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관점에서 보면, 세상은 두 부류로 나눌 수가 있다. 코스프레 하는 자, 코스프레 안 하는 자.

 

코스프레 안 하는 자는 정말 그래서 안 할 수도 있고 처지가 안 되어서 못 할 수가 있을 게다. 코스프레 하는 자는 처지가 안되거나 정말은 아닌데 마치 먼저 그런 양 그 모양새를 띄는 걸 말하는 것이고.

 

이번에 자료를 만드는 데 총괄을 맡으라고 한 J군은 나보다 좀 어린 남성으로, 회사에서는 나름 촉망받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아직 부장 단 지가 얼마 안되었고 우리 부서도 아닌데 팀장이라는 작자가 지시를 내려서 회의에 들어오게 되었다. 원래 내가 정말 혐오하는 스타일인데... 일단 잘난 척 하고 목소리 짜악 깔면서 시시한 농담을 굉장히 유머있는 것처럼 끊임없이 지껄이는 유형이다. 주로 회사 동료를 부를 때 호칭 생략, 성 생략 하고 바로 이름을 불러 제낀다.

 

이번에 회의를 총괄하라고 했더니 자기가 임원이 다 된 것으로 착각을 한 모양이다. 물론 될 수도 있겟지. 하지만 아직은 절대 아니고, 보직도 없다. 그런데 회의 내내 뒤로 제껴 앉아서는 반말을 하면서 장표에 참견질을 한다.

 

"철수야, 저 장표좀 넘겨봐. 저거 설명좀 해봐, 철수야"

"영희야, 노트북 좀 가져와봐."

"아 뭐 내가 다 욕은 먹을게, 뭐 그런 거지. 걱정마."

"여기 법인카드 있으니 (지갑에서 포물선을 그리며 뽑아주면서) 저녁 사먹어."

 

그리고는 중간중간에 시시한 말을 지껄인다. 친한 척 하면서.

 

"철수야. 야야. 어제 저녁 어땠냐. 좀 그렇지 않았냐."

"영희야. 휴가야? 어디? 좋은데? 일 안하고 어딜 가 임마..."

 

그러면서 키득거린다. 저게 미쳤나.

 

나는 정말 꼴도 보기 싫고 목소리도 듣기 싫어서 시종일관 '개김' 자세를 유지했고 덕분에 그 회의에서 빠질 수 있었다. 나 스스로는 매우 잘 되었다, 앓던 이 빠진 느낌이다. 그러고 있지만, J군이 여기저기 내 욕을 해대고 있다는 소문이 들린다. 허허.

 

세상은 왜 그런 사람을 냅두는 걸까. 진실하고 자기 직분에 최선인 사람들은 바보라고 하고 되도 않은 코스프레나 하면서 목소리에 꽉 힘주고 가오나 잡는 그런 인간들은 능력있다 칭해진다는 생각이 든다.

 

어제 끝난 <나의 아저씨>라는 드라마는, 처음부터 끝까지 본 적은 없지만, 동영상 모음들로 늘 보고 있었다. 내 주위 어딘가에 있는, 너무나 순박하고 착하고 평범한, 하지만 능력은 없는 잘 풀리진 않은 보통사람들의 사는 모습에 가슴이 아려와서 눈물을 흘리며 보았다. 그걸 보면서 진실한 사람들이 어떤 대접을 받는 지에 대해서 뼈저리게 절감하고... 하지만 그럼에도 열심히 자기를 치유해가며 서로 위해가며 도와가며 살아가는 모습에 감동을 받았다. 어제 마지막회에서는 눈물을 펑펑... 그래도 해피엔딩이라 안심했다. 대단히 극적으로 잘 되고 멋지고 그런 게 아니라서 더 안심했다.

 

누구에게나 고비는 있는 법이다. 살다보면, 죽을 만큼 힘들 때도 있고... 주변의 사람들에게 힘을 얻어 이겨낼 수 밖에 없는 그런 때... 그래서 나는 그렇게 코스프레 하면서 끊임없이 자기를 내세우고 싶어하고 남들 위에 군림하고 싶어하고 잘난 척 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보면, 솔직히 역겨움을 느낀다. 겸손할 줄 알아야 할텐데. 사는 게 그렇게 매번 그리 살도록 두지 않을텐데. 도대체 넌 뭘 믿고 그렇게 네 수준보다 네가 더 낫다고 착각하는 너를 용서하며 사는 거니...

 

금요일이다. 얼른 집에 가서 발뻗고 자면서 마음을 힐링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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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18 16: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5-18 17: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Forgettable. 2018-05-18 21: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떤 스타일인지 단번에 떠올랐어요!! 어제 지나치면서 길에서 마주친 사람이 딱 그랬는데 모르는 사람인데도 와 기분 나빠지던데 같이 일하셔야 한다니 ㅠㅠ 정말 안타깝네요

비연 2018-05-19 12:55   좋아요 0 | URL
그쵸그쵸.. 이게 얼굴과 분위기만 봐도 똬악 느낌이 오는... ㅠ 정말 괴롭습니다 흑
 

 

 

 

 

 

 

 

 

 

 

 

 

 

 

저자의 약력부터가 독특하다. 국립타이완대학교 역사학과를 졸업한 후 줄곧 '직업 독자' 였고 독서와 독서 관련 글쓰기에 전념하고 있다고 하니. 그의 부인도 소설가이고, 유명한 시나리오 작가의 제부이고... 등등등, 집안 자체도 글과 관련한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매우 흥미롭기도 하고 부럽기도 한 사람이다. 네 명의 작가가 한 집에 살아서 자기 책상이 없는 탓에 매일 아침 단골 카페에 출근해서 오후 다섯 시까지 책읽기와 글쓰기로 하루를 보낸다.. 이런 인생도 있구나!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인류의 '낭비', 마음을 아프게 할 정도의 낭비에 관해 생각해볼 수 있다. 우리 인간이 평생 열심히 배우고 익힌 성과는 삶이 끝나는 순간. 무의 상태로 돌아간다. 칼비노처럼 똑똑하고 존 스튜어트 밀처럼 박식하며 칸트처럼 치밀한 사상을 지녔다 해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인류가 영혼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도 이처럼 터무니없는 낭비에 대한 초조함 때무에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되었다. 어떻게 이처럼 간단하게 모든 것이 무로 돌아갈 수 있단 말인가. 이렇게 착실하고 힘들게 얻은 사유의 성과들은 어떤 초월적 메커니즘과 특별한 잔류의 방식을 갖기 마련이다. 그리고 최소한의 희미한 기억과 흔적이 남는다. 하지만 우리가 갓 태어난 아기들의 반짝이는 눈에서 보는 것들, 중국 소설가 아청의 표현대로 하자면 '아주 깨끗하여 아무것도 없는' 것들은 전부 다시 새롭게 시작되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무력하게 이것이 조물주가 악의적으로 만들어놓은 계책이리라고 믿는 수밖에 없다. 우리는 항상 기억의 강 같은 구식 기억청소 장치를 통해서만 익숙한 인간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p73-p74)

 

아. 내가 늘 허무하게 생각하는 부분을 잘 짚어낸 문장이 아닐 수 없다. 사람의 머릿 속에 든 그 하나하나의 우주들이 죽음과 동시에 다 사라진다니. 그것들은 도대체 다 어디로 가는 것인가... 저자는 그래서 문자와 책이 중요하다고 얘기한다. 먼저 죽어도 기록으로 남겨두면 완전히 사라지는 게 아니다. 후세에 길이길이 남겨져 제로 베이스가 아닌 '거인의 어깨 위에 앉아'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책에 대해서, 기록에 대해서, 문자에 대해서, 그 효용성을 나름 논리적으로 잘 정리한 듯.

 

 

... 다름 아니라 아예 이런 비교를 포기하고 독서 자체를 일종의 습관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아울러 가능한 한 독서를 보르헤스가 말한 '향수'의 경지에 놓고 신경질적으로 수확을 헤아리지 않는 것이다. 나태하게 그다지 믿을 만하지 못한 계시가 머리에 떠오르기를 기다리지도 말고, 수시로 투입과 산출의 손익 균형을 세세하게 계산하지도 말아야 한다. 그리하여 독서가 몰라도 행할 수 있는 일종의 의식이 되게 하는 것이다. 심지어 독서를 호흡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언제든 책을 몸에 지니고 다니면서 틈만 나면 펼쳐서 읽고 잠들기 전에도 펼쳐 갈수록 잠을 쉽게 이루지 못하는 현대인들의 수면제로 삼는 것이다. 가장 좋은 것은 매일 책을 읽지 않으면 샤워를 하지 않거나 양치질을 하지 않은 것 같은 불편함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p120)

 

이건 뭐. 알라딘 서재 하시는 분들은 이렇게 하지 말라고 해도 이미 하고 있을 것 같다. 흐흐.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뭔가 잃어버린 것 같고 인생에서 정말 소중한 부분을 지나치며 사는 기분이 드는... 뭐 그런 것. 물론 요즘의 나는 이 수면제로서의 기능이 너무 극대화되어 책을 얼굴에 자주 떨어뜨리는 바람에 큰 책은 들지 않는다는 신념 아닌 신념을 구가하고 있지만 말이다. 허허.

 

 

나는 독자들이 눈을 감고 책을 고르는 게 모두 옳다거나 책은 다 좋은 것이고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이렇게 좋은 일은 절대로 없다. 반대로 책의 세계는 만신창이가 된 실존 세계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일고의 가치도 없는 쓰레기 같은 책이 너무나도 많다. 그렇다고 그런 책들이 사라져야 한다거나 전부 스린에 있는 폐지 공장으로 보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쓰레기 같은 책들도 나름대로 생존하여 유전될 권리를 가지고 있다. 언젠가는 가려지지 않는 질병의 증상으로서 진실을 드러내면서 우리가 이 세계를 얼마나 형편없는 모습으로 만들어놓았는지를 증명하는 증거물이 될 수 있다. 우리 실존세계에 쓰레기 같은 인간이 많듯이 이런 책들도 양도할 수 없는 생존의 권리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무조건 원래의 모습으로 환원시켜 흙먼지로 돌아가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p136)

 

맞는 말이다. 간혹, 서점에 가서 보이는, 손으로 싹 쓸어버리고 싶은 책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지만, 책의 세계도 인간세계와 마찬가지라서, 다 좋을 수는 없는 것이고 내 눈에 좋아 보이지 않는 것도 그 존재 이유가 있는 것이고. 그렇게 기다리고 참으면 언젠가는 더 나은 방향으로 나갈 것이라고 믿는 게 중요한 것 같다...

 

책에 미쳐 사는 사람의 글을 읽는 것은 늘.. 즐거움이고 부러움이다. 그렇게 줄곧 책을 사랑하고 글을 사랑하며 사는 인생이 가능하다는 것에도 놀랍고. 그렇게 만들어진 철학을 함께 하는 것은, 독자로서의 기쁨이기도 하다. 끝까지 재미나게 읽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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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13 23: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5-14 08:3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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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 그리고 한 인생
피에르 르메트르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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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특하고 재미있는 책이다. 열두살 아이가 우연히 다섯살 동네 아이를 죽이게 되고 그 이후에 벌어지는 심리적 묘사와 마을의 변화, 그리고 십이년이 지나 다시 찾아온 위기와 마지막의 반전까지.. 숨쉴틈 없는 전개를 보이면서도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흡인력이 있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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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서점 국내 미출간 소설 3
크리스토퍼 몰리 지음, 박선경 옮김 / 현인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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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이고 헌책방 이야기이고, 무엇보다 책을 너무너무 사랑하는 미프린씨 이야기라 좋았고 책에 얽힌 음모가 밝혀지기까지의 과정이 흥미진진했다. 다만, 번역이 매끄럽지 못해서 집중이 안 되고 자꾸 책을 덮고 싶게 만든다는 게 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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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간 속초는 역시... 아름다왔다.

낙산사와 설악신흥사... 그리고 영랑호와 범바위...

볼 곳도 많고 먹을 것도 많고... 공기도 맑고... 바다는 푸르고...

 

다음에 다시 가서 좀더 누리고 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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