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하 골드베르크 변주곡 실내악 버전. 원래 피아노곡이었으나 현으로 연주하는 곡을 듣는 맛 또한 색다르다. 지나치게 물두하기 보다 뒷배경으로 틀어놓아도 좋아서 서서히 병에서 회복되는 이들에게도 도움이 된다. 요즘처럼 낮과 밤의 기온차이가 많이 나는 가을의 중심에서 겨울 끝무렵까지 함께 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곡은 없다고 생각한다. 

 

이틀을 앓았다. 몸이 으슬슬하더니 왼쪽 콧구멍이 막히더니 목 안쪽이 간질간질하며 어깨가 한결 무거워졌디. 몸살이다. 직감적으로 알았다. 매년 겨울의 끝자락에 되풀이되던 현상인데 올해는 가을이 한가운데에 찾아왔다. 뭔가 원인이 있을 거라 짐작이 가는 바가 없는 것은 아니나 이미 몸이 안좋은 상태에서 굳이 고민거리를 만들고 싶지는 않다. 사람이 많은 곳에서 전염되었을 가능성이 가장 크지만.

 

여하튼 서서히 몸과 마음이 무기력해지기시작했다. 우선 식욕이 떨어지고 대화를 나누기가 힘들어지고 무엇보다 글을 쓸 수 없었다. 억지로라도 의자에 앉아 피씨를 켜고 자판에 손을 얹을 수는 있지만 그 어떤 문장도 칠 수가 없다. 사고의 회로가 막힌 것이다. 이럴 땐 시간이 가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곧 충분히 앓아야 한다는 말이다.

 

예전에는 이런 상황이 너무도 싫었지만 언제부턴가 나름이 노하우가 생겼다. 식사는 제대로 못하더라도 물만큼은 수시로 충분히 섭취하고 되도록 복잡한 일에서 벗어나 단순하게 말하고 행동해 버릇해야 한다. 일이 있는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할까 싶지만 가장 소중한 것은 자신 아니겠는가? 최소한 자신의 상태를 정직하게 알릴 필요가 있다. 가족에게만큼은. 일터에서는 불가능하더라도 집안에서만큼은 위로를 받아야 한다.

 

이렇게 시간을 보내다보면 슬며시 회복의 기미가 보인다. 나의 경우는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거다, 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에 앞서 음악, 구체적으로 클래시컬 뮤직이 듣고 싶다. 역설적으로 아플 때 가장 먼저 멀리하게 되는 것 또한 고전음악이다. 곧 내게 서양고전음악은 병이 들었다는 신호이자 회복의 신호탄을 알리는 팡파레다. 작곡가와 연주자는 그 때 그 때 다른지만 병상에서 일어나 처음으로 고르는 곡은 바하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이다. 그중에서도 슈트트가르트 채임버 오케스르파의 연주를 으뜸으로 친다. 살짝 재즈풍으로 편곡하여 듣는 내내 몸이 가벼워지는 느낌을 가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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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에 가끔 들르는 식당이 있다. 매주 거거나 아니면 주인과 인사를 나누는 단골은 아니다. 어쩌다 가끔 생각이 나면 간다. 예를 들면 요즘처럼 쌀쌀할 때, 수영을 하고 나서 먹으면 딱이다. 뜸을 너무 들였다. 칼국수집이다. 만두와 떡볶이, 제육덮밥 등도 같이 파는데 역시 칼국수가 최고다. 아주 맛이 있어서는 아니다. 직접 밀가루로 빚어 썰어내는 것을 눈앞에서 볼 수 있어서다. 한가지 흠이라면 주인 아저씨가 자꾸 코를 킁킁거린다는 점. 몇년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아주머니는 주방에서 모든 음식을 진두지휘한다. 아들은 주문과 배달 담당이다. 딸은 홀을 돌며 손님들의 주문에 응하고 필요한 것들을 제공한다. 한마디로 가족 식당이다. 썩 사이가 좋아 보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화가 난채 음식을 내오는 곳은 아닌 그저 덤덤하다. 나는 그게 좋다. 과잉된 친절이나 다운된 분위기 모두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예상보다 이런 식당을 찾기 힘들다. 설령 있다해도 지나치게 인테리어에 신경을 써 들어가기가 거북하다. 내가 원하는 것은 5개 정도의 테이블이 있는 소박한 국수집이다. 

 

이런 저런 상념에 빠져 칼국수를 시킨 다음 신문을 뒤적이다 젓가락 하나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나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숙이고 주웠다. 그런 나를 지켜보던 딸은 아무 말없이 그 젓가락을 받아 가지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 사이 나는 수저통에서 새 젓가락을 꺼내 탁자 위 냅킨 위에 올려놓았다. 이 모든 과정이 너무도 자연스러워 흔한 표현대로라면 물 흐르는 듯 했다. 드디어 칼국수가 나왔다. 멸치로 국물을 낸 기본 베이스에 탱탱한 면발. 그리고 호박과 당근 등의 채소가 얹혀진 전형적인 국수였다. 국물은 언제나처럼 가득이었다. 먼저 국물부터 맛을 보며 마음 속으로는 글을 쓰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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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진은 욕조에 몸을 담그고 책을 읽는 걸 자신만의 작은 사치라고 부른다. 사치 여부보다 어떻게 서적에 물을 묻히지 않는지가 더 궁금하지만, 나름의 비법이 있다고는 하는데 구체적인 방법은 알려주지 않았다, 뭐 꽤 근사하다는 생각은 든다. 큰 돈 들이지 않고 럭셔리한 느낌을 가진다는 건 멋진 일이니까.

 

내게도 소소한 사치거리가 있다. 자판기 커피도 그 중 하나다. 저녁식사를 하고 산책을 할 때면 습관적으로 자동판매기에서 밀크커피를 뽑아 마시는데 그 맛이 그렇게 좋을 수 없다. 아무리 좋은 향을 가진 고급 커피도 대신할 수 없는 안락함이 전해져온다고 할까?

 

걸어서 십분거리에 큰 산이 있는 것도 행운이다.매주 한차례 오르면서 스스로의 컨디션을 챙긴다. 언젠가 오버해서 한 주일에 두 번도 간 적이 있는데 역시 무리였다. 산 자체를 타는 것도 좋지만 역시 가장 즐거운 시간은 정상에서 먹는 식사다. 절에서 내주는 공양은 분위기만으로도 살아있음이 행복을 느끼게 해준다.

 

한 때는 인사동도 자주 들렀다. 유료도 있지만 대부분은 공짜로 볼 수 있는 전시회가 많아서다. 특히 개관일에 맞춰가면 작품설명도 듣고 다과도 즐길 수 있다. 먹을 걸 줘서라기보다는 대접을 받는 기분을 만끽할 수 있다. 한달에 한번은 꼭 가는 강남 순례도 빼놓을 수 없다. 다른 볼거리가 있어서가 아니다. 예스 24, 알라딘 중고서점 그리고 교보문고를 두루두루 돌아다니다 보면 반나절도 모자란다.

 

이렇게 적어놓고 보니 사치를 부리는데 중요한 건 돈이 아니라 시간임이 확실하다. 돈이 없다는 핑계로 여유로운 시간을 함부로 쓰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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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뉴스쟁이들은 개가 사람을 물어서는 화제가 안되고 사람이 개를 물어야 뉴스가 된다고 한다. 곧 흔한 일로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개로 인해 죽은 사람이 이름이 알려진 이이고 개 주인이 유명인이라면 사정은 달라진다. 우연도 이런 우연이 없다. 당연히 난리가 난다.

 

개에게 물린 적이 있다. 평상시처럼 동네를 산책하다 언뜻 덩치가 있어 보이는 개가 보여 본능적으로 몸을 피했지만 이미 늦었다. 개는 내 왼쪽 허벅지에 정확하게 이빨을 들이댔다. 뒤이어 개주인인 듯한 사람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개에게는 목줄도 없었고 입막음 장치는 더더군다나 없었다. 그 와중에도 개 주인은 피해를 입은 나보다 개를 걱정하고 있었다. 우리 아이는 사람을 물지 않는데. 마치 물린 책임이 내게 있는 듯한 말에 화가 치밀었다.

 

그러나 흥분하기보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바로 택시를 잡아 타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응급실에서 마주한 의사는 나를 칭찬했다. 괜한 시비로 시간을 끌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몰랐다고 말했다. 순간 안도하는 마음이 생기면서 그동안 참아왔던 울분이 순간적으로 복받쳤다. 아니, 그 큰 개를 가지고 다니면서 줄도 없이 다닙니까? 그는 죄송하다고는 했지만 표정으로 알 수 있었다. 전혀 미안하지 않다는 것을.

 

언제부턴가 애완동물들이 부쩍 늘었다. 혼자 사는 사람들이 늘면서 생긴 현상이다. 외로움을 달래줄 상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해한다. 그러나 원래 동물은 애완용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다. 자연에서 뛰어 놀고 먹고 자는 것이 생리다. 그런 동물들이 인위적으로 인간에게 길들여졌으니 알게모르게 스트레스카 차올랐을 것이 틀림없다. 게다가 오늘날 우리의 주거문화는 죄다 고층의 아파트먼트 문화 아닌가? 동물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에게는 최악의 생활환경이다. 이번 일을 계기로 애완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에 대한 일종의 자격제도가 도입될 필요가 있다. 이미 독일에서는 시행되고 있다. 자기 좋자고 키우는 동물이 사실은 해가 된다는 사실을 똑똑히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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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특히 훌륭한 작가가 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지하철안에서 <누군가는 알고 있다>를 읽다 눈에 뛰는 문장이 있어 왼쪽 위 페이지를 살짝 접어두었다. 르네 나이트는 소설가의 숙명을 정말 잘 알고 있구나, 라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글을 잘 쓰는 능력은 타고난다고들 한다.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다. 내 인생을 소설로 쓰면 장편으로 몇 십권을 쓸 수 있어, 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그럼 한번 써보세요라고 하면 과연 몇 페이지나 쓸 수 있을까? 한 쪽도 넘기기 힘들 것이다. 취직을 하기 위해 자기소개서를 써 본 경험이 있는 사람도 잘 알 것이다. 글로 자신을 표현하는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그런 힘든 일을 밥먹듯이 해내는 작가는 얼마나 위대한가?

 

그러나 작가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글솜씨가 아니라 용기다. 정확하게 말하면 자신을 온전히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저런 꾸밈이야 있겠지만 사업서가 아닌 이상 글은 자신의 일부이다. 자신을 꾸미고 속이고 적당이 은폐하려는 글은 어떤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한다. 때로는 적나라하게 그러면서도 품위있게 밀당을 할 줄 알아야 한다.

 

나는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를 모른 채 오랜 시간을 보냈다. 학교에서 배우는 거의 대부분이 무의미했다. 돈벌이를 위해 하는 모든 행위에 의미를 부여할 수 없었다. 한 때는 내가 부적응자인가 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물론 겉으로는 절대 티를 내지 않았다. 도리어 쾌활하고 대범한 성격인 것처럼 위장했다. 당연히 큰 문제없이 학교와 직장생활을 이어갔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서는 이건 아니다, 라는 위화감이 뙤리를 틀고 자리잡고 있었다. 문제는 그게 무엇인지 실체를 알 수 없었다는 점이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지금은 어느 정도 윤곽이 드러났다. 결국 내 진정한 의문은 늘 인간의 본성이었다. 사람들이 왜 그런 말을 하고 행동을 하는지가 궁금했다. 자의인가, 타의인가, 주변상황때문인가, 생물학적 이유인가?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매체는 소설이다, 라고 판단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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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7-10-20 1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심리학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ㅋ

카이지 2017-10-20 15: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그건 기본이죠. 답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