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나절에 나, 아내 , 딸아이가 모여서 순대와 김밥을 먹는데 여동생이 새 아파트를 하나 청약해놨다는 소식을 아내가 전한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뛰어난 살림꾼으로서의 자질을 갖춘 여동생에 대한 흐뭇함보다는, 조만간 나에게 튈 것이 분명한 불똥이 걱정된다. 학생들에게 꿀밤을 먹이면 정작 무서워하고 가슴 졸이는 것은 내가 준비 동작을 취할 때지 타격의 순간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분명 나에 대한 원망의 프롤로그임이 분명한 주변 사람의 성공담은 나에게 꿀밤을 맞기 직전의 긴장감으로 다가왔다.


아내와 딸아이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나는 다가올 후폭풍에 너무 긴장한 나머지, 순대가 아닌 김밥을 두 번이나 소금에 찍어 먹었다. 아니나 다를까 ‘우리 집’처럼 5년 후나 10년 후를 내다보지 않으며 금융 상품이나 재테크에 무지한 집도 없다고 한다. 김밥을 먹어서 오물거리는 아내의 입은 ‘우리’라고 말했지만, 그 눈동자는 분명 ‘당신 또는 너’를 말하고 있음을 눈치 없는 나도 알아챘다. 멀쩡히 잘 살고 있는 집이고, 이사를 하면 이사 비용과 세금 등의 비용은 어쩔 거냐는 나의 주장은 이미 자주 써먹은 터라 다른 기발한 변명을 생각하려는데 숨 쉴 틈도 없이 아내는 다음 현안으로 화제를 돌린다.


딸아이가 영어 학원에 그만 다니고 싶어 한단다. 이 현안에 대해서는 나도 나름 전문가(영어 교사)이니 자신 있게 결론을 내려주었다. “계속 다녀라.”


마지막 안건은, 정 이사를 가기 싫으면(‘이사 갈 능력이 안 된다면’이라고 말해주지 않아서 고맙다) 리모델링이라도 해야 하는데 직장 동료가 편백나무를 사용해서 벽을 리모델링하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했단다. 이 대목에서 바람직한 가장이라면 편백나무로 리모델링했을 때 장점과 단점을 열거한 후에 장점이 더 많으니 그게 좋겠다고 말함으로써 남편의 해박한 집안 살림 지식을 자랑하고, 또 아내의 의견에 동조하는 자상한 남편상을 보여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나는 이렇게 말하고 말았다.


“거 편백나무가 뭐 어떤 긴데?”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무식할 수 있느냐는 비난을 듣고 평소처럼 나의 은신처인 서재로 발걸음을 돌렸다. 아내의 무서운 공격에 숨 쉴 틈이 필요했다. 단 30초라도.

영혼까지 털린 몸뚱이를 서재의 소파에 내던진 다음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런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내가 퇴근 직전까지 머리를 싸매고 고민한 것은 새로 나온 이문열의 14만 원짜리 《변경》 전집을 지를까 말까였기 때문이다.


===== 이 글은 제가 쓴 <그래도 명랑하라 아저씨>에서 발췌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휴일에는 주로 서재에서 서식한다. 책도 읽고, 소파에서 낮잠도 자고, 글도 쓰고, 인터넷 서핑도 하고, 야구 중계도 본다. 사실 두 여자(딸아이와 아내)와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취향이 달라서 거실에 머무는 시간이 적기도 하다. 


아쉬울 게 없는 서재에서의 칩거지만 단 하나, 굶주림에는 장사가 없다. 식사 시간에는 주로 딸아이가 와서 “지금 식사를 하시겠느냐” 묻거나 “식사를 하시오”라고 통보하는 편이다. 그러나 사람이 주식만 먹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식사란 것이 어느덧 틀에 박힌 일상의 습관이거나 의무감에서 이뤄지는 행위라면, 순수하게 호감으로 선탁해 즐거운 마음으로 먹는 것이 ‘간식’이다.


불행하게도 나의 서재 생활은 간식에 치명적이다. 그렇지 않아도 아내는 나의 아지트인 서재를 할렘처럼 생각해 우리 집에서 유일하게 손을 놓고 있는데, 음식 찌꺼기나 냄새마저 고약하다면 서재 철폐령이 내려질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가급적 서재에 먹거리를 들이지 않는다.

서재 생활에 심취하더라도 늘 바깥세상의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문을 완전히 닫지는 않는다. 그래야 후각으로 그들이 어떤 간식을 준비하는지와 요리는 완성되었는지, 청각으로 그 양은 어느 정도 되는지와 간식을 얼마만큼 먹고 있는지를 파악한다. 물론 아내가 야구 중계소리가 신경 쓰이니 문을 꼭 닫으라는 요청을 하면 당연히 꼬~옥 닫아준다.


그들이 언제 간식을 먹는지 어떤 종류의 간식을 먹는지 그 양은 얼마나 되는지 서재에 앉아서도 간파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괜히 가장의 체면을 손상하지 않으면서도 그들과 분쟁을 일으키지 않으며 나의 식탐도 충족할 수 있다. 내가 싫어하는 음식, 즉 카레라든지 치즈를 잔뜩 얹은 옥수수 비빔밥을 먹겠다고 쪼르르 나갔다가 괜히 체면만 구길 이유는 전혀 없다.


그들은 대체로 식사를 끝내고 30분 정도 뒤에 간식을 먹는다. 그때쯤에는 더욱 레이더를 정교하게 가동해야 하며, 그들이 완성된 간식을 텔레비전 앞의 탁자에 딱 올리자마자 염치없이 달려 나가서는 안 된다. 그들의 포만감이 3분의 1정도 충족되어서 타인에 대한 경계심이 어느 정도 사라지고 나눔의 미학을 고려할 수 있을 때여야만 한다. 


하지만 이러한 일은 진즉부터 준비한 자에게만 찾아오는 법. 오는 정이 있어야 가는 정이 있다. 가령 어느 날 딸아이가 순댓국밥이 먹고 싶은데 취객들이 있을지도 모르는 순댓국밥집에 행차하기가 거시기하다고 하면 냄비를 들고 가서 포장해 와야 하고, 그들이 새우 버거가 먹고 싶다고 하면 냉큼 운전하고 가서 사 와야 한다.


여느 때처럼 느긋하게 메이저 리그를 감상하는데 촉이 왔다. 가장 적절한 시간에, 너희의 간식을 뺏어 먹기 위해서 나온 게 아니라는 표정과 몸짓으로 군웅이 할거하는 거친 광야인 거실로 나갔다. 그들이 먹으려고 하는 것은 골드키위였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여인들의 간식을 뺏어 먹는 하이에나도 지켜야 할 상도가 있다. 칠거지악에 삼불거라는 예외가 있듯이 나도 삼불식을 지킨다. 우선 딸내미가 직접 장만한 간식이다. 아직 과도를 다루지 못하는 딸내미가 직접 깎은 과일은 그녀가 그걸 극도로 먹고 싶었음을 의미한다. 그 과일을 뺏어 먹는다면 돌이킬 수 없는 지탄을 받을 것이다. 둘째, 그 양이 얼마 되지 않아서 내가 뺏어 먹었다가는 그들의 식탐이 충족되지 못해 원망받을 수 있는 경우다. 셋째는 배스킨라빈스31의 체리쥬빌레 속 왕 체리. 그건 절대 먹어서는 안 된다, 절대로.


불행하게도 오늘은 작은 접시 위에 올라앉은 골드 키위를 보아하니 키위 두 개쯤을 딸내미가 직접 깎아서 마련한 간식이다. 삼불식 중에 무려 두 가지나 해당된다. 아내도 딸아이를 위해서 먹지 않고 있었다. 지킬 것은 지키는 매너남답게 조용히 물러나려 했는데 거실까지 나온 것이 괜히 머쓱해 딱 한 조각만 먹겠다고 했다. 예상대로 딸아이와 아내는 완강히 거부한다.


 나는 그들의 거부 탓에 내가 과일 한 조각도 못 얻어먹고 돌아선다면 그들도 죄책감에 시달릴 수 있고, 가장으로서 가족 구성원에게 괜한 죄책감을 주기 싫으므로 한 조각만 먹겠으니 협조해달라고 요청했다. 나의 합리적인 요구에 딸아이와 아내는 경계를 풀었다. 딸아이는 저게 접시에서 가장 작은 조각이라는 제 어미의 조언에 따라 그놈을 포크로 찍어 내 입에 넣어줬다. 물론 포크에 침을 묻혀서는 절대 안 된다는 지엄한 요구를 했다.


사실 그 골드키위는 우리 모친께 드리려고 사둔 것인데 어찌하다 보니 가져가지 않아서 우리 집 냉장고에 있었다. 딸아이도 제 할머니처럼 골드키위를 아주 많이 좋아한다. 그뿐이 아니라 유년 때부터 제 할머니처럼 노란 시루떡을 좋아해서 재래시장에 가면 조공용으로 자주 사들고 집에 오곤 했다.


제 할머니와 식성을 닮은 딸아이에게서 어머니를 본다. 어머니가 느껴진다.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는 것 같다.



===== 이 글은 제가 쓴 <그래도 명랑하라 아저씨>에서 발췌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내가 늘 그들(아내&딸)에게 굴욕적으로 패배하고 지배를 당하는 것만은 아니다. 나도 승리의 순간이 엄연히 존재한다. ‘국산 옥수수로 만든 강냉이 뻥튀기’ 대첩이 바로 그 경우다. 지난 일요일 나는 어머니에게 드릴 떡을 사기 위해서 재래시장에 들렀는데 그들에게 조공을 할 먹거리를 찾다가 ‘국산 옥수수로 만든 강냉이 뻥튀기’를 발견했다. 
중국산은 노랗게 먹음직스럽게 생겼는데 국산 옥수수는 꺼무칙칙하게 보기엔 그래도 역시 농산품은 신토불이 아니던가? 더구나 조공용이니 그 음식의 원산지에도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한다. 어머니를 뵙고 집으로 돌아갔다. 의기양양하게 까만 비닐봉지에 든 ‘국산 옥수수로 만든 강냉이 뻥튀기’를 마누라 상전에 바쳤으나 그딴 걸 뭐하러 사오냐는 예상치 못한 혹평을 받았다.
순간 화가 치밀어서 ‘국산 옥수수로 만든 강냉이 뻥튀기’를 거실에 패대기치려고 했으나 상전 앞에서 감히 그런 불손한 행동은 못 하고 내 서재로 들어와 소파에 살포시 패대기를 쳤다. 저들에게 ‘국산 옥수수로 만든 강냉이 뻥튀기’를 절대로 주지 않고 나 혼자 다 먹기로 결심을 했다.
무려 5,000원 어치고 나와 안면이 있는 주인아주머니께서 가래떡 뻥튀기와 쌀 뻥튀기까지 덤으로 주셔서 혼자서 다 먹기엔 너무 벅차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매일 매일 먹기로 하고 봉지를 열었는데 뻥튀기 냄새가 코를 찌른다. 꾸역꾸역 먹는데 목이 따가울 지경이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음료수라곤 내가 가장 싫어하는 ‘자몽’ 주스뿐이다. 내가 절대로 먹지 않겠다고 결심한 주스인데 너무 급하다보니 어쩔 수 없다. 쓰디쓴 자몽 주스를 벌컥 벌컥 마시고 다시 서재로 복귀했다. 저들의 비웃음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다음 날부터 야구 중계를 보면서 ‘국산 옥수수로 만든 강냉이 뻥튀기’를 먹었다. 서재의 형광등도 꺼두어서 마치 영화관에 온 것 같은 운치가 느껴진다. 역시 ‘국산 옥수수로 만든 강냉이 뻥튀기’를 사길 잘했다. 그러나 또 목이 따가워져 온다. 나가서 또 자몽 주스를 먹었다. 처음에는 왜 이렇게 맛없는 걸 사왔냐고 조금 짜증을 낸 것 같은 기억이 나는데 이제 자몽주스가 입맛에 맞기 시작했다.
저들도 분명 뻥튀기를 싫어하지는 않는데 자신들이 한 소리가 있어서 참고 있겠구나라고 생각하니 새삼 강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나의 경우 냉우동 한 그릇에 자존심과 나의 이데올로기쯤은 쉽게 버리는 위인이 아닌가? 저들은 자신들의 이데올로기와 명분을 위해서라면 먹거리쯤은 안중에도 없구나!
6일째 되는 날 여느 때처럼 야구를 보면서 ‘국산 옥수수로 만든 강냉이 뻥튀기’를 먹는데 아내가 덜컥 문을 열었다. 뻥튀기를 마치 떡을 먹는 것처럼 그렇게 우적우적 먹느냐고 타박을 한다. 당황스러웠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저 여자도 강렬한 뻥튀기 향을 맡았을 때이고 적어도 인간인 이상 ‘입질’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더구나 저녁을 먹은 후 두 시간이 지났다. 간식거리에 대한 욕구가 극대화되는 시점이다. 서재를 나가는 아내의 뒤통수에 대고 ‘지금이라도 먹고 싶으면 말해라’라고 말하는 호기를 부렸음은 물론이다.
과연 정확히 18분 후 아내가 “뻥튀기 이리 좀 가져와봐”라며 백기를 들었다. 감격스러운 순간이다. 실로 얼마만의 승리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승자라고 해서 자만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먹고 싶으면 여기 와서 가져가”라는 모욕적인 언사를 패자에게 해서는 안 된다. 
거실에 있는 아내에게 조용히 ‘국산 옥수수로 만든 강냉이 뻥튀기’를 가져다주었고 다음 날 아침 그들이 소비한 뻥튀기의 양이 적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나의 승리를 재확인했다.
이번 승리에 오점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다음날 학원을 다녀온 딸내미가 뻥튀기를 찾았는데 승리에 도취한 나머지 ‘조롱’을 조금 하다가 ‘빡친’ 딸내미를 달래주기위해서 ‘국산옥수수로 만든 강냉이 뻥튀기’를 제발 먹어달라고 애원해야만 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책을베고자는남자 2015-06-17 2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을 참 재미나게 쓰시네요 스타일도 비슷하시고....유쾌한 시간이었습니다

박균호 2015-06-17 2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감사합니다...
 

아주 가끔 이런 날이 오기도 한다. 약소국으로 강대국의 눈칫밥을 먹은 지가 수삼 년인데 나에게도 드디어 찬란한 서광이 비치는 날 말이다. 콘크리트보다 더 견고해보였던 그들(아내&딸)의 동맹 관계에 드디어 균열이 보였다. 부부 사이도 그렇지만 모녀간의 우정도 아주 사소한 일로부터 큰 싸움으로 번지는 법이다. 사건의 발단은 이랬다. 
친구들의 모임에 참석하느라 귀가가 늦었는데 역시나 딸아이는 나의 돌출된 배를 손가락으로 찌르면서 ‘이건 뭐야?’라는 질문으로 나의 소중한 몸을 졸지에 ‘사물화’했고 내 손가락으로 흡연 손핑테스트를 함으로써 내가 그들의 관리하에 있다는 사실 관계는 출근부의 도장처럼 확인되었다. 더구나 흡연자들의 천국인 친구들의 모임에 참석하느라 고기 구운 냄새와 담배 냄새를 가득 담고 온 나의 비매너에 대해서 두 사람 모두 개탄스럽다며 한목소리를 냄으로써 그들의 우정과 나에 대한 우위의 위치에 대한 확인이라는 우리 집안의 평화를 떠받드는 두 개의 큰 주춧돌이 어김없이 안녕을 유지한다.
조용히 시키는 대로 샤워를 마치고 그들이 거실을 비운 5분 동안 텔레비전으로 프로 야구를 시청하는 호사를 누린 다음 조용히 나의 서재로 들어왔다. 딸아이는 요새 다이어트 바람이 불었는지 가만히 앉아 있어도 땀이 흐르는 무더운 우리 집에서 헬스용 자전거를 열심히 탄다. 아내는 딸아이가 너무 다이어트에 신경을 쓴 나머지 충분히 먹지 않는다고 걱정하는 눈치다. 결국 딸아이와 아내의 다이어트에 대한 미묘한 관점의 차이는 그들 사이를 벌어지게 하는 아주 작은 틈새를 만들어내고 마는데, 그 조짐은 어제부터 감지할 수 있었다. 
어제 퇴근길에 아내가 마트를 잠시 다녀왔다. 장바구니의 상당 부분의 부피를 차지한 품목이 바로 전날 딸아이가 굉장히 먹고 싶은 빵이 있는데 살이 찔까 봐 못 먹겠다던 바로 그 빵이었다. 차라리 눈에 안 보이면 참을 만한데 다이어트를 위해 간신히 먹고 싶은 것을 참는 그 빵을 주방의 눈에 잘 띄는 곳에 둔다는 것은 딸아이의 입장에서는 도발이 아닐 수 없다. 즉 딸아이의 다이어트 계획에 정면으로 반기를 드는 처사였던 것이다. 
오늘도 딸아이가 거실에 둔 자전거를 타기 위해서 안장의 높이를 낮추느라 부산을 떨었는데 아내가 대뜸 “거기에서 더 이상 낮출 수 없는데 뭐 하러 쓸데없는 수고를 하느냐”라고 말해버렸다. 즉 그 헬스용 자전거는 아직 너의 키에 맞지 않는 성인용이며, 다시 말해서 너는 그 자전거를 타서는 안 된다는 말이고 더 나아가 한마디로 다이어트를 하지 마라는 자신의 궁극적인 속마음을 대놓고 말하는 무리수였다. 요즘 다이어트를 공부 다음으로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는 딸아이에게는 차마 참을 수 없는 큰 도발인 것이 분명했다. 그나마 혈맹으로 뭉친 아내와 딸 사이니까 대충이라도 넘어가지 그들의 잠재적인 적군인 내가 그런 말을 했다면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주장하는 일본의 망언에 버금가는 언행으로 간주되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아무리 그들의 우정이 돈독해서 대충 묻힐 일이긴 하지만 앙금은 남아 있었다. 딸아이가 휴대폰으로 동영상인지 음악인지를 감상하면서 열심히 페달을 밟고 있는데 아내가 그 콘텐츠의 정보 제공 업체와 내용의 건전성 여부에 대한 의문을 딸아이에게 표시했고 딸아이는 발끈하면서 단지 유튜브에서 노래를 감상하고 있을 뿐이라고 항변했다.
아내는 “그렇게 건전한 내용이면 왜 내가 보려고 하면 감추고 그러느냐?”며 그들의 내전을 확대했다. 이에 대해 딸아이는 “내 폰이 구려서 인터넷이 잘 안 된다. 그래서 유튜브로 음악을 듣는다”라고 대응했고 아내는 “인터넷이 안 되는데 어떻게 유투브는 볼 수 있느냐?”라고 대물었다. 서재에서 조용히 강대국들의 다툼을 관전하고 있던 나는 아내의 이번 발언은 내가 아는 IT지식과 일치하며 매우 합리적인 의심이라고 평가했다. 인터넷이 잘 안 되는 휴대전화로 유튜브의 콘텐츠를 실시간으로 감상할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제3자인 나로서도 납득하기 힘든 가설이다.
바로 이때 딸아이는 아내가 반박하기 어려운 회심의 일격을 날렸는데 “엄마도 혼자 휴대전화를 보다가 내가 같이 보자고 옆으로 가면 ‘안 알랴줌’으로 일관하지 않느냐?”라고 따져 물었다. 즉 국제 관계에 있어서 호혜 평등의 원리를 새삼 요구하고 나섰다. 예상은 어느 정도 했지만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발언으로는 제압할 수 없는 딸아이의 공격에 아내는 비논리적인 슈퍼 강대국의 힘을 앞세웠다. “나는 어른이잖아!”라고 말함으로써 냉엄한 국제 관계에서는 호혜 평등의 원리 따위보다는 ‘힘’이 더 앞선다는 즉 법보다는 주먹이 앞선다는 다소 비근대적이고 제국주의적인 논리를 내세웠다. 즉, 아내가 당황했다는 증거다. 마치 영어가 모국어인 싱가포르 상인에게 다급히 “아니, 두 개 말고 하나만”이라고 외치던 상황을 연상케 하는 순간이다. 
그런데 강대국들의 이권 다툼에 온갖 안테나를 곤두세웠어야 할 나는 큰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그 와중에 컴퓨터로 관전하던 프로 야구 게임에서 삼성의 선수가 홈런을 치는 장면에 잠시 넋을 뺏긴 틈을 타 그들의 다툼은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치달았던 것이다. 홈런을 날린 삼성의 선수가 느긋하게 홈런 세러모니를 마치고 더그아웃으로 돌아와 냉장고에서 게토레이를 시원하게 마시는 장면까지 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갑자기 서로를 향한 진한 애정이 담긴 말다툼 아닌 말다툼을 나눈다.
방금 전까지 거실의 패권을 두고 세력 다툼을 하던 아내와 딸이 어쩐 일인지 아내는 딸아이에게 “왜 넌 엄마를 그렇게 걱정하느냐?”라고 탓하고 딸아이는 “딸로서 엄마를 걱정하는 게 당연하지 않느냐”라며 반박한다. 은근히 강자들의 내분을 통해서 어부지리를 기대했던 나에겐 당황스럽기 그지없는 상황인데 더 큰 문제는 어떤 계기로 이토록 급작스럽게 상황이 반전되었는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이다. 황새의 뜻을 뱁새 따위가 알 수 없다고 했든가? 괴이하게도 서로를 끔찍이도 걱정하고 위하는 훈훈한 내용의 말로 다투던 딸아이는 제 방으로 사라졌고, 아내는 아내대로 욕실로 향하는 이해 못 할 상황이 이어졌다. 우매한 나로서는 저들이 다툼을 했는지 아니면 서로에 대한 깊은 애정을 확인한 자리였는지조차 헛갈렸다.
이런 상황까지 이어지자 나는 두 가지 이유로 무주공산이 된 거실로 나갔다. 첫째, 저들이 다툼을 한 것이고 우정의 균열이 생긴 것이라면 둘 중에 누구를 포섭해야 나의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지 궁금했고 둘째, 서로를 비난하다가 어떤 말을 계기로 서로에 대한 따뜻한 애정을 주고받는 상황으로 변질되었는지가 궁금했던 것이다. 여자들의 이런 이해 못 할 행각에 대한 연구와 조사는 앞으로 내가 무탈하게 가장의 권위를 유지시키는 데 무엇보다 중요한 자료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여자들의 행동 양식에 대한 나의 학구열은 간단히 무시되었다. 딸아이의 방에 조심스럽게 접근한 나는 방문턱을 넘자마자 자기 방에서 나가줬으면 좋겠다는 말을 들었고, 그나마 딸아이보다는 구체적인 대답을 해줄 것으로 기대되었던 아내는 나의 정성스러운 마사지 신공이라는 조공을 받고도 구체적인 대답을 회피하는 슈퍼 강대국으로서의 면모를 과시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휴일에는 주로 서재에서 서식한다. 책도 읽고, 소파에서 낮잠도 자고, 글도 쓰고, 인터넷 서핑도 하고, 야구 중계도 본다. 사실 두 여자(딸아이와 아내)와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취향이 달라서 거실에 머무는 시간이 적기도 하다. 
아쉬울 게 없는 서재에서의 칩거지만 단 하나, 굶주림에는 장사가 없다. 식사 시간에는 주로 딸아이가 와서 “지금 식사를 하시겠느냐” 묻거나 “식사를 하시오”라고 통보하는 편이다. 그러나 사람이 주식만 먹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식사란 것이 어느덧 틀에 박힌 일상의 습관이거나 의무감에서 이뤄지는 행위라면, 순수하게 호감으로 선탁해 즐거운 마음으로 먹는 것이 ‘간식’이다.
불행하게도 나의 서재 생활은 간식에 치명적이다. 그렇지 않아도 아내는 나의 아지트인 서재를 할렘처럼 생각해 우리 집에서 유일하게 손을 놓고 있는데, 음식 찌꺼기나 냄새마저 고약하다면 서재 철폐령이 내려질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가급적 서재에 먹거리를 들이지 않는다.
서재 생활에 심취하더라도 늘 바깥세상의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문을 완전히 닫지는 않는다. 그래야 후각으로 그들이 어떤 간식을 준비하는지와 요리는 완성되었는지, 청각으로 그 양은 어느 정도 되는지와 간식을 얼마만큼 먹고 있는지를 파악한다. 물론 아내가 야구 중계소리가 신경 쓰이니 문을 꼭 닫으라는 요청을 하면 당연히 꼬~옥 닫아준다.
그들이 언제 간식을 먹는지 어떤 종류의 간식을 먹는지 그 양은 얼마나 되는지 서재에 앉아서도 간파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괜히 가장의 체면을 손상하지 않으면서도 그들과 분쟁을 일으키지 않으며 나의 식탐도 충족할 수 있다. 내가 싫어하는 음식, 즉 카레라든지 치즈를 잔뜩 얹은 옥수수 비빔밥을 먹겠다고 쪼르르 나갔다가 괜히 체면만 구길 이유는 전혀 없다.
그들은 대체로 식사를 끝내고 30분 정도 뒤에 간식을 먹는다. 그때쯤에는 더욱 레이더를 정교하게 가동해야 하며, 그들이 완성된 간식을 텔레비전 앞의 탁자에 딱 올리자마자 염치없이 달려 나가서는 안 된다. 그들의 포만감이 3분의 1정도 충족되어서 타인에 대한 경계심이 어느 정도 사라지고 나눔의 미학을 고려할 수 있을 때여야만 한다. 
하지만 이러한 일은 진즉부터 준비한 자에게만 찾아오는 법. 오는 정이 있어야 가는 정이 있다. 가령 어느 날 딸아이가 순댓국밥이 먹고 싶은데 취객들이 있을지도 모르는 순댓국밥집에 행차하기가 거시기하다고 하면 냄비를 들고 가서 포장해 와야 하고, 그들이 새우 버거가 먹고 싶다고 하면 냉큼 운전하고 가서 사 와야 한다.
여느 때처럼 느긋하게 메이저 리그를 감상하는데 촉이 왔다. 가장 적절한 시간에, 너희의 간식을 뺏어 먹기 위해서 나온 게 아니라는 표정과 몸짓으로 군웅이 할거하는 거친 광야인 거실로 나갔다. 그들이 먹으려고 하는 것은 골드키위였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여인들의 간식을 뺏어 먹는 하이에나도 지켜야 할 상도가 있다. 칠거지악에 삼불거라는 예외가 있듯이 나도 삼불식을 지킨다. 우선 딸내미가 직접 장만한 간식이다. 아직 과도를 다루지 못하는 딸내미가 직접 깎은 과일은 그녀가 그걸 극도로 먹고 싶었음을 의미한다. 그 과일을 뺏어 먹는다면 돌이킬 수 없는 지탄을 받을 것이다. 둘째, 그 양이 얼마 되지 않아서 내가 뺏어 먹었다가는 그들의 식탐이 충족되지 못해 원망받을 수 있는 경우다. 셋째는 배스킨라빈스31의 체리쥬빌레 속 왕 체리. 그건 절대 먹어서는 안 된다, 절대로.
불행하게도 오늘은 작은 접시 위에 올라앉은 골드 키위를 보아하니 키위 두 개쯤을 딸내미가 직접 깎아서 마련한 간식이다. 삼불식 중에 무려 두 가지나 해당된다. 아내도 딸아이를 위해서 먹지 않고 있었다. 지킬 것은 지키는 매너남답게 조용히 물러나려 했는데 거실까지 나온 것이 괜히 머쓱해 딱 한 조각만 먹겠다고 했다. 예상대로 딸아이와 아내는 완강히 거부한다. 나는 그들의 거부 탓에 내가 과일 한 조각도 못 얻어먹고 돌아선다면 그들도 죄책감에 시달릴 수 있고, 가장으로서 가족 구성원에게 괜한 죄책감을 주기 싫으므로 한 조각만 먹겠으니 협조해달라고 요청했다. 나의 합리적인 요구에 딸아이와 아내는 경계를 풀었다. 딸아이는 저게 접시에서 가장 작은 조각이라는 제 어미의 조언에 따라 그놈을 포크로 찍어 내 입에 넣어줬다. 물론 포크에 침을 묻혀서는 절대 안 된다는 지엄한 요구를 했다.
사실 그 골드키위는 우리 모친께 드리려고 사둔 것인데 어찌하다 보니 가져가지 않아서 우리 집 냉장고에 있었다. 딸아이도 제 할머니처럼 골드키위를 아주 많이 좋아한다. 그뿐이 아니라 유년 때부터 제 할머니처럼 노란 시루떡을 좋아해서 재래시장에 가면 조공용으로 자주 사들고 집에 오곤 했다.
제 할머니와 식성을 닮은 딸아이에게서 어머니를 본다. 어머니가 느껴진다.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는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