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istianity (Paperback) - Essence, History, and Future
Kung, Hans / Continuum Intl Pub Group / 1996년 8월
평점 :
절판


위의 책을 쉽게 간추린 책의 국내 번역본 : [가톨릭교회 / 배국원 역 / 을유문화사 ]  


서문에서 저자는 가톨릭 교회역사를 다룸에 있어서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서술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이 점이 내가 이 책을 택한 큰 이유가 되었다. 이 책은 기독교 특히 가톨릭교회의 역사를 서술하면서 그 잘잘못을 파헤치는 비판적 시각이 있어서 생각할 거리를 많이 주었다. 특히 로마가톨릭의 중심이 되는 교황제도의 인위성을 서술할 것임을 말하고 있다. 이 책이 가톨릭교회 역사에 한정되었지만 이러한 점으로 인해 이 책을 선택하게 되었다. 
 

 저자는 예수의 행적 중에서 성전에서 이루어지던 상업 활동에 반발하여 무력시위를 벌인 일과 그 결과로 나타난 당시 정치, 종교 권력자들과의 운명적인 충돌을 이야기 한 후 과연 예수가 이 세상에 다시 온다면 앞서의 충돌이 또 다시 일어나지 않을까 가정한다. 그리고 예수는 ‘민주적’정신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이는 예수가 광야에서 악마에게 시험을 받을 때에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다’라고 말씀한 것에 대한 후대의 해석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 즉, 예수는 빵으로 대표되는 물질적인 힘 또는 돈 (지상에서의 어떠한 권력을 의미)보다 인간의 자유를 우선시 했다는 것이다. 이것에 대하여 도스또예프스끼의 『까리마조프씨네 형제들』의 이반의 대서사시에서 극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또한 복음서를 읽어보면 권력에 대한 비판과 소수자를 보호하려는 예수의 모습이 많이 나오고 있다. 아마도 초대 교회는 이러한 예수의 삶과 말씀에 따라 사람들에게 봉사하려는 모습이 보여졌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예수가 지금과 같은 위계질서가 있는 가톨릭 교회를 세우지는 않았을 것이고, 베드로의 위치 또한 후대에서 조작된 것으로 보여진다.
그리고 초기기독교교회와 유대교의 결별을 설명한다. 저자는 기독교와 유대교의 결별과 반유대교주의의 기원이 유대교인들이 기독교인을 탄압하고 회당에서 축출한 데서 비롯된다고 말하고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기독교역사를 다룬 다른 책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하지만 오랜 역사에서 이상하게도 유대인들의 반기독교주의와 같은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유대인들은 현실적인 이유, 이를테면 반기독교주의를 내세울만한 여론을 형성할 수 없었거나 기독교인들이 그들 삶에 필요로 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그렇다면 앞서 말한 바의 이유로 반유대주의가 기원했다는 것은 부족한 설명 같다. 그것이 성경에 기록되었다하더라도 근대이전에 대다수의 사람들은 성경을 읽을 수 없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더욱더 그렇다. 


교부철학을 통한 가톨릭의역사적 과정에서 발생한 교회의 변화와 그 변화의 장단점을 논하고 있는데 주목할 만한 점은 여성의 지위에 대한 작가의 비판이었다. 그는 종교의 영역에서 사적 영역보다 남성지배 두드러졌다고 말하고 있다. 기독교의 여성 차별과 또 이 차별을 공고히 하기위한 여성에 대한 편견을 확대 시킨 가톨릭교회 역사를 보여주는 책이 나와 있다. 대표적인 책으로 기 베슈텔이 지은 『신의 네 여자』이다. 이 책은 그리스도교 기원 이래 가톨릭교회의 여성 잔혹사라는 부재로 네 여자는 창녀, 바보, 성녀, 마녀를 말하고 있다. 이러한 교회 내에서 여성의 지위와 시각에 대한 비판이 이루어지고 있음에도 아직까지도 교회는 여성에 대한 차별적인 시각을 거두지 않고 있다. 이것은 비단 가톨릭교회 뿐 아니라 국내 개신교도 마찬가지다. 특히 국내 개신교의 경우는 유교윤리와 결합되어있는 듯하다. 
 

다시 돌아와서, 저자는 바울로의 가장 큰 업적으로 바울로 선교이전까지 존속해왔던 ‘유대 율법’ 행위의 준수에서 벗어나 율법준수와 관계없이 기독교인이 될 수 있다고 확신하고 헬라 문명의 사상과 관념과의 결합을 했다는 것으로 본다. 저자가 지적한 바울로의 업적으로 인해서 초기 기독교 교회가 크게 확장 되었고 바울로가 다닌 각 지방에 교회를 세우게 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1장의 물음과 연결되는 교회의 탄생이다. 결국 교회는 예수가 아닌 예수의 제자들과 바울로에 의해 세워진 것이고 다시 말해 교회는 인간의 작품이라는 것이다. 사실 이점은 기독교인들도 알고 있는 것이다. 오랫동안 가톨릭교회는 ‘교회’라고 하는 그 공간을 신이 임재하는 곳이고, 그곳에서 신께 봉사하고 신도들을 인도하는 성직자는 구별되는 존재였다. 이러한 점이 역시, 국내 개식교 교회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이다.
가톨릭교회는 로마제국, 로마황제를 통해서 위계질서를 확립해 갔고 이러한 위계질서를 시대가 지나면서 점차 확고해졌다. 내 생각에는 그 과정에서 교회와 교회위계질서와 성직자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위해서 성경을 일부를 발췌하여 해석하는 일이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스도가 말씀을 하셨고, 그 말씀이 절대적인 진리가 되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르기 위한 교회가 생겼고, 그 말씀을 해석하는 집단이 생겼고 결국 그 집단이 권력을 가지게 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수단과 목적이 서로 섞여있는듯한 상황이 보인다. 결론적으로 가톨릭교회의 위계질서와 성직자의 차별적인 신분체계는 필연적으로 보인다. 다만 권력을 더욱 확대시키기 위해서 초기에는 성경의 선택과 이후에는 성경에 대한 비타협적인 해석이 안타깝다. 언제나 설교하는 사람과 설교를 듣는 사람이 있지 토론하는 사람은 없는 것이다.
이 책에서도 초기 기독교 신자들에대한 박해와 공인과 국교 이후의 가톨릭교회의 이단에 대한 박해를 이야기 한다. 피박해자가 금새 박해자가 된 셈이다. 이러한 역사를 돌아보면 어쩌면 종교는 그 기본에 있어서 배타성을 갖고 있는 듯하다. 
  

작가는 또한 로마제국이라는 통일 제국에서의 통일 종교, 즉 ‘가톨릭교회’가 국가와 제휴를 하고 이론적, 사색적, 교리, 신학 등이 발전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교리의 확고함과 교회 행정의 통일을 위한 공의회가 있었고, 이 시기의 공의회는 로마가톨릭, 동방정교회, 개신교가 인정하는 초기 공의회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니케아 공의회는 신학적인 분열을 예방하는 차원에서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소집한 것이다. 아마도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굉장히 현명했던 사람으로 보인다. 개신교의 신학적 작은 차이 하나 하나가 엄청나게 많은 종파로 갈라진 것을 보면 어쩌면 초기 로마제국에서의 통일 교회의 형성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것만 같다. 혹은 먼 거리로 인한 소통이 잘 되지 않아서 서로의 차이점을 잘 몰랐다거나 혹은 그 차이점을 이론적으로 설명할 바탕이 되어있지 않았던 것도 같다.
이와 같은 공의회들을 통해서 가톨릭교회에서의 몇 가지의 중요한 변화가 생겨난다. 우선 로마교회를 격상시키고 이에 따라 로마교회의 수장이 교황이 되는 일련의 변화이다. 결과적으로 다른 교회들보다 우월한 로마 교회의 수장은 곧 전체 기독교교회의 수장이 되는 것으로 연결된다. 뜻밖에도 이 책에서는 이러한 로마교회의 위치를 잡는 것이 순탄하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로마제국시기의 타지역의 교회들은 한 교회가 다른 교회들 위에 군림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결국 로마교회는 여러 조작된 문서들과 ‘색다른’성경 해석과 교황들의 끊임없는 노력으로 로마주교의 전체적인 우월성을 획득한 것이다. 즉, 현재까지 이어져 오는 로마 가톨릭 교황의 위치와 존경, 권력의 토대는 상당히 인위적이고 심지어는 ‘사기적’이기까지 한다. 앞으로의 교황들은 그 위치의 정당성을 얻기 위해선 ‘베드로의 반석’보다는 로마가톨릭의 행위를 통해서 얻어야할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국교로 제정한 것이 기독교를 확고한 위치에 올려놓았음을 인정하고 더불어 기독교인들의 가난하고 힘든 사람들에 대한 구호활동과 고결한 윤리, 형이상학적인 문제에 관한 해답을 제시한 것 등이 그 요인이 된다고 역설한다. 하지만 그 윤리의 대상과 구호활동의 대상이 자신들과 견해가 다른 타종교인들의 배제한다면 그것을 순수하게 도덕적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의심스럽다. 우리가 옳고 그름을 판단할 때 행위의 의도를 보고 판단한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구호활동을 펼치고 자신들의 도덕적인 우월성을 내비치는 것이 그 사람들을 기독교인으로 개종하려는 의도라면 그 행위를 옳다고 말할 순 없다.
그리고 초기교회로 돌아가고자 하는 복고의 윤리를 가지는 수도원과 같은 공동체도 생겨났으나 기독교의 윤리가 개인의 신앙영역에서 벗어나 세속과 관계하면서 인류문화를 저해하기도 한다. 그 윤리가 늘 과거 지향적이기 때문이다. 특히 현대 우리나라의 개신교인들의 윤리는 곧잘 한 국가에 관한 사대적이고 보수적인 색채를 띄다. 그리고 인권의 영역에 있어서도 여성의 권익과 성적소수자의 권익에 대해서도 상당히 부정적으로 나타난다. 
 

 로마제국의 교회 시기를 지나고 그 과정 속에서의 로마교회의 위치 확보와 교부철학자들의 활약을 통해 성장한 가톨릭교회가 지금과 같은 교황중심의 엄격한 위계질서가 자리를 잡는 시기를 설명하고 있다. 저자는 그 점에서 레오1세를 최초의 진정한 교황이라고 본다. 레오1세는 교황은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교황을 통해 베드로가 직접 말씀하신다.’는 주장을 한 것으로 나온다. 아마도 이러한 베드로 후계자, 베드로의 반석에 대한 해석이 이후의 교황무류성 주장의 기본이 되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레오1세는 교황의 영적권위는 황제의 세속적 권위보다 우월하다고 하여 세상 권력 위에 군림하려는 교황의 주장이 있었다. 저자는 이러한 주장을 오랜 세월동안 희망 사항이었을 뿐이라 말한다. 
 

게르만 족의 이동 이후 피핀의 왕의 임명 그리고 샤를마뉴가 동로마제국의 황제가 되는 과정은 왕과 황제는 오직 교황에 의해서만 즉위가 가능하다는 공식을 세우게 되었다. 또한 샤를마뉴의 통일 왕국에서 기독교는 곧 가톨릭이고 가톨릭은 곧 로마라는 공식이 자리 잡게 된다. 이 시기에 라틴어예배와 재단과 청중이 소외되는 것, 성적인 도덕심에 대한 강요들이 생기게 된다. 결국 샤를마뉴 시대에 와서 기독교교회는 초기교회의 모습과 예수의 가르침과는 점점 멀어지는 형태를 띄게 되는 것이다. 전형적인 중세 신앙심과 관례들, 절차들 그리고 수많은 구속과 일반인의 두려움이 이용한 기독교의 발생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 책의 저자는 비판하지 않는 점이지만 이렇게 교회의 교리가 확립되어 갈 때 교회는 구속력을 가지기 위해서 부단한 노력을 했음을 알 수 있다. 그 노력은 대체적으로 두려움을 유발 시키는 것으로 구원에 관련되거나 공동체 내에서의 배제와 소외 등을 볼 수 있다. 이뿐만 아니라 저자도 지적했듯이 성에 대한 과도한 부정적 평가와 죄악의 행위에서 태어난 인간과 같은 논리들이 형성된다. 이런 점을 두고 볼 때 기독교교리의 한 가운데에는 공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상과 벌’이라는 타율적인 도덕률은 도덕의 발전과정에서 볼 때 가장 초기단계에 속한다. 이 점에서 교회는 오히려 도덕성의 발달을 막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든다. 또한 그들의 교리가 진리가 되는 상황은 너무나 교조적인 방향으로 발전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가톨릭교회의 일방적인 위계질서의 확립은 실상 초기 기독교의 신약 성서에 기초한 사도전승이라기보다 위조문서와 같은 조작된 역사 증거를 토대로 형성되었고, 그 원동력은 권력을 얻기 위한 교황들의 의지로 인한 것이었다. 10세기에서 11세기에 이러한 활동이 매우 활발히 진행되는데 수도원이 교황의 직접 감독 하에 놓이게 되면서 교황의 주요 수입원이자 네트워크로 작동하게 되었고 로마 교회를 대표하는 추기경을 구성하였다. 특히 교황이 모든 법의 원천이자 기준이며 그 최고의 권위이므로 다른 모든 법을 판단할 수 있지만, 자기 자신은 어느 누구에도 판단 받지 않는다는 교황의 지상권 주장이 나오게 된다. 저자는 바로 이 교황의 지상권 주장이 정교회와 가톨릭과의 화합의 유일한 걸림돌이라 지적한다. 특히 로마 가톨릭은 신에 대한 복종이 교회에 대한 복종이고 교회에 대한 복종이 교황에 대한 복종이라는 이론을 내세우면서 결국 또 다른 커다란 교회인 동방교회를 소외시키게 된 것이다. 이렇게 분리된 서방교회인 로마가톨릭과 동방교회 사이에는 아직도 큰 간극이 존재한다. 오히려 영국 성공회와 로마 가톨릭이 더욱 가깝다. 로마가톨릭교회는 끊임없이 하나의 통일된 교회를 부르짖었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과도한 외침이 기독교교회를 점점 분리시키는 힘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10세기에서 11세기에 이르는 시기에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분열과 교황권의 확립이외에도 교회의 중앙집권화, 법제화, 정치화, 군사화, 교권주의화를 이루었다고 이 책에서 말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교회법과 교회법에 대한 학문을 발전시켰는데 아마도 이것이 중세 스콜라철학의 발전과 맞물려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교권주의화는 여성을 배제시키고 사제들의 결혼을 분리시켰다. 저자는 이 사제독신제도가 성직자와 신자들 사이를 철저히 분리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평가한다. 내 생각을 덧붙인다면, 성직자들의 실질적인 동거가 많았고, 한편으로는 성적으로 매우 문란한 성직자가 있었음이 어쩌면 일반인들의 성직자에 대한 불신을 가져왔을 것이라고 보인다. 이 성직자의 결혼 금지 조항은 현재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이것이 과연 사제들의 도덕적인 우월성이나 하나님에 대한 다른 사람들보다 더 큰 사랑을 의미하는 것일까? 나는 이점에 선뜻 동의를 할 수 없다. 그 우월성은 성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와 여성에 대한 혐오에 기초해 있음을 본다면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현재 우리사회에서의 개신교와 가톨릭을 본다면 가톨릭의 중앙집권화의 장점도 있다고 생각된다. 개신교의 전도사, 주말 교사, 목사직은 어떠한 기준이 없다. 중, 고등학생의 주말 선생은 대학생이 되기도 하며, 우후죽순처럼 생긴 기독교대학에서 공부한 사람이 곧장 전도사가 되고 이런저런 연줄이 잘 맞으면 목사직을 따기도 한다. 신도들이 선출하는 목사는 현재 한국사회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하지만 가톨릭의 경우는 사제서품을 받기 위해서는 국내 하나뿐인 가톨릭대학을 6년간 재학하고 2년간 봉사와 구체적인 커리큘럼이 짜여있다. 결국 가톨릭 대학이 더 나은 성직자를 양산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점은 중앙집권의 장점이라 볼 수 있다.


중세시기 전반에 걸쳐서 교황권이 지속적으로 강화되었다. 스콜라철학으로 그 기반을 더욱더 단단히 다졌고 성직자와 일반인들 사이의 거리는 더욱 넓어져갔다. 저자는 앞 장에서 가톨릭의 화려함과 구원에 대한 주장 등이 과연 기독교적인 것인가, 아니면 단순히 관습일 뿐인가, 무엇이 진정한 내면적 소산이고 어떤 것이 진정한 기독교적 실체인가를 묻는다. 작가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복음과 세례 성만찬 공동체 의식은 의심할 수 없는 기독교적 실체이나 성직자의 길은 그렇지 않다고 역설한다. 이러한 저자의 주장은 6장 종교개혁에 대한 시각과 일치한다. 저자는 종교개혁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반종교개혁으로서의 반응과 교황지상주의를 더욱 강조하던 것이 끝끝내 신교와 구교로의 결별로 이어졌다는 시각을 보여준다.
어쩌면 중세말 교회가 초기교회와 같이 성직자의 구분이 없으며 공동체를 중심으로 하고 예수의 복음을 따르는 개혁이 이루어졌으면 개신교가 따로 분리되는 일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예수사후에서부터 천년이 넘는 시간동안 가톨릭교회 교리가 매우 세밀하게 짜여졌고 이 책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교회법이 방대해지고 그 강제력과 힘도 커진 상태였다. 그렇다면, 종교개혁 세력의 새로운 교리해석을 받아들인다면 거의 완성된 가톨릭의 교리가 부분만이 아니고 전체적으로 변화할 소지가 있었다고 보인다.
교황의 바빌론 유수에서부터 교회의 대분열과 공의회주의는 사실상 교황과 교회에 대한 불신을 키웠고 교황무류성에 기초한 교황권에 큰 상처를 남겼다. 따라서 가톨릭교회는 다시금 교황권과 교회에 대한 권위를 재정립하는 노력을 하였다고 보인다. 결국 종교개혁에 대한 반응은 매우 제한적일 수밖에 없던 것으로 보인다. 루터의 신학적 해석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신학적 해석을 독점하던 가톨릭교회로서는 권력을 포기하라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더군다나 사제의 필요성을 완강히 부인하고 오랜 전통으로 자리 잡은 예배 형식에 대한 비판은 비판이 아니고 단지 이단으로 여겨졌을 것이 분명하다.
개신교의 교리와 가톨릭의 교리 중 어떤 교리가 더 우월하다고 판단할 수는 없다. 하지만 만약에 그 누구가 자신이 ‘00敎의 신자다’라고 말하기에 앞서서 그 종교에 대한 지식을 얻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자신이 믿는 그 종교공동체의 역사와 전통, 예식을 비롯한 여러 형식들의 원천을 찾는 공부를 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여태껏 내 주변사람들 중에는 이러한 지식을 갖지 않는 사람이 더욱 많았다. 심지어 한 목사의 딸은 내가 예정설에 대한 설명을 하자 말도 안된다며 기겁을 했다. 이런 점에서 나는 저자가 가톨릭 사제임에도 불구하고 초기교회에서부터 상당히 비판적인 역사서를 서술한 점을 높게 평가한다. 게다가 지금까지 ‘당위’로 여겨지는 많은 교리들이 어떻게 해서 형성되었고 그 교리의 이면에는 어떤 정치적인 사안이 놓여있는지를 가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또한 베스트팔렌조약 이후에 철학적으로 이성주의의 발전과 코페르니쿠스로 대표되는 과학의 발전시기를 다루고 있다. 저자는 앞서말한 철학적, 과학적, 사회적인 발전에 대한 교회의 반응을 다루고 있다. 특히 문제시 되는 점이 라틴어예배와 마녀재판과 성서비판이다. 그리고 개신교가 자리를 잡았고 오랫동안 종교적인 이유로 (아니면 종교의 가면을 쓰고) 전쟁을 하였기 때문에 종교에 대한 관용의 문제가 제시되었다. 저자의 견해에 따르면 당시 많은 사람들에 의해 문제가 제기되었지만 가톨릭교회는 여전히 일방적인 자세를 견지했다고 한다.
이 시기에 있어서 그야말로 현실과 종교가 분리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과학의 발달은 가톨릭의 세계관의 오류를 보여주었고, 근대 이성주의 철학사조는 神과 종교의 영역을 도덕의 문제로 돌려버렸으며, 경험주의의 경우에는 신의 존재자체를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 책에서도 나오듯이 프랑스혁명과 로베스피에르의 짧은 정권에서의 엄청난 변화는 현대의 정교분리의 정초가 되었다.
이러한 혁명의 시기를 지나면서 가톨릭교회의 세력이 축소되었다. 그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가톨릭교회와 개신교교회의 일상생활에 관련된 많은 부분에 대한 견해가 그 신자들과 비신자들에게까지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생각된다. 

저자는 가톨릭교회의 현대화가 필요하며 교황무류성을 철회하고, 여성에 대한 차별을 철폐하고 사제 결혼을 허용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더불어 제2차 대전 기간의 유대인 학살에 대해서 침묵하고 일부 동조의 모습까지 보인 점을 사과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와 같은 저자의 지적은 상당히 고무적이다. 저자는 이 책을 통틀어 교회의 역사를 서술하여 자신의 주장의 기초를 놓고 있다. 전체적으로 교회의 역사를 서술하고 교회내부의 사건들을 후반부에 중심적으로 다루기 때문에 이해의 어려움이 있으나 역사 서술이 매우 간결하면서도 핵심을 집고 있는 저작이다. 또한 여러 대안과 희망된 모습을 후반부에 그리면서 교회의 변화를 촉구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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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braries in the Ancient World (Paperback, Revised)
Casson, Lionel / Yale Univ Pr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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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번역본 : [고대 도서관의 역사 - 수메르에서 로마까지 / 르네상스 ] 

1. 고대 근동에서의 도서관의 역사

메소피타미아, 이집트 문명에서 최초의 기록물이 발견되었다. 그 기록물은 수메르 인들이 사용한 점토판으로 점토판의 반영구적이라는 특성 때문에 이집트의 파피루스가 남아있지 못한 것에 반해 점토판은 현재까지 남아있어 당시의 상황을 비춰 볼 수 있다.
수메르 인들은 V자 형의 설형문자를 사용하였다. 이러한 설형문자는 문자 습득에 많은 훈련이 필요로 하기 때문에 문자를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제한 되어있었다.
점토판의 내용을 살펴보면 초기에는 숫자를 기억하기위한 생활용품의 수를 세기 위한 것에서부터 복잡한 공문서로 확대 사용되었고, 니푸르 근처에서 발견된 점토판은 인간의 정신적 활동에 관련된 것으로 아마도 학교의 장서였을 것으로 보인다. 즉, 학교 도서관이 있었을 거라 추측해볼 수 있다.
그리고 한 곳의 장서의 수가 많아질 때 그 장서를 적절히 이용하고 찾아보는 것에 대한 고민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니푸르의 점토판에서는 문학작품의 목록이 세겨져 있는 점토판이 있으며, 히투사스에서 발견된 점토판을 보면 판권표기가 되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판권 표기는 점토판을 전부 읽지 않아도 그 점토판의 저자와 내용, 그리고 번역자나 출처, 점토판의 수를 알아 볼 수 있도록 하였다.
이미 그 시대에서도 장서의 도난과 훼손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던 것 같다. 이러한 도난, 훼손 문제와 관련해서 점토판에 처벌과 관련된 내용 또는 신들의 저주에 대한 협박을 적어 놓고 있다.
고대 근동에서의 장서는 장서의 제목을 달아 각 작품의 정체성을 파악하는 판권표기가 나타난 것, 비슷한 작품을 전집으로 묶는 것, 목록을 만드는 것, 도난과 훼손의 문제가 처음 발생한 것을 보아 역사적인 가치를 가진다.

2. 그리스에서의 도서관의 역사

그리스는 수준 높은 문학성을 가지고, 많은 사람들이 지적발달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우리가 아는 도서관을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기원전 4~5세기에 호메로스의 서사시와 에우리피데스의 희곡등 문학에 많은 발전이 있었고, 이러한 문학이 사람들 사이에서 번져나가다 점차 문자로 기록하게 되었다. 또한 그리스 알파벳이 생겨나서 글을 읽고 쓰는 능력을 과거 설형문자보다 빠르고, 쉽게 배울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철자를 배우는 학교가 있었던 것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리스인 들은 도편을 많이 사용하였고, 도편뿐만 아니라 밀랍판, 파피루스 종이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문학작품에는 파피루스 종이를 많이 사용하였는데, 파피루스 종이를 임의로 잘라 말아놓은 것이 두루마기로 하나의 두루마기로 기록될 수 없는 긴 문학작품은 여러 개의 두루마기로 사용한다. 이것이 곧 고대의 책의 개념이다.
이러한 책을 판매하는 서적상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와 관계 되어 책 수집이 늘어나기 시작한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영향을 준 아리스토텔레스는 방대한 장서를 가진 개인 도서관을 가지고 있었고, 다라서 책 배열을 체계적으로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필사와 필사를 통하면서 원본이 다소 왜곡 되는 경우가 빈번히 발생되면서 아테네 정부는 희소성 있는 필사본은 보관소를 지정하라는 칙령을 내리다. 이러한 모습은 알렉산더 도서관이 발생하는 배경이 된다. 
 

3.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고대사회 역사를 통틀어 가장 훌륭한 도서관이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1세 때 시작되어 프톨레마이오스 2세에 완성되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뮤세이온”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그게 걸맞게 고대의 두뇌집단을 모으기 시작한다. 또한 그리스의 모든 자료를 수집하는 것에 총력을 기울여 돈을 들여 사오는 한편 강력한 왕권을 이용하여 가져오기도 했다. 이 대형도서관의 장서관리는 학자들이 맡아 행했다. 호메로스의 시를 정통으로 원문으로 정립한 제노도토스는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초대 관장으로 임명되어 문학 분류의 체계를 세웠다. 또 다른 후대의 관장 칼리마쿠스는 문학의 작품에 대한 상세한 내용과 작가의 전기들을 기록한 방대한 문학 목록인 120권의 [목록]을 만들었다. 현재 이 목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후대 학자들의 기록에서 그 책에 대한 참고사항과 인용을 찾아 볼 수 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270년경 아우렐리아누스 황제가 팔미라 왕국의 폭동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파괴된 것으로 보인다.

4. 도서관의 성장

기원전2세기가 시작할 즈음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이외에도 다른 왕립도서관이 존재하였다. 주목할 만한 도서관으로는 페르가몬의 아탈로스 왕조가 창조한 도서관으로 페르가몬도서관이 있다. 도서관의 규모는 상당히 컸으며 소장된 장서 또한 많았다. 또한 장서를 열거한 표가 작성되었는데 칼리마쿠스의 목록의 유형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이집트와의 상황과 결부되어 페르메네스는 이집트에서 파피루스 종이의 수입의존을 낮추고 양피지를 더 많이 사용했다.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과 페리가몬도서관과의 첨예한 경쟁관계가 있었던 걸로 보이는데, 이러한 경재관계는 학자들을 불러 모으는 것으로 확장되었고, 페르가몬 도서관이 성공적 이였다.
그리고, 서민교육의 성행은 정확히 알 수 는 없지만 전에 비해 교육수준이 높아지고 문맹률이 급격히 하락하였다. 미미하기는 하지만 많은 도시에서 자랑할 만한 도서관이 있었다. 이러한 도서관은 주로 개인 기부금 에 의해 운영이 되었고, 교육시설의 부속기관 이였다.

5. 로마에서의 도서관의 역사

그리스인의 알파벳 기록체계가 에트루리아인이 받아들이고 로마인은 라틴어를 저는데 에트루리아어를 적용하여 현대 알파벳의 선조격인 라틴 알파벳이 생겨났다. 라틴문학은 그리스 문학의 많은 영향을 받았고, 최초의 라틴 작가 플라우투스의 작품 또한 그리스 희극의 라틴 각색물이였다. 그는 극장경영주가 소유한 라틴어와 그리스어 희곡 장서를 보았던 것으로 보인다. 극장 경영주의 개인도서관과 고전 장서를 보유한 부유한 가문의 개인도서관이 기원전 3세기 후반에서 2세기 초까지의 로마의 도서관의 두 가지 유형이다. 기원저 1세기 중반에는 키케로와 아티쿠스 도서관을 주목할 수 있다. 그들은 노예들을 사서로 훈련시켜 필사와 정리, 복원, 목록추가와 갱신, 장서배열등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6. 로마제국의 도서관 ; 로마시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도서관에 관하여”을 저술한 바로의 협력으로 대규모 공공도서관 설립을 계획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고 폴리오에 의해 로마 최초의 공공도서관이 세워지게 된다. 폴리오는 카이사르가 계획했던 공공의 사용을 위한 그리스 도서관과 라틴 도서관 설립을 실현시켰다. 이것은 로마 도서관의 역사에서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의미했다.
아우구스투스는 로마의 두 번째 도서관을 설립하였고, 그 도서관은 ‘ 아폴론 신전의 도서관’ 또는 ‘팔라틴 도서관’이라고 불렸다. 세 번째 도서관도 지었으나 소멸되었다.
로마의 공공도서관은 공공의 소유물이였을 뿐 아니라 시민 누구나 이용할 수 있었다.
로마의 도서관에서도 파피루스 권자본이 자제나 표제에 따라 꼬리표가 달린 끝이 바깥을 향하도록 책꽂이나 상자에 배열되었고, 이를 가죽으로 싸거나 항아리, 대리석통 들에 넣어 보존하였다.

7. 로마제국의 도서관 : 로마시 외부

로마의 도서관은 화산폭발로 매몰되었던 폼페이의 발굴로 인해 대규모의 개인 도서관등의 유적이 발굴되어 그 자취를 찾아볼 수 있다.
문화적으로 중요한 아테네에는 두 개의 새로운 도서관이 생겼다.그 중 하나는 하드리아누스가지은 도서관이였는데 매우 크고 화려한 도서관이였다. 점차 시간이 가면서 로마 곳곳에 여러 공공도서관, 귀족의 도서관등이 세워 졌고, 그 도서관의 대부분은 그리스어와 라틴어로 된 고전 문학작품을 소장하였다.

8. 두루마리에서 양장본으로

2세기까지 도서관의 장서는 모두 두루마리 형식으로 일부는 양피지 두루마리였으나 대부분이 파피루스 두루마리였다. 약 500년 후, 초기 중세 시대의 막이 열리자 현대의 책 형식인양장본이 두루마리를 대체하였는데, 양장본은 주로 양피지로 만들어졌다. 양장본의 사용은 로마인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변화였다. 두루마리는 바깥부분은 늘 빈 공간으로 여백이었는데, 반면 양장본의 양면은 현대의 책처럼 늘 기록물로 채워져 있었다. 보통 양장본은 오늘날의 책과 마찬가지로 종이첩을 모아 꿰매어서 만들었다. 양장본이 두루마리를 대체하기까지 약 100년부터 그 후 400년까지의 긴 세월이 걸렸다.
양장본은 도서관의 활용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양장본은 서가에 깔끔하게 차곡차곡 보관되었고, 내부 종이는 표지에 의해 보호되었으며, 언제든 원하는 제목의 책을 쉽고 빠르게 찾을 수 있었다.
양장본의 장점은 두루마리보다 많은 양의 내용을 담을 수 있고, 보기에도 편하다. 또한, 통상적으로 나무로 된 겉표지가 있어서 내부 종이들이 상하는 것을 방지할 수 있었다.


9. 중세를 향하여

수도원 제도의 성립은 동로마 제국의 변두리인 남부 이집트 사막에서 기원하였다. 4세기 초반에 이집트인 피코마우스가 기독교로 개종란 후 이집트 상단부에 있는 덴디라 사막 근처에 최초로 수도원을 설립하였다. 파코미우스는 수도원의 행동 지침을 작성하였다. 이 행동지침에서는 수도원의 모든 수도승이 글을 읽을 수 있다고 나와있다.
9세기나 그 후의 자료를 보면 수도원에는 늘 도서관이 있었다고 한다. 그 도서관들은 대개 규모도 작았고, 주로 신학과 관련된 책만으로 제한되어 있었다.
카시오도루스는 도서관 역사에서 핵심적인 인물이다. 그는 조상의 땅인 남부 이탈리아의 스퀼라체 부근에 전부터 구상해왔던 전형적 수도원을 지었다. 수도원의 이름은 비바리아 근처에 있던 연못의 이름을 본 따서 ‘비바리움’이라고 지었다. 작품을 필사하는 것이 수도승이 수행해야 하는 당연한 작업이었으며, 수도원 도서관이 필사본을 폭넓게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그의 신념은 ‘성서 학문 초보’ 에 잘 나타나있다. 수도원 도서관 처음에는 작은 내부대출 도서관이었으나 ‘성서 학문 초보’의 영향으로 점차 연구 도서관으로 발전해 갔다. 수도원 도서관은 사자실을 갖추었으며, 도서관끼리의 대출을 시도하여 필요한 작품이 있는 수도원에서 책을 빌려 필사본을 만들어서 장서의 규모를 확장했다.
612년, 카시오도루스 사후 반년도 되지 않아서 성 콜룸바누스가 파비아 근처의 보비오에 사자실과 도서관을 갖춘 수도원을 설립하였고, 이때부터 사자실과 도서관은 둘 다 수도원의 중요한 특징으로 부각되었다.
수도원의 장서는 필사, 선물, 판매, 절도, 약탈 등 다양한 방법으로 전해져서 후기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 주요 도서관의 핵심을 이루었다. 후기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 주요 도서관은 페트라르카와 같은 독서에 일가견이 있던 학자가 설립하였든, 메디치 일가와 같은 수집에 일가견이 있던 귀족 가문이 설립하였든 도서관 역사의 새로운 시대를 여는 지침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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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ting for the Barbarians (Paperback)
J. M. Coetzee / Penguin Group USA / 198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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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번역본 : [야만인을 기다리며 /완은철 옮김/ 동녘] 

존 쿳시의 소설 「야만인을 기다리며」에는 제국의 안위와 번영을 위해서 타자를 상정하고 어떠한 수단을 강구해서라도 야만인의 존재를 발명해내는 과정이 잘 드러나 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서구중심주의가 열정을 쏟았던 기획을 형상화한 것이다. 세계의 준거점이 되려하는 세력은 자신이 어떠한 특성으로 구성되었는지를 과장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이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어디선가 야만인을 찾아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자기 내부에서의 효과적이며 화려한 동일시를 이룰 수도 잇다. 또한 서구인에게 야만인이라 명명된 이들은 자신을 문명과 대립시켜 생각하게 될 여지가 있다. 서구인에게 스스로가 야만인이 아님을 증명해야 할 이들은 더욱 비굴하게 서구화를 이루려고 노력하고, 자기 주변의 어떤 이들을 야만인이라 여기며 배척하게 되는 현상 역시 많은 문학작품과, 그리고 우리의 역사 속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현상이다 

 

어째서 모든 거리와 광장이 그렇게도 빨리 텅 비어지는가?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도 깊은 생각에 잠겨 다시 집으로 향하는가?
저녁이 되었어도 야만인들이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부 사람들이 변경에서 돌아왔다.
그들은 더 이상 야만인들이 없다고 말했다.
야만인들이 없다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될 것인가?
그 사람들은 일종의 해결책이었다.

-콘스탄탄 카바피의 시
‘야만인을 기다리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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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aging in the Next Society (Hardcover)
Drucker, Peter Ferdinand / Butterworth-Heinemann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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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드러커의 「Next Society」는 다음에 올 미래의 사회에 대한 전망을 밝히지만, 미래에 대한 성공의 장담을 예언적인 책은 아니다. 지금까지의 사회 추세를 보며 현재를 진단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미래의 사회를 예측하며 앞으로 우리가 어떤 방향으로 미래를 예약해야 하는가를 밝히고 있을 뿐이다. 그는 노동시장의 노령화로 인한 시장 전반의 변화와, 지식사회의 돌입, 제조업의 쇠퇴, 그로인한 CEO와 기업의 위치와 역할의 변화를 예측하는 청사진을 그린다. 그리고 그러한 가정을 통해, ‘다음사회를 대비하기위해 지금 경영자들이 할 수 있는 것들과 해야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또한 ‘아직은 우리가 알지 못하지만, 분명 앞으로 다가올 다른 큰 변화들은 무엇인가.’라는 두 물음을 던진다. 이 두 물음은 그의 예측들을 살펴보면서 또한 나 스스로의 대답을 구체화시킴으로서 해소될 수 있을 것이다.

1. 노령화되는 노동시장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력이란 가치를 생산하는 가장 중요한 매개물이다. 그러나 계속되는 출산율의 감소와 노년층의 기대수명이 높아짐으로서 젊은 노동력보다 노년 노동력의 비율이 증가 하고 있다. 이러한 추세는 당연하게도 시장구조 전반의 변화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이는 정년퇴직 연령제도가 철퇴되는 등의 고용구조 전반의 변화가 이루어지거나 국가적으로 이민에 대한 적극적 고려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단일화된 내수 시장이 아닌, 노동력 분리 현상이 일어나게 될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인구추세는 갑작스레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변할 수 있으며 그 효과는 매우 빠르기 때문에 인구변화는 항상 주시해야한다.

2. 지식사회

바야흐로 지식사회가 돌입 될 것이다. 이 사회는 지식이 핵심자원이자 희소자원으로서, 각 세부 지식분야의 전문가들이 이루어 가는 사회이다. 지식사회는 그 사회구조가 가장 역동적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 사회는 상승이동이 실질적으로 무제한적으로 열린 최초 사회이고 이는 지식은 모든 개인이 새로이 습득하지 않으면 안 되고, 모두가 똑같이 전적으로 무지한 상태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공에 대한 기대가 높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사회적 지위 사회적 풍요를 누릴 수 있는 가능성을 갖게 된다. 하지만, 그 대가는 만만하지 않다. 고도의 경쟁을 거쳐야 하고 경쟁도중 느끼는 압박감과 정신적 상처를 입을 위험이 크다. 때문에 지식근로자는 그들이 아직 젊었을 때, 자신들만을 위한 비경쟁적인 인생과 공동체를 그리고 어느 정도의 외부에 대한 개발할 필요가 있다.

3. 제조업의 쇠퇴

농업의 쇠퇴과정과 마찬가지로 제조업 또한 물질적 산출량은 증가하는 반면 그곳에 종사하는 노동력의 비율은 점점 감소되고 있는 상황을 미루어 보아 제조업이 무너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제조업의 변화는 모듈, 원가회계, 통계적 품질관리 등 새로운 생산개념이 공장에 도입됨으로서 적은 인력으로 생산력을 상승시키는데 기인하고 있다. 그러나 농업의 답습으로, 제조업 또한 보호주의 정책으로 일관하며 산업을 존립시켜야 할 것인가. 드러커는 과거의 교훈을 통해 보았듯 보호주의는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고 단호히 말한다. 잉여인력을 유지하기 위해 구 산업을 보호하려는 정책은 오직 실패로 끝나고 만다는 것이다. 그 돈은 나이 많은 정리해고자에게 지출되어야 하며 젊은 근로자들을 재배치하고 재훈련하는데 지출되어야 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4. 기업과 CEO 구조의 변화

이 변화에서 살아남으려면 기업은 새로운 실험이 계속되어야 한다. 현재의 하나로 총괄된 법인기업에서 CEO팀을 중심으로 한 아웃소싱그룹으로 이루어진 연합기업까지 독특한 기업방식으로 이후 사회에 존립되어야 한다. 이러한 회사의 이러한 구조는 사람에 대한 정책에 민감히 대응하는 방향으로 가야하는데, 그래서 현재 다음사회에 대한 가장 큰 과제인, 조직에 근무하는 모든 사람을 포괄할 인사정책이 수립되어야 하고, 노령화된 노동력의 은퇴 대신 선택적으로 지속적인 관계를 가질 수 있어야 한다. 또한 기업은 경영에 필요한 체계적인 외부정보를 수집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외부정보가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을 구체화 시켜야 한다.

5. 정보사회

정보 혁명 이후 전자 상거래를 통해 상품뿐 아니라 지식 정보의 확장과 확대되었고 결과적으로 지식사회를 이루는 원동력이 되게 하였다. 이 전사 상거래는 심리상으로 거리라는 개념을 상실시킨 주 매개체로 산업혁명 당시 철도의 역할과 비교할만하다. 이렇게 전자상거래를 가능하게 한 인터넷은 산업 전반의 지형을 다시 그리게 하고 있으며, 이러한 정보 중심의 사회는 지식근로자에게 무수히 많은 정보 중 필요한 정보를 선별하게 하는 정보 독해력을 요구한다. 때문에 앞서 말한 기업의 새로운 실험은 전자 상거래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조직으로 탈바꿈 되는 시도로 이루어 져야 할 것이다. 이에 맞춰 지배구조의 개혁이 필요하다. 이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CEO 들이 해야 할 일 중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가 ‘기업 전체의 균형을 잡되, 지배구조를 어떻게 새로 도래할 시대에 맞게 개혁할 것 인가.’이다. 이는 기존 명령 중심의 구조에서 지식근로자와 파트너 쉽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 즉, 통합하는 법에 대한 과제를 인식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엄청난 불확실성의 시대에는 , 그리고 예측하지 못했던 끔찍한 사건이 마구 벌어지는 시대에는, 전략과 정책을 앞서 말한 변치 않는 기본적인 추세를 바탕으로 수립한다고 해서 성공을 보장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반대의 경우 실패는 틀림없이 보장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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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igins of the Second World War (Paperback)
A. J. P. Taylor / Simon & Schuster / 199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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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국내 번역본 :[제2차 대전의 기원 / 지식의 풍경] 

 2차 세계대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1차 세계대전에 대한 이해가 우선적으로 필요하다. 이 책이 1차 세계 대전의 영향과 더불어 2차 세계대전의 발발을 아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2차 대전에 관한 문헌과 논물들을 살펴보면 가장 많이 인용되고 언급되는 참고문헌으로 이 책을 꼽을 수 있다.  

일반적으로 2차 대전의 원인 또는 발발로 설명하는 것은 첫째로 베르사유 조약의 가혹성과 그에 대한 독일의 반발과 두번째로 히틀러의 등장과 전체주의와 민족주의를 꼽을 수 있다.  (그리고 세계 경제 대공황으로 인한 유럽 경제의 악화도 포함될 수 있다.)

저자는 이에 덧붙여서 (특히 베르사유 조약의 가혹성과 프랑스가 1차 세계대전의 배상금을 요구하며 독일의 탄광지역을 점령한 것들을 지적하면서도) 영국과 러시아, 미국의 외교적 무능을 문제로 삼는 것으로 보인다. 테일러에 따르면 영국과 러시아, 미국, 프랑스는 2차 '세계' 대전으로 확산되기 이전에 히틀러를 압박할 수 있는 카드가 많았고, 기회도 많았는데 그 때마다 영국을 비롯한 강대국들은 당장의 이익을 고려하여 히틀러의 도발적인 행위들을 묵인하고 승인하였음을 지적하고 있다.   특히 프랑스의 경우에는 일관된 태도를 보이지 않았음을 볼 수 있다.

만약 저자의 주장과 같이 영국을 위시한 러시아 미국 등이 히틀러의 외교와 전쟁 도발에 휩쓸려가는 무능을 보여 2차 세계대전이라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났다라고 정의 할 때 또 다른 문제제기가 생겨날 수 있다. 

" '큰'전쟁을 막을 예비적인 '작은' 전쟁이 인정 될 수 있을까? " 하는 문제다. 바로 이 점이 최근 이라크 전쟁과 아프가니스탄의 상황과 연결되어 생각해볼 수 있다. 이러한 문제들 때문에 아직까지도 많은 역사학를 중심으로 논란이 되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을 볼 때 그러한 문제제기도 함께 생각하면서 읽어보면 좋을 듯하다. 많이 인용되는 만큼, 많이 참고로 쓰이는 만큼 중요한 문헌이다. 그 만큼 읽을 만한 값어치가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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