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찮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로 이성적 인간의 허울을 벗겨내고 약탈하는 자로서의 인간 존재를 명쾌하게 드러낸 존 그레이의 신작 <추악한 동맹>. 이번에는 정치와 종교의 불온한 동맹에 사로잡힌 인류의 가능성을 짚어봅니다. 그의 시니컬한 시선 못지 않게 글솜씨 또한 화제를 모으고 있어 차례로 번역될 다른 작품들이 기대됩니다. 이에 여러 분의 아쉬움을 달래드리고자 펭귄출판사가 진행한 인터뷰를 소개합니다. 특히 <만들어진 신>과 관련한 논의는 책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듯합니다.
“검은 미사(Black Mass)”(<추악한 동맹>의 원제)라는 제목을 짓게 된 이유는 무엇인지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제목을 지을 때 이 책의 핵심 주제이자 근대사의 핵심 주제이기도 한 종교의 정치적 변형이라는 문제를 제목에 담길 원했어요. 검은 미사는 기독교 미사의 일종인데 다만 공식적인 미사의 뒤편에 존재하죠. 지난 수세기 동안 가장 파괴적인 운동은 천상의 유토피아적 전망을 이 땅에 실현시키겠다는 기독교의 종말론 신화에서부터 흘러나왔습니다. 정치 종교란 그런 것이죠. 자코뱅당에서 볼셰비키까지, 러시아의 무정부주의자에서 미국의 신보수주의자까지, 급진 이슬람교도부터 전 지구적 자유 시장을 외치는 신자유주의의 전도사들까지, 근대 정치는 종말론 종교의 다양한 변형에 좌지우지 되어 왔습니다.
다른 이유는 음악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나는 러시아 작곡가인 알렉산드르 스크랴빈(Alexander Scriabin, 1872~1915)의 열렬한 팬입니다. 스크랴빈의 아홉 번째 피아노 소나타인 “검은 미사”는 아마도 음악 역사상 가장 음울한 작품 중 하나일 것입니다. “검은 미사”라는 곡은 레닌과 히틀러, 그리고 마오쩌둥의 사상에 생기를 불어 넣었을 것이라 짐작되는, 어두우면서도 악마적인 힘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펭귄 편집자이자 마찬가지로 스크랴빈의 추종자 중 한 사람인 사이먼 와인더와 대화를 나누면서 스크랴빈의 이 곡 이름을 따 책 제목을 짓자는 생각이 나왔지요.
이 책은 과거 큰 성공을 거뒀던 저작들을 기반으로 하는 것인가요 아니면 새로운 출발이라고 봐도 될까요?
초기 작품들과 연속선상에 있는 지점도 분명 있습니다만 <추악한 동맹>은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습니다. 전작인 <False Dawn>에서는 지구화를 조명했지요. 그러면서 당시 대부분의 정치인들이나 친기업적인 작가들이 보여 준 장밋빛 전망과는 극단적으로 다른 관점을 제시한 바 있습니다. 지구화로 세계가 상호 연관될 수는 있겠지만 더 자유롭거나 안전해지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지요. 오히려 더 높은 수준의 갈등에 대비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었습니다. <Al Qaeda and What It Means To Be Modern>에서는 알카에다가 중세나 그 비슷한 시기의 산물이라는 생각을 문제 삼았습니다. 알카에다는 실제 지구화의 산물이며 따라서 독특하게도 근대적이라 주장한 바 있죠.
<추악한 동맹>에서는 이 분석을 더 심화시켰습니다. 사람들 대부분은 근대 계몽주의가 승리를 거둬 우리가 신화적 사고에서 합리적인 세계관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죠. 그러나 이러한 이동은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가장 급진적인 계몽주의는 신화에 기대고 있습니다. 그 신화는 기독교의 기원, 혹은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신화죠. 계몽주의는 과학에 근거하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근대 정치를 추동하는 힘은 종교적 믿음에서 나왔습니다. 유토피아가 도래하리라는 믿음과 진보라는 관념이 바로 그 힘입니다. 예를 들어 무제한의 성장을 용인하고 믿는 최근의 경향은 인간이 이 행성의 주인이라는 일신교적 관념의 부산물입니다. 21세기 초반 이 세속적 신화는 죽거나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계 인류의 대부분은 근본주의적인 종교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여기서 이라크 전쟁은 일종의 전환점이 됩니다. 이라크 전쟁은 민주주의를 확산시키기 위한 십자군 운동의 일환으로도 볼 수 있고 석유 장악을 위한 전쟁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시작은 그러했지만 이라크 전쟁은 결국 해소할 수 없는 종파 간 분쟁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저자 입장에서 <추악한 동맹> 가운데 독자들 뇌리에 영원히 기억되길 바라는 부분이 있다면?
<추악한 동맹>의 2장에서 언급한 이야기를 하는 게 좋을 것 같군요. 1920년대 중반에 스탈린은 러시아 과학자에게 인간과 유인원을 이종 교배해 새로운 유형의 인간을 개발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사실 그 명령을 받은 사람은 과학자라기보다는 거래용 경주마를 사육하는 사람이었지요. 스탈린은 덜 먹고 덜 자도 되는 새로운 유형의 병사를 원했던 겁니다. 물론 그 병사는 정상적인 인간의 감정을 가지지 않아야 했지요. 스탈린은 이처럼 새로운 인간 종이 만들어진다면 자신의 힘을 확장하는 데 요긴하게 쓸 수 있을 거라 믿었습니다.
물론 그 실험은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이 실험은 <추악한 동맹>의 가장 중요한 지점을 명료하게 보여줍니다. 지식의 진전이 인류를 더 합리적으로, 혹은 더 자애롭게 만들지는 않는다는 것이죠. 지식의 성장은 단지 인간들이 자신의 목표를 더 효율적으로 달성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줄 뿐입니다. 그 목표가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말이죠. 지식의 성장으로 우리는 오늘날 번영을 누리고 수명이 연장되는 성과를 거뒀습니다. 동시에 같은 지식이 기후변화와 대량 살상 무기의 확산도 가져 왔지요. 이 이중성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할 겁니다. 그 이중성은 우리 내면의 갈등을 반영하기 때문이지요.
<하찮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Straw Dogs)>는 여전히 잘 팔리고 있습니다. 이 책과 <추악한 동맹>은 어떻게 연결이 되는지요?
<하찮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에서 나는 인간 진보에 대한 휴머니스트들의 믿음이 전통적인 종교의 신화만큼이나 비합리적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게 핵심이었지요. 사실 종교의 신화는 세속의 신화에 비하면 인간 삶의 현실을 견뎌내라는 메시지에 가까웠습니다. <추악한 동맹>은 이 생각을 더 발전시켜 미국 신보수주의의 발흥, 각양각색의 테러리즘, 그리고 고전적인 지정학으로의 회귀 등 지난 수세기 동안 발생한 대중적인 정치 운동을 분석하는 데 사용합니다. <하찮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처럼 <추악한 동맹>도 대부분의 독자들에게 친숙한 세계관과는 전혀 다른 세계관을 제시합니다.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The God Delusion)>의 성공을 보면서 ‘인간이 된다는 것의 의미’를 다룬 책을 읽고 싶어하는 잠재적 독자층이 많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추악한 동맹>은 이 주제를 더 단호하게 밀고 나갑니다. <만들어진 신>이 과연 유용한 책일까요? <만들어진 신>이 유용하다면 그것은 이 책이 복음주의적인 무신론의 기독교적 기원을 보여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도킨스는 종교란 과학이 쓸모없는 것으로 치부한 이론이라 생각했고 신앙인들을 비합리적이라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종교는 원시적인 과학 이론이 아닙니다. 종교는 신화입니다. <추악한 동맹>의 마지막 장에서 도킨스의 관점을 논하며 설명한 바 있죠. 과학과는 달리 신화는 진실 혹은 거짓으로 판명될 수 없지만 인간 경험을 실어 나른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진정성을 갖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종교의 신화는 휴머니즘보다 진실하다고 봅니다. 도킨스는 자신이 다윈의 추종자라고 생각했지만 인간이 다른 동물과는 달리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는 점에서 휴머니즘의 신화에 기대고 있습니다. 도킨스의 주장은 과학에서 나올 수 있는 결론이 아니라 신념의 일부며, 그 신념은 도킨스 자신이 격렬하게 공격하고 있는 기독교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다른 복음주의적 무신론자들처럼 도킨스 역시 신화의 보편성을 해명하지 못하며 그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화에 결코 의문을 제기하는 법이 없습니다.
<만들어진 신>의 독자들이 <추악한 동맹>도 흥미롭게 생각할까요?
<만들어진 신>의 독자들 중 많은 사람들이 <추악한 동맹>도 흥미롭게 읽을 것입니다. 종교에 대한 도킨스의 적대감을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내 책에 큰 관심을 가질 것입니다. 반면 도킨스처럼 전통 종교를 적대하는 사람들에게 인간 진보라는 세속의 신념에 대한 내 공격은 큰 도전이 될 것입니다.
<추악한 동맹>은 분명 중동 지역에서 일어난 사건들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지금 이 순간 당신을 우려하게 하는 다른 지역이 있나요?
중동은 자원을 둘러싸고 벌어진 세계 거대 권력 사이의 지정학적 충돌이 종교 전쟁과 얽혀버린 가장 명백한 사례입니다. 중앙아시아,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그 밖의 지역이 같은 경로를 밟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이슬람과 서양 사이의 갈등이 아니라 모든 산업 사회들이 연루되어 있는 갈등이죠. 중국과 인도는 에너지 집약적인 서구의 생활 방식을 채택하고 있지만 그러한 삶의 방식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습니다. 산업주의의 확산은 많은 혜택을 가져오지만 자원 전쟁과 기후변화에 불을 붙이기도 합니다. 이미 우리는 산업주의가 전체 행성에 미치는 영향력을 실감하고 있다.
다음 책으로 염두에 두고 있는 주제가 있다면?
철학과 소설 사이의 경계에 관심이 있습니다. 위대한 철학자가 자신의 작품을 소설이나 단편 이야기쯤으로 생각하고 썼다고 생각해 봅니다. 이 철학 텍스트를 우리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철학 그 자체가 일종의 소설은 아닐까요?
또, 과학에 대한 글을 쓰고 싶기도 합니다. 우리는 지적인 문제든 윤리적 문제든, 모든 문제는 원칙적으로 과학의 도움을 빌려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데 그게 과연 사실일까요? 오히려 궁극적인 해결책인 양 내놓은 과학의 결론이 해결할 수 없는 새로운 문제를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