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당장 지구의 멸망이 올지라도


흔히 성격이 좋다고 하면 밝고 쾌활한 사람을 떠올린다. 부럽다. 삶이 환희로 가득차야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경제력과 건강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가난하고 몸이 아프면 만사가 짜증스럽고 귀찮다. 그러나 세상에는 태생이 낙천적인 이들도 있다. 어떤 상황에도 굴하지 않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전진하고 또 전진한다. 언뜻 고 정주영 현대그룹회장이 생각난다. 


우울한 일 투성이다. 유난히 춥고 눈이 잦은 겨울부터 마음에 들지 않는다. 잠깐 봄 날씨더니 다시 영하 10도까지 곤두박직치고 바람도 차다. 그럭저럭 3백 명대를 유지하던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자도 갑자기 6백 명을 넘어섰다. 일시적인 현상인 줄 알았는데 오늘(2021년 2월 17일) 또다시 남양주의 공장에서만 백여 명 이상의 집단 확진자가 발생했다. 


개인의 고통은 감가상각을 겪는다. 곧 아무리 내가 아프다고 호소해도 그 절절함이 상대에게 고스란히 전해지지 않는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하물며 글로 통증을 호소하는 건 전혀 와 닿지도 못한다. 그저 넋두리에 불과하다. 


그러나 모두의 괴로움은 다르다. 너와 나뿐 아니라 전체가 앓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1년이 넘었다. 문제는 끝이 보이지 않는 거다. 정부의 말대로라도 금년 11월이 되어야 겨우 백신접종이 완료된다는데, 글쎄, 하도 거짓말을 해대는 정권이라 믿을 수가 없다. 설령 그렇게 되더라도 거리두기와 마스크 쓰기는 계속 해야 한다니 참 답답하고 또 갑갑하다. 이런 마음이 들 때 나는 한 장의 사진을 들여다본다. 동일본대지진으로 쑥대밭이 된 상황에서 욕조를 꺼내 불을 때워 목욕을 즐기는 두 명의 일본인. 그 낙천성에 놀라면서도 어떤 상황에서도 일상을 이어가겠다는 결연한 의지에 탄복한다. 내일 당장 지구의 멸망이 올지라도 오늘 나는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목욕의 즐거움을 만끽하겠다, 라고 외치는 것 같다.


사진 출처 : 중앙일보 2011.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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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거사 크리스트는 살인은 습관이라고 누누이 강조했다. 그러니 추리서설의 여왕이라 불리겠지. 실제로 살해를 포함한 강력 사건의 범인들 모습은 우리들의 예측을 빗겨간다. 뭔가 흉악하고 무섭게 생겼을 것 같지만 직접 보면 너무나 평범해서 놀란다. 적어도 겉으로는. 왜 그럴까? 그들에게 범죄는 익숙한 일이기 때문이다. 곧 특별히 의식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저지른다. 마치 사람들이 아침에 일어나면 화장실에서 양치질을 하듯. 중요한 건 살인이 아니라 습관이다. 뭐든지 자주 하면 일상이 된다. 달리 말하면 좋은 일을 몸과 마음에 새겨놓는 게 핵심이다. 


앞이빨 하나가 부러진 게 이정도로 심각한 영향을 미칠 줄 몰랐다. 당연하다. 이전에는 그런 경험이 없었으니까. 그러나 직접 당해보니 불편함을 넘어 정신건강도 불안정해진다. 괜히 이빨 빠진 호랑이겠는가? 신체의 균형이 무너지면서 극도로 예민해진다. 가짜 이빨을 대신 끼울 다음 주까지는 어떻게 해서든 버텨야 한다. 사실 그 날이 생이빨을 합쳐 두 개의 치아를 뽑아야 하는 극강의 공포를 체험할 날임에도. 그럼에도 변함없이 지키는 건 하루하루의 루틴이다. 심지어 이빨이 부러진 걸 확인하고도 바로 아파트먼트 계단을 삼십분 쯤 오르락내리락했다. 참고로 작년 10월 31일부터 단 하루도 빠지지 않았다. 심지어 집을 비운 날도 근처 빌딩을 찾아 계단을 걸었다. 독하다면 독한 거지만 그냥 세수하듯 습관적으로 그 시간이면 바로 튀어나갔다. 코로나로 실외 활동이 줄어들어 대안으로 택한 운동이었는데 이제는 그냥 평범한 일상이 되어버렸다. 살인이라는 단어 대신 계단 운동을 집어넣은 결과 몸무게가 빠진 것은 물론이고 바이러스 발병 이전보다 건강이 더 좋아졌다. 이빨이 빠지건 말건 이 짓은 계속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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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이빨이 깨졌다. 구체적으로 아래 가운데 자리한 치아다. 직접 원인은 식당에서 먹은 꽃게 때문이었다. 연휴가 끝나자마자 부랴부랴 치과에 다녀왔다. 참고로 환자들이 밀려 예약이 매우 어려웠다. 결과는 예상보다 심각했다. 처음엔 조각이 난줄 알았는데 완전히 부러졌다. 곧 남은 치아를 다 제거하고 새로 심어야 한다. 게다가 지지대 역할을 하기 위해 옆에 있는 멀쩡한 이빨까지 뽑아야 한다. 급하게 본을 뜨고 나서 추후 일정을 물어보니 앞으로도 서너 번은 더 와야 한다. 낭패도 이런 낭패가 없다. 다행이라면 오랫동안 내 치아를 봐주는 곳이라 안심이 되고 비용도 양심적이다. 그럼에도 우울함은 변함이 없다. 정직하게 말해 치과에 가기 전 날 밤 빠진 이빨 사이로 드나드는 공기를 혀로 느끼며 자살충동까지 일었다. 아마도 이제 즐거움은 사라지고 오로지 늙고 병들 육신밖에 남아있는 게 없음을 정신도 깨달았기 때문이리라.


덧붙이는 글


잠시 망설이다 식당에 전화를 걸었다. 바로 답을 주진 않았다. 사장이 따로 전화를 한다고만 알려왔다. 저녁 무렵 통화를 했다. 약 삼십 분에 걸친 이야기 끝에 내린 결론은 주인의 진심어린 사과와 최소한의 보상기준 마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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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을 넣는 즐거움은 남자들만의 전유물만이 아니다 


운동하는 여자가 아름답다


설이나 추석 같은 명절은 방송가에서는 대목이다. 오랜만에 가족이나 친척들이 모여 티브이를 보며 이야기꽃을 피우기 때문이다. 케이블이나 오티티 활성화와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풀이 다소 죽긴 했지만 올해도 어김없이 다양한 파일럿 프로그램들이 선을 보였다. 곧 시험 삼아 내보내고 반응이 좋으면 정규로 자리 잡는 식이다. 일요일 밤을 책임지는 구해줘 홈즈도 그렇게 출발했다.


모든 시험 방영분을 보진 못했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에스비에스의 <골 때리는 그녀들>*이었다. 연예인이나 다른 종목 선수들을 주축으로 축구시합을 하는 포맷은 새로운 게 아니다. 그러나 대상이 여자이고, 팀을 나눠 토너먼트로 우승팀을 가리는 건 참신했다. 게다가 각 팀의 감독이 2002년 주역들이었다. 아무래도 예능이라 웃음 포인트가 강할 거라 예상했는데 뜻밖에 다큐였다. 다들 악착같이 진심으로 경기에 임했다. 심지어 한혜진은 발톱이 빠지기 일보직전에 이를 정도로 뛰고 또 뛰고 차고 또 찼다.


많이 개선되었다고 하지만 여성들이 운동을 하기란 여전히 힘들다. 특히 축구처럼 몸과 몸이 부딪치는 경기는 대중화되지 못했다. 대부분 필라테스나 요가 같은 실내 운동이 전부다. 이유가 뭘까? 단순히 개인의 선호도차이 때문은 아니다. 여자들은 몸매를 다듬거나 체중을 줄이는 스포츠를 해야 한다는 사회적 압박이 큰 역할을 했다. 반대로 축구처럼 과격하여 다칠 우려가 있는 경우는 여자들이 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 결과 전문 축구선수가 아닌 이상 여성은 접근조차 하지 못했다. 프로 선수가 아니더라도 조기축구 등 다양한 경로로 축구를 즐기는 남자들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이상하지 않은가? 남자들이 볼을 차며 느끼는 희열을 여자들이 경험하지 못한다는 게.


<골 때리는 그녀들>은 이러한 편견을 시원하게 깨버렸다. 그라운드를 치열하게 누비는 새로운 즐거움을 만끽했다. 그럼에도 옥에 티들은 있었다. 우승이 결정되고 난 뒤 진 팀의 선수들이 하는 한탄 중 일부는 비상식적이었다. 공교롭게도 최종 우승팀 선수들은 비혼이거나 자식들이 없었다. 마치 아이가 없어 체력이 우수하고 결혼도 하지 않아 남편도 없으니 우리가 더 우월하다는 식의 이야기를 듣고 어이가 없었다. 여자들조차 남자들이 덧씌운 왜곡된 논리로 같은 여성들을 바라본다는 게 서글펐다. 또 한가지 골을 넣을 때마다 상으로 살림살이 상품을 준다는 발상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여자를 집에서 일하는 주부로 한정짓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뭉쳐야 찬다>에서 골을 성공시킨 선수에게 청소도구나 수저세트를 준다고 상상해보라.


* 그녀는 일본어 가노조(かのじょ)를 그대로 옮긴 표현이다. 본래 뜻은 사내의 계집으로 명백히 비하하는 의미를 품고 있다. 최근 들어 여자를 특정지어 부르는 것 자체가 금기시되고 있다. 예를 들어 영어로 경찰관을 Police man, Police woman이라고 구분짓지 않고 Police person이라고 부르는 식이다. 


사진 출처 : 여자들이여 공차러 가자! (골 때리는 그녀들 .. : 네이버블로그 (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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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의 배신 - 좌파 기득권 수호에 매몰된 대한민국 경제 사회 정책의 비밀
윤희숙 지음 / 21세기북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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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과 을이 싸우면 누가 이길까? 대부분은 공멸이다. 곧 같이 죽는다. 그렇다면 을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갑과 싸워 이기는 수밖에 없는가? <정책의 배신>은 우리 사회의 금기를 다루고 있다. 최저임금을 올리면 모두가 잘 살게 될 줄 알았는데 웬걸 신규노동진입이 막히면서 아예 일할 기회조차 잡지 못하게 된다. 비정규직을 모조리 정규직으로 전환하라고 대통령이 한마디 하자 부랴부랴 그 말에 따랐는데 운 좋게 정규직으로 바뀐 사람들 말고 그 이후는 아예 신규직원을 뽑지 못하게 된다. 을을 살리겠다고 낸 정책이 도리어 을을 죽이는 결과를 낳았다. 


윤희숙은 재정, 복지, 분배를 함께 보기를 권한다. 이 중에서도 으뜸은 재정이다. 다시 말해 정부의 돈이 넉넉하지 않으면 복지고 분배고 소용이 없다. 재정을 늘리는 가장 쉬운 방법은 세금을 올리는 거다. 의도했건 그렇지 않건 문재인 정부는 이 방면에서는 성공을 거두었다. 전국의 아파트먼트 값이 급등하면서 재산세와 종부세만으로도 몇 조의 수입을 올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 세금들이 비자발적이며 강제적이라는 사실이다. 장사가 잘되어 선뜻 낸 돈이 아니라 집주인은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 정책의 헛발질로 가격이 올라 울며 겨자 먹기로 낸 것이다. 이런 류의 세금은 필연적으로 저항을 부른다. 예를 들어 조두순조차 기초연금과 주거급여 등을 합쳐 한 달에 백만 원 이상 받는데 어렵사리 집 하나 장만한 사람은 세금은 세금대로 내고 기초연금 자격도 되지 못한다. 이게 말이 되는가? 정책의 혜택을 받기 위해서는 가난해지기 위한 경쟁을 하라는 말과 다름이 없다. 


과연 정책입안자들은 윤희숙의 말처럼 몰라서일까, 아니면 알면서도 저따위 정책을 펼치는 것일까? 만약 전자라면 무능력한 것이고 후자라면 극악무도한 무리들이다, 과연 문 정권은 어느 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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