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관람가에서 소개한 임필성 감독의 <보금자리>. 열린 결말과 밀도있는 연출로 단편영화의 매력을 제대로 보여주었다.

 

보금자리, 아파트먼트처럼 거래되는 아이

 

제이티비씨의 <전체관람가>는 현역 감독들이 돌아가며 단편영화를 만들어 공개하는 프로그램이다. 동시에 영화를 만드는 생생한 현장도 공개함으로써 흥미를 자아낸다. 지난주에는 임필성 감독의 <보금자리>가 공개됐다. 개인적으로는 지금까지 완성한 단편중 가장 압권이다. 소재, 각본, 연출, 연기 모두가 다 좋았다.

 

한국에서 집에 대한 열망은 국민의 잠재적 야망을 국가가 부추켜왔다. 구체적으로 집을 소유개념으로 정착시킴으로써 과도한 돈이 주택에 묶이게 되었다. 경제성장기에는 효과적이었다. 정부는 청약제도를 활용하여 모인 돈을 산업에 쓰고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싼 값에 집을 구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양가와 실거래가의 차이는 투기를 낳아 집을 거주공간이 아니 사고파는 재화가 되고 말았다. 특히 아파트먼트는 공상품처럼 거래가 되고 있다.

 

그 결과 게임에서 지거나 아예 참가를 못하는 사람들은 시장에서 떨거져나가고 말았다. 보금자리 주택은 그들을 위한 임시방편이다. 곧 여러 제약을 가진 이들에게 우선권을 준다. 그 중에는 세 자녀도 포함되어 있다. 인구증가정책과 맞물린 제도다. 문제는 옵션을 달면 달수록 부패가 생긴다는 점이다. 심지어 보금자리 주택에 들어가기 위해 키울 생각도 없으면서 아이를 입양하는 일도  벌어졌다. 

 

이 영화는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만들었다. 어떻게 해서든 보금자리 아파트에 들어가고 싶은 부부가 임시로 보육원에서 아이를 입양해온다. 아이는 처음보는 아줌마에게 엄마라고 부르지만 절대 살갑게 대하지는 않는다. 그건 부부도 마찬가지다. 어차피 청약조건을 채우기 위해 데려온 거니까. 여자아 아이 사이에는 미묘한 긴장이 계속 흐르게 되는데.

 

보는 내내 숨을 죽였지만 사실 내용은 별 게 없다. 극적인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계속 손에 땀을 쥐게 된 까닭은 전도연의 연기도 좋았지만 결국은 연출의 힘이다. 일어날듯 일어나지 않으면서 일관된게 서스펜스로 몰아가는 능력이 탁월했다. 그 결과 아무렇지 않게 느껴지는 대사가 한 한 마디도 없었다. 장편이라면 감히 표현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덧붙이는 말

 

이 영화는 놀라운 반전이 숨어있다. 그건 쉿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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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버디 무비 <청년 경찰>. 후편은 물론 티브이 시리즈로도 각색하여 방영이 가능할 정도로 톡톡튀는 소재를 잘 버무려 만든 영화다.

 

경찰을 다룬 영화는 주로 거칠거나 폭력적이다. 이따금 유머도 끼어들지만 변두리에 머물뿐이다. 그러나 가끔은 이 공식을 깨트리기도 한다. <청년 경찰>이 그렇다. 웃음이 앞장서고 느와르가 뒤를 받친다. 경찰대 동기생 기준과 희철, 한 명은 집에 돈이 없어서 또 다른 과학고 출신은 호기심에. 이들의 좌충우돌이 전반부를 잡아먹으며 낄낄거리게 만든다. 특히 요즘 세대다운 톡톡튀는 말투가 돋보인다.

 

한없이 웃길거같던 영화는 퍽치기 현장을 목격하면서부터 돌변한다. 가출한 여자들을 납치하여 난자를 적출한 후 사창가에 팔아넘기는 일당과 부딪친 것이다. 갑작스러운 상황 전개에 당황스럽지만 다소 느슨했던 마음에 긴장을 조이는 효과도 있었다. 결국 일망타진하고 일계급 특진은 아니고 도리어 교칙 위반으로 1년 꿇게 되는데. 아, 후편은 언제 나오지라는 기대를 품게 한다. 강하늘이 군대에 갔으니 3년쯤은 기다려야 할까? 어쩌면 투캅스의 전편에 해당되는 내용이라 앞으로도 소재는 무궁무진할 것 같은데.

 

그나저나 강하늘이야 원래 성실한 느낌이라 어떤 역을 맡겨도 최대치를 끌어내는게 익숙하지만 박서준이 그렇게 연기를 잘할줄 몰랐네. 진심 깜놀. 지금까지 맡아온 배역은 그럼 다 꽝이었나. 이렇게 유쾌발랄통쾌한 성격을 어떻게 숨기고 살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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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47미터>의 표지. 얼핏보면 상어가 공포의 대상처럼 느껴지지만 실제로는 바다속에서 서서히 미쳐가는 사람의 환각이 훨씬 더 섬뜩하다. 쉿 여기까지만.

 

뻔한 재난영화라고 생각하고 보았다가는 

 

사실 재난영화는 뻔하다. 극적인 상황에 사람들을 던져놓고 어떻게 헤쳐나오는지를 보여준다. 그 과정이 극적이면 극적일수록 관객들은 손에 땀을 쥐게 되는데.  영화 <47미터>도 처음에는 이 공식을 그대로 따랐다. 울적한 마음을 달랠겸 멕시코로 놀러온 젊은 여인 둘. 우울한 기분을 풀려고 술을 마시고 상어를 보기 위해 바닷가로 나간다. 뭔가 짜릿한 걸 경험하고 싶어서. 엄밀하게 말하면 헤어진 남자친구에게 보여주기용 사진을 찍기 위한 것이지만. 이쯤되면 뻔해진다. 케이지가 덜컹거리며 바닥속으로 추락하고 둘 중 하나는 죽고 나머지 한 명이 탈출하며 울부짖는 것으로 끝이 나겠지.

 

그러나 감독이 한 수 앞섰다. 사투끝에 둘은 함께 구조되고 안도의 한숨을 쉬려는 찰나 화면은 다시 칠흑같은 바다속으로 돌아간다. 철제에 깔린 친구는 꼼짝하지 않고 숨이 붙어 있는 다른 친구는 상처입은 손에서 나는 피를 바라보며 헛소리를 해댄다. 이 모든게 상상이었어. 질소중독으로 인해 정신이 돌 수도 있다고 했던 말이 빈 말이 아니었어. 결국 구조대가 다가와 한 명만을 살리는 것으로 영화는 마침표를 찍는다. 장편이라고 하기에는 다소 짧은 런닝타임이었지만 구질구질하게 끄느니 깔끔하게 잘 마무리지었다는 생각이 든다. 다음 작품이 벌써부터 기대된다.

 

덧붙이는 말

 

제목이 47미터인 이유는 그 정도 깊이까지 추락한 걸 빗댄 것이다. 에게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바닷속은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으로 깊고 넓다. 만약 우주에 대한 관심의 백분의 일이라고 바다에 쏟아부었다면 우리는 이미 해저도시에서 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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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마더>의 포스터. 대런 아로노므스키 감독은 기독교를 재해석하는데 탁월한 재주를 가지고 있다. 찬반의 격론에도 불구하고 그는 성모 마리아를 다시 한번 위대한 인물로 재부각시켰다. 주인공을 맡은 제니퍼 로렌스는 힘겨운 결정을 내렸다. 미국인이 사랑하는 만인의 연인에서 논란의 중심으로 뚫고 들어갔기 때문이다. 주름과 점 등 여자라면 특히 여배우라면 꺼렸을 법한 흠결은 아예 신경쓰지 않고 오로지 배역과 혼연일체가 되는데만 주력했다.   

 

 

Mother, It's not the end of the world

 

영화를 선택하는 기준은 간단하다. 아주 재미있거나 매우 심오하거나. 곧 지극히 대중적인 작품과 보는 내내 머리를 쥐어싸메게 하는 어렵고 복잡한 씨네마. 마치 냉탕과 온탕을 번갈아 들락날락하는 것 같지만 미지근한 물은 내 취향이 아니다. 영화 <마더>는 단연코 두번째였다.

 

그러나 썩 내킨 것은 아니다. 미리 본 네티즌들의 평이 극단적으로 갈린데다 상영관 찾기가 하늘의 별따기였기 때문이다. 억지로 수입하기는 했지만 관객들이 안 들테니 대충 개봉하는 시늉만 냈다고 할까? 겨우 찾아낸 곳은 메가박스 코엑스 스크린 A. 좌석은 고작 36석. 맨 앞자리가 아니면 관객의 뒷머리가 영상을 가리고 게다가 작으니 화면의 픽셀이 점처럼 선명하게 드러나는 최악의 환경이었다. 더우기 우연히 읽은 뉴욕타임스의 기사는 스릴러를 가장한 블랙코미디라는 혹평이 주를 이루었다. 스탠리 큐브릭이 되고 싶어하는 아마추어 거장이라는 희롱가지 있을 정도였다. 과연 이런 영화를 꼭 봐야할까? 시간떼우기라면 황당무게한 저스티스 리그가 더 낫지 않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크게 후회할 뻔 했다. 작은 상영관도 어지러운 픽셀도 감상을 전혀 방해하지 않았다. 도리어 아늑한 분위기라 몰입도는 최고였다. 초반은 공포분위기였다. 한 때 잘 나갔지만 지금은 영감이 떠오르지 않아 고민하는 중늙은이 시인과 딸이라고 의심받을 정도로 예쁘고 거기에 육감적인 부인이 낯선 집에 살게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어느날 자신을 정신과 의사라고 소개한 사람이 찾아오고 뒤이어 부인도 오게 되면서 뭔가 긴장감이 고조된다. 드디어 두 아들이 연달아 방문하면서 가족싸움은 살인으로 이어지고 대규모 추모행렬이 들이 닥치면서 영화는 혼돈의 도가니로 빨려 들어간다. 순간 나는 미국의 평론가들을 떠올리며 그들의 주장에 내심 속으로 박수를 치고 있었다. 이게 뭐야, 대체. 개그아냐? 스토리도 중구난방이고 너무 억지잖아? 출판사 직원이 사형집행을 위해 총을 쏴대고 특수군이 투입되고 집을 방문한 사람들을 울고불고 웃고 떠들고. 몬도가네가 따로 없다.

 

그러나 난장판가운데에서도 제니퍼는 임신을 하고 애를 나고 또 그 아이를 남편과 추종자들에게 빼앗긴다. 아 어디서 많이 들어본 얘기인데. 그렇다. 성경이다. 형제간의 다툼부터 카인과 아벨의 오마쥬라는 생각이 강했는데 이건 결정적인 힌트 아닌가? 그녀가 마리아라면 남편은 그럼 요셉, 아니면 하나님. 결국 마리아와 아이는 죽음을 당하고 남은 것은 그녀의 심장.

 

머리속이 덜그럭거리면서 제발 카오스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매달리고 싶은 마음이 드는 찰나 영화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마리아는 침대에서 일어나 첫 장면과 마찬가지로 내 아이를 찾는다. 그리고 이 영화의 단 하나 사운드 트랙이 흐른다. 세상의 종말. 원곡을 부른 스커디 데이비스 버전도 아니고 대중적으로 널리 사랑을 받은 페티 페이지도 아닌 스산하기 이를 데 없는 음성의 패티 스미스가 담담하게 세계는 끝이 났다고 읆조린다. 설마 이게 세상의 끝은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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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 전용 포트가 따로 설치되어 있다. 그녀가 오기 전에는 없던 표시다. 캐서린은 그 딱지를 보며 자신이 머물 수 없는 곳에 있지 않은가라는 회의감에 빠져든다. 당장이라도 떼어버리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다. 지금은 숫자에 전념할 때이다.

 

 

끝까지 긴장감을 잃지 않고 줄을 건너는데 성공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는 어떤 형태든 비약이 있게 마련이다. 드라마틱한 요소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마냥 갈등만을 증폭해서는 안된다. 현실과 가상의 세계에서 줄타기를 잘 해야만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영화 <히든 피겨스>는 끝까지 긴장감을 잃지 않고 줄을 건너는데 성공했다. 아직까지 흑인에 대한 차별이 공공연히 만연하던 1960년대의 버지니아. 나사에 근무하는 세 명의 흑인 여성은 직장과 가정에서 차별을 받으면서도 꿋꿋이 자신의 영역을 개척해나간다. 때마침 소련과의 우주경쟁에서 뒤쳐지던 미국은 어떻게 해서든 추월하기 위해 기를 쓰게 된다. 각각 고도의 수학적 지식과 컴퓨팅 능력, 그리고 엔지니어 기술까지 갖춘 세 여성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자신들의 진가를 알리기 시작하는데.

 

단지 인종차별만 다루었다면 정형화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흑인뿐만 아니라 여성 전반에 가해졌던 멸시와 여자들끼리의 시기심과 직장내 권위주의를 깨부시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영화는 훨씬 풍부해졌다. 여기에 마지막 화룡점정은 바로 유머. 영화 초반 옮겨간 건물에 흑인 전용 화장실이 없어 늘 800미터가 넘는 거리를 오고가야했던 주인공의 총총걸음은 결국 결정적 위기의 순간에도 빛이 나는데, 마침 그 때 흘러나오는 곡이 뛰어(Runnin)라니. 기가 막힌 선곡이란 바로 이런 경우에 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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