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어 프리쿨리치가 들어왔다. 그가 말한다.

작은 보물이란 나 여기 있다 라고 적힌 것들이야.

그것보다 조금 큰 보물은 아직 기억나니 라고 적힌 것들이고.

그러나, 무엇보다 큰 보물은 나 거기 있었다 라고 적힌 것들이지.

(p308)

 

그 사이 나는 내 보물들에 나 거기 머문다라고 적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수용소는 머릿속에서 자신을 확대시킬 거리를 확보하려고 나름 집으로 보냈다. 고향에 돌아온 후로 내 보물에는 나 거기 있다 는 물론이고 나 거기 있었다 라는 말도 적혀 있지 않았다. 내 보물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나는 거기서 나오지 못한다.

(p328)

 

*

 

역시 노벨문학상은 아무한테나 주는 건 아닌 모양이다. 관심이 많이 사그러져서 멀리 하고 있었지만, 아주 오랜만에 상이란 걸 받은 작가의 작품을 읽으니 그 깊이와 통찰력에 감탄하게 된다. 물론 헤르타 뮐러의 글은 아마 원어로 읽어야 그 감동이 더 적확하게 다가올 것이다. 그녀는 모국어를 조합하여 의미를 담은 새로운 말들을 창조해내었고 러시아어와 독일어간의 유사함을 활용하여 느낌을 전달하고 있었다. 언어의 유희. 언어의 유려함. 번역된 글을 읽으면 그 섬세한 뉘앙스는 전해지지 않는 법이다.

 

다만 모든 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저층지대의 감정, 일상, 시각 등에 한정되어 공감된다. 루마니아의 독재정치 속에서 빚어진 루마니아 내 독일인들의 소련 수용소행. 주인공 레오도 거기에 휩쓸려 5년이라는 세월을 수용소에서 보내게 된다. 동성애자였던 그는 집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을 가진 채 떠나지만, 수용소에는 배고픈 천사만이 함께 할 뿐, 외롭고 배고프고 힘겨운 생활의 연속이었다. 어쩌면 공포도 있었을라나. 뜻없이 죽은 많은 사람들. 그 사람들은 죽고나면 그냥 시체로 변모하고 사람들은 그 대상에게서 옷과 먹을 것을 훔쳐내기에 여념이 없어진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애타던 마음은 어느새, 여기에서의 생활도 생활이야 라는 마음으로 바뀌고 러시아의 한 노동자로서 정착을 해도 되리라는 마음 아닌 마음을 가지게 될 찰나, 고향으로 복귀하게 된다. 복귀. 그러나 수용소에서의 5년은 금방 잊혀질 듯 했지만 그의 모든 일상에 붙어서 함께 가는 기억이 되어 있었다. 고향에 마음을 붙일 수 없게 되고 결국 아는 사람들 속에 있으나 나만의 수용소에 갇혀 지내게 된다. 보는 것마다에서 수용소의 사물들이 떠오르고 그 때의 사람들이 겹치는 생활. 그것이 육십년을 갈 줄이야.

 

작가는 물론 그 당시의 수용소 생활을 자세히 묘사하고 싶었을 수도 있지만, 더 깊은 곳에서는 그냥 어느 곳에도 끌려가지 않았던 우리들도 아마 우리의 수용소에 갇혀 지내는 게 아니냐는 화두를 던지는 것 같다. 함께 있으나 함께 있지 않고 얼굴을 마주 대하나 침묵으로 대화를 대신 하는. 그런 생각들 때문에 참... 읽으면서 내내 외로와지는 작품이었다.

 

 

 

 

 

 

 

 

 

 

 

 

 

노벨문학상을 탄 작가라 그런지, 몇 권의 책들이 더 번역되어 나와있다. <저지대>를 한번 볼까 싶다. 어쩌면 다른 책일 지도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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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갈까 말까 망설이다가... 황사도 심하다 하고 날도 꾸물하고 해서 그냥 집에 눌러앉았다. 이넘의 게으름이란. 일요일 정도는 괜챦지 않겠어? 라며 스스르로를 위안하긴 했지만 이제 일요일이 다 끝나가는 마당이 되니 왠지 뭔가 잃어버린 듯한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어쨌거나 온종일 집에서 데굴데굴.. 하며 난 이 미미여사의 에도물인 <맏물 이야기>를 벗했다... 장장 20여년의 기간동안 만든 이야기들이라는데 정말이지 에도 이야기는 편안하고 좋아서 일요일 하루를 거기에 온전히 바쳤다 해도 하나 아깝지 않구나 라는 심정마저 든다.

 

오캇피치 모시치의 이야기이다. <혼조 후카가와의 기이한 이야기>에서 등장했던 사람인데 여기에도 나온다. 아직 남은 얘기들이 많아서 후속편도 나와야 한다 며 속으로 기도 중이다.

 

 

"왜 그러느냐? 그런 세련된 것을 생각하기 때문에 뱅어를 먹지 못하는 게냐?"

모시치의 물음에 이토키치는 부끄러워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다만, 그 작고 새까만 눈을 보면 먹을 수 없게 되는 것뿐입니다. 그놈들은 점 같은 눈을 갖고 있지 않습니까. 그 눈으로 초간장 속에서 이쪽을 올려다보면 젓가락을 댈 수가 없게 되고 말아요."

모시치는 웃었다. "의외로 담이 작은 녀석이로군. 그건 살아 있는 생선을 먹는 게 아니다. 봄을 삼키는 것이지."

"흔히들 그렇게 말하지요. 하지만 저는 안 돼요. 아무래도 안 되더라구요."

- <뱅어의 눈> 중. p60

 

 

이런. 이제 봄을 삼키려 싱싱하게 살아 있는 뱅어를 초간장에 찍을 때마다 이 글귀가 생각날 것 같다. 그넘의 눈. 나도 늘 걸리는 것 중 하나가 뱅어의 그 눈인데 말이다. 뭔가 눈이 아닌 것 같은데 눈이라고 생각되는 건 뭐인지. 웅... 뱅어 먹고 싶다가 이 글귀 읽고 조금 멈칫.

 

 

"흐음, 감나무 중에는 지로 감이라는 것이 있소?"

"있습니다. 단맛이 강하고 맛잇는 감이지요."

"다로 감은 없나?"

"없는 것 같네요." 주인이 잠시 생각한다. "만일 있다면 지로 감보다 더 맛있을 지도 모르겠는데."

아니, 다로 감은 떫은 감일 거라고, 모시치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팔자 때문에 그렇게 되고 마는 것이다.

형제인데. 같은 감나무인데. 떫은 감과 단감이.

- <다로 감, 지로 감> 중, p163

 

 

에도 이야기에는 가족의 이야기가 많이 등장한다. 형제의 이야기, 부모와 자식간의 이야기... 그 속의 애증들. 특히나 장자가 집안을 상속한다는 불문율에서 차남은 늘 집에서 내쳐지는 신세가 되는 지라, 그 속에서의 서러움과 그리움이 한데 엉켜 수십년 세월이 흘러서 좋지 않은 관계로 만나게 되기도 한다. 형제인데. 같은 부모에게서 났는데, 누구는 집을 상속받고 누구는 어디에 양자로 가는 신세라니. 참 매정한 일이 아닐 수 없으나 그 시절에는 또 그렇게 살 수 밖에 없었던 거겠지. 그나저나 모시치와 이야기를 나누는 이 유부초밥 집 주인장의 정체는 무엇인지.

 

 

"이제 올해도 끝이군요." 주인이 말했다. "겨울바람이 옛날 일을 전부, 처음부터 끝까지 다 날려 보내고 새로운 해가 올 것 같습니다."

모시치는 얼굴을 들고 주인을 보았다.

주인은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눈 속에 겨울바람에 휘말려 어디론가 날아간, 그밖에 모르는 세월이 그때 얼핏 비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얼어붙은 달> 중, p204

 

 

주인장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그에게서는 비밀의 냄새가 많이 난다. 누군가를 찾기 위해서 여기에 유부초밥집을 차리고 늦게까지 영업을 하는 사람인데, 예전에 무사를 했었을 법한, 어쩌면 시정 관리였을 법한 포스를 풍기는 사람이다. 모시치는 늘 궁금하지만, 참고 기다리고 있다.... 올해가 끝나고 새해가 와도, 옛날 일을 전부 날려버리는 일 따위는 소망에 불과하겠지만, 나도 가끔 달을 올려다보면 그런 생각을 한다. 새롭게 시작하고 싶다.. 이런.

 

 

"다음의 이건 - 뭐지? '후타타비야키'라니."

두부 요리라고, 곤조는 설명했다.

"구운 두부를 간장에 졸여서 맛을 배게 하고, 물기를 짜낸 다음 기름에 튀깁니다. 그것을 꼬치에 꿰어 매운 된장을 바르고, 살짝 석쇠 자국이 날 정도로 불에 그슬리지요. 뭐, 간단하게 말하자면 두부 산적입니다."

모시치는 상상해 보았다. "아주 집요해 보이는 음식이군."

- <독> 중, p340

 

 

이 책은 음식 이야기가 기본인지라, 음식에 대한 설명이 군침나게 잘 설명되어 있다. 집요해 보이는 음식이란 무엇일까. 나도 같이 상상하게 된다. 꿀꺽. 아 배고파.

 

 

"저것은 대장님, 도깨비의 자리입니다. 도깨비들이 앉아 있지요. 그렇지요, 주인장?"

모시치는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뜨고 주인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주인은 쑥스러운 웃음을 짓고 있다. 대신 아까 그 남자가 이어서 말했다. "오늘 밤에는 어디를 가도, 도깨비들은 바늘 방석이지요. 도깨비는 밖으로, 도깨비는 밖으로, 하면서 콩으로 팔매질을 당하고 도망쳐 나와야 하니까요. 그러면 너무 가엾다면서, 주인장이 도깨비들에게 술을 대접하기로 했다고 합니다."

- <도깨비는 밖으로> 중, p390

 

 

이 시리즈의 이야기들은 좋은 것은 이런 섬세한 따뜻함에 있다. 아마도 일본에 콩 뿌리기라는 풍습이 있어서 입춘 전날 밤에 액운을 쫓기 위해 콩을 뿌리며 '도깨비는 밖으로, 복은 안으로' 라고 소리치는가 보다. 집안에 있던 도깨비는 이 콩에 맞아 아파서 밖으로 도망친다는 건데. 그날 집안에 있는 도깨비들이 다 쫓겨날테니 가엾어서 어쩌냐. 여기서 한자리이긴 하지만 어떻게든 앉겠지, 자리 하나 주어 술이라도 한잔 하게 하자.. 라는 심성이라니. 왠지 훈훈해지지 않는가...

 

미미여사의 이 시리즈는 항상 추천이다. 어느 책 한권 버릴 게 없다니. 이럴 수가 있나 싶을 정도이다. 나중에 한데 모아 어디 틀어박혀서 하나씩 다시 읽어나가고 싶어지는 책들이다. 섭섭하게 지나가는 일요일에 이 책 한권 다 읽어 마음 따뜻해졌으니, 이만하면 살만하지 않나 싶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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춥다는데, 정말 추울까. 내일은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오늘은) 집에서 침대와 벗하며 시체놀이를 해야 하나. 미용실 예약을 해두었는데. 으. 그냥 산발로 일주일을 더 버텨볼까.

 

이생각 저생각에 괜히 잠 못 이루는 나다.

 

사실 아까 집 인터넷이 잘 안되어 짜증이 치솟았다. 아무리 해도 속도가 안나는 거다. 여기저기 뒤적거리다보니 DNS주소가 어느새 바뀌어 있는 것을 발견헀다. 흠? 일단 자동으로 돌리니 잘 되긴 하는데, 그래서 이 새벽에 이렇게 깨서 뭔가 자꾸 쓰고 읽고 하고 있긴 하는데. 찝찝. 왜 그게 바뀌어 있었을까. 혹시 바이러스? 혹시 해킹? 해커야. 내 놋북에 들어와 해킹하려거든 시간 낭비니까 언능 집어치우고 다른 데를 가보렴. 이라고 얘기해주고 싶다. 비밀이 없다, 비밀이.

 

내 왼편에는 책이 한권 놓여 있다. <빅데이터, 경영을 바꾸다>.

어쩌면 예전부터 읽고 싶었던 책인지도 모른다. 근데 지금은 그저 부담일 뿐인 저 책. 찌릿.

 

 

그러니까 회사에서 책을 뿌리고는 일주일동안 읽으세요.. 라고 강권 아닌 강권을 한다는 거지. 게다가 독후감을 어디다 올리라니 나원 참. 덕분에 받아오기는 했으나 진정 읽기 싫은 책이 되어 버렸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내가 보고 자발적으로 사서 읽었을 지도 모를 책이 말이다. .. 그러고보니 서재에 꽂혀 있을 지도.

 

빅데이터가 워낙 화두가 되다보니 이런 책도 나오고 강조하고 그러니까 나도 읽겠다 손은 들었지만. 좀 과한 분위기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빅데이터가 최근 들어 많아졌고 앞으로는 더더욱 많아지기 때문에 상당히 중요한 타겟이 될 거라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결국 상대는 데이터이고 따라서 데이터의 활용이라는 측면에서 데이터 분석에 대한 중요성, 데이터를 바라보는 관점의 중요성 등등을 훨씬 강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처럼 하둡이니 뭐니 통계적 기법 들고 나와서 괜히 엄청나게 어려운 분야인 것처럼 자꾸 사람들을 호도하는 것은 불쾌한 일이다.

 

뭐든 그렇다. 대상이 바뀌고는 있지만, 세상이 날로 발전해가니 말이다, 그것을 바라보는 관점, 그러니까 제대로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 중요하다는 것은 변함없는 진리이다. 표면적인 기술만 가지고 자꾸 얘기해서 통계하는 사람들만 할 수 있겠거니 오해하는 건 웃긴 일이다 이거다.

 

암튼 뭐.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이 책이 그런 내용이면 좋긴 하겠지만, 일단 읽기는 여전히 싫네 뭐 이런 반항적인 마음이 내게 있다는 거다.

 

*

 

최근에 개인적으로 든 책은 <탐정은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다들 재밌다고 해서 들긴 들었는데, 앞부분 읽어서는 잘 모르겠다. 좀더 두고봐야겠지. 좀 흥미로운 건 탐정과 함께 나오는 개, 카스테어스다. (이 이름 보고 카스테라 생각한 사람은 나밖에 없을까?) 덩치가 산만한데 지능은 사람에 가까운 듯이 보이는 개다. 탐정이 동물을 데리고 다니는 건 다른 곳에선 좀처럼 찾기 어려운 설정인지라, 어라? 좀 신기. 하면서 읽고 있다.

 

B급 스릴러/추리소설을 하도 읽어대어서 그런지, 요즘엔 정말 왠만해선 감흥이 안와서 말이다. 넘 잔인한 것은 역겹고, 심리전이라고 나오는 것들의 수준은 천편일률적이고, 하드보일드는 재미는 있으나 읽으면서도 내가 왜 이러고 있지 싶을 때가 많고. 그러니까 마이클 코넬리 이런 분들의 책을 빨리 빨리 번역해달라. 목놓아 요청해본다. 들리지도 않겠지만.

 

 

 

*

 

그래도 반가운 소식은 미미여사의 책이 나왔다는 거다! 심지어 에도시리즈. <맏물 이야기>.

 

 

미미여사의 현대물에 대한 재주는 거의 끝난 것 같고... <화차>나 <모방범> 보다 더한 책이 나오리라 ... 예상도 기대도 안된다. 그 이후에 나온 모든 책들이 그보다 낫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재주가 에도시대 소설 쓰는 데에 고스란히 옮겨갔다는 데에 한표다.

 

나올 때마다 이 책표지에 반하고, 내용에 반하고 그래서 읽는 내내 행복함을 금할 수 없게 만드는 시리즈라고 생각한다. (근데 자세히 보니, 이 책, 내가 일본에서 원서로 샀던 제목인 듯.. 흠냐. 그 책은 내 책장 구석에 잘 모셔두고 있는데) 나왔다는 얘기 듣고 냉큼 예약주문 들어가버렸다. 아마 나처럼 목 빼고 기다리는 팬들이 많아서 예약주문도 금방 차리라 예상되지만서도.

 

일본에서도 인기가 많은 지, 심지어 지난 분기에 일드로도 나왔었다. 통신상의 장애로 아직 보진 못했지만. 담에 몰아서 봐야지. 싶다.

 

*

 

자야지. 몇 자만 적고 나간다는 게 중얼중얼 횡설수설 투덜투덜 뭐라뭐라 많이도 썼네. 지금 자면 일요일은 또 오전 다 날리고 시작하겠구나. 아 아까운 나의 일요일. 주말의 시간은 주주의 시간보다 2배는, 아니 10배는 더 빨리 흐르는 것 같은 건, 나만 그런 건 아닐거라 다시한번 위안해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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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때이다.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는 정글같은 회사에서 열심히(?) 지내다가 토요일은 내가 하고 싶은 거 배우고 싶은 거 찾아 다니고 만날 사람 만난다. 일요일쯤 되면 사실 일주일간 기진맥진하여 몸살기운이 슬며시 찾아오는 것이 밖에 나가기 힘든 몸상태가 되곤 한다. 오늘은 특히나... 이전에 했던 약속마저 잠시 뒤로 미루고 집에서 쉬어야 했다. 온종일 쉬니 이제 좀 낫다. 무엇보다 이 편안하고 차분한 시간들이 나를 좀더 건강하게 하는 모양이다.

 

강릉 테라로사에서 사온 과테말라 커피를 꺼내서 커피머신에 적절한 물을 붓고 나무 스푼으로 몇 숟가락 톡톡 거름종이에 커피가루를 털어낸 후 시작 버튼을 누르면 금새 브라운색 커피물이 똑똑 떨어지기 시작한다. 그 반복적인 리듬에 넋을 잃고 쳐다보며 잠시 머릿속에 아무 생각도 담지 않곤 한다. 하얀 백지상태가 되는 것을 느낀다. 정신을 차려 내 전용 머그에 커피를 부을 땐 그 퍼지는 커피 내음으로 행복함에 젖어본다. 그렇게 머그잔 가득 커피를 받아서 방에 들어와 폭신한 소파에 앉아 읽던 책을 펼친다. 몸살기운으로 나른나른해진 몸에 커피와 책을 벗하니 뭔가 구름에 떠 있는 느낌이다. 이런 게 신선놀음인가.

 

 

줌파 라히리의 <저지대>를 읽었다. 헤르타 뮐러의 동명 소설은 아직 펼쳐 보지도 못한 채. 사실 그 전에 읽은 줌파 라히리의 책들은 내겐 좀 맞지 않는 느낌이었다. 퓰리쳐상도 탔고 (상이 중요하다는 건 아니고... 대체로 퓰리쳐상을 탄 작품들은 내게 재미는 주었었다) 다른 분들도 침이 마르게 칭찬하는 작가인데 어쩐지 내 정서와는 좀 달랐다. 그래서 이 책을 읽을까 말까 정말 망설였는데, 어제 밤 문득 끌려서 펼쳐 보기 시작했다. 무려 550페이지 가량의 장대한 소설이다. 다 보는 데 하루의 2/3는 쓴 것 같다.

 

다른 책들보다는 나았다. 역시나 나의 맘에 딸깍 맞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으나, 그래도 이전에 읽은 책들보다는 훨씬 마음에 와닿았다. 수바시와 우다얀이라는 형제와 그들의 아내인 가우리라는 여성을 중심으로 하여 어렸을 때부터 자라기까지, 서로 다른 생각을 품고 각자의 인생을 살게되고 아이를 낳고 손녀를 보고.. 하는 거의 4대에 걸친 일대기 속에 인도의 역사와 정치를 담고 가족이란 무엇인가를, 가족에 대한 상실감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그 속에서 서로의 섬세한 생각의 결들이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잘 묘사하고 있다. 줌파 라히리는 원래 가족이라는 주제에 천착해있는 작가이지만, 이 작품에서는 역사 속에서의 개인에 좀더 초점을 맞추는 모습을 보였다.

 

국가의 역사이든 사람의 역사이든, 긴긴 세월동안 변화해가는 그 모습들을 담아가는 이야기에 많이 약하다. 특히, 한 사람이 어린 시절에서 젊은 시절로 나이든 시절로 그리고 이제 어딜 가도 두 번은 못 오리라 예감하는 노년에까지 이르는 짧지만 긴 인생을 차분하고 담담하게 그린 소설엔 아릿함을 매번 느낀다. 개인의 인생이 역사의 큰 톱니바퀴 속에서 마모되고 지쳐가고 희생되어 가는 과정은 그 개인에게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주변 모든 사람에게 너무나 큰 영향을 준다는 것을 다시한번 느끼면서.

 

 

그리고 바로 집어든 책은 성석제의 <투명인간>이다. 구태여 우리나라 작가들의 작품을 찾아 읽지 않는 나로서는 이 책을 구입한 자체가 놀라운 일이다. 우리나라 작품들을 폄하해서가 아니라... 스타일이 맞지 않아서라고 해두자. 좋아하는 작가들은 있다. 대표적으로 박민규. 이 사람 작품은 꼭 본다. 그리고는 옛 작가들을 즐겨 찾는 것 같다. 이문구, 박경리, 박완서... 가끔은 신경숙.

 

현세를 이 땅에서 살아가는 나이니만큼 지금의 작가들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가를 아는 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소설에는 시대상이 있고 그 속의 인간군상들의 삶이 녹아 있고... 그리고 그것은 나의 시대이자 나이고 나의 주변인들이기 때문이다.

 

첫장을 펼치니, 이런 단락이 있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 라이더들은 바람과 급격한 외기 변화, 햇빛 등등에 몸을 노출시키지 않기 위해 걷거나 뛰는 일반 사람에 비해 훨씬 더 복잡하고 다양한 복장을 갖춘다. 자전거는 빠른 속도로 인도와 차도를 달리기 때문에 사고 위험이 높아 머리를 보호하는 헬멧은 필수품이다. 넘어졌을 때 손을 다치지 않기 위해서는 장갑을 끼어야 한다. 거기다 눈을 가리는 고글을 쓰고 마스크와 버프로 얼굴의 대부분을 가린다 (p7)

 

웃음이 피식 난다. 요즘 안 그래도 주위에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 급격하게 늘어났는데 (난 불행히도 자전거를 못 탄다..) 딱 그들을 연상케하는 단락이라 말이다. 재미나게 읽어볼 생각이다.

 

 

 

함께 읽는 책들이다. 소설만 읽어가지고는 머리에 기름을 잘 칠 수가 없다. 이런 관점의 책들이 필요하다. <인간은 왜 외로움을 느끼는가>는 저녁에 자기 전 읽고 있고 (말하자면 취침용이다..ㅎ)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는 점심 시간 남는 짜투리 시간에 읽고 있다. 주중에도 나는 편안한 시간들을 조금씩 누리고 있다. 나에게 편안한 시간 소중한 시간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책을 읽는 시간이다. 인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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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ra 2014-10-26 1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선놀음이라는 것에 공감가면서 저도 그럴때 행복감을 느끼곤해요

비연 2014-10-26 18:34   좋아요 0 | URL
mira님~ 첨 뵙네요^^ 알라딘 서재가 좋은 건 이런 심정을 함께 느낄 수 있는 분들이 많다는 것 때문인 것 같아요~ 자주 뵈요~
 

 

어제 비가 한바탕 쏟아질 때는.. 이게 왠일이여. 했는데, 오늘 하늘이 참 이쁘고 햇살도 곱다. 이렇게 해서 여름이 지나가고 가을이 다가오는 건가. 한참이나 더울 땐 이넘의 여름 이넘의 여름 했는데 이제 사라져가는 여름이 좀 아쉽게도 느껴진다. 뭔가 찬란하다는 거, 이런게 요즘 그리워서인지도 모르고. 가을의 쓸쓸함이 덜컥, 겁이 나서인지도 모르겠다.

 

 

 

이 책 얘길 했던가. 얇고 가볍고 어려운 내용도 없고... 그런데 뭔가 마음에 와닿는 게 있는 그런 책이었다. 일본이라는 나라에서, 별 꿈 없이 살다가 빵굽는 인생을 택한 저자와 그의 부인의 소박하지만 실천하는 삶이 맘에 사실 콕 박혔더랬다. 생활에서 이념을 실현한다는 거, 무지하게 쉬운 일 같지만, 절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살아보니 잘 알게 되어서겠지. 비루한 일상이 스스로를 잠식해가는 나날을 보내는 대부분의 소시민들에게, 이런 사람의 인생은 참 기쁘게 다가온다.

 

아마 많이 고생했겠고 많이 고민했겠고 그래서 시행착오라는 것들을 수없이 하면서 뾰족해진 마음으로 살기도 했겠지만, 자신의 길을 찾는다는 게 어디 그리 쉬운 일이겠는가. 다들, 그런 걸 두려워해서, 한방에 한큐에 해결나지 않을 인생이 무서워서 감행조차 하지 않는 일이다. 하지만, 그 고비를 넘어선 사람의 마음은 어떠할까를 생각하니, 부럽고 또 부럽다.

 

대단위의 사회에서 공유와 무소유와 자연주의를 실천하기 힘들다면 작은 사회에서 실현하고 그 사회들이 모여서 대단위의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이 더 빠른 일일 수도 있겠다. 그 옛날, 무지하게 큰 꿈을 꾸었던 사람들이 들으면 뭐야 이거.. 할 수도 있지만, 돌이켜보면, 스스로의 인생에서 뭔가 실천하는 행위를 평생 쭈욱 영위하는 것조차도 어려운 인생이다.

 

 

 

미미여사의 에도소설은 나오면 바로 사게 되는 책. 예약주문해서 받았고 하루만에 다 읽어버렸다. <흑백>과 <안주>에 이어, 과담 들어주는 아가씨 이야기. 이름 까먹어버렸다..;;... 에도소설에 나오는 여자들은 전부 '오~'로 시작되니 그 여자가 그 여자 같고... 이름을 도저히 외울 수가 없다. 쩝. 암튼간에. 재밌다.

 

뭔가 다음 책도 나올 뉘앙스를 팍팍 풍기며 끝나기도 했고... 여전히 맘이 아픈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들의 한을, 어쩌면 희로애락을 정갈한 문장으로 끌어내고 감동을 주는 글솜씨가 나를 행복하게 한다. 계속 계속 써줬으면 싶다. 이제 미미여사의 현대물보다는 에도소설이 더 좋아진 나..^^

 

 

 

 

지금 읽고 있는 책은 이 책. 나온 지 꽤 되었고 산 지도 꽤 되었는데, 너무 두껍고 제목도 거창하고 해서 계속 미루고 있었다. 읽게 된 계기는? 그냥. 눈에 들어와서. 읽고 있는데, 아직은 좀더 봐야할 것 같다. 지금은 너무 힘든 얘기들이다. 코리건이라는 사람의 인생이, 어쩐지 이해가 안 되고 있었는데, 지금 대목에서, 조금씩 이해가 되어가고 있다. 이야기의 전개가 어떻게 흘러갈 지 알 수 없다는 점에서 계속 흥미가 유발되는 책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요즘은 좀 밝은 책이 좋다.. 그래서 읽는 게 좀 힘든 책이기도 하다. 힘든 사람들 얘기가 그냥 해소 없이 나열되는 것이, 요즘엔 참 힘들다. 그냥 맑고 밝고 기운차고 해결이 팍팍 나는 이야기들을 선호하고 있는데.. 그래서 이 책도 끝까지 힘겨우면 중간에 포기할 지도 모르겠다 싶다. 사는 게 팍팍하면... 이렇게 되는가.

 

 

지금은 회사. 회사 나와서 일해야 하는데, 알라딘부터 열고 도닥거리고 있다. 이제 시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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