의 안경을 깜빡 잊고 두고 떠났는데, <독립신문>은 8월31일자 ‘부끄러운 일’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이등 후작이 외부(外部)에 갔다가 안경을 잃었다 하니 당당한 제국 외부에서 귀한 손님이 안경을 잃은 것은 남에게 들려주지 못한 수치”라며 정부 관계자를 질타해 마지않았다.

그로부터 6년 뒤 러일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04년 3월17일, 이토 히로부미는 특파대사 자격으로 서울에 온다. 이때에도 고종 황제는 그에게 대한제국시대 최고의 훈장인 금척대훈장을 수여하고 연회를 베풀어 융숭하게 대접했다. 러일전쟁을 수행하는 데 조선의 적극적인 지원을 얻어내는 것이 특파대사 이토 히로부미의 방문 목적이었다. 그의 요구에 따라 대한제국 정부는 일본군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라는 훈령을 내린다. 거래 내막을 상세하게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이토 히로부미는 러일전쟁을 지원한 대가로 대한제국의 완전한 독립과 이를 기반으로 한 동양 평화의 수립을 약속했을 것이다. 이는 다른 나라가 조선의 내정에 간섭할 경우 “병력을 출동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 또 조선으로 하여금 영원토록 재앙과 난리에서 벗어나도록 하며, 장래에 치안을 보존하여 동양 전체의 평화를 유지하려고 한다”는 일본 천황의 칙서(1894) 이후 되풀이돼온 ‘약속’이었다.

일본의 동양평화론에 배반당한 안중근

그러나 동양 평화의 전도사로서 기대를 한몸에 받았던 ‘동양이 낳은 영웅’ 이토 히로부미는 한국의 독립과 영토 보전을 유지한다는 약속을, 한·중·일 3국이 연합 동맹하여 동양의 대세를 영원히 보전한다는 대의를 헌신짝처럼 팽개쳐버린다. 그리고 1905년 11월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뒤, 그는 “사람을 압도하기에 충분한 음성과 웃음”으로 한국 정치의 전면에 등장한다. 동양의 패자(覇者)답게 동아시아의 황인종을 생각해달라는 대한제국쪽의 간절한 요청은 너무나 허망하게 거절당하고 만다. 그는 너무나 당당하게 이른바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해야만 “두 나라는 행복해지고 동양의 평화는 영원히 유지될 것”이라며 조약 인준을 종용한다. 을사보호조약 제1조에 명기되어 있는 바와 같이 “한국과 일본 두 나라는 동아시아의 대세를 튼튼히 하기 위하여 이전의 친밀한 관계를 굳게 맹세하여 약속”하는 것, 이것이 동양의 영웅 이토 히로부미가 품고 있던 ‘큰 뜻’이었던 것이다.

안중근이 미완성 유고 ‘동양평화론’에서 밝히고 있듯이, 한국과 청국의 인민들이 일본 군대의 짐을 나르고 길을 닦고 정탐을 돕는 등 수고를 아끼지 않고 일본이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데 기여한 이유는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동양 평화를 유지하고 대한 독립을 공고히 한다”는 일본의 대의에 전적으로 동의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황인종과 백인종이 경쟁하는 마당에 “같은 종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한편이 되는 게 인정의 순서요 합당한 이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잇달아 승리하면서 동아시아의 새로운 강자로 떠오른 일본이 한국과 청국의 많은 지식인들의 원망을 철저하게 배반하고 ‘같은 종족’을 침략함으로써 ‘제국의 욕망’을 실현하려는 프로젝트를 현실로 옮기자, ‘테러리스트’ 안중근은 ‘배신자’ 이토 히로부미의 심장을 향해 총을 겨누었던 것이다.


△ 1937년 12월13일 중국의 난징 증산문을 점령한 일본군. 일본발 동아시아론은 한국과 청국의 지식인들의 바람을 철저히 배신했다.

침략의 논리 ‘아시아는 하나다’

동양 평화의 전도사에서 배신자로 전락하는 이토 히로부미의 모습은 동아시아연대론이 얼마나 많은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는가를 여실하게 보여준다. 하지만 제국주의 일본은 ‘배반의 역사’를 반복한다. 1937년 중일전쟁을 도발한 이후 1945년 8월15일 패전에 이르기까지, 특히 태평양전쟁에서 패전에 이르기까지 일본은 다시금 ‘동양 평화’를 전면에 내세우고 아시아 민중들을 고통의 시간으로 몰아넣는다. 동양의 평화를 외치면서 중국을 침략하고, 제국 일본을 중심으로 일치단결하여 스스로가 젖줄을 대고 있는 서양을 쳐부수자고 선동한다. 이른바 영미귀축(英米鬼逐), 즉 영국과 미국의 귀신을 축출하자는 깃발이 아시아 전역을 뒤덮으면서 (동)아시아의 근대사는 죽음의 세월을 보내야만 했던 것이다.

일본의 ‘세계경영’ 욕망이 빚은 폭력과 희생을 정당화하고 이를 사상적으로 뒷받침하던 것이 바로 ‘아시아는 하나다’라는 논리였다. 수많은 학자와 문인들이 앞다투어 동양을 이야기했고, 일본을 중심으로 동양이 강력하게 연대해야만 서양의 침략으로부터 동양 평화를 지킬 수 있다는 논리를 유포했다.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들, 예컨대 이광수·서정주·인정식 등도 이 논리를 자발적으로 내면화했으며, 일본인과 동등한 ‘황국신민’이 되어 당당한 일본제국의 ‘국민’으로 다시 태어나기를 희구했다. 그들은 “서구의 족쇄로부터 아시아 인민을 해방한다”는 명목하에 자행된 소위 ‘해방전쟁’을 위해 조선인들 역시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할 것을 독려했다. 그리고 그 상흔은 아직껏 지워지지 않은 채 기회만 닿으면 망각의 사슬을 풀고 뛰쳐나와 우리의 기억을 교란시키곤 한다.


△ 중국인 포로들을 놓고 총검 훈련을 하는 일본군. '아시아는 하나다' 라는 논리가 그 끔찍한 폭력을 정당화하는 데 쓰였다.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서구 근대에 대한 대타 의식에서 출발한 동양평화론 및 대동아공영권의 논리가 제국주의 일본의 세계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시녀(侍女)에 불과했다는 사실이다. 후쿠자와 유키치를 비롯해 오카쿠라 덴신, 미키 기요시 등 일본의 쟁쟁한 사상가들이 동양을 발견하고, 이를 토대로 동양평화론을 역설했으며, 그 위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위시한 제국주의적 정치가들은 자신들의 구상을 침략전쟁을 통해 현실화하고자 했다. 그들의 사고에 서양에서 출발한 자본주의나 국가주의에 대한 비판은 깃들 여지조차 없었다. 악(서양)을 구축(驅逐)하고 새로운 중심을 세우려 했던 일본 근대의 이중성 또는 이율배반은 전도된 오리엔탈리즘이 얼마나 손쉽게 폭력으로 치달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입만 열었다 하면 연대에 기초한 평화 구축을 내세웠던 제국주의 일본의 ‘약속’이 배반으로 귀결되면서 동아시아 근대사상사에서 동아시아론은 깊은 의혹의 눈길을 피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 그런데 요즘 한국에서 ‘동아시아론’이 하나의 담론으로 떠오르고 있다. 동아시아를 말하는 논자들이 다양한 탐색을 행하는 중이어서 그 향방을 가늠하기란 쉽지 않다. 제국주의를 자본의 논리와 결탁한 국가주의의 확대판이라 할 수 있다면, 동아시아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은 명확해진다. 한국 지식인들이 ‘발견’ 또는 ‘창안’한 동아시아론이 일시적인 ‘유행’으로 끝나지 않으려면, 근대를 추동하는 두 축이자 전면적 폭력의 어머니인 국가주의와 자본주의를 넘어서기 위한 사유의 모험으로 이어져야 한다. 태평양전쟁이 한창 진행 중일 때 일본 학계를 강타한 ‘근대초극론’이 허구에 지나지 않았던 것도 국가주의와 자본주의를 불가침의 전제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와 국가주의를 넘어

두번에 걸쳐 거센 파도처럼 밀려와 아시아를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었던 일본발 (동)아시아론이 침략과 압제를 정당화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는 역사적 경험을 우리는 다시 환기할 필요가 있다. 자본주의와 국가주의 그리고 자민족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을 철저하게 수행하지 않는 한, 한국발 동아시아론이 군사적 침략뿐만 아니라 경제적·문화적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한 이데올로기로 전화(轉化)하지 않는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고 했던가. 두번의 일본발 (동)아시아론은 한국의 동아시아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지시하는 반면교사라 할 수 있다. 역사를 향해 진지하게 되물을 때, 그러니까 일차적으로 동아시아에서 전개된, 국가주의에서부터 아나키즘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도 이질적인 사유의 흐름들을 아우르면서 진정한 연대에 의한 ‘동양 평화’를 모색해나갈 때, 우리는 제2의 이토 히로부미에게 총을 겨누지 않아도 되는 세상, (동)아시아의 민중들이 평화롭게 함께 살아가는 진정한 ‘대동아공영’의 세상을 꿈꿀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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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계몽운동은 ‘애국’이었나

[박노자의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

구한말 계몽주의자들이 추종한 일본인 마당발 오가키 다케오… 친일 환상 부추겼음에도 찬양받아

▣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 · 한국학

‘애국’이란 무엇인가? 자신의 행동을 애국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각자가 생각하는 ‘나라’와 ‘사랑’의 내용이 각각 다르기에 애국을 주장하는 두 쪽이 서로 대립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예컨대 ‘나라’ 개념의 내용을 이라크에 가서 제국의 총알받이로 죽을 서민층 젊은이를 중심으로 본다면 파병 반대가 애국이 되지만, 파병으로 인한 한-미 동맹(대미 예속)의 강화로 미국 투자가 활성화돼 주식값이 오르리라고 군침을 흘리는 투기꾼이 ‘나라’의 주인공이 된다면 파병은 애국이 될 것이다.


△ 1907년 7월20일, 고종 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킨 이토 히로부미와 그 행렬이 궁궐에서 물러나고 있다. 이토의 중요한 협력자는 오가키와 같은 민간인 국수주의자들이었다.

애국항일 계몽지의 놀라운 이면

‘애국’이 주관적인 개념이기에 객관성을 내세우는 사학자들이 애국이라는 수식어를 쓰려 하지 않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럼에도 애국이라는 수식어가 꼭 붙는 것은 1900년대 후반의 이른바 ‘애국계몽운동’이다. 1980~90년대의 민중사학자들이 애국계몽운동 지도자 대다수가 통감부 권력자들과 조화롭게(?) 공존했던 부르주아·지주·관료였음을 입증했는데도, 오늘날까지도 국사교과서를 외워야 하는 학생들은 대한자강회-대한협회(1906년 4월~1910년 9월)나 서우-서북학회(1906년 10월~1910년 9월) 등의 계몽단체 간부들을 ‘애국적인 항일 인사’로 인식하고 있다. 당대의 생생한 증언이라 할 만한 계몽단체들의 출판물들을 읽으면 ‘자강’과 ‘문명’을 부르짖었던 지도자들에게 일제는 위협이면서도 동시에 모방이자 제휴의 대상이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1900년대 후반 계몽단체의 선구자라 할 만한 대한자강회의 <월보> 제1호(1906년 7월)를 들여다보자. 교과서에서 배웠던 박은식·장지연 등의 이름들이 맨 먼저 눈에 띈다. 그러나 웬일인가. 머리말 격인 3편의 ‘서’(序)를 쓴 사람 중에는, 회장 윤치호(尹致昊), 대문장가 이기(李沂)와 나란히 일본 이름 하나가 보인다. 러시아에 붙었다가 중국에 붙었다가 하는 ‘독립정신이 없는’ 한국 당국자들을 비난하고, “한국이 군대를 키우지 않아도 된다. 문명 열강들이 한국을 정의로 대해줄 터이니 약소국이라 하더라도 침략당할 일 없다. 일단 교육과 식산흥업에 힘쓰고 나중에 적당한 시기에 독립을 되찾자”는 취지의 머리말을 쓴 사람은 일본인 오가키 다케오(大垣丈夫·1861~1929)였다.

미국·영국을 위시한 열강의 적극적인 방조 아래서 일제 침략을 당해 ‘보호국’이 된 나라의 국민들에게 “안심하여 교육이나 힘쓰라”고 훈시하는 것은 그 당시 통감부의 대(對)지식인 선전 방침과 대동소이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바로 이 서(序) 밑에다 이기는 “국가 정의에 대한 이 이야기는 인간의 정신을 감동시키는 내용이며, 세상을 깨우치게 하는 큰 종(鍾)”이라는 찬양의 코멘트까지 달아놓았다. 이게 애국항일 계몽지 같은가?

<월보>를 계속 정독해보면 놀라움은 더해간다. 13호까지 발간됐다가 정간을 당한 <월보>에 23편(!)의 글을 기고한 오가키야말로 학회의 가장 근면한(?) 필자로 보인다. 기고의 내용은 계몽주의자들의 거의 모든 관심 분야를 아우른다. 예컨대 “40~50년 전에 일본도 한국처럼 미개한 나라였지만 서구 문명을 흡수하고 ‘국혼’(國魂)인 야마토다마시(大和魂)를 배양했기에 오늘처럼 발전됐으니 한국도 교육·식산흥업에 힘쓰고 한국혼(韓國魂·국민 정신)을 키우면 언젠가 독립을 되찾아 하나의 열강이 될 것이다. 단, 참다운 국민이 정부의 뜻을 받들고 국법을 준수할 뿐이지 독립운동과 같은 ‘무모한 짓’을 결코 하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은 대한자강회의 창립 때 오가키 연설의 요지였다(<월보>, 제1호).

오가키, 계몽운동의 실세로 통해

또 그는 인종적으로 일본과 같은 뿌리의 한국인들이 교육만 잘 시키면 중국 영향으로 말미암은 나태·사대주의를 극복하여 곧잘 문명개화로 중국을 앞지를 것이라고 통감부하 반(半)식민지의 ‘진보’를 낙관했으며(‘외국인의 오해’-<월보>, 제2호), 대한자강회를 중심으로 잘 뭉쳐서 교육에 열중하면 아예 백인종까지도 능가하여 세계 문명의 중심이 되리라고 내다봤다(‘교육의 효과’-<월보>, 제1호). 인종적인 형제 국가인 일본에 번거로운 외교를 편하게 맡겨놓은 채 실력 양성을 잘하여 국민 정신, 즉 국가에 대한 충성만 잘 키우면 한국이 곧 개명진보의 역에 도착하겠다…(‘한국 목하(目下)의 급무’-<월보>, 제9호).

이것이 대한자강회 잡지에 우연히 실리게 된 일개 일본인의 망설뿐이었다면 큰 문제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일한 동맹론’으로 <대한매일신보>의 찬사까지 얻어(‘論大垣氏同盟說’-1906년 2월25일치 논설) 장지연과 같은 당대의 대표적 문사와 개인적으로 가까웠던, 그리고 <황성신문> 등의 매체를 연설과 기사로 자주 장식했던 오가키가 단순히 대한자강회와 무관한 일개의 궤변가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를 고문으로 둔 대한자강회의 상당수 한국인 논객들이 ‘황인종의 연합’과 집단주의적인 ‘국가 정신’, 그리고 ‘선 실력양성 후 독립’ 등을 뼈대로 한 그의 논지를 그대로 따르기도 했으며, ‘이름을 밝혀 이득을 낚으려는’(황현, <매천야록>, 제5권) 계몽주의 지도자들 사이에서 그가 마당발이자 실세로 통하기도 했다. 통상 ‘항일 애국운동가’로 생각되는 계몽주의자들은 어떻게 해서 일제의 속뜻을 대표했던 이 ‘호걸’(장지연의 오가키 평)을 이렇게 환대하게 됐는가?

오가키의 전기가 일본 국수주의자들인 ‘흑룡회’(黑龍會)가 1936년에 편찬한 <동아선각지사기전>(東亞先覺志士記傳-‘선각지사’는 침략의 주역을 뜻한다)에 실린 것만 봐도 그의 정치적 성격을 짐작할 수 있다. 국수주의 운동 활동가로서 전형적인 자금 조달 방법인 기업인 공갈협박의 죄로 일본에서 1902년에 형까지 받은 오가키는 원래 지역 정치인이자 ‘국가 원기 회복’을 주장하는 한 국가주의적 신문의 사장이었다.

본인의 말대로라면 1906년 2월에 이루어진 그의 도한(渡韓) 동기는 “국은(國恩)에 보답하는 의미에서 한국인들의 지도계발을 맡아 제국의 정책에 보탬이 되겠다”는 것이었다. 식민지 백성이 돼가는 한국인에 대한 그의 ‘지도계발’의 전술은 양면적이었다. 한편으로는 그가- 적어도 겉으로- 또 다른 ‘대륙 낭인’(재야 국수주의자)들의 ‘합방론’에 반대하여 이미 허울뿐인 한국의 주권이 명목상 유지돼 일본과 ‘동맹’ 관계가 돼야 된다고 주장함으로써 자신을 성공적으로 차별화하고 한국의 계몽주의자들과의 교분을 쌓을 수 있는 기반을 다졌다.

물론 그가 이야기한 ‘동맹’이란 한국의 대일 종속에 대한 기만적 수사에 불과했다. 그는 초기에 아예 <대한매일신보>에 광고를 내 일본인에게서 구타·임금체불을 당할 경우 자신에게 알려주기만 하면 억울함을 다 풀어주겠다고 약속하는 등(1906년 3월13일 잡보란) ‘착한 일본 해결사’의 노릇을 맡은 셈이었다. 그러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계몽주의자들 사이에서 이미 유행한 ‘황인종 연합론’의 인종주의적인 친일적 환상들을 더 부추기고 국채보상운동에 훼방을 놓고 대한자강회의 강제 해산과 같은 일제의 폭거에 대한 분노를 무마하는 데 공을 들였다. 1907년 8월에 대한자강회가 해산당하자 오가키가 이토 히로부미로부터 계몽주의자를 결집할 새 단체, 즉 대한협회의 설립허가를 따주고 그 활동을 배후에서 조종했다.

식민지 거물로 거듭난 극우 공갈꾼


△ 오가키와 가장 친했던 계몽주의자 중의 한 사람인 대한협회 부회장 오세창(왼쪽). 위암 장지연(오른쪽)은 오가키를 “천하의 호걸”로 평가하고 그의 ‘황인종 연합론’에 동조했다.

이완용과 결탁한 오가키는 1910년에 ‘합방의 공로’를 독차지하려던 일진회의 한쪽과 한때 공방을 벌여 일본 당국의 제지까지 당한 바 있었지만 결국 식민지의 ‘개명진보’를 찬양하면서 죽을 때까지 서울에서 눌러살게 됐다. 일본의 한 극우적 공갈꾼이 명예직을 두루 거친 식민지 ‘거물’로 거듭났다.

1900년대 말에 오가키에 대해서 ‘사기꾼’ ‘고등 첩자’ 등의 소문이 나돌았음에도 그가 대한자강회의 고문이 되어 윤효정(尹孝定), 오세창(吳世昌), 권동진(權東鎭) 등의 주요 정객들을 친구로 사귀고 계몽담론의 생산자로 기능할 수 있는 배경이 무엇인가? 현실적으로는 계몽주의자 집단들에게 오가키처럼 그들과 일제 당국 사이의 매개체가 될 사람이 절실히 필요한 부분도 있었지만, 더 근원적인 이유는 초기 부르주아 민족주의의 모순적인 대일관(對日觀)에 있었다. 일제에 국권이 넘어가는 현실을 안타깝고 분하게 여기는 의미에서 그들이 애국자였지만, 그들이 대표하는 신흥지배계급(개명관료, 개항장의 부르주아, 쌀 수출의 주역인 지주 등)이 도일 유학과 대일 무역을 부·문화자본 축적의 수단으로 여기고 일본의 국가주의적 규율을 흠모했던 만큼 그들에게도 일본은 ‘위협’이기에 앞서 ‘인종적 형제’이자 모델이었다.

오가키가 주장한 인종주의적 ‘일한 동맹론’이나 ‘국혼(國魂) 배양’ 식의 집단주의·국가주의, 그리고 반(半)식민지적 현실의 인정과 ‘실력양성론’은 그들의 계급적 이해관계상 안성맞춤이었다. 그들이 벌인 운동을, 과연 ‘애국’으로 지칭해야 되는가? 만약 ‘나라’를 침략으로 도탄에 빠진 민중으로 해석한다면 침략자들과 ‘인종적 동맹’을 모색했던 운동에 ‘애국’과 같은 수식어를 붙일 여지는 없어지고 만다. 외세의존적인 초기 부르주아의 메이지 일본식의 계몽이 곧바로 식민지 엘리트의 ‘소신친일’의 논리로 이어지고 지금까지도 일본 극우파를 닮은 수구 기득권층의 군사주의적·국가주의적 논리로 계속 이어져가는 것은 우리가 바로 봐야 할 현실이다.

[오가키 관련 연구]
- 이케가와 히데가쓰(池川英勝), ‘大垣丈夫について-彼の前半期’, -<朝鮮學報>, 제117호, 1985.
- 다구치 요조(田口容三), ‘大韓自强會-大韓協會の日本人顧問に對する 評價をめぐって’, - <朝鮮史硏究會會報>, 제66호, 1982.
- 정관, <한말 계몽 운동 단체 연구>, 효성여자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1992
- 최미숙, <大垣丈夫 연구-대한자강회와 대한협회의 활동을 중심으로>, 숙명여자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1995.
- 최덕수, ‘대한제국기 일본인의 조선론 연구’, -<宋甲鎬 교수 정년퇴임기념 논문집>,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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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업적 과잉 강조...王政 극복 문제의식 不在
본격서평:『고종시대의 국가재정 연구』(김대준 지음, 태학사 刊, 2004, 332쪽) 등
2004년 07월 14일   김재호 전남대 

김재호 / 전남대·경제사

 '고종시대의 재조명'은 1997년부터 1999년에 걸쳐 발표된 이태진 서울대 교수의 고종시대에 관한 논고를 모은 논문집이며,  '고종시대의 국가재정 연구'는 故 김대준 연세대 교수의 박사학위논문('이조말엽의 국가재정에 관한 연구(1895∼1910)', 연세대, 1974)을 다시 조판해 간행한 것이다(이하 '재조명', '연구'로 약한다).

이렇게 저자가 다른 두 책을 한 자리에서 평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김대준의 논문을 간행한 이태진 교수는 '간행사'에서 '연구'는 "대한제국의 근대국가 수립의 가장 핵심적인 면"을 다루고 있으며, 대한제국 정부는 갑오개혁에 의해서 개정된 회계제도를 충실히 이행해 근대적 국가예산제도를 "확립"했으며 이러한 성과를 일본의 재정고문과 통감부가 "파괴"했다고 결론짓고 있다는 점에서 "자력 근대화 실재론 주장자"에게 대단히 고무적인 업적이라고 평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연 양 저서의 문제의식의 동일함은 30년 세월의 거리를 전혀 느끼지 못하게 한다.

'재조명'에서 이태진 교수는 저작의 목적을 우리나라의 근대사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을 바로잡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저자는 한국 사회과학자들이 "오늘의 사회과학적 주제들을 우리의 역사를 통해 보려는 시각을 거의 갖고 있지 않다"고 개탄하고 있는데, 이러한 한국 사회과학계의 현상에 대해서 사회과학자의 일원인 평자 또한 크게 공감하고 있으며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원인이 식민지병합의 충격으로 인한 한국사에 대한 "부정적 인식" 때문이며 따라서 그것을 긍정적인 것으로 바로 잡아야 한다는 것은 너무 소박한 진단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의 사회과학자 대부분이 한국사, 더 정확히는 역사 일반에 크게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은 어떤 편견 때문이라기보다는 사회과학 이론을 그것이 생성됐던 시공간에 대한 이해 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천박함 때문이며, 아직까지도 사회과학이론의 개발자(maker)가 아니라 이론을 학습하는 수용자(taker)의 단계에 만족하고 있는 유치함 때문이라고 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의 밑바탕에는 사회과학적 주제를 정면에서 대하지 못하는 래디컬한 자세의 부족함이 드러나는데, 이것은 우리나라의 정치경제적 위치에서 비롯하는 것이다(변방성). 이러한 사회과학으로부터 "오늘의 사회과학적 주제"를 제대로 해명하는 것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저자도 동의하겠지만, 어떻게 사회과학 이론의 이해, 개발, 적용이 인간의 사회적 경험의 총체인 역사에 대한 통찰이 없이 가능하겠는가. 그러나, 자국의 역사를 긍정적인 것으로 만든다고 주관과잉의 연구를 한다면 우리나라 사회과학의 문제해결에는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한국사에 대해서도 자해행위가 될 것이다.

'재조명'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개항기 자주적 근대국가 수립의 주체는 고종이었다. (2)고종은 "暗弱"하지 않았다. 고종은 "계몽절대군주"였다. (3)고종은 영조와 정조의 근대 지향적인 "民國政治"이념을 계승했다. (4)대한제국의 전제군주정은 민국정치를 계승, 발전시켰다는 점에서 근대적인 성격을 갖는 것이었다. (5)고종의 근대화 노력은 대한제국의 근대화정책(光武改革)에 의해서 실현됐다. (6)대한제국의 근대화 정책은 성공을 우려한 일본의 침략에 의해서 좌절됐다.

이 간단한 요약에 의해서도 '재조명'이 그리는 그림이 조선후기부터 개항기와 식민지기에 걸친 장대한 스케일을 갖고 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색채도 상당히 화려하다. 그러나 세부적인 묘사를 일일이 평할 여유가 없기 때문에 이 그림의 구도에 대해서만 말한다. 이 그림에는 5백년의 지구력을 보여준 조선왕조의 극복이라는, 우리나라 근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인 왕정의 극복이라는 문제의식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여기서 평자는 단지 정치체제를 입헌군주제나 공화제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저자의 태극기 분석이 밝히고 있는 "명월이 수많은 하천에 비치는 것"과 같이 "진정하게 소민을 보호하는 군주와 백성의 관계"(276)로 요약되는, 영조·정조의 "탕평군주"와 그 계승자 고종의 비전을 문제삼고 있는 것이다. 평자는 이러한 비전 위에 근대사회를 수립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주지하듯이 당대의 서학의 수입, 동학의 발흥은 다름 아닌 조선 왕조의 이러한 비전 자체를 문제삼고 있었다. 일제에 의한 대한제국의 병합이 우리의 근대사에 치명적인 병폐를 가져다 줬다면, 왕정을 자기 스스로 극복할 기회를 강탈한 것에 있다고 해야 한다. 저자는 전제군주정인 대한제국과 함께 근대를 살아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가. 생각건대 君民一體의 민국정치의 이념을 근대적인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면 불가능하지도 않을 것이다. 진정 그러하다면 해방 후 우리는 대한제국의 부활을 위한 복벽운동부터 시작해야 했을 것이다.

한 인간은 그 사람이 먹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한 나라를 평가할 때도 국왕의 생각을 살필 것이 아니라 그 재정부터 살펴야 한다. 고종이 비로소 자신의 민국정치의 이념을 구현할 수 있었다는 대한제국의 재정제도와 재정상태는 어떠했는가. 김대준의 '연구'의 의의는 공포되지 않았던 예산자료를 발굴해 정리하고 최초로 재정학의 방법에 의해서 분석했다는 연구사적인 것에 있다. 갑오개혁기에 도입된 근대적 재정제도가 대한제국기에 유지, 발전됐다고 인식하고 있는 것은 오류이다.

대한제국기의 황제권력의 강화와 그것을 뒷받침하는 궁내부와 내장원의 재정팽창으로 갑오개혁기의 재정제도는 뒤틀려갔다. 재정곤란으로 인해 예산이 제대로 집행되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예산제도 밖에서 국왕직속의 내장원이 국가재원을 집중해 재정곤란에 빠진 정부에 대해 지세수입을 담보로 대부를 해줄 지경에 이르렀다. 요컨대 황실재정에 의한 정부재정의 지배라는 양상을 노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연구'는 이러한 황실재정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고 있다. 또한 정부예산에서 화폐발행수입이 축소된 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는데, 조폐국인 전환국이 국왕직속으로 이전돼 정부예산에서 빠진 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전환국은 황제의 사금고 역할을 했으며 악화인 백동화 남발은 대한제국기 화폐제도 문란의 주범이었다. 이러한 대한제국의 재정제도는 宮府一體의 이념하에서 운영됐던 국가재정을 정부재정과 왕실재정으로 분리하고, 왕실재정을 정부 통제하에 두고자 했던 갑오개혁의 전도된 결과라고 해야 한다. 이것을 두고 갑오개혁기의 재정제도가 발전돼 근대적 재정제도가 "확립"된 것으로 평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혹자는 말할 것이다. 재정제도는 어찌됐건 근대적 목적에 잘 쓰면 되지 않겠는가. '재조명'은 대한제국의 근대적 업적의 예로서 도시개조사업, 중국도서의 대대적인 수입, 군사비 예산의 증대 등을 거론하고 있지만, 국가재정을 근본적으로 혁신하기 위한 과세대상(토지, 인구)에 대한 파악, 징세기구의 개편, 근대적 산업의 이식과 육성, 군사력의 강화를 우선적으로 살펴야 할 것이다. 대원군이 국력을 기울여 중건한 경복궁을 두고 새로 경운궁을 짓는 것이나 비명에 죽은 황후의 장례를 위해서 막대한 자금을 지출하는 것이 시급한 사업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재조명'은 1902년에 설립된 황제직속의 益聞社를 항일정보기관으로 평가하고 대한제국이 제대로 된 근대적 국가체제를 갖추고 있는 증거로 제시하고 있다. 관민의 모든 동향을 감시하고 "자유 민권을 빙자하여 전제정치를 비방하며 정부 득실을 평론하여 인심을 선동하는 자"를 탐지하는 것을 임무로 하였던 익문사. '大韓帝國制' 아래 君民一體의 '민국정치'의 실상이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일지언정 어떻게 항일정보기관으로 평가할 수 있는지 묻고 싶다. 저자는 갑신정변, 갑오개혁, 독립협회로 이어지는 근대화 노력을 모두 일제와 결탁한 권력찬탈기도로서 평가절하하고 있는데, 고종황제는 다소 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실로 자신을 알아주는 후원자를 얻었다 할 것이다.

필자는 서울대에서 '甲午改革이후 近代的 財政制度의 形成過程에 관한 硏究'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기업의 발흥과 관료, 1876-1910', '한국 전통사회의 기근과 그 대응:1392-1910' 등의 논문이, '맛질의 농민들 - 한국근세촌락생활사'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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