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이곳에 온 목적은, 돌들이 나를 지그시 눌러 가라앉혀 주길 바랐다는 점이다. 이웃이라는 온갖 소란스러움과 번잡함을 감수하고서라도. 떠들썩한 웃음 속에서 빈 술잔을 만지작거리는 밤이어도 나는 여기 있지 않은가, 생각하며. 우리의 위안은 사실 위안일까. 재빨리 지는 꽃이나 순간이 아니라?

오늘 붉은 돼지님 서재(http://blog.aladin.co.kr/733305113/7461189) 당호 사의재(四宜齋)” 유래를 보다가 마지막 문장이 내 눈을 지그시 눌렀다.

 

움직임은 마땅히 무거워야 하나 무겁지 않음이 있으면 빨리 더디게 해야 한다

 

그 문장에서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를 도라 말하면 道가 아니다.”라는 경구를 떠올렸다. 무겁다고 생각하면 할수록 내 행동과 의식은 언제나 그에 한다. 그건 아니라고 지적하며 비판하다가 저기 가서는 와하하, 웃고 있다. 좋지 않으면서 빨리 좋아져야 된다고 자신을 채근하고, 이것을 어서 알아야 더 좋아지게 된다고 타인을 닦달한다. 시간이라는 왕 앞에 잔뜩 조아리면서도 티격태격하는 신하들처럼. 누군들 겪어보지 않았을까.

자신에게 가장 솔직할 것, 왕을 두지 말 것.  

 

밤을 새우고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올 때 많은 들을 만났다. 머릿속으로만 적고 옮기지 않았다. 더 무거워지고 더 더뎌지기 위해서.

 

 

§§ 

도서관에서 희망도서 신청 책들이 도착했다는 알림이 법정 출두 명령서처럼 왔다.

 

 

 

 

 

 

 

 

 

 

 

 

 

 

 

 

 

두 달을 기다려놓고 짧은 요며칠 동안은 그 책들을 온라인으로 바라보며, 그때와 달리 지금 내가 긴급히 찾고자 하는 돌이 아니라는 생각에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맘 굳게 먹고 갔을 때는 도서관 휴관일이었다. 벚꽃이 맘 좋게 웃고 있었고, 그랬다. 오늘이 4일째고, 그중에 몇 권을 고를 테지만, 가장 먼저 읽을 책은 갑자기 고른 책이 될 것이다. 내 희망과는 언제나 다른 것이 온다는 것, 희망보다는 언제나 사실이 먼저 온다. 나는 이 사실들에서 희망과 절망 모두를 볼 것이다.

 

 

나는 얼음인 돌, 다 녹기 전에 뭔가는 할 수 있을 것이다.

해가 길어지고 있다.

 

 

ㅡAgal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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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08 18: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4-08 20: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15-04-08 21: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경기도 최북단의 시골인 이곳에서 저는 도서관에 책을 신청하고는
기다리다가 다른 주제로 돌아가(또는 다른 주제를 찾아) 글을 씁니다.
신청한 책을 구입했으니 대출해가라는 연락이 와 어렵게 이십 분을 걸어
도착한 그곳에서 내가 왜 이런 책을 신청했지, 하는 난감함(?)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이미 지나간 또는 시효가 다한 책이기 때문이라고 해야겠지요.
예수를 기다리지 못하고 자기식으로 처리(배반)한 가롯 유다처럼 저는
급히 다른 주제로 눈을 돌리는 것인지나 모르겠습니다.
저는 알렉스 캘리니코스의 `칼 맑스의 혁명적 사상`을 주문했습니다.
좋은 독서가 될 것이라 가대합니다...

AgalmA 2015-04-08 21:50   좋아요 0 | URL
아니, 흔적님도 그런 난감함(?)을 느끼시다니! 엄청 반가운데요ㅎㅎ!!! 그래도 이렇게 신청까지 해 놓고 안 읽는 건 도서관에도 민폐다 싶어 꼭 읽으려고는 합니다. 요즘은 상호대차가 활발하니 언젠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기도 하겠지 합리화;하기도 하면서 말이죠.
말씀하신 그 책 저도 궁금하던데, 음...흔적님은 하루에 한 권 읽으시는 분이니 리뷰가 곧 올라 오겠군요!
네, 저도 읽어 보겠습니다. 여러모로 감사합니다^^

cyrus 2015-04-08 22: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희망도서 문자 확인을 하고 그 다음날에 한파를 뚫고 도서관에 간 적이 있었어요. 추위를 견디면서 도서관 정문에 도착했는데 휴관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때 맥이 빠져요. 그러면 입에 육두문자를 되풀이하면서 집으로 돌아가죠. ㅎㅎㅎ

AgalmA 2015-04-09 00:56   좋아요 2 | URL
제가 그래서 이사 제1순위가 도서관이 가까운 곳! 지금 위치가 뛰어서 5분입니다ㅎ 휴일날 꼭 평일 시간이랑 착각해서 오후 5시 이후에 가서 허탈해하고는 하죠; 그러면서 또 남산도서관 가서 책 빌리는 바람도 좀 피우고, 매일 중고서점을 주시하는 등의 독서난봉꾼 같은 이상한 지경;

AgalmA 2015-04-09 1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북플과 서재에 대한 감시 보고]
아침이 되니 이 글이 <화제의 서재글>에서 사라져 있었다. 참고로, <화제의 서재글>은 <좋아요>버튼 카운트 누적으로 상주 기간이 길어진다. 내 아래에 있던 글들이 <좋아요> 버튼이 더 적었던 걸 생각할 때 의도적으로 글을 내렸다는 소리가 되겠는데, 내 짐작엔 이웃의 대한 내 생각이 북플에 악영향을 줄까봐 그런 거였으리라 짐작한다. 설마 독서난봉꾼이란 댓글 단어를 보고 공공성 저해 글이라고 생각한 건 아녔을테니까. 여기서 중요한 사실을 발견했는데, 알라딘은 <화제의 서재글>을 충분히 컨트롤할 수 있고 그렇게 하고 있었다는 소리가 되겠지. 지난번 북플 이용에 대한 내 건의들이 얼마나 바보스러웠던 건지 깨달았다. 별다른 내용이 없어도 신간에 대한 글이거나, 알라딘이 손대기 어려운 파워블로거 수준이라면, 누구든지 글을 두 세개씩 올릴 수 있다. 알라딘 시스템에 저해되는 글만 아니라면.
민주주의? 알라딘도 별 수 없군

cyrus 2015-04-09 10:22   좋아요 1 | URL
아갈마님의 글이 의도적으로 사라진 것이 아니라 아갈마님이 작성한 이 글 다음에 업로드된 글이 `화제의 서재글`이 되어서 사라진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좀 더 자세히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아갈마님의 글은 어제 17시 12분에 작성되었어요. 좋아요 수가 5개 이상이니까 화제의 서재글에 떴어요. 17시 12분 이후에 작성된 다른 서재글이 화제의 서재글에 뜨면 아갈마님의 글이 사라지게 되죠. 사라진다기보다는 밀린다고 이해하면 됩니다. 열심히 공들여서 쓴 글이 화제의 서재글에 노출되는 시간은 비교적 짧은 편이에요.

저는 가끔 글에 `책성애자`라는 표현을 쓰는데 공공성에 저해되는 의미도 아니고 알라딘 측에서도 제재를 받은 적도 없어요. 제 블로그 이름도 `책성애자`입니다. 독서난봉꾼, 참으로 재미있고 괜찮은 조어입니다. ^^

AgalmA 2015-04-09 10:35   좋아요 0 | URL
오, cyrus님 이렇게 신속한 답변을! 그렇담 제 글이 알라딘 비방이 될지도 모르겠군요.
반성하는 의미면서 사람들이 <화제의 서재글> 시스템을 아는데 도움이 되라고, 댓글 안 지우고 저만 그냥 멍충이로 남는 걸로 할께요ㅎㅎ
감사합니다. cyrus님 ˝알라딘의 위기탈출 넘버원˝ 이었어! 이 조어는 창의적이진 않지만 답례로 붙여 드립니다 :)

cyrus 2015-04-09 10:38   좋아요 1 | URL
북플 기능이 없었다라면 이런 신속한 답변이 불가능했을 겁니다. 저도 알라딘 서재를 처음 시작할 때만해도 알라딘 메커니즘을 몰랐어요. ㅎㅎㅎ

AgalmA 2015-04-09 11:05   좋아요 1 | URL
말씀하신 기능이 제가 끌까, 말까 매일 고민하는 기능입니다. 신속한 소통이면서 자칫 신속한 배틀이 될 수도 있으며, 상대가 그런 걸 알고 있을 시(부재중 표시를 할 수도 없으니;) 신속한 답글을 주지 않는다는 건 어떤 면에선 무시당한단 생각을 줄 수도 있어서 원글 작성자는 답글에 대한 의무감을 계속 신경써야되는....그야말로 취미가 노동이 되는 상황이 발생. 요즘 그 피로함을 느끼는 북플러가 많아졌단 생각도 하고요. 이걸 빨리 캐치한 사람은, 말을 줄이고 좋아요 기능의 활성화로 가는 것 같기도 한데, 소통은 다시 미묘한 원점...
암튼 그렇다고요. 바쁘신데 이에 대한 댓글 안 주셔도 됩니다^^
(북플보다 나라 걱정을 더 해라, Agalma야)

만병통치약 2015-04-09 14:58   좋아요 1 | URL
알라딘 화제의 서재글과 YES의 ˝많이 본글˝은 장단점이 있네요. 북플은 금방 사라지고 YES는 너무 오래 버텨요.

만병통치약 2015-04-09 14: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블로그만 글만 보면 ( 비슷한 성향의 블로거들만 만나서 그런지) 이 나라가 이럴리가 없어요!!!

AgalmA 2015-04-10 15:03   좋아요 0 | URL
이 나라 뿐만이 아니라 세상 전체가 저는 점점 요지경 같아요; 제가 알든 모르든 언제나 그랬지만.

네오 2015-04-10 05: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본론 공부는 잘 돼요?

AgalmA 2015-04-10 15:02   좋아요 0 | URL
바깥 세상보다 제 독서 세상이 사실 더 복잡다단해서 죽겠어요^^; 김수행, 깅신준씨 책으로 자본론 돌입도 다시 발동 걸어야 할 듯
 
시, 영화, 이미지 - 시의 주제를 넘어 민예총문고 9
함종호 지음 / 로크미디어 / 2008년 7월
평점 :
품절


제1장 시는 회화적인가 - 시 이미지의 동적 구조

 

시어가 가지고 있는 그 자체의 의미보다 그것이 다른 시어와 어떻게 관계를 맺고 있는가에 의해 시적 의미가 구현된다는 점은 우리에게 시를 어떻게 읽고,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시는 명사보다는 동사나 형용사를 중심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p17)

 

시를 명사 중심으로 이해하는 것이 고정된 의미를 확인하는 방식에 가까운 것이라면, 시를 동사나 형용사를 중심으로 이해하는 것은 시어의 의미가 특정한 것으로 고정되기 이전의 이미지의 발생과 그 전개 과정을 이해하는 방식에 더 가까운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p17~18)

 

시에서 이미지(혹은 이미지를 통해 구현되는 정서 상태)가 특정한 것으로 고정되지 않고 다양하게 변주된다면, 그것은 이미지의 본질이 그러하기도 하겠지만 이미지를 담아내고 있는 시의 구조가 그러한 성질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다. (p19)

 

1. 재현의 위반 - 시 이미지의 발생 차원

시의 기능이 주로 정서 전달에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시의 이미지가 객관세계를 감각적으로 재현해 내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과 관련이 깊다. (p19)

 

서정주 「국화 옆에서」경우 '꽃'과 '누님'의 동일시와 이를 통해 발생하는 이미지는 이들의 형태적 유사성과는 상관없이 오히려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이라는 시구가 암시하는 어떤 느낌으로 서로 연결된다. …… 이들은 각각이 지닌 외형적인 형태의 유사성보다는 오히려 각각의 시어가 내포하는 속성의 유사 관계가 더욱 중요하게 작용한다는 점이다. 또한 이들 속성의 유사 관계는 반드시 그 유사 관계가 성립할 수 있도록 다른 시어가 그 연결 고리를 제공해야 한다.

…… 이미지의 발생에 있어서 외형적 형태보다 내재적 속성이 더 중요하게 작용한다는 점은, 이미지는 실재 세계를 재현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실재 세계를 기초로 하여 허상의 세계, 상상의 세계를 구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p19~22)

 

에코의 '거짓말 이론'에 의하면, 기호는 수많은 기의의 '미끄러짐'을 내재하고 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진실하게 세계를 표상할 수 없다. …… 이미지는 대상을 재현하고 구체적인 감각을 동원하며 진실에 가깝게 묘사하는 것이지만, 이차적으로는 비재현적이며, 무규정적이고, 무한한 변화와 변형을 낳는 … 상징적 상상력의 산물. (p22)

 

"한마디 한마디의 말은 각각 한 개의 객관적 사물을 대표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러한 사물에 대하여 있는 것이다. …(중략)…말을 소재로 써야 하는 시는 결국은 그러한 말들이 대표하는 사물의 세계(자연=객관세계)와 어떠한 모양으로든지 관계하지 않을 수가 없다" 「객관세계에 대한 시의 관계」, 『김기림 전집 2』,심설당, 1988, 117쪽 (p23)

  

▣ (Agalma) 이 부분은 매우 중요하다. 김기림의 발언은 모더니즘에서 중요한 작가 플로베르 '일물일어설'과 똑같지 않은가! 한국 모더니즘 시의 기원으로 인정되는, 김기림이 "이미지의 발생을 객관세계와의 닮음을 전제로 한 재현의 원리로 이해한 태도"는 이미지의 규정할 수 없는 차원의 움직임을 간과했고, 이후 평단에 (의도치 않게) 나쁜 영향을 끼쳤다. 비평가들은 1940년대 한국 시문학사의 중요한 위치 '청록파' 시들의 이미지들을 '유사성과 동일성의 원리'로만 바라보았고, '자연성, 향토성, 서정성', '회화시'라고 규정하는 오류와 한계에 거리낌이 없었으며, 독자와 사회 또한 그대로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그리고 국어 시험을 쳤지.

오, 묘사의 악령들이여! 

들뢰즈가 파악한 언어의 '무한소급'성을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의 가치 평가는 늘 제자리걸음일 것이다.

도망친 詩들이 앨리스가 만드는 이상한 후추 공장으로 이미 보여지고 있듯이.▣

 

 

2. 시는 영화적이다.

일찍이 중국 송나라 때 소식은 왕유의 시와 그림을 일컬어 '시를 보면 시 속에 그림이 있고, 또 그림을 보면 그 속에 시가 있다'라고 하여 시와 회화의 상호 연관성을 주장한 바 있다. 이는 송·원 이후 동양 예술의 한 특징을 이루고 있는 '시화 일치론'으로 대표된다. 서양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어서 고대 그리스 시대에 시모니데스가 시와 회화의 상호 연관성을 주장한 이래 여러 시대를 거쳐 시와 회화 사이의 연관성에 대한 논의가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다. 심지어 시와 회화는 '자매 예술sister's art'(*마리오 프라즈, 『문학과 미술의 대화』, 임철규 역, 연세대출판부, 1986,3쪽)로 불릴 정도이다. 그러므로 문학에 있어서의 모더니즘이 다다, 쉬르, 미래파, 입체파 등의 일련의 미술 사조와 영향을 주고받으며 전개, 발전했다는 사실은 그리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p28~29) 

<시와 회화의 차별성- 시는 동적 구조, 회화는 정적 구조>

- 시는 회화보다 시·공간에 대한 묘사가 보다 더 자유롭다.

- 시는 단편적인 영상들이 조화 혹은 병치되는 과정을 통해 시간의 흐름과 공간 이동 등의 변화 양상을 묘사하기에 보다 용이하다.   

 

"화가의 영상은 하나의 전체적 영상이고,

카메라맨의 영상은 여러 개로 쪼개어져 있는 단편적 영상들로서,

이 단편적 영상들은 새로운 법칙에 의해 다시 조립된다."

ㅡ 발터 벤야민 『문예 이론』

 

 

제2장 시 이미지의 운동성

 

1. 이미지의 상호 작용 - 질적 변화

 

영화 형식에 내재된 운동, 혹은 지속의 특성은 영화의 이미지가 현실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에 잠재되어 있는 차이를 일깨워 현실을 다양하게 인식하고 이를 제시하려는 데에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 시의 이미지들이 맺고 있는 관계, 혹은 시 이미지의 전개 양상은 영화처럼 이들 단편적인 이미지의 조합을 통해 만들어지며, 시에서 이미지의 역동성, 운동성은 주로 시각 이미지의 지속과 병치를 통해 나타난다.(p52~53)

 

 

 

 

 

 

 

 

 

2. 이미지의 지속-시점 변화

일반적으로 회화 특히 풍경화에서는 풍경을 바라보는 화가의 시점과 이를 바라보는 감상자의 시점은 일치한다. 그러므로 회화에서는 대상과 이를 바라보는 주체(화가=감상자) 사이에 2차원적인 관계가 형성된다. 그러나 시점을 달리한 장면들이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영화에서는(이를테면 '쇼트-역 쇼트 shot-reverse shot'와 같은) 대상과 그것을 바라보는 등장인물들의 시점, 그리고 대상과 등장인물이 놓여 있는 공간 너머에서 이들을 바라보는 카메라의 시점(감상자의 시점-'잠재적 응시자'-이 되기도 하는) 등이 나타난다.(p62~63)

 

……영화에서 부분들의 결합 양상은 그 나름의 카메라 기법과 편집 기법에 의해 결정되는데, 바로 이 과정에서 자유로운 시점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p64)

 

……원근법은 객관세계를 사실에 가깝게 묘사하는 가장 효과적인 시각 틀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뤼미에르와 르누아르의 영화들에서 특히 주로 사용된 방식이다. (p71)

 

 

 

 

 

 

제3장 시 이미지의 시간성

1. 이미지의 현재성-공간의 지속과 시간의 교차

 

시간이란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볼 수 없는 시간을 볼 수 있는 것으로 대상화하려 한다면, 시간을 공간적 성질로 바꾸는 수밖에 없다. 시간의 '공간적 성질'이란 구체적으로 사물의 변화이자 곧 운동이다.

그런 점에서 실제로 움직이는 영상인 영화 공간에서는 시간적 성질이 참으로 농후하다고 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사물의 운동을 볼 때 시간성을 강하게 의식하기 때문이다.

사진 공간이란, …(중략)… 사물의 어떤 순간의 상태이다. 그러나 회화 공간에서는 그것이 어떠한 순간이었던가 하는 '상태'는 그다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회화 공간에 시간적 성질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사물의 운동을 그린 회화도 있고, 역사화歷史畵와 같이 역사적 시간을 현재화한 회화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작품일지라도 우리는 그곳에서 특히 현실 시간을 의식하는 법은 없다. 그것은 회화 공간에서는 시간적 성질이 내재화內在化되어 있기 때문이다.

 

ㅡ 시게모리 고엥 『사진예술론』, 홍순태 역, 해뜸, 1994, 90쪽

 

…… 종합적으로 판단하면, 영화는 어떤 순간의 상태를 연속적으로 보여 준다는 점에서 시간성을 가장 잘 표현하며, 이때 표현되는 시간성은 시간의 변화와 운동을 내재하는 '공간적 성질', 혹은 공간적 상태에 의해 구현된다는 것이다.(p84~85)

 

 

▣ (Agalma) 이 부분도 매우 중요한 점을 시사한다. 문학 침체의 내부 주요 원인을 제시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시간을 즐기는 존재이면서, 반복되는 시간을 원하지는 않는다. 즉 관객과 독자가 되면 대다수는, 내부에 골몰해 시간이 정체되어 있는 작품을 원하지 않는다. 오, 멋진 셰익스피어(셰익스피어 인기도 요즘은 그닥), 따분한 베케트! 하면서.

캐릭터, 아이디어, 잔재주(트릭) 만으로는 더이상 작품의 완성도를 확보할 수 없다. 긴 시간을 다루는 문학과 영화들이 점점 더 스토리에서 추리와 미스터리쪽으로 기우는 것은 이 때문이다. 시의 경쟁력이자 장점은, 빠른 시공간을 가지고 있다는 점과, 두통약 효과처럼 즉각적인 공감을 얻어낼 수 있다는 점이다. 요즘 그토록 자폐적인 시·소설을 공격하는 것은, 사회·문단이라는 외부 문제라기보다는 인간의 근원·보편에 기반한 내부 반감에 더 기인한 것이라고 나는 진단한다.▣

 

 

2. 이미지의 종합, 혹은 과거의 현재화

시각 이미지와 청각 이미지를 조합하여 과거의 것을 현재의 것으로 재현해 내는 것은 회화에서는 찾기 어렵다. 이는 영화적인 특징인 동시에 시의 특징이다. (p98)

 

 

 

 

 

 

3. 순수 시간의 구현

들뢰즈에 의하면,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라는 진행 방향에서가 아니라 하나의 종합 과정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다. 이에 관한 그의 주장을 직접 인용하면 이렇다. "시간은 오로지 어떤 근원적 종합 안에서만 구성된다. 순간들의 반복을 대상으로 하는 이 종합은 독립적이면서 계속 이어지는 순간들을 서로의 안으로 수축한다. 이런 종합을 통해 체험적 현재, 살아 있는 현재가 구성된다. 그리고 시간은 이런 현재 안에서 펼쳐진다. 과거와 미래도 모두 이런 현재에 속한다." 그리고 이때 나타나는 종합은 수동적인 것이다. 시간은 인간 주체 너머에 존재한다는 점에서 정신에 의해 능동적으로 종합될 수 없는 것이며, 오히려 그것은 인간 주체 정신 안에서 저절로 종합된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과거, 현재, 미래는 세 가지 수동적 종합의 형대로 구성된다. 그것은 각각 '기억의 형식', '습관의 형식', '시간의 텅 빈 형식' 등으로 나타난다.

'습관의 수동적 종합'은 순간들의 수축을 통해 시간을 현재로 구성하지만, 이렇게 구성된 현재는 늘 지나가 버린다는 점에서 역설적일 수밖에 없다. '기억의 수동적 종합'은 시간 안에서 순수 과거를 구성하고 '사라진 현재'와 '현행적 현재'를 비대칭적인 두 요소로 만들긴 하지만, 과거 시간은 네 가지 역설과 마주한다. 그것은 '현재는 현재인 동시에 과거가 아니고서는 결코 지나갈 수 없다'는 동시간성의 역설, '만일 각각의 과거가 자신이 한때 구가했던 현재와 동시간적이라면, 과거는 그것이 과거이기 위해 지금 거리를 둔 새로운 현재와 공존해야 한다'는 공존의 역설, '과거 일반의 순수 요소는 지나가는 현재에 선재한다'는 선재의 역설, '동시간성과 공존, 그리고 선재라는 세 가지 관점에서 순수 과거와 관계한다'는 순수 과거의 자기 자신과의 공존이라는 역설이 그것이다. …(중략)… 시간은 현재와 과거처럼 설명 불가능한 차이들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비재현적이고, 무규정적이며, 무한한 변화와 변형이 이루어질 수 있는 미래에 가까운 어떤 것이다. 결국 시간은 두 개의 범주를 갖는다. 하나는 운동을 참조해서 파악되는 간접적인 이미지로서의 시간이고, 다른 하나는 현존하지만 그렇다고 재현되지는 않는 직접적인 이미지로서의 고유한 순수 시간이다.(p99~101)

 

들뢰즈에 의하면 묘사는 '유기적 체제(운동적 체제)'와 '결정체적 체제(시간적 체제)'로 구분된다. '유기체적 체제'는 "대상의 독립성을 전제하는 묘사"를 지칭하며, 이에 반해 '결정체적 체제'는 "대상을 대체하고 창조함과 동시에 지우며, 이미 나타났던 것들을 반박하고 전치시키거나 혹은 변경시키는 또 다른 묘사들에 끊임없이 대체되는 묘사를 지칭한다. 이와 같은 들뢰즈의 논의를 참고한다면, 김춘수의 '서술적 이미지'는 운동-이미지로서의 '유기적 체제'에서 시간-이미지로서의 '결정체적 체제'로 나아가는 과정을 함축적으로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p106)

 

 

 

 

 

 

 

 

▣(Agalma) 여기서 나는 저자에게 이의를 제기하고 싶은데, 통일된 관념으로 이미지를 구축하고 싶어하지 않는 시적 자아의 관념과 서술(묘사)이 연속적으로 일어날 때, 피할 수 없이 통일(이미지, 관념)의 관점으로 모아진다는 것에 대해선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그 끝에는 또한 비평의 마굿간과 채찍질이 기다리고 있다.

관념을 벗어나려 한 김춘수의 시를 무의미 시로 평가하지만, 그 무의미 속에는 오히려 해석할 수 없는 의미가 넘쳐난다. 최종적 수신자가 없는 이미지-의미의 편지들, 詩 ▣

 

 

 

 

제4장 영화 기법 수용에 따른 시 이미지 전개 방식

 

시와 영화는 공통적으로 단편적인 영상들을 병치시키는 방법을 통해 구조화된다는 특징이 있다. (p113)

 

영화의 몽타주 기법은 문학과 시각 예술이 오래 전부터 사용해 온 사물(대상)의 배열 방법이었다. (p117)

 

 

이 책에서는 영화와 문학의 긴밀한 연관 관계에 대한 논의가 여러 곳에 걸쳐 제시되고 있다. 이와 관련된 단편적인 예를 한 가지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현대시와 영화의 실제적인 관련은 1910년에서 1920년 사이에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이미지즘이라는 시 운동에 영향을 미친 몇몇 발견과 쟁점들은 작지만 확실한 영향을 영화에 미쳤다. 이 중 하나가 페널로사의 뒤를 이어 파운드가 유행시킨 상형 문자에 대한 매료이다. 위대한 동양학자인 어니스트 페널로사는 한자가 회화적으로 문자를 구성한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어떤 개념이 표의문자라는 정교한 그림문자 형태로 표출되는 것이다. …(중략)… 단어의 기능을 이용하여 그림을 만들고, 전통적인 구문이 아니라 병치를 통해 단어를 연결시키는 기법을 전위 시와 영화가 동시에 발견하고 활용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단지 우연이 아니다. 예를 들어 '군중 속의 얼굴들의 환영/젖은 검은 가지에 달린 꽃잎'이라는 두 행으로 된 파운드의 시 <지하철 정거장에서>와, 군중들이 분노로 동요하기 시작하는 쇼트 다음에 바로 빙산이 와르르 무너지는 쇼트를 보여 주는 에이젠슈타인의 영화 시퀀스 사이에는 놀라운 유사성이 있다. …(중략)…(이것은) 단지 두 이미지가 연관이 있다는 것을 구체적 설명 없이 보여 주는 병치만이 있을 뿐이다."

ㅡ 로버트 리처드슨 『영화와 문학』, 이형식 역, 동문선, p64)

 

 

§

 

슬슬 졸리운데,,,,,,,,,, 詩고,  영화고, 시간이고 간에 … 언제나 결과는 잠(Zzzam)

Zzzam을 들으며 잠을 자야겠다.

 

 

 

 

 

 

§§

국내에서 시와 영화를 비교분석한 논문 스타일은 있어도 완성도있는 저서가 없다는 점에서, 이 책은 중요한 자료이긴 하다.

이 책의 의의와 열의에는 당연 박수를 보낸다. 다만 들뢰즈 이론에 너무 기대어 그 이상은 찾지 못한 분석이었지 않나 조금 아쉬웠다.

이 책은 아주 조그만 한데, 읽고 나면 읽을 책이 산더미처럼 늘어난다.

또 베르그손과 들뢰즈와 부딪혔어! 어딜 가나 피할 수가 없다네ㅎ;;;

 

 

 

 

ㅡ Agalma

 

 

 

 

 

 

 

 

 

 

 

 

 

 

 

 

 

 

 

 

 

 

 

 

 

 

 

 

 

 

 

 

 

 

 

 

바둑판에 놓인 하나의 돌은 다른 돌들과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그 존재 가치와 의미가 생긴다.…… `왕`은 왜 그 비좁은 사각의 테두리를 벗어날 수 없는지 하는 의문을 한 번도 가져 보지 못한 채 장기를 두었듯이, 우리의 교실에서도 시를 그 비좁은 사각의 테두리 밖에서 생각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가로막고……(서문 中)

들뢰즈에 의하면, 관념이란 동일성의 원리에 의해 재현된 `개념적 차이`에 불과하다. (p103)

이미지란 대상에 대한 통일된 전망을 두고 하는 말이라면 나에게는 이미지가 없다. 이 말은 나에게는 일정한 세계관이 없다는 것이 된다. …(중략)… 나에게 이미지가 없다고 할 때, 나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한 행行이나 또는 두 개나 세 개의 행이 어울려 하나의 이미지를 만들어 가려는 기세를 보이게 되면, 나는 그것을 사정없이 처단하고 전연 다른 활로를 제시한다. 이미지가 되어 가려는 과정에서 하나는 또 하나의 과정에서 처단되지만 그것 또한 제3의 그것에 의하여 처단된다. 미완성 이미지들이 서로 이미지가 되고 싶어 피비린내 나는 칼싸움을 하는 것이지만, 살아남아 끝내 자기를 완성시키는 일이 없다. 이것이 나의 수사修辭요 나의 기교라면 기교겠지만 그 뿌리는 나의 자아에 있고 나의 의식에 있다. …(중략)… 한 행이나 두 행이 어울려 이미지로 응고하려는 순간, 하나의 장면으로 처단하기도 한다. 『김춘수 시론 전집 Ⅰ』(현대문학, 2004, p537~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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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07 14: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4-07 17: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ECM! 전시도 당연히 갔고요^^

전시장 갔다가 한 해 음반 살 돈을 다 써버린 기억이 나네요...아하하하하;;;

팻 메시니, 아르보 패르트, 스테판 미쿠스, 얀 가바렉, 랄프 타우너, 게리 버튼, 존 서먼, 토드 구스타브센, 요한 요한슨, 키스 자렛~ 이루 다 말할 수 없이 좋은 뮤지션들의 ECM 음반들!! 너무 유럽 중심이 아니냐 지적할 수도 있지만, ECM레이블이 추구하는 개성과 가치를 존중합니다!

뮤지션들만 있는 게 아니죠. 테오 앙겔로풀로스 [안개 속의 풍경] OST도 ECM에서 나왔잖아요~ 능력만 된다면 ECM 앨범 몽땅 다 사고 싶어요ㅜㅜ!!!

그런 의미에서 ECM 마니아 류진현씨의 음악여정 들어보고 싶습니다.

너무 알려진 ECM 간판 스타들 얘기말고(ECM 자체도 그리 대중적으로 알려진 것도 아니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뮤지션 소개이길 희망도 해 봅니다.

* 1강 1명 신청합니다/

 

http://www.aladin.co.kr/events/wevent_book.aspx?pn=20150327_inmunstudy84&start=pbanner 

 

 

 

2013  ECM 전시 (인사동 아라아트센타, 2013. 08.31 ~ 11.24)

"아이디어가 없으면 특별한 소리, 음악도 없다"

 ㅡ 만프레드 아이허

 

 ※ 스크린 속 노인이 1969년 뮌헨에서 ECM(Edition of Contemporary Music)을 창립한 만프레드 아이허(Manfred Eicher)

 

 ECM에서 발매한 음반들이 연도 별로 벽에 저렇게 주루룩 있던 모습, 정말 감동적이었습니다.

여기가 우리집이었으면 좋겠다 얼마나 간절했던지!

 

 

 


 

 

§

토드 구스타브센 얘기하니 작년 자라섬 재즈 페스티벌 생각난다ㅜㅜ

올해도 꼭 가야지!

 

 

 

 

 

 

 

 

 

 

 

 

 

 

 

 

 

 

 

 

 

 

 

 

 

 

 

 

 

Tord Gustavsen Quartet (www.tordgustavsen.com)

 

 

마음의 안정을 가져다주는 북유럽의 피아노 선율

 

 

1970년 노르웨이의 오슬로에서 태어난 피아니스트 토드 구스타브센은 2003년에 트리오 구성으로 발표한 자신의 첫 리더작 <Changing Places>를 시작으로 <The Ground>(2005)와 <Being There>(2007)까지 소위 트리오 3부작으로 불리는 일련의 앨범들이 연이어 좋은 반응을 보이면서 노르웨이를 비롯한 유럽 재즈계에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되었다. 토드 구스타브센이 거둔 성공은 대부분의 유럽 재즈 피아니스트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뚜렷한 작가주의적 개성 때문이라기보다는 북유럽적인 정서가 깊이 밴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멜로디를 통해 듣는 이에게 심리적인 안정감을 안겨주는 그의 음악 스타일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실제로 그가 트리오 활동을 시작하기 전부터 참여했던 시리 야르(Siri Gjære)와의 듀엣 프로젝트 Aire & Angels나 실예 네르고드(Silje Nergaard) 의 앨범과 같이 여성 보컬리스트들의 감성적인 목소리에 중점을 둔 연주 스타일에서 이미 나타나고 있었다.

이러한 보편적인 아름다움을 세련된 멜로디로 표현한 토드 구스타브센 트리오는 2009년 토드 구스타브센 앙상블이라는 이름으로 발표한 앨범 <Restored, Returned>로 변화된 모습을 보여준다. 기존의 트리오에서 베이스를 맡았던 하랄 요흔센(Harald Johnsen) 대신에 마츠 아일러첸이 들어오고 색소폰 연주자 토르 브룬보르그가 참여함으로써 퀄텟의 구성을 갖추게 된 것이다. 이 퀄텟 구성은 보컬리스트 크리스틴 에스뵈욘센(Kristin Asbjørnsen)과 함께한 토드 구스타브센 앙상블 이후에도 유지되어 <The Well>(2012), <Extended Circle>(2014) 두 장의 앨범을 통해 미디엄 템포의 리듬감, 더욱 진중한 멜로디 진행과 넓어진 표현력으로 한층 성숙한 음악을 선보이고 있다.

 

-Written by 전승훈(자라섬재즈페스티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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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athias Eick Quintet(마티아스 아익 퀸텟)의 트럼펫터 Mathias Eick이 모델

 

 

 

 Mathias Eick Quintet (www.mathiaseick.no)

 

 

시대와 장르를 관통하는 트럼펫
노르웨이의 젊은 거장

 

노르웨이는 물론 재즈 씬의 차세대 리더로 떠오르고 있는 트럼페터 마티아스 아익이 자신의 밴드와 함께 자라섬국제재즈페스티벌을 찾아왔다. 그는 한국 재즈팬들에게는 친숙한 연주자이기도 하다. 2007년 기타리스트 야콥 영(Jacob Young)과 함께 자라섬에 내한해 인상적인 무대를 선보였으며 2008년 발표된 보컬리스트 나윤선의 6집 <Voyage>에서도 그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2009년에는 나윤선과 듀오로 국내 7개 도시 투어를 펼쳤는데 당시 트럼펫 연주 외에도 더블베이스, 비브라폰, 피아노, 기타 등을 자유자재로 다루며 뛰어난 음악성을 선보이기도 했다.

지난 10년 간 노르웨이에서 가장 유망한 젊은 연주자로 손꼽히는 아익은 2007년 전 세계 16개의 주요한 재즈 페스티벌 연합체인 국제재즈축제협회(IJFO)의 뉴 탤런트로 지목되었고 2009년에는 노르웨이에서 가장 큰 장학금인 스타토일 스콜라십에 선정되었다. 2000년대 초반부터 세계적인 재즈 레이블 ECM에서 피아니스트 이로 할라(Iro Haarla), 드러머 욘 크리스텐센(Jon Christensen), 색소포니스트 트리그베 자임(Trygve Seim), 드러머 마누 카체(Manu Katche) 등 거장들과 함께 하며 실력을 인정받았으며 2008년에는 ECM에서 첫 리더작 <The Door>를, 2011년에는 두 번째 리더작 <Skala>를 발표했다. 특히 <Skala>은 라디오헤드(Radiohead), 스팅(Sting), 조니 미첼(Joni Mitchell) 등 팝과 록에서 받은 영향을 자신만의 현대적이고 새로운 사운드로 선보여 호평을 받았다.

이번 무대는 <Skala>의 멤버들과 함께 한다. 피아니스트 안드레아스 울보, 일렉 베이시스트 아우든 얼린, 드러머 고르 닐센 과 톨스테인 로프트후스는 모두 노르웨이 출신의 젊은 연주자들로(특히 울보와 닐센은 1983년 생), 일렉트로닉에서부터 서정적인 연주까지 경계 없는 음악을 만날 수 있다. 그 가운데서도 두 대의 드럼을 주축으로 하는 탄탄한 리듬 섹션과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명료한 트럼펫 선율은 재즈의 깊은 매력을 전해줄 것이다.

 

-Written by 안민용(자라섬재즈페스티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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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D-10
    from 공 음 미 문 2015-10-01 02:21 
    위 사진은 2012년도 자라섬 재즈 페스티벌 갔을 때 풍경입니다.올해는 과연 어떤 풍경일지?일단 오늘은 밤새워 음악 예습을~NIK BÄRTSCH'S RONIN(닉 베르취's 로닌)www.nikbaertsch.com2015. 10. 9 (FRI) 18:50 ~ 19:40http://www.jarasumjazz.com/the12th/program/artist/nik_bartschs_roninZen(禪)-Funk라니! 철학과 언어학과 음악학을 공부하면 이런
 
 
만병통치약 2015-04-05 15: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모짜르트, 비틀즈, 조용필, 엑소 말고도 음악가가 많군요 ^^;;;; 항상 난생 처음 듣는 이름들이지만 덕분에 좋은 음악 잘 듣고 있습니다.

AgalmA 2015-04-05 16:33   좋아요 0 | URL
엑소 음악까지도 듣긴 들으신 겁니까ㅎ 전 엑소 이름만 알아요; 요즘 k-pop 시장으로는 두문불출이라.

만병통치약 2015-04-05 15:17   좋아요 0 | URL
설마요 이름만 압니다. 최근에 성에 대한 책을 몇 권 살펴 보다 중고등 여학생들이 즐겨 본다는 BL소설 읽으면서 이름이 익숙해졌습니다. 찬열이 백현이 종대 ㅋㅋㅋ (뭔가 성격에 문제가 있는지 아무것도 안하고 음악만 듣지를 못해요. 아무것도 안하는게 아닌데 눈에 뭔가 안 보이면 견디지를 못하네요. 음악이 점점 멀어져요)

AgalmA 2015-04-05 15:19   좋아요 0 | URL
이름도 꿰시고ㅋㅋㅋ
전 음악없이 책만 읽으면 외롭던데...물론 집중해야 할 책은 음악을 꺼두는데, 책 읽으며 내내 귀가 외로워, 귀가 외로워 타령ㅎ

비로그인 2015-04-05 2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CM label 음악을 조금 좋아했었지요. Jan Garbarek의 Officium을 좋아했었고요.
바흐를 좋아하는데 Keith Jarrett의 바흐 평균율 연주는 듣지 못했고요.
침묵 다음으로 아름다운 음악이라는 모토 때문에 평소 사려던 `소리 없는 음악`을
사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참 지난 번 (꼭 추천 때문에 산 것은 아니지만)
`슈만, 내면의 풍경`은 문체가 참 싫어하는 스타일이어서 읽다 두었습니다.
언젠가 읽게 될 때가 오리라 생각합니다.
딱딱한 문체의 음악 책 하나 추천해 주시기 바랍니다.

AgalmA 2015-04-06 01:34   좋아요 0 | URL
[소리없는 음악]은 나온 지가 20년이 넘었는데, 아직도 판매 중인 것에 놀랐습니다@@
Officium 좋죠! 저도 얀 가바렉 Officium로 처음 듣고 깜짝 놀라서 바로 빠져들었죠^^
키스 자렛은 퀠른 콘서트<Koln Concert>(1975, 6장짜리 솔로 음반)를 사람들이 제일 손꼽는 음반인 듯. 다음해 나온 <Sunbear Concert>(1976, 일본콘서트, 마찬가지 6장짜리 솔로음반)도 좋더군요.
`침묵 다음으로 아름다운 소리`는 ˝키스 쟈렛의 [Facing You]앨범에 대해 앨런 옵스틴이라는 기자가 쓴 리뷰˝에서 만프레드가 감명을 받고 ECM 레이블의 모토로 삼았다고 하더군요. 키스 자렛이 ECM의 명실상부한 간판스타기도 하니 잘 어울리기도 하고요.
[슈만 내면의 풍경] 저 때문에 사신 줄 알고 순간 움찔;;(리뷰는 역시 조심히 써야 한다는...)
흔적님이 그렇게 물으시니 단번에 생각난 책이 테오도르 W. 아도르노 [베토벤 음악의 철학- 단편들과 텍스트] 책인데요? 베토벤과 헤겔변증법을 연결시키려는 야심찬 아도르노. 비싸서 아직 저도 못 사봤는데요. 오프라인에서 한번 훑어보시고 결정하시길.

비로그인 2015-04-06 06:45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자세하게 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붉은돼지 2015-04-06 1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음악에는 거의 깡통이라.... 클래식,재즈,락은 물론 심지어 가요까지 별 관심이 없어서요..
아갈마님의 음악관련 글을 읽으면 가슴을 치며 한탄합니다.....왜 진작에 음악에 좀 관심을 가지고 좀 듣고 하지 않았나... 흑흑흑

그래서 요즘은 제가 나이도 좀 있고 하니까 클래식을 들어볼려고 책도 몇 권 사놓고 cd도 사놓고 해 보는데 기본적으로 취향이 없으니 의지로만으로는 잘 안되네요..ㅋㅋㅋㅋㅋ

AgalmA 2015-04-06 12:40   좋아요 0 | URL
저랑 비슷하신데요? 왜 나는 음악 작곡이나 악기공부 같은 걸 하지 않았나 땅을 치며 매일...
의외로 음악에 관심있는 사람이 별로 없더군요. 제 친구들도 다 그래서 음악회 같은 데 혼자 가는 것도 익숙해졌습니다^^;
음악도 영어공부처럼 억지로 해서는 힘들죠. 그냥 그 속에서 부딪히고 말하고 찾아다니는 등 계속 같이 살아나가는 그런 게 아닐까 한다는^^a
 
지하로부터의 수기 열린책들 세계문학 121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계동준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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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사람은 자신만의 비법서로 감춰 놓기 위해 지금의 내 발언을 탐탁지 않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나는 도스토예프스키를 읽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을 첫 번째로 권하고 싶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철학과 문체가 가장 강렬하게 잘 보이는 책이기 때문이다. 제법 소설을 읽어 본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으며 도스토예프스키의 영향이 얼마나 많은 작가들에게 전파되었는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내 문체도 상당한 침식 작용이 들어와 있다. 이 책을 두고 심심찮게 내용이 어렵다고들 하는데-최소한 이 책은 번역문제는 아니다-그렇기에 더 읽어야 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당신은 내가 이 소설을 왜 읽고 있지?’ -> ‘나는 소설을 왜 읽는 것일까그간의 독서를 되돌아보게 될 것이며(안 하면 안 되는데;) 오기가 아니라 어떤 반성과 공부의 자세로 -> ‘도스토예프스키는 결국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하며 이 책을 끝까지 읽어나가게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포기하지 마요!).

이 말은 스포일 것도 같지만(입이 간지러워 말하겠다; 메롱), 다 읽고 나면 결국에’ 라는 없으며, 한 줄 한 줄처음부터모든 걸 말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이 소설가 도스토예프스키가 소설로써 말하는 문학론이며, 이 책 전체 내용인 인간론이다.

 

듣는 자가 원하지 않았던! 스포를 알려줬으니, 좀 아까워하며 쓸만한 정보도 전하겠다.

이 책의 첫 두 줄 …… 나는 자체적 <Agalma가 뽑은 Best 서문>에 넣었다. 이미 그런 시도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나는 왜 하려고 하지 않았나 모르겠다. 아니, 사실은 알고 있었다. 나는 소설을 쓸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고, 모방을 시작하면서부터는 기존의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강박에 휩싸여 일.부.러 그러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당신도 이미 알고 있는, 어떤 진실을 알기 때문이다. 내가 아무리 잊고 싶지 않아도 대부분! 향기조차 없이 사라진다는 것을. 그것은 인생의 불가항력이자 문학의 불가항력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지속적으로 인간이고, 문학은 계속된다.

■ 나는 병든 인간이다……. 나는 악한 인간이다. 나는 호감을 주지 못하는 인간이다. 생각건대, 간에 이상이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지하로부터의 수기』,  제1부 지하실, 첫

이 글을 읽은 당신은 어쩌면 이제부터 강박이 생길지도 모르겠다. 첫 문장에 대해서. 이미 그러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슬쩍 같이 웃으면 될 일이다. 앞에서는 그럴듯한 걸 거론해 대지만, 사실 우리는 알고 있지 않은가. 문학은 혁명의 깃발이 아니라, 그 이면에 감춰져 있는 부끄러움과 병적인 것에 대한, 인간 탐구이자 집착임을. 지금 이 말도 현상적으로 그렇다는 것이지 결론적으로 그렇다는 말은 아니다. 지하로부터의 수기』저 첫 문장처럼 작가는 혁명가가 아니라 오히려 그 시대를 가장 앓고 있는 병자이며, 그의 글은 유언에 더 가깝다. 죽은 작가에게서 독자인 우리가 느끼는 바로 그것, 말이다. (*작가-병자설 어떤 철학자(블랑쇼? 벤야민?)가 한 걸로 아는데, 기억이 안 난다-,-a)

나는 작가란 특권적인 직위에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미 그런 식으로 강요받았고 학습되어 있지만,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는 작가가 있다면 흠……. 그렇게 생각해도 속으로만 생각하면 다행이고(위선적이지만). 자신을 영리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도스토예프스키는 자신을 '쥐'로, 카프카는 '두더지'로, 로트레아몽은 너무 많아! …… 그렇게 말해왔다. 베르베르가 '개미'를 찾았듯이 당신도 당신의 벌레들과 짐승들을 찾게 되겠지. '고양이'를 선점한 나쓰메 소세끼에게 많은 이들이 분노할지도 모르겠다. 이럴 땐 동물도감과 곤충도감을 많이 본 사람이 유리한 걸까, 흠……. 아 참, 사물도 있었지. 천운영의 '바늘' 같은. 많네, 뭐. 걱정 없겠어.

모두가 작가가 될 수 있다. 그리고 모두가 그랬으면 한다. 어째서 내가 인간인가를, 어째서 너도 인간인가를 알 수 있는, 제법 괜찮은 길이라고 생각한다(돈은 없고 책만 잔뜩 있는 형국에도 불구하고;). 그 이상은 글쎄, 시간이 되려나 모르겠다. 물론 과학자보다는 작가가 더 쉬워 보여서 선택하는 사람도 있겠지만ㅎ 도스토예프스키는 이성과 과학을 믿지 않았다. 그것을 행하고 거기서 결론을 도출하는 자가 다름 아닌 인간이기 때문에. 도스토예프스키의 입장에 반대하고 그것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도스토예프스키보다 훨씬 고달파야 할 것이다. 이론의 집착에서 자유로울 수 있기를. 결론에서 끊임없이 달아나기를. 건투를 빈다.   

 

 

 

 

§§

창밖에 벚꽃이 활짝 피어 있었고, 내가 널어놓은 단 하나의 빨래는 비를 맞고 있었다.

나는 이쯤에서 그만 말해야겠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언제가 끝인지 모르는 미완의 끝이다. 언제나처럼.

 

ㅡAgalma

 

 

 

 

 

 

 

그리고)

 

빵이 다 탔다. 글 쓸 때는 뭔가 알아낸 것처럼 말하지만, 꼴 좋다~

여러분~~~~이런 Agalma를 믿으면 안되는 겁니다!

제 빵 간수도 잘 못하는 녀석. 어휴.

 

 

 

 

 

 

 

 

하나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보다 더 근본적인 원인을 끌어내게 마련이다. 이것이 모든 의식과 사고의 정확한 본질이다.

인간은 항상 어디에서나, 그가 누구이든 간에, 절대적으로 이성과 그의 이익이 지시하는 대로가 아니라,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하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 제멋대로 할 수 있는 자유로운 욕구, 가장 거친 것이라 할지라도 당신 자신의 변덕, 때때로 심지어는 광기에 달하는 당신의 몽상, 바로 이것이야말로 모든 이들이 간과하고 있는 어떤 범주에도 속하지 않는 이익 중의 이익이며 이것 때문에 모든 체계들과 이론들은 끊임없이 와해되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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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5-04-04 21: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지금 작가란 무엇인가를 읽고 있는데 말이죠.작가란 그렇고 그런 존재들이더라구요. 로쟈는 책소개에서 멋진 글발을 자랑하며 신을 언급했는데, 전 구루라 추앙받는 그녀가 개인적으로 젤 멋졌다죠~^^

AgalmA 2015-04-04 22:17   좋아요 0 | URL
일부(라고 굳이 언급하며) 작가들, 시인들 기타 등등 보통 사람들보다 더 소갈머리, 인정머리 없는 거 잘 알죠ㅎ
작가란 무엇인가 읽어보고 싶긴 한데, 남들 다 읽고 판 다 털렸을 때 한 번 읽어보려고요. 읽을 책은 언제나 무궁무진;;
 

 

 

 

 

 

 

 

 

 

 

 

 

 

 

(※좀 따져 묻는 말투지만 이것은 고진에게 따지는 말투임;)

 

 

§  [흔적님 서재] 가라타니 고진 『근대 문학의 종언』에 대한 글 관련 단상

고진의 입장은 사르트르의 참여문학과도 비슷한 듯 보입니다. 두 사람 다 사회성을 너무 강조했달까요.

소세키의 '문학에 대한 사회적 요구'에 대한 발언은 김현 평론가의 '문학의 무용성으로서의 힘과 역할' 입장과 반대 입장이네요.
"근대"라는 접두어가 붙은 문학의 종언은 틀린 말은 아니지요. 근대 문학의 시대는 사라졌죠. 그런 성질(계몽성, 사실주의 기타 등등)은 남아 있을지라도. 그러한 근대 문학의 고발성을 성격으로서 가진 채, 현대문학은 '개인(주체)'에 대한 탐구로 나아가게 되었고, 다른 꽃을 피워 나갔죠.

지금 인쇄매체 신문도 사라져 가고 있지만, 그 외 소통 창구의 다양화가 왜 문학의 종말론으로 선고받아야 하나요. 인쇄로 인해 책과 문학의 활성화가 있었으나 그런 시스템이 없었던 그 이전에는 위대한 문학이 없었느냐 아니잖습니까. 도덕성을 강조하지 않은 문학들이 무용했느냐 아니잖습니까. 즉, 문학에게 사회성의 '요구'는 할 수 있지만 '강요'하고 '단죄' 할 수는 없는 겁니다. 사회성을 요구할 때 우리는 그 사회성에 갇히는 겁니다. 요구하면 요구할수록 문학의 본질들을 밀어내는 척력이 될 겁니다.

여기서 짚어봐야 할 점은, 일본과 그리 입장이 다르지 않은 한국은? 일본의 장르소설이 요즘 왜 이렇게 인기인가, 시사하는 바가 있지 않습니까. 하여간 들여다 볼수록 문제는 복잡해지기 시작하죠.

 

여하간 저는 고진의 발언이, 굉장히 (일본 가부장적 권위의식이 짙게 배인) 엘리트주의적인 선언이며, 시스템과 형태가 본질을 좌우한다는 발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입장은, 문학이 법을 만드는 데 기여는 할 수 있지만 그 자체가 법이 되어서도, 무사나 시녀가 되어서도 안된다는 생각입니다. 일본의 개인화 문화처럼, 일본의 사소설, 장르소설의 활성화는 그러한 과도한 요구의 반대급부로 파생된 건 아닌가 문득 그런 생각도 드네요.

고진이 어떤 철학적 기반으로 문학을 상정했는지 추적하진 못한 채 이러한 발언을 하는 것은 우려스럽지만, 이 포스트에서 거론된 것을 놓고 말씀드리면 고진은 '문학'과 '문학성(질)'에 대한 걸 너무 하나로 뭉텅 그려 일반화 한 거 아닌가 싶습니다. 밥이 없으니 밥그릇이 아니라는 논리.

 

맨 앞에 고진에 반기를 든 문학평론가의 발언을 너무 짧게 가져오셔서 논의하기 좀 그런데요. 그 문장의 맥락상으로는 문학에 대한 막연한 "믿음"이 좀 걸립니다. 그분이 '무엇이', '어떻게'에 대한 확실한 근거나 단초를 제시하셨나요?

 

제 요지는,
겉으로 드러난 "문학부", "사회성"의 쇠퇴 같은 외부적 탐지가 '문학성(질)'까지 착복해 문학 전체를 평할 수는 없다는 겁니다.
발표 당시에는 몇몇에게만 알려진 '카프카'가 왜 지금 이렇게 신화가 되었는가.
거기서 우린 문학의 힘을 볼 수 있었고, 그렇기에 문학은 예측하기 힘든 최종적 발화점일 겁니다. 불길이 나타나기 전에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죠. 불이 지금 안 난다고 해서 불 자체가 없는 게 아니듯.
그렇기에 마지막까지 단 하나라도 문학이 남는다면, 그 힘은 결코 사라질 수 없는 것일 겁니다. 인류가 모두 사라지지 않는 한.

 


 

*

무거운 주제인데, 이러다 논문 쓰겠어서 갈무리...

이 생각은 지금의 제 단상으로 여기 둡니다.

가라타니 고진 『근대 문학의 종언』을 진지하게 읽은 뒤 반드시 재고하겠습니다.

아아, 갈 길이 태산....

 

 

 

ㅡAgalma

※ 댓글이 너무 길어져서 내 서재에서 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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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03 17: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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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03 17: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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