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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실력이 밥 먹여준다: 낱말편 1 국어실력이 밥 먹여준다
김경원.김철호 지음, 최진혁 그림 / 유토피아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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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대학의 교과과정은 크게 교양과 전공 과목으로 나뉜다. 다시 교양은 교양필수와 교양선택으로, 전공도 마찬가지로 전공필수와 전공선택으로 나뉜다. 사실 밥 먹여줄 가능성이 높은 것은 아마도 전공과목일 터인데, 전공과목만 열심히 한다고 대학졸업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대학졸업의 장애가 되는 가장 큰 원인은 아마도 교양필수와 졸업인증제가 아닐까 한다. 내가 적을 두었던 대학에서는 졸업인증으로(나는 졸업인증제의 굴레에 다행스럽게도 얽히지 않았다.) 영어와 컴퓨터를 채택하고 있는데, 이게 졸업하는 데에 영 걸림돌이 된다.

말하자면 대학의 교양필수나 졸업인증 같은 것이 사회에 나가 밥벌어 먹는데 실질적으로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대학에서는 그것을 교양으로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밥 벌어 먹고 사는데에야 실제적으로 효용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정도는 해야 어딜가든 뭘하든 대학나온 사람입네 할 수 있다는 것 아닐까. 요즘 대학에서 공통으로 교양필수 과목으로 지정되어 있는 과목들은 영어와 컴퓨터, 그리고 인문학분야 한 과목과 자연과학분야의 한 과목 정도, 그리고 대학마다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문장작법과 생활한문 등을 적은 학점으로 채택하고 있는 정도이다.

내가 대학에 입학했을 당시에는 교양필수 과목으로 영어와 컴퓨터, 그리고 인문학분야 외에, 국어와 한국사 과목이 있었다. 문장작법도 있었으나 생활한문은 없었다. 그러니까 요즘은 국어와 한국사가 없어지고 영어가 강화되었으며 생활한문이 살짝 들어갔다. 변화의 양상을 보면, 영어의 비중이 높아지고, 국어의 비중이 큰 폭으로 줄어들었다. 사실 문장작법은 레포트 쓰는 법 정도나 가르쳐 주는 글쓰기 과목에다가 2학점 밖에는 안되어서 대학 교양 국어 수준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러니까 대학을 졸업한 사람이 가져야할 기초 소양중에 국어는 슬쩍 빠져버렸다.

요즘 시대에 누가 뭐래도 영어의 중요성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문제는 그로인해 국어의 중요성이 심각한 침해를 받는다는 사실이다. 대학에서 국어를 가르치지 않는다는 얘기는 고등학교에서 국어를 배운 수준이면 된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렇다면 이런 얘기도 가능하다. 대학에서 영어를 중요하게 가르치는 것은 고등학교에서의 영어 수준 이상을 대학에서는 필요로 한다는 얘기다. 즉, 대학을 졸업한 사람에게는 국어 수준보다 영어 수준이 더 높을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요즘 대학생들의 국어와 영어 실력을 비교해 보면, 국어 실력이 영어 실력보다 좋다고 보기 어렵다. 우리말을 무리없이 읽을 수 있고, 쓸 수 있고, 말할 수 있을 뿐이지, 그들의 모국어로서 요구될 그런 수준에 한없이 모자란다. 조금 수준 있는 글을 주고 읽을라치면, 국어사전을 몇 번을 들추어보아야하는지 모른다. 중학생이나 고등학생이나 일반인들의 맞춤법 실력이 별반 차이가 없다는 조사들도 보고되고 있는 걸 보면, 우리나라 국어교육이 총체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원론적인 지적도 가능하나, 대학에서 요구하는 과목에는 국어가 없으니 그런 총체적 문제점을 타개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대학 입시에 논술이 도입된다고 하여 논술 학원이니, 논술 교재들이 호황을 맞았다. 서점에 가보면 논술관련 교재 및 도서들이 서점의 가장 요체에 자리잡고 있을 정도다. 그러나 거기에 국어교육은 없고, 다만 화려한 글쓰기 교육만 있다. 그렇게 해서 될 글쓰기도 아니지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 그런 책들에 불티가 나는 이유일 것이다.

얘기가 자꾸 엇나가는 듯 한데, 대학에서 국어를 가르치지 않는 것은 심히 우려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일까. "국어 실력이 밥 먹여준다"는 유혹에 가득찬 제목의 책이 나와 잘 팔리고 있으니 말이다. 고등학교의 국어 수준으로는 사실 학사학위의 소지자가 그에 걸맞는 글을 쓰기에 심히 부족함이 있다. 언어라는 것은 사실 계속해서 공부하지 않으면 퇴화된다. 우리는 국어야 계속 말하고 쓰고 읽고 하니 그 실력이 어디가겠느냐 하지만, 거기까지 일뿐이다. 고등학교에서 배운만큼 그 국어실력으로 대학공부를 한다는 것이다. 대학공부를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대학 수준의 국어실력이 요구되어진다.

<국어 실력이 밥 먹여준다>는 사실 뻥에 가깝다. 나같음 사람이야 그럴 수 있겠지만, 대학에서 국어전공한 사람이 그걸 가지고 밥 벌어 먹기에는 굉장히 제한되어 있다. 그러니 일반인들에게 오죽할까. 그러나 그것은 국어가 필요없어진 것이 아니라, 가장 기본적으로 요구되어지는, 당연히 어느 정도의 실력을 갖추어야 하는 것임을 의미한다. 그러니 국어는 잘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기본적인 수준까지는 가지고 있어야 한다. 어디까지가 기본일까? 대학에서 국어를 가르치지 않으니, 고등학교 수준의 국어실력이면 기본이라고 생각하지만, 오산에, 육산, 십산에 가깝다.

대학 나오면 대학수준의 국어실력이 요구되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대학은 그것을 포기했다. 이것이 잘못된 것임을 오히려 일반 대중이 몸소 체감한 것인지, 요즘들어 국어관련 책들이 우후죽순 흘러나오고 있다. 대학이 포기한 과목을 일반인들이 일일이 찾아가 배워야 한다는 것은 참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쓸데없는 소리가 길어졌다. 이 책 <국어 실력이 밥 먹여준다>에 대해 간략히 언급하고 리뷰를 정리하도록 하자. 이 책은 말하자면 우리말의 뉘앙스 사전의 전초격이랄 수 있다. 사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말들 중에 대부분의 의미를 어림짐작으로 알고 사용하는 것이지, 그것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별반 없다. 중고등학생들에게 '주관적'이라는 말이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면 명쾌하게 대답할 수 있는 아이들은 거의 없다. 이것은 일반인들에게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우리말의 미묘한 차이들을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느끼면서도 차이를 제대로 알고 쓰지 못할 때가 무수히 많다. 말의 미묘한 차이는 그것이 전달되었을 때 전달된 사람에게 커다란 차이, 즉 오해와 오독을 불러올 수 있고, 말하는 사람이 전달하고자 한 바를 못 알아들을 수도 있다. 또한 표현할 때에 보다 정확하게 자신의 의사를 전달할 수 있기도 하다.

속과 안, 사내와 사나이, 고개와 머리, 엉덩이와 궁둥이 등등,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그 쓰임이 조금씩 다른 말들이 우리말 속에 무수히 많다. 그런 미묘한 차이를 보다 잘 활용할 수 있다면 우리말 실력은 좋아지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다. 그런 무수히 많은 우리말들을 이 책은 다 다루고 있지 못해, <낱말편1>이라는 부제를 달아 놓고, 다음 편을 기다리게 하고 있다. 이런 작업이 차곡차곡 쌓여 우리에게도 알찬 우리말 뉘앙스 사전하나 갖게해 주었으면 한다.

중언부언은 글쓰기에서 꺼려지는 것이지만, 아무리 중언하고 부언하여도 부족함이 없는 것이 있으니, 우리에게 국어는 기본적이면서도 중요한 것이라는 얘기다. 대학에서는 다시금 교양필수 과목으로 국어의 비중을 영어만큼은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서투른 리뷰를 과감히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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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7-02-07 0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제목을 잘 붙인 상품 중 하나가 아닐까 해요. ^^
그리고, 미묘한 차이를 설명하는 것이 좀 어수선하기도 합니다.
님 말씀마따나... 사전으로 정리돼야죠. 이런 책이 시작이 되어서...
 
감염된 언어 - 국어의 변두리를 담은 몇 개의 풍경화
고종석 지음 / 개마고원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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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이란 이름은 내게 낯선 이름이다. 이전에 아는 바 없었고, 지금도 제대로 아는 바 없는, 내게는 그런 인물이다. 알라딘에 거하면서 그 이름을 은근히 자주 보게 되었던 것이 이 책과 나의 인연을 맺어주었을 것이다. 특정의 누구를 거론하진 않겠지만, 이 자릴 빌어 그 분께 감사를 드려야겠다. 나름대로 괜찮은 책 한 권 읽게 해 주었고, 글 잘 쓰는 한 저자를 알게 해주었으니 말이다. <감염된 언어>를 읽고 난 후의 지금, 나는 고종석의 다른 책들에 기웃거리고 있다. 그만큼 <감염된 언어>를 통해 무엇인가 고종석이란 이름에 적잖은 매혹을 경험했다고 해야겠다.

다소 빈약해 보이고(요즘 책들은 양장본이 아니더라도 책 표지가 반양장처럼 다소 딱딱해 어느정도 무게감이 있다.) 글자 크기도 좀 큼지막한 듯 하고(재보지는 않았다.), 쪽수도 몇쪽 안되는(271쪽에 달하긴 하다. 비슷한 쪽수를 가진 다른 책과 비교해보니 이 책의 두께는 2/3정도 밖에 안된다. 그만큼 안돼보였나 보다.) 이 책을 대면한 첫 느낌은, 그저 그랬다고 해야겠다. "감염된 언어-국어의 변두리를 담은 몇 개의 풍경화"라는 제목이 그만큼 가벼워지고, 별반의 흥미를 더해주지 못했다는 얘기다. 어쩌면 요즘 책들의 화려한 외장에 내가 너무 익숙해져 있는 탓이기도 하겠지만, 이 책의 외장은 확실히 요즘의 책들보다 좀 떨어진다. 그러나!

책장을 한 장 두 장 넘기면서 그 외장 두로 숨겨둔 고종석의 유쾌한 필력에 빠져들어야만 했다. 개마고원의 편집자는 그것을 이렇게 귀뜸해 주고 있었다. "편집자 주 - 본문에 나오는 외래어의 표기는 필자의 요구에 따랐습니다." 한 권의 책이 저자와 출판사의 이름을 달고 대중에게 팔리려 할때에 그 책은 사적 소유에서 공적 소유로 그 성질을 달리한다고 할 수 있다. 으례히 한글맞춤법과 외래어표기법 등에 맞추어 출간하는 것이 당연한 일일 터, 굳이 이런 편집자 주를 단 것은 저자가 어떤 사람인가를 궁금하게 한다. 그리고 이렇게도 들린다. "이 책을 읽으려면 단단히 각오하고 읽으시기를." 과연 어떻길래?

무엇인가 의미있는 책에서는 무엇하나 남다르지 않은 것이 없다. 책의 서문에서부터 독자들을 압도하는 책치고 나쁜 책이 없다고 본다. 누가 감사하고, 누가 고맙고, 누구의 덕이라느니 하는 인사치례만 늘어놓은 서문들을 나는 경멸한다. <감염된 언어>의 서문은 내가 경멸하는 그런 종류의 서문이 아니다. '서툰 사랑의 고백'이라지만, 강력한 '자유주의자' 선언처럼 여겨진다. "그(언어) 변화의 과정은 곧 감염의 과정이었다. 외국어와 외국 문화의 감염 말이다. 문화사는 곧 감염의 역사고, 그 문화를 실어나르는 언어의 역사도 감염의 역사다. 인공 언어가 아닌 한 감염되지 않은 언어는 없다."라고 말하는 그에게서 그 '감염된 언어'에 대한 '사랑의 고백'을 듣는다. 순수 국어를 주창하는 우리 국어학자들이 들으시면 목을 잡고 쓰러질 일이다. '민족주의자'가 아니라고 말하는 그에게서 "민족주의자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건 왜 일까? 그만큼 누구 못지 않은 한국어 사랑을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감염된 언어'를 사랑한다는 고백에서 우리는 저자의 붓이 어디로 흐를 것인가를 조금은 짐작할 수 있으면서도, 그것이 어디로 흐를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서문에 난 매력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 이 책에서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볼 대목은 '영어공용어화 논쟁에 대하여" 다루고 있는 "우리는 모두 그리스인이다"라는 대목이다. 271쪽의 이 책에서 이 부분이 100쪽이 넘으니, 가히 이 책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부분이라 하겠다. 그만큼 필자가 이 대목에 할애한 사고의 분량이 많을 것이리라. 나는 '영어공요어화'를 반대하는 입장이다. 결사반대쯤이라고 해두자. 내 눈에 흙이 들어오고 난 다음에 그 때 가서나 해라 정도라고 해두자. 그런데 저자는 그렇지 않다. 그렇다고 영어공용어화를 쌍수들고 찬성하는 쪽도 아닌듯하다. 영어공용어화 논쟁을 촉발시킨 당사자 복거일이 자신의 스승이라고 밝히고 있으면서도 그는 어느쪽에 치우치지 않고 그 논쟁을 차분히 바라보고 있다. 그러면서 일관된 '개인주의', '자유주의자'의 자신의 견해를 투영해 간다. 그런 그에게 나와 다른 생각을 가졌다손 치더라도 미움이 가지는 않는다. 이 대목에서 내가 느낀 것은 '영어공용어화'에 대한 나의 생각을 보다 차분히 정리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관심을 가져야할 대목이라는 얘기다.

대학에서 영어로 하는 강의의 비율을 높여가고 있고, 나날이 영어의 중요성은 높아져만 가고 있는 현재, 영어공용어화는 논쟁이 아닌 대세로 시나브로 이뤄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결사를 해서 반대해야할 것도 아니고, 그렇게해서 되는 것도 아닐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고종석처럼 차분히 자신의 견해를 정리해 볼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나는 어디까지 그의 논리에 동감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태도에 공감하는 것이다.

그와 내가 달리하는 견해는 또 있다. 국한혼용에 대한 문제이다. 그는 공식적 국한혼용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이다. 나는 역시 그의 입장과 달리한다. "내게는 '대한민국'이 '大韓民國'보다 더 표의적이다. 즉 '대한민국'이 '大韓民國'보다 더 직접적으로 그 뜻이 전달된다. 그게 과장이라면, '대한민국'이 적어도 '大韓民國'만큼은 직접적으로 그 뜻이 전달된다. '대한민국'이라는 글자의 꼴이 '大韓民國'이라는 글자의 꼴보다 더, 또는 적어도 '大韓民國'이라는 글자의 꼴 못지않게, 눈에 익숙한 탓이다."라는 그의 견해와 나는 반기를 들 수 있다. '대한민국'일 때에 그 의미는 사라진다. 단순히 우리나라의 국호로만 기능할 뿐이다. 국호에 담긴 그 이름은 사라진다는 얘기다. '大韓民國'일 때의 큰 나라, 백성의 나라라는 의미가 살아나는 것이다. 이렇게 사사건건 나와는 의견을 달리하는 부분이 많지만, 그의 의견을 또한 존중하고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면서 또한 느끼는 것은 그와 '싸울' 준비를 해야겠다는 강한 위기감을 느낀다. 아마 이것이 고종석의 필력이 가지는 힘이 아닐까 한다.

또한 이 책에서 재밌게 읽을 수 있는 부분은 향가와 고려가요에 대한 저자의 글이다. 무엇보다 모든 글에서 저자의 자유로운 생각의 움직임을 느낄 수 있다. 그 움직임을 나는 꽁무니를 부여잡고 따라갈 필요는 없었다. 다만 그 움직임의 춤사위를 감상하면 그만일 것이다. 거기에 고종석이란 인물의 밉지 않은 생각들을 접하고 웃음지어주는 그만인 것이다. 나를 긴장시키는 그의 글을 나는 계속 읽어야 겠다고 생각한다. 고종석이 나를 동화시키더라도, 나는 고종석에 맞서 싸울 준비를 하기위해 그를 가까이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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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1-22 0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상당히 매력있고 설득력있는 글이죠. 그의 다른 글들도 읽어보시면 반하실 겁니다. 고종석 팬들이 많군요.

글샘 2007-02-07 05: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고종석에게 절대로 반하지 않습니다. ^^ 그는 가진자의 논객을 따름이죠.
맘만 먹으면 프랑스에 가서 몇 년 살다 올 수 있는...
극우꼴통은 아니지만, 보수주의자 중에 좀 멋진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근데, 아무리 읽어봐도 마음엔 안 듭니다.
 
글쓰기를 위한 4천만의 국어책
이재성 지음 / 들녘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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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많은 이들이 문법을 어렵게 생각한다. “문법 어렵지 않아요!”라고 할 수도 없다. 사실 문법은 어렵게 생각해서 어려운 것이 아니라, 어렵기 때문에 어려운 것이다. 국어 문법을 공부하지 않을 수 없는 나 같은 사람에게도 문법은 어렵고 따분하기까지 하다. 그래서 문법을 어떻게 하면 쉽게 공부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수도 없이 한다. 그런데 아직까지 그 방법을 찾지 못했다. 어쩌면 그 방법은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왕도는 없다.”는 말을 자주 하는데, 문법에도 왕도는 없어 보인다.

  근래에 들어 우리말 관련 책들이 대중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최근의 <국어 실력이 밥 먹여준다>라는 책은 베스트셀러의 자리까지 차지하고 있는 듯하다. 글쓰기 관련 책들도 다양하게 출간되고 있다. 최근 대학 입시에서의 논술 반영의 영향이 큰 듯하다. 글쓰기의 가장 기초적이고 기본적인 부분이 아무래도 맞춤법이나 문법이지 싶다. 그래서인지 문법 관련 책들도 출간되는데, 이 책 <글쓰기를 위한 4천만의 국어책>(이하 <국어책>)이 그런 종류다.

  사실 이런 대중적 글쓰기 관련 도서들을 나는 외면해 왔다. 아니 내게는 별 도움이 되는 책들은 아니어서 읽을 필요가 없었다. 말하자면 내게는 이런 분야의 전공서적들을 읽어야 했던 것이다. 이러한 책들은 어디까지나 전공서적은 아니기 때문에 내겐 외면의 대상일 수밖에 없던 것이다.

  최근 이 <국어책>을 읽게 된 것은, 뭐랄까 어떤 호기심이 동했기 때문이다. 도대체 내가 수년간 공부해 온 문법을 어떻게 설명하고 풀어놨기에 대중적으로, 그러니까 문법이라면 치를 떨 일반인들이, 이 책을 그렇게도 많이 사서 읽을까 하는 의문에서 오는 그런 호기심 말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게 되었고, 어느 정도 그런 호기심을 풀 수 있었다.

  “제발 외우려고, 공부하려고 하지 마세요! 그러니까 문법책을 내던졌던 거예요!”라고 저자는 말하는데, 그럼 난 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문법이라는 것이 공부 안하고, 외우지 않고 되는 거란 말인가? 내가 그렇게 문법 공부를 해 왔건만, 문법은 외우지 않고 되는 부분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이 저자 참 “구라가 심하다.”고 생각이 되는 대목이다.

  문법은 우리의 언어사용에서 하나의 규칙을 찾아내어 정리한 것이다. 그런데, 그 규칙은 어떤 하나로 모아지지 않는다. 이럴 땐 이 규칙이, 저럴 땐 저 규칙이, 어떨 땐 규칙이라고 할 수 없는 예외적 사항들이 적용된다. 그러니 외워야 하는 것은 문법 공부에서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외우는 것은 지극히 싫어하는 나로서는 이것을 포기하는 것은 그야말로 내 전공을 말아먹는 일이기에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참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외우지 말라고? 외우지 않고 되는 것은 없다. 저자의 뻥은 이 책을 읽고 난 후에도 뻥일 뿐이었으니, 이 책을 ‘내던져’ 버려야 할까?

  이 책은 문법을 나 같은 입장에서 접근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국어학을 하나의 공부대상으로 하는 나와 같은 국어학도의 입장이 아니라, 대중의 입장, 즉 일반 언어사용자의 입장에서 접근하고 있다. 일반 언어사용자, 즉 언중들에게 있어서 문법은 보다 말 잘하고, 글 잘 쓰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문법을 알아야 하는데, 그들의 입장에서도 이 책은 제대로 ‘뻥’치고 있다. 사실 다소 재밌게 읽히기는 했지만, ‘공부’ 안하고, ‘외우지 않고’는 이 책을 읽어도 아무 소용이 없다.

  나는 여기서 이 책의 몇 가지 점들의 문제들을 지적하고자 한다. 사실 내가 문법을 공부하는 것은 문법의 전 분야가 아니라, 그 한 부분이랄 수 있는 학교문법을 공부하고 있다. 사실 일반인들에게 적용되는 문법이란 것이 바로 학교문법인데, 학교문법에 있어 이 책은 어떤 설명들은 학문문법, 즉 개인 문법학자의 설에 관한 것들이다. 그런 점은 분명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먼저 지적하고 넘어갈 것은 문법 용어에 관한 저자의 생각이다. 문법 용어에는 아무래도 한자어가 지배적이다. 그런데, 저자의 입장처럼 “어려운 한자어를 써서 겁을 주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한자어를 쓰지 않고서는 문법의 중요한 원리라고 할 수 있는 간소화를 이루기 어렵다. 논의에서 벗어날 우려가 있어 더 왈가왈부 하지는 않겠지만, 이 책을 읽는 처음부터 귀에 거슬리지 않을 수 없어 언급하고 간다.

  저자는 말의 중요성을 새삼 강조하면서 “글보다 말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사실 말이 먼저 있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안다. 그렇다고 해도 지금에서는 말과 글이 따로 존재한다고 보기 어렵다. 말이 중요하면 글도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 둘은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말과 글을 그렇게 분리해서 생각할 하등의 이유가 없어 보인다.


“[더우기]라는 소리를 영어처럼 소리 나는 대로 쓰면 ‘ㄷㅓㅜㄱㅣ’가 됩니다. ‘더우기’가 맞춤법에 맞는 표기인지 ‘더욱이’가 맞는 표기인지 고민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그런데도 한글을 마치 한자처럼 네모 안에 답답하게 갇혀 있어요. 훈민정음을 만들 때 우리나라가 한자를 쓰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네모반듯하게 규격화되어 있는 한자의 글자꼴에 이미 익숙해진 상황이었기 때문에 한글도 한자처럼 모아서 쓰게 되었어요.”


  미치고 팔짝 뛰겠다. 이 저자는 우리나라 맞춤법의 기본 원리도 묵사발로 만들어 버린다. 사실 문법을 논하면서 말의 소리를 중심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저자의 의도를 알겠지만, 이런 식으로 막무가내식의 말은 너무하다 싶다. 더욱이 한글의 모아쓰기가 세계적으로 어떻게 평가되고 있는가를 저자가 알고 있다면 이런 식의 무식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래도 저자는 한자 노이로제에 걸려 있는 듯싶다. 더 말하고 싶지 않다.

  앞에서도 내가 학교문법을 공부한다고 했는데, 학교문법이 저자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단순 무식한 것이 아니다. “‘학교문법’은 학생들에게 설명하기 쉽게 만든 문법”이라고? 갈수록 가관이다. 학교에서 가르치기 위해 만들어 놓은 게 학교문법이 아니다. 학교문법은 말하자면 일반 언중들의 말하기에서 사용하는 하나의 규칙이다. 저마다 말하는 것이 다르고, 문법을 논하는 학자마다 그 규칙들이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의 통일된 규칙이 필요하다. 그것이 학교문법인 것이고, 그런 규칙이 가르치는 곳이 학교일 수밖에 없기에 이름하여 학교문법인 것이다.

  “문법은 규칙인데 규칙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은 모순입니다. 규칙만으로 말을 명확히 설명할 수 있어야 제대로 된 문법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이 말은 맞는 말인 동시에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문법이 규칙화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만, 말은 그리 간단한 것이 못된다. 특히 우리말에서의 규칙화는 무척이나 어렵다. 그래서 외워야 할 것들이 너무 많다는 얘기다. 일반화되지 못하고 규칙화되지 못하는 것을 문법이라고 하기 어렵다고, 그 예외적인 것들을 빼버린다? 그럴 수 없기에 여러 가지 예외적 현상들을 문법에 포함시키고 있다. 저자 말대로 ‘제대로 된 문법’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저자는 제대로 된 문법을 하고 있는가? 웃지 못 할 일이다.

  이 책에서 ‘-아/어, -게, -지, 고’를 부사형 어미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오해의 소지가 있는 것이, 현행 7차 학교 문법에서는 이것을 분명 부사형 어미로 설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것을 아무런 언급 없이 부사형 어미가 아니다 라고 주장하는 것은 저자의 소홀함이라고 볼 수 있다. 학교 문법에서는 부사형 어미라고 인정하지만 이러이러 해서 부사형 어미라고 할 수 없다 식의 설명이라면 좋았을 것이다. 그런데 7차 학교문법에서는 “국어에서 궁극적으로 연결 어미는 부사형 어미로 볼 수 있다는 특수성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저자의 설명도 그 안에 들어있다고 보여 진다. 부사형 어미에 관해서는 여전히 학계의 논의가 있고 필자의 주장은 그 일부이다. 그 일부를 아무렇지도 않게 대중에게 내어 놓는 것은 무엇인가 문제가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이중주어문도 학교문법에서의 견해와 조금 다르다. 저자는 서술절 내포문으로도 볼 수 있고, 이중주어문이라고도 볼 수 있다고 말한다. 저자가 앞서 주장한 대로라면 이 또한 모순일 수 있겠다. 학교문법에서는 원칙상 이중주어문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 저자는 아무런 언급 없이 이중주어문으로도 볼 수 있다고만 한다. 마치 그것이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보어 설정의 문제도 학계에서 논란이 끊이지 않는 부분이다. 필수적 부사어를 보어로 인정할 것이냐 말 것이냐의 논란으로 정리되는데, 저자는 아마도 필수적 부사어를 보어로 인정해야 한다는 입장에 있는 듯하다. 필수적 부사어를 보어로 인정하게 되면 보어의 규칙화에 치명적인 어려움을 가져온다. 이런 이유로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다가가야 할 부분이 아닌가 싶다. 괜한 필수적 부사어로 짜맞추기식 설정이라고 보지는 않아야 할 것이다. 물론 저자가 그렇게 말하고 있지는 않다. 그저 그렇다는 것이다.

  저자는 관형격조사 ‘의’에 대해 전면 부정하면서 ‘연결조사’로 설정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이 책을 읽고 저자의 말만 듣고 어디 가서 이건 연결조사야 하면 창피당하기 십상일지도 모른다. 다만 저자의 주장을 일정부분 수긍할 수 있는 부분도 크다. 하지만 학교문법에서 소유격조사라는 말은 사용하지 않고 관형격조사로 이름 하면서 체언간의 연결의 역할을 하고 있음도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언급하지 않고 있다.

  이 책에서의 상대높임법 분류에도 문제가 있다. 현행 7차 문법에서는 격식체를 4가지, 비격식체를 3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는 비격식체를 2가지만으로 구분한다. 거기에다가 “비격식체에서도 상대방이 아주 높을 때만 ‘-요’를 붙여 상대방을 높인다는 사실을 표시하고, 그렇지 않을 때는 ‘-요’를 붙이지 않는 것으로 상대방이 아주 높지 않다는 사실을 나타냅니다.”라는 이상한 주장을 하고 있다. ‘-요’는 분명 두루 높임으로 상대방이 ‘아주’ 높지 않더라도 붙여 쓰고 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주장이 담겨있다는 것은 이 책이 ‘4천만’ 국민의 ‘국어책’으로 기능하기에 의문을 들게 한다. “만약 몽룡이가 형을 무서워하고 어렵게 생각한다면, 몽룡이는 형을 아주 높은 사람으로 생각해 ‘-요’를 붙여 말할 거예요.”라는 설명에 과연 수긍할 수 있는가? 웃지 못 할 노릇이다.

  저자의 주장은 시제의 문제, 즉 미래시제의 설정에서도 나타난다. ‘-겠’이 그것인데, 현행 학교문법은 미래시제로 ‘-겠’을 설정하고 있다. 분명 이것은 문제이지만, 그런 언급은 전혀 없이 ‘-겠’은 미래시제가 아니라고 설명하면 그렇게 배운 사람들은 뭐가 되는가? 미래시제 ‘-겠’의 설정여부는 학계의 논란의 대상이기도 하다. 아직 합의되지 않은 그 논란을 마치 당연하다는 듯, 학교문법과 배치되면서까지 일반 대중에게 떳떳하게 내어놓는 저자의 자신감을 높이 사야 할 듯하다.

  이 외에도 사동 표현에서 ‘-시키다’가 빠져있다. 그리고 이중모음을 설명하면서 “두 개의 단모음을 합해서 만든 글자”라는 어느 문법책, 언어학 책에도 없는 설명을 하고 있다. 이중모음은 단모음 두 개의 합이 아니다. 그럼 이중모음은 다시 단모음으로 나누어져야 한다는 얘긴데, 어느 문법학자도 이중모음을 단모음 2개로 나누지 않는다. 저자가 반모음에 대해 알고 있는지 의심이 가는 대목이다.

  이 외에도 여러 가지 문제들이 엿보이지만 이만 줄이기로 하겠다. ‘4천만’의 ‘국어책’임을 자임하는 이 책이 이런 문제들을 안고 있다면 극히 우려스러울 수밖에 없다. 다만 이 책의 장점이라고 한다면, 여러 가지 삽화와 예들이 재미있게 구성되어 있다는 점, 그리고 그렇게 따분하고 지루하게 문법을 설명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것도 이 책의 중반까지는 그런 대로 가지만, 후반부에 들어서는 여느 문법책과 차별을 두기는 어렵긴 하다. 하여간 이 책이 ‘4천만’에게 쥐어질 ‘국어책’이기에는 저자의 사견과 일방적 주장이 곳곳에 너무 많이 담겨있어 지극히 부족해 보인다. 그리고 그 ‘뻥’, 즉 문법을 공부하지 않고 외우지 않고 알 수 있다는 그 ‘뻥’은 ‘뻥’으로 검증되었다고 본다. 만약 문법이 정말 그런 것이라면 저자가 굳이 책을 쓸 필요도 없었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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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매지 2007-01-07 2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법 공부는 정말 어려운 것 같아요. 저도 수업시간엔 학교문법을 위주로 배우긴 했지만 그 때마다 교수님께서 "학계에는 이런 이런 의견도 있으니 참고해라"라고 하셨던 게 생각나네요.

멜기세덱 2007-01-08 2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교문법을 다루다 보면, 애매한 것들이 너무 많아요. 공부하다보면, "이게 무슨 문법이냐?" 할 때가 많습니다.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학계의 의견도 참고해야 하는데, 그렇게 한다는 게 솔직히 쉽지 않죠. 하여간 어려워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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