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의 메신저, 차이를 알고 사이를 좁히다

‘소통의 메신저’로서 마리는 자신이 경험하고 깨달은 것들을 글을 통해 세상에 전하기 시작한다. 사는 것 자체가 곧 ‘소통’이라는 말처럼, 그녀가 쓴 글들과 그녀의 인생 자체가 ‘소통’을 의미할 텐데, 이번 작품은 암이라는 고통과 싸우면서도 직접 젊은이들과 얼굴을 마주한 그녀의 마지막 소통, 마지막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어쩌면 이 강의가 자신이 이 세상에서 해야 할 마지막 사명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홍성민, 옮긴이의 말 가운데)

 
   

오늘은 바로 강의에 들어가겠습니다. 드디어 책을 만났기에, 강의실보다는 혼자 집에서 읽으려고요. ^^ 2강의 주제는 '커뮤니케이션의 이해'입니다.

 

제2장. ‘이해와 오해 사이’ 에서

같이 웃을 수 있는 기쁨

그런데도 내가 왜 통역사가 되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마무리하도록 하자.
  나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아버지의 일 때문에 가족이 함께 체코 슬로바키아의 수도 프라하에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5년 동안 러시아어로 가르치는 학교에 다녔다.
  4학년이 되던 해에 치보라는, 캐나다인 아버지와 프랑스인 어머니를 둔 남자아이가 전학을 왔다. 그런데 이 아이가 아주 심한 장난꾸러기였다. 전학 온 첫날, 앞자리에 앉은 여자아이의 갈래머리를 잘라버려 그 아이가 엉엉 소리 내어 우는 바람에 수업이 엉망이 되었다. 다음 날에는 교실에 비치해둔 지구의에서 구를 떼어내어 그걸로 복도에서 축구를 했다.
  선생님들에게 치보는 몹쓸 전염병을 일으키는 역신疫神 같은 아이였고, 치보 아버지는 치보가 못된 장난을 칠 때마다 학교에 불려왔다. 그럴 때면 치보를 잡으려는 아버지와, 교무실의 펜이며 서류를 던지면서 도망치는 치보 사이에 항상 술래잡기 한판이 벌어졌다.
  분명 선생님들도 이런 치보를 미워했을 텐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치보는 결석 한 번 하지 않고 등교했다. 짓궂은 장난으로 수업을 망치는 것이 그 아이가 살아가는 유일한 보람인 것 같았다. 선생님들이 치보를 보는 순간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버리는 날이 계속되었다.
  그렇게 선생님들도 두 손 두 발 다 들었을 무렵, 한 사건이 일어났다. 수학 도형 시간이었는데, 치보가 교실에 갖고 온 거품기의 스위치를 켜 요란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을 옆자리의 여자아이에게 들이대며 장난을 쳤고, 여자아이는 꺅꺅 비명을 질러댔다. 그 난리를 치니 수업이 될 리 없었다.
  그러자 수업 중이던 갈리나 세묘노바라는 여선생님이 갑자기 치보를 향해 주먹을 쥐어 보이며 “더 이상 말썽 피우기만 해. 그 불룩한 감자 얼굴을 시머트리symmetry로 만들어줄 테니까” 하고 말했다.
  시머트리는 ‘대칭형’이라는 뜻이다. 그 말을 들은 순간 교실 안은 웃음바다가 됐다. 치보까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도 그럴 것이, 치보는 싸움을 한 뒤여서 오른쪽 볼이 보라색으로 불룩하게 부어 있었고, 우리는 바로 전 수업시간에 ‘시머트리’라는 단어를 갓 배운 터라 굉장히 신선한 말이었던 것이다. “오른쪽 볼하고 똑같이 되도록 왼쪽 볼에 한 방 먹여주겠다” 하는 틀에 박힌 어투가 아니라 매우 시적인 여운이었기 때문에 모두감탄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사건 이후 치보가 수업시간에만큼은 조용한 아이가 된 것이다. 이 사건은 ‘갈리나의 기적’으로 교내에서 유명해졌다. 단, 식당의 포크와 나이프가 가끔 몽땅 사라져 모두가 의아해할 때, 옥상에서 치보가 보란 듯이 그것들을 운동장 화단을 향해 던지며 악동의 체면은 유지하고 있어서 모두 묘하게 안심하기는 했지만.
왜 치보는 ‘시머트리 사건’ 이후 수업을 망치는 장난을 갑자기 그만두었을까? 갈리나 선생님의 말은 확실히 박력이 있었다. 선생님의 애인은 플라이급인지 밴텀급인지 되는 권투 선수였는데, 애인과 나란히 서면 선생님이 훨씬 어깨도 넓고 가슴도 두꺼웠다. 그렇게 몸도 말솜씨도 헤비급인 선생님이 치보에게 왜 더 빨리 그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던 걸까?

인간은 끊임없이 커뮤니케이션을 원한다

나는 오랫동안 그것에 대해 생각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그 수수께끼가 풀렸다. 치보의 체험을 나의 체험에 끌어다 생각해보니알 수 있었다.
  나는 치보가 전학 오기 2년 전 프라하에 살기 시작했는데, 러시아어로 가르치는 학교로 처음 전학 갔을 때는 안데르센 동화의 인어공주와 다를 게 없었다. 매일 4시간에서 6시간 동안 아무것도 알아듣지 못하는 수업에 계속 출석해야 했기 때문이다. 정말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학교 아이들이 짓궂은 장난을 쳐도 선생님께이를 수도 없고, 아이들에게 따지거나 항의할 수도 없었다. 그건 정말 억울하다. 제일 억울하고도 서글픈 것은 반 아이들이 웃는데 같이 웃을 수 없을 때였다. 그런 상황이 너무 슬펐다.
  어른이라면 가방을 챙겨 집에라도 갈 수 있지만 아직 어리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매일 비통한 각오로 학교를 다니는 수밖에 없었다. 겨우 아홉 살인 아이가 어깨 결림과 편두통에 시달릴 정도로 학교 가는 일은 고통이었다.
  치보 역시 전학 온 당시에는 나처럼 낯선 환경에 무척 힘들었을 것이다. 짓궂은 장난으로 수업시간을 때웠던 것은 결국 나의 어깨 결림이나 편두통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갈리나 선생님이 ‘시머트리’라고 한 순간에는 선생님의 말을 알아들었던 것이다. 소리 내어 웃었으니까. 같이 웃을 수 있다는 기쁨을 그 순간 치보도 알았던 것이다. 그래서 치보는 더 이상 장난으로 수업시간을 때우는 행동을 멈춘 게 아닐까. 인간은 끊임없이 타인과의 커뮤니케이션을 갈구하는 동물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커뮤니케이션은 불완전한 행위라서 완벽한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기는 영원히 불가능하다. 그러나 인간은 항상 커뮤니케이션을 갈구하는 동물이라는 확신이 나에게는 있다. 아마 그런 확신이 내가 통역 일을 하는 이유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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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성치 2011-03-29 15: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귀여운 마리 여사 ㅎㅎ
 

   
 

드물게 귀여운 ‘지적 앙탈’
전혀 팬시하지 않고도, 소녀적 감수성이 이리 살아남을 수 있다니. 세계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마침내 해석해내고 마는 그의 통찰은, 그 지점과 만나 그렇게 드물게 귀엽다. 내가 그의 생각들을 '지적 앙탈'이라 부르기로 결심한 이유다.
                                                                                                                       - 김어준  <딴지일보> 총수

 
   

  

 

 

네, 그분입니다. 알라디너가 사랑한 그녀, 마리 여사.
이번 책은 1998년부터 2005년까지 그녀가 강의한 내용입니다.
저도 아직 실물을 보지 못했으니 길게 설명드리긴 어렵습니다.
하지만 기쁜 소식 한 가지는 전해드리지요.
오늘,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에 걸쳐 하루에 한 꼭지씩 본문 내용을 공개합니다.
작년에 마리 여사의 책이 여럿 나와 지칠 법도 하지만, 기필코 기운내셔야 합니다.
우리가 만날 수 있는 그녀의 글은 한정되어 있고,
그마저도 몇 권 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모두 기운냅시다. 

 

제1장. ‘사랑의 법칙’에서
 


암컷이 본류다

고민이 있으면 역시 책을 많이 읽게 된다. 이쪽 분야의 책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를 선택하는 현상은 지금 말한 여러 사회적 요인에 더해, 인류라는 종種이 절멸하지 않고 존속하기 위해, 즉 종을 유지하고 진화해가기 위해?진화란 환경에 적응해가는 것이므로 이것도 존속을 위해서는 필요하다? 부지런히 대대로 이어온 행위의 일환이 아닐까 하는 데 생각이 미쳤다.
  예를 들어 『로미오와 줄리엣』이라는 명작이 있다. 열네다섯 살쯤 됐을까, 로미오와 줄리엣은 사랑에 빠진다. 줄리엣은 로미오와 섹스를 하는데 특별히 아기를 갖고 싶은 것은 아니다. 로미오의 아이를 원해서가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섹스를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사랑을 정신적인 행동이나 마음의 움직임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생식행위와도 관계가 있다.
  지금은 섹스가 점점 쾌락으로 기울고 있다. 쾌락 쪽으로 관심이 기운다면 특별히 생식행위는 하지 않아도 될 텐데, 굳이 피임까지 하면서 섹스를 한다. 호모섹슈얼동성애자은 아이를 낳지 못하면서도 유사類似 생식행위를 한다. 그래서 생식이라는 인류 존속을 위한 행위와, 남녀간에 서로 끌리는 감정은 사실 그 뿌리가 같다.
  인간을 포함해 압도적으로 많은 생물들은 왜 수컷과 암컷이 있을까? 인류는 왜 남자와 여자가 존재할까? 만일 누구를 고를 필요 없이 아무하고나 섹스를 해도 마찬가지라면 한 개체 안에 남녀의 기능이 갖춰져 있어도 될 텐데. 그렇게 되면 누구는 퇴짜를 놓아서, 또 누구는 퇴짜를 맞아서 상처 받지 않아도 되고, 퇴짜 놓은 쪽도 스스로 잔혹한 인간이라고 자기혐오에 빠지는 일도 없을 텐데 말이다.
  실제로 생물계를 넓게 조망하면 섹스 없이도 생식하는 생물이 많다. 아메바처럼 세포 분열로 증식하는 생물도 있고, 찾아보면 많다. 또 수컷 없이 암컷 혼자 알을 낳고 알에서 다시 암컷이 태어나는 단성생식을 반복하는 생물도 있고, 정자의 개입 없이 난자가 분열해 개체로 성장하는 생물도 있다.
  하나의 개체가 환경 변화에 따라서 수컷이 되기도 하고 암컷이 되기도 하는 생물도 있다. 최근에는 인간의 줄기세포로 복제인간을 만드는 기술까지 개발되었다. 즉 정자 없이 난자만 있으면 자기와 닮은 개체를 만들어 종족을 유지하는 생식이나 번식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기본적으로는 다음 세대를 만들 수 있다.
  성서를 보면 성모 마리아는 추잡한 섹스 따위 하지 않고 동정童貞인 채로 신에게 수태 고지를 받아 예수를 잉태해 출산하는데, 사실은 이것이 오역이었다는 걸 알고 있는가? 맨 처음 헤브라이어로 쓰인 성서에는 단순히 ‘결혼하지 않은 여자’라는 의미였는데, 이것을 라틴어로 옮길 때 ‘처녀’라고 번역해버린 것이다.
  또 어떻게 신이 지금의 세상을 만들었는지에 대해 쓰여 있는 「창세기」 처음 부분을 보면, 신이 최초의 인간으로 아담을 만들고 아담의 갈비뼈(속설에 의하면 13번째 갈비뼈)로 이브를 만들었다고 나와 있다.
기독교 세계인 유럽 쪽 언어에서는 ‘인간’과 ‘남자’를 뜻하는 단어가 같은 경우가 많다. 영어도 그렇다. ‘man’은 ‘남자’라는 뜻과 함께 ‘인간’이라는 뜻도 갖고 있다. ‘woman’은 ‘man’이라는 단어에 비하면 왠지 불필요한 것이 붙어 있고, 그래서 인류의 지류支流처럼 생각된다.
  유럽 문명에서 자라다 보면 아무래도 남자가 본류고 여자가 지류구나 하는 느낌이 들지만, 순생물학적으로 보면 여자가 본류다. 암컷이 본류다. 인류도 여자가 본류다. 수컷 없이도 존속할 수 있다. 그래서 종種의 유지라는 생명 전략 자체에는 수컷이 필요 없다. 남자 없이도 종은 유지해나갈 수 있다.
 


수컷의 존재 이유

그럼 수컷은 왜 존재할까? 왜 남자가 있을까? 암컷만으로 생식이 이루어질 경우, 새끼는 암컷의 형질을 그대로 이어받는다. 완전히 복사가 되는 것이다. 복사기로 복사를 하면 길게 두 쪽 낸 참외처럼 꼭 닮은 것이 나오는데, 복사한 것을 복사하고, 또 복사한 것을 복사하고, 다시 그것을 복사하고, 그렇게 계속 복사하다 보면 어느 시점에서는 마모되어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된다. 복제인간도 마찬가지다. 최초의 복제인간으로부터 복제인간을 만들고, 그것의 복제인간, 또 그 복제인간, 하는 식으로 복제해가면 유전자 정보의 많은 부분이 소모되어 더 이상 복제할 수 없거나 불완전한 복제가 된다.
수컷과 암컷, 두 가지 성性이 참가해 다음 세대를 만드는 생식에서는 암컷과 수컷의 유전자가 혼합된다. 그리하여 암컷의 복제도 아니고 수컷의 복제도 아닌 전혀 다른 형질의 2세가 생겨난다. 그래서 남자는 인류의 존속 자체를 위해서는 필요하지 않지만, 인류가 진화하고 변화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이다. 퇴화를 위해 존재하는 것 같은 사람도 있지만 말이다.
 


남자는 샘플이다!

나는 젊었을 때 이 두 성性의 관계에 대해서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흥미를 가졌다. 1960년대 구舊 소비에트 연방 공화국의 구성원인 아르메니아1922년 소련에 흡수되었다가 1991년 독립했다의 게오다캰 박사(이론 생물학자로 당시에는 아직 공학박사였다)가 ‘남자는 샘플’이라는 주장의 글을 잡지에 발표했다. 글을 읽은 순간 박사의 가설에 흥미가 생겨 그가 쓴 책들을 찾아 읽었다. 거의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가설이었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관심이 아주 많이 갔다. 박사의 가설은 이런 것이다.
  가령 물소 100마리를 키우는 목장이 있다고 하자. 여러분이 목장 주인이라면 수컷은 몇 마리, 암컷은 몇 마리를 키울 것인가? 우선 송아지가 많이 태어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암컷 99마리에 수컷 1마리로 해야 한다. 그러면 99마리의 송아지가 태어날 수 있다. 이것이 양적으로는 가장 많은 숫자다. 암컷의 수에 비례해 송아지가 태어나기 때문이다. 단, 수컷의 유전 형질은 한 종류뿐이니까 암컷에 의해 각기 다른 형질의 송아지가 태어난다. 99종류의 송아지 99마리. 암컷의 숫자와 같다.
  만일 태어나는 송아지의 다양성을 최대한 추구한다면 수컷 50마리에 암컷 50마리로 해야 한다. 50×50으로 2500종류의 송아지가 태어날 가능성이 있기는 한데, 물론 2500마리가 생기지는 않는다. 암컷의 수와 같은 50마리의 송아지가 태어난다. 이것은 1세대에 한해서다.
  그럼 형질을 우선하고 싶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목장 주인이 양만을 추구해서 계속 수컷은 한 마리만 키우면, 질병이 돌거나 천재지변이 일어날 경우 한 번에 싹 죽게 된다. 그래서 우수하고 강한 소를 만들어야 할 때 목장 주인은 수컷을 99마리로 늘리고 암컷은 1마리로 줄여야 한다. 그러면 수컷들 사이에서 경쟁이 심해진다. 자신의 유전 형질을 다음 세대에 전달할 수 있는 것은 99마리 가운데 단 한 마리뿐이기 때문이다.
 수컷들의 경쟁 못지않게 암컷의 안목도 예리해진다. 한 마리의 유전 형질밖에 얻을 수 없지만, 치열한 경쟁에서 이긴 수컷인 만큼 우수한 송아지가 생기는 것이다. 암컷에 의해 더 우수한 수컷이 선별되고, 그것으로 더 우수한 송아지가 생긴다는 계산이다.
  앞에서 남자를 ABC로 분류한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남자도 그런 식으로 여자를 분류할 거라고 생각한다. ABC나 ABCD 혹은 ABCDE 하는 식으로. 하지만 남자를 보는 여자의 눈이 더 까다롭다. 가끔 너그러운 사람도 있기는 하지만 대개는 매우 까다롭다.
  남자에 비해 여자가 이성을 보는 눈이 까다로운 이유는 뭘까? 출산의 고통을 겪으며 자식을 낳는 것도 여자고, 어느 정도까지 키워야 하는 것도 남자가 아닌 여자인 만큼 건강하고 강한 아이를 원하는 게 당연하다. 여자는 우수한 아이를 낳고 싶어한다. 그래서 상대를 고를 때 남자보다 더 질質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남자에 따라서 여자의 운명이 좌우되는 사회가 계속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사회적 영향도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아무튼 암컷의 수가 많으면 다음 세대 역시 양적으로 증가하고, 반대로 수컷이 많으면 다음 세대의 질적 변화의 폭이 커진다. 수컷은 할 수만 있다면 많은 암컷을 상대해 다음 세대에 자신의 유전자를 이어받는 개체 수, 즉 양을 늘리려고 한다. 암컷은 이와는 반대로 될 수 있으면 우수하고 강한 수컷을 골라 상대하려고 한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는 다음 세대 만들기에 분업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수컷은 양을 추구하면서도 질을 맡는다. 변화의 담당자이자 질質의 담당자다. 암컷은 양을 맡으면서도 질을 추구한다. 실로 완벽한 분업이지 않은가.
  이 논리는 남자의 바람기를 합리화하는 근거가 될 만한데, 순수하게 생물학적으로 그렇다는 것뿐이지,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라서 꼭 이대로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 근저에는 이러한 남녀의 역할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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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고 2011-03-25 17: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조금 먼 곳에서 추천하고 가오. ^^ 내일 서점에 가서 마리 여사 책들 표지 구경이나 해야겠는 걸. ㅎㅎ

인문MD 바갈라딘 2011-03-28 13:22   좋아요 0 | URL
네, 아마 나머지 책들이 모두 출간되면 이전 표지들을 최근 표지에 맞춰서 세트로 판매할 수도 있을 듯.

최 여사 2011-03-25 1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ㅎㅎ 저도 사랑합니다, 그녀.
월요일도 화요일도 수요일도 찾아올게요. ^^

인문MD 바갈라딘 2011-03-28 13:22   좋아요 0 | URL
꼭 제때 올려야겠군요. 퇴근 전에는 올리겠습니다. 꾸벅.

룰루브이 2011-03-25 17: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 꾸욱- 누르고 갑니다~^^

2011-03-26 12: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인문MD 바갈라딘 2011-03-28 13:22   좋아요 0 | URL
아, 잘 지내시죠? 인문학스터디가 별다른 뒷풀이가 없어서 따로 인사도 못 드렸네요. 고맙습니다.

금자 2011-03-27 1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 마리여사 책이 나왔군요! 두든반 새근반~ 서점으로 고고씽!

인문MD 바갈라딘 2011-03-28 13:23   좋아요 0 | URL
아, 알라딘도 있습니다. 잊지 마시길... ^^

순오기 2011-04-01 16: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산책에서 보고 클릭했답니다~~~~
착실하게 읽어보렵니다.
카테고리가 '북 엠마고'군요.^^

인문MD 바갈라딘 2011-04-02 07:30   좋아요 0 | URL
아, '북 엠바고'입니다. 늘 본문이 길어 읽는 데 어려움이 있는데, 마리 여사의 글은 분량도 맞춤하네요.
 

   
  '사회 현상이 존재한다. 도대체 이것을 어떻게 알 것인가?’ 이것의 인식 수단에 대해 논의하는 것이 사회과학 방법론입니다. 긴 인생을 살면서 한 번쯤은 사회과학 공부를 해보는 것이 유익하다고 생각합니다. 사회를 살리는 사회과학의 힘이 생소하고 궁금하신 분들에게 이 초대장을 보냅니다.  
   

 

 

 

사회과학방법론, 대학 필수 교양으로 들었는데, 가설을 세우고 분석 방법을 마련해 증명하는 과정을 거쳤던 기억이 납니다. 두어 달 정도 각종 통계나 기사를 비판적으로 보고는 잊고 살아온 듯합니다. 우석훈 선생은 80년대 투쟁과 비판의 언어였던 사회과학을 소통과 실천의 언어로 자리매김하려는 듯합니다. 이 기획은 오랜 기간 여러 사람들과 강의를 진행하고 글을 쓰고 나누며 공들여 만든 한국사회의 사회과학 입문강좌입니다. 우석훈 선생의 연이은 저작에 조금 지친 분들께는 새로움을, 사회과학이란 말에 부담을 느끼는 분들께는 유쾌한 경험을 전할 거라 생각합니다. 이 책을 만든 과정은 '사회과학 방법론 기초(http://cafe.daum.net/woo-s/)'라는 까페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아래 이 책의 서문을 공개합니다. 더불어 강의 차례와 책의 차례를 함께 정리해 비교해보실 수 있습니다.

 

  

무엇이 공동체를 지키는가!

 

사회의 그 어느 것도 공짜로 좋아지거나 개선되는 일은 없다. 정부나 정당이 알아서 미리미리 해주면 좋겠지만 그런 일은 없다. 많은 사람들이 머리를 맞대고 적극적으로 논의하고 발언하지 않는 이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레드 퀸의 가설’이 바로 그 얘기 아닌가? 열심히 뛰지 않으면 제자리에 서 있을 수도 없는 나라, 그게 바로 대한민국 아닌가? 끊임없이 변화하고 개선하려는 노력이 사라지는 순간 우리는 정말 이상한 나라를 보게 될지 모른다.  

 

나는 우리의 문제를 풀고 싶어서 공부를 시작했다. 경제학과 사회학을 결합시킨 ‘사회경제학’ 같은 분과를 열어서 사회와 경제를 통합적으로 살펴보고 싶었는데, 개인이 하기에는 너무 벅찬 일이었다. 그래서 실제로는 경제학과 생태학을 통합적으로 접근한 일을 더 많이 하게 되었다.  

그리고 또, 내가 희망했던 것은 ‘유학 가지 않아도 되는 사회’였다. 대학원생들과 박사과정 후배들을 모아 계속해서 스터디를 하고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강의를 줄곧 했던 것은, 최소한 내가 속해 있는 생태경제학 분야만큼이라도 국내에서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는 벽에 부딪혔다. 지난 10년 동안 대학원은 물론 학부에서도 유학이 당연한 일이 되었고, 이제는 초등학생에 유치원생까지 유학을 보내는 풍토가 되었다. 국내에서 생산된 인재가 최소한 자기 나라에서 부당하게 설움 받는 일은 없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스스로 완결된 교육 과정을 갖지 못했다. 한국의 엘리트들은 자녀가 초등학교 5학년이 되면 교환학생으로 미국에 보내고, 중고등학교는 외국에서 다니게 하는 걸 자연스럽게 여긴다. 교육 과정의 문제를 고쳐서 좋게 만들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 자녀를 외국에 보내 교육시키는 사회라니! 그러고도 잘살 수 있는 나라는 없다.

우리는 우리말로 학문할 수 없게 만든 것을 발전이라고 한다. 하지만 자기 말로 학문을 하는 풍토에서 비로소 세계적인 이론이 나왔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해준다. 프랑스어로 철학하는 프랑스, 독일어로 학문하는 독일, 일본어로 연구하는 일본, 우리 한국만 우리말로 공부하는 것의 중요성을 폐기하는 중이다. 

영어로 논문을 발표하는 것 자체를 뭐라고 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요즘은 정부에서 지원하는 연구 과제에서도 SCI(과학기술 논문 색인지수) 기준을 들이대면서 외국의 학술지에 발표하도록 유도한다. 정부가 돈을 들여서 자국의 국민들이 읽기 어려운 논문을 쓰도록 하는 셈이다. 정부 연구 과제는 기본적으로 세금에서 지원하는 것인데, 그 세금의 납세자들이 읽을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외국의 학술지에 실리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보다 가치 있는 일이 아닐까? 

기본 논문은 대부분 영어로 쓰여지고, 우리말로 된 문헌들도 거의 외래어 수준이어서 일반인이 이해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학계의 장벽이 너무 높아지면 결국 국민이 그 분야를 외면하게 된다. 벽은 너무 견고하다.

 

 

몇 년 동안 대학생, 대학원생들과 크고 작은 스터디를 하면서, 기초 교육에 대한 필요성을 절감했다. 학문의 전문화만 지나치게 외치면서, 사회과학의 기본을 다루는 논의가 없었고, 마땅히 쓸 만한 교과서도 없었다. 그래서 어디서부터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막막해하는 사람들이 큰 부담 없이 사회과학 공부를 시작할 수 있게 안내하는 책을 내고 싶었다. 

이 책에 정리한 내용은 대학생들과 공동 연구 및 분석 작업을 하면서 약식으로 가르쳤던 기초에 해당하는 내용들을 몇 번에 걸쳐서 진화시킨 것이다. 여러 차례 강의를 하면서 호응도가 높지 않거나 꼭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내용들은 제외했고, 현장에서의 실용성을 강조했다. 인문사회 분야의 학부 1~2학년 또는 비전공자인 경우 대학원 1학기 정도에 배우면 좋겠다고 생각한 내용들로, 사회과학에 대한 개괄적인 입문서 수준에 맞추려고 노력했다. 그렇다고 옛날얘기만 늘어놓지도 않았고, 1990년대 이후 발전된 방법론에 대해서 많이 소개하려고 했다. 

욕심 같아서는 창작을 하는 예술가들이 자신의 시선을 확장시키기 위해 사회과학 공부를 할 때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기회가 되면 경제와 윤리 혹은 경제철학에 대한 논의도 본격적으로 전개해보고 싶다. 

각 장의 끝에는 예습용 목적으로 쪽글이 하나씩 달려 있다. 시험을 잘 보기 위해서는 복습을 충실히 하는 편이 낫겠지만, 공부가 지겨워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나 창의적인 생각을 더 많이 하기 위해서는 예습이 더 도움이 된다는 나의 공부 습관이 반영된 것이다. 시간을 내서라도 쪽글을 써보고 다음 장을 읽는 편이, 효과는 더 높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회과학을 공부하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결국 글의 형태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기 위한 것인데, 그런 훈련을 병행하면서 실제 내용을 읽는다면 응용 능력을 키울 수 있다.

 

사회과학의 힘은 비판에 있다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아주 오랫동안 한국에서 사회과학은 대결의 언어였고, 날 선 논쟁의 언어였다. 그러나 이제는 정확히 분석하고 구체적 맥락을 드러내서 이해할 수 있는 틀을 만드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남과 싸우기 위해서거나 논쟁하기 위해서 학문을 한다면 너무 허망한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소통’은 여전히 중요하다. 사실 좌파든 우파든, 소통이라는 말을 “왜 내 말을 들어주지 않느냐”와 동의어로 사용하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 그건 홍보지 소통이 아니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극단적이 된 데는 언어의 문제도 있다. 

좌우로 싸늘하게 갈리는 양상은 일상에서보다 학문 내에서 더 강한 것 같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가 지난 10년 동안 학문이라는 이름으로 사보타지 외에 한 게 뭐가 있는가? 사회과학 내에서도 서로 만날 수 없는 평행선을 그렸던 것이 사실 아닌가? 그러는 동안 일반인들은 사회과학으로부터 멀어졌고, 우리가 소통할 수 있는 공동의 언어는 사라져버린 셈이다. 사회과학이 학문으로서 부여받은 소명으로부터 우리가 너무 멀리 온 게 아닌가? 

이제는 소통을 넘어 이해와 공감이 필요하다. 탈권위주의와 탈계몽주의 시대에 이해와 공감을 위한 새로운 의사전달 방식이 사회과학에서 어떻게 활용될 수 있는지, 그런 개인적인 고민이 책의 후반부에 들어 있다. 우리의 특수성을 생각할 때, 전통적인 방법론 논의보다 그런 것들이 우리에게 더 절실하다고 생각했다. 사회과학이라는, 좀 오래되었지만 인류 보편의 언어를 통해서 우리가 같이 대화하고 논의하고, 또 그렇게 뜻을 모아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동안 이 나라는 경제 근본주의에만 경도되어 ‘돈의 언어’만 난무했지, ‘이성의 언어’는 온데간데없었다. 의견을 모아나가고 합의해가는 장치 중의 하나인 사회과학의 언어가 죽었던 것 아닌가? 경제학은 사회과학을 구성하는 수많은 분과 중의 하나에 불과한데, 돈의 언어가 보편적이 되면서 지독한 경제 근본주의의 폐해를 낳고 있다. 그러나 이것도 하나의 단계라면, 조금은 더 이성적이고 폭력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새로운 한국을 만들어갈 방법을 우리 모두가 함께 고민해볼 시점을 맞았다고 생각한다. 

한국 사회에서도 이성의 힘이 제대로 작동하기를 바란다. 그것이 이 책을 준비하면서, 사회과학 르네상스라는 희망을 생각하며 내가 가졌던 간절함이다.
 

 

많은 사람들과 같이 작업을 하면서 새로 배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회과학이 기본적으로 수다쟁이들의 언어이기도 하다는 사실이다. 맞다, 사회과학자들은 참 말 많은 사람들이고, 간단한 것을 아주 기괴한 언어를 통해서 복잡하게 만드는 기막힌 재주를 가진 사람들이다. 우리 사회가 좋아질 수만 있다면 좀 시끄럽고 요란해져도 좋은 것 같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상처받거나 아픈 기억을 갖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1980년대의 사회과학은 상처를 주는 데만 집중하다가 결국 많은 사람으로부터 멀어진 것이 아닐까? 그 과정에서 사회과학은 남성적인 측면만 강조되었고, 수컷들의 호전성이라는 특징을 갖게 되었다. 온화하게 얘기하거나 부드럽게 얘기하면 전투성이 떨어진다는 것, 그게 우리가 지났던 80년대의 모습이었다. 사실 남들에게 상처를 주면 자신에게도 상처가 남는다. 논쟁에서 이기면 이긴 것 같지만, 그건 진짜 이긴 게 아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거나 최고한 완화시켜야 그게 진짜 이긴 것 아닌가? 

만약 우리에게 사회과학의 시대가 다시 돌아온다면 더 많은 소녀들과 주부들이 이 사회과학에 초대되어야 하고, 그들이 “당신들이 맞다, 틀리다‘라고 기꺼이 평가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사회과학은 글을 쓰거나 생각을 정리할 때 또는 사회의 대안을 찾아갈 때 길잡이가 되어주는 실용적인 목적을 갖는 게 바람직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회과학의 언어가 엘리트 남성들의 전투 용어에서 여성을 포함한 생활인들의 일상용어로 바뀌는 게 가장 빠른 방법이 아닐까? 대중들과 어떻게 얘기하고 그들에게 무슨 도움을 줄 것인가, 그런 실용적인 측면을 사회과학 전공자들이 너무 가볍게 생각했던 것 같다.
 


우리의 이런 노력이 과연 어떤 결실을 맺게 될지 지금으로서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결실의 기준을 나는 10년 후에 조기 유학이 우리 사회에서 어떻게 되었는지로 삼고 싶다. 우리가 이렇게 고군분투했는데도 사회적으로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는다면 아주 허망한 일이다. 개개인의 삶이 지금보다는 윤택해지거나 풍성해지면 좋겠지만, 이건 객관적 지수로 확인해볼 길이 없다. 그러나 조기 유학이 계속되는지 아닌지, 그런 쉽게 알 수 있지 않을까? 지금의 한국 상황과 사회적 논의의 방향을 보았을 때, 조기 유학이 더 늘면 늘지, 줄어들 가능성은 없다. 

생태학에서 사용하는 ‘깃대종 접근법’인 셈인데, 특수한 생물은 그게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 생태계가 얼마나 건강한지 알 수 있다. 영화 제목으로도 사용되었던 ‘쉬리’ 같은 게 그런 깃대종이다. 조기 유학은 하나의 단일한 사건이지만, 이 문제가 해결되면, 교육 문제, 학문의 내적 재생산 문제, 청년들의 취업 문제, 여성들의 권리 등 많은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짐작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부동산으로 떼돈을 번 한국의 경제 엘리트들도 지금보다는 좀 더 염치와 도덕을 탑재하게 될 것이다. 

그날이 오면 정말 나는 기쁜 마음으로 그다음 10년의 논의와 변화를 모아 이 책의 개정판을 내게 될 것이다. 우리 공동의 문제는 지금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사회적 논의에 참여할 때 비로소 해결의 단초를 찾을 수 있다. 법률로 정해 해결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도덕적인 호소만으로 해결될 문제도 아니다. 사회적 논의를 보다 체계적으로 수행할 수 있으려면 사회과학을 공부해야 한다. 그러니 내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사회과학으로의 초대장을 보낼 수밖에 없지 않은가? 다음 10년, 새로운 희망을 여러분과 함께 꿈꾸고 싶다.
 

 

[강좌 차례] 

1강. 프롤로그. 착한 것과 똑똑한 것  

2강. 학이란 무엇인가? : 학의 기원과 현대적 분화 

3강. 인과론과 실존의 문제 : 인간의 특수성 

4강. 경제적 인간과 사회적 인간 : 구조와 개인 그리고 다리 

5강. 설명과 이해 : 과학철학과 해석학 

6강. 보편주의와 상대주의 : 일원론과 다원론 

7강. 선형 모델과 비선형 모델 

8강. 시간을 다루는 법 : 탈역사주의, 목적론, 진화론 

9강. 공간을 다루는 법 : 균질성, 단절, 땅값주의, 정주권 

10강. 작업가설의 유용성 : 파라다임과 에피스떼메 

11강. 관찰과 개입 : 전문가와 지식인 그리고 지성 

12강. 대상과 애정 : 중립성과 당파성 

13강. 랩과 스쿨 :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의 차이 

14강. 집단지식과 개별지식 : 미국식 사회과학과 유럽식 사회과학 

15강. 에필로그 
 

[책 차례]   

1장. 지금, 우리에게는 사회과학이 필요하다 

2장. 착해지기 VS 똑똑해지기 

3장. 학문이란 무엇인가? : 백과사전형 지식의 귀환 

4장. 실존과 선택 : 학자의 탄생, 그리고 지지 않는 학문 

5장. 경제적 인간과 사회적 인가 : 개인, 구조, 그리고 다리 

6장. 설명과 이해 : 과학주의 VS 해석학 

7장. 환원주의와 다원론 : 쉬운 길과 어려운 길 

8장. 균질성과 비균질성 : 주체의 속성 

9장. 선형과 비선형 : 단순한 숫자와 복잡한 숫자 

10장. 시간을 다루는 법 : 역사에 목적지 같은 건 없다 

11장. 공간을 다루는 법 : 걷고 싶은 거리? 굽고 싶은 거리? 

12장. 스토리 라인 잡기 : 작업가설의 유용성 

13장. 사회과학, 실험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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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빈아빠 2011-03-15 1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와우 우석훈 샘이다~ㅎㅎ

힘센소 2011-03-15 1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앞으로 풀어낼 우 선생님 강좌가 흥미진진 기대됩니다!!!

좌석훈 2011-03-15 1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또 어떤 얘기를 풀어내실지 궁금하네요. 강연이 진짜 알짜시라는...ㅋㅋ
 

 

2010년 하반기 <반자본 발전사전>, <자본주의, 그들만의 파라다이스>로 분명한 색깔을 드러낸 아카이브 출판사에서 네 번째 책이 나왔습니다. 이번에는 미국 중심의 세계화가 문화의 본성, 인간의 정신을 어떻게 평가하고 배제하는지, 이로 인해 문화의 다양성과 가능성, 인류의 종 다양성과 문화의 탄력성이 얼마나 피폐해지고 있는지를 파헤친 논픽션입니다.  

저자는 홍콩의 거식증, (쓰나미 이후) 스리랑카의 외상후스트레스장애, 일본에서 우울증을 '마음의 감기'로 팔아먹은 다국적 제약회사의 사례를 구체적으로 들어가며 세계화의 일방적 문화서사가 몸과 마음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얼마나 단순하게 만들었는지를 보여주는데, 치료와 치유라는 동서양 문화 차이에 대한 단순하고 은유적인 접근이 아니라 인간과 문화에 대한 깊이 있는 사유를 바탕으로 구체적인 상황을 취재하고 분석하는 이야기가 꽤나 신선합니다. 이제 미치는 것도 미국식이라니 입이 씁니다.

서론과 옮긴이의 글을 함께 올립니다. 옮긴이의 글 제목이 '가능한 반론들'이라 서론과 함께 비교해보시면 윤곽을 잡으실 수 있겠습니다. 물론 논픽션의 매력은 취재와 보고이니 본문도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서론] 

누가 정상과 비정상을 결정하는가?


외국 여행을 하다 보면 미국 문화가 전 세계를 잠식하는 모습에 갈수록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탄자니아의 항만 도시 다르에스살람에 새로 문을 연 미마니 실내 쇼핑몰 앞에서 우리는 기겁한다. 천안문광장에서 맥도날드 매장을 만나거나, 말레이시아에서 나이키 공장을 볼 때도 우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전 세계의 시각적 풍경은 우울할 정도로 익숙하고 비슷해졌다. 미국인들이 즐겨 하는 오래된 농담, ‘어딜 가든 우리가 있다’는 이제 농담이 아니라 사실이다.  

우리가 세계 다른 지역에 미치는 영향이 값비싼 대가─세계의 다양성과 복잡성의 상실─를 강요한다는 사실은 우리를 불안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 모든 자백과 인정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 미국이 세계 다른 지역에 미치는 가장 심각한 영향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골든 아치는 우리가 다른 문화들에 미치는 가장 골치 아픈 영향의 상징이 아니다. 문제는 우리가 인간 정신의 풍경 자체를 불도저로 밀 듯 평탄하고 단조롭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인간 정신에 대한 이해를 미국화하는 거대한 프로젝트에 빠져 있다.  

이는 선뜻 동의하기 어려운 주장처럼 보일지 모른다. 설령 그런 변화가 일어난다 해도, 그것은 60억이 넘는 사람의 개인적인 생각 안에서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 더 이상 숨길 수 없을 정도로 현저해진 징후들이 나타나고 있다. 특히 눈에 띄는 현상은 정신질환들이 발생하는 세계적인 패턴의 변화다. 예를 들어 20년 전부터 섭식장애가 홍콩에서 발생해왔고, 이제 중국 내륙으로 퍼지고 있다. 외상후스트레스장애는 흔히 진단하는 병이 되었고, 전쟁과 자연재해를 겪은 후에 찾아오는 인간적인 고통의 공통어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미국 특유의 우울증이 전 세계 모든 나라에서 증가하고 있다.  

이런 병들을 발생시키고 유행시켜온 병원균은 무엇인가? 이 병들은 어떤 흐름을 타고 이동하는가? 그 바이러스는 바로 ‘우리’라는 것이 이 책의 전제다.  

지난 30년 동안 미국인들은 정신질환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열심히 수출해왔다. 우리의 정의와 치료법은 국제 표준이 되었다. 비록 이것이 최선의 의도에서 나왔다 해도, 우리는 그러한 노력의 여파를 충분히 예측하지 못했다. 결국 한 문화를 가진 한 민족이 정신병을 생각하는 방식─증상들을 분류하고 우선순위를 매기고, 치료를 시도하고, 과정과 결과를 예측하는 방식─이 질병 자체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지 않은가. 세계의 다른 지역에 우리의 사고방식을 가르치는 과정에서, 우리는 좋은 방향으로든 나쁜 방향으로든 세계가 미쳐가는 방식을 균일화하고 말았다.   

오늘날 괄목할 만한 양의 연구를 통해, 정신질환은 때때로 가정하는 것처럼 전 세계에 균등하게 퍼져 있지 않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 정신이상은 다양한 문화에서 무한히 복잡하고 특수한 형태를 띠고 출현해왔다.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아모크’란 정신착란에 걸린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 착란에 빠진 사람은 사소한 사회적 모욕에도 장기간 원한을 품고, 일시적으로 맹렬한 살상 욕구를 느끼곤 한다. 동남아시아 남자들은 때때로 성기가 몸속으로 들어가고 있다고 믿으면서 노심초사하는 ‘코로’에 걸린다. 중동의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서는 울고, 웃고, 소리치고, 노래하는 등의 분열 증상을 일으키는 빙의현상(또는 신들림), ‘자르’를 전역에서 목격할 수 있다.  

각기 다른 문화에서 발견되는 다양성은 각기 다른 시대에서도 발견된다. 사람들은 개별 문화들의 다양한 종교적, 과학적, 사회적 믿음에 의거해 병든 정신을 인식해왔기 때문에, 한 시대와 한 공간에 나타나는 정신착란의 형태는 종종 다른 시대의 한 공간에 나타나는 형태와 매우 다른 모습을 띤다. 이 다양한 형태들은 때때로 한 세대 만에 나타났다 사라지기도 한다. 《미친 여행객들》이란 저서에서 이안 해킹은 유럽에서 빅토리아 시대에 젊은이들이 몽롱한 정신으로 수백 마일을 걷는 몽환 증세가 일시적으로 나타났다고 기술했다. 정신질환 증상들은 시대정신을 보여주는 번개이고, 특수한 시대 및 특수한 장소의 문화와 믿음이 빚어내는 산물이다. 19세기 중반에는 수천 명의 상류층 여자들이 히스테리성 하지마비 때문에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했는데, 이는 당시 여성의 사회적 역할에 부과된 구속이 얼마나 컸는지를 직관적으로 이해하게 해준다.  

그러나 갈수록 속도를 더하는 세계화는 변화를 몰고왔다. 한때 각기 다른 문화의 다양한 정신이상 개념들에서 볼 수 있었던 놀라운 다양성은 급속히 사라지고 있다. 미국에서 확인되고 유행해온 몇몇 정신병─우울증, 외상후스트레스장애, 특히 신경성 식욕부진증(일명 ‘거식증’)─은 오늘날 문화적 경계를 넘어 빠르게 전 세계로 퍼지고 있다. 토착성 정신병들과 치료법들은 미국에서 만들어진 질환 범주와 치료법에 밀려나는 형국이다.  

 

서양의 정신의학이 세계적으로 정신질환의 의미와 치료법에 주목할 만한 영향을 미쳐온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서양에서, 특히 미국에서 훈련받은 정신보건 전문가들이 정신질환의 공식적인 범주들을 만들어낸다. 미국 정신의학협회의 ‘정신질환 진단분류체계’인 《DSM(Diagnostic and Statistical Manual of Mental Disorders)》(때때로 정신의학의 성서라 불린다)은 이제 범세계적인 표준이 되었다. 게다가 미국 과학자들과 단체들은 심리학과 정신의학 분야에서 최고로 손꼽히는 학술지들을 운영하고, 최고의 학회들을 개최한다. 정신질환에 관한 연구 자금을 대고 약물치료 마케팅에 수십억 달러를 쓰는 것도 서양의 제약회사들이다. 전쟁이나 자연재해가 나면 서양에서 훈련받은 외상학자들이 달려가 ‘심리 응급치료’를 하고, 정신이 어떻게 망가지는지 그리고 어떻게 치료하는 것이 최선인지에 관한 가정들을 풀어놓는다.  

그들의 생각과 의료 행위는 단순히 문제의 질환들을 묘사하는 증상 리스트를 넘어 훨씬 더 큰 의미를 내포한다. 정신 건강과 치료에 대한 서양의 개념들을 홍보하는 이면에는 인간 본성에 관한 여러 문화적 전제가 깔려 있다. 예를 들어 서양인들은 일반적으로 어떤 종류의 인생 경험이 심리적 외상을 입힐 수 있는가에 대한 믿음을 공유하고, 금욕적인 침묵보다는 말로 감정을 분출하는 것이 건강에 더 좋다는 데 동의한다. 서양인들은, 인간은 선천적으로 허약해서 수많은 감정 경험들을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한 질병으로 여겨야 한다고 확신한다. 우리는 정신질환에 대한 우리의 생의학적 접근법이 환자의 증상을 완화시켜주고, 또 우리의 약이 과학이 제공할 수 있는 최선의 해결책이라고 확신한다. 우리는 다른 문화의 사람들에게, 오래된 사회적 역할을 내던지고 개인주의적인 자기 성찰에 몰두하면 정신건강(그리고 현대적 형태의 자기 인식)을 찾을 수 있다고 약속한다. 정신에 대한 이 서양의 개념들은 세계의 다른 지역 사람들에게 패스트푸드와 랩음악처럼 매혹적이라는 사실이 입증되고 있으며, 그런 환경에서 우리는 빠르고 힘차게 그것을 전파하고 있다.  

전 세계를 우리처럼 생각하게 만들려는 이 지구적인 노력은 어떤 동기에서 출발하는가? 몇 가지 동기가 있는데, 그중 하나는 매우 간단하다. 제약회사의 이익이 그것이다. 자산 규모가 수십억 달러에 이르는 이 복합기업들은 보편적인 질환 범주를 홍보할 만한 동기를 갖고 있다. 그 질환들을 치료할 수 있다는 약들을 팔아 막대한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이유들은 보다 복잡하다. 오늘날 많은 정신보건 의료인들과 연구자들이 우리의 약들, 질환 범주들, 정신에 관한 이론들을 뒷받침하는 과학이 끊임없이 변하는 문화적 경향과 믿음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곳에 터전을 잡았다고 믿는다. 실제로 우리는 지금, 말 그대로 정신을 실시간으로 지켜볼 수 있는 기계를 만들어 사용하고 있다. 우리는 여러 방법으로 뇌의 화학작용을 변화시킬 수 있고, 불구나 기형의 원인을 밝히기 위해 DNA 서열을 조사할 수 있다. 우리는 한 세대 전부터 정신질환의 생의학적 개념을 자랑스럽게 홍보하고 있다. 정신질환들도 신체의 질병처럼 임상적으로 그리고 과학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개념이 그것이다. 그 밑에는 이 같은 놀라운 과학적 진보 덕분에 오늘날 정신보건 의료인들이 선배들의 편향과 실수를 피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실제로 현대의 정신보건 의료인들은 종종 이전 세대의 정신과의사들을 돌아보면서 경멸과 연민이 뒤섞인 감정을 느끼고, 그들이 어떻게 해서 당시의 문화적 믿음에 그렇게 휩쓸렸을까 의아해 한다. 그들은 빅토리아 시대에 여자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히스테리에 관한 이론들을 문화적 유물로 취급한다. 심지어 불과 15년 전에 갑자기 나타났던 다중인격장애처럼, 최근에 의사의 잘못으로 생겨나 유행한 질환들까지도 고대의 역사로, 지금은 위험하지만 과거에는 안전했던 우회로처럼 여긴다. 이와 마찬가지로 다른 문화에서만 발견되는 질병들은 종종 서커스의 막간을 때우는 여흥쯤으로 생각한다. ‘코로’와 ‘아모크’ 같은 질환들은 미국 진단분류체계의 끄트머리(《DSM─Ⅳ》, 845~849쪽)에, ‘문화 구속적 증상들’이란 제목 아래 기술되어 있다. 이 정도라면 ‘이국적이고 신기한 정신병: 1회 관람에 25센트’라는 표지가 붙을 만도 하다.  

서양의 정신보건 의료인들은 《DSM─Ⅳ》에 문화 구속적 증상이 나오기 전까지 844쪽에 수록된 질환들은 문화적으로 고안된 정신병 증상들과는 다른 ‘진정한’ 정신질환, 즉 징후와 결과가 변덕스러운 문화적 믿음의 영향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질환들이라고 믿는 경향이 있다. 이 논리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만일 그 질환들이 문화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면 분명 모든 곳의 인간에게 보편적일 것이다.  

그러나 이 책에 소개된 교차문화 연구자들과 인류학자들은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들은 정신질환의 경험이 문화와 분리될 수 없음을 입증해왔다. 우리는 여러 이유 때문에, 예를 들어 개인적인 외상, 사회적 격변, 뇌의 화학적 불균형 때문에 심리적인 흔들림을 겪는다. 원인이 무엇이든 우리는 항상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이해하기 위해 문화적 믿음들과 이야기들에 의존한다. 빙의에 관한 것이든 세로토닌 감소에 관한 것이든, 그 이야기들은 대단히 극적이고 종종 직관에 반하는 방식으로 질병의 경험을 구체화한다. 결국 우울증, 외상후스트레스장애, 심지어 정신분열병처럼 명백해보이는 범주들을 포함한 모든 정신질환은 히스테리성 하지마비, 침울증, ‘자르’와 같이 인간 광기의 역사를 스치고 지나갔던 다른 모든 정신질환들처럼, 모든 면에서 문화적 믿음과 기대의 영향을 받고 그에 의해 구체화된다.  

문화가 정신병 환자의 정신에 미치는 영향은 언제나 지역적이고 사적인 현상이다. 그래서 비록 이 책은 세계적인 추세를 묘사하지만, 그럼에도 세계적인 관점에서 이야기하지 않는다. 나는 (세계적 척도가 아닌) 인간적 척도와 관련된 영향을 드러내고자 하는 바람을 갖고 네 나라의 네 가지 질병을 다루기로 결정했다. 내가 이 이야기들을 고른 이유는 정신의학에 관한 서양의 믿음이 어떻게 저마다 다른 흐름을 타고 세계로 이동하는지를 각각의 이야기가 실례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빙의에 대한 믿음이 갈수록 생의학적인 정신병 개념에 밀려나고 있는 잔지바르 섬 이야기에서, 나는 정신분열병과 싸우는 두 가족 이야기를 묘사할 것이다. 또한 홍콩에서 거식증이 발생하는 현상을 보고하기 위해 14세 소녀 찰린 슈 치잉의 마지막 행적을 역으로 추적하고, 그녀의 죽음을 둘러싼 매스컴의 관심이 어떻게 그 지역에 서양 특유의 질병을 끌어들였는지를 보여줄 것이다. 또 일본에서 벌어지는 항우울제 팍실의 메가마케팅을 해체해, 제약회사들이 어떻게 치료약뿐 아니라 질병 자체를 팔아먹는지를 폭로할 것이다. 2004년 스리랑카에 몰아닥친 쓰나미의 여파는 외상후스트레스라는 진단과 외상의 영향에 대한 서양의 확신을 양손에 무기처럼 들고 재난 지역에 몰려든 외상 상담사들의 영향을 조사해볼 기회를 제공한다.  

나는 이들 각 장의 맨 끄트머리에서 초점을 다시 서양에, 특히 미국에 맞출 것이다. 먼 해안에서 보면, 정신질환과 인간 정신에 관한 우리 자신의 믿음을 구체적으로 결정하는 문화적 전제들과 확신들이 숨이 멎을 정도로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 시점에서 보면 종종, 정신이상과 자아에 관한 우리의 전제들이 참으로 이상하게 보일 것이다.  

이 책에서 교차문화 접근법을 보여주는 정신과의사들과 인류학자들을 통해, 나는 우리가 인류 역사의 주목할 만한 순간에 살고 있다고 믿게 되었다. 그들이 정신질환과 정신건강에 대한 매우 다양한 문화적 이해들을 기록하기 위해 열심히 연구하는 동안, 그들의 눈앞에서는 그 차이들이 사라지고 있다. 나는 그들이 열대우림을 파괴하는 불도저 바로 앞에서, 아직 남아 있는 종의 다양성을 필사적으로 기록하는 식물학자와 같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렇게 서로 다른 정신병 개념과 다양한 치료법이 사라지는 현상에 대해, 우리는 생물학적 다양성이 사라지는 현상을 대할 때처럼 심각하게 걱정해야 한다. 치유법들 그리고 정신건강을 유지하는 방법에 대한 문화 고유의 믿음들은 멸종해가는 동식물처럼 한번 사라지면 다시는 우리 곁에 돌아오지 않는다. 그런 동식물처럼 정신에 대한 이해의 다양성도 우리가 그 진정한 가치를 이해하기 전에 사라질 수 있다. 생물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열대우림의 무성하고 활기찬 생물의 다양성 안에는 언젠가 현대 전염병들을 치료할 수 있는 화합물들이 존재한다고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정신건강과 질환에 대한 문화적 이해의 다양성 안에는 우리가 절대로 잃어버려선 안 되는 지식이 존재할 수 있다. 이 다양성을 지우면 우리 자신이 위험해진다. 

 

[옮긴이의 글] 

가능한 반론들

‘옮긴이의 글’을 쓰면서 첫머리에 반론을 소개하기는 처음이다. 대부분은 책의 내용을 요약하거나 그에 동조하는 생각을 적었으니 말이다. 사실 이 책은 옮긴이가 갖고 있던 기존의 생각과 크게 부딪히는 면들이 있었다. 지금까지 진화생물학과 관련된 책을 20여 권 번역해온 옮긴이에게 뇌과학과 생의학의 성과는 거의 절대적으로 다가왔던 것이 사실이다. 예를 들어 옮긴이는 여러 책에서 프로작을 비롯한 항우울제들의 효과를 극찬하는 글을 접했고, 한편으로 알츠하이머병으로 고생하는 어머니에게 도움이 되는 치료제가 나오기를 기대하기도 했다. 그런 상황에서 이 책은 작으나마 지나칠 수 없는 충격을 주었고, 그간의 기대와 희망에 혼란과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아무리 가벼운 글이라도 혼란과 의심은 펜을 쥔 손을 얼어붙게 한다. 이 막막함 속에서 옮긴이는 미국 독자들의 평가가 궁금해 amazon.com의 독자서평을 훑어보았다. 수많은 칭찬과 긍정적인 평가들이 이어졌다. 저자의 저널리스트다운 문제의식과 성실하고 세심한 서술 방식에 합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가장 눈에 띄는 서평은 저자의 기본적인 관점을 비판한 글이었다. 짧고 단순한 서평이었지만 이 책에 대한 반론으로 충분히 가능하다고 판단해, 그 서평에 담긴 세 가지 반론을 소개하고 이 책의 내용과 비교 및 재검토하는 것으로 ‘옮긴이의 글’을 대신하고자 한다.  

먼저, 정신질환이 문화와 시대에 따라 다르다는 이 책의 전제에 대한 반론이다. 모든 인간은 공통의 뇌를 갖고 있고 정신질환은 뇌의 질환이라는 것, 우울증과 양극성 장애(정동장애), 정신분열병과 망상(사고장애), 섭식장애들과 외상후스트레스장애(스트레스 반응) 같은 여러 질환이 인류의 오랜 역사 기록에 꾸준히 보고되어왔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신질환들이 문화와 시대에 따라 어느 정도 다른 형태를 띤다고 해도, 기본적인 양상은 보편적이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이 생각은 적어도 이 책에 대한 반론으로는 부적합하다. 바로 그것이 생의학적 관점이고, 이 책에서 비판하는 미국식 관점이기 때문이다(이것이 반론이라면 이 책 자체가 그에 대한 재반론이 되므로 무의미한 순환에 빠진다). 생의학적 관점은 정신질환을 뇌질환으로 보고, 생의학적 진단과 치료법을 최우선으로 하며, 특히 뇌의 생화학적 불균형을 바로잡아 정신질환을 치료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저자는 홍콩의 식욕부진증과 19세기의 히스테리를 비롯한 여러 사례를 통해 생의학적 관점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정신질환들을 소개하고 DSM의 전지전능함을 비판한다. 특히 거식증과 폭식증 같은 섭식장애나 과거 서양의 히스테리와 몽환 증세(1장) 등은 DSM의 진단 기준에서 빗겨나 있는 것이 분명하고, 그런 질환의 생의학적, 뇌과학적 기초가 무엇인지 또는 그런 기초가 존재하는지 불분명하다. 이 질환들과 함께 동남아시아의 ‘아모크’나 중동의 ‘차르’ 같은 지역적인 정신병들이 모두 뇌의 문제에서 비롯되는 생의학적 질병일까? 개인간의 원인이 달라도(예를 들어, 자존감 붕괴와 서양 문화의 영향) 병의 양상이 똑같이 거식증으로 나타난다면 어떻게 생의학적 진단을 내릴 수 있을까? 그리고 그런 진단에 기초한 생의학적 치료법은 과연 어느 정도 효과를 거둘 수 있을까? 이런 의문들은 극단으로부터 한발 물러나는 겸손함을 요구한다.  

둘째, 서양의학의 치료법이 만국 공통이 아니라는 전제에 대한 반론이다. 그리고 그 연장 선상에서 생의학적 접근법이 문화적인 차이와 현지 전통을 이해해 문화적 감수성을 충분히 갖춘다면,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크게 도움이 될 것임을 강조할 수 있다. 사실 이 책은 정신질환의 문화적 차이를 설명할 때, 과학적 증거나 통계 또는 충분한 비교연구 등을 소개하지 않고 있다. 실제로 저자가 제시하는 것은 몇 개의 일화와 그 자신의 경험, 그리고 몇 권의 저서에 불과하다. 그것을 기초로 DSM의 중요성을 깎아내리거나 무시한다면 매우 위험한 시도일 것이다.  

이 책의 강한 어조와 저널리즘에 가까운 서술 방식 때문에 저자가 마치 DSM을 전면 부인하고 새로운 교차문화적 의학을 주장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생의학적 관점에 반하는 명백한 사례들과 개인적인 관찰이 무의미해지진 않는다. 물론 저자의 보고와 결론 사이에 과학적 공백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책은 엄밀한 증거와 통계 또는 비교연구를 수반해야 하는 연구논문이 아니라 관찰과 경험에 기초한 보고서이므로, 그런 공백 때문에 이 책의 가치가 희석되진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게다가 관찰과 서술이 충실하다면, 또 직관과 상상이 깊고 날카롭다면 그런 공백을 가로지르는 좋은 수단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파브르의 곤충기는 충실한 관찰과 기록만으로 훌륭한 과학을 만들어냈고, 아인슈타인의 직관과 상상은 우리에게 상대성이론을 가져다주었다.  

셋째, 약물치료와 거대 제약회사의 문제점을 지적한 것에 대해, 현대의 뇌과학과 약물치료가 정신질환으로 고통받는 수많은 사람에게 큰 도움이 되고 있다는 반론이 가능하다. 저자도 그걸 부인하진 않는다. 다만 그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뿐이다. 한 국가의 어떤 문제점을 지적할 때 국가의 기본적인 기능을 되짚을 필요는 없다. 더 나아가 한미 FTA가 뜨거운 이슈로 떠오른 시점에서 미국 제약회사들의 감춰진 면모를 볼 수 있는 4장의 이야기들은 우리에게 더욱 의미심장하다. 백혈병을 비롯한 난치병 치료제들의 약가 협상을 둘러싼 비판의 목소리가 거세다. 오늘날 거대 제약회사들은 성실한 연구 개발보다는 대학 연구소를 뒤지며 연구 성과를 ‘수색’하고 매입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지만, 그들이 약가 협상의 근거로 내놓는 ‘연구개발비’를 우리 정부가 제대로 반박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도 뼈아프게 들린다. 그뿐이 아니다. 제약회사들이 실제로 치료제의 부작용을 감추고 데이터를 왜곡한다면(4장), 이는 도덕적인 수준을 넘어 법적인 문제가 될 수 있다. 환자의 병을 치료하기는커녕 그의 건강과 생명을 위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을 번역하는 중간에 천안함 생존 장병들이 외상후스트레스장애 치료를 받고 있다는 뉴스를 접했다. 의문이 들었다. 과연 DSM의 진단과 치료법이 그 장병들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까? 혹시라도 쓰나미가 휩쓸고 지나간 스리랑카에서처럼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불편과 번거로움을 초래하거나, 혼란을 가중시키거나, ‘괴물’을 일깨우는 것은 아닐까? 물론 인간 사회에서 과학보다 신뢰할 만한 것은 드물지만, 맹신을 견제하는 문제의식은 항상 필요하다. 이 책이 바로 그것을 일깨운다고 확신한다.

2011년 2월, 김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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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이 온다 2011-02-23 17: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리아의 나라는 정말 흥미로운 이야기이네요. 챙겨서 읽어봐야겠어요. ^^
 

 

생태경제학 시리즈 세 번째 책 <디버블링 - 신빈곤시대의 정치경제학>이 어제 나왔습니다. 우석훈 선생이 각종 지면에 꾸준히 글을 쓰고, 여러 책에 공저자로 이름을 올려 '또 책이 나왔나?' 싶기도 하지만 사실 같은 시리즈의 <생태요괴전>, <생태페다고지> 이후 단독 저술은 처음입니다. 뭐 그래도 1년 반 정도이긴 합니다만.  

표지의 제목이 '더버블링'으로 보인다는 몇몇 사람들의 지적도 있지만 최근의 경제 지표와 흐름을 보면 당연히 '디버블링'이겠죠. 저도 이제사 펼쳐보는 중이라 깊이 있는 말씀은 드리지 못하지만, 지금까지 나온 우석훈 선생의 책 가운데 가장 두껍다는 부분도 중요한 지점 아닐까 싶습니다. 그 스스로 이 책이 생태경제학의 하일라이트라고 말했듯이 '정치경제학 비판'을 넘어 '정치경제학 입론'의 역할을 해주길 기대합니다. 그럼, 꽤 긴 서문을 소개합니다.

 

[서문] 

살면서 특별히 운이 있다고 생각해본 적은 별로 없다. 뽑기와 같이 확률로 영향을 받는 게임에서 이겨본 적이 거의 없고, 운이나 재수 같은 것도 거의 없는 편이다. 유난히 승부에 강하다고 하는 사람들을 종종 보는데, 나는 승부처럼 생긴 것에서는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당구는? 30…. 포커도 칠 줄 모르고, 돈을 걸고는 고스톱을 쳐본 것이 고등학교 시절로 올라간다. 시험운도 별로 없는 편인 것 같다. 어쨌든 운과 확률은 나와는 다른 세계의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편이지만, 선생 복마저 없었던 것 같지는 않다. 대체적으로 나에게 가장 중요한 시절에, 나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쳐줄 수 있는 스승들을 잘 만난 편인 것 같다. 그리고 독서도 운이 있는 편인 것 같다. 난독이라는 생각으로 손에 잡히는 대로 책을 읽었지만, 특히 고전을 아주 어렸을 때 읽었던 특별한 행운이 있었던 것 같다. 책이 재미있어서 읽는다고 하는 사람들도 가끔 보는데, 내가 본 책들은 재미없기로 소문난 책들인데다 크기는 대개 전화번호부 비슷하다. 운이 좋으면 현대 불어나 현대 영어로 되어 있지만, 몇 세기만 위로 올라가더라도 동사변화나 격변화가 지금과는 좀 상이하고, 라틴어가 많이 포함되어 있어서 읽기가 힘들다. 재미있어서 읽은 건 아니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참고 읽었다고 하는 게 솔직한 얘기일 것이다. 좌파로 세상을 살아가기로 마음을 먹은 이후, 독서 외에는 날 지켜줄 것이 없었다. 길을 잃을 뻔한 위태로운 순간들마다 책과 스승들이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운이 아예 없었다고는 말할 수가 없을 것 같다. 

나한테 영향을 많이 미친 학자들이 적지 않은데, 그중에는 20세기에 등장한 학자들도 여러 명 있다. 몇 년 전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20세기에 등장한 주요 학자들을 재미삼아 꼽아본 적이 있었는데, 나에게 전체적인 방향과 깊은 영감을 준 20세기 학자들이 대부분 여성 경제학자들과 일부의 여성 과학자라는 것을 알고는 놀랐던 적이 있다. 물론 내가 공부할 때에 특별히 여성에 대해서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거나, 젠더 경제학 같은 논문을 많이 은 것은 아니다. 젠더 경제학이라는 게 세상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박사학위 논문을 제출하고 나서 지루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논문집들을 뒤져보던 시기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경제학 공부를 시작하자마자 고용이라는 변수에 대해서 매우 인상깊은 감명을 받았었는데, 일반적인 경제학자들이 케인스의 거시경제학을 수용하면서 고용이라는 변수로 들어가는 것과 달리, 나는 조앤 로빈슨(J. Robinson)의 ‘골든 에이지’라는 일종의 황금률 모델을 통해서 고용의 세계로 들어왔다. 실제로는 케인스와 조앤 로빈슨이 같은 건물에서 연구하던 시절이 있었으니, 누가 먼저인가, 누가 누구에게 영향을 주었는가에 대해서 학설사 내에서는 가끔 논란이 되기는 한다. 어쨌든 두 사람의 공통의 선조는 경제학자 시절의 맬서스, 즉 인구론의 청년 맬서스가 아니라 백화점과 같이 부자들이 돈을 쓰게 하는 것이 경제성장에는 매우 중요하다고 주장하던 후기 맬서스라고 할 수 있다. 어쨌든 조앤 로빈슨과 케인스 사이에는 경제적 대상을 다루는 데 미세한 차이가 있다. 케인스의 이론이 꽃피던 시절, 세상은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거대한 전쟁으로 치달렸다. 그러나 조앤 로빈슨은 전쟁에 반대했고, 전쟁이 나지 않는 방식으로 국민경제의 문제를 풀기 위해서 내부 고용을 내부적 방식으로 해결하고자 했던 것 같다. 

좌파 경제학 내에서 전쟁에 가장 강렬히 반대했고, 또한 미국 철도의 건설 사례 등을 통해 건설산업이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고 분석해낸 건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난 후 자국 군인들에게 맞아죽었던 로자 룩셈부르크였다. 케인스와 함께 로자는 소비의 역할을 강조하고 유통을 강조했던 일종의 유통주의자 정도로 간주되지만, 로자는 자본주의의 신비한 매력에 그다지 매혹당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시장과 자원 그리고 자연의 물질적 한계에 대해서 주목했었고,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필시 로자가 살아 있었다면 러시아 등 동구권 국가에서 진행된 자연대개조 사업과 같은 반생태적 경제운용에 대해 반대했었을 것이다. 독일의 전쟁에 대해 사회민주당이 찬성할 때, 그는 동료들과 함께 ‘스파르타쿠스단’이라는, 침략전쟁에 반대하는 정치그룹을 만들게 된다. 인류의 정신세계에는 고귀함을 남겼지만, 유태인 출신의 로자는 정치적으로는 소수파여서 집권을 하거나 스스로 정책을 운용해볼 기회를 갖지는 못했다. 그러나 로자의 생각이 현실사회주의 쪽으로 기울었다면, 아마도 스탈린주의 시대의 토목사업들이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지 않았을까? 가끔 그런 상상을 해본다.  

 

방법론, 모델, 그리고 삶의 스타일까지 나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준 것은 로마클럽 보고서의 연구 리더였던 도넬라 메도우(Donella Meadows)라고 할 수 있다. 당시 MIT에서 시스템 다이내믹스와 환경모델링의 젊은 연구자였던 메도우에게는 인류의 미래를 진단할 기회가 로마클럽의 연구기금과 함께 찾아왔고, 당시로서는 손대기 어려운 그 모델을 풀어볼 수 있는 슈퍼컴퓨터가 MIT에는 있었다. 그녀의 주변에는, 비록 나중에 이혼은 하게 되지만 데니스 메도우와 같은, 평생을 함께할 연구 동료들이 있었다. 그렇게 그들은 ‘월드(WORLD)’라는 시스템 다이내믹스 모델을 만들었고, 그 연구 결과가 바로『성장의 한계(Limits to Growth)』라는 그 기념비적인 저서이다. 우리에게는 ‘로마클럽 보고서’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귀농하여 조그맣게 유기농농장을 일구면서 그녀는 연구를 계속했는데, 월드 셋째 버전으로 진행하던 연구는 그 끝을 보지 못하고 최종 결론만 남겨놓은 채 종료되고 말았다. 전 남편이었던 데니스 메도우가 이 월드3의 분석 결과를 유고집으로 출간했는데, 나에게는 시리즈 셋째권인『촌놈들의 제국주의』가 월드3의 장기 전망 위에 세워진 책이었다. 월드 모델을 동아시아 버전으로, 조금 작게 만드는 대신에 한중일의 디테일을 집어넣은 모델로 변형하고자 하는 꿈을 가지고 있었지만, 혼자 작업하는 것인지라 지역 모델링까지 만드는 것은 힘에 버거워서 새로운 모델링을 추가하지는 못했다. 언젠가는 나도 홀가분하게 되었을 때 시스템 다이나믹스와 거시경제 모델을 연동시키는 생태경제 모델링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는 하다. 15년째 마음속에만 품고 있는 나의 로망이다. 그 로망이 도넬라 메도우에게서 나온 셈이다. 

그리고 생물학 내에서는 여전히 마이너의 위치에 있지만, 전세계 생물학 교과서에 자신의 연구 결과가 들어가게 된 사람, 린 마굴리스(Lynn Margulis). 세포 내의 미토콘드리아에 관한 얘기는 린 마굴리스가 ‘가이아’ 이론으로 코너에 몰린 제임스 러브록(J. Lovelock)을 방어하면서 나왔던 연구 중의 하나이다. 공생(symbiosis)이론이라고 할 수 있는 그의 기본 테마는, 분자생물학에서 진화는 유전자 단위에서 벌어지는 경쟁만이 아니라 서로 이질적인 두 종의 협력적 합성에 의해서도 진행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미토콘드리아가 보다 상위의 포식자에게 잡아먹히고 난 결과이고, 그런 방식의 합성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경쟁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경쟁에서의 승리가 진화의 결정적 동인이라고 하는 것과는 다른 방식의 협동을 보여주는 린 마굴리스의 연구는, 확실히 이단적이며 당분간은 그다지 환영받지 못할 연구 방향이기는 하다. 『코스모스』의 저자이자 린 마굴리스보다는 국제적 지명도가 훨씬 높은 칼 세이건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도리언 세이건은 여전히 어머니인 린 마굴리스와 공저자로 활동하는 중이다. 세이건과 마굴리스 사이에서 태어났으니, 당연히 박사학위도 받았을 것이고, 좋은 대학에서 연구도 할 것 같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아들을 그렇게 키우지는 않았다. 과연 학위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공부와 직접 연관된 것은 아니지만, 마굴리스의 삶은 그 자체로도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바가 있는 것 같다. 

이렇게 몇 년 전 내 생각을 지탱하는 학자들에 대해 생각해봤을 때, 대체로 위와 같은 4명의 여성학자들이 내가 가고자 하는 방향을 안내하고 있었다. 4명 모두 여성이라는 공통점 외에는 학문 분야도 다르고, 자신이 속해 있는 이념적 방향도 달라서, 같은 기준 위에서 뭔가를 분석한다는 것은 우스꽝스럽고 또 균질적이지 않은 분석 결과를 줄 것이다. 만약 가설을 세워본다면, 마르크스든 케인스든 전쟁으로 뭔가를 해결하는 방식을 전혀 배제하지는 않은 남성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남성학자들 중에서도 전쟁에 대한 공포 위에 자신들의 학문이나 예술을 세워놓은 사람들은 많다. 대표적으로는 유언을 대신한 마지막 저서로『문명의 질병』을 우리에게 남겨놓은 지그문트 프로이드가 그랬고, 생태소설의 길이자 평화소설의 원형을『반지의 제왕』으로 보여준 톨킨이 또한 그렇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경제학자 중에서, 전쟁을 통해서 혹은 대규모 토목사업을 통해서 뭔가 해결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 사람 혹은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사람은 드물다. 우리 안을 들여다보고, 지나치게 큰 테제가 아닌 삶의 일상성에서 너무 멀어지지 않고 자신의 학문을 세운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은 것이다.
 

한국에서 내가 만났던 경제학자 중에서 ‘토건이 아닌 대안’에 대해 비록 이론의 출발점이나 정책의 결론은 다르더라도 대체적으로 동의했던 사람이 있었을까? 환경경제학과 같이 기본적으로 흐름이 같을 수밖에 없던 분야의 사람을 제외한다면 두 명 정도를 본 것 같다. 생태경제학의 주요 학파인 런던학파의 결론에 대해 가장 큰 관심을 보였던 사람은 연세대학교의 조하연 교수였고, 내가 전혀 생각해보지 못했던 방식으로 또 다른 가설을 제시했던 사람은 서울대학교의 이지순 교수였다. 이지순 교수는, “만약에 박정희가그때 압축성장과 같은 방식이 아니라, 생태적인 방식으로 한국 경제를 이끌었다면 우리는 고도 성장을 못했을까?”아마 좌파 비슷한 흐름이라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이런 얘기를 했더라면 큰 스캔들이 되었을 텐데, 그는 우리가 시행했던 자연에 대한 폭력적인 방식의 산업화에 대해‘다른 방식’이라는 가설을 가지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시카고 출신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기는 하다. 20세기 내내, 우리는 다른 가설을 가지고 있으면 그 결론도 당연히 다를 것이라는 식의 ‘학문의 당파성’에 붙들려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한쪽에서는 케인스와 케인스 아닌 것, 또 다른 한쪽에서는 하이에크와 하이에크 아닌 것, 그렇게 학파를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자본론』과『자본론』아닌 것, 그렇게 그 출발점부터 이론들을 나누고, 그것들은 서로 현실에서는 전혀 만날 수 없는 것처럼 여겼었다. 

그러나 요즘은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잘 분석된 사회과학 혹은 경제학적 진단은, 그 출발이 각기 달랐지만 대체적으로 유사한 결론을 만들어낼 수 없는가? 물론 ‘마지막 순간’이라고 부르는 혁명이 발생할 것인가 발생하지 않을 것인가, 자본주의는 붕괴할 것인가 아니면 붕괴하지 않을 것인가와 같은 최종적이며 철학적인 해석이 같을 수는 없다. 그러나 분석 수준을 낮추어서, 노무현 시대의 ‘한국식 뉴딜’은 한국 경제에 긍정적이었는가? 여기에 대해서는 학파가 다르거나 이론이 다르더라도 유사한 결론이 나올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찬가지 방식으로, 지금 이명박 정부에서 운용하는 토건식 국민경제는 최소한 10년간 별다른 위기 없이 장기적 번영이 가능한 것인가? 이렇게 좁혀진 질문에서는 만약 그것이 잘 분석된 것이라면, 거의 유사한 결론이 나오지 않을까, 이런 생각들을 좀 해보게 되었다. 당연한 것이, 분석가나 이론가가 그냥 그 자체로 순수이론을 현실 경제로 바로 가지고 올 수는 없고, 여러 가지 많은 수정을 가하게 되고, 데이터에 대한 해석에도 연구자의 주관이 생각보다는 많이 들어가게 된다. 이른바 ‘캘리브레이션(calibration)’이라는 작업을 하게 되는데, 이 과정을 통해서 절대로 한 자리에 같이 설 수 없을 것같고, 한 테이블에 같이 앉을 수 없는 것 같은 논의들이 사실은 유사한 결론으로 가게 되는 것이고, 학제간 혹은 학파간 소통이 가능해지는 것이 아닐까? 만약 이러한 연구자의 주관적 해석과 방법론적 수정이 아예 불가능하다면, 세상에는 한 개의 학파 그리고 한 개의 경제이론만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아마 특수하고도 교조적인 경제학 이론이 아니라면, 지금의 한국 경제는 현재의 방식이라면 위기이고, 그 위기가 특별한 전환점이 없다면 10년 이상 갈 확률이 높다고 할 것이다. 케인스주의자든, 시카고의 시장을 중심으로 하는 학파이든, 아니면 마르크스주의자이든. 진단에 따른 대책에는 조금씩 차이가 있더라도 대체로 현상황에 대한 진단 자체가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경제학이 심리학이라면, 청와대에서 원할 만한 얘기들을 하면 그만일 것이다. 그러나 집권자들에게 불행히도 대다수 경제학자들은 경제학이 심리 영역에 속한 학문이 아니라 과학에 속한 학문이라고 기꺼이 대답할 것이다. 이것은 좌파이거나 우파이거나 하는 그런 문제가 아니라 경제 현상 내부에 고유한 법칙이라는 것이—비록 경성(硬性) 과학이라고 부르는 자연과학의 법칙의 지위에는 가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말이다—경제학을 하나의 학으로 만들어주는 기반이었고, 그 전통은 1776년 애덤 스미스의『국부론』이 등장한 순간으로 올라간다. 대통령이 원하는 말을 그냥 해주는 것이 경제학이었다면, 사회과학으로서의 경제학이 이렇게 오랫동안 독자성을 가진 학문으로 버티지는 못했을 것이다. 경제학이 ‘경세제민’으로 불리던 시절 혹은 정치경제학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학문으로 등장하던 시절 이후로, 많은 경제학자들은 정책의 조언자가 되는 것으로 자신의 학술적 입장을 정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위정자가 듣고 싶어하는 말을 그냥 그대로 하지는 않는 것을 일종의 전통으로 유지했다. 그래서 경제학은 언제나 정치경제학이 라고 사람들이 종종 표현하는 것이다. 

현재 한국에서 ‘탈토건’이라는 용어는 각각 다른 분야에서 출발한 많은사람들이 언젠가 한 번은 만나게 되는 이론적 사거리 같은 것이다. 나처럼 생태학에서 출발했거나 환경경제학에서 출발한 사람들은 조금 먼저 이 사거리에 도착했던 것 같다. 복지에서 출발한 사람들이 요즘은 복지예산과 토건예산의 충돌 속에서 이 사거리에 도착했고, 여성문제에서 출발한 연구자들도 이미 도착해 있다. 전통적인 케인스주의자들도 오래지 않아 이 사거리에 도착할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예상했었는데, 아마 정운찬 총리가 여러 가지로 길을 잃고 헤매는 바람에 늦어지는 것 같다. 그렇다면 시카고학파라고 불리기도 하는 시카고 출신들은? 이지순 교수의 경우처럼 그들 중 일부는 이미 사거리에 도착해 있고, 전경련이나 정부 연구원에 있는 사람들은 정신적으로는 이미 도착해 있지만 아직은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없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 같다. 나는 한국에서 경제학을 전공했거나 아니면 경제문제에 관심을 가졌던 사람들 상당수는 2010년에서 2011년 사이 ‘탈토건’이라는 이론의 사거리에서 한 번쯤은 서로 만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원래 이론이라는 것이 그러하다. 전혀 만날 것 같지 않지만, 유사한 결론과 유사한 개념으로 역사의 소용돌이 앞에서 다른 학파와 다른 접근들이 그렇게 때때로 만나게 된다. 물론 사교육이나 대학 개혁의 기본 방향 같은 것들에서 만날 확률이 그렇게 높아 보이지는 않지만, 정상적인 경제학자라면 탈토건의 사거리에서는 한 번쯤 만나게 된다. 한국에는 김광수경제연구소 그룹처럼 학파 바깥에서 경제현상을 분석하는 집단들도 있는데, 그 중에 일부는 벌써 탈토건 사거리에서 서로 만나고 있다. 내 생각에는, 그게 업자와 경제학자 사이의 차이일 것 같다. 부동산업자들은 자신의 산업 이익에 복무하지만, 많은 경제학자들은 업자와는 달리 학문에 복무한다. 때로 지나치게 어려운 레토릭으로 일반 국민들의 길을 잃게도 하지만, 정치에 복무하거나 업계에 복무하는 업자와는 다른 자신만의 길을 가지고 있고, 그래서 사람들은 그들을 경제학자라고 부르는 것 같다. 그러나 탈토건이라는 사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쳤다고 해서, 이 사람들의 진단과 방향이 모두 같을 필요는 없고, 그럴 수도없을 것이다. 그게 학문이다. 만났다 헤어지고, 그게 학자의 삶이다. 이론은 늘 그렇게 변하고, 진단은 유동적이고, 정책은 상대적이다.  

자, 그렇다면 이제 이렇게 탈토건의 사거리에서 우리가 헤어지면 언제 다시 만나게 될까? 내 짐작이 맞다면, 한국에서 양심과 존엄성을 가지고 있는 경제학자라면 ‘빈곤’이라는 또 다른 사거리에서 우리는 다시 마주칠 것 같다. 우리 모두는 한때는 빈곤에서 출발한, 세계 최빈국 중의 하나였던 나라에서 자신의 삶을 시작한 사람들이다. 아직은 적은 봄을 만난 데 불과한 젊은이라면, 최소한 그들의 부모는 어린 시절 많은 봄을 가난과 함께 최빈국의 나라에서 보냈을 것이다. 그리고 그와는 조금 다른 양상의 빈곤을 이제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된다. 이론적으로 일본은 조금 먼저 이 빈곤이론을 만났다. 우리보다 1인당 GDP가 여전히 두 배가량 되는 나라이지만, 그들 안에서도 예전에 경험해보지 못한 색다른 빈곤을 만났고, 우리는 그것을 ‘신빈곤’이라고 부른다. 이론적으로는 일본보다 약간 늦었지만, 현실의 전개과정은 한국이 훨씬 빠른 듯하다.  

물론 그 누구도 한국인들이 ‘빈곤의 덫’에 빠지거나 좌절하게 되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어떤 경제학자나 혹은 어떤 정치인도, 이 흐름을 멈추게 하거나 최소한 완화시키기 위한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권위나 권능을 가지고 있지 못한 것 같다. 생각해보면, 세계적으로도 위기가 이번이 처음이 아니고, 또 한국이 부딪힌 위기도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아마 인류가 멸망의 위기에 가장 가까이 갔던 것은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때였고, 실제로 그때 우리는 핵전쟁 바로 코앞까지 갔던 것 아닌가? 언제 다시 신냉전의 시대가 올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미·소가 일촉즉발의 위기까지 갔던 냉전시대는 끝이 났다. 위기는 매번 불안하고 위태롭고, 그 해결책이 오히려 더 큰 새로운 위기를 만들어내는 레모니 스니켓의 ‘불행 시리즈’의 구조에 더 가깝다. 당장 우리만 보더라도 IMF 경제위기를 극복한다고 도입한 여러가지 장치나 제도들이 단기 위기를 오히려 장기 위기 그리고 구조적 위기로 바꾸어버린 불행의 역사가 있지 않은가? 

아마 당분간은 한국 특유의 토건으로 인한 문제를 다시 토건으로 풀기 위한 조치들이 간헐적이지만 지속적으로 취해질 것이고, 이는 마치 ‘자기강화형 시스템’처럼 더 많은 빈곤현상을 일으킬 것이다. 그 과정을 막아줄 수 있는 권능을 가진 사회 원로나 제3의 중재자 같은 것은 한국에 없다. 그건 당연하지 않은가? 선진국이 되어간다는 것은, 국민들이 스스로 많은 것을 지역 차원이든 자치 차원이든 코뮌을 형성하면서 자체적으로 결정한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우리는 토건을 정지시킬 그런 국민적 주체도 가지고 있지 않다. 21세기로 넘어오면서 우리는 ‘절차적 민주주의’라는 개념 하나를 가지고 왔고, ‘누가 누구를 위해서’같은 주체에 대한 질문은 우리가 혐오했던 한국의 과거라는 20세기를 쓰레기통 삼아 던져버리고 온 것 아닌가? 정작 해체시켜야 할 것은 지나친 국가주의로 인한 중앙형 시스템 같은 압축성장의 토건형 경제구조였는데, 우리가 21세기를 환상적으로 바라보면서 해체시켜버린 것은 주체로서의 국민, 사회의 주체 그 자체가 아니던가? 지식인이면서 동시에 주체로서의 대학생을 우리는 더 이상 사회적 주체로 인식하지 않고, 그들을 ‘20대 소비자’라는 식으로 소비자로서의 격만 부여한 것 같다. 고전적인 의미에서 사회적 주체가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한 것인가, 아니면 그들이 스스로 역사 속에서 걸어나와 우리 앞에 등장할 것인가? 국민경제 내에서는 안과 바깥이 별도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딜레마에 부딪히게 된다. 우리 모두 소비자이고 생산자이면서 동시에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기도 하다. 주체로서의 격을 잃어버린 역사 바깥으로 튕겨져 나온 듯한 흐름 속의 미아들, 그것을 정치권에서는 여당이나 야당이나, 모두 해체되어 권위와 권능을 잃어버린 이탈적 존재로서 ‘서민’이라고 부르는 것 같다. 서민경제는 토건경제를 작동시키는 또 다른 비밀코드이며, 주체로서의 국민을 서민이라고 부르는 그런 국민경제의 역사는 전세계적으로 21세기의 대한민국밖에는 없다. 서민은 주체가 아니고, 그들은 이 흐름을 전도시키거나 수정할 힘을 가지고 있지 않다. 실제로는, 그렇게 하라고 한나라당에서 국민들을 자꾸 ‘서민들’이라고 부르는 것 아닌가? 국민은 무서워도, 서민은 무섭지 않다. 그게 존재론적인 서민경제의 실체 아닌가? 

상황이 이러니, 대다수 국민들은 한 명 한 명씩 ‘신빈곤’의 광야로 끌려나와 그야말로 ‘회중’을 형성할 것이다. 교회에서는 이들을 출애굽의 전설에 따라‘나온 자’라고 불렀고, 마르크스는 Lump, 즉 덩어리를 형성한 자들이라는 의미에서‘룸펜’이라고 불렀다. 그 룸펜프롤레타리아트의 시대가 21세기의 첫 10년을 지나고 다시 한국에 돌아오고 있고, 일부는 이를 ‘위태로운’이라는 형용사인 precarious와 접목시켜‘프레카리아트(precarriat)’라고 부르기도 한다. 20~30대를 중심으로 상황을 본다면‘프리터(freeter)’현상이 될 것이고, 세대의 특징을 해소한 채 노동형태의 눈으로만 본다면 ‘워킹 푸어’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노동빈곤계층, 아무리 일해도 가난을 벗어날 수 없는 지금의 구조에 이제 진행되기 시작한 ‘디버블링(debubbling)’과 함께 하우스 푸어가 등장했다. 각자 처해진 상황과 양상에 따라서 다른 변주와 다른 양상을 가지겠지만, ‘국민일반 가난시대’라고 할 수 있는‘신빈곤의 시대’에서 한국의 민중들은 서로 만나게 될 것이다. 서민이든 중산층이든 노동계층이든 대체로 경제적 안정성이라는 관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게 되는 대중 평등의 시대에, 우리가 20세기에 던져놓고 온 민중들이 다시 돌아오는셈이다. 물론 주체로서의 민중이 과연 21세기라는 강을 넘어서 우리 앞에 돌아오게 될지는, 그건 역사가 남겨놓은 숙제이고 미스터리일 것이다.  

그러니 경제학자들이 다음에 만나게 될 이론적 사거리는 빈곤이 아닐 수 없다. 대중들이 빈곤의 광야에서 길을 잃고 있는데, 학자들만 혼자서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그런 나라는 없다. 결국 탈토건에서 한번 만났던 이 이론적 흐름이 결국은 신빈곤에서 다시 한번 만나게 되지 않을까? 그게 내가 생각하는 정상적인 사회와 학자 사이의 관계이고, 현실과 이론 사이의 관계이다. 그것은 정치경제학일 수도 있고, 생태경제학일 수도 있고, 지역학일 수도 있고, 정통 수리경제학일 수도 있는데 아직 한국에는 학자적 양심을 버리지 않은 좋은 학자들이 많이 있다고 본다. 그러나 앞으로 당분간 한국에서 경제학이든 아니면 사회과학이든, 빈곤현상을 빼고 한국 경제에 대해 논하는 것은 불가능한 순간이 올 것이다.  

이 책의 부제에서 나는 ‘정치경제학’이라는, 21세기라는 시간에서 토건경제와 공사주의(工事主義)에 익숙한 많은 사람들이 껄끄러워할 게 분명한 제목을 집어들었다. 경제학의 연구대상은 재화와 서비스의 재생산, 경제적 주체의 재생산 그리고 마지막으로 경제제도의 재생산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19세기의 정치경제학이 상품의 재생산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면, 나는 생명의 재생산 즉 사람과 사람 아닌 것들이 어떻게 국민경제라는 틀 내에서 재생산되며 경제로부터 영향을 받고, 다시 경제계에 영향을 주는지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즉, 나는 ‘생식’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경제학도인 셈이다. 토건과 빈곤 그리고 생식의 문제는 국민경제 내에서 그리고 국토생태 내에서 아주 긴밀하고도 은밀한 변증법을 형성한다. 생태와 빈곤이 한국 자본주의라는 매우 특수한 국민경제 내에서 빚어내는 현상황은, 여전히 경제학은 곧 정치경제학이라는 고전적 테마로 향하게 만드는 것 같다. 

나 혼자서 ‘경제 대장정’이라고 부르는 12권의 시리즈는 4권의 책으로 구성되는 세 개의 작은 시리즈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은 그 중의 제7권에 해당하며, 생태경제학 시리즈로는 셋째권에 해당한다. 전체적으로도 하일라이트에 해당하고, 개인적으로도 내가 지금까지 했던 공부들을 2010년의 한국경제라는 특수 상황에 맞춘 채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 노력했던 책이기도 하다. 아직은 대정정을 끝내기 위해서 갈 길이 좀더 남았는데, 지금까지 이 길을 도와준 많은 분들에게 이 기회를 빌어서 잠시 감사를 드리고 싶다.  

이 책을 계기로 나에게 작은 소망이 있다면, 『정치경제학 원리(Principles of Political Economy)』에서 보여진 존 스튜어트 밀이라는 아주 매력 넘치는 학자의 경제적 영감에 대해서 한국의 독자들이 한번쯤 만날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다. 전쟁 없는 사회, 소녀들이 노동과정에서 착취당하지 않는 경제, 그리고 여성들이 참정권을 가지고 투표할 수 있는 정치, 그렇게 존 스튜어트밀이 가졌던 로망은 19세기의 양심일지도 모른다. 생산과 전쟁의 시대였던 20세기 내내 밀의 정치경제학은 망각되었지만, 신빈곤의 시대로 가면서 우리는 다시 한번 이 오래된 사상가의 낭만적이면서 매력적인 사유를 만나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2011년 2월, 우석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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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의수 2011-02-22 0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참 좋은 책이네요...

이러한 좋은 담론이 한국 사회에서 활성화 되길 기대합니다.

좋은 정보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정은서 2011-02-26 05: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2월에 제가 접하고픈 독서의 세계를 보여 주셔서 감사드립니다아~ 꾸벅인사로..^^;;
이제 실행의 단계를 밟으려 한답니당
건강 유의하시고 무궁한 건승을 바라며 이만총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