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의 모든 길은 너에게로 뻗어 있다

 

너를 만나기 전부터

너를 만난 순간에도

네가 떠난 그 후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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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슴도치

 

 

 

누군가 박은 못처럼

밖에서 들어와 박힌 것이 아니다

 

가시는

내 안의 뿌리에서 돋아난 것이다

 

 

 

 

--- 살아가는 일이 못 박고 못 박히는 일이라는 말은 이제 너무나 당연한 비유가 되어버렸습니다. 우리의 삶이 빛나는 환희보다는 아픔과 상처의 비망록이라는 걸 청춘의 이른 봄에 막연하게 느끼긴 느꼈었지만, 그 느낌은 과연 진정으로 믿을 만한 느낌이었던가요?

 

  오래 전, 오래 고통받는 사람을 위무하는 이성복의 시들에서 내가 얻은 것은 무엇이었나요? 낙원에서 영원히 멀어질 수 밖에 없는 자신의 죄의식을 뼈아프게 고백한 김종삼의 라산스카라는 시는 무엇 때문에 그리 내 마음을 오래도록 파고들었을까요? 섣부르게 희망하기 보다 완벽하게 절망하는 삶을 노래한 기형도의 시들은 과연 나에게 비천한 슬픔 그 이상일 수 있었을까요?

 

  저는 그들의 시를 어떤 느낌의 형식으로 그저 느꼈을 뿐이었구나! 라는 생각을 요즘 하고 있습니다. 그 느낌은 결국 엄살과 아픔의 포즈로 구현되어 왔다는 슬픔을 동반하구요... 물론 후회는 없습니다만 숨길 수 없는 부끄러움이 빼곰히 고개를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저는 오래도록 누군가가 나에게 박은 못과 못자국에 대해서만 뒤돌아보고 들여다보려 했던 건 아니었는지... 타인의 고통과 상처에 손 내밀고 아파하려는 연민과 사랑의 순간들은 물론 아름다웠지만, 그 역시도 나에게 박힌 못의 상처를 숨기고 치유하려는 몸부림은 아니었는지... 곰곰 생각해 봅니다.

 

  고백컨대

  지금 온통 나를 뒤덮고 있는 이 뾰족한 가시들은

  다른 누가 와서 나에게 박은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싹 트고 서서히 뻗어 오르고 있었던 것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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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에

 

 

 

 

첫눈에 반한다는 말은

참 아름답다

 

첫눈에 반해보지 못한

사람이 어디 있을까

 

소리 소문없이 내리는

첫눈을 맞으며

 

마음을 열지 못할

사람이 어디 있을까

 

 

 

--- 얼마 전 졸업한 제자가 찾아와... 급 흥분한 어조로 왈,

   "샘! 저 드디어 만났어요."

   "누굴?"

   "그 오빠, 너무 사랑스러운 거 있죠. 정말 첫눈에 반했어요."

 

  막 물오른 나무의 잎사귀처럼 푸르고 싱그러운 얼굴로

운명적인 첫사랑과의 조우를 이야기하는 어여쁜 제자의 모습은

그냥 환희와 기쁨 그 자체였습니다.

 

  그 달뜬 정열과 이제 마악 처음으로 꽃피는 마음이 참 순수하고 고왔습니다.

  이 무더운 폭염의 여름에... 소리소문 없이 이 어여쁜 숙녀의 가슴 속으로 첫눈이 내리고 있구나 라는 생각이 자연스레 들었구요.

 

  아주 오래고 오래 전... 대학 2학년 때... 그냥 막무가내로 외로움에 치를 떨던 겨울의 초입이 생각났습니다. 종로 거리를 쓸쓸하게 걷던 오후로 기억하는데... 그 때 정말 하얀 눈이 하늘에서 소리없이 땅으로 내려왔었습니다. 그 눈에 반해 저녁내내 외롭지도 슬프지도 그래서 술푸지도 않았던 날이었습니다.

 

  그 밤 이 시를 끄적였던 기억이 아련하게 떠오른 오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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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이름은 필요하지 않다

 

외로움도

 

그리움도

 

오지 않는 기다림마저

 

 

 

--- 누군가가 옆에 있다고 해서 외롭지 않은 건 아닙니다. 아무도 곁에 없다고 해서 반드시 외로운 것도 아닙니다. 삶도 사랑도 어차피 홀수라고 누군가는 말하고, 사랑도 삶도 온전히 짝수여야 한다고 또다른 누군가는 말합니다.

 

  가끔씩 서해 바다의 먼 섬을 떠올립니다. 한 번쯤 다시 가봐야지 마음만 먹고 가보지 못한 섬. 언젠가는 꼭 가보리라 단단히 마음 먹지만 그 언제가 언제일지 도통 모를 섬. 그저 다시 꽃 피었다 꽃 지는 시절에 지는 꽃잎처럼 흘러 가야지 다짐하고만 있는 섬.

 

  태풍의 예보는 늘 소금기 바람을 머금고 여기로 불어오네요. 조금씩의 비가 정말 조금씩 내리고 있습니다. 정말 폭우의 폭우가 내려 이 세상을 한 번 푹씬 적시고 푹 담갔으면 좋겠다고... 그 위로 외롭지만 단단한 섬 하나 그 물에 뿌리내리며 솟아올랐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오늘밤 조용한 방 안에서 초(초가 없다면 작은 스탠드의 등이라도)에 등을 켜 보십시오. 스스로를 태우는 초의 빛으로 방 안의 순간 환해질 때

 

  '섬' 하고 마음 속으로 천천히

  '섬' 하고 불러보셔요.

 

  정말 긴 이름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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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멘트

                               -유용주

 

 

 

부드러운 것이 강하다

자신이 가루가 될 때까지 철저하게

부서져본 사람만이 그것을 안다

 

 

 

--- 일찍이 동양의 현인인 노자께서 상선약수(上善若水--가장 최상의 선은 물이다)’라는 말을 써가며 부드러운 물의 힘을 극찬했던 이래... ‘부드러운 것이 강하다라는 진술은 너무나 흔하고 지극히 당연한 레토릭이 되어버린 것만 같습니다. 이 시는 이제 그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 굳이 마음이 아니어도 머리로는 당연하다고 여기고 또 옳다고 끄덕이는 그 부드러움의 가치에 대해 시멘트라는 아주 이질적인 소재를 끌어와 새롭고 신선하게 생기를 불어넣고 있습니다.

 

  먼저 시멘트라는 제목을 읽고 난 후, ‘부드러운 것이 강하다라는 1행을 읽어 보십시오. 무척 당황스럽지 않으셔요? 그건 저나 여러분의 생각이 시멘트하면 떠오르는 어떤 단단한 벽돌같은 이미지에 고정되어 있기 때문일 겁니다. 평소에 머릿속에 박혀 있던 시멘트가 주는 굳고 단단함의 이미지와 부드러운 것이라는 진술이 우선 충돌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2행에서 그 상반되고 충돌했던 이미지의 당황스러움은 조금씩 풀립니다.

  ‘가루라는 말... ~ 화자는 지금 시멘트 포대에 담겨있는 시멘트 가루를 보고 있는 것이군요. 부서질 대로 부서져서 부드러운 가루로 존재하는 그 시멘트의 현상태.

  화자는 그 시멘트 가루자신이 가루가 될 때까지 철저하게 부서져 본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말은 묘한 아픔과 반성을 그 안에 담고 있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화자 혹은 시인 자신은 스스로에게 그렇게 묻고 있는 것이지요. ‘과연 나는 가루가 될 때까지 철저하게 부서져 본 적이 있을까?’

 

  주변에 건물을 짓는 공사장이 있다면 한 번쯤 머물러... 멀리서든 가까이서든 지그시 살펴보십시오. 시멘트 포대가 열리고, 쏟아져 내리는 회색의 가루들... 그 부드럽고 철저하게 부서진 가루들이 부드러운 물과 만나 섞이는 모습을... 부서진 가루와 부드러운 물이 만나 점점 뭉치고 뭉쳐지는 시멘트의 모습을... 그 시멘트가 바르고 발라져 단단해지고 강해지는 건물의 모습을...

 

  놀랍지 않습니까?

  부서지고 부서져 더 이상 부서질 수 없는, 그런 뼈아프게 부드러운 가루가 되어 본 사람만이 진정 강해질 수 있다고 이 시는 일갈하고 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아이들 앞에서 문학이 어쩌고... 사는 일이 어쩌고... 슬픔과 아픔을 위로하고 연대하는 일에 대해서 너무나 쉽게 힘주어 말하곤 했던 제 자신에 대해서...

 

  과연 나는 부서질 대로 부서져 본 적이 진정 있었나?

  진정 나는 그 고통의 부서짐과 자기 단련의 과정을 거쳐 단 한 번이라도 단단해진 적이 있었나?

 

  이 때의 솔직하고 가장 적절한 답변은 오직

  ‘부끄럽다말고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이 시는 너무나 아픈 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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