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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 평전 - 조선 후기 민족 최고의 실천적 학자
박석무 지음 / 민음사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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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만한 사람치고, 아니 배웠다는 사람치고 다산 정약용을 모르는 사람은 없겠다. 단군, 이성계, 세종대왕, 이순신 등등의 급은 아닐지 몰라도 그 아래 등급 정도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위인 중의 한 분이 터이다. 정약용에 대한 서적들만 시중에 나와 있는 책들이 잔뜩 있다. 나는 정민 선생이 쓴 <다산성생 지식경영법>이란 책과 박석무의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등을 보유하고 있고, <목민심서>란 책이 있었는데 지금은 어디 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그렇게 유명하신 분의 '평전'이 아직 제대로 된 것이 없었다는 게 조금 놀라웠다.

다산은 학문 분야가 넓고 광범위했을 뿐만 아니라 해박하고 정밀하며 전문성이 높고 치밀하여 그에 대해 정확하게 정리하고 분석하여 평가를 내리는 일은 누구에게나 어려운 일이다. 그렇지만 누군가가 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인 것도 사실이다. 다산 서세 178년이 지났고, <여유당전서>가 간행된 지 76년이 되었는데, 본격적인 다산의 평전이 출간되지 못했음은 역시 이 나라 학계가 지적받을 사안의 하나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대로 어느 누구도 선뜻 착수하기는 어려운 일이었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것 또한 인정해야 한다.(14쪽)

그렇다. 정약용과 같은 뛰어난 인물을 감히 누가 평가하겠는가? 단군 평전을 못봤고, 이성계나 이순신, 세종대왕 평전이 견문이 적은 탓으로 보질 못했다. 단군은 자료가 부족할 탓을 테고, 다른 분들은 너무 뛰어나서 평가의 칼을 들이대기 겁이 나서일지도 모를 일이다. 어설프게 들이댔다가는 본전도 못찾고 욕만 잔뜻 먹기 딱 좋다. 대단한 각오와 용기만 필요한 게 아니고, 적확하게 평가할 능력 또한 갖추어야 하기에 누구하나 선뜻 나서서 평전을 쓰기 어려웠을 터이다. 그렇다해도 평전이 하나 없는건 그분들에 대한 모독일 수도 있고, 우리 무지대중들에 대한 애민정신의 부족일 수도 있는 일이라, 우리 학계는 지탄을 받아야 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 일을 박석무가 맡았다. 대단한 용기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평전을 쓰려면 잘 써야 했다.

 

다산 정약용의 평전 쓰기, 쉬운 작업이 아닌, 지난한 일이다. '평전'의 사전적 의미는 '평론을 곁들인 전기'이다. 어떤 인물의 인생과 학문에 대한 일대기인 전기에 가치 판단인 '평론'을 곁들이는 일은 누구의 경우에도 어려운 일이다. 더구나 다산 정약용은 뛰어난 인물이고 탁월한 학자인 데다 삶 또한 파란만장하고 드라마틱하여 그 일생을 정리해 내고 평가를 내리는 일은 더욱 쉽지 않은 일이어서 '지난'한 일이라고 했다.(13쪽)

평가하기가 쉽지 않은 일이라고 해서 평전을 쓰면서 평가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 저자의 서문을 읽으면서 과연 정약용에 대한 어떤 평가를 내리려 하기에 이렇게 거듭 엄살을 부리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일단의 저자의 전략이 성공한 것이리라-생각했다.

 

서문격인 '들어가면서'로 책을 시작하는데 서문에 정약용의 일생과 저술 등을 일목요연 잘 정리하고 있다. 본론으로 들어가면서는 정약용의 드라마틱한 인생을 보다 드라마틱하게 전달하고자 순행적 구성이 아닌 역순행적 구성, 그러니까 시간적 재구성을 통해 약간의 시간적 변화를 주어 정약용의 젊은 시기 암행어사로서의 활약상을 먼저 보여주고 있다. 흥미있는 구성 전략이라고 보여진다.

 

그렇게 흥미롭게 읽어가면서, 정약용에 대해 우리가 잘 알고 있던 부분을 재확인하기도 하고, 잘 몰랐던 세세한 일화들에 재미를 느껴가고 있는 터에, 불현듯 정약용에 대한 저자의 평가는 언제 나올까가 궁금해졌다. 그래서 그 평가에 주목하면서 이 평전을 읽어가는데, 요약하자면, 아니 요약할 필요도 없이, 책 표지에 있는 그대로 뿐이었다. "조선 후기 민족 최고의 실천적 학자'. 이 외의 어떤 평가를 찾아 볼 수 있었는지 다른 분들께 물어보고 싶다.

 

논문을 쓰는데 있어서 먼저 선행연구를 정리하는 것이 기본인데, 저자도 서문에서 선인들의 정약용에 대한 평가를 찾아 제시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한다. "칭찬의 평가만 많아 비판한 내용을 많이 찾지 못하는 아쉬움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자신이라도 비판점을 찾아 제시했어야 했다. 더구나 저자는 자신만의 긍정적 평가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그저 선인들의 정약용에 대한 평가만 재삼재사 나열하고 있을 뿐이다.

 

이런 위대한 역사적 경험이 우리에게 존재하지만, 다산 이전이나 이후의 오랜 시가 동안 고을의 수령인 목민관은 고을의 주인이고 권력자로 여겨져 수령의 다른 호칭으로 '성주'라는 용어가 보편적으로 사용되었으니, 그런 아이러니한 현상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지, 민주주의 발달사에서 한 번쯤 되짚어 연구할 가치가 있다고 여겨진다. 다산 또한 백성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논리로 실제 행정을 폈으면서도, 역사의 발전 주체를 국민이 아닌 국왕에게 두고 국왕이 선정을 펼쳐야 역사가 발전한다는 논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이러한 점에서 다산도 인간적 한계를 보였으며 시대적 제약에서 탈피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근본적인 변화와 개혁이 불가능했던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을 것이다.(234쪽)

 

저자가 제시한 정약용의 한계, 과연 타당한가? 저자의 지적은 타당하지만, 현재의 시점에서 당대를 평가한 것이고, 그 시대 모두에게 적용될 한계일 터이다. 정약용을 이 시대 민주주의의 선각자로 만들 필요는 없는 것인데, 민주주의의 잣대를 정약용에게 적용해서 한계를 지적하고 비판한다면 이처럼 불합리한 평가는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정약용의 민본은 현대의 민주와 그 성격이 다르다.

 

여기서 우리는 다산에 대한 아쉬움과 애석함을 토로하지 않을 수 없다. 고산은 몇백 년 전에 이미 순수한 우리 한글로 그처럼 아름답고 뛰어난 시조를 남겨 우리 한글의 우수성을 여실히 증명했는데 고산의 6대 외손이던 다산은 훨씬 뒤의 인물임에도 한글을 사용한 문학 작품을 남기지 않았다는 까닭이다. 송강 정철이나 고산 윤선도보다 훨씬 뒤의 후손으로 그들이 이룩한 문학적 업적도 계승하지 않은 점은 유교주의자의 한계로서 후진성을 면할 수 없다. 다산의 한문시들이 내용 면에서야 송강이나 고산에 뒤지지 않은 점이 많지만, 표현의 수단으로 한자만을 사용한 점은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의 하나임이 분명하다. 시대로 보면 훨씬 진보적이어야 하건만, 후진적인 점은 어떤 이유인지 알 길이 없다. 문학가와 사상가의 차이로도 볼 수 있겠으나, 여기에서 다산의 한계는 숨길 수가 없다.(436쪽)

 

이게 말이 되는가? 다산이 한글 작품을 짓지 않은 것이 후진적이라니? 고산의 자손이니 한문이 아닌 한글 작품을 남겨야 한다는 건 무슨 논리인지, 고산이나 송강의 문학적 업적을 계승하려면 강호자연을 노래하거나 임금님 찬양을 노래하는 가사나 시조를 정약용이 지었어야 했다는 말인가? 한자만 쓴 걸 이해하지 못했다면 더 연구했어야 했고, 한글을 써야 문학가고 한문을 쓰면 사상가라고 규정할 바에야 아에 규정을 말았어야 했다.

 

다산의 한글을 쓰건 한문을 쓰건 그건 다산의 자유이면서, 도산이나 송강이 한글을 쓴 건 노래로 읊기에 유리하면서 정서를 표현하는 데에는 한글이 부족함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시에도 사상이 담긴 말은 죄다 한자인걸 모르나? 정약용은 백성들의 비참한 생활상을 그려내는 데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저자가 밝히고 있듯이, 그런 사회 비판을 통해 백성들의 참상을 위정자들에게 알리기 위해 핍진하게 시로 그려낸 것이다. 그것을 자세히 그리고 세밀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한글보다도 당시에는 한자를 사용하는 것이 더 유리해던 것이 아닐까? 한자를 사용하면서도 당시의 귀한 우리말 표현을 최대한 살려낸 점을 칭찬할 일이지, 한글을 쓰지 않았다고 후진적이고 한다면, 이런 어불성설이 또한 어디에 있을까?

 

저자는 법을 전공한 학자이고 <다산 정약용의 법사상>이라는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국회의원을 지냈고, 국회다산사상연구회를 조직, 간사로 활동했으며, 여러 대학에서 석좌, 석좌초빙교수 등을 역임했다. 박사 학위를 받았는지는 프로필에 나와있지 않아 모르겠지만, 문학을 전공하지는 않은 게 분명해 보인다. 그래서인지 문학적 평가에는 매우 부족한 능력을 보인다. 위에서 언급한 한글, 한자의 문제뿐만 아니라, 정약용의 작품을 인용하면서 붙인 해설과 평가는 그저 일반적 수준에 불과하고, '그냥 좋다'식의 평가 뿐이다.

 

다산의 나이 50세이던 1811년에는 평안도 정주 지방에서 지역 차별 철폐 등을 내걸고 홍경래가 민중들을 동원하여 봉기하였다. 다산은 귀양지에서 이런 소식을 듣고서 민란이라고 규정하고 그들을 토벌해야 한다고 전라도민에게 고하는 <창의통문>을 작성했다. 왕조 정권 아래의 백성 입장이던 다산은 그 일에 대해 대처하지 않았어도 크게 탓할 일이 아니었는데, 왕조 정권을 지지하는 입장임을 나타내려는 뜻에서 그런 글을 지었지 않았을까 생각하지만, 민중 사관으로 보면 다산 개인의 한계이자 시대적 한계를 드러냈다고 여길 수 있다. 그는 좋은 집안의 출신인 기득권자였고 상당한 지위의 관료를 지냈다는 점 때문에 그러한 한계에서 벗어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480쪽)

 

다산이 <창의통문>을 지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는데, 왜일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저자의 해설을 보면, 다산이 백성 입장이었다는 건 무엇을 근거로 하는지 의문이다. 또한 당시의 다산이 기득권자의 위치에 있었는지도 의문이다. 이러한 다산의 행위를 설명하고 평가하려면 다산의 저술을 분석하고 다산이 <창의통문>의 입장을 취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밝혀내야 했다. 민중 사관으로 보는 것은 그 다음의 일이 되어야 했던 것이다. 저자 말대로라면 홍경래의 난을 보고도 다산은 입다물고 가만히 있었어야 했는가? 정약용도 양반이고 관리출신이니까 그랬을 거야? 정권에 잘 보여서 유배나 빨리 풀자고? 아니면 잠깐 정신이 나가서?

 

나는 박석무의 이 책이 정약용에 대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읽은 유일한 책이다. 그런데도 정약용에 대해서는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알고 있기는 했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 좀더 정약용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더 자세히 알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그것 뿐이다. 평전이라고 해서 인물을 반드시 비판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의 평가가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보다 심도있는 탐구, 사상에서 문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탐구와 그에 대한 저자의 전문적이고 객관적인 평가가 있어야 제대로된 평전이 나올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거기에 이르지 못했다는 판단이다.

 

 

추신

1. 정약용을 이야기하는데 있어서 천주교와의 관련성은 빼놓을 수 없는 것이긴 한데, 정약용이 천주교에 대한 입장을 바꾼 것, 그리하여 천주교에서 벗어난 것은 저자의 판단에 동의하지만, 한번이면 족하지 않았을까? 이 책은 여러곳에서 천주교 얘기를 하면서 천주교의 오류를 지적하는데 많은 공을 들이고 있다. 좀 과한 느낌.

2. 평전에서 평가의 내용을 주로 선행 연구들을 정리하여 채우고 있는데, 그렇다면 적어도 책 말미에 참고문헌으로 정리는 해주어야 하지 않았을까?

3. 정약용이 강진의 다산에서 유배생활을 했는데, 언제부터 다산이라는 호(?)를 사용했는지, 왜 그런 것인지가 궁금했는데, 책에는 별반 내용이 없어 아쉬웠음.

4. 그외 아쉬움 점은 생략.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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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4-06-16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웅 깨갱이어요 덕분에 저도 정약용 공부해야겠어요

gabekkim 2021-07-03 16: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의 평가에 대해 매우 공감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반란의 도시]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반란의 도시 - 도시에 대한 권리에서 점령운동까지
데이비드 하비 지음, 한상연 옮김 / 에이도스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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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시골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 대학 진학과 동시에 도시에 오게 되었다. 시골서는 옆집 숟가락이 몇 개인지까지는 몰랐지만, 그 집의 식구가 몇이며 대소사는 무엇인지 모를 수가 없었다. 반경 몇 키로 내의 이웃들을 거의 다 알고 지냈다. 도시에 와서부터는, 그리고 현재 내가 사는 집 앞뒤좌우 옆집의 이웃이 누구인지 나는 모른다. 그러니 나는 지금 이웃이 없고 마을 친구가 없다. 삭막한 도시.

 

  이 도시는 왜 삭막할까? 시골은 일과 생활이 같은 장소에서 이루어진다. 그들은 같은 일을 하고 같은 생활을 한다. 반면 도시는 일하는 곳과 생활하는 곳이 다른 경우가 많다. 나 같은 경우, 생활의 공간은 대부분이 잠만 자는 공간인 경우다. 또한 이사도 자주하게 되면서, 여기가 '우리 마을, 우리 동네'란 인식은 약해진 듯 하다. 언젠가는 떠나갈, 잠시 지나는 공간일 뿐이다. 오래 머물 수 없는 공간.

 

  이런 공간에서 십 여 년이 넘게 생활한 나는 이제 어엿한 시티즌이다. 도시 사람. 시민이다. 이런 나에게 하비는 '반란'을 권한다. 데이비드 하비를 처음 경험한 건 <신자유주의>란 책에서다. 어느 책 모임에서 신자유주의를 주제로 토론하게 되면서 이 책을 읽게 되었는데, 무슨 경제학자나 정치학자, 사회학자가 아닌 어울리지 않는 지리학자가 쓴 책이라는 걸 알고는 신뢰성을 의심하며 읽은 책으로 기억된다. 이 책을 통해 내가 신자유주의를 철저히 공부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지리학이라는 것이 꽤나 넓은 범위를 다루는 학문이란 사실을 느낀 바가 크다. 그런 그가 이제는 반란을 말한다. 도시에서의 반란. 어쩌면 이 주제는 그가 전에 탐구했던, 그 실체를 까발렸던 '신자유주의'에 대한 저항의 연장선상에 있는 작업이지 싶다.

 

  왜 반란을 하라는 거지? 이 도시를 왜 뒤집어엎어야 하는 거지? 이 책을 읽다가 잡혀가는 건 아닐까? 국가보안법에 저촉될 염려가 있지는 않은가? 위험한 책. 이런 두려움을 읽는 내내 느꼈다. 이 책은 마지막 장은 그 위험성이 가장 커보였다. '윌스트리트를 점령하라'는 그의 선언적 명령은 나를 두렵게 했다.(잡혀갈까봐.)

 

  하비에 의하면 도시는 공유재다. 이 도시는 그 누구의 것도 아니고, 이 도시에서 사는 모든 사람이 이루어낸 결과? 성과? 유산? 뭐 그런거다. 그런데, 이 도시를 소수의 사람들이 사유화하고 있다. 본래의 주인을 내쫓고 있다. 약탈이 일어나고 있고, 착취와 사기와 거짓으로 모든 걸 빼앗아 가고 있다.

 

  "1980~90년대 서울에서도 건설회사와 토지개발업자가 험상궂은 용역깡패를 동원해 달동네 주택을 대형 해머로 때려 부수고 주민을 몰아내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1950년대부터 가난한 사람이 거주하던 고지대 토지가 1990년대에 이르러 가치가 높아졌기 때문에 빚어진 일이다. 현재 고지대는 온통 고층건물로 뒤덮여 있어 과거 야만적인 재개발 과정의 흔적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p.51)

(우리나라 사례가 제시된 유일한(?) 경우인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자본의 통제가 워낙 철두철미해서인지, 하비의 연구가 미진해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모범적 반란의 사례로는 우리나라는 등장하지 않는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는 빼앗긴 것을 되찾아야 한다고 하비는 말하고 있다. 그 빼앗긴 것. 그것은 이 도시를 누릴 권리, '도시권'이다. 그래서 하비는 서문에서부터 제1장에까지 '도시권'을 말한다. 이 도시권을 그들이 약탈해 갔고, 그것은 원래 우리의 것이고, 그것을 이제부터 찾아와야 한다고 말이다. 제2장에서부터 제4장까지는 그것을 철저하게 분석하고 증명하면서 우리가 왜 도시권을 찾아와야 하는지를 쪼금은 어렵게(나한테는 어려웠다.) 이야기한다. 그리고 제5장에서는 어떻게 도시권을 찾아야 하는지 그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내가 주목한 부분, 그리고 열심히 읽은 부분은 바로 이 대목이다. 반란의 방법론.

 

  "좌파는 세계시장에서 자본주의적 가치법칙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면서 그 대안도 만들어내야 한다. 또 협동적 노동자가 무엇을 어떻게 생산해야 하는가의 문제를 놓고 민주적이고 집단적으로 결정하고 운영하는 능력도 길러야 한다."(p.218)

 

  그러면서 하비는 '새로운 도시혁명'의 방법을 제시한다. "파업에서 공장 점거에 이르는 노동자 중심 투쟁은 주변 민중세력이 지역사회와 공동체 차원에서 대규모로 결집해 강력하고 활기차게 지원할 때, 성공할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에 "노동자와 지역 주민 사이의 끈끈한 연대"를 구축하라고 말한다. 더불어 "연대를 구축하고 유지하고 강화하려는 정치적, 의식적 노력이 꼭 필요하다." 또한 노동 개념의 변경도 필요하다. "점점 도시화하는 일상생활의 생산과 재생산에 꼭 필요한 노동이라는 넓은 의미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반란의 구체적 방법은 무엇일까? 하비는 솔직하게도 "그저 잘 모르겠다"고 말한다. 무책임해 보이지만, 그 방법을 우리모두가 찾아야 한다는 필요성을 역설하는 게 아닐까 싶다. 고기가 아니라 낚시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는 말이다. 고기를 어디서 찾아야 할까? "혁명적 상황에 놓인 도시의 정치적 실천 사례를 검토"하는 작업에서 그 방법을 찾아낼 수 있을 거라고 하비는 말한다.

 

  하비는 제7장(마지막장)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 월스트리트당이 복수의 여신과 만낟다'에서 월스트리트의 탐욕과 부정, 약탈과 착취, 거짓과 범죄를 가열차게 고발한다. 하지만 이에 맞서 지금 현재 '월스트리트 점령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비는 다음과 같이 선언하면서 반란의 당위성을 설파한다. "월스트리트당의 전성기는 끝났다. 처참한 몰락만이 남았다. 우리는 폐허 위에서 대안을 구축할 절호의 기회를 맞이했다. 이는 우리의 피할 수 없는 의무, 피하려고 해서도 안 되는 의무이다."

 

도시권을 되찾자, 도시에서의 반란은 신자유주의와 자본에 맞서 싸우는 원동력이 되어야 한다. 민중의 연대, 협력, 공동체 등등. 어쩌면 이 하비의 선동은 그간의 노동운동의 당위를 주장하는 다른 이야기들과 크게 다를게 없어 보이기도 한다. 같은 이야기들의 반복. 그러나, 나는 마지막 선언에 담긴 하비의 말에서 자신감을 보았다. 막연한가? 그 막연함이 우리를 반란으로 이끌어 갈 것이라고 믿는다. 막연하고 답답하고 먹먹하고 비참하고 처참하며 말이 안 되는 현실이기때문에 우리가 '반란'하는 것이겠지. 반란의 역사는 다 그런 식이었다.

 

사족: 이 책의 번역이 많이 아쉽다. 사소한 부분들에서의 실수가 많이 보인다. "이를테면 페미니스트는 교외와 교외형 생활양식 때문에 매우 불만스럽다고 선언했다."(p.36)에서 처럼 잘못된 조사가 사용되었거나, 문장의 호응이 맞지 않는 등의 실수들이 곳곳에서 보인다.

 

p.35 "그 방법 무엇인가는" 은->이

p.59 "통상적 범위를 넘어는" 넘어는->넘어서는

p.105 "부동산 소유자 개입되었다." 소유자->소유자가

p.114 "19세기 후반부터 도시 개발은 항상 투기적 성격을 띠었지만, 중국 경제 발전에서 엿보이는 투기의 규모는 지금까지의 인류 역사에서 나타났던 그 어떤 투기의 규모와도 차원을 달리 한다. 그럼에도 글로벌 경제에서 흡수되어야 하는 과잉 유동성도 전례 없는 규모인데다 나날이 기하급수적으로 확대되고 있다." 의미상 '그럼에도'는 '게다가' 정도가 아닐까?

p.134 "온갖 용도의 공간 갖춘" 의->을

p.150 "이 문제는 오스트롬의 주장은 물론 급진 좌파가 공유재 문제를 두고 내놓는 다양한 제안이 반드시 해결하고 넘어가야 한다." -> 주술 호응이 맞지 않는다.

p.175 "그러고는 두 가지 요인 덕분에" 요인이-> 요인

p.230의 각주 번호는 2가 아니라 25다.

p.235 "창출을 추진하면서 옹호한 구상과 비슷한다." 비슷한다->비슷하다

p.241 "완강한 엘리트(특히 산타크루주 시에 몰려든 무리)는" -> 둘 중 하나는 빼야한다.

p.251 '라르' ->지금까지 계속 '라자르'라고 했다.

p.272 "모든 제도정치 짓눌려" 제도정치->제도정치에

 

내가 찾은 건만 무려 13개다. 더 찾아보면 더 나올지도 모르겠다.

 

  더욱 아쉬운 것은 번역가가 번역을 덜 한 듯한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한국말로 번역할 때 적절한 말을 찾지 못해서인지는 몰라도 '프리캐리아트'라든지, '리버테리어니즘', '뉴어버니즘', '레버리지', '인프라스트럭처', '인클로저할 수 없을 때', '거버넌스하는 데', '코포라티즘' 같은 단어들은 번역을 해 주든지, 번역을 안 할 거면 영어라도 병기를 해주든지 해야 했다. i'm happy를 나 해피해라고 번역하는 듯해서 언해피하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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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사회]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투명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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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뻔 하게 시작해본다. 한병철의 <투명사회>를 읽기 전에, 읽으면서, 그리고 읽고 나서 문득 드는 뻔 한 생각이 '투명 인간'이었다. '투명 인간'은 우리가 한번쯤 어렸을 때 동경(?)했던 존재(?)였다고나 할까? (하도 오랜만에 리뷰를 쓰니 어휘력이 꽝이 됐는지, 적절한 단어들이 떠오르지 않는다. 아마도 이 리뷰는 물음표 천지가 되지 싶다.) '투명 인간'이란 특이한 발상은 꽤 오래되었지 싶다. 검색해 보니, 1897년에 영국의 소설가 웰스가 쓴 공상 과학 소설 <투명 인간>이 그 시초가 아닐까 싶다. 투명해 지는 약을 개발해 먹고 못된 짓 하다가 죽는다는 내용이란다. 신기하게도 1969년, 내가 태어나기도 무려 10년 전에, 그 당시 내로라하던 신성일, 허장강, 서영춘, 그리고 요즘 대세 이순재 선생 등 한 가닥씩 하는 분들이 출연해 만든 <투명 인간>이라는 영화가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걸 알았다. 2000년에는 미국에서 <투명 인간>이라는 드라마가 방송됐다. 그런데 내용은 잘 모르겠다. KBS에서는 <투명인간 최장수>라는 드라마도 했다. 외국에서는 <투명인간 그리프>라는 영화도 있었다. 찾아보면 더 많을 것이다. 그만큼 '투명 인간'이라는 화두(?)는 이래저래 유행이었더랬다.

 

  지금은 '투명 인간'이라는 비현실적인 화두를 들어보기는 어려운 듯하다. 대신에 공상이 아닌 현실로서의 '투명 인간'의 가능성이 언뜻 언뜻 보도를 통해 들려오기는 한다. 투명 망토 같은 것을 개발할 수 있다고 하는 것 같은데, 우리 어렸을 적, 그런 망토가 있으면 투명 인간이 될 수 있을 거야 하는 허무맹랑한 생각이 곧 현실이 되는 걸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러면 진짜 신기할 거 같다. 투명 인간이 되는 방법들은 우리 상상 속에서 여러 가지가 있었다. 약 같은 것을 개발하려 하다가 잘못해서 투명 인간이 되거나, 투명 망토를 걸치면 투명해지는, 뭐 그런 것을 생각했었다. 그렇게 우리는 투명해 지고 싶었던 것이다.

 

  투명 인간이 되어서 우리는 무엇이 하고 싶었을까? 여탕에 들어가는 걸 최우선으로 꼽을 수 있겠고, 은행에 가서 돈을 잔뜩 들고 나오는 것, 대강 유치찬란 뽕짝 같은 상상들에 그치고 만다. 그러다 정의를 위해 악당을 물리치고 해피엔딩?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투명해진다는 것은 불편한 점이 더 많을 듯하다. 요즘 같은 세상에 내가 보이지 않는다면, 죽거나 다치기에 딱 좋지 싶다. 길을 걸을 때도 아무도 나를 보지 못하니 열심히 피해 다녀야 할 판이다. 잠시 잠깐 한눈이라도 팔았다가는 차에 치여 죽기 딱 좋지. 아무데서나 잠을 자는 것도 피해야 할 것이다. 내가 자는 데 누구라도 덜컹 앉아버리거나, 무거운 짐이라도 쿵 내려놓는다면? 어익후!!!

 

  보통 공상 과학류의 주인공들은 한 때 신나게 즐기다가도 남과 다른 나를 느끼며 외로워지고 슬퍼진다. 뻔 한 스토리지만, 뻔하다는 것은 일반적이고 보편적이고 자연스러운 귀결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내가 투명인간이 되어도 당근 슬퍼지고 말 것 같다.

 

  상상을 넓혀서 투명해지는 약 혹은 망토가 개발되어 세상 모든 사람들이 투명해진다면, 세상은 어떻게 될까? 아무도 아무를 보지 못하는 세상은, 투명한 인간들이 제 아무리 빨빨거리며 돌아다닌들, 그건 아무도 없는 세상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 인간 모두가 투명해지면, 세상은 아무도 없는 세상이 되고 만다.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無.

 

  한병철은 말한다. "투명한 관계는 모든 매력, 모든 활기를 잃어버린 죽은 관계이다. 완전히 투명한 것은 오직 죽은 자뿐이다."(p.19) <투명사회>에서 말하는 투명한 인간과, 내가 지금까지 주저리 떠들었던 '투명 인간'은 출발점이 다르지만, 어쩌면 결과는 동일해지는 듯하다. 인간 모두가 투명해지면 그건 아무도 없는 세상, 죽은 자만 널린 세상, 아무 것도 아닌 세상, 아무 것도 없는 세상, 無.

 

  한병철이 말하는 '투명사회'의 속성은 '긍정, 전시, 명백, 포르노, 가속, 친밀, 정보, 폭로, 통제'다. 이렇게 보면 도무지 무슨 사회인지 알 수가 없다. '긍정, 명백, 친밀, 정보'만 보면 대단히 좋은 사회인 듯싶고, '포르노'를 보면 흥미롭게 야한 사회이기도 한 듯싶다. 이 사회에서도 인간은 투명해진다. 오늘날 '정보사회'라고 하는 이 시대에 인간은 '투명'하다는 얘기다. 이 '정보사회'에서 발생하는 중요한 문제가 정보 유출인데, 비단 몰래 빼가는 유출만이 아니라, 나도 모르는 사이 자연스럽게 노출되는 정보의 유출, 그로 인해 나의 일거수일투족 모든 것이 낱낱이 읽혀지는 그런 정보사회가 '투명사회'다. 누군가 나를 속속들이 알고 있다. 나의 모든 정보가 투명하게 누군가에 의해 읽혀진다. 그래서 나는 투명하다. 아니 이 사회의 인간 모두는 점점 투명해진다. 그리하여 투명해진 인간이 된다. 투명인간. "투명사회는 정보사회다. 정보는 어떤 부정성도 알지 못한다는 점에서 투명성의 현상이다. 정보는 긍정화되고 조작 가능하게 만들어진 언어다."(p.83)

 

  "아감벤의 테제에 따르면 아담과 이브는 원죄 이전에 벌거벗지 않았다. "은총의 옷" "빛의 옷"이 그들의 몸을 덮고 있었기 때문이다. 원죄로 인해 그들은 신성한 옷을 빼앗기고 만다. 완전히 벌거숭이가 된 아담과 이브는 몸을 가리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벌거벗음이란 곧 신이 내린 옷의 상실을 의미하는 셈이다."(p.49-50)

 

  태초에 하나님이 계셨고, 아담과 이브를 창조했더랬다. 그러나 그들은 벌거벗었지만 "벌거벗지 않았다." '신성한 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창세기 2장 25절) 그러나 그들은 벌거벗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창세기 3장 11절) 그 부끄러움을, 부정성을 그들은 옷을 만들어 가렸다. 그리고 그들은 숨어 버렸다.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창세기 3장 8절) 그러나 오늘은 인간은 부끄러움을 가린 그 옷을 실오라기 하나까지 훌훌 벗어버린다. 부끄러움에 숨지도 않고 자신 있게 드러낸다.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한다. '긍정', 그리하여 만인에게 자신을 드러낸다. '전시'. 야한 사회, 이것은 '포르노'다. "아무것도 덮거나 숨겨두지 않고 시선에 내던지는 투명성은 외설적이다. 오늘날 모든 미디어의 이미지들은 어느 정도 포르노적이다."(p.59)

 

  "투명성의 강제는 기존 시스템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데 매우 효과적으로 작용한다. 투명성은 그 자체로 이미 긍정적이다. 투명성 속에는 기존의 정치경제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의문시하는 부정성이 들어 있지 않다."(p.25) 이러한 투명성은 결국에는 '통제'에 있어 최적화된다. "투명성의 독재 속에서는 주류에서 벗어나는 의견이나 일반적이지 않은 아이디어는 아예 입 밖으로 꺼내기도 어려워진다. 과감한 도전은 거의 시도되지 않는다. 투명성의 명령은 강력한 순응에의 강제는 낳는다. 사람들은 카메라의 지속적인 감시 속에 있을 때처럼 관찰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투명성의 명령에는 파놉티콘적 효과가 있다. 그것은 결국 커뮤티케이션의 획일화와 동일한 것의 반복으로 귀결된다."(p.141) 이것을 한병철은 '디지털 파놉티콘'이라 명명한다.

 

  21세기에 우리 인간은 자유를 만끽하고 있다. 아니 만끽하는 것만 같다. 아니 만끽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디지털은 우리의 발자취를 낱낱이 기록한다. 길을 걸어도 우리도 걸음 하나하나는 수많은 차들 앞유리창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블랙박스에 녹화된다. 거리마다 빌딩마다 달려있는 cctv에 의해 촬영된다. 우리가 버스를 타도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지 모든 정보가 남는다. 인터넷의 바다를 유영해도, 백화점엘 가도, 그 어디를 가도, 이 정보사회는 우리를 벌거벗게 만든다. 이것을 어느 누가 보고 있다면, 그는 우리를 '통제'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감시되는 것이다. 한병철의 투명사회의 속성을 하나 추가하면 '감시'가 되는 이유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를 노예처럼 부리고 착취하던 산업 시대의 기계에서 해방되었지만, 디지털 기기가 낳은 새로운 강제, 새로운 노예제에 직면하고 있다. 디지털 기기는 이동성을 무기로 모든 곳을 일터로, 모든 시간을 일의 시간으로 만듦으로써 우리를 더욱 효과적으로 착취한다. 이동성이 가져온 자유는 어디서나 일해야 한다는 치명적인 강제로 돌변한다."(p.163) "더 많은 자유를 약속하는 스마트폰에서 하나의 치명적인 강제가 생겨난다. 커뮤니케이션에의 강제. 사람들은 최근 들어 디지털 기기와 거의 강박적 관계에 빠져들었다. 여기서도 자유는 강제로 전도된다. 소셜네트워크는 커뮤니케이션에의 강제를 엄청나게 강화한다. 결국 그러한 강제는 자본의 논리로 소급된다. 더 많은 커뮤니케이션은 더 많은 자본을 의미한다. 커뮤니케이션과 정보의 순환이 가속화되면 자본의 순환도 가속화된다."(p.164) "우리는 오늘날 자유 자체가 강제를 촉발하는 특수한 역사적 단계에 처해 있다. 자유는 본래 강제의 반대 형상이다. 그런데 강제의 반대 형상이 강제를 낳는 것이다. 그래서 더 많은 자유는 더 많은 강제를 의미한다. 그것은 자유의 종말일 것이다."(p.181)

 

  디지털 파놉티콘의 무서운 점은 이렇듯 자유로운 통제, 감시라는 점이다. 아니 더 정확히는 자발적이라 해야 옳을지 모르겠다. "디지털 파놉티콘의 주민들은 수감자가 아니다. 그들은 자유롭다는 환상 속에서 살아간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스스로를 전시하고 훤히 비추어줌으로써 디지털 파놉티콘에 풍부한 정보를 제공한다."(p.212) 우리의 정보를, 우리가 자발적으로 자유롭게 드러내놓은 정보를 누군가가 독점한다면, 그는 우리를 통제할 수 있다. 이전의 통제가 권력을 위한 것이라면, 오늘날의 통제는 무엇을 위한 것일까? 결국은 '돈'이다. 오늘날은 '돈'이 곧 권력이니, 그 근본은 같다.

 

  "내가 한 모든 클릭은 저장된다. 내가 디딘 모든 발걸음은 역추적될 수 있다. 우리는 도처에서 디지털 발자취를 남긴다. 우리의 디지털적 삶은 네트워크 안에 정확히 모사된다. 삶의 완벽한 프로토콜이 남겨질 수 있는 가능성으로 인해, 신뢰는 완전히 통제로 대체된다. 빅데이터가 빅브라더의 자리를 차지한다. 삶의 완벽한 프로토콜화는 투명사회를 완성한다."(p.211)

 

  한병철은 현대 사회의 '디지털화'에 초점을 맞춰 이를 '투명사회'로 분석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현대 사회는 투명사회'화'되고 있다. 어느 순간엔 완성될. 여기저기 막그냥 확그냥 정보가 넘쳐난다. 그러나 우리에겐 이야기가 사라진다. "오늘의 사회를 지배하는 긍정성의 과잉은 이 사회에서 서사성이 사라졌음을 방증한다."(p.69) 우리의 서사가 사라진 사회에서 빅브라더는 우리에게 이야기를 부여하고, 우리를 그의 이야기에 따라 지배하게 될 것이다. 서사가 없는 이 사회는 결국엔 비극이 될 것이다.

 

  몇 가지 아쉬운 점? 아니면 궁금한 점? 이도 아니면 그냥 궁시렁 몇 자 적으며 마무리하자. (내가 지금까지 무슨 말을 장황하게 했는지 정리도 안 된다.)

 

  1. 투명사회라는 테제는 한병철이 서문에서도 이야기했듯, 불합리하고 비합법적인 불투명성과 싸우는 투명성과 겹쳐진다. 정치권력, 자본권력에 강력히 요구되는 투명성, 투명한 사회에의 요구는 이 사회에 필수적인 부분이다. 이것이 자칫 한병철의 '투명사회'라는 비판에 의해 퇴색될까 하는 우려가 생긴다. 프레임이라고 했던가? 비판적 의미로서의 '투명사회'라는 한병철의 명명을 비판적 의미가 좀 더 부각되는, 그래서 조금 더 적절한, 권력과 자본의 투명성에 대한 요구와 겹쳐지는 않는, 그런 명명이 필요해 보인다. '디지털 파놉티콘' 같이 말이다.

 

  2. 투명사회가 완성되기 전에, 우리는, 우리사회는 무엇을 해야 할까? 어떻게 완전한 통제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피로사회>에서 제기된 현대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분석이 <투명사회>로 완성되었다면(?) 이제는 '불(不)투명' 사회로 되돌아 갈 수 있는 길을 알려주어야 하지 않을까?

 

  3. 한병철의 우려는 약간의 기우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과연 이 디지털 사회에서 부정성이 완전히 사라졌는가? 이야기가 없는가? <투명사회>를 읽어가면서 긍정성의 강요, 부정성의 소멸(?)이라는 견해에 부분적으로 동의하면서도 과연 그런가? 정말 그런가? 꼭 그런 건가? 아닐 수도 있지 않나? 여전히 나는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데? 하는 의문들이 든다. 인터넷을 통해 자기의 의견을 개진하고 비판하고 토론하는 장이 확대되고 있고, 건전하고 생산적인 만남으로 이어지고 있기도 하지 않은가? 그런 부분에 대한 의도적인 무시가 있지는 않은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한병철의 후기 작업을 기대하는 부분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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씩씩한 남자 만들기 - 한국의 이상적 남성성의 역사를 파헤치다
박노자 지음 / 푸른역사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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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내가 군생활 당시(2001~2003)에도 잘 부르지 않았던 군가 중에 '진짜 사나이'란 노래가 있다. "사나이로 태어나서 할 일도 많다만 / 너와 나 나라 지키는 영광에 살았다. / 전투와 전투 속에 맺어진 전우야 / 산봉우리에 해 뜨고 해가 질 적에 / 부모형제 나를 믿고 단잠을 이룬다."는 대중적으로 익숙한 '대중 군가'라고나 할까? 가슴아프게도 '사나이'는 할 일이 많다. 하지만 나라를 지키고 부모형제를 지키는 사나이가 바로 '진짜 사나이'라는 것인데, 이는 총과 칼로 적과 싸워 지키는 것 뿐만 아니라, 나라경제를 지키고 부모 자식을 먹여 살려 지키는 것까지를 포괄한다. 재미삼아 몇 절을 더 불러보자. 

   
  입으로만 큰소리 쳐 사나이라드냐?
너와 나 겨레 지키는 결심에 살았다.
훈련과 훈련 속에 맺어진 전우야
국군용사의 자랑을 가슴에 안고
내 고향에 돌아갈 땐 농군의 용사다.

겉으로만 잘난 체 해 사나이라드냐?
너와 나 진짜 사나이 명예에 살았다.
멋 있는 군복 입고 휴가 간 전우야
새로운 나라 세우는 형제들에게
새로워진 우리 생활 알리고 오리라.
 
   

2절과 3절이다. 이게 언제적 노래인지 알게 해주는 대목이 있다. "농군의 용사"란 노랫말을 봤을때 한참 전에 지어진 노래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를 현대적으로 해석하면 "산업의 용사"쯤으로 바꾸어 부를 수 있다. 다를 건 없다는 뜻이다. 군 생활이 암만 새로워져도 그게 부럽다는 사람은 없지만, 그래서 더욱 3절은 처량하다. 아직도 휴가 간다고 군복에 세 줄 잡고, 전투화에 불광내는 군인들이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여하간 '진짜 사나이'가 나라 지키고 부모 형제 지키는 나라의 일꾼이라고 노래를 부르지만, 진짜 사나이들이 너무 많아져서인지, 진짜 사나이 중에서도 우리는 '멋진 사나이'가 되고자 한다. 역시 출처는 군대일까? 특히 해병대에서는 '멋진 사나이'를 이렇게 정의한다.

   
  멋있는 사나이 많고 많지만 
바로 내가 사나이 멋진 사나이
싸움에는 천하무적 사랑은 뜨겁게 (사랑은 뜨겁게)
바로 내가 사나이다 멋진 해병대

멋있는 사나이 많고 많지만
바로 내가 사나이 멋진 사나이 
명령에는 호랑이 대화는 정답게 (대화는 정답게)
바로 내가 사나이다 멋진 해병대
 
   

적에 맞서 싸움을 잘하고 2번을 강력하게 강조해도 모자랄 정도로 여인에 대한 사랑은 '뜨겁게'하는 사나이가 진짜 사나이 중에서도 '멋진 사나이'라는 것이다. 역시나 여기서의 '싸움'은 적과의 싸움, 나아가 나라 경제의 최전선에서 벌이는 산업 전쟁이어야만 한다는 전제가 있다. 그러나 간혹 이를 망각하고 언제 어디서나 지들이 천하무적인 줄 알고 빨간 옷 입고 설치는 이들이 문제가 되기는 한다. 

군대에서도 시대의 발전상을 반영하고 있는 부분이 있어 흥미로운데, 우렁찬 목소리가 상징인 '진짜 사나이'는 그것도 때와 장소와 상대(특히 뜨겁게 사랑해야할 여인)를 가려 정다움을 내보여야 '멋진 사나이'가 될 수 있다. 이런 사나이라야 '남성 넘버원'이다. 

다들 한 물 간 사나이 타령이지만, 의미심장하게도 이는 여전히 우리에게 내재된 사나이스러움이다. 나라 경제의 대들보로서 사나이, 곧 남성은 전투력을 배가시켜야 하고, 이는 나라를 지키고 내 부모와 처 자식을 지키는 원칙이다. 곧 경제력 있는 남성이 '진짜 사나이'고 여기서 좀 더 부드럽게 그러나 사랑은 뜨겁게 하는 남성이 '멋진 사나이'라는 사실, 이는 진리 아니면 자연접칙이다. 

대세는 꽃미남이라고? 짐승 아이돌이 꽃미남 얼굴에 근육질을 자랑하며 설쳐대지만, 얘네들한테서 돈을 빼놓으면 그냥 루저일 따름이다. 얼굴 파먹고 사는 것 아니고, 근육 뜯어먹고 사는 것 아니라는 것이 우리의 상식이잖은가? 요즘 대부분의 매체들이 연예인들을 내세워 근육질 꽃미남을 남성의 이상형으로 선전하고 있지만, 이는 지극히 상업적 노림의 일환일 뿐이다. 교묘한 경제력의 다른 이름이라고나 할까? 노골적으로 "돈 있냐"를 물어보기는 쑥스러우니, 우회하고 있을 뿐이다. 꽃미남은 타고나는 것도 어느 정도 있지만, 근육질은 솔찮이 돈을 들여야 하니 말이다. 

각설하고, 박노자 교수의 근간 중에 그다지 주목받지 않았던 책 한 권을 소개해야 하겠다. <씩씩한 남자 만들기>란 책이다. "한국의 이상적 남성성의 역사를 파헤치다"라는 부제가 달려 있는 이 책은 1890~1900년대에 집중적으로 만들어진 '이상적 남성성'을 추적하고 있다. 다양한 자료와 문헌을 통해서, 역사적 사실과 사건들을 통해서 근대와 함께 어떠한 남성성이 요구되어지고 만들어졌는지를 끄집어낸다. 이를 통해 현대에 이어지는 '이상적 남성성'에 대한 '계보 캐내기'를 시도하고 있다. 

박노자 교수는 '남성성-남자다움에 대한 사회적 이상'을 "생물학적인 남성다움을 둘러싼 사회적 구성물, 복잡한 권력관계의 망에 의해 지탱되고 지배적인 문화의 틀과 이데올로기를 통해 구체화되는 패러다임"으로 정의하면서 '남성다움의 담론'의 역사를 추적한다. 

1890~1900년대 세계 제국 열강의 위협과 왕조의 존망의 위기 앞에서 서구 근대적 남성성에 대한 지향이 어떻게 우리에게 적용되었는지를 중심으로 하면서, 이전 시기의 유교주의에 입각했던 지배계층의 전통적 이상적 남성성, 이와는 다른 측면을 보이는 일반 서민의 이상적 남성성과 대비하고 있다. 이를 통해 근대화와 함께 형성된 이상적 남성성은 국가에 대한 자기희생적 정신을 바탕으로한 정신적인 힘(전장에서 죽을 태세)과 신체적인 힘(무쇠골격, 팔다리 민활)을 모두 구현하는 것이다. 이를 테면 부국강병을 위한 남성성을 강력히 요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1890~1900년대 이루어진 이상적 남성성의 민족주의적 재구축은, 대체로 이 같은 가치들을 차용하여 왕조국가를 "민족/국민"으로 재정의하고 이전에 효라는 관념이 차지했던 최상의 지위를 "민족/국민"에 부여하는 한편, 여성에 대한 남성 지배의 구조는 근본적으로 손대지 않음으로써 이루어졌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전통과 근대의 접목을 통해 이상적 남성성 이데올로기의 성립을 예리하고 밝혀내고 있다. 

이는 꾸준히 그 논리와 수사를 변용하면서 지속되는데, 나라 존망의 위기에서 대두되었던 강인한 체력의 훈련된 민족 전사라는 이상형은, 박정희 시대를 거치면서 산업 전사로서 모습만을 바꾸게 된다. 조금씩의 변화는 있지만, 앞서 살폈던 대중군가(?)에서 보이듯이 오늘날의 진짜 사나이, 멋진 사나이, 스러움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이상적 남성성의 요구는 계속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박노자 교수는 현대 한국의 남성성 '경제화'된 남성성으로 규정한다. "학력 자본의 소유자"와 "경제 능력의 소유자"가 이상적 남성성이라는 것이다. 학력과 경제력은 오늘날 거의 등가를 이루고 있는 현실에선 이는 곧 '경제력'으로 수렴되는 것이라고 할 때, 역시나 오늘날 남성들에게 요구되는 덕목은 경제력에 다름 아닌 게 되었다. 경제력 하에서 꽃미남도 되고 근육질 남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 변화라면 변화일 뿐이다. 

씁슬한 현실이다. 박노자 교수는 미래의 이상적 남성성으로 다소 엉뚱한 제안을 내놓는다. "바람직한 씩씩한 남성상은 배려하는 남자, 돌봄을 할 줄 아는 남성"이어야 한다는데, 나는 다소간 뚱~하다가도, 이내 수긍이 간다. "적극적인 배려의 생활은 상당한 체력을 요한다. 정기적인 운동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배려는 과거의 근대적 이상들과의 단절이 아니라 발전적 계승이다."라며 자기의 주장을 강화하고 있다. 그렇게군. 이를 내식대로 해석하면 이상적 남성성도 이상적 여성성도 없어야 한다는 것이 아닐까 한다. 다만 이상적 인간성이 필요하다는 것은 아닐까? 

이 시대 여성만큼이나 남성도 피곤하고 힘겹다. 학력과 경제력으로 결정되는 경제력자 천하지대본은 이 시대의 인간성을 말살시키고 있잖은가? 이 시대의 진정한 루저는 180이 안되는 키의 남성이 아니라, 수천만원의 연봉을 받지 못하는 남성이다. 그녀는 다만 돌려 말했을 뿐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상적 인간성을 찾는 것이다. 우리 한국의 남성들이여 인간이 되자.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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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화령 2023-10-14 1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노자 교수. 신체 건강한 남성입니다.^^
 
15조원의 육체산업 - AV 시장을 해부하다
이노우에 세쓰코 지음, 임경화 옮김 / 씨네21북스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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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미국과 일본의 포르노 업체에서 한국인 네티즌을 상대로 고소를 해와 논란이 되고 있다. 자신들의 재산이 포르노 영상을 무단으로 인터넷에 유포했다는 죄목으로 말이다. 그 사실 자체는 부인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이 사건을 처음 맡은 경찰에서는 포르노 자체가 불법인만큼 그에 대한 지적재산권을 보호할 근거가 없다는 판단에서 수사를 하지 않기로 해 일단락되는가 싶었는데, 검찰에서 이를 번복하고 미국과 일본 업체의 고소를 다시 받아서 수사한다고 한다. 일차로 5만여명의 업로더들을 추려 고소했는데, 이번에 다시 추가로 수천명을 고소했다고해서 재삼 논란이 커지고 있다.  

그간 나는 미.일 업체가 고소한 업로더에 해당되지는 않기에 이번 고소에 대해 긴장하거나 하지는 않지만, 고소당한 이들의 시혜를 어느 정도 받아왔기에 이번 논란과 검찰의 수사결과에 주목하고 있다. 내심으로는 계속해서 이 시혜를 누렸으면 하지만, 또 한편에서는 이번 논란을 계기로 포르노 및 성인 비디오물에 대한 사회적 법적 인식을 재고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미.일 업체는 자신들의 지적재산권인 포르노 영상을 무단으로 인터넷에 유포하는 한국네티즌으로부터 피해를 입었다는 주장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한국의 법적 테두리 안에서는 그 피해를 보전해야할 이유는 없어보인다. 지적재산이라고 주장하는 포르노 자체가 불법임으로 인터넷 등에 유포하는 행위는 형사적 불법행위일 뿐이지, 지적재산에 대한 침해의 불법은 성립할 여지가 없는 것이 당연해 보인다. 이러한 점에서 경찰은 수사하지 않겠다고 결정한 것일터다. 그러나 검찰의 생각은 다른 것 같다. 나로서는 법률적 지식이 거의 전무하므로 어찌 되가는지의 추이에 주목할 뿐이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대한민국의 성인남성치고 야동이라고 일컫는 이 불법 포르노 영상을 보지 않은이를 찾기는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일본의 AV를 보지 않은이 나오라고 한다면, 난 나가지 못할 것이고, 아오이 소라를 아느냐는 물음에는 눈을 크게뜨고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여하간 우리 생활속에서 마음먹고 이 영상들을 찾는다면, 몇 분 걸리지 않고 아주 쉽게 찾을 수 있다. 중고생들의 접근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우리의 인터넷은 야동으로 넘쳐나고 있지 않은가? 

이러한 현실에서 현재 불법으로 묶어놓고 있는 포르노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필요하지 않은가 생각한다. 굳이 표현의 자유 운운할 필요 없이 변화된 사회 현실 속에서 구시대적 잣대만을 들이대기는 어려운 노릇이다. 미국이나 일본만큼은 아니지만(구체적으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우리 사회는 어느 정도 성적 개방이 이루어진 상태고, 성에 대한 인식도 크게 변화해온 것이 사실이다. 일본에서는 AV로 대표되는 보다더 노골적인 영상(모자이크 처리된 영상)까지를 허용하고 있다. 어디까지를 보여줄 것인가를 놓고 생각할 때, 나는 보여주지 못할 것이 무엇인가하는 의문을 갖지만, 우리 사회의 합의가 일말의 변화가 있으리라고 생각할 때, 현재의 불법에 대한 기준은 분명히 진일보해야 할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청소년들의 성인 영상물 접근을 일체 차단해야한다고도 생각지 않는다. 기존의 온갖 야동들이 우리들의 젊은 시절 성적 인식에 어느 정도 왜곡을 가져다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외의 영상물들이 아주 바람직한 인식을 준다거나, 그러한 기회를 제공하는 것은 전혀 많은 것이 아니다. 어쩌면 우리 청소년들의 성적 인식을 키운 것은 팔할이 포르노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현실인 것을 아닐까 의심된다. 만약 그러하다면, 내용을 좀더 달리한 영상물을 제작 보급할 수 있도록 변화의 노력을 하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너무 앞서간 얘기지만, 섹스에 대한 인식과 방법을 보다 바람직하게 이끌어 줄 영상물이 나올 수도 있다고 본다. 

2002년 일본에서 출간된 『AV산업-1조 엔의 메커니즘』(이노우에 세스코)이란 책이 최근 『15조원의 육체산업-AV시장을 해부하다』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출간됐다. 일본에서는 15조원에 육박하는 시장을 형성한 이 AV가 산업으로 인식되고 있다. AV 뿐만 아니라, 섹스산업이라고 통칭할 수 있는 매매춘 등을 포함한 여타의 것들을 헤아릴때는 가히 천문학적인 액수의 거대한 산업이랄 수도 있을 것이다. 한국의 현실 또한 그다지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일본에서도 그러한 시장은 본격적으로 탐구하고 연구한 책들은 그다지 많지 않은 것으로 안다. 저자가 밝히듯이 그것은 뭐하러 취재하고 다니느냐는 주변의 물음을 수차례 들어야했을 정도라고까지 한다. 그러나 저자는 이미 산업이라고 일컫을 정도로 성장하고 우리의 생활에 밀접하게 연관된 AV 시장을 연구하고 해부하면서 이에 대한 인식과, 그 안에 가려진 불합리함을 개선해 나가는 노력이 필요함을 인식하고 이 책을 펴냇다고 한다. 

이 책에서는 그간의 일본 성인 비디오가 어떻게 형성되었고 어떻게 거대한 시장을 형성하게 되었는지, AV의 간략한 역사를 살펴보고, AV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어떠한지를 조사한다. 그러부터 AV업계가 어떻게 변화해왔는지를 추적한다. 또한 현재의 AV에는 어떠한 문제들이 있는지를 파헤친다. AV에 만연한 성폭력과 강간 등의 폭력적 성문화, 나아간 그 안에 내재된 AV 여배우들에 대한 반인권적 행태, 그것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동참하는 AV 소비자들의 인식의 문제들을 지적한다. 이를 토대로 저자는 AV 시장이 어떻게 변화해야하고 또한 새로운 성문화를 창출하기 위한 과제를 제시하며 마무리한다. 비록 간략하고 부족하긴 하지만, 나름의 의미를 지닌 저서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현실에서는 아직 시기상조라고 할 수 있지만, 범람하고 있는 불법 야동들을 그저 막으려만 하는 것은 눈가리고 아웅하는 식밖에는 안된다고 볼 때, 좀더 이른 시기에 좀더 변화된 기준을 갖고 판별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아직까지 우리 사회에 적합한 기준이 무엇일지 제대로 논의되고 있지도 못한 현실은 여전히 왜곡된 성문화를 우리 사회 어둡고 칙칙한 곳에서 불법적으로 체험하는 범죄자들만 양산하는 것은 아닐까? 여하튼 이번 포르노 유포 논란이 우리 사회의 변화된 성인식을 재검토하여 보다 바람직하고 시의적절한 성문화 창출을 위한 기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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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236 2009-09-16 14: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아오이 소라! 유명한 분이시죠. 아마 님의 태그 때문에 "아오이 소라"를 검색하시는 분 중에 분명히 당황하실 분이 있을 것입니다.^^

멜기세덱 2009-09-16 19:20   좋아요 0 | URL
파란 하늘이란 뜻이래요. 아름답지 않습니까? ㅋㅋㅋ

마노아 2009-09-16 15: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뜬금 없이, 서재의 저 여인네는 누구인가요? 소용녀가 딱! 떠올랐어요.

멜기세덱 2009-09-16 19:22   좋아요 0 | URL
맞아요. <신조협려 2006>에서의 소용녀에요. 양과는 황효명이 맡았는데, 나이차이가 엄창나보여서리...ㅋㅋ
너무 예뻐서 찾아봤더니 이름이 유역비, 선검기협전, 천룡팔부에도 출연했더군요. 중국과 일본에서 음반도 내고 가수로 활동했대요. 우리나라는 안 오는지 몰라요.ㅋㅋ 천룡팔부의 왕어언, 요새 이거 보고 있어요...ㅋㅋㅋ

Jade 2009-09-16 15: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멜기님이 간만에 올리신 리뷰가 AV책이라니....어쩐지 웃음이 나와요 ㅋㅋ

멜기세덱 2009-09-16 19:23   좋아요 0 | URL
AV보고 웃으면 음...쫌 변탠데...ㅋㅋ

이매지 2009-09-16 16: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멜기님의 오랫만의 글이 야동을 허하라라니 ㅎㅎㅎㅎ
저도 어쩐지 재미있는 걸요 ㅎㅎ

멜기세덱 2009-09-16 19:24   좋아요 0 | URL
야동쯤이야...뭐...건전한 야동이 나라를 살린다는.....ㅋㅋ

마늘빵 2009-09-17 0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랫만에 글 쓰셨는데 그 동안 AV 본 거 아녀요? =333

아오이 소라는 내한 때 하도 언론에서 떠들어서 누군가 찾아보고 알았어요. 정말요.

멜기세덱 2009-09-17 00:59   좋아요 0 | URL
흥!!! 그 소릴 누구보러 믿으라고?ㅋㅋ

순오기 2009-09-17 0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메인에 뜬 이름이 반가워서 로그인했는데~ 잘 사십니까?
AV가 뭔가 했어요~ ^^

멜기세덱 2009-09-17 01:00   좋아요 0 | URL
제가 그나마 할 줄 아는게, 그냥저냥 사는겁니다. 자알 살지는 못하고요...ㅎㅎ
평안하시죠? ㅎㅎ

무해한모리군 2009-09-17 0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AV배우들은 한국사람이면 누구나 봤을 듯..
길바닥에 막 뿌려져 있잖아요.
오빠 전화주세요 하면서 ㅎㅎㅎ

막는다고 막아지지도 않을 일이고,
다 자란 성인이 저런거 본다고 그대로 하려고 할 일도 아니고 보면..

멜기세덱 2009-09-17 21:08   좋아요 0 | URL
그대로 할수도 있겠죠.ㅎㅎㅎ
어쩔 수 없으니 그냥 내비둬, 이런건 아니에요.
말하자면, 굳이 이걸 어째야 하느냐, 이런 것에 의문을 갖는 거죠.ㅎㅎ

Alicia 2009-09-18 0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그러니까 멜기님은 음화반포죄로 처벌하는 형사법의 규정이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하시는거죠? ^^
업자들이 포르노를 가지고 지적재산권 주장을 하고 있는지는 몰랐어요. 저작권의 보호대상이 사상,감정의 창작적 표현임에 주목한다면 단순 상업적인 성격이 매우 강하고, 성적호기심을 자극하는 정도에 그치는 표현물인 포르노를 저작권의 대상으로 보기는 좀 어렵지 않을까 생각해요. (좀 기계적인 접근이죠?) 서사구조가 있다면 또 달라지겠지만요. 그런데 대체로 포르노가 가진 '전형적인' 스토리는 창작성을 인정받기가 어려워요.(이러니까 야동 즐겨보는 사람같네! ☞☜) 뭐가 포르노고 예술인지 사실 그 경계 자체가 모호하기는 하지만. ^^

태그가 인상적이네요. 후훗.

멜기세덱 2009-09-17 21:16   좋아요 0 | URL
제가 지적재산권이라고 표현했는데, 정확하게 그들이 고소한 내용이 그것인지는 잘 모르겠네요. 아무튼 그런 종류의 권리를 주장하고 있는 것은 확실합니다. 포르노를 포함한 그런 종류의 영상들이 창작성이 떨어진다는 건 상대적인 것이겠죠. 전형적인 서사구조를 보여주는 것들에는 대중문학에서도 여럿 볼 수 있구요. 아무튼 그것은 또다른 논의가 필요하겠구요.
제가 생각할 때 궁극적으로는 어떠한 표현의 형태라도 규제되거나 제한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지만, 현재에 있어서 그것을 극단적으로 주장하지는 않습니다. 음란물에 대한 기준이 좀 유순해질 필요성이 있다는 것이죠. 일본처럼 시민사회에서 자체적인 심의 기구 같은 것들이 만들어져 그러한 기준을 정하게 하는 것도 필요할 것 같구요.(일본의 경우라고 해서 그것이 100% 민간기구라고 하기는 어렵겠지만요.)

Alicia 2009-09-17 22:43   좋아요 0 | URL

영상물이라면 저작권을 이유로 전시,배포권 침해를 주장했을 가능성이 커요.
지적재산권은 크게 특허,상표,의장,디자인 등 아이디어 보호등을 내용으로 하는 산업재산권과, 사상이나 감정의 창작적 표현을 보호하는 저작권으로 나누어볼 수 있는데. (무엇이 아이디어고 무엇이 표현인지 그걸 명확히 구분하기는 사실 어렵습니다.) 말씀하신대로 포르노의 창작성에대한 논의는 필요한 것이겠고요. (사실 이 부분이 굉장히 흥미로워요!)

음란물에 대한 기준이 유연해질 필요가 있다는 점엔 동의하는데, 문제는 어떻게, 어디까지 이겠군요. 사실 음란물의 성적 표현의 하한이 어디까지 열려있어야 하는지, 구성원들의 합의 아래 합법성 안으로 포섭이 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감이 잘 안와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멜기세덱 2009-09-18 00:24   좋아요 0 | URL
그나저나....
커피는 언제 사 주실 거에요? ㅋㅋㅋ
곧 추운 겨울이 다가온답니다....ㅋㅋ

심술 2009-09-17 2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av랑은 관계없는 얘긴데 사전에서 용호상박을 찾아보면 '용과 호랑이가 싸운다는 말로 강자들끼리의 다툼을 가리킨다' 라고 돼 있는데 실제로 사람들이 쓰는 걸 들어 보면 막상막하나 난형난제랑 같은 뜻으로 더 많이 쓰거든요. 왜 이런 일이 생기죠?

멜기세덱 2009-09-18 00:21   좋아요 0 | URL
저한테 이런 걸 물어보시면....ㅎㅎ 곤란한데요....ㅋㅋ
용호상박의 정확한 출처는 제가 모르겠지만, 용과 호랑이가 싸울 땐 쉽게 승부가 나기 어렵기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용의 전설 속의 동물이고, 호랑이도 흔히 산신과 같이 인식되었으니까요. 용호상박과 비슷한 말로 양웅상쟁(兩雄相爭)이란 것을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보면 확실하죠. 승패를 가리기 어려운 강자들의 싸움은 막상막하의 승부가 될 것이고, 용과 호랑이는 결국 난형난제가 되겠죠. 의미의 차이는 조금 있겠지만 문맥에 따라 비슷한 의미로 사용될 수 있다고 보여지는데요.ㅎㅎ

가넷 2009-11-04 0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생각하는(?) 깊은 내용을 담은 것 같지는 않네요. 그래도 궁금하긴 하군요.

그나저나, 유역비는 국내에도 팬들이 많은 모양입니다. 선검기협전을 본 적이 있는데, 다른 작품에서 보다 정말 이쁘게 나오더라구요. 그런데 연기는 아직 별로인 것 같아요. 뭐 중드가 손발 오그라들게 만드는 요소가 있어서 더 그렇게 느끼는지도 모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