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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내 사랑 ㅣ 레이먼드 챈들러 선집 3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박현주 옮김 / 북하우스 / 2004년 8월
평점 :
절판
레이먼드 챈들러의 작품들을 연대순으로 보고 있다. '빅 슬립'이 처녀작으로 필립 말로라는 탐정의 이미지를 최초로 부각시켰다면 이 작품 '안녕 내 사랑'은 한층 성숙되고 치열한 탐정의 모습을 각인시킨다. 작가는 이 작품을 마음에 안 들어했다는데 정작 레이먼드 챈들러의 작품 중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작품이란 사실은 아이러니하기도 하다. 유려한 문체와 섬세한 주변 묘사, 그리고 사건의 해결보다는 사회의 부조리와 그 속에서 버둥거리며 살고 있는 인간군상들에게 초점이 맞추어진 작품들은 어쩌면 추리소설이라는 쟝르에 적합하지 않다 싶을 정도이다.
가끔 추리소설을 읽을 때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밟아가며 읽지 않을 때가 있다. 추리 위주의 구성에서는 대각선방향으로 읽어내려가도 그 의미를 파악하는 데 전혀 문제가 없으므로 한 시간이면 한 작품은 뚝딱 읽을 수 있다. 하지만 레이먼드 챈들러의 작품들은 그게 안된다. 사람에 대한 묘사 하나하나에도 그 사람의 과거와 성격, 심리까지 다 드러날 정도로 자세하고 구체적이며 말로가 겪어내는 왠지 산만해보이는 사건들의 주변 설명은 전체 작품의 분위기를 잡아내는 데 충분한 실마리들을 제공해주기 때문에 한 구절도 그냥 그렇게 지나치기가 쉽지 않다.
이 작품, '안녕 내 사랑'은 제목 그대로 사랑이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 추리소설의 주제가 사랑이라니. 그걸로 내용이 만들어질 수 있겠는가 싶지만 말로가 여러개의 사건에 순차적으로 부딪히면서 만나는 사람들은 결국 '사랑'이라는 하나의 단어로 흥망을 거듭한다. 그리고 그 내면에는 사회의 부패함과 권력이라는 것이 인간 세상을 얼마나 우습게 만드는가를 담고 있고 그런 것들을 몸소 겪으면서도 희망(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면)을 포기하지 않는 한 존재, 말로가 있어 흥미진진함을 담보한다.
나는 달도 뜨지 않은 하늘을 바라보던 죽은 눈과 그 아래 입가에 고인 검은 피를 떠올렸다. 더러운 침대 기둥에 죽을 때까지 부딪힌 불쾌한 늙은 여자를 떠올렸다. 뭘 두려워하고 있는지도 잘 모르면서 두려움에 떨던 금발 머리 남자......원하기만 하면 내 손 안에 넣을 수도 있었던 아름다운 부잣집 여인도 떠올렸다. 약간 다른 방식이기는 하나, 역시 원하면 손 안에 넣을 수도 있었던 날씬하고 호기심 많은 혼자 살던 착한 아가씨를 떠올렸다. 뇌물을 잔뜩 받았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다지 나쁘지 않은 거친 경찰들, 말하자면 헤밍웨이 같은 경찰도 떠올렸다. 상공회의소 사람들 같은 목소리를 지닌 뚱뚱하고 부유한 경찰들.....마르고 영리하며 집요하지만 깨끗한 방식으로 깨끗하게 일을 처리할 만큼 자유로운 권한을 지니지 못한 경찰들....이미 시도하는 것조차 포기해버린 널티 같은 성질 까다로운 늙은 경찰들. 이 모든 사람들과 인디언, 심령 치료사, 마약 의사도 떠올렸다...(pp346)
말로가 떠올리는 이 사람들. 도시생활에서 나름의 영역을 구축해가며 살아가는 사람들. 사는 방식을 그렇게 결정해버린 사람들. 그 인생에서 풍겨나는 다양한 냄새들. 그런 것들이 작품 전체에 걸쳐 문학적으로 잘 묘사되어 있다는 점이 이 작품의 큰 묘미이다. 혹자는 말로가 여성성이 더 커져서 나약하고 낭만적인 모습이 너무 도드라진다고 얘기하지만 난 여기에 나오는 말로의 모습에 애정을 느낀다. 돈에 유혹을 느끼는 듯 하지만 자존심을 버리지 않고 정의를 부르짖지는 않지만 무모하리만치 직접적인 시도로 알고 있는 바를 실천하려고 하며 냉소적이고 우울하지만 사랑을 느끼는 여자를 지켜주고 싶어하는, 그리고 사람의 눈에서 그의 마음을 읽어내려가는 탐정의 면면이 참으로 매력적이었다.
레이먼드 챈들러의 작품들을 하나하나 읽어나간다는 것은 생각만으로도 들뜨는 일임을 요즘 경험하고 있다. 그래서 이 더운 여름이 그다지 덥게만 느껴지지 않는 것, 그것이 추리소설 매니아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임을 절실히 느낀다. 강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