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빌리 엘리어트 - 오리지널 캐스트 레코딩
여러 아티스트 (Various Artists) 노래 / 유니버설(Universal) / 2008년 10월
평점 :
품절


오리지널을 능가하는 작품은 없다, 고 단언하곤 하지만 늘 그렇듯이 예외도 있다.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가 그렇다. 영화가 주는 감동이 너무 커서 처음엔 돈 벌려고 괜한 걸 만들었구나 싶었는데 아니었다. 원작의 스토리는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음악을 싹 다 바꾸어 새로운 놀라움을 안겨주었다. 개인적 호불호를 떠나 앨튼 존은 역시 천재다. 특히 춤출 때 기분을 전하는 일렉트리시트는 지금 들어도 전율이다. 이 음반은 오리지널 캐스트가 참여하여 화제를 모았다. 어느덧 빌리도 나이를 들어가고 우리나라에서까지 공연이 되었다. 모두가 다 좋을 수는 없지만 댄스의 기쁨은 늘 영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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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때문이 아니라면 하루에 정해진 시간 동안 혹은 세 편 정도는 꼬박꼬박 글을 쓰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나도 마찬가지다. 물론 최소한 세 시간 정도 그리고 세 개의 글을 지어내고는 있지만. 그렇다. 내게 글쓰기는 일이다. 만약 직업이 아니라면 어떻게 될까? 그럼에도 나는 내 안의 악마를 온전히 글로 풀어낼 것이 분명하다. 그만큼 매력적이다. 왜? “글을 쓰다보면 생각을 많이 하게 돼” 소설 <말 안하기 게임>을 읽다가 발견한 문장이다. 매우 공감이 간다. 글쓰기란 모든 면에서 비효율적이다. 다이렉트로 말을 하거나 그게 귀찮으면 카톡을 보내면 되지 않나? 반면 글이란 최소한의 격식을 갖춰야 하고 내가 하고 싶은 말과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을 동시에 담아야 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런 귀찮은 과정을 거치는 동안 생각을 정말 많이 하게 된다. 처음엔 스스로를 돌아보고 도중엔 내 글을 읽을 사람을 떠올리고 마지막으로 기록으로 남게 될 걸 직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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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꾸라지 한 마리가 온 웅덩이를 흐려 놓는다


어느 집단이나 목소리 큰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은 극히 소수다. 문제는 이들이 권력을 쥐고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경우가 많다. 말을 좀 어렵게 했지만 간단히 말하면 시끄러운 인간이 쥐뿔도 없으면서 대장 자리를 차지한다는 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혀를 차면서도 대게는 방관하는데, 그 이유는 똥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더러워서다. 시간이 지나면 나아지겠지, 본인도 잘못을 알고 있겠지, 설마 더 위까지 오르겠어. 착각도 이런 착각이 없다.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지랄발광을 하며 유세를 떤다.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보면 내 주변의 사람들은 모두 그의 부하가 되어 있다. 끝까지 저항하면 괴롭힘이 시작된다. 정신적, 육체적으로 가혹함이 극에 달하게 되는데 결국 중이 절이 싫으면 떠나듯이 튀어나올 수밖에 없다.


여성 걸 그룹 에이오에이의 민아 사태를 보며 많은 생각이 들었다. 어찌 보면 유치해보이지만 자세히 파악하면 권력을 둘러싼 치열한 싸움임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다수가 선하다고 하더라도 악독한 인간이 작심하고 웅덩이를 흐려놓게 되면 결과는 탈퇴 아니면 방관자가 될 수밖에 없다. 팀닥터의 구타를 못 이겨 자살을 선택한 선수도 마찬가지다. 감독과 주장이 함께 공모하고 다른 선수들이 수수방관하며 일은 극단적으로 흘러갔다.


과연 해결방법은? 정직하게 말해 잘 모르겠다. 인간세계 더 나아가 포유류의 세상에서 권력과 폭력은 늘 함께 하기 때문이다. 곧 폭력을 동반하지 않은 권력은 성립하기 어렵다. 여기서 폭력이란 물리적, 정신적, 경제적, 정치적 요소를 모두 포함한다. 되도록 엮이지 않는 게 최선이긴 한데. 그나저나 나를 그렇게 괴롭히던 그 자식과 그 녀는 아직도 잘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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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는 매력적이다. 모두가 평등하게 살 수 있다.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그러나 과연 목적을 달성한다고 해서 사람들은 행복해질까? <시간의 파동>을 보면 똑같은 집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나온다. 적어도 가난은 없어 보이지만 주민들은 늘 경계심을 품고 있다. 평등해지기 위해서는 어떤 한 사람도 튀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정부가 곧 칼을 빼들 것이라고 엄포를 놓고 있다. 집을 사거나 팔거나 보유하거나 상관없이 폭탄세금을 투하하겠다. 다주택자는 물론이고 1주택자도 예외가 없다. 이른바 고가 기준 미만인 9억 원 이하 주택도 재산세를 올려 내야 한다. 과연 누구를 위한 정책인가? 무주택자를 위해서란다. 그들은 약자이며 을이기 때문이다. 글쎄? 허리띠를 줄여가며 한푼 두푼 저축하고 이른바 영혼까지 끌어모아 집 한 채 장만하려는 사람들이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정부의 말을 들어보면 평생 집 살 꿈은 꾸지도 말고 임대주택 대기줄에 서야만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역설적으로 가난하면 가난할수록 그 확률은 더 높아진다. 서로서로 빈곤해지기 위해 경쟁을 해야만 한다.


독재는 언제나 선의로 위장한다. 내가 다 알아서 좋은 방향으로 가고 있으니 무조건 따르다. 결과는 즉각적이다. 문제는 부작용이다. 다양한 사람들의 의견은 단지 서슬 퍼런 압력 때문에 살짝 누그러져있을 뿐 언젠가 폭발하기 마련이다. 현 정권은 총선 승리로 다수당을 차지했다. 입법이나 집행 모두 마음대로 할 수 있다. 야당은 견제 기능을 상실한 상태다. 아무리 여당이 옳은 생각을 하고 있더라도 누군가의 견제를 받지 않고 독주하면 재앙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민주주의의 부활이 절실한 때다.


덧붙이는 말


민주주의 또한 악용의 소지가 크다. 나치 독일은 합법적으로 의회에 진출하여 다수당이 되었다. 미국 또한 루스벨트 대통령이 내리 3선을 하며 피로도가 극에 달했다. 그러나 이 두 나라 모두 그 피해를 잘 알고 있었다. 독일은 종전 후 다수당 체제를 도입하였고 미국은 같은 대통령의 세번째 출마를 금지시켰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어떻게 거대여당의 독주를 막을 수 있을까? 그 방법은 이미 체험으로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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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불시착 일본 넷플릭스 


드라마에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사람은 아니다. 끝까지 본 것도 손에 꼽을 정도다. 특히 군인들이 나오는 경우는. <사랑의 불시착>을 모두 보았다. 한 번에 다 시청한 것은 아니고 일주일에 걸쳐 보았다. 이유는 일본발 태풍 때문이었다. 습관처럼 하루에 한번은 야후재팬에 들어가는데 거의 매일 빠짐없이 이 드라마가 언급되었다.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인기가 있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심지어 수십 번을 반복해서 보는 시청자도 있다고 한다. 과연 왜 그런지 호기심이 일어 넷플릭스를 클릭했다. 


전부 다 본 소감은 정직하게 말해 아주 잘 만든 드라마는 아니었다. 우리에게는 익숙한 막장 요소를 북한을 배경으로 잘 버무렸다고나 할까? 그러나 일본인들 시각에서 보면 새로웠을 것 같다. 북한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등장하는 드라마는 매우 드물었기 때문이다. 물론 결정적인 원인은 현빈과 손예진때문이겠지만. 이 둘은 기존의 정형화된 로맨스를 벗어나 남자는 여자를 간섭하지 않되 보호하고 여자는 사랑하되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인 역할을 연기했다. 우리에게는 어느 정도 익숙해진 캐릭터지만 일본인들에게는 매우 낯설었던 듯싶다. 여하튼 잘 봤습니다.


덧붙이는 말


이 드라마를 보며 두서너 번 울컥했다. 그 중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두 남녀의 애절한 사랑씬이 아니라 여자들의 우정을 드러낸 장면이었다. 보위부(우리의 인기부)에 끌려간 남편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간부 부인의 집에 동네 사람들이 먹을거리며 땔감을 가지고 하나둘씩 등장하는 순간 눈시울이 시큰했다. 분명히 누군가 감시를 하고 있고 적발되면 곤욕을 치른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알음알음 모이는 걸 보며 북한도 사람 사는 곳임을 실감했다. 그들 처지에서는 남한을 그렇게 볼지도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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