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
텐진 갸초(달라이 라마).빅터 챈 지음, 류시화 옮김 / 오래된미래 / 2004년 9월
평점 :
일시품절


달라이 라마에 대한 글은 처음이다. 사실 이런 류의 글들을 많이 접했지만 달라이 라마처럼 너무나 유명한 사람의 책에는 오히려 선듯 손이 가지 않았다. 이 책에도 잠시 나오지만 승려라기 보다는 오히려 정치가나 외교관과 비슷한 그 분의 이미지로 인해 글의 내용에 신뢰가 갈까 하는 노파심이 앞서서였다. 이 책을 읽게된 것도 참으로 우연챦은 기회였고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읽어내려갔었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오해였다. 아니 그랬던 것 같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는 감탄하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달라이 라마와 티베트 불교, 그리고 티베트라는 나라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중국에게 어느날 주권을 빼앗기고 많은 괴로움을 당한 나라라는 점에서 어쩌면 우리나라와 비슷할 수도 있는 배경을 가진 이 나라의 국민들과 지도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를 강조한다. 말은 쉽다, 용서.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시간들을 증오와 분노, 복수감을 마음에 품은 채 살아가고 있는가를 돌이켜보면 할 말이 없어진다. 거창하게 어느 나라를 미워하고 어느 민족을 증오하기보다는 일상에서 마주치는 개개인들에게 섭섭함과 미움을 불쑥불쑥 느끼며 살아가는 작은 사람으로서의 나는 부끄럽기 짝이 없다.

달라이 라마는 말한다. 상호의존이라는 것에 대해서. 모두가 각각 개별적인 존재인 것 같으나 다 연결되어 있는 뗄래야 뗄 수 없는 존재들임을. 그래서 당신의 이웃을 미워하고 파괴하는 것은 결국 나를 파괴하는 것과 같은 것임을 역설한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돕고 다른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는 행위는 나를 행복하게 하는 길이며 이것이 지혜로운 삶의 자세임을 강조한다.

하지만 그것이 쉬운 일은 아니라는 것도 얘기한다. 용서라는 것을 마음 속 깊숙이 인지하고 자연스럽게 하기까지는 오랜 시간동안 마음의 수행을 해야 하고 영적인 성장을 이루어나가야 한다는 것을. 그러나 그것이 어떤 선지자들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일반인들도 스스로를 갈고 닦을 때 충분히 이루어낼 수 있는 상태임을 자신의 경험을 비추어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삶의 목적인 행복해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한다. 용서와 자비. 이것을 가질 때 가장 커다란 행복이 온다고.

읽는 내내 그 사상에 공감하면서도 어렵다 어렵다 했다. 사람은 누구나 상처를 입고 살게 마련이다. 그것이 개인에게서 받는 것일 수도 있고 집단에게 당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그 상처를 속에 품는 대신 발산되는 것은 미움과 복수의 감정일 것이다.  그것을 인내하고 참으며 상대를 용서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알고 있다. 그런데도 달라이 라마는 할 수 있다고 한다.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을 용서하기 위해서는 내가 나를 용서해야 하고 우리 모든 인간이 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 애쓰는 존재들이며 누구나 죽을 수밖에 없는 공동운명체임을 인지해야 하는 것 같다. 달라이 라마는 그것을 '공'이라는 단어로 요약한다. 책의 말미에 그 분은 이런 말들을 적어 두고 있다.

다른 인간 존재에 대해 분노와 미움, 적대적인 감정을 가지고 싸움에서 승리를 거둔다 해도, 삶에서 그는 진정한 승리자가 아니다. 그것은 마치 죽은 사람을 상대로 싸움과 살인을 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인간 존재는 모두 일시적이며, 결국 죽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전쟁터에서 죽는가, 병으로 사망하는가는 별개의 문제이다. 어쨌든 우리가 적으로 여기는 사람들은 언젠가는 죽기 마련이고, 그러므로 결국 사라질 사람들을 죽이고 있는 것과 마친가지다. 진정한 승리자는 적이 아닌 자기 자신의 분노와 미움을 이겨낸 사람이다.

어렵겠지만, 불가능해보이지만 스산해지는 계절에 이 말을 담아두고 노력해보려 한다. 무엇보다 어차피 스러질 인간들에 대해 미움이라는 감정을 가지는 자체가 참으로 허망하다는 생각에, 그리고 결국 나의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라도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염려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에 한번 해보고자 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나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겠다. 솔직히 도덕경 같은 글에 별로 내켜하지 않는 나였지만, 달라이 라마의 이 글들은 경험에서 우러나온 철학이라 마음에 와닿을 수 있는 것 같다. 무엇보다 이 글을 엮은 사람이 티베트를 무력으로 진압한 중국의 국민이며 그럼에도 달라이 라마의 가장 절친한 친구 중의 하나라는 사실만으로도 믿고 따를 수 있겠다.

이런 책들이 요즘 참으로 많이 나오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한번 권해보고 싶은 책이다. 아울러 달라이 라마 뿐 아니라 티베트 사람들을 직접 보고 그들의 선한 의지를 확인하고프다는, 강렬한 열망을 마음 속에 불러일으키는 책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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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르바나 2004-11-23 0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체게바라, 마더테레사 그리고 달라이라마 같이 유명한 분들에 관한 책이 서점에 가면 널려 있어서 우리는 읽지는 않아도 읽은 것 같은 생각을 하며 살기 쉽지요.

하기는 상술로도 짜집기한 책들이 진열되어 있으면 정작 좋은 책들을 선택하기가 쉽지 않기도 하지만요.그러나 비연님의 리뷰로 본 달라이라마의 책 '용서'가 새로운 울림을 주는군요.

비연 2004-12-01 2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니르바나님...그런 것 같아요. 오히려 너무 유명한 사람의 책에는 선듯 손이 안 가는 이유가...흔하게 보이니까 그 소리가 그 소리일 것 같고 이 사람 저 사람 안다고 쓴 책이 별로 감흥이 없을 수도 있고...(쩝) 하지만 그 중에서 이 책은 달라이 라마의 진정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듯 하여 좋았습니다...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것들에 대하여
조은 지음, 최민식 사진 / 샘터사 / 2004년 9월
평점 :
품절


사진이 주는 질감은 그림과는 다른 무엇이 있다. 그림이나 사진이나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을 느낄 수 있다는 공통점이 있기는 하나...사진은 보다 사실적이다. 그래서 그냥 그렇게 지나칠 수 없게 만들곤 한다. 가끔씩 보이는 최민식 작가님의 사진들도 그러했다. 흑백이라는 색조 속에 묻어나는 삶의 질곡, 인생의 회한, 고단함, 하지만 잃지 않으려 하는 따스함, 부드러움, 그래도 인생은 살아갈 만 하다고 말하는 작가의 생각....스쳐가지만 보고 나면 한동안 머리 속을 떠나지 않는 강렬함까지.

가난한 아이와 장애를 가진 남자와 몸 속에 깊은 골이 파고든 노인들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아 좋다..이 느낌은 가지기 힘들다. 최민식이라는 작가. 인생이 뭔지 아는 분이시구나. 그의 그 따뜻한 시선이 나에게까지 전달되어 가슴 속에 훈훈함을 더하는구나..싶다가도 무엇인가 마음 한 켠 짓눌러지는 것이 느껴져 막막해진다. 뭘까, 그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란 책 제목이 있지만, 사진들은 내게 결코 존재한다는 것이 가볍지 않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 같다. 때론 버거우리만치 무겁고 때론 모르고 지냈으면 싶으리만치 아리게 느껴진다. 그래서 이 사진집을 보는 내내 사실 괴로왔다. 그건 그들의 인생이 힘들여보여서가 아니라 사람이 산다는 것에 대한 전반적인 회한과 허망함이 뼛속까지 파고 들어와서였다...

그럼에도 이 사진집을 모두에게 권하고 싶다면....그건 사람이 살면서 감정 저변에 깔아두고 살아야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려주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무겁고 아무리 막막하고 아무리 서러워도 인간이라면 삶에 대해서 느껴봐야 할 깊은 속내를, 이 사진집은 큰 소리 내지 않고 알려주어서 더 뼛속까지 스미니까. 그래서...말해주고 싶다. 한번 진지하게 보라고.

시인의 덧글이 간혹 어색하게 느껴지곤 한다. 어쩌면 나의 느낌과 간혹 어긋나 지는 게 받아들이기 어려워서일 수도 있다. 또...제목 하나에 여러 사진을 나열하고 그것으로 스토리를 엮으려고 하는 작위성이 가미되어서인지도 모른다. 여백의 미가 좀 더 있었더라면 더 좋았겠다. 모든 사진에 다 글을 받치지 않아도 빈 자리만으로 우리에게 글과 글 사이를 채울 수 있는 여유를 줬더라면...하지만 시인이 사진에 대해 가지는 깊은 감수성까지 외면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어차피 글은, 자신의 생각이고 느낌이며 거기에 모두가 공감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래서 느끼는 것은...글이라는 게 사람의 사고를 많이도 한정짓는구나 하는 깨달음이다. 사진을 보는 중에, 말로 표현할 수도 글로 나타낼 수도 없으나 나의 마음 속에서 뭉게뭉게 피어오르던 그 숱한 느낌의 파편들을 떠올려보면... 입밖으로 내지도 손끝으로 쓰지도 못하는 어떤 무한함이 느껴진다.

그래서...사진이 좋다. 무엇보다 약한 사람들에게(스러져가는 육체를 가진 인간은 모두 약한 존재일 수 밖에 없다) 한없는 애정을 가지고 대하는 노작가의 사진이 더욱 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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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4-11-17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책을 읽으신 분들 대다수가 전반적으로 만족하시면서도 사진을 가두어버린 글에 대하여는 실망하신 모양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였고요. 삶은 가끔 여백만으로도 충분한 여운을 가진다는 사실을 시인이 좀더 알아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잘 쓰셨네요.

비연 2005-04-26 2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다들 비슷한 느낌이었나봐요..
시인을 폄하하기 보다는..어쩔 수 없는 언어의 한계이겠지요...
 
왜 사는가 1 - 무량 스님 수행기
무량 지음, 서원 사진 / 열림원 / 2004년 10월
평점 :
절판


왜 사는가...

누구나 살면서 이런 의문 한번 안 가져본 사람이 있겠는가. 그저 그런 평범한 사람이라도, 위세 부리며 사는 고관대작이라도 어른이나 노인이나 혹은 아이나...어쩌면 머릿 속에서 한시도 떠나지 않는 속깊은 질문일 지도 모른다. 그래서 종교에 심취하는 사람도 있고 뭔가에 몰두해서 바빠서 잊고 지내려는 사람도 있고...하지만 해결되지 않는 화두는 늘 우리 맘 속에서 한 자리 차지하고 앉아 불쑥불쑥 솟아오르곤 한다.

이 책의 저자는 미국인이고 좋은 집안과 학벌을 뒤로 한 채 승려의 길을 걷고 있는 무량스님이라는 분이다. 그는 어렸을 때 어머니의 죽음을 겪었고 살면서도 항상 존재의 본질에 대한 물음에 충실히 답변하고자 애썼다. 끊임없이 찾고 헤매던 중 숭산스님이란 스승을 알게 되고 그의 가르침을 좇아 스님이 되었으며 지금은 미국의 서부 사막 어디에서 절을 10년째 지으며 수행하고 있다. 이 책은 그런 저자의 정신적인 궤적과 경험들을 차분한 어투로 풀어나가고 있다.

읽고 있으면 무량스님이 느꼈던 고민들을 함께 하게 되고 깨달음을 얻어 구도자의 길을 걸으면서 또한 알게 되고 느끼게 되는 많은 생각들을 같이 하게 된다. 그건 이 책이 자신의 어렸을 때부터의 생과 그 속에서 조금씩 커가던 물음들, 그리고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방황하던 시절들을 시간순으로 잘 풀어나가고 있기 때문일 거다. 어떤 어려운 철학적인 문답이 있다거나 고상한 말들이 난무하여 알듯 말듯 한 기분으로 책을 읽어나가기 보다는 단순하고 누구나 접할 수 있는 상황들 속에서 무량스님이 취한 선택들에 충분히 공감하면서 볼 수 있는 책이다. 그래서...왜 사는가 라는 문제에 대해서도 한번 더 진지하게 생각하게 한다.

종교에 관계없이 인간 본연의 질문에 대해 자신에게 재삼 물어보게 하는, 그리고 이 책의 가르침처럼 'Only Do'의 생활에 대해서도 실천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게끔하는 좋은 책이다. 요즘 가을의 스산함 속에서 이런 종류의 책들을 많이 접하고 있는데, 읽을수록 안정감있는 정서를 획득하게 되는 것 같다. 그것은 어떠한 답을 홀연히 알아내어서가 아니라,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의 목소리 속에서 외롭지 않음을 느끼고 진리에 한 발자욱이라도 다가가고 있다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그래서...참 든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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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4-11-08 0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연님은 왜 사시나요?

비연 2004-11-08 1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쎄요...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계속 고민하고는 있습니다..

니르바나 2004-11-11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연님도 보셨군요.

비연 2005-03-21 2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니르바나님. 님이 요즘(?) 읽고 계시는 책들이 저의 그것들과 많이 일치하여
참 좋습니다...넘 반갑구요...^^
 
허삼관 매혈기
위화 지음, 최용만 옮김 / 푸른숲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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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삼관 매혈기.  며칠동안 나의 일상을 지배한 책이다. 허삼관이라는 인물의 인생에 흠뻑 빠져 몇 날 며칠 웃음과 눈물로 범벅이 되어 지냈다. 어찌 보면 그냥 그런, 평범하다기 보다 오히려 우매하기까지 한 중국인 한 사람의 고단한 인생이 내게 왜 이리 큰 의미로 다가오는가...왜 이렇게 가슴이 아프게 느껴지는가...싶다가도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를 느낄 때마다 그냥 속없이 몰두하게 되었더랬다.

허삼관이란 사람. 피를 판 돈으로, 결혼을 하고 아들이 때린 아이의 병원비를 대고 한번 잔 여자에게 선물을 하고 흉년에 가족들에게 맛난 음식을 먹이고 아들의 상사에게 대접할 끼니와 선물을 사고 그리고 아들에게 용돈을 준다. 그리고 자기 자식도 아닌 큰 아들이 중병에 걸리자 삼개월동안 너댓번이나 피를 팔며 병원까지 간다...그리고 그는 늘그막에 다 편해졌는데 노인 피는 사지 않겠다는 신참 혈두의 말에 "집안에 일이 생길 때마다 매혈에 의지해서 문제를 해결했는데, 이제는 자신의 피를 아무도 원하지 않다니.... 집에 무슨 일이 또 생기면 어떻게 하나?" 하며 눈물을 흘리는, 그런 사람이다. 

중국의 급변하는 근현대의 역사 속에서 가난하고 배운 거 없고 평생 공장 다니고 농사 지어봐야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어려운 상황을 이 어리석은, 하지만 마음결 고운 허삼관은 자신의 피를 팔며 위기를 넘기곤 한다. 척박한 민중의 삶에서 믿을 거라고는 내 몸 하나요 퍼도 퍼도 마르지 않을 것 같은 피 뿐인 것이다. 하지만 이 소설의 진수는 이러한 어려운 생활을 매우 유머러스하면서도 정감어리게 그린다는 데 있다.

가장 아끼는 큰 아들이 사실은 부인이 엉겁결에 잠자리를 한 동네 아저씨의 아들임이 밝혀지면서 질투와 배신감에 사로잡혀 비아냥 거리기도 하고 아들에게 친아들이 아니다 주문처럼 외곤 하지만, 가출했던 큰 아들을 찾아내자 쉴새없이 욕을 퍼부으면서도 들쳐 업고 국수 집으로 향하는 모습은 입가에는 웃음이 배이고 눈에는 눈물이 나게 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아버지, 우리 지금 국수 먹으러 가는 거예요?"
허삼락은 갑자기 욕을 멈추고 온화한 목소리로 대답해 주었다.
"그래."

부인인 허옥란이 문화대혁명의 와중에 결혼 전 있었던 잘못으로 비판을 받게 되고 급기야는 집안 내에서도 비판을 해야 한다고 하자 아들과 허삼관이 모여 자리를 만든다. 허삼관은 아내의 죄를 낱낱이 알리게 하면서도 자신도 한번 실수를 했음을 말하며 "너희들이 만약 너희 엄마를 증오한다면, 나도 마땅히 예외가 될 수 없다는 뜻이다. 나도 너희 엄마랑 똑같은 놈이니까." 이렇게 감싸안는다. 그 착한 마음 씀씀이가 내 마음 속 깊이까지 스며들어 온다.

많은 굴곡이 있은 후에 인생은 흘러 흘러 육십이 된 허삼관이 피를 팔러 갔다가 냉대를 당하고 아들들에게서도 핀잔을 당하자 그의 아내 허옥란이 남편 손을 끌고 음식점에 가서 먹고 싶다는 황주와 돼지간볶음을 푸짐히 시켜놓은 채 병원의 신참 혈두를 욕해대는 마지막 장면은 정말 멋진 마무리가 아닐 수 없다. 힘들고 어렵게 살아온 부부가 서로에게 의지가 되는 늘그막이 이렇게 잘 그려질 수 있는 것인지. 그리고 의미심장한 허삼관의 마지막 대사는 압권이었다.

이 말을 들은 허삼관이 허옥란에게 근엄하게 한마디 건넸다.
"그걸 가리켜서 좆털이 눈썹보다 나기는 늦게 나지만 자라기는 길게 자란다고 하는 거라구."

인생은 누구에게나 힘겨운 것이고 늙어간다는 것은 슬픈 일일 게다. 하물며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민중의 삶이야 말할 필요도 없겠다. 예전 '아큐정전'이란 책을 읽었을 때도 비슷한 느낌을 가졌더랬다. 그러나 허삼관이라는 인물이 우리에게 무겁게만 다가오지 않는 것은, 마음 여리고 가족 사랑할 줄 알고 원칙에 따라 살아가려 애쓰고 자기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는, 바로 우리 주위의 그 누군가와 엇비슷한 느낌을 주어서이고 또 인생에서 느낄 수 있는 페이소스를 안겨주기 때문인 것 같다.

난 이번 가을, 허삼관 아저씨를 만나, 그 가족들 허옥란 아줌마, 일락이 이락이 삼락이 세 형제와 그 동네 사람들을 만나 정말 오랜만에 울어 보았다. 불쌍해서도 비참해서도 아니고 우리네 인생이 주는 그 고달픔과 쓸쓸함이 가슴 저미게 느껴져서였다. 아마도 그건 그들을 생각해서라기 보다는 그들을 통해 나를, 지금의 우리 인생들을 돌아보게 되어서인지도 모른다...많은 사람들이 이 느낌에 동참했으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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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2004-10-20 2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잘 읽고 갑니다..

비연 2004-10-20 2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홋! ^^; 올리자마자 글 남기셨네요~

플레져 2004-10-21 0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나면서도 슬픈 이야기죠. 황주와 돼지간볶음도 엄청 먹고 싶었어요. 추천합니다!

비연 2004-10-21 0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황주와 돼지간볶음이 어떤 맛일까...소설 읽으면서 계속 궁금했던 거였죠^^
아직도 여운이 많이 남는 이야기인 듯, 가슴 한구석에 뭉게뭉게 아릿함이...
 
왼쪽으로 가는 여자, 오른쪽으로 가는 남자
지미 지음, 이민아 옮김 / 청미래 / 200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그 해 겨울은 몹시 추웠고
축축한 공기가 온 도시를 짓눌렀다.
하늘은 우중추했고, 햇살 환한 날은 좀처럼 없어
걸핏하면 알지 못할 우울함에 젖어들곤 했던 나.
길을 걷다가 문득 울고 싶은 마음에 화들짝 놀란 적도 많았다...

이 책은 이러한 글로 시작한다. 예쁜 그림들에 혹해서 이 책을 고른다면 그건 오산이다. 많지 않은 글들과 그림으로 가득찬 얇은 책에 불과하지만 그 속에는 팍팍하게 살아가고 있는 현대 도시인들의 생활 구석구석을 아주 절묘하게 묘사하고 있어 아..이거 내가 늘 느끼던 거쟎아 하는 공감을 계속 지닌 채 책장을 넘기게 한다. 그리고 다 읽고 나면 어느 새 새어나오는 한숨. 참 쓸쓸하지만 참 아름답기도 하네...싶다.

항상 왼쪽만 향하는 여자와 오른쪽만 향하는 남자. 그들은 같은 공간에서 같은 시간대를 누리고 있지만 만나지 못하는 평행선이다. '도시의 수많은 사람들은 대부분 줄곧 같이 살면서도 평생을 서로 알지 못하고 지내는 것은 아닐까..' 생계를 위해 약간의 일들을 하고는 있지만 그 속에서 큰 의미를 발견하고 있지는 않다. 그저 멍하니 혹은 공허하게 하루하루를 살아나가고 외로운 짐승들과의 대화로 적적함을 달랜다. 아무 재미없는 삶 속에 벌어진 하나의 이벤트는 나와 마음이 닿는 서로를 스쳐간 것. 잠시의 행복감이 그들을 지배하지만 다시 멀어진 간극 속에서 더 외로움 속에 침잠하게 된다...그 쓸쓸함이 너무 커서 문득 길거리를 걷다가도 그 무거움에 휩싸여 슬퍼지고 울고 싶어진다.

같은 숲을 거닐고 같은 아기를 어루만지고 같은 땅을 밟고 다니면서도 마주치지 않는 사람들. 우리네 도시인들. 소통하는 사람이 없는 도시생활은 마치 동굴같고 담장없는 감옥과 같다..그리고 그들은 훌쩍 여행을 떠나고자 한다. 가진 것을 놓아두고 훨훨 날아오르려는 찰나 우연의 일치로 마주치는 그들. 긴긴 겨울을 마감하고 쾌청한 날씨에 뭉글뭉글 하얀 구름이 떠다니는 하늘이 봄을 가져다 준다...

소통의 어려움. 함께 하는 이들에 대한 무지. 그래서 함께 하나 늘 혼자인 외로움. 그 막막함. 쓸쓸함. 해결할 길 없는, 끝닿은 데 없는 절망감 속에서 우리를 구제하는 것은 늘 한 사람의 빛이다..라고 작가는 말하는 것 같다. 사람이 사람에게 주는 그 느낌이 이 도시의 삭막함 속에서도 눈동자처럼 빛나며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그 무엇이라고...구태여 어려운 말 쓰지 않으면서도 잔잔한 어투로 어여쁜 그림으로 얘기하고 있다. 그래서...이 책이 내게 소중하게 느껴지는 듯 하다.

외로움을 얘기하고 있으나 또 그 외로움에서 해방시켜주는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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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구두 2004-10-18 1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해요. 비연님! 리뷰를 통해서만큼은 비연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듯 해서 좋습니다.

비연 2004-10-18 1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람구두님..감솨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