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탑
윌리엄 골딩 지음, 신창용 옮김 / 삼우반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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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의 삶이란 것이 그저 하루하루를 먹고 마시며 때우는 것을 전부로 한다면, 그 삶이란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을까? 현대를 근근(僅僅)히 살아가는 사람들에게야 하루하루의 육체적 삶이 눈앞에 놓인 불똥과도 같겠지만, 그들에게 또한 이상(理想)이 있고, 꿈이 있고, 미래에 대한 장밋빛 환상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저마다의 소중한 꿈과 목표를 가지고 하루하루의 고된 일상과 지루함, 그리고 고통들까지고 감수(甘受)하며 살아간다. 과연 우리가 의도하고 목적했던 바 그 목표를 완벽히 이루어 내는 사람이 많지 않다손 치더라도, 아니 그 가능성이 희박함을 여실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마다의 인간들의 그것에 목숨을 건 인생의 승부를 건다. 과연 그것은 타당한가? 과연 그것은 자기 자신을 내어 던질만한 가치가 있는 승부인가? 그 목표를 이루어 가는 과정에서 우리가 버리고 희생시킨 그 모든 것들의 가치를 그 목표가 보상해줄 수 있는 것인가?

 

  소설 ꡔ첨탑ꡕ은 본질적으로 이런 물음들을 끄집어낸다. 여기서의 그 목표란 ‘첨탑’으로 상징화되어 나타나고, 그 첨탑에 대한 어쩌면 돈키호테적 무모함의 돌진으로 비추어지는 인생의 승부를 건 삶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소설이다.

 

  이 소설의 작가 윌리엄 골딩William Gerald Golding은 우리 일반인에게는 참으로 낯선 작가이다. 나도 부끄러운 고백일지는 모르지만 골딩이라는 작가를 이 책을 통해 처음 접하게 되었다. 윌리엄 골딩은 무엇보다 ꡔ파리 대왕ꡕ으로 유명하고, 노벨문학상을 수상(1983년)한 뛰어난 작가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고 해서 조금은 민망스러울 따름인 것이지, 이 소설을 읽는 데에는 크게 방해를 받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어떤 편견스러움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고도 해야겠다. 과연 ‘첨탑’은 무엇일까를 좇아가면서 읽어낸 인간 본연에 내재한 문제의식들이 스스럼없이 솟구칠 수 있었던 것은 이 소설 이전의 골딩이라는 작가를 내가 알지 못하였기에 오히려 가능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윤동주, 「십자가」(  및 강조 필자)


  나는 이 소설을 읽기 전에 이 소설의 제목이 ‘첨탑’인 것에 윤동주 시인의 위에 인용한 시가 오버랩이 되면서, 과연 이 ‘첨탑’의 의미는 무엇이고 이 소설은 무엇을 말하려 하는 것인가에 대해 매우 궁금해지면서 책장을 하나둘 조심스럽게 넘겼다. 읽고 난 후의 생각은 위의 시에 나오는 ‘첨탑’이, 이 소설의 그것과 다르지 않음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라는 물음에서 우리는 단적으로 ‘첨탑’이라고 하는 상징적 기호가 무엇을 나타내는 것인지는 재삼 말이 필요 없을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이상이요 지향점이다. 우리가 도달하고자 하는 이상적 욕망이요, 목표이며, 타락하고 세속적인 세상과는 다른, 우리를 그것으로부터 격리시켜주는 하나의 이상적 공간이다. 이 ‘첨탑’에 도달하는 것은 어쩌면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고귀한 성인의 반열에 들어가는 것일 터이다.

 

  하지만, 이러한 이상에의 도달에는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수반해야만 한다는 것 또한 사실임과 동시에 비극이다. 비극이라 한 것은 그러한 희생을 완벽히 감당해낼 수 있을 만큼 강인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평범한 인간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첨탑’에 대한 상징적 의미를 소설 ꡔ첨탑ꡕ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주인공 조슬린에게 있어 ‘첨탑’ 건설은 하나의 이상이며, 지향점이고, 도달해야만 하는 사명인 것이다. 하지만 결국 그 과정에서는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흘려야만 했던 것이다.

 

  이 소설은 “줄거리 자체는 단순하지만, 작가는 여기에 대단히 복잡한 상징체계를 결합시켜 ꡔ파리 대왕ꡕ 이래 작가가 일관되게 유지하고 있는 주제 의식을 제시하는 대단히 독특한 작품이다.”(역자 후기, 「윌리엄 골딩의 소설 세계와 ꡔ첨탑ꡕ의 의미」, 282쪽) “영국의 중세를 시대 배경으로 주인공 조슬린이 대성당에 첨탑을 건설하는 과정”이 곧 이 소설의 줄거리인 것이다. 이런 단순한 내용 속에 작가 골딩은 심층적 내면을 서술해 내면서, 다양한 상징적 구조물들을 곳곳에 배치시켜 놓음으로써, 단순한 내용을 전혀 단순하게 읽지 못하도록 의도적으로 구조화시켜 놓고 있다. 이것이 작가 골딩의 위대성이라 한다면 누구나 인정 가능한 위대성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작가적 역량의 위대성 때문에 이 소설은 우리에게 매우 어렵게 다가온다. ‘재독’을 적극 권장하고 있는 여러 비평가들의 이구동성(異口同聲)까지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일독(一讀)이건 재독이건 간에 이 소설을 통해 상징적 표현들을 술술이 풀어내고, 이 안에 담긴 작가의 암호와 전략들을 무장해제(武裝解除)시키는 것에 이 소설의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는 하나의 읽기 방법일 터이지만, 그 상징적, 암호적 서술방식을 넘어서, 혹은 그 이전에 우리에게 주는 무언가가 있고, 그것을 심각하게 고민하고 우리 내면의 성찰을 요구하는 것이 이 소설은 근본적 주제의식이며 작가 골딩이 우리에게 내어놓은 소설 ꡔ첨탑ꡕ의 뛰어난 가치가 되는 것이다.

 

  앞에서 ‘첨탑’이라는 이상에 대한 추구와 도달에의 지향은 “꽃처럼 피어나는 피”같은 희생을 수반한다고 하였다. 이 소설 속에서도 이러한 희생은 필수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작가 골딩은 그것은 단순한 비극으로 마무리 짓지 않았다. 아니 더욱 정확히 이야기한다면 결론을 내지 않았다고 해야 옳겠다.

 

  과연 이상에의 추구를 통해 가져와 그 희생들을 감내해내는 것이 어떤 가치가 있는 것일까에 대한 작가의 물음이 곧 이 소설의 결론이라면 결론이다. 작가는 조슬린의 ‘첨탑’이 아직 무너지지 않고 있음을 애써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자기 자신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의 희생을 강요했고, 피해를 주면서까지 건설해내고 만 조슬린의 돈키호테적 행동이 잘못된 것이라고 단정할 수만은 없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고 그 희생된 제물들의 피해를 무엇으로 보상받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 또한 여운으로, 혹은 작가의 또 다른 목소리로 울려나고 있다.

 

  많은 비평가들이 이 소설의 재독을 권하고 있다. 그 이유는 골딩이라는 작가의 물음에 이제는 답을 찾아보시라는 소리가 아닐까한다. 이제 재독을 남겨진 책임으로 하고, 답을 찾기 이전에 나라는 인생의 ‘첨탑’은 무엇이며, 그 과정 속에서 나는 또 하나의 조슬린이었던 적은 없는 가를 곰곰이 생각해 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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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으로 보는 마르크스
조너선 울프 지음, 김경수 옮김 / 책과함께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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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르크스! 이름만 들어도 무시무시한 인물이다. ‘이다’라는 서술격 조사는 현재형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반문(反問)할 수 있다. “에이, 이 사람아 지금 시대가 어느 때인데 마르크스가 뭐가 무서운가?” 그렇다. 일제 강점기를 거쳐 한반도 남단(南端)에 반공(反共)정권이 들어서고 7~80년대의 군사정권하에 이르기까지 마르크스는 그 이름 자체의 언급만으로도 씻을 수 없는 죄를 짓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시절이 변했다 한다. 90년대 이후 이 땅에 민주화의 토대가 굳건히 서고 이제는 새로운 천년의 도래와 함께 그런 무서운 시대는 갔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마르크스는 여전히 무시무시하다. 왜 그런가?

 

  ‘맑스’라고 한다면 더 친근감(?)이 들지 모르지만 현재 외래어 표기법상 ‘마르크스’로 표기하는 것이 정확하다. 하지만 ‘맑스’라는 표현이 더 현실발음에 가까우면서('Marx'는 1음절의 단어이기 때문에 ‘마르크스’보다는 ‘맑스’(또는 [막스])로 읽는 것이 더 정확할 수 있다.) 더욱 강한 분위기를 띄는 것이 ‘마르크스’보다 더욱 ‘마르크스’스럽지 않은가 생각되기도 한다.

 

  하여간에 ‘맑스’면 어떻고 ‘마르크스’면 또 어떤가? 굳이 구분하자면 이전의 군사정권하 악마시(視)되어 왔던 마르크스를 기억하는 이들에게는 ‘맑스’가 친근할 터이고, 현재에는 그냥 마르크스일 터이다. 그렇다면 현재의 마르크스는 어떠한가? 왜 나는 아직까지도 마르크스가 ‘무시무시’한 인물이라고 생각하는가? 이 물음은 다음과 같이 변형될 수 있다. 아니 그것이 오히려 현문(賢問)이겠다.

 

  “마르크스는 현재에도 유효(有效)한가?” 즉, 오늘날―구(舊)소련의 공산정권이 무참히 무너지고 미국을 대표로하는 자본주의의 재편, 그리고 그 속에서 자본주의와 서서히 타협해 가는 중국을 보라― 마르크스를 언급하는 것에 어떠한 의미가 있을 수 있겠는가? 마르크스의 사상은 이미 실패한 사상이 아닌가? 그러한 마르크스를 현 시대에도 읽어야할 필요성이 있는가? 이런 물음들에 대한 한 마디의 답변이 바로 ‘여전히 무시무시한 마르크스’라는 말에 제대로 담겨 있다고 생각된다.

 

  마르크스는 여전히 무시무시하다. 현대의 학자연(學者然)한다는 사람이라면 마르크스를 피해갈 수 없다. 다양한 분야에 걸쳐 마르크스는 무시무시한 존재로 녹아들어가 있다. 즉, 마르크스를 배워야 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참 무서운 노릇(?)일 테지만,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이 마르크스의 유효성을 강하게 입증한다. 그 사실인즉, 마르크스의 노스트라다무스와 같은 예언적 통찰이 그것이다.

 

  예언적 통찰(豫言的通察)이라니? 무슨 얼토당토않은 소린가? 그렇지 않다. 현대의 자본주의의 폐해가 이미 마르크스의 저술에서 드러나 있다는 사실이 그것을 입증한다. 마르크스는 현대의 자본주의의 비판적 성찰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사상가이다. 그래서 그가 여전히 유효하며, 여전히 ‘무시무시’하다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세상을 떠난 지 언 100여년이 넘었다. 과연 100년의 후의 미래를 마르크스는 눈앞에 놓고 보듯이 예리하게 서술해내고 있다. 이것은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에 전혀 뒤질 바 없지 않은가?

 

  결국 마르크스는 무시무시하다. 이런 마르크스를 알지 않고서는 현대를 살아가는데 있어 지성인으로서의 명함을 내밀 수 없을 것이다. 지성인이고자 한다면 마르크스를 배워야 한다는 소리인데, 또한 무시무시한 것이 마르크스를 배우는 것일 터이다. 《자본론》을 읽어내야 한다는 것, 《마르크스의 초기 저작》들을 두루 섭렵해야 한다는 것, 그 뿐인가? 다양한 분야에서 발전한 마르크스주의의 방대한 양의 이론서들을 접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할 때 가히 ‘무시무시’함은 엄청나게 증폭되어 다가오는 것이 사실이다. 그를 아는 것 또한 이렇게 무시무시하니 내 말이 또한 엄청나게 딱 맞아 떨어지지 않는가? “무시무시한 마르크스”

 

  이런 ‘무시무시’한 마르크스를 “한 권으로 보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역시 불가능(不可能)하다. 터무니없는 생각이고,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마르크스를 ‘무시무시’가 아닌 ‘무시(無視)’의 태도로 대하는 불경(不敬)을 보이는 것이다. 헌데, 190쪽(차례와 찾아보기, 그리고 빈 페이지를 제외하면 끽해야 160여 쪽 밖에 안 된다.)의 그것도 규격이 B6(A4 용지의 절반도 안 된다.) 밖에 안 되는 책의 제목은 당당히 《한 권으로 보는 마르크스》이다. 허, 이런 당돌한 이름을 붙이다니 웃음도 안 나올 일이다. 이런 당돌함과 무모한 이름을 내걸은 책이 어련하겠냐 하는 의심의 눈, 그리고 끝내는 이 책 또한 무참히 그 당돌함에 상처를 입는 것을 보겠다는 억하심정(抑何心情)으로 이 책을 읽어냈다고 일단은 고백을 하고 넘어가야겠다.

 

  결과적으로 이 책이 표방한 제목 ‘한 권으로 보는 마르크스’는 여전히 불가능했다. 하지만 마르크스의 여러 저작을 읽어낼 수 있도록 하는 ‘한 권’임을 인정해야만 했다. 다시 말하자면, 이 책에는 마르크스의 사상의 세계 속으로 빠져들게끔 하는 강한 힘이 담겨져 있다고 하겠다. 이 책의 서문에서 저자는 “위대한 사상가들의 경우 독자가 이미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알고 있을 때에 그 텍스트가 가장 잘 읽히게 마련인데, 그것은 확실히 마르크스에게도 해당된다. …… 기초 지식을 먼저 갖춘 뒤 텍스트를 읽게 되면 그 사상가의 세부적인 생각을 평가 할 수 있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정확히 옳은 말이다. 또한 이것이 이 책의 목적일 수 있다. 마르크스의 깊은 수렁에 풍덩 빠져 그 속에서 허우적거리다 결국 자멸하기보다는, 마르크스의 끝 간 데를 알 수 없는 사상의 바다를 잘 저어갈 배와 삿대를 마련하는 것이 현명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이 책은 그 배와 삿대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남음이 있다.

 

  이 책의 구성을 살펴봄으로써 어떻게 이 책이 그 역할을 해내고 있는가를 보면, 2장에서는 초기 저작들에 나타나는 마르크스 사상의 핵심 요소들을, 3장에서는 마르크스의 전체 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즉 지배적 개념인 ‘계급(階級)’, ‘역사(역사)’, ‘자본(資本)’에 대해 간명하면서도 이해하기 수월하게 서술해 내고 있다. 생각만 해도 따분하게 그지없는 이러한 개념들을 누가 뭐래도 ‘쉽게’ 설명해 내고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이 책은 그것을 해내고 있으니,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다.

 

  4장에서는 “왜 여전히 마르크스를 읽어야 하는가?”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는데, 아마도 이 책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부분일 것이다. 이 책의 원제는 “Why read Marx today?”이다. 즉, “왜 오늘날 마르크스를 읽어야 하는가?” 하는 물음인데, 이 책의 근본적 목적이 담겨있는 주제임에 분명하다. 여기서 마르크스를 읽어야 하는 필요성을 강하게 제시함으로써 우리를 마르크스에 빠질 수밖에 없도록 하는, 좀더 유연하게 말한다면, 마르크스에게 가야만 하는 이유를 제시함으로써 무시무시한 마르크스에 정면 도전하게 만드는, 그리하여 마르크스의 저작들의 저작들을 읽어내게 하는 ‘한 권’의 힘을 발휘하게 하는 것이 이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것이 이 책의 두 번째 장점이다.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 책이 마르크스에게로의 안내자 역할을 더욱 충실하게 만드는 “참고문헌과 ‘깊이 읽기’를 위한 안내”의 역할까지 해내고 있는 자상함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다소 아쉬움이 남는다. 이 책이 한국어판으로 출판된 것을 전제한다면, 한국의 독자들이 쉽게 구할 수 있는 한국어판 마르크스 참고문헌들을 보다 일목요연하게 그리고 구체적으로 제시해 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그것이다.

 

  이 책과 아주 비슷한 책이 이전에 한 권 더 있었다. 그것은 시공사에서 펴낸 ‘로고스총서’ 시리즈로서 2번째인 데이비드 매클릴런의《마르크스(Karl Marx)》라는 책이다. 책의 부피와 체계가 매우 비슷한데, 이 책은 전체를 마르크스의 ‘생애’와 ‘사상’, 그리고 그에 대한 ‘평가’의 체계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깊이 읽기의 안내서로서 참고문헌의 제시는 이 책이 훨씬 돋보이는 것이 사실이다.(이 책은 마르크스의 저작과 그에 대한 참고서적들을 보다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으며, 한국어 출판물 목록을 따로 제시해 두고 있음을 밝혀 둔다.) 이 비슷한 두 책을 비교해 보면, 《한 권으로 보는 마르크스》는 마르크스 사상의 중심 요소들을 선별하여 보다 쉽고 평이하게 서술함으로써 독자들의 이해를 충실히 돕고 있으며, 마르크스 읽기의 필요성, 즉 현대적 마르크스의 유효성을 강조함으로써 마르크스에게로 강하게 이끌어 들이고 있다면, 매클릴런의 저서는 마르크스의 생애가 상대적으로 자세하게 서술되면서 전체적인 마르크스 사상을 통찰력을 가지고 서술하고 있다.

 

  나는 이 두 책을 함께 읽는 것이 매우 효과적이라고 생각하는데, 먼저 《한 권으로 보는 마르크스》를 읽고 다음에 매클릴런의 저서를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다. 그 이유는 《한 권으로 보는 마르크스》가 보다 쉽고 간명하게 서술함으로써 마르크스에 대한 입문서로서 읽는 이에게 부담감을 훨씬 덜어주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마르크스는 ‘한 권으로 보는’ 것이 절대 불가능하지만, 마르크스의 사상으로 이끄는 귀한 안내자로서, 전도자로서, 선생님으로서, 마르크스의 사상의 바다를 유유히 헤쳐갈 수 있도록 하는 작은 배로서, 삿대로서, 이 책 《한 권으로 보는 마르크스》는 가치가 있고, 그 당돌한 제목 또한, 용서되고도 남음이 있다. 아 참으로 무시무시한 마르크스는 이 책을 통해 도전해 볼 만한 높이로 허리를 숙여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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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 - MBC 느낌표 선정도서
신경림 지음 / 우리교육 / 199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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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해 전 MBC의 ‘느낌표’라는 교양 프로그램에서 “책을 읽읍시다.”라는 코너가 전국적으로 큰 인기를 얻은 적이 있다. 이 프로그램은 우리나라의 독서 현실이 그야말로 참담함을 인식하고 독서의 생활화를 위해 만들어진 어쩌면 획기적이면서도, 또 한 면으로는 우리를 부끄럽게도 하는 것이었다. 어쨌든 전국적으로 독서 열풍을 일으키고, 부진한 도서 판매고를 기하급수적으로 늘리는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공을 세운 것임에 틀림없다.

 

  전 국민이 ‘느낌표’에서 선정하는 책을 따라 읽었다. 나도 그 중의 하나로 열심히 그 책들을 읽었던 기억이 있다. 박완서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비롯해, 《괭이부리말 아이들》, 《백범일지》, 《삼국유사》등등, 많은 좋은 책들을 만날 수 있었고, 아니 그 책들을 읽을 수 있도록 압박하는 좋은 역할을 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동안 많이 미뤄두었던 책들임에 분명했고, 어지간해서는 읽어내기 따분한 책들도 열심히 읽을 수 있도록 해 준 고마운 프로그램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내가 이 프로그램을 기억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 이 책《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때문이다. 이 책이 나온 것은 1998년이었다. 하지만 그리 일반인에게는 알려지지 않았고, 잠들어 있던 이 책이 크게 인기를 얻게 된 것은 전적으로 ‘느낌표’에 선정된 탓이었다. 내가 ‘느낌표’에서 선정해준 책들을 열심히 읽던 와중에 조금씩 지루해가고 있을 즈음, 이 책은 나에게 진정으로 책 읽는 기쁨을 느끼게 해 주었다. ‘느낌표’가 내게 준 값진 선물이었던 것이다.

 

  《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는 제목 그대로 시인들의 자취와 흔적을 찾아, 그 안에서 시인을 어떤 생각과 느낌을 가지고 시를 쓰게 되었는지를 기행문 형식으로 재미있게 풀어가고 있는 책이다. 이것은 시에 대한 다른 책들과는 다르게 시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시인들이 나고 자란 고향, 그들이 살았던 집, 그들이 걸었던 길들을, 저자 자신이 직접 체험하고 걸으면서, 시인이 느꼈던 느낌 그대로를 또한 새롭게 느껴보고, 그러함으로써 그들이 남긴 시들을 살펴본다. 이것은 하나의 외재적 비평 방법으로, 우리에게 시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하면서도, 따분하고 지루하기만 한 시 읽기에 재미와 기쁨을 더해주는 효과를 주고 있다.


  “나는 이 기행을 하면서 많은 것들을 배웠다. 목월의 향토색 짙은 밝은 색깔의 이미지가 무엇에 연유하는가도 알았으며, 영랑의 맑은 노래가 어떻게 생성되었는가도 알았다. 또 어떤 시인의 어느 부분이 과장되고 어느 부분이 축소되었는가도 확인됐다. 이 동안에 어느 면 닫혀 있던 내 시관도 많이 수정되었다. 나는 시를 새롭게 공부한다는 느낌으로 이 기행을 하는 동안 늘 들떠 있었다. 시를 이렇게 재미있게 읽을 수도 있구나, 새삼스럽게 감탄하기도 했다.”


  저자의 말처럼, 나도 또한 이 책을 읽으면서 ‘들떠 있’지 않을 수 없었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가 어떻게 태어나는지 곰곰이 물어 본다면, 이 책이 우리에게 주는 큰 효용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시는 단순히 시인의 머릿속에서 태어나는 것이 분명 아니다. 자기가 보았던 풍경, 사물, 그리고 자신이 체험한 현실에서 시가 태어나는 것은 자명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을 애써 외면해 버리고, 시를 놓고 거기에 쓰인 언어 기호 자체만을 풀어내려고 하고, 분석해 내려 하고, 이해하려고 한다. 하지만 이런 시 읽기는 제대로 된 읽기가 아니다. 아니 시는 “마음이 흘러간 바”를 적은 것이기에 그 마음을 느껴야 하건만, 이러한 시 읽기는 우리에게 ‘감상’을 하지 못하게 하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정상적인(?) 학교교육을 받은 우리들에게는 여전히 답답하고 지루하기만 한 시 읽기가 아닐 수 없기에, 이 책 《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를 만나는 순간 나는 그동안 내가 시를 잘못 알았다는 것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저자가 하나하나 찾아떠난 그 길을 나도 어느새 걸어가고 있으며, 주옥같은 시들이 어떻게 태어났고, 그간 내 머릿속에서 좀체 설명되지 않던 구절들이 물흐르듯이 흘러 어느새 내 마음속에서 강한 감동으로 흘러내렸다.

 

  이 책을 만나고 나는 꼭 한 번 다시 읽고, 신경림 시인이 찾아 갔던 그 길을 나 또한 걸으리라는 결심을 굳게 했다. 하지만 책장 깊이 박아두고 있다가, 근래 다시 읽게 되었다. 아직 그 길을 가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지금도 처음 읽던 그 느낌 그대로 내 마음은 여전히 요동친다. 이 책 한 권을 들고 시인들의 자취를 찾아 떠나고 싶은 마음이 지금도 가슴 속에서 요동을 치다 못해 나를 힘들게 한다.

 

  《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가 ‘느낌표’를 통해 재간되고 나서 얼마 후 아쉬웠던 내 마음을 달래기라도 하는 듯, 《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2권이 나왔다. 내가 그것을 바로 구해 읽은 것은 말할 필요가 없으리라. 1권은 이미 작고한 시인들을, 2권은 생존 시인들을 다루고 있다. 작고한 시인들의 흔적들을 찾아나서는 1권 못지않게 2권은 살아있는 시인들을 직접 만나 얘기하고, 때론 술 한 잔 주고받기까지 더욱 재미와 감동을 주고 있다.

 

  이 2권의 책은 시 해설서가 아니다. 하지만 그 역할을 충분히 해내고 있다. 아니 어떤 시 해설서보다 더욱 충실한 해설서, 해설다운 해설서라고 할 만하다. 이 책은 기행문이다. 기행문의 박진감과 현장감, 그리고 살아있는 시를 만나게 해주는 귀한 책이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정작 저자 자신, 즉 ‘신경림을 찾아서’는 없다는 것이 한 가지 아쉬움으로 남는다.


    다들 잠이 든 한밤중이면

    몸 비틀어 바위에서 빠져나와

    차디찬 강물에

    손을 담가보기도 하고

    뻘겋게 머리가 까뭉개져 앓는 소리를 내는 앞산을 보며

    천년 긴 세월을 되씹기도 한다.


    빼앗기지 않으려고 논틀밭틀에

    깊드리에 흘린 이들의 피는 아직 선명한데,

    성큼성큼 주천 장터로 들어서서 보면

    짓눌리고 밟히는 삶 속에서도

    사람들은 숨가쁘게 사랑을 하고

    들뜬 기쁨에 소리 지르고

    뒤엉켜 깊은 잠에 빠져 있다.


    참으려도 절로 웃음이 나와

    애들처럼 병신걸음 곰배팔이 걸음으로 돌아보는 새벽

    별들은 점잖지 못하다

    하늘에 들어가 숨고

    숨 헐떡이며 바위에 서둘러 들어가 끼어앉은 내 얼굴에서는

    장난스러운 웃음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

                        신경림, 〈주천강 가의 마애불―주천에서〉전문


  이 시를 제대로 느끼기 위해서는 ‘주천강’에 가봐야 하지 않을까? 신경림 시인이 본 그 모습을 나는 가서 보아야 하겠다. 그래서 그 감동 그 느낌 그대로를 느껴보고, 별을 보고, 하늘을 보고, ‘병신걸음, 곰배팔이 걸음’도 걸어보고, 춤도 추어보고, 그렇게 ‘장난스러운 웃음’도 웃어보면 정말 좋지 않을까?

 

  그래, 나도 한 번 그 길을 걸어가 보자. 꼭 결심을 실행해 보리라. 어쩌면 나도 ‘시인을 찾아서’ 한 권 쯤 낼 수 있지 않겠는가? 상상만 해도 즐거운 결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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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하 교수의 시 쓰기 교실
이승하 지음 / 문학사상사 / 2004년 9월
평점 :
절판


  2006년 병술년 새해 벽두에 쓰는 서평이다. 나는 이 책 <<이승하 교수의 시 쓰기 교실>>을 택했다. 이 책을 읽은 것은 한 1년 남짓, 그런데 왜 하필 詩, 그것도 시 창작에 관한 책에 대해 서평을 쓰는가?

  우선은 내가 시를 좋아한다는 사실에서 연유할테지만, 나름대로의 의미를 부여하자면 이렇다. 시를 쓴다는 것을 말하기 전에, 시를 읽는 것에 대해 먼저 말해보자. 시를 읽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어려워한다. 학창시절 입시위주의 교육에 상할대로 상한 문학적 감상력은 문학에 대한 혐오 내지 반감으로 작용한다. 그것은 시에서 더욱 심한데, 대표적인 문학의 장르인 소설과 비교하면 그러한 문학교육이 가져온 폐해는 시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소설은 이야기에 바탕을 두기때문에 그 이야기의 재미를 따라 읽어내려가면 되면 상대적으로 단순한 읽기가 가능하다. 하지만 시라는 것은 무슨 암호와 같은 상징과 이미지들이 압축되어 있기 때문에 보다 고난도의 읽기가 필요하게 된다. 그런한 이유로 학창시절에 배운 시들은 모두가 어렵고 따분하며 무슨 공식같기도 하고, 암호해독 같기도 해서, 그 시절이 지나면 아예 담을 쌓아버린다.

  시를 읽는 것(엄밀히 말해 시는 읊는 것이다.)이 과연 그러한 것인가? 우리의 학교교육은 시를 분석과 해독에 중점을 두었다. 하지만 시는 감상, 즉 느끼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분석과 해독의 학교교육은 시의 감상으로부터 아주 멀리 우리를 떨어뜨려버린 것이다.

  "詩者, 志之所之也. 在心爲志, 發言爲詩."(시는 마음이 흘러가는 바를 적은 것이다. 마음속에 있으면 '志'라고 하고 그것을 말로 표현하면 '詩'가 된다.) -<<詩經>> 序-

  이렇듯 시가 마음을 적은 것인데, 그것을 분석해내는 것이 어디 가당키나 한 것인가? 가당키는 하겠으나, 그것이 제대로가 아닌 것은 확실하다. 마음은 분석 이전에 느껴야 하는 것이다. 곧 시는 마음으로 느껴야 하는 것이다. "이심전심"이란 말은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음을 적은 것이니 마음으로 읽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렇게 우리가 시에서 멀어지다 보니 우리 마음은 점점더 메말라 가는 것이 아닐까? 꽤 오래 에둘어 왔다 싶지만, 내가 이렇게 시창작관련 책을 새해 벽두에 소개하는 것은 이러한 의미를 담고 있다 하겠다. 즉, 우리 마음이 2006년 새해부터는 촉촉해지고 따뜻해졌으면 하는 마음에서, 시를 읽는 것뿐만 아니라 시를 써보자는 뜻을 가진다.

  시를 쓰는 것에 대해 말하자면, 시를 읽는 것보다 더 어려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여간 더 말 해 무엇하겠는가? 시를 쓰는 것이 절대 어렵지 않음은 앞서 인용문을 보면 확실한 답을 얻을 수 있다. 곧, 우리의 마음을 적어내면 되는 것이다. 여하튼 이에 관해서는 더 말하지 않겠다.(나의 서재에 마이페이퍼 '시와 비평' 게시판에 <아무나 시인이 될 수는 없지만, 누구나 시인이 될 수는 있다.>라는 글을 보시면 좋겠다.)

  그래서 이 책을 골랐다. 이 책은 중앙대 문예창작과 교수인 이승하의 노작이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우리가 어렵게만 생각하는 시 쓰기에 대해 아주 친절히 그리고 쉽게 가르쳐주고 있다는 것이다. 이승하 교수는 책의 머리에서 "시를 쓴다는 것이 즐거운 노동이 되기 위하여" 이 책을 썼다고 말한다. "시 쓰기가 괴로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러분은 시를 어렵다고만 생각해 오지 않았습니까? 시인을 보통 사람과는 다른 별종이라고 생각해 오지는 않았습니까? 시를 자꾸 접해본다면 뜻밖에도 쉽구나, 재미가 있구나, 감동을 주는구나, 하고 생각이 바뀔 것입니다. 시를 한 편 두 편 습작해 보면 시인에 대한 막연한 거부감 내지는 동경에서 벗어나 나도 시인이 될 수 있겠다는 자신감도 갖게 될 것입니다. ~ 시가 얼마나 우리의 정서에 도움이 되고 일상적 삶에 윤활유 구실을 하는가를 가르쳐드릴 것입니다."

  저자의 말이다. 시 쓰기 만큼 "우리의 정서에 도움이 되고 일상적 삶에 윤활유"가 되는 것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나는 이러한 조금은 색다른 제안을 하는 것이다. 시를 무작정 쓴다는 것은 그 시작이 어려울 수 있음을 인정한다. 따라서 이 책은 그 길을 쉽게, 아니 그것이 쉽다는 사실을 알려줌으로써 우리를 기쁘게 하고 시를 쓰게 해줄 것이다.

  이 책은 크게 1부와 2부로 나뉘어 있다. 여기서 시창작 방법에 관한 내용이 이 책의 2/3를 차지하면서 1부에 수록되어 있고, 2부에는 시의 정의, 시 창작 교육, 등단 제도, 시문학사 등에 대한 단평들을 모아놓고 있다. 1부는 각각의 테마들을 16개의 장으로 나누어 쉽게 재밌는 설명과 함께 구체적인 시들을 예로들어 보이고 있어 쉽고 재밌게 시창작에 접근할 수 있다. 2부 또한 관심을 끌 수 있을 만한 읽을 거리들이어서 짬짬히 읽어볼 만하다.

  1부에 구성된 테마들을 잠깐 살펴보면, 1장에서는 시의 구성 요소들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시의 원론일 수 있어 자칫 따분하고 어려울 수 있는 내용이지만 이 책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 3장에서는 시 쓰기에 있어서 체험과 상상력에 관해 이야기 하고 있고, 4장에서 9장까지는 다양한 시의 제재들에 대해 친절히 설명하고 있다. 10장에서 15장까지는 시 쓰기의 기법들을 다루고 있는데, 비유, 상징, 이미지, 알레고리, 아리러니, 역설 등 우리가 학교에서 무슨 공식처럼 배운 것들이 여기서는 우리가 시 쓰기에 적절히 사용해 볼 수 있도록 실제적인 사용 방법들이 돋보인다. 무엇보다 10장에서 12장을 '비유'에 할애하고 있는데, 시에서는 무엇보다도 이 비유의 사용이 매우 중요함을 깨닫게 하며, 비유를 적절히 사용하기 위해서는 많은 연습이 필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이 책에서 얻을 수 있는 또다른 즐거움은 무엇보다도 다양한 시들을 접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이 책이 다양한 시들을 예로 들어 구체적인 설명을 함으로써 우리들에게 알기 쉽게 시창작에 대해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다양한 시들 중에서도 어렵게 느껴지는 시들보다는 재밌있고 신선한 시들이 많이 선별되어 있어 이 책을 읽어 가면서 크게 웃게도, 작게 미소짓게도 하는 것이 이 책의 큰 장점 중의 하나다.

  2006년의 새해가 밝았다. 2006년은 많은 사람들이 시를 쓰면서 자신의 마음의 소리를 들어보고, 시를 읽으면서 다른 이들의 마음의 소리도 들어보자. 그러면 어느새 내 마음이 따뜻해지고 촉촉해지지 않을까? 너무 메마른 사회를 살아가면서 우리 마음또한 차갑고 냉정하며 인정이 메말라가지 않은가 한다. 시를 한 편 읽어도 보고, 시를 한 편 쓰기도 하면서, 우리 마음에 따뜻해지면, 이 세상도 따뜻해지지 않을까? 2006년은 모두모두 시를 써보자. 시인이 되자. 누구나 시인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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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농장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
조지 오웰 지음, 도정일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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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만에 탁월한 소설 한 편을 만났다. 며칠 전 읽었던 ꡔ독서의 기술ꡕ에서 “소설은 단숨에 읽는 것이다.”라는 배움을 나도 모르게 실천해버린 것이다. 소설이라는 장르의 가장 큰 매력은 어쩌면 이런 ‘단숨에 읽’히는 데 있는 것이 아닐까? 플롯의 탄탄한 짜임과 오묘하게 배치된 복선에서 오는 쾌감, 인물의 갈등과 대립, 그리고 갈등의 해결에서 오는 아스라함 등등 많은 부분에서 소설은 우리를 빠져들게 하는 요소들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모든 소설이 우리에게 그런 매력의 이끌림을 허용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일단 우리 독자들의 능력부족에서 오는 것일 수도 있지만, 가장 큰 책임은 그 소설 작품 자체에 있는 것일 게다.


  나는 그리 소설을 좋아하는 편이 못된다. 왜 그런가 하니, 내 성격이 다소 급한점이 있기 때문인가 한다. 급한 성격 탓에 빨리 해결을 보고 싶어지고, 느긋하게 소설의 결말을 기다리고 있을 만한 성질이 못되는 것이다. 책을 조금 느리게 보는 탓도 있으리라. 한 장 한 장 꼼꼼히 읽다보면 이런 급한 성질은 여전히 발동되어 언제쯤 결말에 대한 답답함을 해소해 줄는지 마냥 기다리지 못하게 된다. 성질은 급한데 책 읽는 것은 왜 그리 느린지 그게 참 아이러니이긴 하지만 말이다.


  이런 내 못난 탓에 그동안 좋은 소설들을 손에 잡지 못했다. 이것은 나의 독서생활에 가장 큰 결점으로 작용한다. 국어교육을 할 사람으로서 읽어야할 소설을 많이 읽지 못했다는 것 또한 나의 단점이겠다. 하지만 이것이 내가 시를 좋아하게 만든 원인 중에 하나였을 것이라고 애써 생각하며 스스로 위로를 하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늘 이렇게 말한다. “시는 짧아서 좋다”고.


  잠시 딴 길로 많이 빠졌다. 다시 돌아와 얘기하자면, 나는 정말 간만에 탁월한 소설 한 편을 만나 밤을 꼴딱 새버렸다. 그야말로 “단숨에” 읽은 것이다. 가장 최근에 이런 “단숨에 읽은” 소설은 카프카의 ꡔ빈집ꡕ이었다. 그것의 재미도 이 책 못지않았다. 하지만 아직 그 서평쓰기를 잠시 밀어놓고 있는데, 그것은 다시 한 번 읽어야겠다는 생각에서 이다. 어쨌거나 카프카의 ꡔ변신ꡕ 이전을 생각해 보면, 음, 꽤 오래전의 ꡔ다빈치 코드ꡕ가 떠오른다.


  헌데 내가 가장 “단숨에 읽은” 것은 뭐니 뭐니 해도 ꡔ삼국지ꡕ이다. 이것은 나는 대학 1년때 읽었는데 아직도 그 기억과 감동은 생생히 남아 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이것이 단순히 무협소설 쯤으로만 생각하고 폄하하고 있었는데, 시간이 참 많이 남아돌아가던 차에 우연찮게 손에 잡게 된 것이, 이런 나는 3일 밤을 정말 잠 한숨 자고 다 읽었던 것이지 뭔가(정말 잔 한숨밖에 안 잤다). 유비, 관우, 장비 세 형제가 서로 뿔뿔이 헤어졌다 ‘고성’이라는 곳에서 재회하며 서로 부둥켜안고 울 때, 나도 그만 엉엉 울었으니, 그 감동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마지막 10권의 책장을 덮고 나는 곧바로 비디오 대여점을 찾아서 40여편의 비디오를 4일 밤낮으로 보면서 같은 대목에서 또 함께 울었으니 나는 어쩔 수 없이 ‘삼국지 마니아’가 되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이걸 어쩌나! 또 딴 길로 빠져버렸다. 하여간에 나를 사로잡은 소설이라는 것이 당최 얼마 없었으니, 내가 읽은 소설이라는 게 그리 많지 않을 수밖에 없던 것이다. 그런 와중에 큰 뜻을 품고, 그래도 이름난 소설들을 한 번씩 읽어봐야겠다고 덤빈 것이 민음사판 <세계문학전집>이다. 전부다 읽을 수는 없었고, 그 중에 읽을만하겠다는 골라 시작한 것이 ꡔ변신ꡕ이었고 ꡔ동물농장ꡕ이 그 두 번째인 것이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자. 이 조지 오웰의 소설 ꡔ동물농장ꡕ이 왜 내게 “단숨에 읽”혔는가? 이것을 말하는 것이 이 글을 주 내용일 터인데 지금까지 쓸데없는 소리를 했으니, 읽다 지쳐 ‘이 사람이 무슨 헛소리를 이리도 하는가?’ 생각하고 줄행랑을 놓아버린 사람들에게 비난할 생각은 전혀 없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애써 읽어주신 분들께는 우선 고맙다는 인사 한마디 전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야 예의 아니겠는가? 그래서, “고맙습니다.”


  조지 오웰의 소설 ꡔ동물농장ꡕ은 우선 길지 않다. 단편이라고 보기는 조금 힘들고, 그렇다고 장편은 절대 아닐 것이며, 보통의 중편으로는 조금 분량이 적다. 그러면서도 10개의 장들로 나누어 놓고 있어,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지루함을 느끼게 하지 않게 하고 있다. 이것을 나는 하룻밤을 읽었으나,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한 두 시간 열심히 읽으면 충분히 읽고도 남을 정도의 분량이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이 소설의 장점은 절대 아니다. 이것을 장점으로 꼽는다면, 이 소설의 장점들만 모아놓더라도 책 한권은 족히 나오고도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ꡔ동물농장ꡕ의 진정한 매력은 무엇인가? 첫째로 꼽을 만한 것은 무엇보다, 우화라는 장치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화하면 딱 떠오르는 것이 ꡔ이솝우화ꡕ다. 이것은 어쩌면 이 ꡔ이솝우화ꡕ에 살짝 집어넣어도 약간 길다는 것 빼고는 전혀 손색이 없다. 이 소설에는 각 종 동물들이 등장한다. 제목에서 느끼겠지만 한 농장에서 사육하는 동물들이 그 주인공들이다. 이점에서 ꡔ이솝우화ꡕ의 조건과 일치한다. 하지만 약간 다른 점은 ꡔ이솝우화ꡕ에서는 동물들이 등장은 하되 그 동물들은 전형적 인간의 특징들을 대변하고 있는데 반해, 이 소설에서는 동물들의 특성이 조금은 부각되는 점에서 차이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다. 그보다는 이 소설에 등장하는 동물들은 어떤 특정한 실존 인물을 나타내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바로 구 소련, 즉 스탈린 시대의 소비에트 연방을 어쩌면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나는 이것을 더 이상 말하지 않을 것인데, 이 마이리뷰의 유의사항을 읽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소설의 재미를 반감시킬만한 폭로를 금지하는 조항이 있어서이기도 하고, 내가 다 말해버리면 이 소설을 읽을 분들의 재미를 누릴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기도 할 테니까 말이다. 따라서 이것은 이만큼만 살짝 언급하도록 하겠다.

  두 번째 꼽을 것은, 이 소설은 풍자라는 것이다. 누구를 풍자하고 있다는 것은 위에서 말한바 그대로다. 이것이 풍자이기 때문에 우리는 신랄한 웃음을 지을 수 있다. 그것이 곧 이 소설에서 주는 가장 큰 재미이다. 이 책의 역자 도정일은 이 소설을 ‘풍자우화’로 지정한다. 같은 맥락일 수 있겠지만, 나는 이것은 우화이며 풍자라고 말하고 싶다.


  그래서 세 번째 꼽는 것이 곧 이 소설이 우화인 동시에 풍자라는 사실이다. 바꿔 말하면 풍자이면서 우화이기 때문에 이 소설은 엄청난 매력을 발산한다. 왜 나는 이것을 이렇게 우화와 풍자로 굳이 나누어 말하는가? 그것은 이 시대 나 같은 사람들에게 ‘풍자우화’로 읽히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우화’로 읽히게 되고, 또 그렇게 읽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이 소설은 사실상 풍자로써의 자격조건을 유지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당대의 현실을 비판하고 조소하는 풍자의 성격상 이 시대에는 이미 그 비판과 조소의 직접적 대상이 사라졌기 때문이다.(내가 ‘직접적’이라는 수사를 굳이 사용한 점이 유념하길 바란다는 점을 붙여둔다.)


  그렇다고 이것을 우화로만 읽으라는 것은 아니다. 일단은 우화로 읽되 그것이 무엇을 풍자하고 있는지 어느 정도의 역사적 배경지식을 갖춘 사람들이라면 읽어가면서 살짝이 찾아낼 수 있기 때문에, 그 첫 대면을 우화로써 하라는 것이다. 그래야만 이 소설이 주는 네 번째 매력에 빠져들 수 있기 때문이다.

  자 이제 그 네 번째 매력을 꼽아보자. 그것은 앞서 말한 대로, 이것이 우화로써의 현대적 문맥으로의 변주, 혹은 적용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이 소설의 표층적 주제를 말한다면 ‘독재자에 대한 비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것은 이 시대 딱히 적용되기 어렵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사회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독재가 존재하고 있음을 깨닫게 해 줄 수 있다. 역자 도정일의 말을 하나 더 빌려서 말하면 “‘동물농장’은 지금도 있고 미래의 세계에도 있을 것이다. …… 인간 정치사회의 권력 현실을 부패시키는 근본적 위험과 모순에 대한 항구한 알레고리”이기 때문에 이 소설은 현재적으로 유효한 비판을 여실히 제공하고 있다. 이것은 알레고리, 즉 우화로써의 가치를 의미한다. 그뿐 아니라, 이것은 풍자이기 때문에, 우리는 거기에서 오는 재미와 더불어 새로운 재미를 창출해 낼 수 있다. 이것은 앞서 말한 ‘직접적 대상’의 풍자에 ‘새로운 대상’을 교체 투입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가능하다. 현시대의 이 풍자의 대상은 널려있다. 현대적 의미의 ‘독재자’를 찾아본다면, 어린아이들도 재미난 놀이하듯 잘도 찾아내지 않을까?


  참 길게도 왔다. 내가 뭐 이 소설을 가지고 정말 책 한권 내려고 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이점 여기까지 따분하게나마 읽어주신 분들께 확실히 말씀드리고 넘어가야 도리일 것이다. 무슨 소리냐 하면 곧 끝날 테니 좀더 인내심을 가지고 읽어봐 달라는 것 아닌가? 동물농장은 이상에서 언급한 것 외에도 “단숨에 읽”히는 많은 매력을 가지고 있다. 결론으로 다시 따분히 정리하는 관습을 여실히 배제하면서 그래도 뭔가 아쉬움을 남기기에 나는 조지 오웰과의 첫 만남을 회상하며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조지 오웰이라는 이름을 나는 몇 해 전 《대중문학의 이해》라는 수강과목에서 ꡔ1984ꡕ라는 소설의 언급과 함께였다. 그때까지 이 ꡔ1984ꡕ라는 소설이 그저 그야말로 정전, 즉 이 시대의 고전이라고 할 정도의 본격문학으로만 알고 있었던 차에 이 소설이 하나의 대중문학의 시초 격이라고 할 수 있다는 설명에 참 의아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조지 오웰이라는 이름을 내 머릿속 한 켠에 집어넣고 된 것이다. 그 뿐이다. 하지만, 나는 그때 조지 오웰이라는 이름에 그동안 쌓아왔던 일종의 편견, 즉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 같은 작가들 하면 느껴지는 뭔가 한 층 격조 높을 것 같다는 편견에 일말의 빈틈을 내어 준 것이다. 그런 만남으로 어쩌면 이 ꡔ동물농장ꡕ이 내게 좀더 몰입할 수 있는 한 줌의 빛줄기 같은 이유가 되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된다.


  마지막으로 한 말씀만 덧붙이고 마치자. 조금만 참으시길 재삼 부탁하며, 아니 이제 막가는 식으로 명령하며, 이 소설은 이 시대에 존재하고 있는 수많은 ‘돼지’들에게 엄청난 두려움으로 존재하고 있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조금 더 이 소설의 메시지를 공개한다면, 이 소설은 결국 ‘똑똑한 돼지’들이 득세하고 지배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 ‘무식한 동물’들이 똑똑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의 조종자 이 시대 너무나 ‘똑똑한 돼지’들을 막기 위해서는 우리가 늘상 깨어있어야 한다는 것을 이 소설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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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7-12-08 1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화요일 토론도서라 꾹~누르고 구입했어요. 님의 리뷰로 컨닝 좀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