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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프리마투르
리타 모날디.프란체스코 소르티 지음, 최애리 옮김 / 문학동네 / 2004년 9월
평점 :
품절
이 책을 사둔게 아마 2004년 말이었던 것 같다. 특이한 제목과 '움베르토 에코'에 비견할 만한 역사 추리물이라는 광고에 혹해서 인터넷으로 주문했었는데 받아들고 그 두께에 질려(무려 850페이지!) 서재에 그냥 넣어두었던 모양이다. 가끔씩 쳐다보고는 했지만 도대체 저걸 언제 다 읽을 수 있을까 하는 고민 아닌 고민을 마음에 담은 채 늘 뒤로 밀어놓곤 했던 책이다. 근데 왠일인지 지난 주말에 문득 이 책을 읽고 싶다는 강렬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읽던 책들을 다 뒤로 하고 손 안에 잘 들어오지도 않는 이 소설을 꺼내들어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급기야 이틀만에 다 읽었다!
사실 뒷면에 나와있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고증 부분이 좀 지루하다 뿐이지 그 앞 부분의 내용은 언제 다 읽었는가 싶을 정도로 재미있다는 게 이 책의 장점이다. 과연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연상시키는 책이다. 고대를 배경으로 했다는 점이나 연금술, 점성술, 의학, 미술, 인문학 등등의 다양하고 신기한 학문들을 술술 풀어나가는 등장인물들이나 사제와 그를 따르는 사환이라는 구도 등이 그러했다. 또 일면은 여타의 추리소설을 연상시키기도 했다. 섬이나 대저택 같이 밀실에서 벌어지는 살인과 그에 대한 인간 군상들의 비밀, 음모, 관계등을 파헤치는 아가사 크리스티류의 소설처럼 이 소설도 돈젤로라는 여관에서 정체불명의 남자가 독살당하면서 벌어지는 많은 일들을 추리의 형태를 빌어 그리고 있다. 그러면서도 이 소설은 플러스 알파의 그 무엇, 그러니까 이 소설만이 가지는 강점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돈젤로 여관에서 정체 불명의 남자가 독살당하고 이를 페스트로 의심한 당국에서 투숙객들을 가두는 것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여기에는 여관주인인 펠레그리노와 사환인 '나'가 있고 로블레다라는 예수회 신부, 미성의 카스트라토인 아토 멜라니 사제, 토스카나에서 온 잡다한 의학적 지식의 소유자 크리스토파노 의사, 나폴리에서 온 스틸로네 프리아소, 베네치아에서 온 정체 불명의 안졸로 브레노치, 그리고 죽은 노인과 함께 투숙했던 음악가 드비제와 페르모에서 온 상인 출신의 폼페오 둘치베니, 그리고 영국인인 베르포르디와 코르티자나인 클로리디아가 있다. 그저 그런 투숙객들인 듯 한 그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뭔가 말못할 사연들을 지닌 양 서로를 경계하고 자신을 은폐한다.
독살된 남자의 사인을 밝히고자 하는 아토 멜라니 사제와 엉겁결에 그를 따르게 된 사환 '나'는 여관 지하에 있는 비밀 통로를 발견하고 암울하고 지저분한 도굴꾼들의 인도 하에 매일 밤 이 곳을 탐색하면서 여관에 투숙하는 사람들의 과거와 그에 얽힌 놀라운 비밀들을 하나씩 알아가게 된다. 거기에는 그냥 개인의 인생만이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프랑스의 국왕과 왕비, 그리고 교황 등의 인물들이 배후에 있고 개신교와 가톨릭간의 종교 갈등, 투르크의 빈 침략 등과 같은 굵직굵직한 역사적 사건들까지 연결되어 있음이 밝혀진다. 그리고 마침내 드러난 결과는 읽는 나까지도 가슴깊이 허탈하게 느낄만치 비열하고 졸렬한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 이 소설의 내용을 말하는 건 스포일러에 해당하기에 일일이 거론할 수는 없지만, 어쩌면 이 소설이 에코나 크리스티의 소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 마지막에 느껴지는 허탈함인지도 모르겠다.
이 작품과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은, 앞 표지에 부착된 CD에 수록된 음악들이다. '다빈치 코드'가 미술작품을 배경으로 해서 방대한 미술사의 궤적을 함께 하는 작품들을 소개하듯이, 이 소설은 음악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카스트라토인 멜라니 사제는 자신의 마음을 늘 음악으로 표현하고 사환 '나' 또한 음악가인 드비제가 연주하는 론도에 깊이 매료되곤 하며, 읽고 있는 우리들도 CD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마음을 싣고 이 책을 읽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게 한다.
한마디로 딱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방대하고 스펙터클한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다양한 인간들의 삶과 애환을 그려내는 동시에 그 내면에 자리한 부정과 비리와 정치와 음모, 그리고 그로 인한 환멸까지 정말 짜임새 있게 잘 그려낸 소설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움베르토 에코 정도의 지적인 수준에는 못 미친다는 것이 내 개인적인 생각이나, 10년이 넘게 고문헌을 조사하여 쓴 소설답게 역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그것을 사람의 살아가는 모양새에 잘 각인한 솜씨는 높이 살 만하다고 본다.
이 책을 덮으면서 우습게도 난 왜 조흔파 선생이 지은 '에너지 선생'의 마지막 장면이 생각났었다. 전혀 연관성이 없는 내용임에도 말이다. 주인공이 어느덧 나이가 한참 들어 과거를 회상하면서 이제는 하늘나라에 가 계신 에너지 선생을 기억하고 에너지 선생과 한바탕 싸우고 집을 나가버린 침모 할매를 떠올리던 그 장면이 소설의 마지막과 매치되면서 가슴이 짠해졌었다. 이 소설은 내게 그런 느낌이다. 소설 속에서 한 도굴꾼이 말하던 '빗속의 눈물' 이라는 어구가 주는 그런 느낌. 추천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