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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은 길이다 - 루쉰 아포리즘
루쉰 지음, 이욱연 엮고 옮김, 이철수 그림 / 예문 / 2003년 12월
평점 :
품절
책을 읽다보면 이건 곁에 두고 계속해서 읽어야겠다 싶은 책이 생기게 마련이다. 그 수가 많든 적든 책을 읽는 사람으로서 그런 책 한권 떠올리지 못한다면 제대로 독서를 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한다. 그런 점에서 루쉰의 글들이 한데 묶인 이 책은 내게 있어 두고두고 소장하고픈 생각을 절로 일으키게 하는 것이었다.
사실 아포리즘을 썩 좋아하지 않는다. 좋은 글이라고 모아두면 질리기 쉽고 내용에 흐름이 없으니 집중도 잘 안된다. 그리고 그렇게 내 맘에 콕콕 와박히는 글들만 모아두기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루쉰의 이 아포리즘(물론 이건 루쉰이 직접 엮은 건 아니지만)은 보는 내내 다른 생각없이 보았고 그렇지 그렇지 하는 깨달음까지도 느껴졌더랬다. 예전부터 루쉰의 글을 좋아하고 찾아 읽는 편이긴 했으나 이번에 아주 잘된 책을 다시 만난 듯 하여 가슴마저 뻐근하다.
직접 겪어보지 않고 누군가를 존경한다는 것만큼 위험한 일이 있을까. 글이나 말이나 풍기는 이미지만으로 그 사람을 속단하는 건 원래 경계하는 나다. 허나 루쉰이 이 시대의 닮고 싶고 존경할만한 인물이라는 데에는 이의를 달기가 힘들다. 그는, "내 설익은 열매가 나의 과일을 편애하는 사람들을 독살하고, 나를 증오하는 이른바 성인군자들의 힘을 북돋워주지는 않을까 우려한다" 라고 오히려 말하면서 자신을 숭배하는 사람들에게 경고의 메세지를 남기고 있지만.
아마도 루쉰의 글 중에서 가장 우리에게 와닿는 글은 희망에 대한 그 유명한 단락일 것이다.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땅 위의 길과 같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가 희망만을 말한 것은 아니다. 그는 지식인 계급의 약점을 비판하고(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두고 이렇게 해도 안 되고, 저렇게 해도 안 된다고 말하곤 한다) 노예가 되는 것을 경계하며(우리는 아주 쉽게 노예로 되며, 노예로 된 뒤에도 아주 좋아한다) 혁명을 낭만이 아님을 경고한다(혁명은 고통스러운 것으로, 필연적으로 더러운 것이며 피가 섞이게 마련이다).
또한 민중의 힘과 혼에 대해 강조하고(민중의 혼만이 소중하다. 그것을 드높여야 중국에 참다운 진보가 있다) 혁명과 투쟁을 해야 함을 역설한다(구사회, 구세력과의 투쟁은 반드시 단호해야 하고 부단히 계속해야 하며, 실력을 키워야 한다).그리고 무엇보다 중국의 문화 우월감을 엄중히 질책하고 문명의 참혹한 역사, 여전히 저열한 수준의 의식구조, 노예성, 어리석음 등을 글자 하나하나 또박또박 박으며 비판하고 있다.
루쉰은 중국의 근대화라는 격동의 시기에서 어쩌면 중국에 대한 철저한 해부와 비판을 앞세우고 구사회와 미래에 대한 깊이있는 통찰력을 가지고 주위에 그 사상을 전파했던, 어찌 보면 굉장히 '어두운' 사상가일런지도 모른다. 당시의 상황은 극히 암울했었고 행동하는 지식인이었던 루쉰의 눈에는 이 모든 몽매함이 견디기 힘든 것들이었을 테니까. 하지만 내가 루쉰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힘들고 불행하고 진창같은 현실일지라도 끊임없이 긍정적인 에너지와 희망을 찾고자 애썼다는 데에 있다.
그래서 그는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래도 우리가 위안을 가질 수 있는 것은, 그래도 미래에 대한 희망이다. 희망이란 존재와 한 몸으로, 존재가 있으면 희망이 있고, 희망이 있으면 빛이 있다."라는 말로 우리에게 결코 포기하지 않아야 함을 암시하고 있다. 아울러 "마귀의 손일지라도 빛이 새는 부분이 있기 마련이니 빛을 다 가릴 수는 없다." 라는 말로 우리가 희망을 가지고 있는 한 어둠보다는 빛을 항시 가질 수 있다고 한다.
이 책의 제목처럼 루쉰이 지향하는 방향은 이것, 희망이 있으면 길이 있으며 그 길은 현재에도 있고 과거에도 있었으며 미래에도 계속 있을 거라는 데에 있었던 것 같다. 우리에게 참담한 현실 속에서도 한 줄기 빛을 보게 하고 그러나 현실을 꿈결처럼 아룽거리는 눈으로 보기보다는 철저히 해부된 채 받아들이게끔 했던 그는 정말 진정한 이 시대의 선각자였다고 감히 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