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어부가 11살 난 딸에게 말한다.

"너는 나중에 판사 되지 말아라.

공부를 잘 해 사법고시 붙을 수 있다 해도 판사는 되지 말아라.

시인이 되어라."

딸이 묻는다. "시인이 뭐야?"

어부가 다시 말을 잇는다.

"아니면 철학자가 되어라.

세상을 비판하는 시인이나 철학자가 되어라"

 

새만금 물막이 공사가 거의 완공될 무렵 대법원은 결국 정부의 손을 들어주었다.

대법원 판결이 있던 날, 계화리에 사는 아버지는 방바닥에 엎드려 숙제를 하던 딸에게 저렇게 말하였다.

그러다가 "아유 내가 지금 열한 살 난 딸한테 무슨 말이여"하며 허탈하게 웃어 버린다.

 

다큐멘터리 <살기 위하여> 시사회를 보고 온 날,
새만금 갯벌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에 부끄럽고 괴로웠다.
그리고 '먹고 사는' 문제가 이 세상의 그 어떤 진리보다 더 숭고한 것임을,
진짜 철학은 그 어떤 석학의 사상이나 언어에서가 아닌, 먹고 사는 문제에 부대끼며 사는 그네들의 생각과 말에서 찾을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더 부끄러웠다.

<살기 위하여>에 등장하는 주인공들-매일 먹고 살기 위해 평생을 바다와 갯벌에서 살던 그네들이 하는 말 속에서 그들이 분노를 느끼는 지점, 그들이 비판하는 지점이 무엇인지 곱씹어 보자.

그 예리한 통찰력에 나는 정말 깜짝 놀랐고, 곧이어 (놀라워하는 나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자만한가를 깨닫고는) 부끄러웠으며, 다시 숙연해졌다.

지난 시사인에 실린 조국 교수의 칼럼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었다.

얼마 전 <한겨레21>(2009년 2월20일자)이 이명박 대통령의 국정운영 평가에 대한 여론조사를 했다. 그런데 ‘고·소·영’ ‘강·부·자’ 정권이라고 비난받는 이명박 정부에 대하여 가장 후한 점수를 준 계층은 역설적으로 저소득층이었다.  저소득층은 현 정부의 교육 경쟁 강화, 종부세 완화 등 자신에게 불리한 정책도 지지하는 경향을 보였다. (...) 서울 강남 지역 주민이 철저하게 계급 이익에 충실한 투표를 하는 것과 대조되는 이러한 현상을 두고 ‘계급 배반’ 투표라는 분석이 뒤따른다. (...) ‘계급 배반’이라는 분석이 현재 저소득층 유권자가 지닌 정치의식의 현실을 알려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이 분석 뒤에는, 저소득층은 지식 수준·교육 수준·정보 접근력 등이 낮다 보니 자기 밥그릇도 못 챙기며 자기 발등을 찍는다는 식의 비난성 설명이 뒤따르기도 한다. 그러나 필자는 이러한 비난만으로는 저소득층의 ‘계급 충실’ 투표를 기대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특히 그 비난이 저소득층의 밥 한 끼 가격에 에스프레소를 마시는 ‘진보파’ 고소득층의 지적·도덕적 우월성을 수반한 비난이라면 더욱더 그렇다.


'진보'라는, 어떤 고상한 가치에 대해 이해하기 힘든 말로 설파하는, 또 그것이'원칙적으로 옳게 말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이해하려면 공부를 하라고 말하는 지식인은, 필히 <살기 위하여>를 보아야할 것이다.  

밥벌이에 치여 사는 그네들이야말로 "밥의 지엄함"을 알고 있기에 더 자명한 진리를 이야기하고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자연스럽게, (굳이 표현하자면)자신의 이익이 계급 전체의 이익을 대변하고 있으며, 생태계를 지키고 있으며, 진보를 실천하고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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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안. 밤.
 
(off sound) "(앵커) 이번 대법원의 판결로 마지막 남은 새만금의 물길이 덮이게 되었습니다..."
 
딸(11)은 바닥에 엎드려 그림을 그리고 있고, 홍선장은 고개를 푹 숙이고 tv를 바라보고 있다.
 
홍선장 : 어민은 사람도 아니란디. 아가야, 어민의 딸은 사람도 아닌거여.
홍선장 :  니는 커서 공부 잘 해두 판사 같은거는 절대 되지 마라.
딸 : (관심도 없이) 판사가 뭐야?
홍선장 : 니가 판사 된다고 하면 내가 너랑 확 연을 끊어버릴텡게.
딸 : (바다 그림만 열심히 그린다)
홍선장 : 그려, 시인이나 철학자가 되그라. 그라서 세상에 대한 비판 좀 하고 살아라.  
딸 : 시인이 뭐야? ... 난 바다가 좋단게! 
   

 
다큐는 세상의 진실을 비추는 한줄기 빛 같은 거다.
그래서 투박한 질그릇에 담겨있더라도,  진실한 삶의 내음이 담긴 인간의 냄새를 맡고,  온기를 느끼는 우리는 감동하게 되는 거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10년이 넘게 싸워온 그들의 일은 그저 신문 한 귀퉁에서 슬쩍 보고 넘어가는 무관심 사건이었다.
 
새만금 간척사업이 진행중인데, 환경적으로 문제가 많고, 어민들의 터전이 막막하다 라는 그저 피상적인 정보 뿐이었다.
그건 그저 그들의 일일 뿐, 내가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으므로 그저 창문밖 불구경이었을 뿐이었다.
 
이 모든게 전복된건, 바로 작년 촛불때였다.
꾹 참다가, 도저히 그대로 있다가는 두고두고 후회할듯 해서 호기심 반 거리에 나갔다가 첫날 물대포와 방패세례에 호되게 당하고 줄기차게 나갔었다.  


그저, 말도 안되는 꼴통들의 짓거리가 꼴보기 싫어 소수정당에 투표를 꼬박꼬박 하는 것으로 책임을 다했다고 생각했던 내게 그 촛불은 충격이었다.
평생 책상머리에서 배운것을 거리에서 단 며칠만에 다 배워버렸다고 해야 할까...
 
헌데,
인간과 관계된 모든 것이면, 나와 상관없는 것은 없는 것은 단 하나도 없다!
 
전 세계 4대 갯벌인 서해안.
한반도에 인류가 정착한 이후 그 갯벌은 육지의 유기물을 분해하는 필터였고, 소금과 어패류, 생선을 주던 생존의 일터였고,
새와 게, 조개와 미생물까지 동거동락하던 생명의 보고 였었다.
 
헌데, 일제의 식량 수탈을 위한 간척사업으로 시작해서  박통의 건설경기 부양을 위한 대규모 간척, 그리고 현재의 시화호, 새만금 등 부동산 간척까지... 
 

도대체 이 매번 반복되는 약자에 대한 수탈과 핍박의 싸이클은 어떻게 맞서야 하는 것일까...
 
영화를 보는 내내, 가슴이 터져버릴듯 답답했다. 
 

전국 300만을 기록한 메가톤 흥행작 다큐  '워낭소리'는 시골에 대한, 늙어감에 대한, 노부부에 대한, 정서적인 울림으로 따듯했었는데,
이 영화 '살기 위하여'는 따듯하기보단 한 여름에 사막에서 팔팔 끓는 가마솥에 맨손을 넣는 느낌이랄까, 먹먹함 그 자체였다.
 
세상에 대한 안타까움과  무관심에 대한 죄책감과 리더들의 정치적 술수에 대한 분노, 생명에 대한 엄숙함 까지...
신경이 곤두서고, 심장이 울렁거리고, 호흡도 쉽지 않게 만드는 꽤 불편한 영화임에 틀림없다.
 
바로 그 불편함이 엔딩크레딧에 이르면 죽어버린 갯벌에서 생일 케이크를 먹으며 막걸리 한잔에 활짝 웃는 이모들의 얼굴로 인해 화악 따스함으로 변해간다. 
 

바닷물이 없어 말라 비틀어 가는 조개들이 살아남기 위해서 제 몸의 수분을 빼내며 끝까지 버텨가고 있듯이,
달랑 보상금 몇백만원에 평생 해온 일자리가 없어지고, 새와 조개들과 노닐던 천국이 없어지고, 동료가 갑작스런 사고로 세상을 떠나더라도, 
 

살기 위하여, 죽음 속에서 생명을 일으켜야 하고, 울음 속에서 웃음을 터트려야 하고, 말라버린 갯벌에서 조개와 여전히 함께 버텨야 하는,
바로 우리의 이모들, 형님들처럼 말이다... 
 
지금 이 땅이 바로 이 새만금이다.
촛불이 그랬고, 용산이 그랬고, 대운하도 그렇고, 경제불황도 그렇고...
 
말라 비틀어진 갯벌에서 바짝바짝 타들어가는 백합조개처럼, 우리 모두는 지금 어디로 가야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타들어 가고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생명은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니다.
 
삶에 위기가 닥치면 생명체는 저항을 하게 마련이고, 진화를 통해 변화하게 마련이고, 바뀐 환경에 적응하게 마련이니까...
아무리 세상이 이렇게 바닥을 치더라도, 우리는 살아남을 꺼다.
 
' (남들을 죽여서 잘 먹고 잘) 살기 위하여 ' 가 아닌,
'(남들과 함께 제대로) 살기 위하여'
 
잘 먹고 사는게 행복이 아닌, 제대로 사는게 행복이 되면 되는 것이다!
 
이 세상 사람들 모두가,
판사가 아니라 시인이 된다면,
 
그런 세상이 온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사랑으로 넘치게 될까...

[출처] [시인이 된다면...] 새만금 다큐 '살기 위하여' |작성자 mov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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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영화
2009 희망 다큐프로젝트 4탄, '생명'

[살기위하여], - 살아있는 모든 것들을 위한 아름다운 몸부림.

 

첫 장면부터 앤딩크래딧까지, 그리고 그 후에도 눈물이 자꾸만 흘렀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문득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흘린 그 눈물로 갯벌을 살릴 수 있다면 얼마든지 더 울 수도 있겠다.' 메마른 갯벌에서 '희망'을 놓지않는 어민들을 보며 많이 울고, 많이 배웠습니다. 

 살아있는 모든 것에 '생명'이 깃들어 있다는 것 또한 되새겨봅니다. '희망', 앞으로 잘 될 수 있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힘을 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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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 『살기위하여』시사회에 다녀왔습니다.



영화 중에 이런 대화가 있습니다.

"너는 대한민국이 버린 딸이야.."
"너는 커서 절대 판사 같은거 하지마라."
"시인이 되어라, 시인이나 소설가같은거 되서 사회비판 좀 해라."
"에효~내가 초등학교 4학년 생이랑 뭔 이야기를 하는거야?"

"너는 대한민국이 버린 딸이야"라는 말이 아이러니합니다.
정부에서 새만금 사업을 진행을 강제적으로 진행을 하고 법원에서도 정부의 편을 들어주자 새만금에 사는 어부의 말입니다.

『살기위하여』가 좀 늦게 개봉이 되긴 했지만..
오히려 요즘같은 세상에서는 언젠가
 나도 대한민국이 버린 사람이 되어 버릴 수도 있겠구나...
 내 친구는 대한민국이 버린 친구가 되어 버릴 수도 있겠구나...
 미래의 나의 자식도 대한민국이 버린 아들,딸이 되어 버릴 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더욱 강하게 들었습니다.

"대한민국이 버린..." 이 한 마디에 새만금 주민의 억하고 억울하고 답답하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모든 심정이 그대로 들어납니다.
그리고 이건 단순히 새만금 주민의 문제만이 아닌 우리 모두의 문제입니다.

시사회가 끝나고 이강길 감독과 김종광 작가와의 대화 시간에.. 이강길 감독은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영화는 타겟을 정하고 찍어요.. 누가 많이 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찍습니다. 저는 일반 대중을 타깃으로 하고 찍지 않았어요... 솔직히 말하면 말이예요... 지금 이 시사회 자리에도 활동가라는 분들이 계실지는 모르겠지만.. 계시다면 그 분들께 죄송하지만.. 저는 활동가분들이 이 영화를 많이 보았으면 좋겠어요. 왜 막지 못하고 알리지 못하고.. 그냥 당할 수 밖에 없도록 방치하는지.. 저는 활동가 분들도 많이 변해야하고 변했으면 좋겠습니다."
(모든 내용이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아 제가 느낀 감정이 들어간 '기억'대로 적습니다.^^ 감독님의 의도가 왜곡되지만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이강길 감독님의 말 중 '활동가'라는 말이 '우리'라는 말로 들렸습니다.

관심을 갖기는 쉽지만 올바른 관점-혹은 정확한 인식-을 갖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중요합니다.
말하기는 쉽지만 행동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중요합니다.

 
주변의 사회운동 혹은 활동을 하시는 선배들을 보면서 저런 것보다는 이런 것도 필요하지는 않을까라고 생각하면서..
행동하기를 꺼려하고 분위기를 보면서.. 논리('혀')로 뭔가 해볼려고 하는... 이성('머리')으로 생각해보려고 하는...
제가 이 영화를 보고 나니 공허해집니다. 혼란스러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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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크면 판사가 되지 마라..  

아니 공부를 잘해서 판사가 된다고 해도 내가 반대할것이다. 

시인이 되거라 아니 철학자가 되거라. 

그래서 사회를 비판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거라. 

새만금사업이 법원에서 최종 판결 나던날 홍선장님과 딸이 나눈 대화의 요지였다. 토시하나까지 정확히 기억 할 수 는 없지만 정의에 편에 서지 못하는 헛똑똑이 판사보다,사회를 비판 할 수 있는 시인이라든가 철학자가 더 절실했을 그 마음을...  내가 얼만큼 공감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집으로 돌아온 나는 제일 먼저 타이레놀을 먹을 수 밖에 없었다. 새만금에 대한 이야기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것은 고작 언론을 통해서였다. 그렇다 보디 당연히 그 곳에서 살고 있는 이들의 목소리 보다 환경단체의 목소리를 더 많이 듣고 있었던 것 같다.그리고 그들이 참 많이 노력하고 있구나,그럼에도 이렇게 힘든 것인가 라고 혼자 자괴감에 빠지는 것이 전부였다.그리고 그런 마음은 영화를 보는 처음에도 따라오고 있었다.감독은 왜 환경의 문제로서가 아닌 생존의 문제로 새만금을 이야기 하는 것인가? 라고 정말 오만하고 모순으로 가득한 나를 발견 하는 순간이었다.영화를 통해 새만금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고 싶었던 나의 근본적인 동기 자체가 깨어지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그러니까 이 영화는 새만금에 대해 환경적으로만 인식하고 있던 나에게 더 근본적인 절실한 문제를 인식하게 만들어 주었다는 생각이었다. 그 짧은 두시간 가량 보는 내내 머리가 아프다는 이유로 타이레놀에 의지하는 내 모습이 못나 보이기도 했지만 물막이 작업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절망하고 있었다. 칼과 총만 들이대지 않은 것이지,저 것이 살인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살인이다 너무도 무자비한 살인이었다. 어디에다가도 항거 할 수 없는 무참한 살인.. 멀쩡한 사람들을 식물인간으로 만들어 버렸다는 기분은 공포 그 자체였다. 얼마전에 <고추장 책으로 세상을 말하다>라는 책을 읽었다. 거기엔 이런 말이 있었다."삶의 터전을 잃게 된 곳에서 우리 모두는 농민이며 생명의 위협을 받는 곳에서 우리 모두는 새만금의 조개입니다."라고  

영화가 끝난 후 이어지는 감독과 모내기블루스라는 책을 쓴  저자의 입에서도 한 목소리가 나왔다. 지금의 이십대가 새만금의 갯벌 같고,비정규직 노동자가 모두 갯벌 같고 새만금 같다고,용산참사가,사회 곳곳이 새만금이 되어 가고 있다고...그럼에도 희망을 노래하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영화를 보면서 희망을 볼 수 없었다.새만금에 무관심했던 내 자신의 모습에 부끄러운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었다. 환경보호라는 시선으로만 새만금을 보고 있었기때문은 아니었을까? 환경 보다 더 절박한 생존권이 있었음을 깨달았다.  

살기 위하여 절박한 마음으로 오늘도 갯벌로 나갔을 계화도이모들에게 응원의 박수를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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