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읽다 - 단숨에 통독하는 사복음서
김동준 엮음 / 두란노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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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사복음서를 읽다보면, 서로 같은 사건에 대한 기록이지만 상호 미묘한 차이를 가지는 부분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서로 겹치지 않고, 각 복음서에 독립적으로 기록된 사건이나 예수님의 말씀도 있습니다. 하지만 각각의 복음서가 가지는 나름의 개성이나 저자가 독자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기에 내용이나 분량, 또는 예수님에 대해 서술하는 시각의 차이 - 이스라엘의 왕, 인자, 하나님의 종 또는 하나님의 아들- 등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그 자체로서 예수님의 일생에 대한 고찰의 의미가 있고, 또한 예수님의 일생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복음과 가르침 등의 의미를 각자의 특성대로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매번 읽다보면, 특히 주석서나 강해서를 함께 보면서 서로 겹치는 사건들에 대해서 서로 다른 복음서의 내용들을 대하다 보면, 예수님의 탄생부터 십자가 사건까지 일목요연하게 정리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생기는 경우가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오늘 그러한 바람을 알기라도 한 듯, 이 책을 만나게 되는 행운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의 예고에서부터 요한과 예수님의 탄생으로 이어지는 일대기가 십자가 사건과 부활, 사람들앞에 다시 나타나시고 승천하시고, 그리고 오순절 성령강림과 베드로의 설교까지.... 사복음서와 사도행전 초반부의 내용을 시간의 순서대로 배열해서 읽는 이로 하여금 예수님의 일생에 대한 틀을 제대로 잡을 수 있게 인도해 주는 책입니다. 누가복음을 토대로 사건의 순서대로 사복음서의 내용을 중간중간에 삽입하여 예수님의 일대기를 완성하였는데, 미묘한 차이가 있는 사복음서 각각의 시각을 불협화음을 느끼지 않게 깔끔하게 정리한 점을 생각하면 엮은이의 노고가 쉽지만은 않았으리라는 짐작이 가는 부분입니다. 물론 거기에는 예수님의 일생을 성경에 의거해 연대기순으로 정리해 보고 싶다는 엮은이의 의욕에 앞서 먼저 무릎꿇고 간절히 구한 기도가 있었으리라고 믿습니다. 

 내용을 보면, 엮은이는 복음서의 내용을 한자도 훼손하지 않고, 내용 그대로를 이용하여 각각의 사건이나 이야기들을 정말로 매끄럽고 자연스럽게 연결해 놓았습니다. 예를 들어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면 사복음서에 나오는 내용을 다 이용하여 사건을 재구성하여 놓았는데, 각 복음서의 몇몇 구절을 조금씩 이어붙여 이야기를 완성한 것이지만, 그대로 읽어간다면 오병이어의 기적에 대한 가장 세세한 서술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각각의 복음서가 가진 생략된 부분에 대한 보완이 되어 있다는 면에서는 후에 사복음서 각각을 읽을 때, 일일이 앞뒤를 뒤적이며 보지 않더라도 각 복음서의 특징적인 서술과 생략부분을 비교해 볼 수 있는 훌륭한 참고 서적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또한 중간에 삽입된 삽화들이 성경 내용에 대한 이해를 더 풍요롭게 이끌어주는 장점도 있고, 성경을 읽으며 가장 난해함 중의 하나일 단조로움(?)이나 긴장감을 벗어나, 똑같은 내용의 성경을 읽으면서도, 한권의 책을 읽는 듯한 편안한 마음으로 대할 수 있다는 면에서는, 무작정 성경읽기에 어려움을 느끼는 초신자나 비신자, 또는 기존의 성도들에게도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사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생애가 복음이라는 동일한 사실을 근거로 기록된 것이기는 하지만, 나름이 특징적인 면이 있기에, 온전히 예수님의 생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복음서 각각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면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또한 이 책이 예수님의 일생을 사복음서를 통해 잘 엮어냈다고 하더라도, 각각의 복음서을 읽고 묵상할 이유들도 충분히 많을 것입니다. 각 복음서가 지닌 고유의 가치와 의미가 있을테니까 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일생을 알기위해서 또는 통독을 위해서 매번 4권의 복음서를 읽어야한다는 부담을 덜고, 처음부터 끝까지 정리된 내용을 대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성경읽기에 부담을 지니고 있을 많은 이들에게 좋은 선물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결국 우리의 신앙은 예수님의 일생에 담긴 복음을 알고 믿고 전하는 데 그 바탕을 두고 있을테니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남들이 다 알지 못할 수고를 아끼지 아니하고, 자신의 아이디어를 이리 책으로까지 만들어내는 삶의 노고를 아끼지 않은 엮은이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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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이매진>을 리뷰해주세요.
진중권의 이매진 - 영화와 테크놀로지에 대한 인문학적 상상
진중권 지음 / 씨네21북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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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가 소개한 40여편 -정확하게는 37편-의 영화 중, 실제 진지하게 끝까지 보았던 영화들을 생각하며, 스스로에게 물어봅니다. 내가 <슈렉>이라는 영화를 아이들과 함께 보았을 때, 저자가 말한 쿨미디어의 하이퍼리얼리티라는 것에 대해서 생각이나 해 보았을까?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움직임이 자연스럽다는데서, 그리고 장화신은 고양이를 보며 '쟤가 왜 여기 나오나?' 하는 정도의 물음표를 달았다는 데서, 저자가 말하고 있는 이야기의 도입부를 붙들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책에서 말한 것만큼 거창하게 생각하지는 못했고 그냥 아이들과 즐겁게 보며 그럴 듯 하다고 한바탕 웃어주었던 단순한 기억만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DVD로 <폴라 익스프레스>를 보았을 때도, 왠지 주인공 소년을 비롯한 등장인물들에게서 느껴지던 차가움과 어색함에 대한 기억은 있지만, 이 영화가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이행하는 과도기의 특성을 지닌 '섬뜩함의 계곡'에 빠져 있었던 것이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습니다. <매트릭스>의 기막힌 장면들 속에서도, 건물들 사이를 누비는 <스파이더 맨>의 우아한 모습을 보면서도, 케이블 TV에서 수도 없이 반복되는 <터미네이터>의 놀라운 장면들 속에서도, 그 영화만이 주는 독특함에 대한 느낌이 있었지만, 저자가 말하는 주제들에 대한 나름의 생각을 해보지는 못했던 듯 합니다. 그래서 저자가 말하는 영화 이야기들이 곳곳에 나오는 생소한 용어들과 함께 괜히 영화를 어렵게 뜯어보는 현학적인 글쓰기일 뿐이라는 오해를 사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이 책에 대한 변명일수도, 소개일수도 있는 프롤로그에서마저 그 생소한  용어들이 튀어나오며 나의 지식과 상상력의 빈곤을 자극하니, 그러한 오해와 편견은 첫인상 효과처럼 그리 시작 되었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디지털 기술이 시네마의 내용과 형식에 어떤 변화를 일으키고 있는지, 또 과학과 인문학의 담론이 어떻게 영화적 상상력으로 변용되는지 살펴보자는 막연한 생각으로 시작한' <씨네21>에 실렸던 글들이 이 책의 시작이었다는 저자의 글을 차분히 읽었다면, 분명 이 책을 대하며 '괜히 영화를 어렵게 본다'는 오해를 조금은 줄일 수 있었을테지만, 처음에는 그런 차분함보다는 명성있는 이의 뭔가 그럴듯한 체계잡힌 영화에 대한 해설이나 분석 -물론 저자는 프롤로그에 이것은 영화 비평이 아닌 인문학적인 상상을 담은 담론의 성격을 가진 글들이라고 밝히기는 하였지만 처음에는 그 말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을 기대했으니, 제대로된 스토리에 대한 설명도 없이 이런 저런 지엽적인 것들로 한편의 영화를 뜯어 분해해 버리는 글들이 당혹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고 해야겠습니다. 저자가 말한대로 더도말고 덜도 말고 디지털 기술과 인문학적인 담론이 영화와 만나 어떻게 표현되고 변화되는지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읽는다면, 저자의 글쓰기 방식에 대한 이해의 폭을 조금더 넓혀 줄 수는 있을 것 같지만, 그렇다고 글자체가 지닌 난해함에 대한 감정까지 쉽게 풀릴 수 있는 것은 아닐 듯 합니다. 그만큼 저자가 말하는 주제들이 일상적인 소통의 범위를 넘어선, 과도한 테크놀러지와 인문학적인 용어와 개념들을 말하고 있는 것일 수도, 그것이 아니라면 독자의 한사람으로서 나의 지식과 소양 부족에 대한 반성이 필요한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내가 영화들을 보면서 느꼈던 미묘한 감정이나 느낌에 대해서 저자는 훨씬 구체적인 용어와 사례들을 통해서 설명하고 있고, 그런 부분들이 내 앎의 영역의 일부가 되었다는 사실에 난해하다고 투덜대면서도 굳이 이 책을 끝까지 읽어낸 이유와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겠지만, 여전히 내 스스로에게 이런 식으로 영화를 뜯어볼 의향이 있냐고 묻는다면, 아직까지는 난 그냥 단순한 관객의 한사람으로 스토리를 따라가면서 웃고 울며 자연스러운 감정을 표출하고 싶다는 대답을 하겠습니다. 저자가 말하는 인문학적인 지식과 상상력이 가미된 디지털 기술의 변신에 대한 명확한 이해- 책을 읽으며 순간순간 지적 사치와 호기심이 충족되는 만족감을 주었던 -가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내 느낌과 감정속에 묻혀서 알듯 모를 듯 모습을 숨길지라도 말입니다.  

****** 

•  서평 도서의 좋은(추천할 만한) 점 - 영화만이 아니라 우리 주위의 많은 것들을 좀더 세밀하게 관찰한다면 얼마나 색다르고 깊이 있는 곳에 이를 수 있는지에 대한 자각을 준 것     

•  서평 도서를 권하고 싶은 대상 - 영화를 좋아하는, 하지만 그냥 즐기고 말았던 사람들, 또는 영화 뿐 아니라 실제 삶속에 담긴 다른 의미들을 추구하는 사람  

•  마음에 남는 '책속에서' 한 구절 - 모든 이는 같은 영화를 보면서 각자 다른 영화를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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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관형인간 - 어떤 과학이나 기술보다 강하다
샥티 거웨인 지음, 고빛샘 옮김 / 뜰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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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직관에 따라 사는 법을 배우고 싶은가? 이 책에 그 방법이 나온다." 

 이 구절을 읽고서 책을 집어든 사람이라면 어찌하든지 끝까지 읽어낼 것입니다. <블링크>라는 책이 직관의 유용성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 일으킨 뒤로 -물론 그 전에도 관심이 있었겠지만, 많은 이들의 주목을 끌었다는 의미에서- 이에 동의하는 책이나 이에 동의하지 못하겠다는 책을 여러 권 보았던 듯 합니다. 직관과 논리적인 사고. 각기 나름대로 장단점과 쓰임이 있고, 적절한 상황에서 효과적으로 이용된다면 분명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리라는 생각을 하지만, 아직까지 우리 사회는 직관보다는 논리적인 과정을 거친 사고를 더 중요시하고 존중하는 듯 합니다.  특히 교육과정의 대부분은 바로 그러한 논리적인 사고를 배우고 익히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으니 우리들의 태도가 그러한 방식에 익숙해져 있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겠지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논리적인 사고와 직관을 반드시 대립항에 놓고 생각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이러한 종류의 책을 대할 때마다 매번 머릿속을 맴도는 것도 사실입니다. 

 먼저 저자는 '직관형 인간'에 대한 정의를 '자신의 직관을 바탕으로 생각하고 이를 행동에 옮기는 사람'이라고 정의합니다. 그리고 '직관'이란 '1. 판단, 추리, 경험 등의 사유 작용을 거치지 않고 대상을 파악하거나 지각할 수 있는 힘이나 능력, 2. 대상을 보거나 듣는 즉시 곧바로 깨닫는 통찰력'이라고 정의 하고 있습니다. '왜 직관을 개발해야 할까?' 이에 대해 저자는 '직관은 우리 인생에 성공과 충만감을 가져다주는 중요한 자원'이며 '타고난 권리이자 특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자의 생각에 직관은 인생이 모든 면에서 정확한 길잡이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감각으로, 특히 무수히 만나게 되는 인생의 선택 상황에서 훌륭한 길잡이가 되어주고, 내면의 영적인 본성과의 교류를 통해 매일매일 충만한 삶을 살게 도와 줄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부처나 예수, 아인슈타인이나 에디슨 등이 직관형 인간이었는데, 그들의 훌륭한 업적은 직관과의 원할한 소통과 창의성의 발현에 기여한 직관의 역할에 의한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능력있고 창의력 넘치고, 에너지가  충만한 삶에 대한 약속이 직관력의 개발속에 담겨 있다는 것이지요. 

 본문의 내용은 직관과 어떻게 소통할 것인지, 직관이 전하는 말을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 직관력을 어떻게 기를 것이지에 대한 구체적인 실천방안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직관력을 타고난 경우도 있지만, 자신의 노력을 통해서 개발할 수 있으며, 일상에서의 반복적인 적용과 성공을 통해서 더 깊이있는 직관력에 이를 수 있다는 저자의 믿음에 근거하고 있다고 하겠는데, 일상생활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해 볼 수 있는 방법들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물론 직관력에 대한 관심과 유용성에 대한 믿음, 그리고 스스로 그러한 직관력을 갖추고 싶다는 욕구가 조화를 이루어야 시작할 수 있겠고, 또한 꾸준히 실천하고 열매도 얻을 수 있겠지요.   

 제 6감각이라고도 일컫는 직관력은 우리가 실생활에 잘 활용한다면, 이전의 여러 선인들이 보여주었듯이 분명 우리의 생활을 더 풍성하고 활력있게 이끌어 주는 하나의 방식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기대 못지 않게 직관이라는 감각의 한계점에 대해서도  나름의 기준이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이러한 접근이 논리적인 사고 방식이라는 지적을 당할 수 있겠지만, 직관력이 가지는 풍성한 가능성은 많이 이야기되고 있지만, 그로인한 실패와 문제들은 찾기 어려운 것은 그러한 실패와 문제가 없어서라기 보다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만한 주제가 못된다는 이유에서이겠지요. 그래서 이 책이 말하는 방식들을 시도하고픈 이들은 저자의 말처럼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적용할 일 입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세상은..... 직관과 논리적인 사고 뒤엉킨 곳이라는 너무도 당연한 사실에 한 표를 던집니다. 즉 직관의 가치를 인정하기는 하지만, 모든 것을 이루는 신기루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에서 입니다. 그리고 내 스스로의 결론은 둘을 대립항에 놓을 것이 아니라 서로를 보완하는 사고의 방식으로 생각해야 하는 것이 현명한 방식이지 않나 합니다. 그렇다면 저자가 말하는 이 책의 많은 부분이 흥미롭기는 하지만, 기를 쓰고 배우려고 달려들 에너지는 이미 상실한 상태라는 이야기가 되어버리는 건데..... 직관에 따라 사는 법에 관심이 있다면..... 가볍게 한 번 읽어볼 수 있는 책이기는 할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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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명적인 내부의 적 간신 - 중국 간신 19인이 우리 사회에 보내는 역사의 경고
김영수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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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간신과 충신..... 역사에 기록된 많은 이름들 중에 가장 극적인 대조를 이루는 인물 유형일 것입니다. 글로 기록된 역사에는 항상 이 두가지 유형의 사람들이 이야기가 어지럽게 얽히고 설켜있고, 많은 충신과 간신들이 한 시대의 대미를 장식하는 이들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그런 삶의 행적은 시대의 변화나 시간의 흐름 또는 한 인간의 죽음으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역사라는 기억속에 각인되어 현실보다 더 준엄하게 판단을 받곤 합니다. 의로웠고 충성스러웠던 이들은 후대에도 위인으로 추대받으며 책으로, 소설로, 드라마로 반복하여 사람들에게 칭송되지만, 간신이나 역사의 배반자로 낙인찍힌 이들은 두고두고 비난과 무시 속에서 고개를 숙이게 됩니다. 이 책은 역사의 심판에도 불구하고 시대마다 반복되며 지속되는 간신들의 모습과 이미지를 (중국역사 속에서) 찾아 고발하고, 현실속의 우리의 자화상을 들여다보며 그런 과거의 역사속에서 배워야 할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격정어린 주장을 담은 책입니다.  아마도 저자는 독자들에게 우리 시대의 모습이 자신이 살펴본 중국 역사속의 간신들이 활보하던 시대상과 닮아있다는 염려와 일정 부분 과거의 간신현상이 우리 주변에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경고와 함께 간신들은 자신이 살던 당시만이 아니라 죽어서까지 역사의 준엄한 심판을 받는다는 교훈 -경각심-을  알리고자 한 듯 합니다. 

  자신의 권력과 욕망의 성취를 위해 자식을 삶아 바친 춘추시대 제나라 환공 때의 역아에서 시작하여 자신의 권력을 위해 기꺼이 한 나라를 말아먹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던 명나라 숭정제 때의 온체인에 이르기까지 19명의 이야기..... 이들의 특징은 왕이나 황제의 심기를 홀려 한 나라를 뒤흔들만한 권력을 가졌다는 것, 그리고 그 권력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심지어 자신에게 이득이 된다면 나라에 해가 되는 짓도 서슴치 않았다는 것, 또한 주어진 권력을 나라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사리사욕을 위해 기꺼이 사용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는 것 등등 입니다. 저자가 말하는 나라를 쇠퇴하게 하고 안에서부터 무너지게 만든 치명적인 내부의 적, 바로 간신들의 악행과 기행, 그리고 그들의 최후 및 역사의 심판 등에 대한 이야기인데, 책의 부록에 담긴 중국역사속에서 화려하게(?) 한 시대를 풍미했던 수다한 간신들 중에서도 선택된 19인이니, 간신중에서도 스타급 간신들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책이 역사속에 활보했던 간신들에 대해 단순히 기록하여 알리는 것이 아니라, 간신들이 출현하고 세력을 키우고 나라의 기초까지 흔들리게 만드는 천편일률적인 수법에 담긴 반복되는 닮은 꼴 역사에 대한 통찰력을 가질 것을 강조하고 있다는 면에서도, 이 책의 의도는 단순히 역사를 돌아보는 것을 넘어, 저자가 염려하였던 우리 사회에 넘치기 시작하는 간신 현상에 대한 염려와 경고를 함께 담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저자는 책의 첫머리에 공자가 경계한 나라와 백성을 해치는 다섯가지 간신 유형에 대해서 이야기 합니다. "통치자가 제거해야 할 인물은..... 첫째가 마음을 반대로 먹고 있는 음험한 자이고, 둘째가 말에 사기성이 농후한데 달변인 자이고, 셋째가 행동이 한쪽으로 치우쳐 있고 고집만 센 자이고, 넷째가 뜻은 어리석으면서 지식만 많은 자이고, 다섯째가 비리를 저지르면서 혜택만 누리는 자이다...." 그리고 그들의 특징으로 마음속에 '진실이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고, 그들은' 나라를 뒤엎을 자'들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공자의 말을 따른다면 저자의 말처럼 지금 우리 사회 곳곳에서 불행의 싹이 보이지 않는 곳을 찾기가 어렵고, 사방에 간신의 망령들이 어슬렁거리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 의미인지 몰라도 저자는 본문의 한 곳에서, 우리 사회 곳곳에 넘쳐나는 간신배들의 유형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정치판의 간신 정간은 기본이고, 이들에 빌붙어 알랑거리는 언론계의 언간, 배운 것을 왜곡하여 학문적인 양심은 물론 자신의 영혼마저 저당 잡히길 서슴지 않는 학간, 권력마저 돈으로 살 수 있다며 열심히 권력자의 비위을 맞추는 상간, 심지어 무인이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기본기마저 망각한 채 더러운 권력의 쓰레기 더미를 향해 킁킁거리며 달려가는 무간, 종교라는 권위에 빌붙어 세상을 밝히기는 커녕 악취만 풍기고 다니는 목간, 여기에 대중을 기쁘게 하고 즐겁게 하던 딴따라가 하루아침에 권력자의 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며 아양을 떠는 뭐라 이름 붙이기조차 민망한 간신들까지." 이러한 저자의 열변은 누구를 구체적으로 지적한 것은 아니지만,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우리 사회의 모습이 정말 그렇다고 수긍할 만한 이야기이지 않을까 합니다. 다만 한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은 역사속에서 만난 간신배들의 모습을 우리의 현실에 연결시켜 보고자하는 열정이 넘치기는 하나, 저자가 말하는 이 시대의 간신이랄수 있는 구체적인 대상에 대한 지적이 분명하지 못해서, 책을 보는 어떤 이는 적어도 나는 아니라는 식의 회피를, 그리고 어떤 이는 그렇다면 이런 지적에 걸리지 않는 이는 누구냐는 자책에 이르고 마는 것은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저자는 우리 사회의 간신 현상을 지적하고 경고하고자 했지만, 매번 현재 우리사회에 대한 이야기에서는 구체적인 사례나 사건보다는 원론적인 이야기로 끝내는 수준이어서, 결국 읽는 사람으로서는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에 해당되는 이야기, 또는 나를 포함한 모두의 이야기로 받아들이고 말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공자의 가르침이나 저자가 예로 든 19명의 삶을 들여다보면, 분명 우리시대에는 각 개인에게 은연중 권장되는 세상살이에 대한 교훈들이 과거의 간신들을 키우던 토양하고 많이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드는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보다는 나를 먼저 생각하게 만드는 경쟁을 부추기는 교육, 더 많은 부나 경제적인 발전을 위해서 작은 것이나 소수의 삶은 과감하게 무시해버리는 경제정책들, 내 의견의 관철을 위해서 상대편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것마저 마다하지 않는 정치권과 사회 여러 분야의 갈등 현장들, 자신의 성공과 이익을 위해서 영혼이 죽은 수단과 방법을 설파하는 자기 계발서들 등등..... 역사의 기준으로 보면 분명 간신이 되기를 부추기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여러가지 것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리고 그리 생각한다면 이 시대에 사악한 간신배들이란 누구를 말해야 하는 것인지..... 그 막다른 골목에서 스스로에게 공자님의 다섯가지 유형을 되물으며, 저자의 이 책이 다른 사람들을 무작정 비난하는 도구의 하나가 되지 않기를..... 먼저는 스스로를 비춰보고 정결케하는 기회가 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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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기독교의 비밀
바트 D. 에르만 지음, 박철현 옮김 / 이제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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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역사인가? 사람들 사이의 투쟁과 쟁취의 역사일 뿐인가?' 초기 기독교의 성립과정에 담긴 사실들, 예를 들면 신약성경 27권의 정경으로서의 확정 과정과 여러 위서들의 등장과 그 배경, 여러 기독교 세력의 출현과 소멸, 상호 견제와 투쟁, 그리고 원기독교의 승리로 막을 내린 기독교의 초기 역사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이 책을 읽노라면, 저자의 말을 듣기 전에 먼저 기독교의 성립과정에 대한 여러 사실들을, 기독교 성립에 관여하신 하나님의 역사과정으로 받아들일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여러 기독교 세력들이 정당성을 부여받고 세력을 확장하기 위한 과정에서 더 나은 비젼이나 교리를 마련한 세력의 승리였을 뿐이라고 받아들일 것인지에 대한 나름의 자세가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실제로 기독교 신앙을 배타적이라고 말하는 비기독교인들의 비판이 일견 타당해 보이기는 하지만, 기독교인들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종교가 가르치는 가장 기본적인 교리 자체가 이미 그런 배타성을 품고 있는지라 서로 타협할 수 없는 것을 타협하자고 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듯이 -물론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기독교의 배타성을 넘어선 사람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고, 또한 그러한 자세가 최소한 정통(?) 기독교가 말하는 신앙적 가치안에서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 책을 대하는 독자의 자세에 따라서 저자가 말하는 내용들이 천양지차의 간극으로 다가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때문입니다.  

 저자의 기독교 초기 역사에 대한 접근법은 신앙이라는 관점보다는 인문학에서의 눈높이로 관찰하는 것입니다. 즉 신약성경 27권이 정경으로서 승인되는 과정, 에비온 파나 마르시온 파 그리고 영지주의자들이 이단적인 사상으로 몰리고 원정통 기독교가 정통으로서의 권위를 얻게 되는 과정, 승자로서의 원정통 기독교가 교리를 더 다듬고 논리적인 틀을 형성해 가면서 저지른(?) 것으로 생각되는 여러 논증이나 공격, 위조, 변조 등을 살펴보는 과정에서 저자는 원정통 기독교 나름의 그만한 세력과 권위를 얻을 만한 장점이 있었다는 인정을 해주기는 하지만, 순전히 세력과 세력의 다툼과 투쟁의 역사에서 승리한 결과로서의 기독교, 처음부터 정통성을 지닌 것이 아닌 단지 한 정파였을 뿐이지만 여러 방면에서 수완을 발휘하여 반대 정파들을 하나씩 제압해 나가는 과정에서 교리적으로 그리고 논리적으로 더 완벽한 틀을 만들어가는 승자로서의 역사가 현재의 기독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저자의 관점안에는 신앙으로서의 기독교,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기독교라는 관점은 당연히 배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인으로서 이 책을 읽다가 발을 헛디디면, 자신의 종교와 믿음의 근본 바탕에 대한 시험의 순간이 다가올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그러한 과정이 결코 무익한 것이 아니고, 그런 시간 뒤에는 좀더 깊이 있고 폭이 넓어진 신앙으로의 과정이 뒤따를 수도 있으리라는 점은 인정해야겠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책을 저자의 관점을 따라가며 숙고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신앙적으로 하나님께서 관여하신 역사의 과정이라는 시각으로 다시 해석해 보는 노력이 필요하리라는 생각입니다.  

 이단과 정통 -초기 기독교의 역사에서는 저자의 말처럼 모든 것이 처음부터 이단인 것이 아니고 원정통 기독교가 권위을 획득하면서 그외 다른 정파들이 이단시 되었지만, 현재는 분명 교리에 비추어 보아 이단적인 정파들이 주위에 많습니다-에 대한 이해, 예수의 인도 고행설이나 막달라 마리아와 은밀한 관계였다는 낭설, 또는 예수가 동성애자였다는 이야기들의 출처와 그것들이 유통되게 된 기제에 대한 이해, 현재의 기독교 교리들에 대해 단순한 교리공부 이상의 의미를 알게 한 형성과정과 그러한 과정에 담긴 의미에 대한 더 깊이 있는 만남..... 이 책을 순전한 신앙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너무 인본주의적인 관점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지만, 그래도 저자의 여러 자료를 통한 고찰과 주장을 통해서 배울 수 있었던 내용들입니다. 단순히 신앙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던 나의 종교를, 신앙을 배제한 사람들 사이의 투쟁과 성취의 과정을 담은 역사로서 대한다는 것은 조금 당혹스러운 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미처 알지 못하거나 소홀히 했던 사실들, 또한 그러한 과정에 담긴 역사로서의 기독교에 대한 신앙적인 이해의 깊이를 더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저자가 말하는 잃어버린 기독교들이란 신앙인의 관점에서 다시 해석해 본다면 정당한 권위를 지닌 올바른 기독교의 성립을 위한 하나님의 연단과정이라고 할 수 있지는 않을는지..... 하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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