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이 괜찮다고 하는 분들이 계셔서 그냥 무작정 구매했는데, 사실 구매할 때부터 망설여지긴 했다. 표지가... 도대체 표지가 왜 이리 섬뜩하단 말이냐. 좀 예쁜, 아니면 좀 상징적인 그림으로 하면 안 될까 라는 마음이 생겨서, 이거 사서 침대맡에 두고 읽다가 잠결에 보면 뭔가 호러 찍는 느낌이겠다, 이러면서 망설이다가 결국 호기심을 못 이겨 구매했다. 그런데, 막상 받아보니, 애개? 싶은 거다. 책 판형도 작고 페이지수도 100페이지 조금 넘는 '작은' 책이었다. 시집같은? 근데 표지는 호러고?
그래서 그냥 놓아두고 안 읽다가 오늘 울산 출장을 가는 참에 짐은 많고 책 두꺼운 거 들고 갔다가는 허리 휘어질 것 같아서 이걸 불쑥 집어들어 갔다 이거다. <성의 역사>도 같이 가져가려 했으나, 어제 얼굴 밑에 두고 자다가 벌떡 일어나 씻고 나오는 바람에 침대에 고스란히 남겨둔 채로 집을 나섰다는 건... 안 비밀. (얼굴엔 책 자국이 반나절은 갔는데..)
가는 기차에서 다 읽었다, 이 책. 근데 오. 재밌다. 내용은 어찌보면 평범하다. 아버지에게 학대를 받던 아이가 FBI 요원이 되었고 잘 하다가 어느날 중국 여자아이들 서른 명이 냉동 육탑차에서 죽어 있는 걸 본 이후 킬러로 전환하게 된다. 이름은 조. 청부를 소개하는 매클리어리에게 의뢰를 받아 성매매업소에 잡혀 있다는 제보를 받은 보토 의원의 딸 리사를 구하러 간다. 구했다. 구했는데 그 이후가 이상하게 돌아가는 얘기다. 사실 이런 내용은 다른 스릴러 소설에서도 많이 쓰이는 내용임에도 이 책이 뭔가 특별하다고 생각되는 건, 그 전개가 굉장히 담담하고 간결하다는 거다. 군더더기 기술이 없고, 조의 심리상태에 초점을 맞춰 쭉 진행되는 형식이다. 대사도 별로 없고 - 하긴, 이 짧은 책에 긴 대사 넣으면 끝나겠나 - 대단히 흥미진진한 스토리가 나오는 것도 아니지만 상당히 긴장하며 보게 하는 구석이 있다.
보통의 이런 류의 소설 같으면 이제 초반 들어갔구나 할 때 이 책은 끝난다. 이 작가가 아주 나를 조바심나게 하려고 작정한 것처럼. 실상이 드러나니 정말 구역질나고 피가 꺼꾸로 솟아서 얼른 영웅처럼 날아가 그 나쁜 저질 (육두문자 생략)들을 망치든 총이든으로 일망타진하길 바라는 나의 간절한 마음을 저 높이까지 올려놓고는, 불쑥 끝난다. 그러니까 어떻게 했다는 것이냐. 가서 원수를 갚았다는 것이냐. 무엇이냐. 가타부타 설명도 없다. 원본 책 간행연도가 2013년도인 것을 보면 이 작가는 이 뒤의 얘길 글로 알려줄 생각은 일도 없어 보인다... 흑.
영화로 나왔다고 해서 얼른 찾아보니, 있었다! 심지어 호아킨 피닉스가 나온다. 칸느 영화제에서 각본상을 탔다는 얘기만 들어도 이 영화의 분위기를 짐작할 만 하다. 그닥 대사 없이 난해하게 풀어나갈 것이 분명. 그런데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왓챠를 뒤지니, 오, 있다. 바로 '보고싶어요'를 누르고 어느날 와인 한잔에 이 1시간 40분짜리 영화를 보리라 마음 먹어본다.
이 책에서도 여전히 여성들은 피해자다. 가정폭력의 피해자인 조의 어머니. 말도 안되는 상황에 빠진 보토의원의 아내. 그리고 성매매업소에 납치되어 팔려간 열세살 소녀 리사. 모두... 대사도 별로 없이, 그냥 그렇게 희생되어 간다. 어쩌면 현실이 그런 지도 모른다. 소리쳐 얘기하는 사람은 빙산의 일각일 뿐, 어딘가 어두운 곳에서 더 많은, 더더 많은 여성들이 조용히 원치않게 죽어가고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참 무섭구나. 요즘은 세상이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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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회의는 울산에서 있었다. 가이드라인 심의하는 회의였는데, 음식서비스업 종사자(홀서빙 업무를 말한다)에 대한 내용이었다. 그런데 그 중에 이런 문구가 있었다.
"대부분이 여성 근로자로, 직장과 가정을 양립하는 스트레스가 있다."
일단, 이런 얘길 이런 식으로 일반론으로 펼친 자체에 부아가 치밀었다. 아울러 음식서비스업 종사자의 대부분을 '여성'으로 몬 것도 그렇고, 직장과 가정을 양립하는 스트레스는 여성만 있다는 듯이 쓴 문구가 걸렸다. 이의 제기. 이 내용은 삭제해주시기 바랍니다. 약간의 반발이 있었으나 다시 얘기했다. 직장과 가정을 양립하는 건 남성들도 마찬가지고 음식서비스업 종사자의 성별을 여성으로만 국한시킨 것도 문제가 있어 보인다. 삭제가 맞다.. 다른 위원들의 지지를 받아 삭제 결정. 멋진 위원장님이 내 의견을 지지해주셨다.
뭐 이 문구 하나 가지고 그러냐.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하나씩 고쳐나가야 한다. 이 가이드라인을 만든 사람의 인식도 새롭게 해야 하고, 이 가이드라인을 읽는 사람들이 알게 모르게 이런 류의 생각에 젖어드는 것을 방지해야 한다. 글이 무서운 것은, 그냥 이게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힘이 있어서다... 다른 많은 제언들을 했지만, 난 오늘 이 작은 문구를 과감히 삭제하게 한 내게 (혼자서) 박수를 보냈다. 잘 했다, 비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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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다시 <성의 역사>로 가자. 아직 1권이네? 우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