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인간 동서 미스터리 북스 148
로스 맥도날드 지음, 강영길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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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라 그런지 추리소설이 참 잘 읽힌다. 사실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계절을 타지 않긴 하지만, 이번 여름은 특히나 더워서 추리소설이 아니고는 이 후덥지근함을 견딜 수 있으려나 싶다.

로스 맥도널드가 쓴 소설은 크게 17편 정도 된다는데..그 중에 루 아처 탐정이 나오는 소설은 15편이란다. 이 '지하인간'이라는 소설은 1970년대 초반 그러니까 후반기 작품에 속한다. 루 아처가 이제는 40대인 것 같고(나오는 여자의 나이보다 두 배는 된다느니 한 걸로 미루어) 좀더 원숙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내 생각엔 매우 잘 만들어진 작품이다. 흔히들 해미트와 챈들러의 뒤를 잇는 하드보일드 작가로 로스 맥도널드를 꼽곤 하는데, 기실 세 작가의 작풍은 비슷한 것 같으면서 조금씩 다른 맛이 있다. 챈들러의 작품 6권을 읽은 지 얼마 안되어서인지 '지하인간'을 읽으면서는 비교가 되어 더더욱 재미있었던 것 같다.

루 아처가 새로 이사간 아파트에 살고 있는 교수 부부집에 잠시 머무는 어느 여자와 아이를 아침에 우연히 만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로니라는 여섯살백이 소년은 루 아처가 주는 땅콩을 받아 새들에게 모이로 주면서 즐거워하다가 아빠, 엄마의 등장으로 겁을 먹는 모습을 보인다. 아빠는 아이를 넬 할머니에게 보여 준다며 거의 억지로 데려가고 그 모습을 바라보는 탐정은 어린 날의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는 것 같아 씁쓸한 마음을 금치 못한다. (이건 로스 맥도널드의 어린 시절을 투영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로니의 할머니가 사는 산장 근처에 화재가 발생하고 걱정이 된 엄마를 앞에 세운 채 루 아처는 그곳으로 향하는데, 그 행적을 좇아 가는 동안 아이가 스탠리라는 이름의 아빠와 함께 온 금발머리 여자에게 유괴를 당한 듯한 상황이 보여지고 그러면서 사건은 전개된다. 그 속에서 몇몇의 사람들이 죽어가고 등장하는 주변 인물들 사이의 얽히고 섥힌 관계들이 하나하나 밝혀지면서 묻혀졌던 과거의 상흔들이 드러나게 되고 결국 엄청난 하나의 진실로 모든 얘기들은 수렴하게 된다.

로스 맥도널드의 작품들은 대개 가정의 파괴와 그에 따른 상처, 그러면서 왜곡되는 인간상들의 모습에 촛점이 맞추어지곤 한다. 이 작품도 마찬가지로 먼먼 옛날부터 마치 낙인처럼 사람들의 마음에 남겨진 가족 해체혹은 집착 혹은 질투 등등에 의한 인정하고 싶지 않은 상처들이 끊임없이 그들의 인생 전반을 지배하고 있었고 그것이 또 다른 갈등과 파국을 초래한다는 설정을 함으로써 미국의 중산층 가정의 위기를 정확하고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여기에서 루 아처는 냉정하고 객관적인 3자적 입장에서의 탐정이 아니라 그 문제들에 약간은 비애를 느끼며 또 더이상 알지 않아도 되는 진실들에 접근하면서 발을 빼지 못하는 스스로를 느끼면서, 마치 심리 상담사처럼 사람들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풀어주려는 모습을 보인다.

가족은 사랑으로 뭉쳐야 한다고 도덕경처럼 읊어대지만, 사실은 가장 가깝다는 이유로 서로에게 가장 상처를 많이 주는 존재들이 가족이라는 이름인지도 모른다. 오히려 타인이라면 해결이 되었을 일들도 서로에게 지나친 배려를 하고 포장한 모습으로 일관하면서 더더욱 상처를 곪게 만드는 존재. 로스 맥도널드는 자신도 가졌을 지 모르는 그 문제들을 범죄의 형태로 재창조하면서 해결방법을 찾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개인적으로 이 작품이 로스 맥도널드 이름으로 번역된 작품들 중 소름 다음으로 좋았다. 그런데 한가지 의문점은 왜 이 제목이 '지하인간'일까 하는 거다. 뭘 의미하는 지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은데...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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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5-08-06 1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어보심 아시게 되는데요...

비연 2005-08-06 18: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그러니까..그게...그런 뜻인거죠. 만두님? (스포일러로 몰릴까봐..더이상은)

물만두 2005-08-06 2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이시드로 파로디의 여섯 가지 사건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외 지음, 권영주 옮김 / 북하우스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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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고름에 있어 난 항상 아마추어인지도 모른다. 어디에선가 읽었던 글을 기억하면 아마추어는 늘 작가나 음악가의 이름이 대가인 것을 고르고는 마치 굉장한 것을 선택한 양 우쭐댄다고 했다. 말하자면 본인의 식견이나 관점이 아닌 남의 관점에 슬쩍 얹어 자신을 과대평가하고 싶은 심리가 있는 것이 아마추어라고 하겠다. 진정한 프로는, 그래서 남들이 못 보는 진주를 캐내고 그것을 음미하며 알리기에 힘쓰는 것인가 보다. 아뭏든 나는 주로 작가의 이름, 특히 이름이 많이 알려진 작가들의 책에 선듯 손이 가는 아마추어로, 이 책을 산 것도 솔직히 그런 얄팍한 마음이 지배적이었다.

생각해보라. 보르헤스와 카사레스와 같은 중남미 문학을 대표하는 대문호 중의 문호가 공저하여 펴낸 '추리소설'이라니. 추리소설을 그저 문학의 변방 중에서도 밑에서 세기 더 편한 순서에 놓곤 하는 것이 순수 문학을 하는 사람들의 입장이라는 선입관을 빼고라도 특히 보르헤스와 같이 환상적이고 남다른 필치를 자랑하는 작가가 추리소설을 썼다는 자체가 놀라움이었다. 그가 쓴 추리소설은 어떤 분위기를 가지고 있을까. 이러한 호기심으로 난 쌓아둔 다른 책들을 다 제치고 이 책을 먼저 손에 들었다.

다 읽고 난 나의 감상은 '역시' 라는 거다. 대작가가 쓴 책이라서가 아니라 그냥 봐도 훌륭하다. 이 추리소설은 아주 평범한 것 같으면서도 전혀 평범하지 않은 책이다. 범죄를 추리하는 탐정(?)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옥살이를 하는 전직이 이발사인 죄수이고 한발짝도 밖에 나가지 않은 채 의뢰인의 말만 듣고는 머릿 속에서 온갖 가정을 세운 후 인간의 본성과 일의 정합적인 논리라는 측면을 고려하여 어느새 사건을 해결한다는 줄거리 자체가 일단 그렇다.

의뢰인들이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솜씨가 또한 그렇다. 우리가 흔히 추리소설에서 접하는 의뢰인들은 가급적 말을 많이 하지 않으려 하거나 필요한 말만을 한다. 물론 그 중에서 헛되게 나오는 말들을 조합하여 범죄를 구성하는 것은 탐정의 몫이며 따라서 탐정은 끝없이 질문을 하고 의뢰인은 끝없이 답을 하게 되는 구조다. 하지만 이 추리소설은 탐정의 역할을 맡은 죄수가 말을 하는 것은 사건이 해결되고 나서일 뿐이다. 사건을 의뢰받을 때는 그저 파란 컵에 마테차 한잔 받아놓고 조용히 마시고 있으면 의뢰인들이 느닷없이 닥쳐와 온갖 허세와 과장과 미사여구를 집어넣어 자신이 겪은 상황들을 설명하기 바쁘다. 그들의 말 속에는 그저 사건을 기술하는 것만이 있지 않고 시대의 정황과 인간의 허장성세, 그리고 내면의 본성 등이 다 드러나게 되고 삶에 대한 통찰력을 가진 죄수 탐정은 이것을 잡아서 사건을 바로잡아주곤 한다.

나는 이 여섯가지 사건 중에서 '타데오 리마르도의 희생자'(프란츠 카프카를 기리며라는 부제가 붙은)가 인상적이었다. 책 속의 해설에도 언급되었지만 이 소설은 사람의 심리에 대한 아주 세심한 통찰이 엿보이는 작품이다. 심리학을 들먹이지 않아도 이 소설에서 일어나는 사건들과 결말을 보며 사람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 그리고 그 기저의 심리는 무엇인가를 느끼게 해준다.

또 하나를 들자면 개인적으로 '산자코모의 숨은 뜻'도 좋았다. 사실 읽으면서 어떠한 결론이 내려질 지 어느 정도 예측이 되는 것이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그냥 범인을 찾는 추리소설이 아니라 범죄라는 외면으로 가려져 있는 사람의 잔학성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었다고 본다.

그리고 한 가지 덧붙일 것은, 환상적인 문체이다. 정말 어수선하리만치 화려한 미사여구와 장황한 설명들이 유려하게 펼쳐지는데 한자 한자 꼼꼼히 읽노라면 그 속에 빠지지 않을 수 없으리만치 좋다. 보르헤스와 카사레스의 예의 그 멋진 글맛들이 조금은 색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추리소설이다. 난 이 대가들이 추리소설에 흥미를 가지고 함께 재미나게 이 책을 써나갔다는 것만으로도 점수를 많이 많이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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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보석 - An Inspector Morse Mystery 3
콜린 덱스터 지음, 장정선.이경아 옮김 / 해문출판사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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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레이먼드 챈들러의 필립 말로 시리즈를 다 읽고 조금 허탈해졌었다. 사실 하드보일드 류의 작품들은 플롯에 승부를 거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에 많이 의존하는 편이고(그래서 필립 말로 시리즈의 플롯을 엉성하다고 혹평하는 사람들도 있다. 거기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는다, 난) 그래서 그 화려한 묘사와 빛나는 문장들 속에 빠져 있다가 나오려니 여간 힘들지 않았다. 콜린 덱스터의 모스 경감 시리즈가 뒤이어 나왔지만 손에 바로 잡기까지 약간의 망설임이 있었다면 그건 필립 말로라는 독특하고 멋들어진 캐릭터의 이미지를 그렇게 빨리 놓고 싶지는 않다는 소박한(?) 바램이 있어서였다.

하지만 모스 경감은 또 다른 매력으로 날 몰아간다. 콜린 덱스터는 아가사 크리스티 등이 풍미했던 Golden Age를 다시 찾은 현대 영국 추리소설계의 대가다. 따라서 주인공인 경감은 번뜩이는 머리로 남들보다 앞질러 연역적 가설을 세우고 그것을 비범하게 풀어가며 마지막에 범죄의 논리를 쫘악 해설하는 것을 즐긴다. 범인은 사회적인 모순이나 불합리에 의해 우발적 혹은 계획적으로 범죄를 저지르기보다는 매우 개인적인 이유나 잔악한 성격을 이유로 철저히 살인을 계획하여 저지름으로써 탐정과 일종의 두뇌 게임을 벌인다. 교묘한 플롯을 함께 풀어가기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적합한 내용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책은 모스 경감이 등장하는 주요 장편 시리즈의 9번째 쯤 해당하는 1991년도 작품이다. 전체 13권 정도가 나온 것을 고려하면 모스 경감은 처음 우리에게 선보였을 때보다 나이가 한참 든 50대 중후반이 된 셈이다. 책 속에서도 루이스 경감이 언듯 언급했다시피 말이다. 나이가 든 모스 경감은 여전히 술을 좋아하고 아름다운 여자를 보면 정신을 못 차리는 그 모습 그대로이나 이제는 자신의 나이를 인식한 듯 중간중간 쓸쓸함을 드러내곤 한다. 아마도 이게 모스 경감의 매력이 아닌가 싶다. 헛점 투성이이지만 누구보다 뛰어난 경감의 노년에 다다라 느끼는 감회들이 슬쩍 슬쩍 엿보이면서 우리에게 이 사람이 마치 나인 듯, 혹은 내 주위의 사람인 듯 느끼게 만드는 작가의 재주가 놀랍다.

사건은 영국 옥스포드에 여행을 온 미국 관광객들이 도착해서부터 벌어진다. 여행을 다녀본 사람들은, 특히 패키지 여행이란 걸 다녀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소수의 인원이 모여 있어도 그 인간군상은 다양하고도 다양한 법이다. 여행객들은 이제 나이가 지긋한 노부부들이 대다수로 그 중의 한 부부는 유명한 진귀한 보석을 영국의 박물관에 기증하고자 참여한 상태다. 그리고 드디어 그 보석을 기증하기 전날, 객실에 우연히 혼자 있던 아내는 죽은 채로 발견되고 보석은 사라진다.

처음엔 단순 절도 사건으로 여겨졌던 일이 점점 불어나고 함께 동행한 사람들의 면면이 조금씩 드러나면서 모스 경감의 머리를 활발히 움직이게 하더니 급기야는 그 보석에 대한 전문가인 켐프 박사가 살해를 당하면서 이야기는 급물살을 타게 된다. 그리고 절도 사건과 살인 사건이 어떤 맥락에서 연관성을 가지고 있음을 간파한 모스 경감에 의해 사건의 윤곽은 조금씩 드러나게 된다.

결국 모든 진실이 밝혀지던 순간. 나는 아가사 크리스티의 명백한 흔적을 발견한다. 복잡한 인간의 심리와 그 관계들 중에 숨겨졌던 진실이 드러나지만 그다지 즐겁지만은 않은, 오히려 뭐랄까...씁쓸함을 더 짙게 남겨주는 스토리텔링이 콜린 덱스터라는 작가가 영국인이며 Golden Age를 부활시킨 장본인임을 아주 뚜렷이 느끼게 해준다. 그리고 에르큘 포와로나 미스 마플을 만났을 때와 비슷한 심정을 모스 경감에게서도 느끼는 나를 발견하게 되고.

콜린 덱스터의 추리소설은 머리를 두드리는 큰 충격을 선호하거나 사회의 모순을 이번 기회에 아주 절실히 느껴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별반 흥미가 없을 수 있으나 정통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읽고 실망하지 않을만한 작품들이다. 이 작품도 마찬가지로 읽어볼만 하다고 생각된다. 무엇보다 모스 경감이 헛짚어 당황하고 난처한(이 작품에서 정말 재밌는 장면이 있다. 여기까지..더 나가면 스포일러다) 상황에 직면하게 되는 부분에서는 웃음이 절로 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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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5-07-29 1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가사 크리스티의 계보를 잇는 작가는 개인적으로 미넷 월터스라고 생각합니다^^;;;

비연 2005-07-29 1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관점의 차이인 듯 싶슴다..만두님^^;;;
근데 이미지가 참 이쁘시네요. 만두님의 이미지와 잘 어울리는 듯 합니다..^^

panda78 2005-07-29 1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비연님 견해에 한 표. ^^;
 
기나긴 이별 레이먼드 챈들러 선집 6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박현주 옮김 / 북하우스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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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하우스에서 나온 레이먼드 챈들러의 6권 시리즈와 더불어 초여름을 났다. 그리고 드디어 오늘 그의 마지막 장편인 '기나긴 이별'의 마지막 장을 덮었다. 사실 이 시리즈를 읽어나가는 동안 더운 줄도 몰랐음을 고백한다. 하드보일드 류의 추리소설에 별반 흥미가 없던 내게 이런 작품도 있구나 라는 놀라움을 안겨준 '빅슬립'을 시작으로 나는 레이먼드 챈들러가 창조해낸 필립 말로라는 사립탐정과 그의 활약에 푹 빠져 지내야 했다. 5권을 다 읽고 두툼한 '기나긴 이별', 그 마지막 책만이 남겨졌을 때 얼마나 망설였는 지 모른다. 이걸 다 읽고 나면 이제 다 본 것인데 아쉬워서 어쩌나 이 긴 여름을 어떻게 보내나 고민이란 것까지 했으니 참 우스운 일이다. 그래도 궁금함과 호기심을 못 이겨 결국 반나절 꼬박 지내며 이 책을 다 읽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마지막 글을 읽으며 느꼈던 그 아쉬움과 일종의 서러움은 한참동안 내 마음을 지배할 것 같다.

필립 말로라는 사립탐정의 매력은 너무나 많지만 6권의 책을 다 읽어나가면서 소설의 한 캐릭터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인양 느껴졌던 것은 그가 세월에 따라 나이를 먹고 그에 따라 조금씩 변화해가기 때문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빅슬립'에 나왔던 필립 말로가 '기나긴 이별'에 와서는 조금은 의뭉해지고 조금은 지쳐가고 또 조금은 세상과 타협하는 모습들에 실망을 하기도 한다지만 나는 그것이 오히려 인간적으로 느껴져서 좋았다. 어떤 사람이라도 시간을 이길 수는 없는 것이기에 필립 말로가 30대 초반에서 40대로 넘어가면서 나이에 걸맞는 자신만의 모습을 만들어나가는 모습이 내게는 훨씬 사실적으로 다가왔다.

이 작품 '기나긴 이별'은 500페이지가 넘는 장편으로 다른 작품처럼 어떤 사람의 의뢰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필립 말로가 우연히 어떤 알코올 중독자와 친구가 되는 장면부터 시작하는 것이 독특하다. 그가 알게된 친구는 과거를 잘 알 수 없는 사람으로 거렁뱅이로 살다가 재벌의 난잡한 딸과 결혼이란 걸 하면서 신분상승을 했고 그 속에 불편하게 끼인 삶을 거추장스러워 하는 사람이었다. 말로는 그에게서 어떤 친근감을 느꼈고 결국 그 친구의 아내가 살해를 당한 날, 그를 멕시코로 도망갈 수 있게 도와주면서 사건이 전개된다.

여기서는 오히려 이전보다 살인사건의 횟수가 주는 대신 주위 사람에 대한 묘사, 부자들에 대한 생각, 세상에 대한 환멸을 토로하는 장광설 등이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그리고 다른 작품과 마찬가지로 그 속에 그냥 악한은 없다. 다들 인생의 바퀴에 휘말려 자의로 타의로 지쳐가는 인간 군상일 뿐이며 그를 바라보는 말로의 시선 또한 아주 냉담하지만은 않다. 그게 아마도 레이먼드 챈들러 작품의 큰 매력이 아닐까 싶다.

결국 밝혀진 진실은 우리에게 통쾌함보다는 씁쓸함을 남긴다. 어쩌면 과거는 추억으로만 존재해야 하는 지도 모른다. 그 과거는 그냥 예전의 일이 아니라 어느 새 생명력을 가지고 우리에게 살아가는 원동력을 제공하기도 하니까. 내가 기억하는 과거의 조합들이 현실에서 다르게 재현될 때 우리는 일면 좌절하고 피하고 싶어지는 것일 테다. 작품의 제목처럼 과거는 그저 계속 '기나긴 이별(The Long Good Bye)' 의 상태로 남겨져야 했는지도 모른다.

레이먼드 챈들러 작품이 멋진 이유는 여타의 추리소설과는 다르게 미적인 섬세함과 적절하고 날카로운 비유가 돋보이기 때문이다. 그의 비유는 읽으면서 머릿속이 쭈뼛할 만치 좋다. 영문학도의 꿈을 꾸었던 작가는 추리소설이 그저 트릭으로만 승부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사람을 표현하는 아주 그럴 듯한 '작품'으로서 정의했을 것 같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그냥 추리소설만으로는 읽히지 않는다. 50년도 전에 나온 작품들 속에서 우리는 현재를 보게 되고 나를 보게 되고 그 속에 깔린 심리와 배경을 읽게 되므로.

나는 이 작품 뿐 아니라 레이먼드 챈들러의 작품 모두를 권한다. 추리소설을 읽으면서 두고두고 읽어야지 라는 생각과 함께 책장을 덮은 책은 몇 안되는데 그의 작품은 전부가 그랬으니까. 두말없이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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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5-07-24 15: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필립 말로 시리즈 가운데 제일 좋아하는 작품이지요. 좀 더 인간적으로 나오는 말로... 플레이벅을 출판하지 않는게 아쉽습니다 ㅠ.ㅠ;;;

비연 2005-07-24 15: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레이먼드 챈들러의 작품은 단편이라도 모두 나왔으면 싶어요~^^
저도 이 책이 필립 말로 시리즈 중 가장 좋았답니다, 만두님.

마태우스 2005-07-24 1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연님의 리뷰가 멋진 이유는 책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아주 많이 들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적절하고도 날카로운 표현력이 책의 질을 보증해 주고 있습니다.

비연 2005-07-24 1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과찬의 말씀을..^^

oldhand 2005-07-25 1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챈들러 완독을 축하드립니다. 저는 <기나긴 이별>을 아직 남겨 놓았답니다. ^_^ 언젠간 읽게 되겠지만요.

비연 2005-07-25 1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oldhand님...'기나긴 이별'은 아껴가며 읽으세요~ 읽고 나면 넘 서운하답니다...^^
 
안녕 내 사랑 레이먼드 챈들러 선집 3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박현주 옮김 / 북하우스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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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레이먼드 챈들러의 작품들을 연대순으로 보고 있다. '빅 슬립'이 처녀작으로 필립 말로라는 탐정의 이미지를 최초로 부각시켰다면 이 작품 '안녕 내 사랑'은 한층 성숙되고 치열한 탐정의 모습을 각인시킨다. 작가는 이 작품을 마음에 안 들어했다는데 정작 레이먼드 챈들러의 작품 중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작품이란 사실은 아이러니하기도 하다. 유려한 문체와 섬세한 주변 묘사, 그리고 사건의 해결보다는 사회의 부조리와 그 속에서 버둥거리며 살고 있는 인간군상들에게 초점이 맞추어진 작품들은 어쩌면 추리소설이라는 쟝르에 적합하지 않다 싶을 정도이다.

가끔 추리소설을 읽을 때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밟아가며 읽지 않을 때가 있다. 추리 위주의 구성에서는 대각선방향으로 읽어내려가도 그 의미를 파악하는 데 전혀 문제가 없으므로 한 시간이면 한 작품은 뚝딱 읽을 수 있다. 하지만 레이먼드 챈들러의 작품들은 그게 안된다. 사람에 대한 묘사 하나하나에도 그 사람의 과거와 성격, 심리까지 다 드러날 정도로 자세하고 구체적이며 말로가 겪어내는 왠지 산만해보이는 사건들의 주변 설명은 전체 작품의 분위기를 잡아내는 데 충분한 실마리들을 제공해주기 때문에 한 구절도 그냥 그렇게 지나치기가 쉽지 않다.

이 작품, '안녕 내 사랑'은 제목 그대로 사랑이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 추리소설의 주제가 사랑이라니. 그걸로 내용이 만들어질 수 있겠는가 싶지만 말로가 여러개의 사건에 순차적으로 부딪히면서 만나는 사람들은 결국 '사랑'이라는 하나의 단어로 흥망을 거듭한다. 그리고 그 내면에는 사회의 부패함과 권력이라는 것이 인간 세상을 얼마나 우습게 만드는가를 담고 있고 그런 것들을 몸소 겪으면서도 희망(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면)을 포기하지 않는 한 존재, 말로가 있어 흥미진진함을 담보한다.

나는 달도 뜨지 않은 하늘을 바라보던 죽은 눈과 그 아래 입가에 고인 검은 피를 떠올렸다. 더러운 침대 기둥에 죽을 때까지 부딪힌 불쾌한 늙은 여자를 떠올렸다. 뭘 두려워하고 있는지도 잘 모르면서 두려움에 떨던 금발 머리 남자......원하기만 하면 내 손 안에 넣을 수도 있었던 아름다운 부잣집 여인도 떠올렸다. 약간 다른 방식이기는 하나, 역시 원하면 손 안에 넣을 수도 있었던 날씬하고 호기심 많은 혼자 살던 착한 아가씨를 떠올렸다. 뇌물을 잔뜩 받았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다지 나쁘지 않은 거친 경찰들, 말하자면 헤밍웨이 같은 경찰도 떠올렸다. 상공회의소 사람들 같은 목소리를 지닌 뚱뚱하고 부유한 경찰들.....마르고 영리하며 집요하지만 깨끗한 방식으로 깨끗하게 일을 처리할 만큼 자유로운 권한을 지니지 못한 경찰들....이미 시도하는 것조차 포기해버린 널티 같은 성질 까다로운 늙은 경찰들. 이 모든 사람들과 인디언, 심령 치료사, 마약 의사도 떠올렸다...(pp346)

말로가 떠올리는 이 사람들. 도시생활에서 나름의 영역을 구축해가며 살아가는 사람들. 사는 방식을 그렇게 결정해버린 사람들. 그 인생에서 풍겨나는 다양한 냄새들. 그런 것들이 작품 전체에 걸쳐 문학적으로 잘 묘사되어 있다는 점이 이 작품의 큰 묘미이다. 혹자는 말로가 여성성이 더 커져서 나약하고 낭만적인 모습이 너무 도드라진다고 얘기하지만 난 여기에 나오는 말로의 모습에 애정을 느낀다. 돈에 유혹을 느끼는 듯 하지만 자존심을 버리지 않고 정의를 부르짖지는 않지만 무모하리만치 직접적인 시도로 알고 있는 바를 실천하려고 하며 냉소적이고 우울하지만 사랑을 느끼는 여자를 지켜주고 싶어하는, 그리고 사람의 눈에서 그의 마음을 읽어내려가는 탐정의 면면이 참으로 매력적이었다.

레이먼드 챈들러의 작품들을 하나하나 읽어나간다는 것은 생각만으로도 들뜨는 일임을 요즘 경험하고 있다. 그래서 이 더운 여름이 그다지 덥게만 느껴지지 않는 것, 그것이 추리소설 매니아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임을 절실히 느낀다. 강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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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5-06-25 2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말 너무 좋아요^^

비연 2005-06-26 0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두님..추리소설 좋아하는 사람끼리는 통하는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