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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삼관 매혈기
위화 지음, 최용만 옮김 / 푸른숲 / 2007년 6월
평점 :
허삼관 매혈기. 며칠동안 나의 일상을 지배한 책이다. 허삼관이라는 인물의 인생에 흠뻑 빠져 몇 날 며칠 웃음과 눈물로 범벅이 되어 지냈다. 어찌 보면 그냥 그런, 평범하다기 보다 오히려 우매하기까지 한 중국인 한 사람의 고단한 인생이 내게 왜 이리 큰 의미로 다가오는가...왜 이렇게 가슴이 아프게 느껴지는가...싶다가도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를 느낄 때마다 그냥 속없이 몰두하게 되었더랬다.
허삼관이란 사람. 피를 판 돈으로, 결혼을 하고 아들이 때린 아이의 병원비를 대고 한번 잔 여자에게 선물을 하고 흉년에 가족들에게 맛난 음식을 먹이고 아들의 상사에게 대접할 끼니와 선물을 사고 그리고 아들에게 용돈을 준다. 그리고 자기 자식도 아닌 큰 아들이 중병에 걸리자 삼개월동안 너댓번이나 피를 팔며 병원까지 간다...그리고 그는 늘그막에 다 편해졌는데 노인 피는 사지 않겠다는 신참 혈두의 말에 "집안에 일이 생길 때마다 매혈에 의지해서 문제를 해결했는데, 이제는 자신의 피를 아무도 원하지 않다니.... 집에 무슨 일이 또 생기면 어떻게 하나?" 하며 눈물을 흘리는, 그런 사람이다.
중국의 급변하는 근현대의 역사 속에서 가난하고 배운 거 없고 평생 공장 다니고 농사 지어봐야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어려운 상황을 이 어리석은, 하지만 마음결 고운 허삼관은 자신의 피를 팔며 위기를 넘기곤 한다. 척박한 민중의 삶에서 믿을 거라고는 내 몸 하나요 퍼도 퍼도 마르지 않을 것 같은 피 뿐인 것이다. 하지만 이 소설의 진수는 이러한 어려운 생활을 매우 유머러스하면서도 정감어리게 그린다는 데 있다.
가장 아끼는 큰 아들이 사실은 부인이 엉겁결에 잠자리를 한 동네 아저씨의 아들임이 밝혀지면서 질투와 배신감에 사로잡혀 비아냥 거리기도 하고 아들에게 친아들이 아니다 주문처럼 외곤 하지만, 가출했던 큰 아들을 찾아내자 쉴새없이 욕을 퍼부으면서도 들쳐 업고 국수 집으로 향하는 모습은 입가에는 웃음이 배이고 눈에는 눈물이 나게 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아버지, 우리 지금 국수 먹으러 가는 거예요?"
허삼락은 갑자기 욕을 멈추고 온화한 목소리로 대답해 주었다.
"그래."
부인인 허옥란이 문화대혁명의 와중에 결혼 전 있었던 잘못으로 비판을 받게 되고 급기야는 집안 내에서도 비판을 해야 한다고 하자 아들과 허삼관이 모여 자리를 만든다. 허삼관은 아내의 죄를 낱낱이 알리게 하면서도 자신도 한번 실수를 했음을 말하며 "너희들이 만약 너희 엄마를 증오한다면, 나도 마땅히 예외가 될 수 없다는 뜻이다. 나도 너희 엄마랑 똑같은 놈이니까." 이렇게 감싸안는다. 그 착한 마음 씀씀이가 내 마음 속 깊이까지 스며들어 온다.
많은 굴곡이 있은 후에 인생은 흘러 흘러 육십이 된 허삼관이 피를 팔러 갔다가 냉대를 당하고 아들들에게서도 핀잔을 당하자 그의 아내 허옥란이 남편 손을 끌고 음식점에 가서 먹고 싶다는 황주와 돼지간볶음을 푸짐히 시켜놓은 채 병원의 신참 혈두를 욕해대는 마지막 장면은 정말 멋진 마무리가 아닐 수 없다. 힘들고 어렵게 살아온 부부가 서로에게 의지가 되는 늘그막이 이렇게 잘 그려질 수 있는 것인지. 그리고 의미심장한 허삼관의 마지막 대사는 압권이었다.
이 말을 들은 허삼관이 허옥란에게 근엄하게 한마디 건넸다.
"그걸 가리켜서 좆털이 눈썹보다 나기는 늦게 나지만 자라기는 길게 자란다고 하는 거라구."
인생은 누구에게나 힘겨운 것이고 늙어간다는 것은 슬픈 일일 게다. 하물며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민중의 삶이야 말할 필요도 없겠다. 예전 '아큐정전'이란 책을 읽었을 때도 비슷한 느낌을 가졌더랬다. 그러나 허삼관이라는 인물이 우리에게 무겁게만 다가오지 않는 것은, 마음 여리고 가족 사랑할 줄 알고 원칙에 따라 살아가려 애쓰고 자기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는, 바로 우리 주위의 그 누군가와 엇비슷한 느낌을 주어서이고 또 인생에서 느낄 수 있는 페이소스를 안겨주기 때문인 것 같다.
난 이번 가을, 허삼관 아저씨를 만나, 그 가족들 허옥란 아줌마, 일락이 이락이 삼락이 세 형제와 그 동네 사람들을 만나 정말 오랜만에 울어 보았다. 불쌍해서도 비참해서도 아니고 우리네 인생이 주는 그 고달픔과 쓸쓸함이 가슴 저미게 느껴져서였다. 아마도 그건 그들을 생각해서라기 보다는 그들을 통해 나를, 지금의 우리 인생들을 돌아보게 되어서인지도 모른다...많은 사람들이 이 느낌에 동참했으면 하는 바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