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타 창비시선 284
신경림 지음 / 창비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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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림 시인이 '또' 시집을 내놓았다. 그는 그의 '전집'을 엮어 낸 적이 있다. 전집들이 대개 시인 사후에 묶여 나오는 것이 일반적인지라, 신경림 시인이 두 권으로 묶어낸 '전집'을 나는 애써 외면했다. 시인이 절필을 선언한 것도 아니고, 전집을 낼 당시(2004년) 고희를 앞둔 나이임에도 여전히 그는 시적 감수성에 충만한 '현역' 시인이었으니, 그즘의 전집이 결코 전집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번에 시인이 『낙타』란 시집을 또 내놓았으니, 이전의 전집은 이제 '전집'이 아닌 게 된 셈이다. 어찌 되었건 새 시집을 내놓았다는 소식에는 반가움을 금할 수 없다. 그는 내가 사랑하는 '살아있는' 시인이니까.

신경림을 떠올리면 새삼 감사를 전해야 될 곳이 있다. 바로 MBC의 <느낌표>란 프로그램이 그것이다. 지지리도 책을 안 읽는 대한민국에 한때나마 독서열풍을 몰고 왔던, 꽤 공이 많은 프로그램이었는데, 거기서 선정한 도서 중에 『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가 있었고, 그것을 계기로 나는 신경림에게 더욱 매력을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그 시절, 이래저래 방향도 잡지 못하다 끌려가듯 군대에 가서, 어느 것 하나도 낙이 없이 지내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찾은 게 책이었고, '느낌표' 열풍에 살작 기댄 것이었다. 시에 관심을 꽤나 가지고 있던 터라, 신경림이 찾아간 옛 시인의 자취들, 신경림이 풀어내는 그 시인들의 노래들을 읽으며 참 행복했다. 군대라는 살벌한 공간에서 길 떠나는 노(老)시인을 따라 옛 시인들의 흔적을 찾아가는 것은 내게 참으로 행복한 낭만을 주었다. 그것을 통해 더욱 신경림 시인에게 끌리게 됐고, 신경림 시인의 시들까지도 찾아 읽게 되었다. 그의 유명세만큼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의 시를 여러편 탐독한 것은 아니었기에, 그의 시를 접하면서는 더욱 이 시인이 좋아졌다. 어쩜 이런 시를 써낼까, 감탄하면서. 가령 이런 시들 말이다.

   
 

다들 잠이 든 한밤중이면
몸 비틀어 바위에서 빠져나와
차디찬 강물에
손을 담가보기도 하고
뻘겋게 머리가 까뭉개져 앓는 소리를 내는 앞산을 보며
천년 긴 세월을 되씹기도 한다.

빼앗기지 않으려고 논틀밭틀에
깊드리에 흘린 이들의 피는 아직 선명한데,
성큼성큼 주천 장터로 들어서서 보면
짓눌리고 밟히는 삶 속에서도
사람들은 숨가쁘게 사랑을 하고
들뜬 기쁨에 소리 지르고
뒤엉켜 깊은 잠에 빠져 있다.

참으려도 절로 웃음이 나와
애들처럼 병신걸음 곰배팔이 걸음으로 돌아보는 새벽
별들은 점잖지 못하다
하늘에 들어가 숨고
숨 헐떡이며 바위에 서둘러 들어가 끼어앉은 내 얼굴에서는
장난스러운 웃음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

―「주천강 가의 마애불―주천에서」전문(『달 넘세』, 창작과비평사, 1985.)

 
   

신경림이 옛 시인들을 찾아 이러저리 떠돌았던 데에는 지나온 이력이 있다. 그는 시인만을 찾아 떠돈 것이 아니었다. 그가 고백하듯이 그는 장돌뱅이를 한 적도 있었다. 그러면서 이리저리 장이 서는 곳들을 찾아 떠돌았을 것이다. 그렇게 그가 떠돌면서 보았던 애틋하게 삶에 충실했던 농민들, 서민들, 민중들의 모습을 이렇게 시로 그려냈다. 주천강 가를 지나다 본 마애불에서 그는 '장난스러운 웃음'을 보았다. 그것은 그의 웃음이기도 하다. "짓눌리고 밟히는 삶 속에서도" 사람들은 그 질긴 삶을 "숨가쁘게 사랑을 하고" 때론 "들뜬 기쁨에 소리 지르"며 살아간다. 그 모습들에서 시인은 삶의 소중함과 행복을 보았던 것이 아닐까? 그는 "이웃들의 정서나 설움, 얘기 같은 것을 외면하지 않겠다"고 했고, "시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한 조건을 만드는 데 일정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나는 왜 시를 쓰는가」) 했다. 그 이웃들은 설움 속에서도 그렇게 "사람답게 살"고 있음을 볼 때, 너무나 좋아서 "애들처럼 병신걸음 곰배팔이 걸음으로" 부처님 체면은 아랑곳없이 춤을 춘다. 이 한 편의 시만으로도 나는 신경림을 대단한 시인으로 인정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 시인이 전집을 엮어 내었을 때, 나는 이 늙은 시인이 시 쓰기를 그만할 작정인가 염려했었더랬다. 그러니 이번 시집이 무척이나 반가울 수밖에. 그런데 그런 반가움을 뒤로 하고, 이번 시집을 읽으면서 나를 온통 흐느끼게 한 것은 노(老)시인을 감싸고 도는 왠지 모를 죽음의 그림자였다. 그래서 이번 시집 한 편 한 편을 흐느끼며 읊었다. 아, 이 시인도 그가 찾았던 옛 시인의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려는구나.

   
 

낙타를 타고 가리라, 저승길은
별과 달과 해와
모래밖에 본 일이 없는 낙타를 타고.
세상사 물으면 짐짓, 아무것도 못 본 체
손 저어 대답하면서,
슬픔도 아픔도 까맣게 잊었다는 듯.
누군가 있어 다시 세상에 나가란다면
낙타가 되어 가겠다 대답하리라.
별과 달과 해와
모래만 보고 살다가,
돌아올 때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 하나 등에 업고 오겠노라고.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았는지도 모르는
가장 가엾은 사람 하나 골라
길동무 되어서.

―「낙타」전문

 
   

시집 『낙타』는 여는 이 시에서 나는 '낙타'를 타고 쓸쓸히 길 떠나는 시인을 본다. 사막을 그 고된 길을 낙타는 뚜벅뚜벅 느리게, 그러나 꾸준히 걸어간다. 등은 굽어 뒤우뚱거리며 걷는 것이 마치 어느 늙은이의 쓸쓸한 뒷모습 같다. 그런 낙타를 타고 "가장 가엾은 사람", 곧 시인이 저 멀리 사막의 길을 간다. 일흔을 넘긴 시인에게 드리운 것은 저 '저승길'의 "별과 달과 해"일 뿐이다. 이번 시집은 이 노시인이 차분하게 그러나 "아무것도 못 본 체" 낙타를 타고 걸어가는 사막길에서의 편지가 아닐까?

그 가는 길에서 시인은 "굵은 주름투성이 늙은이"와 "눈에 웃음을 단 아낙"과 "조그맣게 엎드려 사는 사람들"과 어느 또다른 늙은이가 저 뒤어서 타고오는 '조랑말'(「이역(異域)」)을 본다. 때론 '사랑방에' 앉아 계셨던 '할아버지'도 보고, '건넌방에' '아버지'도 보고, '할머니'를 보고 '어머니'를 본다. "철없는 아이가 되어 딱지를 치고 구슬장난을 하"(「즐거운 나의 집」)던 자신의 옛모습도 본다. 그는 또 '고목을 보'면서는 이렇게 읊는다.

   
 

내 몸의 상처들은
왜 이렇게 흉하고 추하기만 할까
잠시도 한곳에 머물지 못하고 떠돌게 하던
감미로운 눈발이며
밤새 함께 새소리에 젖어 강가를 돌던
애달픈 달빛도 있었고
찬란한 꿈 또한 있었건만
내게도

―「고목을 보며」부분

 
   

그렇게 먼 길을 가면서 시인은 '이역'의 사람들을 보기도 하고, 지나간 옛 추억에 침잠하며, 그리운 사람들을 떠올리기도 하고, 이제는 "흉하고 추하기만" 한 제몸을 돌아보며, 지난 날에 품었던 '찬란한 꿈' 이루지 못했음을 한탄하기도 하면서, 천천히 죽음의 길을 간다. 그가 가는 길은 "무너진 성과 집 사이의 무성한 잡초 속"(「폐도(廢都)」)이기도 하다. 그 사이에는 "먼 세상과 나를 하나로 잇는 강물이, 그리고/가까운 세상과 나를 둘로 가르는 강물이." 흐르고 있기도 하다. '낙타'를 타고 가는 그 길은 '사막'이고, '무너진 성과 집'을 지나며, '무성한 잡초 속'이기도 하고, 그 옆으로는 "세상과 나를 둘로 가르는 강물이"(「나와 세상 사이에는」) 흐른다. 이 모든 것에서 죽음의 이미지를 끌어내는 것은 괴이한 일이 아닐 것이고, 시인에게 죄송스런 말씀도 아닐 것이다. 그가 우리에게 보내는 이 편지들은, 그 길을 가면서, 차분하게 마음을 정리하는, 마지막 편지, 마지막 시편들이 아닐까? 시인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세상은 즐겁고 서러워 살 만하다고"(「귀로(歸路)에」).

이번 시집의 구성을 보면, 시인의 죽음에 대한 정서를 강하게 내포하고 있는 시편들은 1~2부에, 그리고 3부에서는 파괴되고 오염되어가는 현대 사회에 대한 비판의 시편들을, 그리고 4~5부에서는 기행시편들을 모아두고 있다. 사실 그의 시편들은 기본적으로 '기행'으로부터 탄생하지만, 4~5부에 실린 시편들이 보이는 차이는 국내가 아닌 국외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 담고 있는 정서와 메세지는 여는 시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시집 말미에 담긴 산문 「나는 왜 시를 쓰는가」에서 시인은 자신의 시 인생을 겸허히 토해내고 있다. "내 시가 우리 사는 일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면서" "세상을 위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시가 시시해지고 문학이 우스워졌"던 시에 대한 회의를 고백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웃들의 정서나 설움, 얘기 같은 것을 외면하지 않겠다는 생각"과 "시는 그 시대의 문제에 대한 질문이요 대답이라는" 시인 나름대로의 시에 대한 정의에 입각하여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한 조건을 만드는 데 일정한 부분 책임을" 지는 시를 쓰고자 했단다.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시인은 "더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문학성 높은 시를 쓰고자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남이 알지 못하는 것, 남이 보지 못하는 것, 남이 만지지 못하는 것을" 찾아 끊임없이 헤매었다. 그런 그에게 결론은 "그 시대의 삶에 깊이 뿌리 박는 것으로 충분하지 그 이상의 해답은 있을 수 없없고, 오늘의 내 삶, 우리들의 삶에 충실한 시를 쓰자"였다. 그것이 시인의 길이었다고 말한다.

그런 점에서 이번 시집의 3부에 엮인 시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시적 성취에서는 좀체 신경림 시인의 명성에 부합하지 않지만 말이다. 4부와 5부에 엮은 시편들은 이역 만리를 여행하면서 거기서 보고 느꼈던, "남이 알지 못하"고 "남이 보지 못"했던 것을 시로 풀어냈다. 그러나 거기에서 본 그 타국의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도 "한 오십년쯤 전/안성 장터 어느 골목으로 사라지던/떠돌이 젊은 악사와 닮았다 그 어깨가./몇봉지 약을 팔기 위해 저녁 한나절 기타를 켜고는/절뚝거리며 골목으로 들어가던 그 어깨"를 바라본다. 우리네 삶과 그리 다르지 않음을 본 것이다. 어느 세상에서는 사는 모습과 애환과 설움은 비슷한 것이라는 이야기를,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고 "사람답게 살" 만한 세상을 함께 만들어 가야 한다고 말하는 듯하다.

이번 시집에서 보여주는 그의 시편들은 지난 날의 그의 시들과 그리 다르지 않다. 그러나 왠지 모르게 노쇄해 보인다고 해야 할까? 간혹은 시적 성취는 좀 떨어져 보이는 것 같다(특히 3부의 시편들이 그렇다). 그러나 고희를 넘긴 시인이 써낸 시들은 그 나름대로 가치가 있고, 그가 세상에 대고 격없이 퍼붓는 비판들은 그만큼이나 힘이 있고 울림이 있다.(가령, "그 잘나고 힘센 사람들은 다 두고 제일 못나고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만 수만 수십만이 죽고 다치고 부서져야 했는가?"(「아, 막달라 마리아조차!」)라는 절규가 그렇다. 상투적이라고 누가 감히 말하겠는가? 노시인의 애틋한 절규에 대고.)

노시인 신경림의 마지막 시집이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가득한 이번 시집 『낙타』는 그래서 끝까지 안타까움으로 읽혔다. 마지막이 아니길 바란다. 그러나 한편으론, 이제 서서히, 우리도 이 노시인의 기나긴 시적 여정을 기릴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노시인이 무거운 걸음을 애써 옮겨가며 우리에게 전해 주었던 아름다고 낭만 넘치는 옛시인의 자취와 노래들에 감격했듯이, 우리도 이 노시인이 낙타를 타고 사라진 이후를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끝내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나서는 찾을 수 없는 노시인의 아름다운 모습들을, 아직 우리 곁에 남아있는 이 행복한 순간에 많이 많이 남겨두어야 하지 않을까? 이제는 우리가, 이 노시인을 찾아갈 때다. 얼른, 출발하자. 시인을 찾아서, 신경림을 찾아서 말이다.

   
 

그러나 이번 시집 『낙타』의 시들을 쓰는 동안 나를 사로잡았던 가장 중요한 생각은 시 작업이야말로 세계화, 디지털 시대에 가장 적합하지 않은 일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빨리 변하고 쾌속으로 질주하는 속에서 시는 어쩔 수 없이 느린 걸음으로 걸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시는 언젠가는 버려질 방언 같은 것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빠른 흐름 속에서, 또 세계의 말이 온통 하나로 통일되어가는 세계화 속에서 느린 걸음, 방언은 비단 무의미한 것은 아닐 터이다. 그 느림과 방언에서 오늘의 우리 삶이 안고 있는 갈등과 고통을 덜어줄 빛을 찾을 수도 있고, 병과 죽음을 몰아낼 생명수를 찾을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 근래 두리번거리면서 느릿느릿 걸어 간다는 생각으로 시를 쓴다, 많은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중얼거리면서.

―「나는 왜 시를 쓰는가」에서

 
   

아! 내 더 큰 바람은 이 노시인이, 이 큰 시인이, 빠르게 흐르는 세월 속에서도, 꿋꿋하게 버티었으면, "두리번거리면서 느릿느릿 걸어" 갔으면, "많은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더라도, 계속해서 이 아름다운 그의 "방언을 중얼거"려 주었으면, 그랬으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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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왕국의 게릴라들 - 삼성은 무엇으로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가
프레시안 엮음, 손문상 그림 / 프레시안북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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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뉴하트'의 디질랜드 속에서 헤맬 때, 나는 KBS에서 방영한 '쾌도(快刀) 홍길동'을 봤다. 지성과 김민정의 '뉴하트'가 세간의 주목을 받을 때, 드라마에 곧잘 폐인되는 나도 무척이나 궁금했어지만, 나는 그래도 홍길동과 허이녹(유이녹)을 택했다. 왠지 모르게 나는 이 드라마에 끌렸다. 사극은 드라마에 고정 시청자층을 확보하고 있는 장르다. 현재 각 방송사에서 방영하고 있는 드라마 중에서도 사극이 차지하는 비율이 꽤나 높은 것은 그 이유에서다. 간혹 사극 열풍을 등에 업고 퓨전 사극을 표방하는 드라마들이 곧잘 있었지만, 정통 사극에 비해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이번 '쾌도 홍길동'도 마찬가지였다. KBS에서는 전에도 '쾌걸 춘향'이라는 퓨전 사극을 방영한 적이 있었는데, 그것도 거의 재미를 못봤다.(지금 생각해 보는 '쾌걸 춘향'은 사극이라고 보긴 힘들겠다.)

이전까지의 퓨전 사극이 이처럼 재미를 못 본 것은, 그것이 '퓨전'으로서의 재역할을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정통 사극은 다소간의 첨가와 상상이 가미되긴 했겠지만, 그것의 역할은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그것을 흥미롭게 전달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퓨전 사극은 이와 다르다. 우선 '퓨전'을 표방했다는 것은 고전과 현대를 절묘하게 조합하겠다는 의도를 내포한다. 그런 가운데 상상력을 충분히 발휘하며 현대적 의미를 강하게 담아내야만 그것이 흥행을 떠나서 성공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를 가지게 된다. 그간 퓨전 사극이 대체로 '실패'했다고 말할 때에는, 이러한 '퓨전'이 가지는 의미들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했다는 뜻이 크다.

내가 볼 때 이번 '쾌도 홍길동'은 그런 식의 실패는 전혀 아니다. 오히려 나는 이 퓨전 사극이 제대로 '성공'했다고 당당히 말해야겠다. 비록 그것이 '뉴하트'라는 강적을 만나서 대중의 관심을 강하게 끌지는 못했지만, '쾌도 홍길동'은 그것이 표방한 '퓨전 사극'으로서 그 역할을 최대로 발휘했고, 다양한 재미와 함께 당대 사회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의미심장한 메세지를 전달하고 있다. 지금까지 보였던 모든 사극(정통과 퓨전을 통털어) 중에 가장 성공적이고 재미와 의미를 동시에 담아낸 최고의 사극을 꼽으라면, 약간의 주저와 함께 이 '쾌도 홍길동'을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쾌도 홍길동'은 고전소설 '홍길동전'을 각색한 퓨전 사극이다. '홍길동전'은 누구나 다 아는 고전소설로, 완전한 영웅소설이다. 비범한 재질을 가지고 태어난 홍길동이지만, 서자라는 출생의 한계에 의해 고난에 부딪히고, 그는 세상에 대한 변혁을 꿈꾸며 세상과 싸우다, 결국 율도국이라는 이상의 나라로 간다는 그런 이야기다. 그런데 이 퓨전 드라마는 대략적 구도는 고전 '홍길동전'과 비슷하지만, 그 전개과정은 지극히 현실적이고, 사회비판 의식도 당대적 의미를 무척이나 반영했다.

우선, 홍길동은 서자로 태어난 것, 재능이 출중한 비범한 인물로 태어난 것 등은 비슷하지만, 그가 커나가는 과정에서 영웅의 기상을 찾아볼 수 없었다는 설정이 다르다. 그는 자신의 태생적 한계를 인정하고 시정잡배로 살아간다. 그러던 중, 그는 자기와 같은 소외된 사람, 태생적으로 한계지어진 사람을 보고 그로부터 세상의 모순과 억압을 보게된다. 그러나 그는 그런 세상에 자신이 그들의 대신해서 맞서 싸울 의지를 갖지는 못하다가, 차츰차츰 변화되고, 자각한다. 세상과 맞서 싸워서 변화시켜야 한다고 말이다.

홍길동과 그의 일당들(이 드라마 속에서 활빈당은 홍길동과 그 일당들이 의도한 명명은 아니었다. 어쩌다 사람들이 지어준 것에 불과했다.)은 더이상 주저하지 않고 세상과 강하게 맞서 싸우고, 자신들이 선택한 왕을 세우기에 이른다. 그러나 그 왕의 세상과 그들이 꿈꾸는 세상은 애초에 다른 것이었고, 그들이 선택하여 세운 왕의 세상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세상을 꿈꾸는 것조차 불가능한 것이 되고 만다. 그 둘의 대결은 불가피한 것이 된다. 결국 홍길동과 그 일당들은 고전과는 달리 다분히 현실적으로 강한 왕의 군대에 의해 죽어갔고, 그들이 꿈꾸는 세상은 그렇게 꿈으로만 남게 된 것이다.(이 드라마 속에서 홍길동이란 인물의 현실성은 고전과는 달리 굉장히 부각된다. 그만큼 그는 영웅의 면모는 절대 아니다. 이 드라마 속에서 말하고자 하는 영웅의 모습은, 일개의 시정잡배일지언정, 세상의 모순과 억압, 그로부터 소외된 자신과 민중을 보고, 격분하여 세상을 바꾸고 변화시키고자 미약하게나마 맞서 싸울 때, 민중들이 그에게 부여한 명예가 되는 것, 그것이 진짜 영웅이라는 것이다.)

이 드라마의 마지막 장면에서, 홍길동과 그 일당들의 결말은, 확실히 보여주는 것은 아니지만, 결국 죽음으로 끝났다는 것을 강하게 암시한다. 그러나 살아남은 노승과 곰이를 통해, 그리고 홍길동을 기억하는 많은 민중들의 가슴속에 홍길동은 영원히 살아있고, 여전히 세상을 변혁을 꿈꾸는 것이라고 말한다. 노승은 이렇게 말한다. "어느 세상에나 홍길동은 있다"고. 바로 이것이 이 퓨전 사극 '쾌도 홍길동'이 이 불합리한 사회에 전하는 메세지다.(참고로, 여주인공 이녹이란 인물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내가 볼 때 허이녹(유이녹)으로 분한 성유리가, 지금까지 그가 맡은 모든 역할 중에 가장 연기를 (성공적으로) 잘 한 것이 이 드라마다. 이녹 또한 많은 아픔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항상 밝고 착한 마음으로, 순수하게 살아가는 인물이고, 도저히 악할 수 없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러나 그녀가 끝내 홍길동과 함께 한다는 것은, 그렇게 순수하고 선한 민중들이 그 순수과 선함 그대로를 간직하고 착하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은 홍길동이 꿈꾸는 그런 세상이란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드라마 얘기를 너무 오래 장황하게 했지만, 그것은 이 '쾌도 홍길동'은 너무나 재미있었고, 감동적이었으며, 꿈과 희망의 메세지를 담은, 그러면서도 지금의 현실을 우습게 풍자하기도 하고, 비판적 칼날을 날리기도 한, 정말 성공적이 드라마였기 때문이다. 이 드라마에 이제 종영했지만, 이 드라마의 마지막 메세지, 즉 "어느 세상(시대)에나 홍길동은 있다"는 메세지와 최근에 읽은 『삼성왕국의 게릴라들』이 강하게 겹쳐졌기 때문이다.

노승은 말한다. "어느 세상에나 홍길동은 있다"고. 세상을 노려보고, 그 불합리에 격분하며, 그러한 세상의 변화를 꿈꾸는, 그런 홍길동은 언제, 어디서나, 그 누구에게나 존재한다고. 그래서 세상은 조금씩 변화하고, 차츰 살만한 세상으로 변해가게 된다고. 그것이 느리고 더딜 것이지만. 그런데, 그런 노승의 말이 다만 허황된 이상에 지나지 않을까 우려할 필요는 없다. 그 증거, 곧 이 시대에 살아있는 홍길동들이 여럿 있음을 이 책 『삼성왕국의 게릴라들』은 증명하고 있다. 삼성 비자금을 양심고백한 김용철 변호사, 김용철 변호사를 신앙으로 받아들이고 세상에 선전포고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삼성 족발 체제를 파헤집고 있는 김상조 교수, "나를 고소하라"며 삼성과 정권의 유착관계와 X파일 물고 늘어지는 노회찬 국회의원, 삼성과 돌이킬 수 없는 전쟁을 벌이고 있는 '심상성'이라 불리는 심상정 국회의원, 기자정신에 투철하여 모든 두려움을 누리고 공익과 민중을 위해 당당히 삼성 X파일을 취재 방송한 이상호 기자, 삼성의 무노조 신화의 폭력에 맞서 민주노조 건설을 위해 투신한 김성환 위원장 등이 그들이다.

이 책 『삼성왕국의 게릴라들』이 증거하는 이들은 대한민국, 곧 삼성 이건희 회장의 왕국에서 그 거대 왕과 맞서서 진정한 대한민국, 곧 이 나라 민중들이 주인되는 세상 건설을 위해 투신한 게릴라들이다. 아니 세상의 변화를 꿈꾸고, 세상의 악을 노려보고, 고발하며, 투철하고 혈혈단신 싸우는 이 시대의 홍길동들이다. 그래서 퓨전 사극 '쾌도 홍길동'을 보면서, 그리고 그 드라마가 세상에 전한 희망의 메세지를 보면서, 나는 이들을 떠올리고, 이들이 이 시대의 홍길동들이며, 그래서 여전히 희망이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들은 드라마 속의 홍길동처럼, 자신이 왜 세상과 맞서야 하고, 싸워야 하는지, 그들은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차츰차츰 자신과 민중들이 고통당하고 착취당하며, 세상이 점점 사람이 사람답게 살지 못하는 세상이 되어가는 것을 보면서, 그것이 부당하고 불합리한 불한당들의 억압과 폭력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되었고, 그것과 당당히 맞서 싸워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아닐까? 이들은 태어나길 영웅으로, 투사로 태어난 것은 전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제 우리의 영웅들이다. 삼성과 맞서는 것은 그들 스스로도 말하듯이 두려움 그 자체다. 드라마 속의 홍길동도 그런 두려움에 갈등했다. 그러나 끝내 홍길동은 꿈꾸었다. 그 꿈은 이제 다시금 이 게릴라들, 아니 이 시대의 홍길동의 후예들, 분실들에 의해 다시 꾸어지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이 땅의 소외된 자, 핍박받는 자, 착취당하는 자, 불합리에 굴복하여 울고 있는 자, 아니 우리 모든 민중들에게 우리도 이제 '홍길동'이 될 것을 말하고 있다.

지금 이들이 싸우고 있는 것은, 그들이 맞서 싸워 이루어 낼, 그들이 꿈꾸는 세상은 이녹이와 같은 우리 무지하지만 순수한, 살아가는 그것 자체가 선한, 그런 사람들이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다. 그런 세상으로 가는 데에, 삼성이 자꾸 걸린다. 그래서 그들은 삼성과 싸우고 있다. 이것이 희망 아닌가? 드라마 속의 홍길동처럼 다만 꿈으로만 기억되고 사라져갈지라도, 세상은 그 사라져가 만큼 변화할 것이다. 그러나 이 드라마 속에서 모든 민중들이 홍길동이었다면, 세상은 당장에 변화했을 것이고, 홍길동의 꿈은 현실이 되지 않았을까? 그럴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니까 이 시대 홍길동이라 불릴 명단에 김용철, 사제단, 김상조, 노회찬, 심상정, 이상호, 김성환 다음으로 우리들의 이름을 하나씩 적어볼 생각은 없으신지? 내 이름도 저 어디 말단에 적힐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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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불온서적을 읽자!' 서평이벤트2 &lt;삼성왕국 &amp; 비정규직&gt;
    from 진보생활문예 『삶이 보이는 창』 2008-08-27 15:42 
    의 서평이벤트 2 '불온서적을 읽자!' 서평이벤트2 이번에는 '불온서적을 읽자!' 서평 이벤트 2편이 찾아왔습니다. 지난 이벤트에서는 신청이 많이 저조했습니다. 조금 급하게 진행되면서 홍보가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은 탓도 있었고, 서평도서 3권 중에 [말해요 찬드라]를 제외한 [공장은 노동자의 것이다]와 [물류를 멈춰 세상을 바꾸자!]는 조금 무거운 주제의 책이며, 발간된지 시간이 좀 지나서 시의성을 많이..
 
 
가시장미 2008-03-27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라마평과 서평을 한꺼번에 감상하게 되었군요. ^^ 이 시대에 홍길동이 정녕 있단말입니까~ 제가 그들을 잘 몰라서 인지도 모르겠지만, 있다면 빨리 나타나줬으면 좋겠네요.
'명박씨가 사실은 저는 명박이가 아니에요~~' 라고 말하기 전에요. ㅋㅋ

2008-03-27 12: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신은 위대하지 않다 (양장)
크리스토퍼 히친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마 / 2008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만약 하느님이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면, 왜 우리는 하느님의 자연스러운 능력을 이렇게 끊임없이 '찬양'해야 하는가? 다른 건 몰라도 이건 정말 노예처럼 비굴한 행동 같았다. 만약 예수가 우연히 만난 맹인을 치료해줄 수 있다면, 아예 시력을 잃는 사람이 없게 만들 수는 없는 건가? 예수가 악마를 쫓아낸 것이 뭐 그리 대단한가? 악마가 사람 대신 돼지 몸속으로 들어가게 했을 뿐인데. 이건 좀 사악한 짓 같았다. 흑마법처럼. 사람들이 이렇게 끊임없이 기도를 드리고 있는데 왜 아무런 효과가 없는가? 왜 내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 한심한 죄인이라고 계속 말해야 하나? 섹스에 관한 이야기를 그토록 유해하게 생각하는 이유가 무엇인가?(14~15쪽)  
   

히친스가 "어렸을 때 머뭇거리며 제기했던 이 의문들"과 비슷한 것들이 내게도 있었다. '내게도 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문제는 히친스에게나 혹은 "세상에 지극히 흔하게 퍼져 있"는 이런 의문들을 품은 이들에게 "어떤 종교도 여기에 만족스러운 대답을 내놓"고 있지 못한다는 데에 있다. 사실 나는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그 모든 능력이 사실 그대로라면 히친스와는 달리 "끊임없이 찬양"할 마음이 충분하다. 그러나 창세기 1장 1절의 그 구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는 그 말부터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전지전능한 하나님, 지고지선의 하나님이 사탄도 만들고 그와 함께 '재미난' 내기도 한다는 그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는 가인과 아벨, 그리고 또 누가 있었던가? 그렇다면 인류가 이만큼 번성한 것은 가인이 자웅동체였거나 아담과 하와의 숨겨둔 딸과 근친상간을 했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이외에도 나는 히친스만큼, 아니 그 이상의 의문들로 가득했다.

'사랑의 하나님'이 그렇게도 많은 인간들을 끊임없이 죽이고, 벌하고, 씨를 말렸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하나님이 선악 관념이 분명해서 그렇다지만, 우리에게 말하는 사랑은 아가페가 아닌가? 아가페적 사랑은 예수의 새로운 창조물인가? 예수 이전의 하나님은 그런 사랑을 할 줄 몰랐나? 그건 이상한 하나님이다. 때론 TV드라마 속의 연인들처럼 사랑에 배신당하고 처절한 복수를 하는 것을 볼 때, 하나님을 배신한 인간들이 참혹하게 죽어갔던 이야기를 떠올리면서, '질투하는 하나님'은 어딘가 모자란 신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주말 연속극에 '하나님'이 언제쯤 나올지 궁금해 하면서.

세상에 존재한다고 알려진 신들 중에 가장 많은 인간들을 죽인 신은 단연 기독교의 하나님일 거라는 말을 하면 불경한 것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그것이 성스러운 경전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죽어간 인간들이 무수하게 나온다. 그래서일까? 나는 이 성경(특히 구약)을 읽으면서 종종『삼국지』를 떠올린다. 어디에서 더 많은 인간들이 죽었을까를 헤아려보는 것은 짓궂은 일인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구약을 읽으면서는 『삼국지』만큼의 드라마틱하고 스펙터클한 재미를 느낀다. 아니 그 이상으로. 간혹 어떤 구절들에서 성스러운 가르침을 얻기도 하지만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창세기>를 가득 채운 인간들의 거대한 오류를 다시 볼 수 있다. <창세기>를 쓴 것이 신이 아니라 무지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한 문단으로 증명할 수 있을까? 인간이 모든 짐승과 새와 물고기를 '지배할 권리'를 얻었다는 점이 바로 그 중거이다. 성경에 예를 들어 공룡들의 이름이 구체적으로 명시되지 않은 것은, 저자들이 공룡의 존재를 몰랐기 때문이다. 성경에 유대류가 언급되지 않은 것도 오스트레일리아(중앙아메리카의 뒤를 이어 '에덴동산'의 새로운 후보자)가 지도상에 나와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창세기>에서 인간이 세균과 박테리아를 지배할 권리를 얻지 못했다는 점이다. 저자들이 꼭 필요하지만 위험하기도 한 이 생물들의 존재를 몰랐으니까. 만약 이 생물들의 존재가 알려졌다면, 그들이 우리를 '지배'한다는 사실이 금방 분명해졌을 것이며, 사제들이 옆으로 밀려나고 의학 연구가 마침내 기회를 얻을 때까지 누구의 도전도 받지 않은 채 그 지배권을 마음껏 즐겼을 것이다.(137~38쪽)  
   

히친스의 재치있는 이런 반증말고도, 나는 성경(특히 구약)이『삼국지』보다 더 재밌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어느 정도 이상의 인간의 가필이 성서에 있을 거라고 믿는다. 하여간에 나는 어떻게든 노력했지만, 성경의 모든 것을, 어쩌면 기독교 성립의 전제를 믿지 않으면서, 기독교를 믿었다. 그래서 아직까지 날나리 신자에 그치는 것인가 보다.

그러나 구약을 넘어서 신약에 이르러 예수 탄생 이후의 시나리오는 거반 마음에 들었다. 동정녀의 몸에서 예수가 탄생했다는 설화는 그 수준에서 '아름다운' 이야기로 받아들인다. 물을 포도주로 변하게 했다는 기적은 또 얼마나 유쾌한 일인가? 신약 속에 가득한 예수란 인물의 이야기들은 많은 부분 감동으로 넘친다. 그리고 그가 한 말들은 그다지 걸러낼 것들이 많지 않은 좋은 얘기들로 가득하지 않은가? 나는 그래서 예수가 좋았고, 여전히 기독교 신자를 자처하고 있는 것이다. 십자가에 달려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음을 당한 예수란 인물, 아니 신성을 가진 예수를 그대로 믿는 것은 어느 누구에게나 선택의 문제일지 모르지만, 그의 설법들은 오늘날에도 가히 혁명적인 말들로 가득하다. 나는 어쩌면 그 혁명가적 예수를 꿈꾸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지금 이 기독교가, 그리고 세상의 종교가 욕먹는 이유는, 적어도 히친스가 유쾌하게 씹어대는 세상 종교의 죄악들은 성경속의 하나님도 예수도, 그리고 알라신도 아무런 책임을 질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인간이 썼건 신의 영감으로 지어졌건 간에, 그것을 '어리석게'도, 아니면 교묘하게도 제멋대로 이용한 것은 인간들이기 때문이다.

도킨스와 마찬가지로 히친스는 이 책에서 신은 단지 인간의 '형상'대로 인간적 감성으로, 인간의 필요성에 의해서 창조된 것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그런 히친스에 대해 그게 아니고, 성경에 이렇게 저렇게 써 있으니, 이것은 거룩하시고 전지하시며 전능하신 하나님이 쓰셨다고 반박하는 것은 현재로선 어리석어 보인다. 그러나 그것이 누구에 의해 창조되었건 간에, 우리는 그에 구애받을 이유가 하등 없는 것도 사실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흔히 기억하는 신화나 전설이 구태에 그 창작자가 누구인가를 두고 갑론을박하지 않듯이, 성경 또한 그러한 수준에서 생각할 수 있기에 충분하다.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이용하고 활용하는가이다. 그러니까 성경무오류설에 입각하여 사탄, 마귀새끼를 철저히 응징하고 뿌리뽑겠다는 십자군적 망상에 사로잡힌 종교 근본주의가 문제인 것이다. 종교를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중요하지 그것이 진짜냐 가짜냐를 논하는 것은 쓸데없는 또다른 근본주의가 아닌지도 모르겠다. 오늘도 어디쯤에서 밥퍼주는 목사님이나,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라던 성철 스님은 걸리적 거릴 것이 거의 없지 않은가?

   
  이슬람의 기원은 이슬람이 표절한 다른 종교들과 마찬가지로 수상쩍다. 이슬람은 스스로를 엄청나게 부풀리며, 추종자들에게 납작 엎드리는 복종이나 '굴복'을 요구하고, 신도가 아닌 사람들에게는 존중을 요구한다. 이슬람의 가르침에는 이처럼 오만하고 뻔뻔스러운 행동을 정당화해주는 것이 전혀, 눈곱만큼도 없다.(195쪽)  
   

히친스의 이 말처럼, 성경을 들먹이고 코란을 들먹이며 종교를 지배수단으로 제멋대로 이용하고 사리사욕을 채우며, 인간을 무참히 짓밟으려고 하는 것이 결국 문제인 것이다. "역사적으로 종교는 지상의 독재체제와 내세의 절대적인 통제에 무릎을 꿇었을 뿐만 아니라 그런 사상을 널리 퍼뜨렸다." 그렇게 지배체제에 종속되고 인간을 억압하고 강제하는 것으로 쓰인 종교는 원초적으로 사라져야 할 것이다. 이 외에도 히친스가 말하는 종교의 악행 혹은 잘못된 쓰임은 수두룩하게 많다. '좋게 말해서' 종교가 인간에게 위안을 주고 안식처를 마련해 준다는 것을 십분 인정한다 하더라도, 종교란 이름으로 수많은 생명들을 죽이고, 잘못된 편견과 혐오를 조장하며, 심지어 "종교가 건강에 해로울 수"도 있다고 말한다. 또한 종교는 내세에 대한 허황된 기대와 염려를 팔아서 장사를 하고, 파렴치하고 반인류적인 지배체제와 타협하고 복종해 왔다. 히틀러의 친구는 저 로마 카톨릭의 교황이었다. 그 뿐인가? 종교를 아동 학대를 서슴지 않았다. 구약에도 아비의 헛된 약속으로 딸은 번제가 되었고, 이삭은 죽다가 살아났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인 인간들이 제멋대로 신을 악용한 것의 결과일 따름이다. 그들은 신성한 성경이니, 코란이니 하는 것들을 들이대지만, 그것이 있는 그대로 사실이고 절대적이라고 신도들에게 강요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바다는 커녕, 집 앞에 흐르는 졸졸 시냇물 한 번 갈라보지 못했을 뿐더러, 어떤 불구덩이에도 들어가 본 적이 없지 않은가? 우리는 주몽이 위기에 처해 도망가다가, 강물에 막혀 더는 도망가지 못하고 있을 때 거북이 들이 나와서 다리를 마련해 주었다는 신화를 기억하고, 견우와 직녀를 만나게 해준 까치와 까마귀를 기억한다. 그러나 어디까지 그럴 듯한 이야기로 여길 뿐이다. 그렇다. 우리도 성경을 그렇게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성경을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만약 신이 있다면, 신이 하늘에서 웃을 일이다. 아니면, 나는 억울하다고 하소연할 일이거나.

내가 볼 때, 하나님은 억울하다. 예수님도 억울한 측면이 있다. 알라신도 그렇고, 부처도 어차피 피해神이다. 세상 모든 신(神)들이 히친스에 의해 이 무한한 죄의 굴레를 띄집어 쓰게 만든 것은 단지 인간일 뿐이다. 신이 있든 없든 그것은 아무 상관이 없다. 또한 인간이 신을 있다고 믿든, 없다고 치부하든 마찬가지다. 몹쓸 인간들이 있을지도 모르고 없을지도 모를 신을 몹쓰게 이용하고 애용한 것이 죄다. 그리하여 신(神)은 무죄하다. 나는 그 무죄한 신을 선별적으로 믿는다. 아니 믿고 싶다. 예수의 사랑을, 하나님의 그 어리석음까지도.

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도올 김용옥이 떠올랐다. 그 특유의 삡싸리 나는 굉음이 섞인 '이~게, 이게'하면서 내뱉은 우습기까지한 신랄한 욕설과 독설이. 히친스의 이 시니컬한 종교비판은 도친스를 읽을 때 느꼈던 것과 비슷했다. 다만 도킨스를 읽으면서 느꼈다 묵중함 보다는 히친스를 읽으면서 보다 유머러스하게 시니컬한, 그래서 도킨스의 것보다 더 재밌게 읽혔다. 아무튼 이 책은 히친스의 역작이고, 대체로 수긍할 수 밖에 없는 종교인으로서는 뼈저린, 그러면서도 굉장히 기분 나쁜 책임에 분명하다. 이 책을 읽는 내내 히친스가 김용옥의 얼굴을 하고 그 기분나쁜 얼굴로 독설을 퍼붓는 듯 했다. 그러나 나는 너무나 흥미롭게 이 책을 읽었다. 미안한 말일지도 모르지만, 재밌게 말이다. 히친스가 말한 대부분을 수긍하면서, 내 연약한 마음은 인간을 미워하되 신은 미워하지 말기를 당부한다. 신은 무죄하다. "우리가 담론에서 종교적인 색채를 모조리 없애버린다는 단 한 가지 조건만 충족시킨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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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길을 주어야 할 곳이 세상엔 한 가득인데, 책에다만 이렇게 주구장창 눈길주는 것이 면구스럽니다. 요즘 UCC가 나도는 것을 지나치기만 했는데, 마노아님 서재에서 보고는 기겁을 했다. 진성고의 학생 인권 유린 사태를 당국은 조속히 조속하여 해당자를 처벌하고 상처받은 학생들에게 다시금 밝음을 주어야 할 것이다.

아까 낮에는 진보신당 홈페이지에 갔다가 얼결에 당원으로 가입했다. 특정 정당에 당원으로 가입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진보란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라는 생각하에 그들이 그런 세상을 만드는 정말 진보로 신나는 당이 되길 바란다. 그렇게만 된다면, 아니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그들이 그런 노력을 보여준다면, 매달 나가는 당비가 거금 10,000원이 아깝지 않을 것이다.

개는 책을 읽지 못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내 버릇은 개를 줄 수가 없으니, 오늘도 이 노릇만 어쩔 수 없이 한다. ㅎㅎ

[종교/기독교]
꿈꾸는 터 편집부,『개(開)독교를 위한 변명』, 꿈꾸는 터, 2007.12.

종교가 싸잡아 욕먹긴 하지만, 언제나 그 중심엔 기독교가 있었다. 최근에 이르러 많은 이들이 '개독교'라고 부르고, '먹사'라고들 부르는 건 다 이유가 있어서다. 그런데도, 이들 개독교 먹사들은 자성은 커녕 반성 한마디 하지 않는다. 장로 대통령 만들겠다고 목에 핏대를 세우는 데만 혈안이었고, 결국 성공했다. 그러나 그 장로 대통령이 개독교를 더 망치면 망쳤지 고쳐 줄 수는 만무한 일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스스로 개독교를 표방한 젊은 기독교 청년들의 자성의 목소리, 혹은 변화의 목소리를 담았다. 그간 개[犬]독교로 대표되는 기독교가 외부와의 문을 차단하고 폐쇄적으로 안에서 곪아 터져왔다면, 이제는 사회와 소통하고 열린 기독교로서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는 메세지를 담고 있는 듯 하다. 이 책은 어디까지는 기독교 내부의 청년들의 목소리지만, 그렇다고 이것을 온건히 개독교 내부의 목소리, 내부에서 울어나는 자성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아직까지 개독교의 먹사들, 주류 기독교의 지배층들은 반성할 기미가 전혀 없으니까. 그런데 중요한 것이 있다. 동음이의어를 이용한 언어 유희가 돋보이지만, 사실 어감이 영 이상하긴 한다. 분명 개(開)독교는 좋은 기독교 하자는 것 아닌가? 그래서 우리는 구분해 발음할 필요가 있다. 개[犬]독교의 개는 장음이다. 그래서 발음은 [개-독교]해야 한다. 그리고 개(開)는 단음이다. 그래서 그냥 짧게 [개독교]하자.

[역사/미국사]
하워드 진 · 레베카 스테포프, 『하워드 진, 살아있는 미국역사』, 추수밭, 2008.3.

하워드 진의 『미국민중사』전2권을 가지고 있는데 아직 읽지 못했다. 이 책은 그 두껍고 벅찬 책을 읽기 부담스러운 사람이거나 미국사에 대한 초보적 입문 단계를 거치고자 하는 이들에게 보다 쉽게 간략히 전하는 미국민중사라고 보면 된다. 하워드 진의 명성이야 두 말할 필요 없고, 그가 전하는 정말 살아있는 미국의 역사, 곧 미국 민중들의 역사가 어떤 것인지를 이 책으로마나 맛보고, 곧 『미국민중사』로 본론에 들어가면 되겠다. 참고로 이책은 2006년, 그러니까 부시 정권의 그 폭력적 세계 지배의 추악함도 다루고 있다고 한다.

[만화/바둑]
김종서, 『바둑 삼국지 1, 2』, 랜덤하우스코리아, 2008.2.

나는 만화를 잘 안 본다. 지금까지 본 만화가 『고스트 바둑왕』하고 이 만화다. 그러니까 나는 바둑 만화만 본다. 이 만화는 예전에 파란에 연재되었었다. 그게 단행본으로 나온 것인데, 이 만화의 주인공은 뭐니뭐니 해도 조훈현이다. 쿤켄. 그가 1988년 잉창치배에 혈혈단신으로 출전해서 이중허리 린하이펑과 녜웨이핑을 이기고 우승한 내용의 전반부에서부터 이어지는 흥미진진한 만화다. 조훈현의 이 우승으로 바둑기사로는 처음으로 카퍼레이드도 했다. 아무튼 당시 바둑 불모지, 혹은 중국, 일본에 밀려 바둑 후진국 한국의 바둑기사가 세계 바둑 올림픽이라 불리는 어마어마한 대회에서 당당히 1위를 차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책으로 보는 느낌은 또 다를 것이다. 근데, 김종서는 조훈현의 조카로 알고 있다. 그는 참 조훈현 팔아서 이것저것 많이 한다. 뭐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다. 이창호는 조카가 없나?

[사회과학]
조국,『성찰하는 진보』, 지성사, 2008.3.

얼굴 잘생긴 법대 교수로 널리 알려진 조국 교수의 신간이다. 나는 사실 그를 잘 알지 못하고 이름만 안다. 그런데, 언젠가 걸리겠다고 싶었다. 그가 얘기하고 떠드는 게 나의 관심사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이 참에 확 걸어버릴까? 무엇이든지 성찰하지 않으면 안된다. 조국 교수의 이 성찰은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있을지, 사실 궁금한 내용은 아니다. 뻔한 것일 수 있으니까. 예를 들어, 정치 개혁이나 인권 신장 등은 진보가 아니어도 너무나 잘 아는 내용들이고 많이들 떠들지 않는가? 그러나 바뀌는 것은 미세하다. 그렇더라도 이런 미세한 변화 속에서 인류는 진화해 오지 않았던가?

[역사/현대사]
최영태, 김상봉 외, 『5.18 그리고 역사』, 길, 2008.2.

얼마 전 김상봉 교수를 만남 이벤트 강연회에서 만나 강연도 듣고 술도 한 잔 하고 한 적이 있다. 그때 본인이 학술대회에서 5.18 관련 논문을 발표한 얘기를 많이 했는데, 그 학술대회 발표문들이 모여 나온 것이 이 책이다. 우리에게 5.18은 여전히 가슴 아프다. 그러나 아파만 해서는 안 된다. 5.18이 김상봉의 발표 제목대로 라면 '그들의 나라'를 '우리의 나라'로 바꾸어 가는 밑거름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 책이 나온 것은 그런 이유에서이지 않을까? 헌데, 김상봉 교수는 지난 만남 이벤트 뒷풀이 자리에서 선거거부운동 운운했었다. 그런데 오늘 진보신당 홈페이지에 가보니 진보신당 비례대표 후보 8순윈가 그러던데, 어찌 된 건지는 잘 모르겠다. 모쪼록 진보신당이 이번 선거에서 선전하길 바란다.

[종교/기독교]
맹용길, 『예수의 윤리』, 살림, 2008.3.

오늘은 기독교 관련 책이 눈길에 많이 사로잡혔다. 내가 이 책에 주목하는 이유는 기실 지금 한국기독교가 비판받는 이유는 기독교가 그 근본을 잃어버리고 제멋대로 개독교가 되어서 그런 것이란 생각에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이 말하는 '예수의 윤리' 곧, 사랑으로 되돌아가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이 책이 말하는 예수의 윤리가 정확인 어떤 것인지는 책을 열어봐야 하겠지만, 내가 단언하기는 이 책에서 말하는 예수의 윤리가 지금의 개독교의 행각에 대해서는 냉철하게 비판되는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자자, 어디 예수가 보여주는 기독교의 그 근본이 무엇인지들, 당신님네들께서 생각 좀 해보이소. 그리고 이땅을 살아가는 기독교인들도 예수의 윤리는 무엇인지를 낮게 낮게 내려앉아서 차분히 생각해보는 계기를 가져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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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8-03-26 0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런. 김상봉 교수, 조국 교수 또 책냈어. 사야되자나요.
 

* 3월은 이래저래 바빴다. 봄을 맞아서 해야 할 일들이 밀려들었다. 봄이어서 그런지 이런 바쁜 일상 속에서도 생동하는 느낌을 갖지만, 그래도 바쁘고 정신 없는 건 딱 질색이다. 내 본질적 게으름일지, 대다수의 바쁜 일상에 대한 반항적 게으름인지는 모르겠지만, 모두들 바쁜 것이 좋은 것이고 제일이라고 생각하고 바쁘게, 주위를 돌아다 볼 여유 없이 앞만 보고 가는 사람들을 볼 때, 내가 다 어지럽다. 예전 군대에서 피에르 쌍소의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을 '바쁘게' 읽은 적이 있다. 세 권이나 나왔는데, 지금 기억으로는 세 권을 다 읽었던 것 같지는 않다. 이 책을 만나게 되었던 것은 우연이었다. 심심하던 차에 몇 권 없는 소대의 책꽂이에 이 책이 꽂혀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그 때는 책 읽을 만한 여유로운 짬밥이 아니었던지라, 눈치코치 살펴가며 '바쁘게' 읽었다. 그래서인지,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가 무척 궁금했지만, 진정으로 그 의미를 깨닫지는 못했다. 그래서 제대하면 다시 찬찬히, 제대로 '느리게'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아직 그 생각을 이루지 못했다. 하여간 바쁜 탓은 아니었던 걸로 안다.

 

 

 

 

 

(어라! 그 새 4권도 나왔네.)

** 아침부터 서울서 일이 많았다. 지금까지 사교육을 혐오하고, 나 자신도 사교육을 혜택을 받은 바가 없었지만, 이 땅에서 선생이 되기 위해서는 어쩜 사교육을 받아야 하는 건지 모른다는 생각이 이제는 강하게 든다. 그래서 요새는 고시생들이 칩거하는 옆동네에서 토요일 오전엔 기웃거린다. 사실 뭔가는 해야겠는데, 내 스스로의 의지로는 그 뭔가를 하기가 너무 싫어서, 울며 겨자 먹기로 사교육과 손잡았다. 여전히 공부는 안 되지만, 토요일 아침을 잠으로 허비하지 않고 깨어 있게 해주었다는 것에 위안을 삼는다. 낮에는 바둑 동호회 모임엘 가서 바둑 몇 판을 두고 왔다. 변화 무쌍한 바둑의 세계에서 나는 한갓 하수에 지나지 않지만, 361개의 바둑판은 하수의 돌을 가리지 않는다. 내 무모하고 허접한 인생의 수를 놓을 세상의 바둑판은, 그리 썩 보이지 않아서, 나는 그저 바둑을 두는 것에 무력하게 심취하게 된다.

*** 세상이 자꾸 거꾸로 가는 것 같다. 구 시대적 발상이 광기를 선동하는 것일까? 삽질의 신화로 경제 성장을 이룩하겠다는 세상, 이런 세상에 자꾸들 몰입하면, 적어도 미국에 가서 어륀쥐는 사먹을 수 있으려나? 오늘, 지하철 1호선 막차를 타고 주안역에 12시가 넘어서 도착했다. 버스는 모두 끊기고, 비가 오는 토요일 밤이라 그런지, 택시를 기다리는 손님들이 많았다. 나도 택시를 타야해서 역 앞 택시 승강장으로 갔다. 이상한 것은 승강장으로 마련된 지붕있는 공간은 텅 비어 있고, 죄다들 우산을 쓰고 승강장 반대로 줄을 서 있다. 나는 어쩌라고? 나는 승강장에서 혼자 우뚝하게 서서 택시를 기다려봤다. 하지만 택시는 내 반대로 줄을 서 있는 우산쓴 사람들 차지였다. 내가 선 옆으로 어느 중년 부부가 무거운 짐을 들고 다가왔다. 여기가 택시 타는 줄 맞냐고 묻는다. 나도 택시를 타려고 하는 데, 이게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우산 쓴 사람들의 줄을 본 그 중년 부부는 뭐가 뭔지를 몰라 했다. "비 오는 데, 왜 다들 승강장에서 줄을 서지 않고 거기들 비맞고 있어요?" 그 부부의 질문에 아무도 대답하지 않고, 묵묵히 우산을 들고, 그들은 줄을 서서 간혹 오는 택시를 자기들 줄의 순서대로 탑승했다. 나는 몇 분을 그냥 우둑하니 혼자 서 있다가, 비를 맞으며 조금 먼길을 돌아, 택시가 종종 지나다니는 길거리에서 어렵지 않게 택시를 잡아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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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8-03-23 0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우린 2001년이던가 학부모독서회 토론도서였어요. 그 당시 화두가 '느림'이었지요.^^

멜기세덱 2008-03-24 00:43   좋아요 0 | URL
제 삶의 화두는 늘 '게으름'인데요...ㅎㅎ

2008-03-23 09: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3-24 00:44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