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목사님? - 아무도 몰랐던, 목사님 바꾸기 비밀 프로젝트
여성훈 지음 / 넥서스CROSS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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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에 나쁜(?) 사람들이 많듯이, 아마도 세상에는 나쁜(?!) 목사님들도 있을 것입니다.-이리 쓰면 불경스런 고백이 될지 모르지만, 그래도 그것이 사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이렇게 제목을 '나쁜 목사님(?)'이라고 대놓고 달려드는 책을 보니, 좋은 의미로 제목을 붙였더라도 저자가 얼마나 돌팔매를 당할까? 하는 염려가 먼저 생깁니다. 내게는 흥미로운 제목이었지만, 아무래도 평상시 느끼던 교회의 경건함이나 격식을 차리는 모양새와는 다른 투의 제목 붙이기니.....

 "따끔하지만 따뜻한 마음을 담은 책".....  "현대 교회의 중요한 문제를 짚어주는 책"..... '나쁜 목사님'을 이야기하는 이 책에 추천사를 쓰신 유명하신 목사님과 신학대 총장님의 글제목입니다. 책의 서술형식이 서로 이야기를 하듯이, 가릴 것은 가리고 꾸밀 것은 꾸미는 가식을 버리고 툭 터놓고 서로 이야기 하듯이 전개되는 모양새가 듣는 이로 가슴이 시원하게, 십년 묵은 뭐가 내려간다고, 교회안에서 때때로 느꼈을 답답함을 확 뚫리게 만드는 매력이 있는 이 책을 두분께서는 이리 칭찬하고 있습니다. 덩치는 커졌지만 위기라고 진단받는 현대 우리의 교회에 대해서 따끔하지만 따뜻한 마음을 담아 던지는 이야기, 우리에게 있는 중요한 문제와 해법을 하나하나 짚어주는 책이라는 칭찬은,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신앙인으로서 우리에게 사랑과 관용의 정신이 얼마나 메말라 있었는지에 대한 따끔한 지적과 그러한 냉랭함에서 벗어나 예수님의 마음을 회복할 수 있는 지혜를 가르쳐주는 이 책의 내용과 저자의 통찰력,그리고 그러한 이야기를 딱딱하지 않게 풀어내는 글솜씨에 대한 솔직한 표현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여기저기 귀기울다보면 현대 한국 교회의 위기를 말하는 글과 주장들이 넘쳐나는 듯 합니다. 비단 신앙인들만이 아니라 교회 밖의 사람들도 교회를 향해, 신앙인들을 향해 돌팔매를 서슴치 않는 시대이기도 합니다. 초기 교회가 소수로서의 핍박당함이었다면, 지금의 외부 압박은 많은 기득권을 지닌 교회에 대해 겸손하기를, 자신보다는 주변을 돌아보며 몸을 낮출 것을 요구하는 목소리라고 해야할 것입니다. 넘치는 글과 비난만큼이나 많은 이런 저런 해법과 지적, 그리고 분열과 정죄의 모습들이 보이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의 결말은 대부분 그리 아름답지 못하게 마무리가 되는 듯 해 보이고, 결국 위기를 말하며 더 큰 갈등의 불씨만을 만들어 놓곤 하는 것을 보기도 합니다. 아마도 그러한 갈등과 분열의 모습은 교회의 문제만이 아니라, 현재 우리 사회 내부의 전반적인 모습이기도 합니다. 이 책은 그러한 커다란 문제를 교회의 목사님과 교인들간의 관계로 좁혀서 이야기하는 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목사님을 목사님답지 못하다고 정죄하거나 비난하는 교인들, 목사님의 인간적인 부족함을 이해하지 못하고 기어이 들춰내서 목사님의 기를 꺽어버리는 교인들, 율법의 잣대로 목사님의 행동을 일일이 체크하며 등 뒤에서 불평하는 교인들 등등.... 에게 저자는 툭 터놓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목사님도 사람이라서 실수할 때도, 화를 낼 때도, 게으름을 피우고 싶을 때도, 숨고 싶으실 때도.... 있는 법이라고, 그러니 있는 그대로 인정해 드리고,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리 될 수 있도록 기도하며, 좋은 목사님으로 만들어 가는 법을 배워보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그 방법이란.....  저자가 말하는 여러 유형의 나쁜 목사님의 카테고리에서 우리들의 목사님을 빼내 좋은 목사님으로 변신시키기 위한 방법이란 결국 성경에서 말하는, 그리고 예수님의 삶이 말하는 사랑과 관용..... 결론은 바로 거기에 이르는 듯 합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 우리 목사님을 다른 목사님'과' 바꿔주세요!"가 아닌 "하나님, 우리 목사님을 다른 목사님'으로' 바꿔주세요!"라고 할 수 있는 마음을 지니고, "하나님, 우리 목사님을 다른 목사님'으로' 바꿔주세요!"라고 기도할 때 조용히 뒷방으로 불러 "너희 목사님을 자꾸 바꾸려 하지 말고 너를 후딱 바꾸거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을 만한 귀를 지닌 성도가 되어야 한다는 결론적인 저자의 말속에, 우리의 교회와 한국 교회, 그리고 우리 사회가 품고 있는 위기와 갈등과 분열을 이겨내고 성숙할 수 있는 비밀이 숨어 있다고 하더라도 너무 과장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현학적인 지식과 현란한 혀가 아니라 죄인이라 불리던 세리를 비롯한 사람들과 음식을 나누며 정죄당하는 그들을 옹호하시던 예수님의 마음,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데려온 이들을 '죄 없는 이가 먼저 돌로 치라!'는 한 마디로 물리치시고 여인을 용서하셨던 마음, 자신을 세번 이나 부인할 베드로에게 세번이나 거듭 '네가 날 사랑하는냐?'고 물으셨던 마음, 죄인 취급을 당하며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까지 온갖 고난과 희롱을 참고 참으셨던 마음..... 그러한 마음이 아닐는지.....

 옹졸한 마음을 지닌 우리의 불평과 불만속에 나쁜 목사님이 되어가는 우리의 목사님을 우리가 원하는 좋은 목사님, 훌륭한 목사님으로 만들어 보자는 저자의 시원스런 이야기들 속에, 나와 우리 가정, 우리 사회와 우리 나라까지도 더 성숙하고 건강하게 자라게 만들만한 귀한 싹을 볼 수 있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는 책이었습니다. 비록 현학적인 지식으로 뽐낸 것이 아니고, 화려한 문체로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지만, 내게는 '한 번 읽고 없어지는 책', '세상에 있으나마나한 책', '읽어도 그만, 안 읽어도 그만인 책'이 아닌 어느 순간 생활이 팍팍할 때 생각나는 책, '더 좋은 것을 더해 주는 책', 잊고 살다가도 어느 날 책꽃이 속에서 우연히 발견한다면 반갑기 그지없을 그러한 책..... 그리고 마음 속에 나쁜 목사님, 나쁜 직장 상사, 나쁜 친구 등등 나쁜 ** 라는 카테고리를 담고 계시는 분들께 한 번 꼭 들려주고 싶은 책입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는 말씀에 한번쯤 진한 감동을 먹으셨을 모든 분들이 주변의 좋은 **과 함께 행복하시기를 기원합니다.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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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코필리아 - 뇌와 음악에 관한 이야기
올리버 색스 지음, 장호연 옮김, 김종성 감수 / 알마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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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음악은 귀로 듣고 감상하는 예술로서의 의미가 강할 것입니다. 고전음악에서부터 현대의 대중음악이나 가요에 이르기까지 그러한 의미로서의 스펙트럼만 본다고 하더라도 하나의 거대한 물줄기를 이루고 있고, 거기에 덧붙여 각 나라의 전통음악들을 합쳐 놓는다면 그 방대함과 다양함은 말이나 글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그런 음악은 우리의 삶 순간순간에 끼어들어 우리에겐 희노애락을 느끼고 표현할 수 있게 해 줍니다. 이러한 우리 삶에 다양하고도 밀접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음악자체가 우리 삶에 영향을 끼치는 방식에 대한 이야기가 이 책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음악 자체의 이야기가 아니라, 음악이 우리의 뇌에 인지되고 정서적인 반응을 일으키고, 질병의 증상이 되거나 질병의 치료를 위한 도구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고, 단순히 음악을 듣고 즐기며 흥얼거리는 수단으로서의 음악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음악을 인식한다는 것은 음이나 음색, 음정, 화성, 리듬 등을 인식한다는 것이고 또한 뇌의 여러 부분에서 그러한 요소를 통합하여 새로운 정서적인 반응이나 의미를 구축하는 것이라는 사실, 그리고 그것들이 어긋났을 때 어떤 문제들이 발생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라고 하겠습니다. 그러한 이야기의 진보속에는 발전된 의학과 뇌영상 촬영 기법이 아마도 많은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저자인 올리버 색스가 신경과 의사라는 점을 고려한다고 하더라도, 뇌와 음악에 관한 이야기는 상당히 한정된 주제이고, 뇌과학이라는 분야는 아직도 미지의 부분들이 더 많은 부분이기에 어찌보면 저자가 지금 책속에서 하고 있는 이야기들이 시간이 조금 지나면 고전적인 이야기들이 되거나 전혀 다른 의미로 해석되어 버릴지도 모를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인간의 뇌라는 곳이 알려지지 않은 만큼 찾아내서 들려줄 이야기도 그 만큼 흥미롭고 많다는 의미가 될수도 있겠습니다. 그리고 저자가 독자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의 시작 지점이 바로 많은 특별한 환자 증례들이 암시하는 뇌와 음악이 관련되는 흥미로운 현상들에 대한 탐구라고 하겠습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언어만큼이나 오래전에 인간의 뇌속으로 들어온 음악이 귀의 고막에 잡히고, 청각시스템을 통해서 뇌에 전달되고 뇌에서 복잡하게 이해되고 통합되는 과정, 그리고 청각과 무관하게 뇌의 작용만으로도 충분히 음악을 마음속에 연주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 등에 대한  여러 증례와 연구를 통한 탐구와 이해에 대한 내용들이 가득히 담긴 내용을 읽어 가노라면 일반독자가 읽기에는 조금 난해감마저 느껴지는 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단지 지금까지 귀로 듣고 흥얼거리던 가요나 고상하게 앉아서 감상하던 고전음악이라는 단편적인 의미에서의 음악에 대한 이해에서 벗어나, 정말로 언어와 마찬가지로 한편으로는 언어보다도 더 원초적인 면에서 인간 삶의 일부로서 기능하는 음악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지는 시간이었습니다.

 4부로 이루어진 책의 내용은 다양한 상태에서의 음악과 사람 그리고 뇌에 관한 이야기들을 들려줍니다. '1부 음악에 홀리다'에서는 번개를 맞고 나서 갑자기 음악에 열정을 쏟기 시작한 정형외과 의사, 음악 발작, 음악 유발성 간질, 음악 환청 등 음악과 관련된 병적 상태들에 관한 이야기들입니다. '2부 놀랍고도 풍부한 음악성의 세계'에서는 음악성에 대한 의미, 절대 음감, 두 귀의 스테레오로서의 역할, 시각장애와 연관된 새로운 청각의 세계와 음악, 음악을 들으며 색을 느끼거나 맛을 느끼는 공감각 등 우리가 쉽게 음악이라고 하지만 음악을 인지하고 표현하는 것속에 얼마나 다양한 과정이 포함되고 그것들이 통합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와 일반인으로서는 느끼지 못하는 전혀 다른 의미의 음악세계라는 것도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이야기들입니다. '3부 기억과 동작, 그리고 음악'에서는 기억상실증 환자나 실어증 환자, 투렛증후군, 파킨슨병 환자 등의 치료과정에서 사용되는 음악의 효용 등에 관한 이야기인데, 기존의 운동계나 감각계와는 전혀 다른 과정을 통해서 작용하는 음악을 통해서 환자들의 장애가 교정되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에 대한 내용입니다. 아마도 환자의 치료에 음악이 사용되는 것들에 대한 많은 근거들 중의 몇가지 사례들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4부 정서와 정체성, 그리고 음악'에서는 음악이 우리의 정서와 정체감에 미치는 영향들에 대한 내용인데, 특히 일반적인 부분에서는 지적인 문제가 있지만 음악이나 사교성에서 만큼은 천재적인 소질을 보이는 윌리엄스 증후군 환자들과 치매환자에 대한 음악치료를 통한 파괴된 인지기능 등의 회복에 대한 이야기는 대단히 흥미로운 부분이기도 했습니다. 

 책에서 언급한 많은 부분들이 아직도 더 연구가 진행되어야 하고, 또한 실생활에 적용되는 음악치료들도 더 많은 개선을 거쳐야겠지만, 저자의 40여년동안의 임상 경험과 자료 축적으로 이뤄진 책의 내용은 여러 실례에 대한 꼼꼼한 추적의 결과들이나 동일하게 해석될 수 있는 다른 환자들의 실례, 그러한 환자들에 대한 연구결과 등을 통해서 음악과 뇌에 대한 한단계 높은 통찰력을 제공해주고 있습니다.  즉 음악이 뇌에 이해되고 또한 생활속에 표현되는 다양한 상태-정상적이기도 하지만 병적일 수도 있는 상태-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서, 음악이라는 산물이 그냥 우리가 흥얼거리는 활력소나 감상하는 도구로서의 기능보다 훨씬 더 뿌리 깊은 의미 -음악을 듣고 이해한다는 것은 인간의 마음을 이해하고 인간 존재 자체를 이해한다는 의미- 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고, 또한 아직도 우리가 찾아내지 못한 사람을 사람답게 만들수 있는 수많은 가능성을 지니고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환자들의 다양한 증상을 통해서 뇌와 음악에 대해서 이야기했지만, 그 안에 담긴 해석과 통찰력을 통해서 음악이라는 것이 얼마나 인간 뇌의 근원적인 곳에 자리잡고 있는 원초적이고 매력적인 '그 무엇'인지에 대해서 깨닫게 해 주고, 또한 그러한 깨달음이 우리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한 더 깊은 이해에 이르게 해 준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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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 와일드 환상동화
오스카 와일드 지음, 이은경 옮김, 이애림 외 그림 / 이레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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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설공주나 신데렐라, 그리고 우리의 전래 동화에 이르기까지 아이들의 동화책을 대할 때면 거의 항상 일정한 틀 -권선징악, 고진감래 등- 안에서 이야기가 전개되고, 아이들에게 세상살이의 교훈이나 어른들이 그리되기를 바라는 -하지만 이기적 욕심과 교만 등으로 결코 이루지 못한- 바람이 투영된 선하고 아름다운 사회에 대한 소망이 담겨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가끔씩은 그러한 경향에 대한 패러디를 통해 통쾌한 웃음을 선사하는 이야기들이 등장 - 흑설공주, 아기 늑대 세마리와 못된 돼지 등- 하기도 하지만, 많은 아이들에게 읽히는 고전이나 전래동화에서 창작동화에 이르기까지 교훈이나 가르침의 내용만이 조금 다양해졌지 그러한 경향은 변하지 않은 듯 합니다. 물론 과거의 이야기들에 비해서는 요즈음의 창작동화들은 훨씬 현실적인 감각을 담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교훈과 가르침이라는 지향점에서 벗어나지는 못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세상을 긍정하고 세상의 밝고 희망에 싸인 모습을 기대하며 배워가는 것이 분명 잘못된 것은 아닐터이고, 그러한 것들을 무작정 비판코자 하는 것은 대책없는 또 다른 편협함을 낳는 것일 겁니다. 그래서 무작정 비판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러한 이상적인 모습을 담은 동화들과 균형을 이루는, 세상의 보이는 현실이나 숨겨져서 표면적으로는 느낄 수 없는 가면을 들춰주는 이야기들이 필요할 것이라는 것에 생각이 이르게 되고 그런 균형추의 역할을 수행해 줄만한 동화책이 바로 오스카 와일드의 환상동화와 같은 이야기들이지 않을까 합니다.

 책에 실린 아홉편의 동화에는 지금까지의 동화 이야기들과는 전혀 다른 삶의 방식과 시각을 지닌 주인공들이 등장합니다. 주인공이 결국은 선하거나 깨달음을 얻게 되기는 하지만, 그들이 반드시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아닌 존재로서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현실에서 보는 선하지도 그렇다고 반드시 악한 것도 아닌 두가지 얼굴 모두를 지닌 가능성으로서의 인간의 모습이라고 할까요. 또한 백설공주나 신데렐라 이야기처럼 '공주와 왕자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는 도식적인 결말로 이야기가 마무리되는 것이 아닌, 때로는 죽음으로 때로는 파괴와 버려짐으로 그리고 때로는 선한 자의 실패와 악한 자의 이득으로 결말이 나기도 합니다. 즉 우리의 삶속에 나타난 그러한 부조리함들을 이야기 속에 고스란히 녹여 놓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주인공들은 항상 선하거나 포근한 것이 아니어서 별아이처럼 극단적인 이기심을 보이다가도 자신에 대한 자각을 한 이후에는 또한 그 누구보다 더 선한 삶을 살려고 노력하기도 하고, 거인처럼 이기적인 마음에 정원을 폐쇄하지만 이내 자신의 잘못을 체험을 통해서 깨닫고 열린 마음으로 세상을 품는 자각에 이르기도 하고, 황금과 보석으로 꾸며진 행복한 왕자의 겉모습을 찬양하던 이들이 모든 화려함을 없는 자들에게 나눠주고 나서 행복한 왕자의 동상의 몰골이 흉해졌을때 냉랭히 돌아서는 천박한 인간정신에 대한 조소와 그런 왕자의 버려진 심장을 선택하는 신의 손길에 대한 묘사는 그 자체로 세상을 향해 지르는 시원한 발차기가 아닐는지.....

 무엇보다도 아홉편의 동화 하나하나를 대하면서 흥미로웠던 부분은 이야기의 흐름이나 구성을 이루는 작은 이야기들은 충분히 동화적인 상상력과 발랄함을 가지고 있지만, 그러한 이야기 꾸러미들이 한덩어리의 큰 이야기로 꾸며져서 우리에게 들려주는 것들은 지극히 현실적인, 아니면 현실보다도 더 현실적인 사람과 그들이 사는 사회의 적나라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행복한 왕자에서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나누는 왕자의 따뜻한 심장보다는 루비와 사파이어 그리고 황금으로 꾸며진 외양을 더 찬양하는 시대, 인어를 사랑한 어부처럼 자신의 사랑에 충실했을 때 주어지게 되는 비극적인 결말이 비일비재한 사회, 한스의 어리석음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이용하기만 하고서도 그의 장례식에서까지 그 뻔뻔함을 버리지 못한 방앗간 주인의 창창한 삶과 한스의 억울한 죽음으로 대별되는 있는 자와 없는 자의 삶의 모양이라는 것에 대한 통렬한 비꼼 등은 어른들이 보아도 충분히 흥미와 자신에 대한 자각을 얻을 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제목은 환상 동화였지만 환상과 이야기 속에 세상살이의 현실더 생생하게 담은 지극히 현실적인 동화라고 해도 옳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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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탄생] 서평단 알림
철학의 탄생 - 현상과 실재, 인식과 진리, 인간과 자연에 던지는 첫 질문과 첫 깨달음의 현장
콘스탄틴 J. 밤바카스 지음, 이재영 옮김 / 알마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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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날에는 누구나 그리스적인 방식으로 생각한다. 설령 이를 전혀 깨닫지 못한다고 해도. -자클린 드 로미어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에 대해서 처음 대하게 된 것은 아마 고등학교 윤리시간이었다는 기억입니다. 책의 처음 부분에 발음도 어색하기 그지 없었던 인물들에 대한 소개와 그들의 사상에 대한 간단한 설명이 있었던 기억입니다. 당시에는 철학(Philo-sophy)라는 어원의 풀이 즉 '지혜에의 사랑'이라는 설명에서 시작하여 이 책에 소개된 이들의 철학의 핵심을 소개하고 그 뒤로 소피스트들과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으로 이어지는 철학사에 대한 난해하기 그지없는 소개가 있었습니다. '만물의 근원은 불이다', 또는 '물이다', 또는 '수이다' 등의 말을 들으며 당시에는 그 정확한 의미를 몰랐기에 -실제로는 철학이라는 학문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이 더 컸겠지만- 헛웃음을 쳤던 기억도 있습니다. 부질없는 이야기들을 철학의 시작이라고 다루고 있다는 치기어린 마음에서 나오는 행동들이었겠지요. 그 뒤로 다시 그들-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을 접하게 된 것은 대학생이 되고 나서 교양과목으로 철학개론을 듣게 된 것이 계기가 되어서였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책의 내용은 좀더 깊어졌을지 모르겠지만, 강의 방식은 고등학교때 배우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고, 한학기 동안만 들으면 되었던 과목이었던지라, 플라톤에 대해서 진행되던 중에 마무리가 되었던 당시 강의는 고등학교때 배웠던 기억에 별반 다른 특별한 것들을 더하지 못하고 그리 허망하게 끝나버렸습니다. 그 뒤로는 몇몇 개별 철학자들의 저서를 통해서 철학이라는 것의 난해함만을 맛보며 매번 뒷걸음질치던 기억은 다른 많은 이들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 학문의 안쪽으로 들어가면 매번 무언가 멋진 것이 있을 거라는 기대를 가지고 대들어 보지만, 매번 미로에 갇힌 듯 헤매다가 퇴각하곤 하지요. 그리고 다시 바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고, 그러다 보니 철학이나 그 근처의 학문들은 계속 미지의 땅이 되어 가고.....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우리가 하루하루를 살면서 아무 철학적인 사고나 행위없이 살아가고 있는 듯 할지라도 현재의 우리의 주변 환경을 결정짓고 있는 것들은 다양한 철학적 사고의 결과물이라는 것을 수긍하게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과학의 발견이나 발명을 통해 우리 생활의 다양한 시스템이나 물건들이 만들어지고 이용되듯이, 철학은 사람들의 정신적인 자각과 개혁을 통해서 끊임없이 사회의 구조와 조직, 그리고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또한 여타 다른 학문들의 발전에 기초나 토대로서의 기능도 하게 됩니다. 바로 이러한 철학에 대한 기억과 자세 때문에 두툼한 이 책을 다시 손에 잡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동안 실패했던 이들에 대한 이해의 폭을 조금이나마 넓히고, 철학이라는 학문에 대한 기초적인 소양을 조금이나마 넓혀 볼 요량이었습니다. 하지만 다 읽고 난 지금의 느낌은 솔직히 대학교때 철학개론 강의를 마치고 책을 한쪽 구석에 밀쳐버리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당혹스러움이 있습니다. 내용의 방대함이 먼저겠지만, 어쨌거나 내용의 많은 부분이 뒤죽박죽이 되어버리고, 그들에 대한 뭔가 새로운 이해나 깨달음이 더해졌다는 느낌이 없이, 그냥 막막하다는 생각만이 앞서갑니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이란 '기원전 5-6세에 처음 활동을 시작한 그리스 철학자들을 일컫는말로, 생물학적인 연대를 기준으로 하는 구분이 아니라 철학을 처음으로 개척한 이들의 사상을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과 구분'하기 위한 표현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데모크리투스는 소크라테스보다 늦게 태어나서 그와 동시대를 살았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소크라테스 이전과 이후를 나누는 것은 소크라테스를 중심으로 확연해진 철학사상의 단층선에 대한 구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책에 소개된 이들은 밀레토스의 탈레스를 시작으로 아낙시만드로스, 아낙시메네스, 피타고라스,  크세노파네스, 헤라클레이토스, 파르메니데스, 엠페도클레스, 아낙사고라스, 데모크리토스 이렇게 열사람입니다. 이들의 활동은 '신화적인 관념으로부터 인간의 이성적인 사유로의 발전과정에서 인간 스스로 비판적인 사유를 통해서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는 통찰이 시작'된 기원전 7세기 경에 나타납니다. 그리고 저자에 의하면 그러한 변화는 비슷한 시기에 중국 (공자와 노자), 인도 (붓다 등), 이스라엘 민족 (예언자 예레미아와 에스겔), 페르시아 (차라투스트라?)에서도 나타나는데, 그리스에서 나타난 사상적 특징은 '인간의 경이감으로 출발'하여 세상의 시초와 본질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사색으로 이어졌고 결국 이러한 특징이 철학과 과학의 합리적인 기초를 세우는 바탕이 되고 동양과 서양의 차이를 만들었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저자의 분석에 의하면 중국은 정의로운 정치 질서 안에서 인간들이 서로 맺어야 할 올바른 인간관계를 설정하려는 실천적인 고민이 주였고, 인도의 경우는 인생의 심오한 의미에 대한 최초의 질문들을 제기하는 종교적인 고민이 중심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관점에서 저자는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사상이 단순히 유럽의 합리성이라는 기초만을 마련하는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아무런 선입견이나 편견없이 자유롭게  세상만물과 정신세계를 탐구했던 그들에게서 오늘날 우리들이 직면하고 있는 철학이나 자연과학의 여러 문제들에 대한 접근법이나 해결책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는 초현실성이 있지 않나 하는 기대감을 가지고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머리말에서 저자는 이 책을 집필하게 된 두가지 기본적인 목적은 '첫째, 현대인들이 유럽사상의 기초가 세워지고 발전되는 과정을 살표'볼 수 있도록, 대부분의 사람들이 철학과 과학의 시작으로 중요시하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영향력이 그 바탕에 있음을 알리고, 철학과 과학의 시작이라는 사실에 대한 지평을 넓히는 것이고, '둘째는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저작에서 나타나는 자연과학적 차원을 부각'시켜, 오늘날의 과학적인 개념들과의 연관성이나 영향력을 알리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책 내용이나 구성의 많은 부분을 그러한 목적에 맞게 철학적인 영혼이나 신, 로고스 등의 개념과 사상적 특징들에 할애하기도 하지만, 우주기원론이나 우주론, 기상학, 수학, 기하학, 물리학, 생물학, 물질, 생리학, 의학 등의 항목들을 추가하여 각각의 철학자들이 내세운 사상적인 특징들이 현대의 이러한 과학과 어떠한 연관성을 가지고 제 목소리를 내고 있는지에 대한 꼼꼼한 내용정리가 함께 들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그러한 해석의 과도함으로 인해 불편감이 느껴지는 -이현령비현령식으로 느껴진다고나 할까요- 부분도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엠페도클레스를 언급한 내용들 중에서 '실험', '실제적 응용', '법칙성', '물리학적 법칙들의 보편타당성', '힘', '빛', '화학', 우주기원론' 등에 언급된 내용들을 읽다보면 현대과학이 이룬 다양한 업적들 -빛의 이중성, 원자론이나 분자론, 블랙홀, 빅뱅 등-을 그의 철학속에 이미 구축했다고 말하는 과함을 느끼게 되는 면이 있는 것이 사실이니까요. 하지만 저자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미 구축된 지식을 익히고 그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생각들을 구축해 나가야 하는 선입견에 자유로와서, 다양한 부분에 대한 다양한 사색과 주장들을 펼칠 수 있었던  그들의 사상들 속에는 분명 우리가 한쪽을 선택함으로써 잃어 버렸던 다른 여러 가능성들에 대한 실마리들을 얻을 수 있는 보물들이 숨겨져 있는 것은 분명할 듯 합니다. 그것이 옳고 그른 것에 상관없이 그들은 자유로운 철학적 사색을 하였고, 또한 실험이 뒷받침되지는 않았지만 그러한 사색을 바탕으로 가설의 단계에서는 지극히 자연스러울 수 있는 다양하고 자유분방한 여러 가설들을 앞다퉈 세상에 내놓은 매우 과학적인 태도를 지닌 사람들이기도 하였으니까 말입니다. 아직도 각각의 철학자들에 대한 것들은 혼란스럽고 난해하기만 하지만, 전체적으로 그들 철학자들의 의미를 이렇게나마 간추린 것으로도 이 책을 붙들고 씨름한 이득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시간이 흐르더라도 다시 한번 펼쳐 볼 수 있는 책꽂이에 꽃혀 있을 물리적인 자산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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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과 무생물 사이
후쿠오카 신이치 지음, 김소연 옮김 / 은행나무 / 2008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생물과 무생물의 경계는? 평상시에는 동물과 식물의 구분만큼이나 명확하다고 생각되는 이 질문에 막상 답을 하자니 말문이 막힙니다. 그 사이에 있는 헛갈리는 존재들에 대한 생각 때문이겠지요. 바이러스는? 요즈음 광우병으로 관심을 끄는 프리온은?...... 저자는 '생명이란 자기 복제를 하는 시스템이다'라는 정의로 책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생물학에 조금만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마 자기복제를 한다는 말에 문득  DNA구조를 통해 부단한 자기복제의 과정을 수행하는 세포의 특징을 떠올릴 것이고, 거기에 생명의 포인트가 있겠구나 라는 생각을 하겠지요. 저자 역시 여기DNA에서 자신의 생명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하지만 DNA는 저자가 생명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는 매듭일 뿐이지 자기복제라는 경이롭지만 싱겁기도 한 정의로 생명을 재단하고 끝내는 것은 아닙니다.

 제임스 왓슨(James Watson)과 프랜시스 크릭(Francis Crick). 저자가 '생명이란 자기를 복제하는 시스템이다'라는 정의를 내리는 시작이 되는, 아름답고 황홀하기까지한 이중나선의 DNA 구조를 최초(?)로 밝혀낸 이들입니다. 상보적인 염기서열 구조를 하고 있는 이중나선 구조가 풀리면서 플러스 가닥과 마이너스 가닥이 생기면, 그 가닥들을 모체로 새로운 상보적인 가닥이 생기면서 두쌍의 새로운 DNA를 완벽하게 만들어 내는 시스템을 통해 거기에 새겨진 유전정보를 자기복제하여 후대에 전하게 되는 생명의 본질을 저자는 자신의 정의에 담은 것이지요. 그러한 위대한 발견자들에게 저자는 경의를 표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지만, 그들에 앞서 '유전자=DNA'라는 사실을 최초로 발견한 오즈월드 에이버리와 DNA 염기의 네가지 구성 성분중에 A와 T, C와 G의 함유량이 같다는 사실을 밝혀낸 어윈 샤가프에 대한 경의도 빠뜨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DNA의 다량 복제 기술인 PCR 기법을 드라이브 데이트 중에 고안해 냈다는 멀리스에 대한 이야기는 그러한 발견이 그에게 노벨상까지 쥐어줬다는 이야기에 이르면 그 과정이 하나의 전설 -신이 다른 모든사람을 제쳐두고 그에게만 비밀의 문을 열어주었다는 전설-이라고 말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법한 극적인 요소를 담고 있기도 합니다. 그리고 더 소설같은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과연 왓슨과 크릭이 최초의 이중나선구조의 발견자인가? 그들과 같은 시기에 X선 결정학을 통해서 RNA의 구조를 연구하고 있던 로잘린 프랭클린, 그리고 그의 상관격이던 윌킨스, 윌킨스를 통해서 프랭클린의 X선 사진을 훔쳐(?)본 왓슨, 또한 영국의학연구기관에 제출된 프랭클린의 DNA에 관한 데이터를 몰래 훔쳐볼 수 있었던 크릭에 대한 이야기인데, 한편의 음모와 스릴, 희망과 절망, 찬사와 반역 등이 담긴 소설의 전개를 보는 듯한 흥미진진함을 담고 있습니다. 과학의 뒤안길에 담긴 흑막이라고 할까, 결국 노벨상은 왓슨과 크릭, 윌킨스에게 돌아갔고, 프랭클린은 그들 공범자들이 노벨상 단상에 서기 4년전 암으로 세상을 마감합니다.... 

 다시 생명에 대한 정의로 돌아와서 자기복제 시스템을 생명이라고 정의한다면 바이러스는 생명체인가? '기생충처럼 다른 세포에 기생해서 완벽하게 자신을 복제해 내기는 하지만 입자단위를 보자면 무기질적이고 딱딱한 기계적 오브제로서 생명으로서의 움직임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바이러스를 생명이라고 해야할까? 이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을 표하는 저자는 자기 복제라는 개념 너머로 생명현상에 대한 고찰을 확장합니다. 그리고 이 책의 중요한 요점이랄수 있는 '생명이란 동적평형 상태에 있는 흐름이다'라는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물리학자인 슈뢰딩거의 <생명이란 무엇인가>에서 제기된 두가지 질문 즉, '유전자의 본체는 혹시 비주기성 결정이 아닐까?'와 '원자는 왜 그렇게 작을까?' -역으로 생명체는 원자에 비해 왜 그렇게 커야만 하는가?-에 대한 답을 찾아나서는 것으로 새로운 고찰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쇤하이머가 실험을 통해 얻어낸, 물리화학적인 면에서 접근한 생명에 대한 탐구의 결과 엔트로피 증대의 법칙에 항거하여 생명의 질서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 끊임없이 파괴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명의 동적평형 상태에 대한 개념과 '생물이 살아있는 한 영양학적 요구와 무관하게 생체고분자든 저분자 대사물질이든  모두 변화하지 않을 수 없다. 생명이란 대사의 계속적인 변화이며, 그 변화야말로 생명의 진정한 모습이다'라고 말하며 그것을 '신체 구성 성분의 동적인 상태' (The dynamic state ig body constituents)라고 부른 다이내믹한 흐름에 대한 개념을 바탕으로 자기 복제를 하는 존재로 정의된 생명을 동적  평형 상태에 있는 흐름이라고 재정의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동적평형을 유지하기 위해 부단히 작동하는 단백질과 세포와 세포막, 유전자들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내용의 대부분은 저자의 경험과 어우러진 과학에 대한 내용이지만 딱딱하기 보다는 소설책만큼이나 흥미로웠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만한 이야기들이었습니다. 저자가 과학자이긴 하지만 자신의 분야에서 쌓아온 길들에 대한 충분한 되새김을 통해서 인문학적으로도 훌륭히 자신의 분야를 소화해 낸 안보이는 노력이 있어서이기도 하겠고, 남다르게 갈고 닦여진 글솜씨에서 연유한 면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생명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열정의 결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가 깨닫고 알게 된 만큼만 겸손하게 전달하고자한 절제된 글솜씨도 그 이면에 책의 무게를 더하는 이유가 되는 듯 합니다. 저자는 두가지 정의로 생명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은 것 뿐이지만,  생명을 자기를 복제하는 시스템이며 동적평형 상태에 있는 흐름이라는 자신의 평생에 걸친 고찰의 결과를 진지하게 담은 목소리를 통해서, 생명에 대해 지금까지 내가 품고 있었던 막연한 신비로움이나 경외감 이상의 진지함 -'생명이란 이름의 동적인 평형은 그 스스로 매 순간순간 위태로울 정도를 균형을 맞추면서 시간 축을 일방통행하고 있'으며 이는 '절대로 역주행이 불가능 하며, 동시에 어느 순간이든 이미 완성된' 상태여서, '혼란을 야기하는 인위적 개입은 동적평형에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힌다'는, '표면적으로는 변화가 없어보여도 이미 내적으로 무언가 변형되고 손상을 입고 만다'는 사실-을  배울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자연의 흐름 앞에 무릎을 꿇는 것 외에, 그리고 생명을 있는 그대로 기술하는 것 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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