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계의 두 고수가 만났다. 한겨레 '책과 지성' 팀장으로 인문사회 도서를 꾸준히 소개해온 고명섭 기자와 '로쟈의 저공비행'이란 블로그로 강호를 평정한 로쟈 이현우. 알라딘은 고명섭 기자의 서평집 <즐거운 지식> 출간을 기회로, 꼭 함께 보고 싶었던 둘을 한자리에서 만났다. 오프라인과 온라인의 최고수가 만났으니 불꽃이 튈 만하다. 당대 최고의 '책꾼'들이 풀어내는 이야기는 책에서 서평으로, 다시 앎에서 삶으로 이어지며 듣는 이의 머리와 가슴에 횃불을 놓았다. 오늘 그 끝없을 이야기의 실마리를 풀어본다.                                                                 
                                                                  (인터뷰 진행 및 정리: 알라딘 인문MD 박태근)

 

 

책의 바다를 항해하라!

사회 : 오늘 책의 달인 두 분을 함께 모시고 이야기를 나누게 되어 무척 반갑고 즐겁습니다. 특히 고명섭 선생님께서는 이번에 <즐거운 지식>이란 서평집을 출간하셨지요. 축하드립니다. 오늘은 책의 세세한 내용보다는 책을 둘러싼 다양한 이야기를 함께 나누면 어떨까 합니다. 우선 고명섭 선생님께서는 <담론의 발견>에 이어 이번 <즐거운 지식>에서도 독서를 항해에 비유하셨는데요. 그 까닭이 궁금합니다.

고명섭 : <담론의 발견> 때 왜 서문을 그렇게 썼는지는 사실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는데, 노이라트의 배가 그때 내 마음을 잘 보여주는 것 같아서 그러지 않았을까 싶어요. 대양 한가운데서 배가 고장 났는데 되돌아갈 곳도 의지할 곳도 없고, 오직 배 안에서 부품이든 도구든 찾아 고칠 수밖에 없다는 대목이 마음에 확 와 닿았지요. 그렇게 우리는 전망을 찾기 어려운 시대를 살고 있다는 이야기로 들렸고요. 돌아보면 그 시절에 앎을 향한 도전을 항해에 비유하는 말들이 심심찮게 있었는데, 니체 텍스트가 유행을 하는 것과 관련이 있지 않나 싶어요. 이번 책에서는 지난번에 이어 자연스레 항해라는 비유를 쓴 듯하고요.

사회 : 이현우 선생님께서는 <즐거운 지식>에 추천사를 써주셨는데요. 여기에서 고명섭 선생님을 ‘일등 항해사’라 부르셨습니다. 선생님 책인 <책을 읽을 자유>에서는 ‘지의 항해사’라는 호칭도 나오는데요.

이현우 : 서문에서 항해가 나오길래, 왠지 기대하셨을 듯해서요. (웃음) 또 마침 그때 <모비딕>을 읽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자연스레 그런 이미지가 떠올랐어요. ‘지의 항해사’는 편집자가 붙인 문구고요. 비평고원에 있는 제 게시판 이름도 ‘책의 바다’거든요, 이것 역시 제가 만든 건 아니지만 그런 표현을 자주 쓰게 되네요.

사회 : 저는 이런 비유가 익숙하면서도, 뭔가 어긋난 느낌을 받았거든요. ‘항해’라는 건 지금 우리가 하는 행위라기보다는 고전적인 느낌이 강한데, 독서라는 행위는 근대적 경험의 측면이 있으니까요.

이현우 : 그러니까 올드하다는 이야기인 거죠? (웃음)

사회 : 어떤 영화에서처럼 클래식하다고 해두겠습니다. (웃음)

고명섭 : 사실 맞는 지적이에요. 처음에 그 표현을 쓸 때 이게 올드냐 클래식이냐 걱정을 좀 했거든요. 저는 항해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어렸을 적 본 영화 <모비 딕>이에요. 그레고리 펙이 주연했죠. 그리고 말론 브랜도가 출연한 <바운티호의 반란>(1962)이 기억에 강하게 남아 있는데, 세 번 정도 본 듯해요. 선상 반란으로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망망대해에 갇힌 존재, 이런 이미지가 있어요. 옛날 얘기라는 말이지요.
  변명을 좀 하자면 역시 책은 옛날 책이 좋고, 책 이야기를 예스럽게 해 보자, 정도로 이해해주시면 어떨까 합니다. 사실 제가 심리적으로는 반근대주의자예요. 현대성에 반감이 많습니다. 그래서 기계식 동력기관이 출현하기 이전 세상이 좋았다는 생각이 있어요. 예를 들면 배도 풍력으로 가는 배가 좋고 터빈을 돌려서 가는 배는 배라고 생각을 안 하거든요. 정리하면 올드패션이지만, 저는 이게 정서적으로 좋고 편하다는 말이지요.

이현우 : 항해에 대해 조금 심층적인 이유를 말씀해주셨는데, 저는 항해보다는 ‘책의 바다’라는 말. 너무 많고 망망대해를 보는 듯 막연하고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가야 할지 궁금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한, 그런 이미지를 보존하려다보니 항해나 항해사 이미지가 따라붙게 된 게 아닐까 싶어요. 근대에 반대하거나 이런 이유는 아니고요. (웃음)

고명섭 : 저는 전근대주의자 혹은 반근대주의자적인 태도가 있는데 그간 공표를 하지 못하고 살았어요. 반동으로 몰릴까봐서요.(웃음) 그런데 마르크스주의가 망가지고 나서 여러 대안담론이 다시 소개됐잖아요. 예를 들면 아나키즘을 이야기할 때 중세의 도시, 근대 이전의 살을 모델로 삼기도 하거든요. 라다크처럼 말이죠. 이렇게 ‘과거가 사실 미래’라는 담론들이 나오는 상황이다 보니, 전근대주의자라고 얘기해도 예전처럼 이상하게 보지는 않는 것 같기도 하고요.
  

 



어디에 어떻게 쓸 것인가 하는 문제

사회 : 고명섭 선생님께서 쓰시는 서평은 신문지상에 공개되는 게 전제인데 블로그에 올리는 서평과 다른 지점들이 무엇일까요? 또 사적 서평이라는 지점에서 혹 남몰래 조용히 하고 계신 블로그가 있나요?

고명섭 : 공적 지면과 사적 지면의 차이에 대한 질문 같은데요. 이번 책은 제가 공적 지면에 쓴 걸 묶은 건데 사적 지면에 비해 뻣뻣한 기준이 적용되고 주장에도 엄격한 제한이 있어요. 물론 정확하고 엄밀한 글쓰기 훈련을 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지요. 그 제한에 대해 더 얘기하면, 제가 기자생활이 18년인데 그 절반 정도가 책 기사 쓰는 일이었어요. 지면이 공적이라는 건 뭐냐면, 제 개인적인 관심사를 무조건 반영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 주에 신문사에 배달된 책을 대상으로 해야 하고 그 중에 여러 사정상 꼭 원하는 책이 아니어도 써야 하는 경우가 자주 있으니까요.

일동 : 그런데 거의 원하시는 것만 쓰시는 것 같은데요? (웃음)

고명섭 : 독자들이 그렇게 볼지 모르겠는데, 사실 자기 설득 작업을 거치는 거예요. 이 책이야말로 내가 진정 원하는 책이다, 이렇게 자기 최면을 걸고 기사를 쓰죠.

사회 : 그래도 고명섭 이미지와 딱 맞는 책만 쓰시는 듯하거든요. 이런 책도 쓰나 싶은 책은 거의 없었던 것 같은데요.

고명섭 : 사실 거슬러 올라가면 온갖 종류의 책을 다 다뤘어요. 어린이 책부터 자기계발서까지요. <담론의 발견>에서는 ‘담론성’을 담고 있는 것만 골라서 낸 거지요. 제가 책팀장을 몇 년 했는데, 팀원들이 전부 선배예요. 팀장은 잡일도 있고 팀원도 배려해야 하거든요. 기사 쓰는 시간이 줄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 선배들에게 지면을 내주는 거예요. 그러다보면 제가 딱딱한 걸 맡게 되는 거죠. 이렇게 하다보면 이게 자연스레 자기 일이 되는 겁니다. 지면이 문학, 청소년, 실용 모두 따로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딱딱한 분야를 맡게 되는 거죠.

이현우 : 의도하지 않은 이미지란 말씀인 거죠?

고명섭 : 네, 그러다보니 매우 딱딱하고 엄숙하고 어두운 이미지로 저를 생각하더군요. 사실 저는 유머를 즐기는 사람인데 어느 날 돌아보니 어둡고 무거운 이미지를 갖게 된 거죠. 공부를 할 기회를 얻는다는 장점도 있지만 대중성을 잃어 손해를 본 점도 있습니다. 독자 폭이 협소해진 면이 있거든요. 물론 좋다는 분도 있지만. 

사회 : 이현우 선생님께서는 어떠신가요. 워낙에 다양한 매체에서 활발하게 활동을 하고 계셔서 각각 감각이 다를 듯한데요.

이현우 : 공적지면, 사적지면 차이는 아니고 매체의 차이인데요. 인터넷도 완전히 사적인 공간은 아니고 절반은 공적인 공간이라고 봐야겠지요. 그래도 상대적으로 자유롭고, 돈 받고 쓰는 게 아니니까  구속을 덜 받는 장점은 있어요. 지면에 대해 생각했을 때 제가 보기에 오히려 중요한 건 분량이고요. 분량 맞추는 게 제약이라면 제약인데 다른 한편 재미이기도 해요. 쓰기 싫을 때는 안도감도 있죠. 여기까지면 쓰면 된다는 게 있으니까요. (웃음) 기본적으로는 제약인데 제가 적응하다보니까 이제는 긴 글을 쓰는 데는 적응이 안 되더군요.

사회 : 고명섭 선생님께서는 서평이 아니라 ‘기사’라는 표현을 쓰시는데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고명섭 : 공적인 지면에 쓰다 보면 객관성, 공정성을 늘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주관적인 의견을 드러내는 걸 의식적으로 절제하는 편입니다. 기사의 성패는 절제에 있다고 생각하고요. 신문의 책 소개 기사들은 인상비평이거나 독후감이어서는 곤란합니다. 평론가나 칼럼니스트의 글은 주관성에 호소하더라도 최소한의 근거만 있다면 문제될 게 없지요. 그런데 기자는 사태를 정확히 전달하는 게 우선입니다. 사태의 핵심, 본질이 무엇인지 정확히 포착해서 사진을 찍듯 전달하는 게 기자의 역할이니까요. 사회부 기자가 화재 사건을 취재할 때 불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났다, 이런 걸 알리잖아요. 마찬가지로 이 책은 어떤 책이다, 라는 사실 자체를 잘 전달하는 게 1차 임무죠. 가능하면, 주관성이 개입할 여지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개인적 논평을 자제하려 하고 서평이라는 말도 안 쓰려고 하는 거예요. 서평이라기보다는 책이라는 사건의 전말을 전달해준다는 의미에서 리뷰기사나 책 소개 기사라는 말을 쓰고 있지요.

사회 : 이현우 선생님께서는 <한겨레>에 ‘로쟈의 번역서 읽기’를 연재하시죠? 이건 당연히 기사가 아니라 서평이겠죠?

이현우 : 그것도 평까지 가는 건 아니에요. 분량 상 그렇게 쓰기는 어렵거든요.

고명섭 : 그렇죠. 분량 때문에 깊이 들어가지는 않지만 그래도 본인의 취향을 가지고 쓰시잖아요? 저는 그런 부분을 자제하려는 거고요. 그걸 딱딱하게만 전달하면 읽기 어려우니까 양념을 넣기는 하지만 그래도 최소한에 그쳐야 한다는 태도가 있는 거죠.

이현우 : 고명섭 선생님께서는 서평기사 쓰실 때 ‘지은이는 이렇게 말한다’라는 표현을 많이 쓰시는데 거기서 안정감을 느끼시나요? 일종의 전달자 역할에 머무는 듯한데요.

고명섭 : 예. 전달자로서의 역할에 그친다는 거죠. 기사 쓰기는 논평 욕구와의 싸움이에요. 내가 동의할 수 없는 것을 그대로 전달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물론 그 경우에도 앞뒤 맥락을 살피면 내가 동의하지 못한다는 것을 독자들이 알 수는 있지만, 그래도 그대로 전해주면서 논평을 안 하는 거죠. 독자의 판단에 맡기는 겁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책 기사는 기자의 주관적인 의견이 드러나야 한다고 말하는데, 저는 팀원들에게 가능하면 주관적인 생각으로 논평하지 않는 게 좋겠다는 원칙을 주문했습니다. 어떤 책을 소개하기로 선택하는 것이 이미 하나의 논평이니까요.

이현우 : 선택과 기사 크기 자체도 논평이라는 말씀이죠?

고명섭 : 그렇죠. 그걸로 이미 주관적 판단이 되었으니 책 내용을 객관적으로 전달하면 그걸로 된 거다, 독자들이 알아서 판단한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왜 그러냐면 기자들보다 독자들이 더 똑똑하거든요. 기자들이 종종 자신들이 똑똑하다고 생각하고 독자를 가르치려고 하는데, 이게 한국 저널리즘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가르치려는 태도를 버리고 책을 통해 뭘 배웠는지를 쓰면 되거든요. 그러면 기사가 정갈해지고 내용도 더 깔끔해지고, 독자를 속일 일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너무나 많은 기자들이 독자를 속여요. 책을 쓴 사람, 만든 사람, 그 분야 전문가들은 다 알고 있죠. 물론 제 주문에 대해 반발도 많았지요. 그러면 독자들이 읽지 않는다고. (웃음)
 



자신의 서평에 대해 생각하다

사회 : 이렇게 서평에 대한 두 분의 차이가 드러나는 것 같네요.

이현우 : 직업차이인 것 같은데요. 직업적으로 서평을 쓰게 되면 고명섭 선생님처럼 더 많은 책임과 부담감이 있는데 저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편이고 사람들이 기대하는 바도 다르지요. 기자라면 객관성에 대한 요구에 있는데 사람들이 저에게는 그런 요구까지 하는 것 같지 같습니다. 저도 만일 기자라는 타이틀이 붙으면 한 번 더 신중하게 읽고 써야겠지만 ‘인터넷서평꾼’에게는 약간의 면책특권 같은 것이 주어지는 듯해요.

고명섭 : 아이러니한 것은 기사에 대한 반응이 오는 경우는 대개 기사에 하자가 있을 때거든요. 바로 이메일로 항의가 오지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옵니다. 그래서 하자 없는 공사, 혼이 담긴 시공, 이게 제 모토예요. 그게 목표다 보니 반응이 별로 없습니다. 반응이 많아야 좋은 글이라 하는데 저는 반응이 없는 글을 쓰는 게 목표에요. 이런 얘기는 처음 들어보시죠? 이현우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회 : 이현우 선생님의 경우는 반응이 바로 오지요? 강호의 한가운데에서 활동을 하시니까요.

이현우 : 제 경우는 오히려 반응이 없으면 문제가 없는 게 아닌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웃음) 그런데 궁금한 건 객관적인 것을 쓰시다 보면 분명 하지 못한 주관적인 말들이 있을 텐데, 이걸 따로 기록해 두시나요?

고명섭 : 아니오, 안 합니다. 목표는 하자 없는 시공인데 마음에 드는 기사는 적습니다. 실패했다고 생각하는 기사가 대부분이고 아닌 경우는 열에 하나, 둘 있을까 말까인데요. 최근에는 이현우 선생님께서 번역하신 <폭력이란 무엇인가>가 만족스러웠던 경우예요.

이현우 : <즐거운 지식>에서도 지젝을 맨 앞에 두셨죠.

고명섭 : 네, 그런데 이렇게 마음에 드는 경우는 정말 드뭅니다. 항상 제 기사가 너무 부실하고 문제가 많다는 생각을 하거든요. 자괴감을 느끼는 경우도 있는데 내용을 더 쉽게 풀어쓸 수 없을 때가 그렇습니다. 본인의 능력이 모자란다고 느끼는 경우가 많지요. 수도 없이 많은 예 중 하나가 지젝이 셸링에 대해 쓴 책을 소개한 기사였는데요, 처음에는 제가 할 수 있을 줄 알았거든요. 한번 용기를 내서 써 봤는데 정말 어렵더라고요. 그래서 기사를 쓴 후에 실패했다고 느꼈는데, 결국 이번 책에도 편집자가 넣지 않은 것 같아요. 편집자 역시 너무 어렵거나 문제가 많은 글이라고 생각한 것 같아요.

사회 : 본인의 능력이라 말씀하셨지만 사실 마감 시간도 중요한 원인이겠죠?

고명섭 : 예, 시간도 작용하고 지면도 작용하지요. 사전 공부의 양도 작용하고요. 이 세 가지가 좌우합니다. 지면이 좀 넉넉하면 사례를 넣어 쉽게 풀 수도 있는데, 그걸 못해서 압축하다 보니 안 되는 경우도 있지요. 마감시간의 경우는 마지노선이 금요일 오후 4시예요. 오후 1~2시 정도가 되면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하죠.

이현우 : 2시간이면 굉장히 빨리 쓰시네요.

고명섭 : 그렇게 마감에 쫓기면 페이스를 잃고 힘들 때도 있지요. 아까 공적지면과 사적지면 얘기가 나왔는데, 저는 블로그를 전혀 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기사에 집중하기 위함이기도 하고, 성격적으로도 한 번에 여러 가지를 못하기 때문이기도 해요. 또 트위터나 블로그도 다른 사람들이 찾아올 테니 순수하게 사적인 공간은 아닐 테고, 여기에 글을 쓴다고 해도 결국 기사 쓰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느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현우 : 그러지 않으셔도 제가 기사를 많이 옮겨 놓아서 괜찮을 겁니다. (웃음)

고명섭 : 그러게요. 저공비행을 통해 보는 독자가 더 많을 것 같네요. ‘인터넷 한겨레’에 들어와서 보시는 분들보다요. (웃음)

사회 : 이현우 선생님께서는 최근에 방송대 TV에 출연하셨죠? 다채로운 매체에서 활동을 하시는데, 특별히 가리지 않으시는 듯합니다.

이현우 : 저는 원고청탁도 거절을 잘 못해요. 유일하게 거절했던 기억이 KBS에서 카이스트 학생들 자살사태에 대해 토론해달라는 거였는데 저와는 안 맞는 것 같다고 생각해서 사양했지요. 그거 이외에는 청탁을 거절 한 기억이 많지 않아요. 책을 많이 읽는 문화를 만들기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하자는 생각입니다.

사회 : 활동 공간 가운데 어디가 가장 편하세요?

이현우 : 물론 집에서 블로그 하는 게 가장 편하죠. 서평 쓰는 것도 괜찮은 일인데 항상 마감이 지나서 쓰거든요. 마감만 아니면 책을 더 살펴볼 수 있는데 마감이 지나면 못 그러거든요. 그래서 매번 애를 먹이게 되는 편집자들에게 미안하기도 해요. 정리하면 서평 쓰는 일은 좋아하는 일이기는 한데 약간 민폐도 끼친다는 거죠. 가장 좋아하는 건 저 혼자 글 쓰는 건데 요즘은 아쉽게도 그럴 여유가 별로 없네요.

고명섭 : 저도 마감이 세상에서 가장 괴로운 일이더라고요. 저는 그래서 처음부터 청탁을 받지 않습니다. 열에 아홉은 거부합니다. 하도 거부했더니 이젠 아예 청탁이 들어오지도 않아요. (웃음)

이현우 : 월간 <인물과사상>에 쓰시잖아요.

고명섭 : 그건 제가 쓰겠다고 한거죠.

이현우 : 청탁을 넣으신 거군요.

고명섭 : 예, 그렇죠. 그런데 그래놓고도 2년이 넘게 준비하느라 시작이 늦었어요.  

 



윤봉길의 벤또처럼, 책을 세상에 던지다

사회 : 이현우 선생님께서는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글을 많이 쓰셨잖아요. 논란을 예상하면서도 굳이 그런 글을 쓰시는 거죠?

이현우 : 예상까지 한 건 아니고요, 예상 밖으로 논란이 생긴 경우가 있었지요. 서평의 경우는 아니고 오역 문제였는데, 사실 제가 번역한 <폭력이란 무엇인가>에도 오역이 조금 있어요. 쇄를 더 찍을 때 수정을 해야 합니다. 표현에 문제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론서나 철학서는 많이 나가는 책이 아니라서 한 번 나오고 끝나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런데 이게 교정되지 않고 남는 건 독자와 저자 모두에게 손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달랑 정오표만 올려놓으면 재미도 없고 해서 오역을 지적할 땐 동기부여 차원에서 ‘내러티브’를 부여하는데 이런 게 필화 사건이 된 경우도 있지요.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한 경우도 있고요. ‘당신이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의 오역을 보게 될 것이다’라고 한마디 적었다가 강서경찰서에 가서 조사를 받았어요. 나중에 학위증명서도 검사실에 팩스로 보내고 했었죠. 작년에 강유원씨 공역서 관련으로 문제가 된 일도 기억이 나네요. 의외였거든요. 신뢰받는 출판사에서 그렇게 책이 나왔다는 게 놀랍기도 하고요. 그 이전에는 주로 지젝 책 관련한 이야기들이 있었고요.

사회 : 대개 학자 사회에서는 알고도 모른 척 넘어가는 게 상례 아닌가요?

이현우 : 저는 이게 품앗이라고 생각해요. 요즘은 번역비평학회 일도 하고 있는데, 사람들을 만나 보면 자기 전공 분야에 대해서는 어떤 책에 무슨 문제가 있다는 걸 대개 알아요. 그런데 공개적으로 이야기하는 경우는 많지 않아요. 한국사회의 안면 문제도 있고요. 그런데 각자 알고 있지만 사회적으로는 공유되지 않는 지식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어요. 교정되지 않는 지식, 이건 지적 냉소주의라고 생각해요. 이런 문화는 바뀌어야 한다고 보고요. 그 과정에서 불편하고 불쾌한 일들이 있더라도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좀 나아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언젠가 한 이론서의 역자를 만났는데 저 때문에 한 번 더 보게 된다는 말을 들었어요. 책잡히지 않기 위해서 말이죠. 이런 것도 저 나름대로는 기여라고 생각되네요.

고명섭 : 앞서 말씀해주신 맥락에서 한겨레 지면에서도 ‘로쟈의 번역서 읽기’를 해보면 좋겠다고 이야기가 나온 거죠.

이현우 : 아, 그것 때문이었나요? 요즘은 거의 소설만 쓰고 있는데요.

고명섭 : 얼마 전에도 특종 하나 하셨죠. <안나 카레니나>.
 
이현우 : 그것도 필화사건이죠.

고명섭 : 그걸 최재봉 선배가 다시 기사로 썼는데, 일종의 칼럼 특종이죠.

이현우 : 들은 이야기로는 기사거리가 없어서 쓰셨다는 이야기도 있던데요. (웃음) 그 이후로 문학동네 블로그가 꽤나 시끄러웠어요.

사회 : 고명섭 선생님께서는 쓴소리를 잘 안 하시죠?

고명섭 : 쓴소리요? 저는 책 기사 쓸 때 기본적인 태도가 쓴소리를 할 책은 쓰지를 말자예요. 일주일에 책팀에 300여 종의 책이 오면 1차로 걸러서 5, 60종이 회의실 탁자에 올라오거든요. 문제가 많은 책은 아예 회의실에 들어오지 못하고, 혹 거르지 못하고 채택된 책도 나중에 읽다가 문제가 발견되면 다른 책으로 바꾸기도 해요. 어쩔 수 없는 경우에만 쓴소리를 하는데, 가능하면 그런 책은 쓰지 말자는 게 기본 입장이에요. 이진경씨 표현인데, 마르크스가 고전파 경제학의 하자를 알고 있었지만 리카도의 노동가치설의 약점을 보완해가면서 읽어서 이것을 완성시켰다, 란 평가가 있어요. 이처럼 책을 읽어서 내가 완성시키면서 읽자, 이런 태도도 있어요. 좋은 내용이기 때문에 배우는데, 약간의 부족한 부분은 내가 보충해가면서 읽자는 태도가 있어서 쓴소리를 안 하게 되는 거죠. 가능하면 장점을 찾아보려고 애를 써요.  쓴소리를 싫어해서 그런 건 아니고요.

사회 : 그럼 책에 대한 ‘화’를 어떻게 다스리십니까?

고명섭 : 기사를 쓰고 나서 출판사에 전화해서 이런 식으로 책 만들지 말라고 화를 낸 적도 여러 번 있어요. 기억 나는 사례가 20세기 좌익 혁명가 평전인데요. 출전 주를 다 빼고 출간을 한 거예요. 그래서 기사는 쓰고 나중에 출판사에 전화해서 따졌죠. 예전 같으면 왜 출전 주를 삭제했는지 기사에서 비판했을 텐데, 요즘 제 태도는 그런 말은 쓰지 말자예요. 그 인물 이야기를 예로 들면, 이데올로기나 제국주의와의 관계를 이야기해주는 것이 더 중요하고 급한 거예요. 좁은 지면에 그 이야기만 해도 부족한 거죠. 이야기를 다 쓰고도 지면이 남았으면 출전 주 이야기를 했을지도 몰라요. 한국사회라는 시공간에서 이 책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 어떤 문제를 던지는가를 앞세우다 보니까 못 한 거죠. 이를테면 책을 사회를 비판하는 무기로 삼는 거예요. 제가 가끔 ‘벤또’라는 비유를 쓰는데, 윤봉길 의사가 훙커우 공원에서 제국주의, 식민주의를 향해 던졌던 벤또 있지요, 책을 벤또 삼아 이 사회를 향해서 던지자는 거지요. 그래서 책이 벤또 모양이다, 이렇게 생각해요. (웃음) 저자나 편집자를 대신해서 신문을 통해서 벤또를 던져주는 거죠.

이현우 : 꼭 ‘벤또’여야 하는 거죠?

고명섭 : 네, 도시락이라고 하면 맛이 안 납니다. (웃음)

이현우 : 일종의 책-벤또론이군요.

고명섭 : 이 벤또를 던지는 게 급하거든요. 벤또로서 제 기능을 하는 정도면 일단 던질 필요가 있는 거예요. 모양에 조금 문제가 있거나 맛에 문제가 있는 건 다음 문제라는 거죠.

 

 


내가 읽는 책, 내가 읽고 쓰는 책

사회 : 제가 인문사회 출판사 분들을 만날 때 이 책은 이현우 선생님께서 추천을 해주시겠구나, 고명섭 기자가 한겨레에서 서평을 쓰겠구나 하는 이야기를 하거든요. 두 분께서 요즘 벤또의 주재료로 삼는 주제가 있을까요?

고명섭 : 이 책의 배열이 그런 건데요. 우선 성능 좋은, 화력이 좋은 벤또를 던진 거죠. 지젝-벤또 같은 거요. 세상을 바꿔보려는 생각이 충만한 책들에 우선 관심을 보이는 거고요. 그 다음에는 유장한 호흡으로, 답이 안 보이는 시대에 훗날을 길게 보는, 카렌 암스트롱 식으로 말하면 ‘축의 시대’로 돌아가서 그 시대에 현자들이 고민했던 이야기를 다시 보는 거죠. 그중에서도 제가 관심을 두는 부분은 정치사상, 정치철학 쪽이에요. 그러다 보니 그런 책들이 눈에 빨리 띄겠지요.

이현우 : 저는 조금 잡다한데. 블로그를 하다 보니 제가 개인적으로 관심 있는 책 말고도 그 책에 대한 정보나 서평이 공유되면 좋겠다 싶은 걸 많이 다루거든요. 블로그에 기사를 스크랩해두지만 정작 제가 관심을 덜 갖는 책도 있거든요. 그래도 이런 책이 나왔다는 사실 정도만 알아도 좋겠다 싶을 때가 있는 거죠. 책이란 건 읽으면 좋겠지만 시간이 제한적이기 때문에 다수가 읽는 게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에요. 내가 지금 못 읽어도 우리 중에 누군가는 읽는다는 사실. 커다란 독서공동체 비슷한 걸 생각하는 거지요. 한 개인이 할 수 있는 건 한계가 분명하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제가 문학 전공이다 보니 철학이건 문학이건 생각을 자극하거나 충격을 주는 책들이 좋아요, 통념을 뒤집어보는 도전적인 책이요. 이런 게 철학이나 이론서가 갖는 강점이죠. 독서공동체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너무 어려운 책을 눈높이에 적절하게 맞춰주는 부분도 중요하죠. 블로그에서 이런 작업을 해왔어요. 지젝을 재미나게 같이 읽을 수 있도록 미끼를 던지는 일 같은 거요. 서평도 그런 중개의 역할이고요. 책을 당장 읽지 않을 사람에게도 책의 정보나 중심 맥락, 흥밋거리를 던져줄 수 있으니까요. 나중에라도 관심 가질 수 있겠죠. 그런 기능이 있다고 생각해요. 앞으로 더 하고 싶은 일은 사실 서평보다는 비평 쪽인데, 이게 만족도가 더 높아요. 서평은 분량이 제한적이고 자기 주관을 드러낼 여지가 적으니까요. 조금 여유를 두고 진행할 생각이에요.

사회 : 고명섭 선생님께서는 서평집으로는 두 번째인데요. <지식의 발견>은 서평보다는 비평의 맥락에 닿아 있는 책이죠?

고명섭 : 네, 꼭 그런 건 아니고요. <지식의 발견>은 2003년~2005년에 월간 <인물과 사상>에 연재했는데, 신문 책면의 기사 분량이 제한돼 있다 보니까, 매번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못하고, ‘이만 총총’인 거예요. 하나의 책, 하나의 주제를 가능하면 충분히 써보고 싶었지요. 그래서 <인물과 사상>에 제안을 해서 연재를 했죠. 50매 분량을 쓰니까 처음에는 좀 힘들더라고요. 나중에는 익숙해져서 75매 분량을 썼는데, 여기에서도 기본 태도는 책 기사 쓸 때와 별 차이가 없었어요. 다만 제 목소리를 조금 더 넣고, 책 내용이나 저자 주장의 단순 전달로 그칠 게 아니라 내용에 개입해서 전달하자는 태도가 있었죠. 주제를 정확하게 전달하려고 노력했어요. 책 하나로 부족하다 싶으면 다른 책을 엮어서 쓰기도 했고요. 처음부터 뚜렷하게 의도한 건 아닌데, 연재를 해 가면서 국내 저자의 책, 현실과의 접점이 넓은 책을 소개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국내 저자의 현실 발언을 담론 차원에서 다루는 책이 된 거죠. 근본적으로는 <즐거운 지식>과 차이가 없다고 봐요. 단지 분량과 주제 전달 방식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는 거지요.

사회 : 최근 부서를 옮기셔서 이전에 정기적으로 쓰시던 서평 지면이 없어졌는데요. 여유가 생기실 테니 <지식의 발견> 같은 시도를 다시 해볼 생각은 없으신가요?

고명섭 : 시간이 된다면 하면 좋겠는데, 저는 항상 시간이 없더라고요. 나만 그런가 모르겠지만….

이현우 : 다 그래요. 물어보면 시간 있다는 사람이 없어요. (웃음)

사회 : 정기적인 지면에 글을 쓰실 계획은 없으신가요?

고명섭 : 현재로서는 지금 연재하고 있는 니체를 빨리 마무리하는 데에 집중하고 싶어요.

사회 : 이현우 선생님께서는 지젝 연재를 마무리하셨죠?

이현우 : 네, 연재는 마쳤고 <실재의 사막> 번역 출간을 타진해보고 있는데 좀 늦어진다고 하네요. 다시 번역을 하게 된다면 연재 내용도 거기에 맞춰서 출간을 준비해야겠지요. 여름까지는 정리를 해볼까 싶어요. 그리고 지젝 해설서를 하나 더 쓸 텐데요. 이번에는 <시차적 관점> 읽기입니다.

고명섭 : <자음과 모음>에 연재하신 지젝 해설은 읽어보지 못했는데요.

이현우 : 책으로 나오면 읽어보시죠.
 

 



좋은 서평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가능한가

사회 : 서평 혹은 리뷰라는 말이 흔해졌지요. 많은 분들이 블로그에 쓰고 계시고요. 많은 독자분들께서 두 분께 가장 궁금해 하는 부분이 좋은 서평이 무엇이고 어떻게 쓸 수 있느냐 하는 건데요.

고명섭 : 저는 네 가지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우선 사전지식이 필요합니다. 두 번째는 성실성, 세 번째 정직성, 마지막이 글쓰기 훈련인데요. 어떤 책에 대한 서평을 잘 쓰려면 그 책 하나만 잘 읽어서는 부족하고요. 그 책을 둘러싼 지식을 사전에 읽고 공부가 되어 있어야만 그 책의 가치를 정확하게 포착해서 전해줄 수가 있거든요. 신문기자의 경우는 언제 어떤 책이 나올지 모르기 때문에 항상 방어적 자세를 갖춰야 해요. 어떤 책이 나오든 이미 알고 있었던 것처럼 쓰려면 그 분야에 대해서 항상 생각을 하고 있어야 해요. 다음으로 좋은 리뷰를 쓰려면 성실하게 책을 읽어야 해요. 주마간산으로 읽으면 리뷰도 그렇게 겉핥기밖에 안 됩니다. 성실하게 읽을수록 좋은 글이 나와요. 크루즈 미사일이 지면 위에 붙어 날아가듯 책의 지면에 최대한 가까이 밀착해서 읽어야 해요. 주파 혹은 독파라고 표현할 수 있는데 이게 성실성이에요. 정직성이란 것은 내가 아는 만큼 이야기한다는 거예요. 아무리 성실하게 읽어도 내가 그 분야에 대한 지식이나 고민이 부족하면 딱 그 만큼밖에 이야기할 수 없거든요. 내가 느낀 만큼, 배운 만큼, 깨달은 만큼 이야기한다는 거예요. 책에 대한 예의 같은 거죠. 이런 걸 다 하면서도 개성 있고 문장이 깔끔하고 산뜻하고 신선하면 좋겠죠. 문체까지 자기만의 분위기가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고요.

이현우 : 말씀해주신 건 일반 독자를 위한 서평 쓰기보다는 좋은 서평 기자가 되는 방법이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대개 이해가 가는데, 성실성은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마감 시간에 쫓기면서 크루즈 미사일처럼 읽어내실 수 있나요?

고명섭 : 그래서 고통인데요. 두 가지 고통이 있어요. <담론의 발견>에서 플라타너스 잎사귀만한 지면에 글을 쓰는 게 매번 고통이고 도전이었다고 쓴 적이 있어요. 우선 지면에 응축해서 쓰는 거 자체가 괴로움인데요. 그보다 괴로운 건 마감을 앞두고 책을 독파하지 못하는 거예요. 그래서 하는 데까지 해보자는 거죠. 예를 들어 <시차적 관점> 소개 기사를 쓰는데 이건 도저히 물리적으로 다 읽어낼 재간이 없는 거죠.

이현우 : 아까 ‘독파’라고 하셨는데, 그러니까 결국 할 수 있는 데까지 하면 되는 거죠? (웃음)

고명섭 : 네, 그렇죠. <폭력이란 무엇인가> 같은 책은 다 읽을 수가 있으니까요.

이현우 : 300쪽 이내 책은 독파하고, 그 이상은 하는 데까지. (웃음)

고명섭 : 제가 왜 이걸 강조하느냐면, 너무나 많은 기자들이 책을 안 읽고 써요.

이현우 : 예전에는 보도자료 읽고 쓰면 됐는데 요즘에는 보도자료가 온라인서점에 그대로 공개되니까 기자들이 더 힘들어진 거 같아요. 특히 짧은 기사들이요. 3매 기사 이런 걸 쓰는 데 다 읽고 쓰는 기자는 거의 없을 듯하거든요.

사회 : 이현우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좋은 서평은 어떤 걸까요?

이현우 : 저는 좋은 서평의 조건보다는 효과 면에서 말씀을 드릴게요. 저는 어떤 책을 안 읽도록 설득해주는 서평이 제일 좋아요. 돈과 시간을 절약하게 하거든요. 별 하나짜리 서평을 설득력 있게 쓰는 거죠. 본인은 불만이겠지만 다른 많은 이들에게는 유익하니까요. 별 다섯 개짜리 서평보다 오히려 하나짜리 좋은 서평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저는 아마존에서 서평을 볼 때 별 하나짜리와 다섯 개짜리를 보는데, 하나짜리도 짧은 거는 특별히 새길 게 없어요. 그런데 길게 차근차근 왜 이 책이 별 하나인가를 알려주는 서평은 좋은 글이라고 생각해요. 그 다음으로 좋은 서평이라면 이 책을 꼭 읽어야 한다고 설득하는 서평. 돈과 시간을 요구하는 서평이죠. (웃음) 사서 꽂아두기라고 해야겠다는 마음을 부추기는 글 말이에요. 세 번째는 잘 정리해주는 서평인데, 살 수도 있고 안 살 수도 있지만 읽은 척할 수 있게 해주는 서평이죠. 어디 가서 한 마디 던질 수 있는 서평이요. 고명섭 선생님께서 이런 서평을 많이 써주시죠.

고명섭 : 저도 그 세 번째 기사를 쓰려는 노력을 많이 하죠. 그래서 제 기사를 보고 참 좋다는 사람들이 많아요. 책을 사서 볼 필요가 없다는 거죠. (웃음) 기사를 읽고 나면 책을 한 권 다 읽은 듯한 느낌이라는 거예요. 바로 그걸 노린 거죠. 어떻게 하면 그런 기사를 쓸 것인가 고민하거든요.

이현우 : 출판사들이 좋아하지 않을 것 같은데요. (웃음)

고명섭 : 맞아요, 그래서 기사를 쓰면 출판사들이 아주 싫어한다는 거예요. (웃음)

이현우 : 저는 가급적이면 출판사 매출을 올려주려고 써요. 안 좋은 평을 쓸 때도 말이지요. 출판사들이 문을 닫으면 곤란하니까.

고명섭 : 논란이 될 때가 책한테는 가장 좋죠. 혹평이든 호평이든 말이죠.

 

 


내가 책을 읽는 방법

사회 : 이번 주에 에코의 <책의 우주>가 나왔는데. 에코의 장서가 5만 권정도 된다고 하더군요. 지인들이 찾아와서 다 읽은 거냐고 자주 묻는다고 해요. 그럼 에코는 다음 주부터 읽을 책들이다, 고 대답을 하고, 책을 언제 읽느냐고 물으면, 자기는 글을 쓰는 사람이라 책을 읽을 시간이 없다고 유쾌하게 대답을 한다고 합니다. ‘글을 쓰는’ 두 분께서는 책을 얼마나 많이 읽고 사시는지요.

고명섭 : 에코가 매주 칼럼을 쓰는데요. 그렇게 20년 넘게 매주 칼럼을 쓸 수 있다는 게 무척 부럽더라고요. 가벼움이 부러워요. 저는 너무 무거워서 문제인 거 같아요. 저는 출판 담당할 때 기준으로 보면 정독으로 한 달에 대여섯 권 정도 되는 듯해요. 발췌독이나 읽다가 덮어두는 책들은 조금 더 많고요. 그런데 돌아보면 정독한 책만 남는다, 사실 정독한 책도 안 남는다, 정독이라도 해야 남을 가능성이 조금 있다, 이런 생각이 들어요. 저는 책에 밑줄을 그으면서 읽는데, 발췌독의 경우는 나중에 그 책을 보면 밑줄은 수도 없이 있는데 읽은 기억이 전혀 없는 거예요.

이현우 : 저는 책의 용도가 다르다고 생각해요. 종류에 따라 다른 독서법인 거죠. 문학 전공이다 보니 느리게 천천히 자세히 읽는 걸 훈련받았고 그런 걸 좋아해요. 시집을 한 시간에 다 읽었다, 이런 건 별 의미는 없잖아요. 잘 읽기 위해서 쓴다는 관점에서 ‘자기화’하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이게 제가 좋아하는 독서이고 권장하는 독서인데, 시간의 한계 때문에 이렇게만 읽을 수는 없다는 거죠. 때로는 속독을 필요로 하는 책들도 있거든요. 최근 원자력 관련 책들이 많이 나오는데 깊이 있는 독서를 필요로 하는 책은 많지 않거든요. 시사적인 책들의 경우에는 빨리 읽으면서 필요한 내용을 습득하는 독서를 요구하기도 하죠.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고요. 그에 반해 정독을 요구하는 책은 다시 읽는 걸 요구하죠. 두 번, 세 번 말이죠. 문학 강의를 하다 보니까 어떤 책은 매 학기, 일 년에 두세 번 이상 읽는데 그래도 재미있는 건 그때마다 작품에 대한 생각이나 이해가 달라지고 추가되고 교정된다는 거죠.
  피에르 바야르의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에 동의하는 부분이 굉장히 많았어요. 그 책에서 <특성없는 남자>에 나오는 도서관 사서를 예로 드는데, 모든 책을 읽기 위해서 한 권의 책도 읽지 않기로 선택한 자기희생 정신이 투철한 사서예요. 사서가 책에 몰입해 읽게 되면 자기 역할을 다 할 수가 없는 거죠. 서평가도 부분적으로 그런 운명을 갖고 있지 않나 싶어요. 그러니까 정독하면 좋겠지만 한 권의 책을 정독하기 위해서 열 권의 책을 거들떠 볼 수도 없는 경우도 있고, 거꾸로 열 권의 책을 보기 위해서 책을 정독하면 안 되는 처지도 있죠. 전자가 더 나은 운명이긴 하죠. 그런데 이런 경우는 소수일 듯하고요. 후자의 역할도 필요하다는 생각이에요.

고명섭 : 정보로서의 책 읽기가 있는데, 우리는 보통 교양으로서의 책 읽기를 말하거든요. 문사철이죠. 당연히 이 경우에는 정독이 좋은 듯하고, 정보로서의 책 읽기는 빨리 찾아가서 포착하는 게 필요하죠. 저는 실용서나 자기계발서도 많이 보는 편인데, 자기계발서도 내 것으로 소화하려면 정독이 필요하거든요. 역시 생각의 힘을 기르는, 내적인 삶을 풍요롭게 하는 차원에서의 책 읽기는 천천히 저작하듯이 읽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을 합니다. 이야기가 너무 공식적이군요. (웃음)

사회 : 그럼 저도 공식질문을 하겠습니다. (웃음) 알라딘 인터뷰의 마지막 질문인데요. 서점이다 보니 추천 도서를 부탁드립니다.

고명섭 : 얼마 전에 아는 분하고 이야기를 하는데, 최근에 의미 깊게 읽은 책으로 김용규 선생의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신> 그리고 <축의 시대>를 말씀하시던데요. 저는 여기에 더해서 김영사에서 나온 조철수 선생의 <예수 평전>을 함께 읽으면 더욱 좋을 거라고 얘기했습니다. 요즘 제가 개인적으로 관심을 두는 분야이기도 해서, 이 세 책을 함께 읽어 보면 ‘잃어버린 신’에 대해서 지적으로 풍요롭게 고민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하는 게 ‘공식적인’ 생각입니다.

사회 : 이현우 선생님께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추천해주고 계시지만, 그래도 부탁을 드립니다.

이현우 : 읽은 책이라고 하면, 요즘 강의 때문에 읽은 책밖에 없어서. <러시아 문화에 관한 담론>이란 책이 최근 나왔는데, 전공서처럼 되어 있지만 사실 교양서거든요. 서양 중세에 대한 이야기는 사람들이 좀 읽는데 다른 문화권에 대해서는 잘 읽지 않는 것 같아요. 그리스나 중세 문화는 교양서이고 러시아나 일본에 대한 책은 학술서로 분류가 되거든요. 관심의 폭을 넓힐 필요가 있어요. 형평에 맞게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에요.

고명섭 : 아까 책-벤또 이야기를 했지만, 이건 사회적 차원의 이야기고, 개인적, 실존적 차원에서 보자면 책은 도끼여야 합니다. 카프카가 대학시절 ‘책은 우리 정신의 두꺼운 얼음판을 깨뜨리는 도끼여야 한다’고 친구에게 말했지요. 그렇게 강력하게 우리 정신을 흔드는 책을 읽을 때 우리의 삶과 사고의 관습이 깨지고 창조적 카오스 상태를 거칠 수 있다고 봅니다. 니체는 ‘나는 피로 쓴 글만 믿는다.’라고 했는데, 피로 쓴 글, 피로 쓴 책만이 정신의 얼음판을 깨는 도끼 노릇을 할 수 있을 겁니다. 자기 혼을 바쳐서, 혼이 흔들리는 강렬함 속에서 쓴 책이 독자의 혼을 흔들고 깨울 수 있지 않을까요.  평소 제가 마음에 품고 다니는 생각입니다.


댓글(8) 먼댓글(2) 좋아요(4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좋은 서평이란 무엇인가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1-05-15 12:58 
    지난달 언젠가 알라딘과 사계절출판사의 주선으로 <즐거운 지식>(사계절출판사, 2011)의 저자인 고명섭 기자와 대담을 나눈 바 있다. 알라딘 인문MD님의 대담을 정리해서 글을 올려주셨는데, '서평'에 관해 내가 몇 마디 거든 내용을발췌해놓는다.사회 : 이현우 선생님께서는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글을 많이 쓰셨잖아요. 논란을 예상하면서도 굳이 그런 글을 쓰시는 거죠?이현우 : 예상까지 한 건 아니고요, 예상 밖으로 논란이 생긴 경우가 있었지요. 서
  2. mm-area의 생각
    from mimoarea's me2day 2011-05-16 10:35 
    [인터뷰] 서평계의 두 고수, 고명섭 기자와 로쟈 이현우를 함께 만나다
 
 
루쉰P 2011-05-13 2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묵직한 인터뷰 내용이 도움이 많이 되네요. 좋아하는 두 분의 대담이라 그런지 제가 책을 읽을 때 도움도 많이 되구요. 알라딘 MD님도 고생하셨어요. ^^

인문MD 바갈라딘 2011-05-16 09:15   좋아요 0 | URL
그러고 보니 제 인터뷰도 늘 '묵직'해서 걱정이네요. 고명섭 기자처럼요. ^^ 좀더 자주, 가볍고 경쾌하게 찾아갈 수 있도록 노력해볼게요. 고맙습니다.

2011-05-16 12: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5-16 17: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룰루브이 2011-05-16 16: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지식인을 알게 되었네요~~^^ 머리가 든든해지는 글 잘 읽었습니다.

인문MD 바갈라딘 2011-05-16 17:13   좋아요 0 | URL
네, 고명섭 기자의 강연회도 진행하니 살펴주세요. http://blog.aladin.co.kr/culture/4791733 고맙습니다.

ziyeoni 2011-05-18 0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 분 각각의 내공에 압도 당한 기분입니다. 긴 글은 끝까지 잘 안 읽게 되는데, 마지막까지 집중해서 읽었습니다. 가볍고 경쾌한 인터뷰도 기대하겠습니다 ^^

인문MD 바갈라딘 2011-05-18 09:26   좋아요 0 | URL
네, 고맙습니다. 그러나 다음 인터뷰도 만만치 않은 내공을 만나게 될 터라. 가볍고 경쾌한 거 하나 만들어야겠습니다, 정말로.
 

 

  

PD수첩 검사와 스폰서 편이 방송된 지 어느새 1년, 사태는 대강 마무리되는 분위기다. 몇몇 검사의 징계와 고발자의 구속이 결과인데, 검찰 내부 문화와 권력 문제는 제대로 논의되지 못한 듯싶다. 그간 몇몇 책이 나와 일정한 호응을 얻었지만 고발 이상의 의미를 만들어내진 못했다. 스폰서 정용재씨의 증언을 바탕으로 시사IN 정희상, 오마이뉴스 구영식 기자가 정리한 이번 책은 50여 명에 이르는 관련 검사 실명을 직접 내보인다는 점에서 PD수첩 이후 가장 폭발력이 큰 이야기가 될 거라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너무 뜨거워지지는 말자. 이 책 역시 폭로와 고발에 그친다면 언제 새로운 기회가 올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니. 이제는 PD수첩을 '떠나게 된' 최승호 PD의 추천사와 세 명의 저자가 전하는 서문을 공개한다. 책은 11일 월요일에 나오는데 문제 없이 독자들에게 전해질 수 있을지 걱정이다.

 

[추천사] 

‘검사와 스폰서’ 방영 후 1년… 그리고 이 책  
- 최승호, MBC PD 


<PD수첩> ‘검사와 스폰서’(2010년 4월 20일 방송)가 방송된 지도 벌써 1년이 되어간다. 방송 1년이 지난 지금 검사들의 스폰서 행태를 고발한 정용재 씨는 수감자의 신분이고 나 역시 <PD수첩>을 타의로 떠났다.

검찰에도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수십 명의 검사들이 특검 수사를 받았고 일부는 기소됐지만 1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 박기준·한승철 두 검사장은 면직 처분됐다. 박기준 씨는 면직처분 취소소송을 냈지만 기각됐다. 특검 기소가 무죄 판결을 받는 상황에서 나머지 일부 검사들을 대상으로 한 징계가 ‘조용히’ 이뤄졌다. 정직, 감봉 등의 징계가 내려졌다. 이렇게 스폰서 검사 파문은 정리되어가고 있다. 검사들은 당분간 그들이 받은 ‘섹검’의 수치를 기억할 것이다. 그러나 곧 위엄을 갖추고 일인지하만인지상의 검찰 위상을 회복할 것이다.

지난 1년간 그 난리를 쳤지만 사실 검찰이 인정한 것은 별로 없다. 그저 증거가 명확하게 남아 있는 최근의 몇 차례 향응을 인정했을 뿐 스폰서 정씨가 수백 명에게 제공했다는 성 접대는 한 건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엄연히 있는 증거와 증인도 없는 것처럼 묵살하고 은폐했다. 검찰이 다른 사건을 수사할 때도 이렇게 한다면 우리 국민은 불안해서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을 것이다. 그 정도로 심각한 은폐·왜곡이 저질러졌다.

그 한 예로 검찰은 인터넷에서 이름만 검색하면 어디에 있는지 지도까지 나오는 식당을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만들었다. <PD수첩>은 쉽게 찾아낸 과거 업주들 중 상당수도 찾을 수 없었다는 한마디로 은폐해버렸다. 어찌 보면 검찰이 제대로 조사를 했더라도 업주들이 과거 정용재 씨가 얼마나 검사들을 자주 접대했는지 밝히기를 꺼렸을 가능성이 크다. 누가 검찰의 비위를 상해가면서 오래 된 과거 일을 굳이 진술하려 하겠는가. 그러나 검찰은 아예 찾아보지도 않고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나는 검찰이 찾아보는 시늉도 하지 않고 없다고 결론을 내버린 것이야말로 검찰이 누리고 있는 권력이 얼마나 무지막지한지 말해준다고 믿는다. 검찰이 이렇게 결론을 내버리면 그 누구도 쉽게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는 것을 검찰 스스로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이런 일을 저지르는 것이다.

실제로 <PD수첩>이 검찰의 진상은폐를 통렬하게 고발하는 ‘검사와 스폰서3’을 방송했지만 검찰 조직은 묵묵부답이었다. 일언반구 변명도, 항변도 하지 않았다. 그 뒤에 느껴지는 것은 “너희는 떠들어라. 우리가 묵살하면 결국 그뿐이다”라는 오만함이었다. 대한민국에서는 검찰이 이렇게 버틸 경우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우리가 그들을 이렇게 괴물로 만들어놓았던 것이다.

정용재 씨는 이때 큰 상실감을 토로했다. 그는 자신의 전 인생을 걸고 검찰을 고발한 결과가 이런 용두사미 특검이라는 데 분노했다. 그런 그를 두 언론인이 찾아왔다. 이 책은 검찰의 검사 스폰서 사건 은폐·왜곡을 향해 정용재 씨와 그를 취재하던 두 언론인이 보내는 고발장이다. 《시사IN》 정희상 기자, 《오마이뉴스》 구영식 기자. 이 두 분은 나와 함께 정용재 씨를 취재하던 기자들이다. 특검의 수사가 결국 의혹만 남기고 정리될 즈음 이들은 정용재 씨를 만나 이 책을 쓰기로 의기투합했다. 검찰의 진상규명이 어느 정도 순조로웠다면 만들어지지 않았을 책이 태어난 것이다.

원고를 읽어보니 새로운 사실이 많다. 게다가 거의 실명을 공개했다. 저자들은 “일부 고위직 검사들뿐 아니라 일반 검사들조차도 스폰서 문화에 포획된 현실을 가감 없이 보여줄 필요가 있어서” 실명을 공개했다고 밝혔다. 검찰뿐 아니라 경찰, 군 등 과거 정용재 씨의 스폰을 받은 다른 부문의 고위 인사들도 실명으로 등장한다. 이 책의 후폭풍이 만만치 않을 거라는 예감이 든다.

증언을 한 정용재 씨는 지금 가족이 있는 곳과 멀리 떨어진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다. 어쩌면 이번 증언은 그에게 또 다른 시련을 안겨줄 수도 있다. 그럼에도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누가 과연 그의 처지에서 그와 같은 일을 할 수 있을까? 그런 점에서 그는 우리 사회가 가진 축복이다. 비록 그것이 그와 그의 가족에게는 천형을 의미한다 할지라도.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그와 가족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저자 서문] 

인터넷 국어사전은 ‘스폰서sponsor’를 이렇게 설명해놓고 있다.

1. 행사, 자선사업 따위에 기부금을 내어 돕는 사람.
2. 라디오나 텔레비전 방송 따위에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광고주.

하지만 스폰서는 이런 사전적 의미에만 머물지 않고, 사회적 의미로 확장된다. 그런 점에서 스폰서는 국회의원, 판·검사 등 사회에서 힘이 있는 사람을 뒤에서 돈 등으로 뒷받침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이런 경우 스폰서는 대부분 사업가다. 마치 권력과 돈이 만나는 것과 비슷하다. 지난해 우리 사회를 뒤흔들었던 ‘검사 스폰서’ 사건은 그러한 성격의 스폰서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계기였다.

우리는 ‘검사 스폰서’ 사건이 터진 때를 전후로 수차례 정용재 씨를 부산 현지에서 만났다. 정씨는 20대의 젊은 나이에 아버지의 사업체를 물려받아 한때 부산·경남지역에서 가장 잘나가던 건설업자였다. 정씨에게는 젊은 나이라는 약점을 보완해줄 힘(권력)이 필요했고, 정씨는 아버지 때부터 관계를 맺고 있던 ‘검사’를 선택했다. 정씨는 사업이 몰락한 이후에도 ‘검사 스폰서’ 노릇을 멈추지 않았다. ‘스폰서 중독증’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권력에 돈 쓰는 맛’, 그 대가로 ‘권력에 호가호위하는 맛’을 버릴 수 없었던 것이다.

정씨는 자신이 20여 년 동안이나 검사 스폰서였다고 고백했다. 검사들에게 정기적으로 밥과 술을 사고, 촌지를 돌렸을 뿐 아니라 수시로 성 접대까지 해왔다고 증언했다. 이렇게 쓴 접대비만 당시 돈으로 10억 원 이상이라고 한다. 특히 검사들이 다른 지역으로 떠날 때면 전별금과 함께 순금으로 만든 마고자 단추를 선물했고, 심지어 검사들이 제 시간에 비행기를 탈 수 있도록 경찰 헬리콥터를 띄우기도 했다. 떠나는 검사가 부임하는 검사에게 정씨를 소개해주는 ‘스폰서 인계’ 문화는 검사─스폰서 유착관계의 원동력이었다. 정씨는 접대가 “보험 성격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검사들이 노골적으로 요구하는 분위기였다”며 “하지만 어떤 검사도 이러한 접대에 죄의식을 느끼지 않았다”고 말했다.

더 놀라운 증언도 나왔다. 부산의 한 모델에이전시에 소속된 모델들을 불러 ‘원정 접대’에 나섰는데, 그 과정에서 경찰 호송차의 호위를 받았다는 얘기다. 경찰도 ‘검사 스폰서’의 손아귀 안에 있었던 셈이다. 이렇게 공권력이 검사 접대를 위해 움직인 것은 정씨가 ‘검사’스폰서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점에서 검사 스폰서의 실체를 들여다보는 일은 검사의 어두운 얼굴을 들여다보는 것이나 다름없다. 정씨가 증언한, 술자리에서 보여준 검사들의 행태는 차마 글로 옮기기조차 민망할 정도다.

하지만 검사의 어두운 얼굴은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다. 언론의 집중적인 보도에도 불구하고 검찰 진상규명위원회와 특검의 활동은 그야말로 ‘용두사미’로 끝나고 말았다. 오히려 이들의 활동은 스폰서 검사들에게 면죄부만 줬다는 지적을 받았다. 생선을 고양이에게 맡긴 데서 예고된 결과였다. 특검에 파견된 현직 검사들은 날마다 변호사 출신인 특검보들과 싸워가며 조직의 치부를 덮기에 바빴다. 정씨는 지난해 12월 중순 우리에게 보낸 문자메시지에서 이렇게 토로했다.

“스폰서 검사 건은 이제 막을 내리는 것 같다. 모든 진실이 묻혀버리고 정의가 사라지고 무소불위의 검찰은 자성의 기미가 전혀 없다는 현실이 서글플 뿐이다.”

그동안 계속 정씨를 취재해온 우리도 ‘막을 내리는 검사 스폰서 사건’ 앞에 아쉬움이 컸다. 고민한 끝에 정씨의 증언을 한 권의 책으로 정리하자는 데 뜻을 모았다. 그리고 구속집행정지 상태였던 정씨를 다시 부산에서 만나 수차례 심층 인터뷰를 진행했다. 이 책은 우리가 그동안 정씨를 취재해왔던 내용과 그때 심층 인터뷰한 내용을 정리해 엮은 것이다.

특히 이 책에서는 정씨가 접대했던 검사들의 이름을 과감하게 드러냈다. ‘한두 번 접대받은 검사들 이름까지 공개할 필요가 있느냐?’는 주위의 걱정도 있었다. 하지만 검사 스폰서 사건이 터졌을 때 공개된 일부 고위직 검사들뿐 아니라 일반 검사들조차도 ‘스폰서 문화’에 포획된 현실을 가감없이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하기 위해 고심 끝에 내린 선택이 검사들의 ‘실명 공개’다. 수사검사로 8년 6개월간 검찰에 몸담았던 김용원 변호사는 자신의 저서에서 ‘스폰서 문화’를 이렇게 독하게 꼬집었다. 그의 독설은 우리의 검사 실명 공개를 설득력 있게 뒷받침해준다.

“여자 접대도 하고 용돈도 주면 물론 금상청화다. 판검사들, 특히 젊은 판검사들 가운데는 술과 여자에 굶주린 사람이 많다. 스폰서들은 이런 판검사들을 노린다. (…) 룸살롱의 잘나가는 아가씨들 가운데 판검사와 섹스 한번 해보지 않은 사람을 찾는다는 건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 그러나 스폰서를 두고 있는 판검사들은 여전히 적지 않다. 특히 잘나가는 검사들 가운데 스폰서를 여럿 거느린 사람도 많다.”(《천당에 간 판검사가 있을까?》 중에서》)

이 책은 정씨의 의지가 없었더라면 나올 수 없었다. 그는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증언이 책으로 기록되어 세상에 나오길 가장 바랐다. 그는 “그동안 제가 접대했던 분들이 이 책을 한 권씩 사서 읽어주길 바란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잊지 않았다. 하지만 정씨는 진실을 얘기했다는 괘씸죄에 걸려 현재 신병치료를 위한 구속집행정지조차 얻어내지 못한 채 고통스러운 옥살이를 견뎌내고 있다. 애초 도전하지 말아야 할 ‘성역’에 도전한 탓이었다. 정씨는 지난 2월 우리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처지를 <산장의 여인> 노래 가사에 빗댔다.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외로운 이 산장에 (…) 병들어 쓰라린 가슴을 부여안고 나 홀로 재생의 길 찾으며 외로이 서 있네.”

정씨는 다시 구속된 이후 수술이나 재활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정씨는 편지에서 “모든 것이 이렇게 고통스러울 줄, 힘들 줄 몰랐다”며 “모든 것이 고립”이라고 토로했다. 정씨의 유죄가 확정돼 형사처벌을 받고 있더라도 그가 건강을 되찾을 수 있도록 사법부에서 정당하게 배려해주기를 바란다.

특히 ‘언론보도’의 한계를 절감했던 우리는 책을 펴내는 과정에서 ‘책’이라는 ‘올드 미디어old media’가 의미 있는 미디어로서 기능할 수 있다는 기대를 갖게 됐다. 그런 점에서 출판사에 부담이 될 수도 있는 이 책을 내겠다고 선뜻 나서준 김이수 책보세 주간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그리고 검사 스폰서 사건 보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최승호 PD 등 MBC <PD수첩>에도 감사한다. <PD수첩>은 두 번에 걸친 검사 스폰서 관련 방송 원고를 이 책에 실을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다. 앞으로도 <PD수첩>이 우리 사회의 성역을 끈질기게 파헤치는 ‘시대의 눈’으로 남기를 바란다.

지난 4월 6일, 책 출간을 앞두고 안동교도소에 수감된 ‘스폰서 정씨’를 면회했다. 수감 상태에서도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늘 검찰의 주시 대상이었다. 안동교도소로 이감되기 직전 부산구치소에 있을 때, 그의 구속을 지휘한 부산지검 검사가 이 책 초고를 손에 넣으려고 구치소 내 그의 방에 들이닥쳤지만 간발의 차이로 원고를 우편으로 내보낸 뒤여서 허사로 끝났다고 했다. “도둑이 제 발 저린” 꼴이다. 검찰이 지난 1년간 그런 열성으로 환골탈태를 위해 각고했다면 아마 이 책은 나올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2011년 4월 초
정용재의 증언을 정리한 정희상·구영식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지자본주의라는 용어의 문제에 대해 간단히 언급해 두고 싶다. ‘인지’라는 말은 주로 과학용어로 사용된다. 인지과학이라는 용어를 통해 비교적 널리 알려진 ‘인지’는 신경생리학, 뇌과학, 컴퓨터공학, 심리학, 교육학 등의 용어로도 자주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추세 때문에 정치경제학 용어인 ‘자본주의’라는 말과 ‘인지’라는 용어의 결합은 생소하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바로 이 생소함이야말로 우리가 인지라는 말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이다.

 
   

 

 

제국, 다중, 아우또노미아... 조정환 하면 함께 떠오르는 개념이다. 물론 캘리니코스, 네그리, 하먼 등의 이름도 빼놓을 수 없다. 그의 연구를 거칠게 정리하면 '현대 세계의 성격과 구조를 탐구하고 이 조건 속에서 가능한 사회변혁의 가능성과 방법을 고민'하는 학문이라 하겠다. <인지자본주의>는 이 여정의 일단락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이번 책은 입론이라 변혁의 대안에 대해서는 <혁명의 세계사>(가제)에서 따로 다룰 계획이라 한다. 다중이 어느새 (그 내용에 대한 이해를 떠나) 익숙한 표현이 되었듯이, 인지자본주의도 세계를 이해하는 새롭고 강력한 틀로 자리잡을 수 있을까? 몇 가지 질문과 답변, 서문을 통해 <인지자본주의>를 읽기 위한 준비운동을 제안한다.

 

Q. 인지자본주의는 신자유주의, 금융자본주의, 탈산업사회 등의 다른 이름인가?
이것들이 사유하는 대상은 거의 같다. 하지만 신자유주의론은 자본주의 정책 형태의 변화를 중심에 놓고 사고하며 그것의 대안은 주로 사회(민주)주의적 정책변경에서 찾아진다. 금융자본주의론은 자본형태를 중심으로 사유하며 그것의 대안은 지금까지 주로 산업자본에서 찾아졌다. 탈산업사회론은 주로 기술형태를 중심으로 사유하며 그것의 초점은 대안기술과 문화에 모아졌다. 인지자본주의론은 노동형태의 변화를 중심으로 사고하며 그 대안은 노동의 대안적 자기조직화이다.
 
Q. 인지자본주의는 산업자본주의의 한 유형일 뿐, 자본주의의 새로운 국면은 아니라는 주장이 있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인지활동도 신체를 사용하며 신체에 의존한다. 인지노동은 육체노동에 대립하는 노동이 아니라 육체노동이 확장되고 진화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인지노동은 산업노동과 연속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지노동은 산업노동으로 환원될 수 없다. 산업자본주의에서 육체노동은 정신노동과 분업적으로 구별되었고 심지어 대립되었다. 구상과 실행의 분리가 그것이다. 인지자본주의에서 이 분업적 구별과 분리는 사라진다. 육체노동이 인지화하며 인지노동이 육체화한다. 그 결과 모든 노동은 육체노동이면서 동시에 인지노동이라는 이중적 성격을 띠고 나타난다. 인지자본주의를 산업자본주의로 환원하는 것은 이 핵심적인 변화를 간과하면서 인지화가 가져오는 변화의 여러 지점들을 놓친다. 이 책에서 내가 분석하는 것은 인지화가 가져오는 실제적 변화들, 그 결과들, 그리고 의미들이다.
 
Q. 인지자본주의론이 인지노동자들을 특권화시키지는 않겠는가?
인지자본주의에서는 대학이 공장으로 되고 메트로폴리스가 미술관으로 되고 국가가 스펙타클로 된다. 이것의 영향으로 전통적 공장들도 점점 디자인 작업실로 바뀐다. 이런 의미에서 인지노동의 헤게모니가 나타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이 학생, 예술가, 공무원 등을 인지노동자로 특화할 수 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모든 노동들이 인지노동의 성격을 더 많이 띠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원자력발전소의 노동자들을 전통적 산업노동자로 부를 수 있겠는가? 고도의 지식을 요하는 유기농산물 생산자를 농민이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인지노동은 산업노동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산업의 메트로폴리스로의 확장이며 또 그것의 변화한 특질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지노동의 헤게모니를 말하는 것이 인지노동자의 정치적 특권이나 헤게모니를 의미할 수는 없다.
 
Q. 인지자본주의론은 공통되기를 위한 인지혁명을 주장한다. 그렇다면 인지자본주의론은 SNS(소셜 네트워크 서비스) 등 인지적 성격이 강한 신기술의 영역을 운동과 혁명의 핵심영역으로 간주하는가? 예컨대 최근의 아랍혁명을 SNS 혁명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전통적 관점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SNS는 표현수단에 불과했고 실제로는 노동운동이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고 말한다.
인지자본주의론은 기술을 노동과의 관계 속에서, 그리고 자본과 노동의 적대관계 속에서 고려하지 그 자체로 독립적인 것으로 고려하지 않는다. 아프리카와 중동에서 폭발한 혁명의 성격을 묘사하면서 그것을 페이스북 혁명이라거나 트윗 혁명이라는 말로 묘사하는 것은 그러므로 일면적이다. 튀니지와 이집트의 경우에 대해 특히 그러하다. 이러한 말들의 유행은 혁명을 테크롤로지 의존적인 것으로 표상할 위험성이 있다. 이러한 표상은 혁명을 기술적 지적 엘리뜨의 과업으로 만들고 이러한 테크놀로지에서 소외되어 있는 대중들의 혁명적 역할을 간과하거나 폄하할 수 있다
   반면 고전적 혁명 관념을 가진 사람들은 트윗이나 페이스북은 발화수단일 뿐, 진정한 혁명은 공장에서 파업을 통해 준비되어 왔고 또 그것을 통해 완성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SNS나 그와 연관되어 있는 사람들(학생과 청년들)를 주변적이거나 종속적인 힘으로 묘사한다. 이러한 관점은 20세기 운동의 표상을 현재로까지 가져와 육체적 산업노동자들을 중심에 놓으면서 새로운 노동자층의 혁명적 역할을 간과하거나 폄하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이 두 관점은 모두 현존하는 혁명능력들을 축소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SNS는 오늘날의 공장이다. 사회적 인지력을 연결하는 망은 공장노동자들을 연결하는 콘베이어벨트와 같다. 내가 현대의 메트로폴리스를 거대공장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이다. 이것을 통해 가치생산이 이루어지고 축적이 이루어진다. SNS 사용자들을 산업공장의 노동자들과 구별짓는 것은 그들의 생산방식이나 그 생산과정의 특성일 뿐이다. 자본주의적 생산과 재생산의 구성부분이라는 점에서 양자는 동일하다. 그러므로 SNS가 생산의 장소가 아니라 혁명의 장소로 사용된다는 것은 공장이 점거되어 파업투쟁의 장소로 사용되는 것과 같다. 그것은 투쟁의 특권적 장소로 파악되어서도 안 되며 투쟁을 보조하는 종속적 장소로 파악되어서도 안 된다. 메트로폴리스에서의 혁명은 산업적 투쟁과 사회적 투쟁 그리고 담론적 투쟁 모두를 위계 없는 관계로서 포괄한다. 이 각각을 서로 연결되어야 할 특이한 투쟁력들로 파악할 때에만 현대의 혁명이 뿌리에까지 이르는 혁명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책머리에]

과거에 비해 오늘날의 사람들은 어느 나라 어느 곳에서나, 유사한 경험을 한다. 실업으로 인해 소득은 줄어들고 치솟는 물가로 인해 상품들의 문턱은 높아지며 양극화로 인해 가난하다는 느낌은 점점 깊어진다. 역사적 공동체들을 대체한 국가는 지배계급을 옹호하는 이익집단으로 행동하고 제국은 소수 강대국들의 이해관계에 의해 조종당한다.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주의적 사회관계에 의해, 특히 사적 이익집단들에 의해 무차별적으로 이용당한 지구생태계는 단말마의 신음을 내뿜으며 점점 인간에 적대적인 양상을 드러내고 있다. 이런 것들로 인해 개개인들은 점점 더 의외의 시간에, 의외의 방식으로, 질병에 걸리거나 죽게 되고, 인류 전체가 종말의 시간을 맞이하고 있다는 묵시록적인 공포의 정서가 일상세계에서뿐만 아니라 학술세계에서도 전염병처럼 확산되고 있다. 이럴수록 사람들의 삶은 고통스럽고 무의미한 것으로 되고 공포와 절망의 감정은 모든 윤리적 감각을 마비시키는 마취제로 작용한다.
   그리고 어느 나라 어느 곳에서나 통치집단들의 모습도 비슷하다. 뻔한 거짓말을 지겹도록 늘어놓고 모든 것을 돈에 종속시킨다. 심지어는 인도주의라는 말조차도 자원약탈과 제국주의적 침략의 수사학으로 이용한다. 정치, 경제, 교육, 미디어, 종교, 군대 등 모든 영역들에서 지배집단들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뿌리깊은 부패의 사슬에 연루되어 있다. 그래서 이들은 더 자주, 그리고 더 깊이 사람들 사이의 경쟁에, 집단들 사이의 갈등에, 그리고 전 지구적인 전쟁에 의존한다. 그리하여 정치가들이 자신의 지역을 멋지게 가꾸었다고 자랑하는 목소리가 높으면 높을수록 그 지역의 오염과 훼손은 심각해지고, 주가가 떨어지건 고공행진을 하건 대중들의 가난은 깊어가고 GNP 지표가 하락하건 수 만 달러를 가리키건 하루 2달러 미만으로 사는 사람들의 수는 늘어나고, 텔레비전 드라마와 광고가 꿈같이 화려한 세계를 누구나 만져보고 싶도록 연출해서 보여주면 그럴수록 일상의 삶은 그 만큼 더 비루해지며, 구원이 가까왔다는 목소리가 높아질수록 행복은 아득하게 멀게만 느껴진다.
   부와 가난의 양극화는 권력과 무력의 양극화로, 탐욕의 끝모르는 질주와 희망의 추락이라는 양극화로, 마천루 높은 곳에서 아래를 굽어 보는 삶과 뒷골목 쓰레기통을 뒤지는 삶의 양극화로 이어진다. 조산(早産)된 21세기는 1968년 혁명에서 시작해서 부채위기로 점철되었고 냉전을 제국적 내전들과 테러에 대한 전쟁으로 대체했으며 2008년의 금융위기로 조로(早老)현상을 드러냈다. 나는 이 조로하고 있는 21세기의 자본주의를 인지자본주의라는 말로 명명했다.
   현대 사회를 인지자본주의로 파악하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한국에서 지난 이 십 여 년 동안 이루어져온 연구들의 많은 부분은 인지자본주의의 증상들과 결과들을 탐구하는 데 바쳐졌다. 인지자본주의가 고용에 미치는 영향에 집중하는 실업, 비정규직, 불안정노동이라는 대중화된 주제들, 인지자본주의가 소득에 미치는 영향에 집중하는 88세대론이나 양극화론, 인지자본주의가 주체 재구성에 미치는 영향에 집중하는 신세대론을 비롯한 각종의 세대론과 청년론, 인지자본주의가 과학과 테크놀로지 발전에 미치는 영향에 집중하는 인지과학, 생명공학, 정보화론, 인지자본주의가 공간재구성에 미치는 영향에 집중하는 도시개발론, 메트로폴리스론, 환경공학, 인지자본주의가 기업형태 변화에 미치는 영향에 집중하는 네트워크 기업론이나 사회적 기업론, 인지자본주의가 대중의 문화체험에 미치는 영향에 집중하는 스펙타클론이나 시뮬라크르론, 인지자본주의가 가져오는 권력형태의 미시적 재구성에 집중하는 우리안의 파시즘론, 대중독재론, 부드러운 파시즘론, 인지자본주의가 자연에 미치는 영향에 집중하는 다양한 생태론, 인지자본주의가 성별 문제에 미치는 영향에 집중하는 돌봄노동론과 페미니즘론 등등의 주제가 그러하다. 인지자본주의론은 이 미시적이고 다양한 탐구들이 천착하고 더듬어온 문제들을 노동형태 및 자본형태의 변화, 그리고 이 둘 사이의 사회적 관계의 변화라는 거시적 틀 속에서 종합하고 각각의 문제들의 위치를 밝히며 총체적인 발전의 경향을 밝히려는 시도이다.
   우리가 분석 대상으로 삼은 인지자본주의는, 2011년에 들어 발생한 두 개의 사건들을 통해 자신이 발전과정에서 불러낸 힘들을 그 자신이 통제할 없음을 고백하고 있다. 그 중 하나는 일본 대지진에 뒤이은 원자로 폭발과 방사능 위기이며 또 하나는 북아프리카 및 중동에서의 연쇄적이고 연속적인 혁명이다. 원자력 발전은 우라늄이라는 자연물질을 이용하는 것이지만 그것의 분열과정은 인간의 과학기술에 의해 인지적으로 정교하게 조직되어 있다. 인간은 핵분열 조작을 통해 거대한 핵에너지를 인공적으로 발생시키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후쿠시마 원자로의 폭발과 누출되는 방사능에 대한 통제불가능의 상황은 인지자본주의가 거대한 힘을 불러낼 수는 있지만 그것을 그 자신이 통제할 수 없을 수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원자 에너지는 켤 수는 있지만 끌 수 없는 불이다. 인간은 그것을 냉각시킬 수 있을 뿐이고 수 만, 수 십 만, 아니 수 십 억 년에 걸쳐 진행될 그것의 반감을 기다릴 수 있을 뿐이다. 일본 핵상황의 불확실성은 전 세계에 불안과 공포를 확산시키고 있다.
   아프리카와 중동에서의 혁명은 이 통제불가능성의 또 다른 예이다. 인지자본주의는 아프리카와 중동에서 핵연료인 우라늄을 비롯한 막대한 광물자원과 석유자원을 채굴했고 그것으로 거대한 자본을 축적했다. 2011년, 이 지역의 다중들의 혁명과 그것의 연쇄적 확산은 인지자본주의가 빠져 있는 통제불가능성과 무능력을 전혀 다른 방향에서 보여준다. 튀니지에서 시작된 혁명은 이집트로 확산되었고 이어 리비아, 알제리, 모리타니 등의 아프리카 지역 뿐만 아니라 예맨, 사우디아라비아, 이란, 오만, 시리아, 팔레스타인 등 중동의 전 지역으로 확산되었고 이 지역에 통제불가능성과 불확실성을 확대시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절실해지는 것은 우리가 속해 있는 인지자본주의가 어디에서 와서 지금 어떻게 운동하고 있고 무엇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가, 하는 물음이다. 이 물음은,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고 또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진보와 실천의 물음뿐만 아니라 우리의 능력 가운데 무엇을 발전시키고 무엇을 억제해야 하는가 라는 윤리적 선택과 자제의 물음도 포함해야 한다.
   1991년 사회주의 소련이 붕괴하고 미국에 의해 새로운 세계질서가 선포되었을 때, 문제는 그 새로운 세계질서의 성격, 그것의 구조, 그것의 내적 모순, 그리고 그것의 동학에 대한 탐구였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우리로 하여금 냉전 이후의 이 통합된 세계질서가 가져오는 새로운 주권형태가 무엇인가를 탐구하도록 우리를 이끌었다. 그 탐구의 결실은 네트워크 주권형태로서의 제국에 대한 개념화로 나타났다. 그러나 2001년 9/11 사건과 그에 대한 미국의 대응으로서의 테러에 대한 전쟁, 그리고 그에 뒤이어진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제2차 걸프전은 제국의 형상을 수정했다. 9/11 사건은 군주국 미국이 정치적으로 뿐만 아니라 군사적으로도 도전받는 상태에 있다는 이미지를 만들어 냈다. 이러한 상황을 이용해 미국은 제국의 다원주의적 합의 체제를 깨뜨리고 일방주의적으로 행동하는 쿠데타를 감행했다. 테러에 대한 전쟁이라는 이름 하에서 수행되어온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전쟁은 이 일방주의적 행동의 산물이다. 그러나 이 전쟁들은 미국을 단독적 군주국으로 만들어주기는커녕 미국을 더 깊은 수렁으로 끌어들였다. 10년 여 계속되고 있는 이 전쟁은 제국 내부에 커다란 긴장과 갈등을 불러왔을 뿐만 아니라 미국을 정치적 군사적으로 실추시켰고, 2008년의 금융위기는 미국의 이 쿠데타가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미국의 종말을, 나아가 세계자본주의의 결정적 위기를 불러오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제국의 위기가 자본주의의 결정적 위기로 이어진 것이다. 금융위기는 세계경제위기를 불러오면서 수년이 지난 지금까지 수습되기는커녕 나날이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음을 보여준다. 전 세계적 수준에서 다중의 저항과 혁명은 이러한 상황에 대한 아래로부터의 대응으로서, 라틴아메리카에서 아시아로, 아시에서 유럽으로, 유럽에서 아프리카로, 아프리카에서 중동으로 순환하고 있는, 다중의 전 지구적 대장정의 형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2008년 이후의 위기는 자본주의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현 시대를 재조명하는 과제를 절실한 것으로 만든다. 많은 경제학자들은 이것을 자본주의의 순환적 위기의 한 국면으로 간주하곤 한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인지자본주의하에서 누적되어온 위기의 축적과 그 축적된 위기가 갖는 탈순환적이고 구조적인 성격을 간과하는 것이다. 이것은 과거의 경험을 통해 현재를 해석하는 것이다. 이 책에서 나는 현재의 위기의 구조적 성격을 규명하는 한편, 현재의 체제 속에 자본과 노동의 적대가 고스란히 살아 있음을 확인하면서도 그것이 결코 고전적 형태 그대로가 아니고 변용된 형태로 살아있음을 밝힐 것이다. 이 작업은 우리 시대에 가능한 혁명의 기원과 경향과 형태를 밝히는 작업-이 작업은 곧 출간될『혁명의 세계사』(가제)에서 이루어질 것이다-의 필수적인 전제가 될 것이다.
   지난해부터 이 책을 준비하면서 나는 지난 십 여 년 동안의 나의 연구과제 대부분이 바로 현대 세계의 성격과 구조를 탐구하고 이 조건 속에서 가능한 사회변혁의 가능성과 방법을 탐구하는 데 바쳐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철학을 다루든, 정치경제를 다루든, 문학예술을 다루든, 늘 나의 문제의식이 이 문제를 중심으로 회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하면서 나는 지난 해 이후 의식적으로 이 책의 발간을 목표로 기고활동을 조직하고 이 책의 기획 이전에 썼던 글들을 이 책의 취지에 맞게 편집하고 수정했으며 일관된 서술체계를 부여했다. 이 책은 인지자본주의의 구조와 특성에 대해 서술한 책이기 때문에 대안을 찾는 데 관심을 갖고 있는 독자들을 충분히 만족시켜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각 장의 끝 부분과 책의 마지막 부분, 그리고 간주곡에 해당하는 몇 편의 글을 통해, 그 대안이 고려해야 할 거시적 조건들과 대안이 추구되어야 할 커다란 방향이 제시되거나 최소한 암시될 수 있도록 노력했다. 하지만 그 서술의 내용은 이 책에 필요한 범위에 제한되었다. 이 책에서 다루어지지 못한 사회혁명적 대안문제에 관해서 나는, 『혁명의 세계사』에서 역사서술적 방식을 통해 좀 더 상세하게 다룰 계획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쉽지만 마리 여사의 강의 지상중계는 오늘로 막을 내립니다. 네 번에 불과하지만 너무 질질 끌었나 싶은 생각도 해봅니다. 마지막 강의는 '국제화'와 '글로벌리제이션'의 의미를 통해 세계질서의 변동에 대응하는 일본인의 자세를 보여줍니다. 우리 모습을 빗대어본다면 어떻게 말할 수 있을지. 앞서 말씀드렸듯이 이제 마리 여사의 책은 세 권 남았습니다. 계획대로라면 올해 안에 완간이 될 터인데 더 많은 이들이 곱씹을 수 있도록 널리 알려지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문득 일본에서는 마리 여사를 어떻게 기억하고 추억하는지 궁금해지네요. 참고 삼아 알라딘에서 진행한 요네하라 마리 리뷰 대회 페이지를 소개합니다. 한번 살펴볼 만합니다. 

http://www.aladin.co.kr/events/wevent_detail_book.aspx?pn=100802_mari_end 

 

제4장. ‘국제화와 글로벌리제이션 사이’에서

이미 국제화를 이루었지만

비일상적이라고 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이미 국제적인 교류랄까 다른 나라와의 교류는 일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런 한편으로 일본인의 의식 속에는 전통적으로 국제적인 일은 비일상이라는 관성의 법칙(외부로부터 힘이 가해지지 않는 한 현재의 상태를 유지하려는 성질)이 아직도 남아 있다. 마음속에도, 행동양식에도 이 관성의 법칙이 살아 있어서 현실은 이미 국제적인데도 마음은 여전히 비非국제적인 상태 그대로다.
  국제적이게 된 요인으로는 먼저 교통수단과 운반수단의 발달을 들 수 있다. 굳이 목숨을 걸고 바다를 건너지 않아도 비행기로 한번에 외국에 갈 수 있다. 국경이라는 울타리가 차츰 낮아지고 있다. 또 통신수단이 발달해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나는 일도 몇 초 후면 텔레비전 중계로 방송되고 인터넷으로 전해진다. 눈 깜짝할 사이에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난 일들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다. 유럽에서는 10여 년 전에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되어 체제의 벽이 없어졌다. 그래서 다국적 기업이 자원을 조달할 때도 국경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최근 일본의 엔화가 약세다. 경제 불황이 이어져 엔화가 힘을 쓰지 못한다고 하는데, 그래도 국제적으로 보면 엔화의 수준은 상당히 높고 강하다. 그러면 일본에 값싼 노동력이 자꾸 들어온다. 외국인이 일본 열도로 몰려든다. 그런 의미에서도 현실에서 일본은 이미 국제화되어 있다. 다른 국가와의 교류가 증가하고 있다.
  바다는 더 이상 국경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국제화는 비일상이 아니라 일상이 되었는데도 뉴스를 봐도 그렇고, 일반인들을 봐도 그렇고, 세계나 국제라는 말을 들으면 약간 흥분한다. 이웃현縣의 손님보다 외국 손님이 오면 흥분하는 것과 같은 게 아닐까? 아무튼 일상의 연장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국제화는 영어로 뭘까

어떤 이유에선지 사람들은 일상적인 일이 아니면 평상심을 잃는데, ‘국제’와 ‘국제화’에 대해 차분히 생각해보자.
  ‘국제화’라는 말에 우리는 많은 개념을 뒤섞어 집어넣고 있는 게 아닐까? 일본어로 ‘국제적’이라고 할 때와 ‘국제화’라고 할 때 똑같이 ‘국제’라는 단어를 쓰는데, 영어로 ‘국제적’은 ‘international’이다. 그럼 ‘국제화’라고 할 때는 ‘internationalization’이라고 하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이 말을 쓰지 않는 것은 아니다. 사전에도 나와 있다. 그런데 ‘국제화’라는 의미는 아니다. ‘internationalization’은 ‘국제 관리화’라는 뜻이다.
  파나마 운하를 예로 들어보자. 남북 아메리카를 잇는 잘록한 땅이 있는데 그곳이 바로 파나마라는 나라다. 파나마 운하는 파나마 지협地峽을 횡단해 태평양과 카리브해(대서양)를 잇는 장소라서, 그곳의 이권을 쥐는 것은 교통이나 군사적인 면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 파나마 운하를 한 나라가 아닌 국제 공동 통치하에 두어 관리한다고 할 때 ‘internationalization’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일본은 미국, 소련, 프랑스, 중국 등 아홉 개의 나라로 이루어진 연합국—연합국은 9개국이었던 걸로 기억한다—의 통치하에 놓였다. 국제 공동 통치하에 놓인 것이다. 독일도 그랬다. 이런 경우에 ‘internationalization’이라는 말을 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국제화’는 영어로 어떻게 번역할까? 사전에 나와 있듯이 ‘globalization’, 글로벌리제이션 혹은 글로벌라이제이션이라고 한다.
  일본인이 ‘국제화’라고 말할 때 그것은 어떤 의미일까? 일본은 장사 습관이나 행정 방법 등 많은 것들이 특수한 나라로, 국제사회와는 약간 다르다. 그래서 일본인의 양식을 국제사회의 양식에 맞추지 않으면 안 된다. 일본인이 국제화라고 말할 때는 국제 양식에 맞추는 것, 흔히 글로벌 스탠더드global standard라 말하는 세계 표준에 맞춘다는 의미다.
 


글로벌리제이션의 진짜 의미

그럼 ‘국제화’로 번역되는 ‘글로벌리제이션’은 어떤 의미일까? 글로벌리제이션이라는 용어의 중심 개념은 ‘글로브globe’다. 글로브는 지구의 구球, ‘지구의地球儀’를 말한다. ‘영어로 지구는 earth인데?’라고 생각할 텐데, 글로브는 지구가 구형인 것, 즉 둥근 것을 강조할 때 사용한다. 글로벌리제이션은 영어니까 영국과 미국이 자신들의 기준, 자신들의 표준으로 세계를 뒤덮으려는 것이 글로벌리제이션이다.
  그래서 나는 동시통역을 할 때, 일본인이 국제화라고 말하면 거의 자동적으로 글로벌리제이션—러시아어니까 글로발리자치야Глобализация—이라고 번역했는데, 지금 말한 것처럼 사실은 반대 의미다. 앞서 말했지만 ‘국제화’라 할 때 일본인이 말하는 국제화는 국제적인 기준에 자신들이 맞춘다는 의미다. 지구촌, 국제사회에 맞춰간다는 의미.
  미국인이 말하는 글로벌리제이션은 자신들의 기준을 세계에 보편화한다는 의미다. 자신들은 달라지지 않는다. 자신들은 정당하고 정의롭다. 자신들이 법이다. 이것을 세계 각국에 강요하는 것이 글로벌리제이션이다.
  똑같이 국제화라고 하지만 자신을 세계의 기준으로 하려는 ‘글로벌리제이션’과 세계 기준에 자신을 맞추려는 ‘국제화’ 사이에는 아주 커다란 도랑이 있는 것이다. 정반대의 의미다. 일본인은 이 점을 자각해야 한다. 이것이 첫 번째 문제점이다.
  두 번째 문제점은 무엇일까? 일본인이 세계에 자신들을 맞추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할 때의 세계 혹은 국제사회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일본인의 전통적인 습성으로, 일본인에게는 그때그때의 세계 최강국이 곧 세계가 되는 경향이 있다. 게다가 세계 최강국이라고 할 때 무엇을 기준으로 하는가 하면, 기본적으로 군사력과 경제력, 이 두 가지만 보고 문화는 염두에 두지 않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드디어 3강, 마리 여사의 전공 분야군요. 꽤나 분주한 화요일입니다. '차이'건 '사이'건 틈이 없는 하루입니다. 

내일은 마지막 강의를 전하겠습니다. 나머지는 책에서 확신하시라.(자료를 제공해준 출판사에 전하는 제 마음의 표현입니다)

 

제3장. ‘통역과 번역의 차이’에서
 


사전 없이 책을 독파하다

당시 여름 숲속학교에 도서관이 있었다. 어느 날 도서관에서 책을 뒤지다가 한자로 ‘箱根用水하코네용수’라고 쓰여 있는 책을 발견했다. 일본을 떠난 지 6개월 정도 됐을 때여서 낯선 땅에서 같은 고향 사람을 만난 듯한 정겨움에 그 책을 꺼내어 꼭 움켜쥐었다.
  표지는 한자였지만 안은 온통 러시아어였다. 그런데도 망설임 없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다카쿠라 데루高倉テル1891~1986라는 일본 작가가 쓴 소설이다. 후지산 기슭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이 물에 좌우되었던 에도시대에, 지하터널을 통해 하코네箱根 아시노코芦ノ湖 호수의 물을 끌어와 저수지와 운하를 만들어 농사짓는 데 쓰기 위해 권력층과 싸우고 많은 사람의 협조를 얻어 그 사업을 성공시키는 이야기다.
  나는 책 내용에 푹 빠졌다. 한창 읽을 때는 그것이 러시아어로 쓰였다는 것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사실 캠프에 가기 전에도 학교 도서관에서 몇 번인가 책을 빌려 읽으려고 했는데, 말을 몰라서 제대로 읽을 만한 것이 없었다. 단어의 뜻을 모르면 보통 사전을 찾는다. 일일이 사전을 찾으며 읽다 보니 흥미가 줄어들어 도중에 책장을 덮고 좌절할 때가 많았는데, 이때 처음으로 끝까지 읽었다. 그래서 사전 없이 책을 읽는 데 자신이 생겼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해졌는지에 대해서는 이후에 이야기하자.
  그 캠프에서 마음에 맞는 아이들끼리 독서회를 열었다. 재미있을 것 같은 책을 정해 소리 내어 낭독하는 방식이다. 그러면 우스운 장면에서는 같이 웃고, 슬픈 대목에서는 같이 눈물을 흘린다. 사람이 느끼는 마음의 진동은 다른 사람의 진동과 공명하면 더 깊고 커진다. 그만큼 더 깊은 희로애락을 맛볼 수 있다. 한편 똑같은 문장도 사람에 따라 해석이 달라진다. 그것으로 서로 충돌하는 재미도 있으니 독서회는 해보는 게 좋다.
  한번은 함께 읽을 책으로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가 선정되었다. 익살스런 표현이 러시아어로 잘 번역되어 있었다. 그 학교는 대충 50개 나라의 아이들이 다녔는데, 여러 나라의 아이들이 모두 배를 잡고 웃었다. 메이지시대의 일본인이 쓴 이야기를 이렇게 여러 나라의 아이들이 재미있게 읽을 수 있구나 싶어 자랑스러웠다.
독서회를 자주 갖다 보니 러시아어로 된 글자를 읽는 게 편해졌다. 그래서 차츰 러시아 작가가 쓴 책에 도전하게 되었다. 지금 그 이유를 생각해보면, 마침 그때가 초등학교 4, 5학년 무렵이어서 남녀관계의 미묘한 사정과 섹스 같은 게 너무 알고 싶었는데, 선생님이나 부모님께는 물을 수 없지만 문학 작품에는 그런 내용이 잔뜩 나와 있으니 열심히 읽은 것 같다. 아무튼 많이 읽었다. 



살아 있는 말을 하기 위한 과정

통역을 할 때 그 모호함의 결과로서 즉 개념의 결과로서 나온 코드화한 문자나 소리만을 주워 옮겼기 때문에 동시통역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사람의 입에서 말이 나오는 과정은 모호함에서 시작된다. 그래서 우리는 개념이 표현된 것을 문자나 소리로 인식했을 때 그 내용을 듣거나 읽어 해독한다. 그러고 나서 ‘아, 이것을 말하고 싶었구나’ 하고 그 모호한 대상의 정체를 인식한다. 모호한 대상의 정체를 알게 되었을 때 이해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문자 그 자체가 아니다.
  그래서 통역을 할 때는 이 모호함을 다시 만들어내지 않으면 안된다. 즉 말이 생겨난 과정을 다시 한 번 거쳐야만 한다. 말이 생겨나고 그것을 듣거나 읽고 해독해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 하는 개념을 얻어서 그 개념을 다시 한 번 말로 한다. 코드화해서 소리나 문자로 표현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살아 있는 말이 될 수 없다. 결과만, 즉 말만 옮기는 것이 빠를 것 같지만 사실은 앞의 과정을 거치는 것이 더 빠르다.
  왜냐하면 말이란 그 부품인 단어가 아니라 하나의 텍스트이기 때문이다. 소설뿐 아니라 예를 들어 물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물리학도 좋고,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축구 기사도 상관없다. 말이란 그런 텍스트다. 이렇게 텍스트가 된 것을 인식하고 다시 텍스트로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그래서 단어마다 주워서 암기하거나 문법이라는 해골만 머리에 넣는, 살아 있는 말과 관계없는 행위를 열심히 해봤자 아무 의미가 없다. 매력도 없다.
  동시통역은 개념을 파악해 옮겨야 성립한다. 수화의 경우는 어떨까? 아마 단어 하나, 문장 하나를 일일이 옮기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것이 가능하다는 신앙을 버리지 않는 한, 통역으로의 비약은 불가능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