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 시 바로읽기 - 백석 대표시 해설
백석 원작, 고형진 지음 / 현대문학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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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백석, 그와의 인연은 조금은 남다르게 시작되었다. 내가 대학에 들어가 2학년이 되었을 때, 소모임으로 활동하던 시(詩)창작 동아리의 후배들이 성년의 날 선물로 백석의 시선집 한 권을 주었다. 교복을 단정히 차려입고, 유달리 흰 피부의, 요즘으로 치면 꽃미남, 완소남 소리를 듣고도 남았을 준수한 외모의 한 청년이 겉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시와사회, 1997.)란 시집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백석이란 시인은 그리 잘 알려지 있지 못 했다. "분단에 의해 묻혀진 세계적인 천재 시인"이란 부제에서 드러나듯이, 나에게 이런 백석은 그때까지의 여타 시인들과는 유독 다르게 다가왔다.

우선, 그의 외모는 너무 잘생겼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보아왔던 이전의 시인들 중에서는 백석처럼 잘 생긴 이를 찾아보지 못했다. '천재 시인'이라는 그 시집의 수식어와 겹쳐지면서, 이런 시인을 왜 아직까지도 몰랐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그 후 1930년대 후반의 짧은 활동과 분단 후 재북시인으로서 우리에게 '묻혀질' 수 밖에 없었던 사실 등등을 알게 되었다. 그 시집을 선물로 받고는 쉬엄쉬엄 묵혀두면서 틈틈이 읽어 갔다. 하지만 그의 시들을 읽어내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못되었다. 무슨 암호같은, 외국어같은 평북지방의 방언들, 자칫 지루해지기 십상인 그의 시 형식들, 이를테면 끝없는 사물의 나열이라든가, 줄글과 같은 산문시형들로 시의 맛들을 찾아내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그의 외모와는 사뭇 다르게 시들과 친해지기는 이런 난관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 와중에 백석에 대한 보다 깊은 관심을 이끌게 한 것은 그의 살아온 모습에서였다. 백석에 대한 관심을 꾸준히 두면서 틈틈이 그와 관련된 책들을 찾아보는 와중에 그의 삶의 재밌는 에피소드들을 알게되었다. 이를테면, 자야 여사와의 첫 만남에서 다짜고짜 "당신은 오늘부터 내 마누라요."라고 말하던 백석의 모습들을 알게되면서 '아 이 백석이란 시인은 참 멋진 사람이었구나!'하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백석에 대한 여러 자료들을 구해 읽게 되었다. 그러나 그리 많은 것을 알 수는 없었다. 그에 대한 내력이라는 것은 해방 이후의 자취들 외에는 잘 알려진 것이 없었고, 그때까지의 백석 연구라는 것도 미진했기 때문이다.

백석이 해금되고 그에 대한 첫 연구가 바로 고형진의 「백석 시 연구」(고려대 석사학위논문, 1983.)다. 그 이후로 백석에 대한 연구가 대학의 논문 중심으로 이루어졌을 뿐, 그를 대중적으로 알리는 작업들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이동순에 의해서 『백석시전집』(창비, 1987.)이 80년대 후반에 출간 되었고, 이후 김학동, 김재용 등에 의해서 전집들이 엮겨져 나왔으며, 백석의 시 전반에 대한 연구나 그의 삶의 이력들이 단행본으로 출간된 것은 거의 없다. 몇몇 문학사나 시비평 서적에서 부분적으로나마 언급된 것이 전부일 따름이다. 그런 상황에서 백석에 대해 보다 세세히 안다는 것은 내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도움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건국대출판부에서 나온 <문학의 이해와 감상>시리즈 『백석』(박혜숙, 1995.)이란 작은 책 뿐이었다.

아직까지도 백석에 대한 연구는 미진하고 대중적 인지도 또한 그리 높지 못하다. 현행 국어교과서나 문학교과서에서 몇몇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지만, 그 시들이 백석 시를 대표할 수 있는 종류의 것들이 아니다. 분명 뛰어난 작품들이긴 하지만(「여승」, 「여우난곬족」, 「흰 바람벽이 있어」,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고향」) 백석시의 전반적 특징들이랄 수 있는 '엮음'의 방식, 토속어의 사용, 다양한 인간 모습의 형상화 등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런 점에서 백석에 대한 편협적인 이해에 그칠 수 밖에 없으며, 백석의 본연의 시적 성취를 알기에는 모자람이 너무 크다.

  새끼오리도 헌신짝도 소똥도 갓신창도 개니빠디도 너울쪽도 짚검불도 가락잎도 머리카락도 헝겊조각도 막대꼬치도 기왓장도 닭의 짓도 개터럭도 타는 모닥불

  재당도 초시도 문장늙은이도 더부살이도 아이도 새사위도 갓사둔도 나그네도 주인도 할아버지도 손자도 붓장사도 땜쟁이도 큰개도 강아지도 모두 모닥불을 쪼인다

  모닥불은 어려서 우리 할아버지가 어미아비 없는 서러운 아이로 불상하니도 몽둥발이가 된 슬픈 역사가 있다. (「모닥불」전문)

"이 시는 백석이 시도한 엮음의 표현형태가 또 하나의 새로운 미학적 기능을 발휘한 작품이다. 뿐만 아니라 모닥불의 현장을 묘사하면서 작품의 의미를 구축해나가는 시의 제작과정이 신선하여, 그의 개성이 분명하게 과시된 또 하나의 문제작으로 꼽을 수 있다."(186쪽)는 고형진의 언급에서처럼 이 시는 단순한 나열인 것 처럼 보이는 사물들, 인간 군상들의 열거를 통해 묘한 시적 성취를 이루어낸다. 이런 방식들을 고형진은 '엮음'이라고 명명하고 있다. 판소리 사설에서 사용되는 이러한 표현형태와 비교하면서 백석 시에 나타나는 모더니티한 모습에 전통적 명맥을 부합시키고 있는 것이다. 백석이 김소월보다 뛰어나도고 할 수 있는 점이 이것으로 근대적인 시의 형식과 전통적인 정서와 표현방식들을 절묘하게 접합시키면서 뛰어난 시적 성취를 이뤄낸 점에 있다고 생각한다.

  신살구를 잘도 먹드니 눈오는 아츰
  나어린 안해는 첫아들을 낳었다

  인가 멀은 산중에
  까치는 배나무에서 즞는다

  컴컴한 부엌에서 늙은 홀아비의 시아부지가 미역국을 끓인다
  그 마을의 외따른 집에서도 산국을 끓인다  (「적경」전문)

백석은 시적 장치에 무척이나 예민했었던 것 같다. 그의 시들이 무수한 나열의 시에서 오는 지루함이 아닌 것은 그가 곳곳에 다양한 시적 장치들을 설치해 놓았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 장치가 바로 제목이다. '적경'이란 말은 "고요한 경지의 경계, 또는 고요한 상태'라는 의미다. 한 폭의 수채화같은 이 시에 백석은 '고요함'을 부여하면서 '시의 정서와 밀접한 관련'을 맺게 만든다. 또 다른 시를 보자.

  처마 끝에 명태를 말린다
  명태는 꽁꽁 얼었다
  명태는 길다랗고 파리한 물고긴데
  꼬리에 길다란 고드름이 달렸다
  해는 저물고 날은 다 가고 볕은 서러웁게 차갑다
  나도 길다랗고 파리한 명태다
  문턱에 꽁꽁 얼어서
  가슴에 길다란 고드름이 달렸다  (「멧새소리」전문)

기묘하다고 할 것이다. 시 어디에도 멧새는 등장하지 않는다. 명태와 자신을 동일시 하면서 자신의 초라하고 외롭고 쓸쓸한 모습을 부각시킨다. 여기에 교묘한 시적장치로서 배경음악을 추가시킨다. 추운 겨울 명태 사이를 오가며 찍찍 짹짹 울어대는 '멧새소리'를 떠올려 보면, 이 시의 묘미을 더욱 잘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밖에도 백석의 뛰어남을 볼 수 있는 시들은 많다. 그 중에서도 그의 연애시편들도 우리의 가슴을 울린다. 그는 정열적인 사랑을 한 만큼, 뛰어난 연애시편들도 엮어내고 있다. 외지로 떠돌면서 삶의 고노와 외로움들을 읊어낸 시편들, 어린 날의 추억들과 평북지방은 여러 문화적 일상적 모습들을 한편의 동화처럼, 신화처럼 엮어내고 있는 시들 모두가 뛰어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을 고형진의 『백석시 바로읽기』는 보여주고 있다.

이 책에서는 백석의 시들 중 60여 편을 골라 각각의 시에 섬세하고 세밀한 해설을 붙여주고 있다. 백석시를 읽어내는데 가장 애를 먹이는 평북 방언들에 대한 저자의 주석도 친절하다. 사실 해설이라는 것은 자유로운 시 감상에 방해가 될 소지가 크다. 이 책의 작업들도 그런 염려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백석을 읽고자 하는 이들에게 하나의 커다란 장벽을 해소해주는 역할을 이 책이 충분히 해 줄수 있다는 것에 큰 의미를 둘 수 있을 것이다. 친절하고 세밀한 해설이 장점이면서, 이 장점을 독자들이 적절히 부분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면 이 책은 충분히 값지다고 할 것이다. 이 책으로 백석에게 매료되는 사람들이 더 많아질 수 있다면 기쁜 일이다.

아직까지 백석에 대한 연구는 미진하다. 백석이란 뛰어난 시인을 오늘날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야할 의무가 우리의 문학자들에게는 있다. 백석이 가지는 시와 삶의 매력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충분히 호소력 있음을 나는 느낀다. 일례로 그의 삶과 사랑은 한편의 영화로 만들기에 너무나도 아름답다. 그의 시와 삶에 대한 연구와 더불어 대중적으로 백석을 알리는 작업들이 활발히 이뤄지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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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매지 2007-05-14 0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집에 있는데 아직 못 읽어 봤어요^^;
여담이지만 백석시를 읽으면 왠지 배가 고파지기도^^

멜기세덱 2007-05-15 0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백석시에는 참 먹을거리가 많이 나와요..ㅎㅎ 국수가 먹고 싶어지는군요...ㅎㅎ

apple 2008-04-25 2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처음뵙습니다. 질문이 있어서요.
저, 이 책에서 "컴컴한 부엌에서 늙은 홀아비의 시아부지가 미역국을 끊인다"로 나오나요?
혹시 "끓인다"가 아닌지 여쭙습니다.

멜기세덱 2008-04-25 23:30   좋아요 0 | URL
명백한 오타네요.ㅎㅎ 죄송합니다.

승주나무 2008-04-26 1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백서을 엄청 좋아해서.. 백석 시 용어사전 같은 거를 옆에 놔두고 초록색 형광펜으로 단어를 칠하고 밑에 각주를 쓰면서 봤던 거 같아요. 그렇게 단어찾고 새기면서 봤던 책은 김유정과 백석이 처음일 듯 ㅋㅋ
이 책 좋은 것 같아요. 멜기 리뷰가 더욱 물이 오른 것 같네~~
요즘 많이는 안 쓰는 것 같지만 ㅋ
 
우리말의 수수께끼 - 역사 속으로 떠나는 우리말 여행
시정곤 외 지음 / 김영사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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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와 그 궤를 같이한다. 아니 역사(history)라는 것은 그 기록을 전제하는 고로 인류의 역사는 곧 언어의 역사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야 될지도 모른다. 인간의 사유가 전적으로 언어로 이루어진다고는 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언어가 인간 사유의 폭과 깊이를 무한히 확장해 주었다는 사실은 확실하다. 언어를 통한 인간의 사유, 곧 상상의 날개는 오늘날까지 인류의 높은 문명의 하늘로 날아 오르게 하였다. "인류에게 언어가 없었다면 이러한 놀라운 발전을 상상"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언어를 통해서 우리는 사고하고, 사물을 인식하며, 개념을 형성한다. 인간적 활동의 대부분에서 언어는 중요한 도구로써 기능한다. 그러나 그런 중요하고 유용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언어의 정체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고 있지는 못하다. 인류 문명의 시작 이전부터 있었왔고("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인류의 문명을 꽃피웠으며, 오늘날의 눈부신 발전을 이룩해 낸 이 언어에 대해 우리는 그 근본을 거의 알지 못한다. 말하자면 태생적 비밀을 가지고 있는 이 언어에 대한 궁금증은 아주 오래 전부터 있어왔고, 많은 이들, 즉 언어학자들이 그 비밀을 캐내기 위해서 노력해 왔다.

이것은 비단 인류 초기, 즉 인류의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 멀고 먼 시대의 고대 원시 언어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우리가 모르는 언어의 모습들은 가까이는 500여년 전의 우리말, 우리글도 마찬가지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말했을까? 오늘날 우리와 직접 대면하여 말을 해도 통할까? 하는 의문의 해답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전혀 없다. 다만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언어의 비밀, 말과 글의 담긴 수수께끼들은 무한히 많다. 원시시대부터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우리말에 이르기까지, 그 끝없는 비밀을 문을 오늘날의 언어학자들은 탐구하고 있다. 여기 우리말의 비밀을 찾는 젊은 국어학자들이 있어, 그 수수께끼의 문을 열고자 하는 노력이 있다. 『우리말의 수수께끼』에서는 멀리는 인류 초기의 언어에 대한 수수께끼부터 우리 말과 글의 역사, 그리고 우리글의 표기법에 담긴 숨은 이야기들까지를 흥미롭게 탐구하고 있다. 언어의 비밀은 어느 누구도 빠져 나올 수 없는 미궁과도 같다. 다만 그 미로를 헤쳐나가려는 땀과 열정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흥미진진함을 느낄 수 있기에 충분하다. 그 책에서도 우리말과 글의 비밀들을 속 시원히 밝혀내고 있진 못하지만, 아니 그것은 불가능하지만, 그 가능성을 추측해 보는 젊은 국어학자들의 노력의 결과를 고스란히 담겨 있어, 읽는 나로 하여금 기쁘게 한다.

이 책 『우리말의 수수께끼』는 2002년에 출간되었다. 박영준, 시정곤, 정주리, 최경봉 4명의 신진 국어학자들의 사뭇 유쾌한 모임의 결과물이다. 이 책의 존재를 뒤늦게 안 것은 최근 읽은 『우리말이 사라진다면』덕분이다. 이 책의 흥미로운 기획에 재미를 느끼고 일독한 후, 이 책이 그들의 2번째 결과물임을 알게 되었으며, 그들의 첫번째 흥미로운 탐구가 또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된 것이다. "역사 속으로 떠나는 우리말 여행"이라는 부제에서 드러나듯이 가볍운 마음으로 그들의 첫번째 여행에 동참하기로 마음 굳게 먹고 이 책을 구해 읽게 된 것이다. 또한 그들은 『우리말이 사라진다면』의 서문에 3번째 작업을 준비 중에 있었다고 밝혔고, 이미 그 결과물이 세상에 나와 있다는 사실도 나는 알았다. 조금 있으면 그것도 찾아 읽을 것이다.(그 책은 『역사가 새겨진 우리말 이야기』란 제목을 달고 2006년에 출간되었다.)

『우리말의 수수께끼』에서는 몇 가지 질문들을 던지고 그 질문에 답을 찾아가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말에 대한 질문이라기 보다는 우리글에 대한 질문들, 그러니까 언어전반에 대한 것이라기 보다는 문자의 역사에 숨긴 이야기들에 대한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책의 제목은 구태여 다시 달자면 "우리글의 수수께끼"라 해야 좀더 정확할 듯도 하다. 어쨌거나, 이 책에서 다루는 수수께끼들은, 우선 문자의 탄생 배경에 대한 궁금증으로 문을 연 후, 우리 글의 역사에 대한 수수께끼로 이어진다. 한글 창제를 기준으로 볼때, 창제 이전의 문자사, 창제 후의 문자사에 대한 여행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덧붙여 근대이후 한글 맞춤법통일안 탄생의 비하인드까지를 쉽게 재밌게 풀어나가고 있다. 여러모로 우리글의 전체적 흐름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책이라고 생각이 된다.

1장에서 다루고 있는 문자의 탄생에 대한 부분은 이 책의 프롤로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익히 알려져 있는 내용으로 별반 다른 언어관련 기본서에 다 나오는 내용인데, 보다 쉽게 풀이되어 있다고 보여진다. 본격적으로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우리글의 역사는 2장부터다. 우리글이 없던 시대에 우리는 한자를 빌어 사용해왔다. 향찰이니 이두니, 구결이니 하는 것 등이 그것이다. 한자를 빌려와 한문으로 기록하는 것이 정상적인 것이었지만, 이외에 우리말을 우리식으로 적되 한자를 이용하여 적는 방법이 바로 향찰과 이두와 구결인 것이다. 이 향찰, 이두, 구결에 대한 따분한 이야기들, 특히 한자만 나오면 치를 떠는 요즘의 우리들에게 조금은 다행스럽게도 쉬운 이해가 가능하도록 서술하고 있는 것이 장점이라면 장점이다. 이어서 6장부터는 훈민정음의 창제와 관련한 이야기들이다. 훈민정음의 창제 목적은 무엇이었으니, 어떻게 훈민정음이 창제될 수 있었는지, 훈민정음 창제를 두고 세종과 최만리의 논쟁등을 흥미롭게 담아내고 있다. 이어지는 것은 한글표기법과 관련한 문제들, 그리고 세종대왕의 업적, 나아가 미래 사회의 새 문자, 혹은 원시문자로의 회귀 가능서엥 대한 언급하면서 끝을 맺고 있다.

사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들이 전혀 새로울 바는 없다. 내용의 많은 부분이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것들이며, 국어를 전공한 사람들이라면 대부분 다 알고 있는 내용들이다. 어차피 이 책은 일반인을 대상으로 씌여지고 있어서 일반인들을 생각해서 본다면, 조금씩 신선한 내용들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잘 아는 것이면서도 거기에 신선함을 담고 있다고나 할까, 시종일관 신선하면 어려우니까 말이다.

이 책에서 나의 눈길을 끈 부분은 크게 두 가지다. 우선 최만리와 세종대왕의 대결 부분이다. 그동안 우리는 세종대왕을 칭송하면서, 한글창제에 결사적으로 반대했던 최만리를 천리 만리 배척해 왔다. 이 책에서는 당시의 시대적, 사회적 상황에 비추어 최만리의 철학과 사상을 고려하면서, 그가 왜 반대해야 했는지를 살피고 있다. 어쩌면 세종에게나 최만리에게나 백성은 '어리석었고', 이 어리석은 백성을 보다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한 나름의 시각차에서 기인한 것은 아닐까하는 결론을 주고 있다. 또 다른 대목은 박승빈과 최현배의 철자법 논쟁에 관한 부분이다. 최현배는 주지하다시피 오늘날의 국어학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인 것에 반해, 박승빈은 나도 여기서 처음 들었다. 우리가 오늘날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맞춤법규정이 이런 논쟁을 통해 성립되었다는 사실 자체도 흥미롭지만, 또한 논쟁이란 것 자체가 흥미로운 것이지만, 국어발전에 있어서 최현배의 승리만큼이나 박승빈의 패배가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는 사실이 박승빈에 대한 흠모의 마음을 가지게 해서 더욱 이 대목에 끌린다. 앞으로 철자법 논쟁에 대한 기록들을 찾아보는 것은 또다른 이책이 주는 기쁨으로 남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대중서로서뿐만 아니라, 국어학입문서로서 전공자들에게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다. 저자들이 의도한 것같지는 않지만, 국어관련 대학에 입학한 신입생들에게 필독서로 읽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읽는 내내 가지게 되었다. 특히나 어렵다는 향찰, 이두, 구결 부분에서 조목조목 대조비교하여 설명, 해설한 부분은 어떤 전공서적의 해설보다도 좋다. 다만 아쉬운 점은 이 책은 그 표제대로 '우리말'에 대한 역사 여행이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글'에 국한되어 있다. 백년전, 천년전의 우리 말을 재구성하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다. 그 점에서 글은 자료가 그래도 남아 있어 말보다는 쉽다고 하겠다. 하지만, 이 책이 표방한 대로 '우리말'에 대해, 즉, 음성언어와 문자언어 전반에 대해 그 의문의 수수께끼들을 찾아보았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이를테면 신라사람과 고구려사람이 만나서 어떻게 대화를 했는지, 지금의 전라도 사투리가 500년 전에는 또 어땠을지 등 재미나고 유익한 주제들이 많을 것도 같다. 추후 이들의 작업이 보다 활발히 그리하여 우리말과 글의 비밀들의 재미나게 밝혀주시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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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교육학 원론 - 제2판
박영목 지음 / 박이정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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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교육학 원론』을 읽었다. 국어교육 전공자에게는 필수 기초 서적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그래서인지 '읽는다'는 낱말이 어울리지 않는다. 전공자에게 이 책은 전공서적, 강의교재이기 때문에 한층 가벼워 보이는 이 '읽는다'는 말과 격이 맞지 않는다고나할까? 내게 읽는다는 것은 기분 좋은 것이지만, 전공서적을 읽는다는 것은 기분 좋지만은 않은, 괜한 부담 있는 그런 것이다. 부끄러운 고백을 하자.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2째년 되는 지금 이 책을 처음 '읽었다'.

국어교육을 전공하면서 어떻게 이 책을 읽지 않고 졸업했을까 의아해 하시는 분들을 위해 변명하자면, 사범대학의 제도적 허실을 첫번째로 지적할 수 있겠고, 나의 노골적 교과교육론 기피현상을 두번째로 들 수 있겠다. 군대가기전 기억도 나지 않는 강의 수강 이력(학점이 꽤나 좋지 않지만 낙제는 면했다.)에 힘입어 이 책과 씨름하지 않아도 되었다.(당시 이 책은 초판이 나와 있을 때이다.) 행운이었는지 불행이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이제사 와서 고백하건데, 참 부끄러운 노릇이 아닐 수 없다. 그나마 이제라도 한 번 읽어 본 것이 어딘가 하는 것으로 위안을 삼는다.

많은 사범대학 국어교육과의 교과교육론 시간에 이 책을 강의교재로 택하고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래서 대다수의 국어교육 전공자들은 이 책을 한두 번쯤은 읽어내야할 큰 산이다. 필수 전공서적에 그 이름을 올리고, 반드시 읽어야할 책 쯤으로 언급될 뿐 가타부타 별 말들이 없어, 최근에 읽어낸 내가 이렇게 리뷰를 남기려 한다. 사실 많은 전공자들이 이 책으로 공부하면서 불만들을 토해내고 있지만, 이 책을 강의교재로 택하는 교수님들도 그러하지만, 별달리 말들이 없고 계속해서 이 책이 교재로 사용되는 이유는 이만한 책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오탈자가 곳곳에 포진하고 있고, 내용이 중복되거나 삭제되기도 하고, 대부분이 외국 연구 논문 번역의 짜깁기라고 보여지는 이 책을 대신할 만한 국어교육학 원론서가 현재로선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현대적 의미의 국어교육이 시작된 것은 해방 이후라고 할 것이다. 미흡한 점이 많지만 교육과정이 성립되고 학교교육이 제도화 되면서 지금의 국어교육은 시작된 것이다. 지금에 이르러 7차교육과정이 시행되고 있으며 곧 8차교육과정으로 바뀔 예정이다. 말이 8차라고 오래된 것 같지만, 70년에 못 미친다. 교육백년지대계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교육과정은 수없이 바뀌어 왔다. 뭐 시대가 급속도로 변하는 상황에서 그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수도 있다는 설명이 가능은 하겠지만, 여전히 졸속적 교육정책이라는 비판을 피할 길은 없다. 지금은 국어교육 또한 그와 크게 다르지 않다. 길지 않은 시간에 걸쳐 많은 것들이 변하고 그 변화에 국어교육 연구는 발을 맞추어 걸어오지 못한 바가 크다.

국어교육 초기 대부분의 교육이론들은 서양의 것을 수입해 온 것들이다. 그 사정이 지금이라고 나아진 바가 크지 않다. 사범대학에서는 국어교육 전공이라지만 국어학과 국문학 공부에만 치우쳐 있다. 교과교육론의 비중이 작을 뿐더러 강의 개설도 극소수 필수 과목들 뿐이다. 우리나라의 국어교육에 대한 전문가, 즉 국어교육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개발하는 교수진이나 연구진이 얼마나 되는지를 따져보면 우리 국어교육의 현주소를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나마 근래에 들어 전문적 국어교육학 연구자들이 배출되고 있고, 다양한 연구성과들이 나오고 있지만, 아직은 그것이 뿌리를 내리지는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이 책을 집필한 저자들도 개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런 책이 나온 것만 해도 우리로서는 다행이라고나 할까? 그렇기에 이 책이 여전히 선택을 받고 있는 것이리라.

이 책은 1996년도에 초판이 발행되고 2003년에 제2판이 발행되었다. "초판의 내용을 전면적으로 수정 보완하고자" 했다는 저자들의 말은 사실이지만, 미진한 점이 너무 많은 것이 탈이다. 여전히 외국논문들의 번역요약수록에 오자와 탈자, 내용 중복과 삭제등이 너무 심하다. 단어의 오탈자 및 잘못된 조사, 문장의 호응이 안 맞는다거나 하는 문제는 이해하겠지만, 3가지가 있다면서 첫째, 둘째만 하고 끝나는 등의 웃지못할 문제점들이 곳곳에 내재해 있는 점, 외국의 이론을 쉽게 설명한다던지, 우리 실정에 맞게 소화하여 소개하고 있지 못한 점, 앞서 서술했던 설명 내용들이 다른 제목으로 다시 서술된다던지 하는 점들의 문제들이 너무 많다.

이 책의 체제를 잠시 살펴보면, 제1부 국어교육학의 기초, 제2부 국어표현론, 제3부 국어이해론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 제1부 국어교육학의 기초에서는 국어교육학의 연구 동향을 요약제시 한 것이 지나지 않으며, 필자들의 독자적인 집필이라고 보여지는 것은 제3장 국어과 교사의 극히 일부분 정도로 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제2부 국어표현론에서 또한 이러한 상황은 나아지지 않는다. 작문이론에 대한 집중적 조명외에 표현에 해당하는 말하기는 상대적으로 부실하게 다루어 진다. 저자들의 관심 사항외에는 거반 부실한 요약만을 제시하고 있는 정도이다. 제3부 국어이해론에서도 '독서'에만 치중될 뿐이다. 전체적으로 체계와 균형이 잡혀있지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국어교육학의 '원론'이라고 하기에는 모자란 점이 많다.

문제가 많으나 아직 이 많은 책이 나오지 않고 있는 점은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다분히 원론서라고 하는 것이 그간의 연구결과를 집약해서 주요 엑기스를 담아내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할 때 다양한 이론들의 요약제시는 필요하다. 그러나 앞으로 진정한 국어교육학의 원론서가 나오기 위해서는 체계적이고 균형있는, 나아가 현 우리의 국어교육의 현실에 맞게 독자적으로 수용되고 재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이 책의 단점들이 앞으로의 국어교육 발전을 위한 진정한 국어교육학 원론서 출간의 촉매제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 책은 400여 페이지 분량으로 두터운 편이지만, 보다 내용을 충실히하기 위해서는 보다 두꺼워질 필요도 있을 것이다. 이래저래 아쉬움이 남는 나의 부끄러운 전공서적 탐독기(耽讀記)를 서둘러 끝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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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가 사라진다면 - 2023년, 영어 식민지 대한민국을 가다
시정곤·정주리·장영준·박영준·최경봉 지음 / 한겨레출판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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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국어 '열풍' 비슷한 바람이 불었다. 특히나 출판시장에서 그 바람은 거셌다. 현 사회의 이슈를 알아보려면 서점엘 가보라는 말이 있다. '한국어' 관련 도서들이 즐비한 것을 보면 바람이 분 건 확실한 것 같다. 왜 그런 것인가 생각해 보니, '대입 논술'이라는 유난히 민감한 문제에 그 원인이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한다. 대부분의 도서들이 작문·논술 관련 참고서였지만, 그와 더불어 잘 포장된 문법책들, 한국어 어휘 관련 도서들도 때를 놓치지 않고 달려 나왔다.

최근에 대학에서 영어 강의 비중을 대폭 늘리겠다는 발표들이 잇다르면서, 이제 이슈는 '영어'로 귀향한 것 같다. 영어는 항상 우리 사회에서 대접받는 손님, 아니 주인이었다. 이런 발표에 따라 우리 사회는 다시 영어 문제로 민감해졌고, 각종 방송 뉴스, 토론의 주제로 다뤄지면서 바람에 날개를 달았다. 영어를 잘 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21세기가 왔고, 경쟁력 강화를 위해서 대학의 영어 강의 비율을 대폭 늘리고, 나아가 잠시 고개 숙인듯 했던 영어 공용어화의 필요성도 언급된다. 그래서일까? '한국어 소멸'의 위기감이 대두되고 있는 것은.

언어는 생성, 발전, 소멸한다. 마치 인간처럼 태어나고, 자라고, 죽는다. 지금까지 많은 언어들이 생성(발생)됐고, 많은 언어들이 발전했으며, 또한 많은 언어들이 소멸했고, 소멸하고 있다. 그런데 이제는 언어의 생성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것은 아닐까 한다. 지금의 단계에서는 언어가 소멸되는 단계, 그러면서 몇 개의 언어로 정리되는 단계에 이른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언어학계의 보고에서도 어떤 언어가 새로이 생성되었다는 얘기는 들리지 않으니 말이다. 지금까지 수 천 개의 언어가 사라졌고, 사라질 것이라고 한다. 한국어도 예외일 수 없다는 위기감은 항상 있어 왔으나 최근 다시 머리를 들이 밀고 있다. 왜일까?

한국어 '열풍' 비슷한 바람이 불었고, 다시 '영어'에 자리를 내주는 형세에 대한 반발에서 국면 전환의 전략일까? 말하자면, 출판 업계의 음모설 정도? 아무런 근거도 없는 주장이지만, 한국어 소멸 위기를 말하며 목청을 높이고 있는 것을 보면, 이런 음모설 주장 만큼이나 좀 헤픈 느낌이 든다. SBS의 <웃찾사>의 한 코너에 이런 개그가 있다. 얼핏 어리숙하고 모자라 보이는 학생(주인공)이 다소 불량스러워 보이는 학생 둘이 나와 개그를 하는데, 불량 학생이 이렇게 말한다. "너 나한테 맞으면 죽어!" 정상적이라면 여기서는 쫄아야 맞겠지만, 이 개그의 웃음의 묘미는 이런 반전에 있었다. "에이! 사람이 그렇게 쉽게 죽나요." 이 개그에서처럼의 웃음을 주진 않지만, "한국어가 곧 죽을 것이다."라는 말에 "에이! 한국어가 그렇게 쉽게 죽나요."라는 대구를 해주고 싶은 것은 왜일까?

이 책 『한국어가 사라진다면』은 사실 1998년 복거일이 영어공용어화 논쟁을 불러일으키면서 그에 대한 반론의 제기의 성격을 띄고 기획, 출간된 것이다. 여기서는 영어를 공용어로 정하면, 이렇게 되고, 이런 문제들이 생기고, 이렇기 때문에 한국어가 사라지게 될 것이고, 그럼 또 이런 문제들이 있고 등등, 그런데도 영어 공용어를 하겠다는 것이냐? 이런 문제를 가상의 상황을 설정해서 논하고 있다. 개연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이 그렇게 쉽게" 죽지 않듯이 한국어도 이 책에서처럼 그렇게 쉽게 죽을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드는게 사실이다. 그만큼 이 책의 주장들, 상상의 상황들이 다소 과격해 보인다.

그러나 이런 과격한 상상들이 허황된 것만은 아니다. 분명 언어는 안쓰면 사라지게 돼 있다. 박물관에 보존된다고 해서 그 언어가 살아있는 것은 아니다. 영어 공용어화는 결국 한국어의 소멸을 야기하게 될 것은 자명한 결과라고 하겠다. 하지만, 영어를 공용어로 채택하기까지, 또한 영어 공용화 정책이 성공하기까지도 그리 쉬운 문제일 것 같지는 않다. 우리말이 사라지면, 우리 민족의 전통, 정체성을 잃는다는 협박성 발언도 이제는 식상하다.

한국어가 사라진다, 그렇지 않다는 입장들을 좀 차지할 필요성이 있을 것 같다. 영어 공용어화가 한국어를 살아지게 할 것이라는 가능성은 매우 높지만, 영어 공용어화가 그렇게 필요한 것일까를 우선 고민해 보아야 하는 것이 가장 간단한 방법이라고 본다. 영어가 왜 필요한가? 공용어, 나아가 모국어로서 영어를 택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그 문제들에 차분하고 냉철하게 판단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된다. 그 문제는 전문가들에게 숙제로 주면 좋겠다.

나는 기실 영어 공용어화를 절대 반대한다. 왜냐하면 나는 영어를 못하고, 싫어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지금으로써는 영어를 못해도 하등의 지장이 없고, 앞으로도 없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근데 이런 사람이 비단 나뿐일까? 나뿐이라고 할지라도 나는 영어가 싫고, 영어 공용화를 그렇기때문에 반대한다. 옛날 얘기 잠깐 하자면, 중학교 2학년때 지독한 영어 선생의 무지막지만 영어 단어 시험에 질려 그때부터 영어와 결별을 선언했다. 쪽지 시험을 통과 못하면 죽어라 패는데, 제깐엔 어케 통과나 해보자고 손가락 사이사이에 영어 단어를 적어 놓고 컨닝을 하다고 들켜 정말 죽어라 맞은 안 좋은 추억이 있었더랬다. 하여간 영어가 나는 싫다.

그러나, 나는 영어를 배우고 싶다. 그리고 중국어와 일본어, 여력이 된다면 독일어나 프랑스어 등을 배우고 싶다. 나아가 희랍어나 라틴어 등도 배우고 싶다. 독서를 하면서 이런 필요성을 강하게 느낀다. 나는 영어가 너무 싫지만, 내가 필요로 하고 그럼으로써 노력하여 배우면 얼마든지 잘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목적은 영어로 된 책을 잘 읽는 것이다. 중국어를 배워서 한시를 멋드러지게(한시를 중국어로 읽으면 운이 산다.) 읊어보고 싶다. 일본어는 배우기가 그리 어렵지 않을 것 같다. 유럽 여행을 가보고 싶은데, 유럽의 한 나라 정도 언어를 배우고 싶다. 배우고 싶은 열정을 가진다면 그깟 언어 하나쯤은 충분히 익힐 수 있다는 자만이 나에게는 있다. 그런데 영어공용어화라? 뭘 그렇게까지.

우리 사회는 영어를 잘할 필요성이 있다. 경제적 요인이 가장 큰 이유다. 직장에서도 영어를 강조한다. 그런데 따지는 것이 영어 성적이다. 영어를 못하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우리 공용어가 영어가 아니라서 우리가 영어를 잘 못하는 것은 아니다. 영어를 대하는 우리 마음가짐의 문제이고, 교육의 문제이고, 사회제도의 문제이다. 그런 것을 바꿀 따름이지, 영어 공용어화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네덜란드의 택시기사는 5개국어를 하는 모습을 얼마 전 텔레비전에서 본 적이 있다. 그들은 외국어의 필요성에 따라 언어를 배우고 익혔을 뿐이지, 대학입시, 취직을 위해 영어성적 따기에 심취한 것이 전혀 아님을 우리가 알아야 하지 않을까?

쓸데없는 소리만 잔뜩 했다. 이 책의 다소 과격한 논리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우리의 '영어'가 어떻게 잘못 걸어 왔는지를 따져볼 수 있는 좋은 자료들이 많이 담겨 있다. 저자들의 의도는 한국어 사멸의 시나리오 작성에 있었겠지만, 그런 "쉽지 않은 죽음" 보다는 오히려 이런 쪽에서 나에겐 도움이 된 듯 하다. 다양한 자료들이 풍성한 것을 장점이라고 해야겠다. 참고로 영어공용어화 논쟁의 추이도 이 책을 통해 개괄적으로 살펴볼 수 있겠다. 어떤 허무맹랑한 주장과 반박, 논쟁이 오고가는지 따라가 보는 것도 이 책을 읽는 재미로 추가할 수 있겠다. 

p.s. 사람이 쉽게 죽기도 하는 것 같다. 이 자릴 빌어, 무참하게 죽어간 미국의 젊은 청년들의 안타까운 죽음에 애도를 표한다. 그런데, 미국 청년들의 죽음만 안타까울까? 총이 아닌 최첨착 무기로, 대형폭탄으로 수십명, 수백명이 죽어간 소식을 간간히 뉴스단신 정도로 전해져 올때 나의 마음이 씁쓸한 것은 왜일까? 모든 죽음은 슬프다. 지나치지 않다면 한국어 사멸의 위기에 대한 경각심은 무용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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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4-21 07: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어공용화에 관한 가장 읽기 쉬운 책이 아닌가 합니다. 하지만 이 책만으로는 양쪽 모두의 의견을 듣고 비판하기는 힘들죠. 저도 영어공용화 반대입니다. 필요한 사람들은 그 분들만 자체 공용어화 하시면 됩니다. 필요없는 이들에게까지 강요할 건 아니죠. :)

멜기세덱 2007-04-21 1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느 소설에선가, 영화에선가, 이런 장면을 본 적이 있어요. 아빠, 엄마, 딸이 서로 다른 언어로 대화를 하는 모습. 그런 것도 재밌을거 같아요. 다양한 여러개의 언어를 말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지적, 인식적 풍성함을 준다고 생각해요. 영어공용어화보다는 다양한 언어 교육을 장려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하네요.
 
나는 폭력의 세기를 고발한다 - 박노자의 한국적 근대 만들기
박노자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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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박노자를 꾸준히, 관심을 가지고, 아껴 읽어왔다. 『당신들의 대한민국1, 2』에서부터 『좌우는 있어도 위아래는 없다』, 『나를 배반한 역사』, 『하얀 가면의 제국』에 이르기까지, 그의 저서들을 열심히 탐독했다. 분명히 그의 필치는 나름의 매력이 있었고, 다루는 주제들도 나의 관심사 중의 하나였지만, 그의 이런 저서들을 탐독하게 만든 것은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가 말하고 있는 것들이 나를 화끈거리게 만들었다고나 할까? 아마도 그런 것이 있었더랬다.

『당신들의 대한민국』을 읽고서 나는 이런 화끈거림을 살뜰히 느꼈다. 부끄러움에 고개숙이기 보다는 '우리들의 대한민국'을 적나라하게 까발리는 박노자에게 매력 만점을 주었고, 나는 그를 칭찬하는 리뷰를 쓰게 되었다. 그를 '경계인'이라고 애써 치부하면서, 그러기에 그런 날카로운 지적들이 가능하다고, 우리가 숙연히 받아들이고 고쳐가야하지 않겠냐고. 그렇게 박노자의 첫 저서에 평을 단 적이 있었더랬다.

그 후로 계속된 박노자 읽기에서 나는 더이상 그의 저서에 어떤 평도 달지 못했다. 무엇때문이었을까? 그의 저서들을 읽어갈 수록 나의, 그리고 우리의 부끄러움들이 너무도 무섭게 까발겨져서, 더이상은 고개를 들 수 없었기 때문이었으리라. 다만 박노자 잘한다를 속으로 뱉어냈을 뿐이었다. 한가지 이유를 첨언한다면, 그를 이제는 더이상 '경계인'으로 규정할 수 없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러시아에서 귀하한 법적 한국인 박노자를 경계인이라 규정했던 내게는 '그는 나와 다르고, 우리와 다르니까 그렇게 말할 수 있겠지'라는 생각에서 오는 관용이랄까? '남이니까 그런 소리가 가능한거지'라는 타자화였을까? 그런 것들이 분명 있었더랬다. 그러나 이제는 더이상 박노자를 우리와 다른 타자로 규정하는 '경계인'의 칭호를 붙여둘 수가 없다.

끊임없이 까발리고, '고발'하는 그에게 나는 이제 '우리'라는 동질성을 부여하고자 한다. 나 아닌, 우리 아닌 박노자의 진심어린 충고를 받아들이기엔 우리의 부끄러움이 너무 크고, 그의 충언을 받아들이고 '우리'를 반성하고 성찰하기 위해서도 이제는 그를 우리 안에 끌어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럴때 그의 까발림은 충언이 되고, 그의 고발은 우리의 반성과 성찰이 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는 지금 저 먼나라 타국땅 노르웨이 오슬로에 가 있다. 러시아에서 한국으로 귀화한 그가, 저 먼 타국 노르웨이로 날아가버린 이유가 무엇일지 난 궁금하다. 그는 왜 노르웨이로 날아갔는가? 우리 (대학)사회가, 우리 사학계가 그를 진정 '우리'로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은 아닐까? 단지 나의 추측일 따름이지만, 그의 우리 가까이에 있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쉽다. 우리 안에서, 우리와 함께하며, 가까이서 '까발리고 고발' 해 주었으면 하는 아쉬움말이다.

그의 까발림과 '독설'적 고발은 혀를 내두르게 한다. '김일성 동상'과 '이순신 장군 상'의 담긴 이데올로기적 동질성을 말했을 때, 외국인 노동자(특히 동남아 및 아랍)를 대하는 우리의 오리엔탈리즘적 모순과 식민주의, 제국주의적 행위들에 대한 그의 냉혹한 필담에서 나는 진땀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화끈거릴 수밖에 없었고, 그러면서도 옷깃을 여미며 그의 목소리를 경청했던 것이다. 여기 『나는 폭력의 세기를 고발한다』를 읽으면서도 달라질 것은 전혀 없었다.

이 책은 "이 사회를 지배하여 개개인에게 체제를 뒷받침할 '경쟁의 영웅'이 되게끔 감요하는 '힘'의 논리를 예쁘게 포장하는 군대, 스포츠, 종교 등 각종 담론들을 해부하여 그들의 '고상함' 두에 숨겨져 있는 진짜 내용이 무엇인지"를 고발하고 있다.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힘'과 '폭력성'들을 추적하면서, 우리 사회 안에서 그것들이 어떤 모습으로 작용하고 있으며, 어떠한 과정을 통해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게끔 조작되어 있는가를 탐구하고 있다. 그는 여전히 우리 안의 '폭력'을 까발리고 '고발'함을 통해서 우리를 일깨워 주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의 부제가 "박노자의 한국적 근대 만들기"라는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의 '고발'과 까발림, 현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폭력적', '힘'의 논리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작용하고 있는지에 대한 탐구는 우리의 근대가 '한국적'이지 못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왜 한국적이지 못했던 것일까? 그 원인을 추적하고 고발하는 그는 이제 제대로 된 근대,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가는 '한국적 근대'를 만들고자 하는 박노자의 '한국 사랑'을 엿볼 수 있다.

우리의 역사 해석에서의 '힘'의 논리는 고대로까지 수렴된다. 삼국시대 피비릿내 나는 전쟁 속에서 무참히 죽어간 이름모를 민중들은 역사의 어느 페이지에도 기록되지 못했다. 얼마전 인기리에 방영된 드라마 <주몽>에서도 고구려의 '민족적' 힘의 번성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었을 뿐이다. 이에 우리는 열광했고 공전의 히트를 쳤다. 우리 안에 내재된 이 폭력성은 곳곳에 숨어 있다는 것을 박노자는 세세히 까발린다.

한국 개신교 역사에서의 배타성과 폭력성을 비롯해서, 교육에 있어서의 적자생존, 강한 '힘'을 가진 인간육성, 위인전에 담긴 '힘' 있는 영웅에 대한 숭배 등 이러한 '힘'의 담론은 종교, 역사, 교육, 문화 등등 어느 곳에서도 잠재해 있다. 강한 국가를 꿈꾸었던 개화기 인사들의 '경찰국가의 이상'이 어떻게 형성되었고, 우리의 절대적이고 신성한 '국방의 의미'라고 여기는 징병제에 담긴 내막까지도 속속들이 추적해 내고 있다.

일제시대 '유도'가 유입되는 과정에서 어떤 논리가 작용했는지를 추적하는 그의 작업 또한 흥미롭다. "얼핏 보면 '일상의 당연한 부분'으로만 보이는 무술 수련이, 태권도를 위시한 여러 무술 종목들을 정치적으로 이용했던 권위주의 시대가 끝난 뒤에도 계속 이 사회의 각종 지배 담론들과 복잡한 유착 관계를 유지한다는 사실"을 말하면서 우리 사회의 "가장 일상적이고 생활적인 것들이, 보이지 않게 가장 정치적일 수도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기억해야 할 것을 박노자의 말하고 있다.

우리가 오늘날 '테러'를 보는 의식의 기반들은 어떻게 형성되었고, '동북공정' 논란에서 엿보이는 우리의 '힘'의 논리들 또한 해부하고 있다. 나혜석이란 한 여자를 끌어들이면서 근대가 던져준 여성의 고통을, 국가주의에 의해 잃어버린 우리의 개체성, 개인성을, 그리고 지역감정에 이르기까지, 박노자의 우리 사회의 '폭력'과 '힘'의 논리들의 원인자들을 찾아나선다.

이러한 대부분의 것들은 바로 우리의 '근대'형성기에서 적지않은 오류를 범하며 형성되었다는 것을 박노자는 진중하게 탐구하고 있다. 오늘날의 "체제의 수사와 권력관계의 현실 사이에서의 괴리는, 100년 전과 결코 다르지 않다"고 그는 말한다. 또한 "소위 '신성한 국방의 의무'가 실상 국가에 의한 상명하달적인 생활양식의 훈련을 받을 권위주의 사회 남성 구성원의 '사회화 의무'를 의미"하는 우리 사회의 이런 폭력성들은 "일제 말기의 총동원 체제와 식민지 이후의 남북한 군사주의 문화였"음을 그는 파헤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한국적 근대'를 만들 수 있을까? 박노자의 말에 귀를 기울여 보자. "개인 차원의 적극적인 저항은, 저들이 강요하는 생활 방식을 생각과 몸으로 동시에 부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현실적으로 버티기" 힘들다. 쉬운 방법으로는 "어쩔 수 없이 재벌이 만드는 물건을 쓰더라도 노동 탄압과 극우 정당에의 기부로 악명을 얻은 악질 재벌들의 물품을 보이콧하고, 학벌 타파를 위해 분투하는 시민단체들을 할 수 있는 대로 지원하고, 합법적인 병역 거부와 대체 복무를 위한 친화적 여론을 인터넷 등을 통해 조성하는 등 한 개인이 온몸을 내던지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일"들이 있겠다. "바로 현 체제가 인간의 심신을 파괴하고 인간의 행복추구권을 빼앗는다는 의식"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고 박노자는 말한다. 그럴 때 우리의 '폭력의 세기'는 마감될 수 있을 것이다. "'힘의 숭배'는 생명 파괴의 길이요, 죽임의 길일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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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7-04-18 0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을 때마다 부끄러움이 앞서서 선뜻 집어들지 못하는 이름 중 하나입니다. 리뷰 잘 보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