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영어교육의 가장 큰 적은 영어공부가 매우 중요한 의무라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영어를 실생활의 필요에 의해서 하지 않고 오로지 좋은 대학에 진학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는 상황 때문에 영어공부는 재미가 없다. 이런 상황은 누구의 잘못은 아니다. 영어뿐만 아니라 모든 공부와는 완전히 담을 쌓고 지내는 한 학생이 미친 듯이 중얼거리면서 연습장에 뭔가를 필기도 하면서 공부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궁금증을 못 참고 다가가서 지켜보니 놀랍게도 그의 연습장에 꼼꼼히 가득 적힌 내용은 영어단어들이었다. 더 자세히 보니 그 단어는 녀석이 좋아하는 컴퓨터게임을 즐기는데 필요한 각종 영어로 된 용어였다.

 

최고의 영어 교사는 현실적 필요에 의한 동기부여다. 그것이 어렵다면 굳이 교과서와 참고서에 전적으로 매달리지 말고 다른 재미있는 영어공부를 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딱딱하고 지루한 영어교과서나 참고서에만 매달리지 말고 좀 더 흥미를 가지고 영어공부를 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좋은 외국도서를 발견하고, 그 내용이 너무 좋아서 원어로 감상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긴다면 좋은 영어공부방법이다. 흔히 영어로 책을 읽고 싶은데 어떤 책이 좋을까? 라는 질문을 많이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추천받기보다는 이런 방법이 좋다. 본인이 읽은 책 중에서 재미있게 읽었거나 감동적이어서 다시 읽고 싶은 책이 있다면 그런 책의 원서를 구해서 읽는 방법이 그것이다. 원서로 읽는다면 번역본에서 느끼지 못하는 원문이 주는 다른 감동이 있고 또 영어공부도 되니 일석이조인 셈이다. 또는 이런 방법도 좋다. 자기가 본 영화중에서 굉장히 감명 깊고 즐겁게 본 영화가 있다면 그 영화의 원서를 찾아서 보는 방법이다. 많은 영화들이 소설을 원작으로 제작되니 영화의 원작을 구하기가 어렵지는 않다. 최근개봉중인 위대한 개츠비만 해도 그렇다. 국내에서 번역본들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지만 기왕이면 영어공부도 할 겸 원서로 읽는다면 좋겠다. 또 자기의 취미와 연관된 원서를 읽는 방법도 좋다. 영어는 배경지식이 있으면 자기의 영어실력에 비해서 훨씬 쉽게 읽게 된다.

원서를 읽을 때 주의할 점은 영어공부를 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독서를 하기 위해서 읽는 마인다가 필요하다. 그래서 재미와 흥미를 최우선 기준으로 해서 원서를 선택해야한다. 그래서 원서를 고를 때 처음단계에서는 자신의 취미, 흥미와 너무 잘 맞아서 끝까지 읽을 수 있는 책을 골라야 한다. 자신의 취미와 잘 맞는 원서를 수준이 조금 높아도 아무래도 완독의 가능성이 커진다. 그리고 어쩌면 웬만한 영화보다도 더 몰입을 가지고 읽게 된다.

The baseball codes.pantheon.2010

야구는 규칙이 매우 복잡한 운동이다. 수십 년 이상의 경력을 자랑하는 야구팬은 물론이고 야구를 밥벌이로 삼고 있는 프로야구 선수 , 심지어는 가끔 야구 심판마저 야구 규칙을 헛갈려 한다. 더구나 미국 메이저리그의 경우 각각 독특하게 설계된 구장 덕택에 그라운드 룰이라고 해서 해당 야구장에서만 적용된다. 야구에는 이런 성문화된 규칙뿐만 아니라 불문율이라고 해서 명문화되고 정식 규칙은 아니지만 선수들 간에 암묵적으로 지켜지는 규칙 아닌 규칙도 엄연히 존재한다. 이런 불문율을 어길 겨우 물론 투수가 일부러 상대 타자를 맞추는 보복이 따르고 또 그런 식으로 보복을 당한 팀은 반드시 보복을 해야 하는 불문율을 지켜야 한다. 몇 가지 불문율을 살펴보자.

0 큰 점수 차이로 이기고 있는 팀은 도루를 삼가라.

큰 점수 차이로 이기고 있고 경기 종반인데 굳이 상대편을 자극하는 도루를 하지 말라는 이야기다. 근데 야구가 참 어렵다는 게 대체 큰 점수 차이가 얼마를 말하는지 애매하다. 급기야 큰 점수 차이에 대한 인식의 차이에서 생기는 난투극도 실제로 2013년 우리나라 프로리그에서 발생했다.

 

0 홈런을 치고 나서 요란한 세러머니를 하지 마라.

게임을 끝내는 안타는 예외지만 홈런을 치고 나서 요란한 세러머니를 하거나 심지어 타구를 감상하면서 한 참을 타석에 머무는 행위도 이에 포함된다.

0 벤치클리어링이 생기면 무조건 열외해서는 안 된다.

팀 간에 다툼이 생겨서 그라운드에 운집해서 싸우는 벤치 클리어링이 생기면 모두 나와서 싸와야지 여기에 참석하지 않는 선수는 구단에 따라서 벌금을 매기기도 한다. 벤치 클리어를 할 때도 불문율이 있어서 손만을 사용해야지 발은 사용하지 않는다. 박찬호가 다저스 시절 상대선수와 다툼이 생겨서 이단 옆차기를 날린 적이 있는데 싸움자체는 문제가 안 되지만 손이 아닌 발을 사용했다는 이유로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0투수가 대기록을 앞두고 있을 때는 말을 걸지 않는다.

가령 노히트 노런이나 퍼펙트게임을 진행중일때는 말을 거는 일은 고사하고 근처에 앉지도 않는다. 투수의 집중력을 흩트리기 때문이다.

0투수가 대기록을 앞두고 있을 때는 상대편 팀은 번트를 대지 않는다.

번트가 비겁한 작전은 아니지만 대기록을 수립해나가는 투수에게 느닷없는 번트는 매너 있는 행위가 아니라고 여겨진다.

0스트라이크나 볼 판정에 대해서는 절대로 항의하지 마라.

야구에서 판전번복은 여간해서 없지만 특히 스트라이크, 볼 판정은 절대로 없다. 또한 심판 고유의 권한이기 때문이다.

 

이 책 The baseball codes는 위에서 언급된 불문율뿐만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일어난 다양한 야구의 불문율에 대해 들려준다. 야구팬이라면 누구나 재미있게 볼 만한 책이다. 어휘의 수준도 어렵지 않고 무엇보다 야구에 대한 배경지식이 깔려있는 야구팬이라면 어렵지 않게 읽는다. 야구의 불문율을 나열해가면 설명한 사전식 책이 아니고 마치 다큐처럼 실감나게 그 당시의 상황을 그대로 글로 재현했다고 보면 된다.

 

Tennis 2000.Vic Braden.1998

테니스 마니아지만 한 때 운동신경이 너무 없어서 발전이 더디다고 자책하던 필자에게 고개를 숙여서 수돗물을 받아먹을 정도의 운동신경이면 충분하다라고 큰 용기를 준책이다. 테니스는 비록 학교나 아파트에서 주차장에 밀려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는 중년층 이상의 운동으로 이미지를 굳혀가고 있는 우리나라의 현실이지만 여전히 가장 많은 동호인을 가지고 있는 생활스포츠다. 모든 운동이 다 그러하겠지만 테니스는 멘탈이 강하게 작용하는 종목이다. 그러나 동호인은 물론이고 선수들의 훈련에 있어서도 멘탈보다는 기술위주의 압박이 강한 훈련법이 주로 이루어진다. 국내에 나와 있는 테니스 관련 서적은 단순한 기술이나 작전위주의 기능만을 위한 책만 있지 그렇게 플레이를 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한다든지 게임 중의 멘탈을 키위기 위한 자상한 설명이 있는 책은 별로 없다. 이 책은 테니스 기능을 위한 책이 아니고 테니스를 잘 하기 위한 기본적인 원리를 익히는 책이라고 해야 맞다. 테니스에 관한 고전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Photography.Babara London. Pearson Prentice Hall.2007

우리나라만큼 DSLR이 대중적으로 많이 보급된 나라도 드물다. 한국에서 등산복 브랜드 Northface가 많이 팔리는 이유가 엄청나게 높은 산이 많기 때문이라고 이 회사의 본사가 생각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는데, 일본에 있는 캐논과 니콘 본사에서는 아마도 한국에는 기자나 사진작가가 엄청나게 많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싶다. 그만큼 우리나라에서는 전문가용 최고급 카메라와 렌즈가 많이 팔린다. 긍정적인 시각으로 보면 그 만큼 사진에 대한 열정이 많다는 뜻인데 이런 아마추어 사진가의 열의에 걸맞지 않게 사진교육이 대중적이지는 않다. 그래서 주로 사진관련 인터넷 커뮤니티를 통해서 사진에 관한 팁이나 지식을 얻어간다. 그런데 사진기술이나 카메라를 다루는 질문을 했다가 이런 질문을 하기 전에 카메라 매뉴얼을 3번 정독하고 오시오라는 핀잔을 심심찮게 듣는다. 과연 맞는 말이다.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비싼 장비를 구입하고선 정작 그 카메라를 다루는 방법이 담겨 있는 매뉴얼을 제대로 읽어보지 않으면 사진 공부를 할 성의가 없다는 핀잔을 들어도 할 말이 없다.

 

이 책은 한번이라도 매뉴얼을 3번 정독하고 다시 오시오라는 꾸지람을 들어본 적이 있는 아마추어 사진가를 위한 책이다. 말이야 쉽지 의외로 카메라 매뉴얼을 읽어봐도 이해가 잘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결국 카메라 매뉴얼을 이해하는데도 최소한의 카메라의 기본 원리와 배경지식이 필요하다. 독자들이 이 책을 읽음으로서 카메라가 어떻게 작동되며, 빛은 기본적으로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등의 카메라 사용 개론을 익히게 된다. 엄밀히 말해서 이 책은 사진을 찍기 전에 카메라라는 물건에 대해 공부하는 책이다. 조금은 딱딱하지만 사진을 좋아한다면 큰 어려움 없이 정독이 가능하다. 또 풍부한 사진자료는 원서를 읽은 두려움을 상당부분 덜어준다.

 

The ball is round : A global history of soccer.David Goldblatt.Riverhead Trade.2008

 

이 책의 제목을 보고 단순한 축구에 관한 역사책이라고 보면 오해다. 물론 축구의 발생에서부터 월드컵 결승전이라는 지구의 가장 큰 이벤트로 발전하기까지의 역사가 망라되어 있기는 하다. 그러나 1,000페이지에 육박하는 이 책은 축구의 역사뿐만 아니라 선수, 감독, , 구단주, 클럽팀, 국가대표팀등의 축구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에 대한 이야기거리가 풍부하다.

축구라는 렌즈로 바라본 인간세계의 정치 및 경제의 역사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다. 아주 두꺼운 책이지만 축구를 사랑하는 팬이라면 넉넉한 시간을 가지고 읽어봄 직한 책이다.

 

Fever Pitch. Nick Hornby.Riverhead Trade. 1998

최근 EPL(영국프리미어 축구 리그)를 좋아하는 여자가 많이 생길 정도로 축구의 인기는 상승일로에 있다. 월드컵이나 한일전에만 열광하던 한국의 축구팬들이 해외 리그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축구에 대한 관심의 저변이 비약적으로 확대되었는데 긍정적인 여가생활이라고 본다면 매우 바람직하다. 세계적인 유명작가 닉 혼비가 쓴 이 책은 소설이라고 하기엔 믿지기 않을 만큼 낯선 형식을 가지고 있다. 외형상 포맷은 분명히 영국축구리그에 대한 게임 후기를 모음집이다. 그러나 첫 번째 게임 후기만 살펴봐도 이 책의 범상함을 잘 느낀다. 1968914일 이제 막 이혼을 한 아버지가 11살짜리 아들인 닉 혼비를 데리고 생애처음으로 축구관전을 하러 간다. 그 경기는 아스날 대 스토크 시티의 경기였는데 이 경기를 관전하면서부터 닉 혼비는 그만 축구와 사랑에 빠지고 만다. 이 책은 뭐랄까. 닉 혼비의 자서전과 축구에 대한 열정적인 사랑이 결혼하여 낳은 자식이라고 해야 되겠다. 축구경기의 관전기()와 더불어 닉 혼비의 드라마틱한 살아온 이야기가 오버랩 된다. 즉 소년이 중년의 나이가 되기까지의 인생유전과 더불어 아스날 경기의 관전평이나 경기장 안팎의 이야기가 아름답고 감동적으로 배합이 된 이 책은 영화로 제작되기에 충분한 흥행성과 재미를 보유한다. 더구나 닉 혼비가 누군가? 유머의 아이콘답게 대담한 정직이라고 표현해야 할 만큼 개인이나 가족사의 속내를 담담하게 털어놓으면서도 특유의 유머는 곳곳에서 발휘되어 독자들을 더욱 감동시킨다. 원서로 읽는 국내 독자들에게 기쁜 소식은 이 책이 아스날의 한 경기 한 경기 관전평으로 구분되어 엮어져 있기 때문에 긴 흐름을 유지하면서 읽어야 만하는 부담감이 없다.

 

 

Holy Bible

역사상 최고의 베스트셀러이지만 가장 읽히지 않는 책이기도 하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읽어야 할 필요성은 느끼지만 의외로 우리말 성경은 읽기에 쉽지는 않다. 물론 쉬운 말 성경이 출간되고 있지만 오히려 영어로 된 성경이 오히려 이해도가 높은 경우가 많다. 애초에 어려운 라틴어로 쓰인 성경이 교육수준이 낮은 서민들도 읽도록 최대한 쉽게 써졌기 때문에 영어로 된 성경은 우리가 읽기에도 어렵지 않고 이해가 빠르다.

 

Holes. Louis Sachar. Randomhouse. 2000

자신이 저지르지도 않은 잘못 때문에 억울하게 교도소에 수감되어 오로지 구덩이 파는 일만 하게 되는 소년들이 값지고 아름다운 우정을 키워나가는 줄거리다. 마치 복잡한 퍼즐을 맞춰나가는듯한 치밀한 구성과 흥미진진한 줄거리가 잘 조화가 되어 청소년과 어른 모두에게 재미와 감동을 선사한다.

간혹 난해한 단어가 나오지만 사전의 도움을 받는다면 충분히 독파가 가능한 원서이며 2003년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다. 흥미로운 줄거리를 가진 책을 원서로 먼저 읽고 한글 자막이 없는 영어로 다시 본다면 독서나 영어실력향상에 큰 도움이 된다.

 

Reading for thinking. Laraine.E.Flemming.2011

소설이나 인문학 서적이 아니라 일종의 영어 독해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학습서다.

말하자면 원서로 읽는 독서의 준비 단계에 적합한 책에 속하는데 수준이 녹록치 않다. 임용고시나 공무원시험에 대비하는 적지 않은 수험생들이 이 책을 애용하고 있기도 한데 내용이 알차고 영어독해능력향상에 큰 도움이 된다. 영어를 가르치면서 다양한 방법으로 학생들에게 영어에 대한 거부감을 줄여줄려고 노력을 했는데 필자가 시도한 웬만한 방법은 실패를 했었다. 낙담을 한 끝에 이 책과 유형이 비슷한 학습서는 학생들의 반응도 괜찮았고 또 많은 학교에서 부교재로 채택하고 있었다. 놀랍게도 영어공부라면 진저리를 치는 아이들이 그 교재로 계속 공부하고 싶다는 요청까지 했더랬다. 다양한 주제와 창의적이고 지겹지 않은 문제도 풍부하지만 무엇보다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지문이 아닌 비판적 글 읽기 능력을 향상시키는 구성은 이 책을 독해력 향상을 위한 좋은 교재라는 명성을 안겨주고 있다. 원서를 읽기 전 이 책으로 워밍업을 해보자.

 

The Givers. Lois Lowry

이 책은 십대를 위한 책이다. 국가에 의한 철저하게 계획되고 통제된 이상사회에 반대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데 주제 자체로만 봐서는 청소년이 읽기에 과연 적합한가라는 논란이 일기도 했다. 내용이 무겁긴 하지만 우리의 미래사회에 대한 고민을 던져주고 또 읽고 나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책이다. 이 책이 원서로 읽기에 적합한 이유는 아동용 소설이니만큼 어휘가 쉽고, 또 충분한 문학성과 생각거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영어교육이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지만 가장 이상한 심각성은 어려운 단어는 잘 알면서 정작 미국의 아이들이 사용하는 쉬운 단어는 잘 모른다는 점이다. 미국의 아동용 책이 우리나라 성인 영어학습자들에게는 좋은 공부가 된다. 게다가 문학성을 갖춘 이 책은 더욱 그렇다.

 

The Moon and Six pence. William Somerset Maugham

원서로 읽을 만 한 좋은 고전을 추천해달라는 설문조사를 한다면 이 책은 많은 표를 얻지 않을까? 화가 고갱의 드라마틱한 삶을 소설의 형식으로 쓴 이 책이 각광받는 이유는 무엇보다 재미있기 때문이다. ‘섬머셋 모옴의 소설을 쓰는 최고의 모토가 재미이기 때문에 사실 섬머셋 모음의 모든 책은 원서로 읽기에 매우 좋다.

문장이 간결하며 쉬운 어휘가 사용되었고 또 문학성이 높으니 한국의 많은 독자들에게 영어로 읽는 고전의 첫 도전 상대가 되는 경우가 많다. 이 책뿐만 아니라 <인간의 굴레에서>는 군 입대 직전 군 생활에 대한 걱정 따위는 전혀 생각할 틈도 없이 이 책을 미친 듯이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너무나 생생하다. 당시 <인간의 굴레에서>를 읽었던 대학 기숙사의 침대마저도 기억에 선하다.

 

On the road. Jack Kerouac

소설가이자 번역가인 안정효는 해외에 휴가를 간 친구가 느닷없는 영감을 받아서 단숨에 써내려간 원고지 1000매 분량의 소설을 읽은 기억을 말하면서 작가는 모름지기 심사숙고를 해서 천천히 써내려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위대한 소설을 쓰는 일은 작가의 개인적인 역량에 따르지 그 방법에 의존하지는 않는다고 잭 케루악은 강변이라도 하듯이 <On the road>를 맨 정신도 아닌 마약에 취해서 타이프 용지를 36미터 길이로 이어 붙인 후 타자기에 넣고 구두점이 없이 3주 만에 125천단 어를 단숨에 써내려갔다. 이 책은 대학교를 자퇴한 저자가 친구들과 함께 미국 서부와 멕시코를 도보 여행한 적이 있는데 이때의 경험을 토대로 썼다. 문득 대학시절 기숙사의 한방을 사용했던 후배들이 생각난다. 어느 날 저녁 후배 두 명 중 한명이 지나가는 말로 우리 기차타고 서울 가자라고 하더니 일분을 채 넘지 않은 채비를 마치고 곧장 서울로 향했었다. 그들은 고단하고 복잡한 과정을 거쳐서 새벽녘에야 돌아왔는데 여행은 계획 없이 무작정 떠나야 그 참의미가 있다는 엉뚱한 생각을 했었다. 그 후배들은 비록 케루악처럼 길 위에서가 아닌 철로위에서짧은 여행을 했지만 그들의 기억 속에 오래 남을 일이었으리라. 기성세대가 만들어 놓은 틀 속에 감금되기를 거부하는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젊은이들의 우상이었고 비트 제너레이션의 기수였던 케루악의 흔적은 지금도 사회전반에 생생이 새겨져 있다.

아울러 미국 대학 도서관에서 가장 많이 대출이 되는 도서이면서, 반납 또한 가장 잘 안 되는 책이라는 묘한 위엄을 자랑한다. 이 책을 저자가 단 숨에 써내려갔듯이 독자들은 이 책을 단숨에 읽어야 한다. 또 단숨에 읽힌다.

 

** 이 글은 저의 저서 <아주 특별한 독서>에서 발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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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 희귀본을 수집하는 재미로 살았던 때의 이야기다. 거의 3년을 찾아 헤매던 희귀본을 손에 넣었다. 감격에 겨워서 내게 그 책을 양도한 판매자 A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신영복 선생의 《엽서》 이야기가 나왔다. 《엽서》는 희귀본 수집 업계에서 수집가로서의 신분증과 같은 책이다. 그러니까 적어도 수집가라는 소리를 들으려면 반드시 갖추어야 할 책이란 뜻이겠다. 


그런데 A는 《엽서》가 반드시 재출간이 될 것이며 자신은 그때 구매할 것이고 절대로 비싼 값에 절판된 구판을 사지 않겠단다. 덧붙여서 책이란 게 ‘텍스트’만 확보해서 읽으면 되지 비싼 값에 절판된 판형을 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했다(당시만 해도 E-BOOK이 활성화되기 전이었다). 나도 격하게 동의를 했고, 재출간이 되면 사서 읽으면 되지 비싼 값에 구판을 사지 않겠다고 말했다. 우리는 독서의 본질에서 벗어난 그런 저급한 수집놀이도 하지 않을 것이며, 희귀본이라고 해서 얼토당토않은 비싼 가격에 사지도 않고 오직 책만 열심히 읽겠다는 서로의 신념을 치하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며칠 뒤에 개인 간 헌책 거래 사이트에 신영복 선생의 《엽서》가 판매 리스트에 올라왔다. 가격은 대략 7만 원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미친 듯이 예약 댓글을 남기느라 손가락이 얽히고설켰는데 결국 1순위가 되진 못했다. 물론 그 책을 사겠다고 야밤에 남긴 예약 댓글의 행렬 속에서 A의 이름과 연락처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나보다 좀 더 절박했는지 자정이 되어가는 시간인데도 같은 서울이니 당장 달려가겠다고 써놓았다…….


===== 이 글은 제가 쓴 <그래도 명랑하라 아저씨>에서 발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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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친구의 부친인 김 아무개 씨는 소작농의 자식으로서 온갖 고생은 다 겪었다. 김 아무개 씨의 부친은 마을에서 처음으로 단발령을 받아들여서 상투 대신 성인 남자의 보편적인 헤어스타일인 하이칼라를 선보일 정도로 신문명에 관심이 많았지만 타고난 가난은 어쩌지 못하고 김 아무개 씨에게 가난을 대물림했다.


김 아무개 씨는 정규 교육은 거의 못 받고 온갖 농사일에 시달렸는데 소년 시절부터 마을의 대소사에 부친 대신 동원되었다. 마을의 온갖 대소 사중에서 그가 가장 힘겨워한 일은 상여 매기였다. 어른들과 키가 맞지 않아서 어떨 땐 상여를 지탱하는 끈이 어깨의 허공으로 다녔지만 또 어떨 땐 상여의 무게가 그의 가녀린 어깨로 집중되어 땅으로 꺼질 것만 같았다.


그런데 그의 눈에 신세계가 보이기 시작했다. 상여를 끈으로 매고 온갖 험난한 길을 온몸으로 버텨야 하는 상여꾼을 비웃기라도 하듯 상여 소리꾼은 맨몸에 설렁설렁 걷기만 할 뿐 그 어떠한 힘을 쓰지 않았다. 상여 소리라는 것이 두고두고 쓰지, 변하거나 망자에 따라서 다르게 할 필요가 없으니 한 번만 익혀서 소리꾼이 된다면 평생 편하게 상을 치를 수 있을 것 같았다.


 더구나 흥이 나면 상여에 올라타고 가는 호사를 누릴 수 있을 뿐더러, 어느 순간 상여를 멈추게 하고 상주들로부터 절도 받고, 망자의 노잣돈이라는 핑계로 돈을 뜯어내는 것 역시 소리꾼의 몫이었다. 김 아무개 씨는 소리꾼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하고 상여소리를 배우려고 했지만 그 동네의 소리꾼은 그가 자신의 라이벌이라고 생각했는지 가르쳐달라는 소리는 가르쳐주지 않고 버럭 화만 내면서 김 아무개 씨를 쫓아낼 뿐이었다.


김 아무개 씨는 잠시 낙심을 했지만 다른 동네에도 소리꾼이 있겠다 싶어서 무작정 길을 나섰다. 인근의 여러 마을을 헤맨 끝에 그는 마침내 소리를 가르쳐주겠다는 스승을 만났다. 그렇지 않아도 궁색한 살림에서 훔친 콩 두어 되로 수업료를 지불했다.


본래 목청이 좋고 상여소리에 대한 동기 부여가 남달랐던 김 아무개 씨는 상여꾼들과 상주들을 애달프게 할 수 있는 다양한 레퍼토리의 상여 소리를 갖추었다.

김 아무개 씨가 특별히 바라던 바는 아니었지만, 수십 년간 상여 소리꾼 노릇을 한 할배가 바람을 맞아서 유명을 달리했고 김 아무개 씨는 냉큼 그 자리를 차지했다. 인근에서 최연소 상여소리꾼에 취임한 그는 그로부터 근 50년간 무수한 망자를 구성진 목소리로 달래 저승길로 데려다주었다. 


그 무수한 망자 중에는 나의 조부모와 아버지도 포함되었다. 그의 상여 소리는 마치 망자 자신이 이 세상을 떠나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는 넋두리 같았다. 그는 나의 할아버지가 되었고 할머니도 되었으며 나의 아버지의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들려주었다.

김 아무개 씨는 무수한 망자를 음택으로 모셨지만 정작 마을에서는 아이 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었고 그가 마침내 유명을 달리했을 때 그의 상여를 든 이들은 자신의 몸조차 가누기가 힘겨워 보이는 열댓 명의 노인뿐이었다.


문상을 온 김 아무개 씨의 아들의 친구들이 대신 상여꾼이 되어주고 싶은 충동이 일 정도였다. 다행스러웠던 것은 장지가 김 아무개 씨의 집에서 멀지 않은 나지막한 산 아래였는데 불행하게도 김 아무개 씨가 반백년 동안 상여소리꾼 노릇을 할 때 그의 자리를 탐내는 젊은이가 전혀 없었고 김 아무개 씨의 아들은 갑작스러운 부친의 죽음에 타동네서 소리꾼을 초빙할 여유도, 의도도 없었다. 


김 아무개 씨가 망자들을 모시고 다닌 마을 골목골목을 거쳐서 마침내 장지에 이르기까지 그의 저승길을 위로한 것은 상여 귀퉁이에 매달린 일제 카세트에서 흘러나오는 녹음된 소리였다.


===== 이 글은 제가 쓴 <그래도 명랑하라 아저씨>에서 발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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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인들의 습관은 참으로 놀랍다. 1년 중 대부분을 오후 5시 30분에 퇴근하다가 최근 얼마간 한 시간 이른 시간에 퇴근을 하는데 많지도 않은 잉여 시간이 낯설고 어색하다. 단지 한 시간의 여유를 주체를 못하다가 결국 미용실을 들리기로 했다. 물론 나는 깔끔함과 멋스러움을 추구하는 도시남자답게 아무 미용실이나 다니지 않는다. 소정의 엄격한 선정 기준에 의거해서 미용실을 선택한다. 내가 미용실을 선택하는 기준은 ‘어떤 경우에도 기다릴 필요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동네 상가에는 총 세 곳의 미용실이 있는데 나의 엄격한 기준을 통과한 곳은 2곳에 불과하다. 탈락된 한 곳은 다른 미용실보다 우리 집에서 대략 5미터와 10미터 정도 더 가깝다는 이유로 최우선 협상대상에 선정되는 영광을 누렸다. 그러나 1분 1초를 계획하고, 시간을 정복한 남자인 나를 무려 15분이나 둥그런 파마 모자를 쓴 아줌마들 틈바구니 속에서 방치한 그날로 여지없이 퇴출되었다.


그 이후로 나는 나머지 두 곳의 미용실을 번갈아 가면서 이용했다. 예산을 균등하게 집행함으로서 지역사회의 균형 있는 발전을 도모해야 한다. 그런데 그 중에서 상가 2층에 자리 잡은 미용실이 나의 거래처에서 제외되는 비운을 맞았는데 백수로 보이는 남편이 러닝셔츠 바람에다 담배를 문 채로 나의 머리를 감겨주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는 우리 집에서 가장 멀어서 무려 25m나떨어진 미용실을 항상 이용했다. 그런데 지난 대선 당일 저녁 평소처럼 미용실 문을 열고 일순간의 지체도 없이 거울 앞의 의자에 앉았는데 그 아주머니 미용사는 오랜 고객을 영접할 생각도 않고 친구로 보이는 다른 아줌마와 설전을 벌인다.


친구 아주머니가 같은 성씨라는 이유로 아무개 후보를 찍었다고 하니까 ‘그럼 전라도에 가서 살아라. 라고 호통을 친다. 의사결정을 함에 있어서 그렇게 단순하고 불합리한 이유를 대는 사람을 신뢰하지 않는다. 그리고 내가 혹여 헤어컷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면 ‘그럼 전라도에 있는 미용실에 가보든가’라고 혼날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그 그곳도 발길을 끊었고 결국 애초에 나를 15분간이나 소파에 방치했던 미용실을 다시 찾아야 했다.


나의 우려와는 달리 예쁜 미용실 아주머니와 보조비용사는 무려 2년이나 외도를 한 나를 반갑게 받아들였다. 오늘도 그 미용실을 갔는데 원장아주머니는 포도를 한 송이 거의 다 먹어가는 찰나였고, 보조 미용사 아가씨는 청소를 하는 척하지만 실상은 텔레비전의 막장드라마에 마음이 뺏긴 상태였다. 의외로 손님은 아무도 없었고 그 분들은 굉장히 심심해했다는 게 확실하다. 어린 시절 나를 서로 가지고 놀겠다고 다투던 누나들의 눈초리로 두 미용사가 나를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세 군데의 미용실 중에서 유일하게 보조 미용사를 보유한 장점을 살려 본격적으로 커트를 하기 전 세팅 작업에만 5분이 소요되었다. 원장 아주머니도 심상치 않았다. 어른이 된 이후 단 한 번도 헤어스타일이 바뀐 적이 없는 나를 두고 어떤 스타일로 자를 것인지, 구레나룻은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뒤통수 머리는 얼마만큼 길게 자를 것인지에 관한 매우 세부적인 오더를 내려주기를 요구했다. 물론 나는 명쾌하게 결론을 내려주었다. “적당히 잘라주세요.” 


나의 불길한 예감은 여지없이 적중해서 원장 아주머니는 일생일대의 대작품을 만들어 내기로 작정한 분 같았다.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을 자기 통제하에 두셨고 가위질은 0.0001미리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으려는 기세다. 아마 미켈란젤로가 다비드 상을 만들 때의 모습을 볼 수 있다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 원장 아주머니가 얼마나 나의 헤어스타일에 집중을 했는지는 뜬금없는 동네 아줌마가 방문한 순간에 알 수 있었는데 인사를 건네는 순간 원장 아주머니는 화들짝 놀라면서 노크도 하지 않고 들어오느냐고 화를 내신다. 아니, 화장실 문도 아니고 정문은 묵직한 유리문이고 뒷문은 레이스가 달려 있는 개방된 상태인데 뭘 어떻게 노크를 하라는 말인가? 그리고 언제부터 미용실을 들어갈 때 노크를 하라는 소셜 에티켓이 형성되었단 말인가?


그 동네 아주머니는 아티스트의 미칠 듯한 예술혼을 불사르는 순간에 몰입을 방해한 괘씸죄에 해당된 것이다. 나는 원장아주머니의 미칠 듯한 몰입을 꾸벅꾸벅 졸음으로써 작품의 완성도를 방해하는 누를 끼치기 싫어서 단한 번도 눈을 감지도, 고개를 떨어뜨리지도 않았다. 보조미용사 아가씨도 우리의 투혼에 동조해 원장 아주머니가 잘라낸 나의 머리카락이 단 일초도 내 이마와 목에 머무르지 않도록 스펀지를 열심히 이리저리 놀렸다.


마침내 우리의 예술 작품이 탄생했고 온몸의 기를 모두 소진한 원장 아주머니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보조 아가씨는 완성된 예술작품의 대미를 장식하기 위하여 나를 의자에 앉힌 채로 거품을 머리에 마구 풀더니 두피 마사지를 시작했다. 순간 나는 이렇게 럭셔리한 서비스는 주머니에 든 만 원짜리 한 장으로 해결이 안 될 것 같은 걱정에 사로잡혔다. 집으로 전화를 해서 아내에게 한도가 넉넉한 신용카드나 집안의 비상금을 모조리 긁어오도록 지시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어서 무려 5분여간의 머리 감김이 진행되었고 머리 건조도 어디 시골동네의 허접한 미용실처럼 드라이기로 대충 볏짚 말리듯이 허투로 하지 않았다. 원장아주머니의 작품이 제대로 구현될 수 있도록 드라이기를 예술적으로 다루었다. 머리가 건조되었다고 예술작품이 완성된 것은 아니다. 내가 지금 몸담고 있는 곳은 허접한 동네 미용실이 아니다. 보조미용사 아가씨는 기계의 솜씨는 믿지 못하겠다며 맨손으로 나의 헤어스타일을 빚기 시작했다. 마치 도공이 도자기를 정성껏 매만지듯이 보조아가씨는 한 올 한 올의 방향과 휘어짐의 정도를 결정하였고 기존의 촌스러운 가르마가 아닌 앞으로 쭉쭉 내려 뻗는 청담동 스타일을 완성시키고야 말았다. 공장에서 기계로 대충 찍어낸 스타일이 아니고 무려 ‘수제’ 헤어스타일이다. 


다행이 우리 집에서 돈뭉치를 들고 올 필요가 없었다. 원장아주머니는 내 머리에 담긴 예술혼은 돈으로 따질 수 없다며 평소대로 단돈 만 원이면 충분하다고 했다. 차도남 스타일의 세련된 예술작품을 갖춘 나는 10미터를 활보하고 집에 도착했다. 

아내는 침대에 누워 스마트폰으로 드라마를 시청 중이었는데 나를 힐끔 보더니 “집에 다 와 간다면서 어딜 다녀오기에 이렇게 늦었어”라고 한마디 한 다음 이내 돌아눕는다.


===== 이 글은 제가 쓴 <그래도 명랑하라 아저씨>에서 발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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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늘 그들(아내&딸)에게 굴욕적으로 패배하고 지배를 당하는 것만은 아니다. 나도 승리의 순간이 엄연히 존재한다. ‘국산 옥수수로 만든 강냉이 뻥튀기’ 대첩이 바로 그 경우다. 지난 일요일 나는 어머니에게 드릴 떡을 사기 위해서 재래시장에 들렀는데 그들에게 조공을 할 먹거리를 찾다가 ‘국산 옥수수로 만든 강냉이 뻥튀기’를 발견했다. 


중국산은 노랗게 먹음직스럽게 생겼는데 국산 옥수수는 꺼무칙칙하게 보기엔 그래도 역시 농산품은 신토불이 아니던가? 더구나 조공용이니 그 음식의 원산지에도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한다. 어머니를 뵙고 집으로 돌아갔다. 의기양양하게 까만 비닐봉지에 든 ‘국산 옥수수로 만든 강냉이 뻥튀기’를 마누라 상전에 바쳤으나 그딴 걸 뭐하러 사오냐는 예상치 못한 혹평을 받았다.


순간 화가 치밀어서 ‘국산 옥수수로 만든 강냉이 뻥튀기’를 거실에 패대기치려고 했으나 상전 앞에서 감히 그런 불손한 행동은 못 하고 내 서재로 들어와 소파에 살포시 패대기를 쳤다. 저들에게 ‘국산 옥수수로 만든 강냉이 뻥튀기’를 절대로 주지 않고 나 혼자 다 먹기로 결심을 했다.


무려 5,000원 어치고 나와 안면이 있는 주인아주머니께서 가래떡 뻥튀기와 쌀 뻥튀기까지 덤으로 주셔서 혼자서 다 먹기엔 너무 벅차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매일 매일 먹기로 하고 봉지를 열었는데 뻥튀기 냄새가 코를 찌른다. 꾸역꾸역 먹는데 목이 따가울 지경이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음료수라곤 내가 가장 싫어하는 ‘자몽’ 주스뿐이다. 내가 절대로 먹지 않겠다고 결심한 주스인데 너무 급하다보니 어쩔 수 없다. 쓰디쓴 자몽 주스를 벌컥 벌컥 마시고 다시 서재로 복귀했다. 저들의 비웃음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다음 날부터 야구 중계를 보면서 ‘국산 옥수수로 만든 강냉이 뻥튀기’를 먹었다. 서재의 형광등도 꺼두어서 마치 영화관에 온 것 같은 운치가 느껴진다. 역시 ‘국산 옥수수로 만든 강냉이 뻥튀기’를 사길 잘했다. 그러나 또 목이 따가워져 온다. 나가서 또 자몽 주스를 먹었다. 처음에는 왜 이렇게 맛없는 걸 사왔냐고 조금 짜증을 낸 것 같은 기억이 나는데 이제 자몽주스가 입맛에 맞기 시작했다.


저들도 분명 뻥튀기를 싫어하지는 않는데 자신들이 한 소리가 있어서 참고 있겠구나라고 생각하니 새삼 강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나의 경우 냉우동 한 그릇에 자존심과 나의 이데올로기쯤은 쉽게 버리는 위인이 아닌가? 저들은 자신들의 이데올로기와 명분을 위해서라면 먹거리쯤은 안중에도 없구나!


6일째 되는 날 여느 때처럼 야구를 보면서 ‘국산 옥수수로 만든 강냉이 뻥튀기’를 먹는데 아내가 덜컥 문을 열었다. 뻥튀기를 마치 떡을 먹는 것처럼 그렇게 우적우적 먹느냐고 타박을 한다. 당황스러웠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저 여자도 강렬한 뻥튀기 향을 맡았을 때이고 적어도 인간인 이상 ‘입질’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더구나 저녁을 먹은 후 두 시간이 지났다. 간식거리에 대한 욕구가 극대화되는 시점이다. 서재를 나가는 아내의 뒤통수에 대고 ‘지금이라도 먹고 싶으면 말해라’라고 말하는 호기를 부렸음은 물론이다.


과연 정확히 18분 후 아내가 “뻥튀기 이리 좀 가져와봐”라며 백기를 들었다. 감격스러운 순간이다. 실로 얼마만의 승리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승자라고 해서 자만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먹고 싶으면 여기 와서 가져가”라는 모욕적인 언사를 패자에게 해서는 안 된다. 


거실에 있는 아내에게 조용히 ‘국산 옥수수로 만든 강냉이 뻥튀기’를 가져다주었고 다음 날 아침 그들이 소비한 뻥튀기의 양이 적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나의 승리를 재확인했다.

이번 승리에 오점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다음날 학원을 다녀온 딸내미가 뻥튀기를 찾았는데 승리에 도취한 나머지 ‘조롱’을 조금 하다가 ‘빡친’ 딸내미를 달래주기위해서 ‘국산옥수수로 만든 강냉이 뻥튀기’를 제발 먹어달라고 애원해야만 했다.


===== 이 글은 제가 쓴 <그래도 명랑하라 아저씨>에서 발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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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윗듀 2015-06-18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너무 재밌어요😆

박균호 2015-06-18 18:01   좋아요 0 | URL
ㅎㅎㅎ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